방송국에서 단파수신기를
통해서
중경방송을 들은것은 1941년부터이고
1942년부터는 미국의 소리방송을
들었습니다.
성기석님이 들은 해외방송에 관한 얘기는 님이
쓰신 효암행장기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방송국에서는 성기석님을 비롯해서
대부분의 우리 방송인들이 이 소식을
들었습니다.
처음에는 방송 기술자들이 들었지만 차츰
아나운서,
편성원, 업부요원들도 지방방송국직원들도
들었습니다.
여기서 들은 얘기들이 귀와 입을 통해서 외부에
전달되기도 했지만 이것이 조직적으로
독립인사들에게 연결되었습니다.
그 중간 역할을 한 사람은
방송국측에서 양제현 아나운서였고
양제현에게 정보를 직접 전달받은 사람은
송남헌님이었습니다. 송남헌님은 동아일보에서도
글을 썼고 방송국에서도 어린이 방송글을 쓰고
있었으며
독립운동가로 합동 법률사무소 이인선생님의 동생과
또
홍익범님과 친분이
핖어서 양쪽을 연결하는데 자연스러운
위치에 있었습니다. 송남헌님이 양제현님에게 받은
정보는 동아일보 기자였던 홍익범님과함께
독립운동 진영에 전달되었습니다.
독립운동진영은 주로 이인선생님과
김병로 선생님이 운영하는 합동
법률사무소에서
이루워져씁니다. 이 법률사무소는 원래
허헌선생님까지
세분이 했는데 허헌선생님은 6. 10만세사건이래
변호사 자격이 박탈되어 개인자격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했습니다.
이 합동법율사무소에는 위의
세분외에도
항일 저향 운동가였던 폐간전의 동아일보 사장
송진우선생님을 비롯해 성함을 들으시면 알 수 있는
수 많은 독립운동진영의
인사들이 드나들었습니다.
따라서 이 합동법율사무소에
전달된 정보는 여러
경로를 통해 순식간에 독립운동진영에
퍼지고
많은 국민들에게 알려졌습니다.
활동영역이 넓었던 홍익범기자는
사회 각계각층의 인사와
만나고 있어서 방송국에서
나온 정보는 광범위하게 퍼져나가 일본의
일방적인 선전을
무력화 시키면서 독립운동에 큰힘이
되었습니다.
허헌님이 공산당 거두가 되어
그동안 그에 관한 얘기를 함부로 하기는
어려웠지만 어쨋던 그는 단파방송 연락운동으로
갖은 고초를 겪었고 2년간의 형을 언도받았습니다.
그러면서도 마지막까지버틸 수 있었던것은 단파방송을
통해서
해외에서 들어온 소식이 힘을 주었다고
했습니다.
중경에 있던 임시정부와 미국의 소리방송에서
단파방송을
통해서 들려오는 소식은 알게 모르게 많은
사람들에게
전해져 이승만박사의 말대로
희망의 소식이고
생명의 소식이 되었고 일본패망의
소식이 되었습니다.
항일 단파방송 연락운동은
칠흙같은 암흑속에서 국민들에게 희망을주고
용기를
주었습니다. 독립을 쟁취하는데 국민들의
힘을 결집시켜
주었습니다.
이 얘기는 계속 이어질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