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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3월 1일 주일메시지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말씀 / 요한복음 1 : 29 - 51
요절 / 요한복음 1 : 29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가로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1장에서는 예수님이 누구신가? 단정적으로 정의하는 식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지난 주 말씀에서는 서문 형식으로 예수님을 증언했습니다. 오늘 말씀은 네 명의 증거자를 통하여 예수님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을 깊이 만나기를 기도합니다.
1.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29-34)
29절을 보십시오.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가로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첫 번째 증거자는 세례 요한입니다. 세례요한이 증언하는 예수님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입니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 이것이 세례 요한이 증언하는 예수님 증거의 컨텐츠요, 가장 첫 번째 증거입니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에는 두가지 사실이 담겨 있습니다. 먼저 ‘세상 죄를 지고 간다’는 것은 아사셀 염소를 염두에 둔 증거입니다. 아사셀 염소는 레위기 16 : 7-10절에 기록한 말씀입니다.
“그 두 염소를 가지고 회막 문 하나님 앞에 두고 두 염소를 위하여 제비뽑되 한 제비는 하나님을 위하여 한 제비는 아사셀을 위하여 할지며 아론은 하나님을 위하여 제비 뽑은 염소를 속죄제로 드리고 아사셀을 위하여 제비뽑은 염소는 산 채로 여호와앞에 두었다가 그것으로 속죄하고 아사셀을 위하여 광야로 보낼지니라”
레 16:7~10은 모든 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속하는 대속죄일에 일어나는 마지막 예식을 설명하는 구절입니다. 대속죄일이 되면, 제사장은 크기와 모양새가 똑같은 두 마리의 흠 없고 깨끗한 염소를 구합니다. 그리고 제비를 뽑습니다. “하나님의 것”이라는 제비에 뽑힌 염소는 지성소에 계신 하나님을 위하여 구별하여 그 목에다가 빨간 천을 두루고, “아사셀의 것”이라는 제비에 뽑힌 염소는 광야에 사는 아사셀을 위하여 구별하여 그 뿔에다가 빨간 천을 두릅니다. 그런후 두 염소에다가 이스라엘의 모든 죄를 전가한 후 죽입니다. 두 염소를 죽이는 방법과 그 의미가 아주 다르다.
첫째 염소에 대해서는 제사장이 하나님을 위하여 구별한 첫째 염소의 각을 뜬 후 육체는 영문 밖에서 불사르고 그 피는 지성소로 가지고 들어가 언약궤에 뿌립니다. 그러면 지성소안에 하나님 쉐키나의 영광이 가득 차게 되고, 이는 이스라엘의 죄가 속해져 하나님의 진노가 사라졌다는 것을 상징합니다. 이것이 첫 번째 염소의 죽음과 그 의미입니다. 둘째 염소는 제사장이 아사셀을 위하여 준비한 둘째 염소를 광야로 몰아내어 굶어 죽이거나, 들짐승에게 찢겨 죽게 합니다. 그때 염소의 뿔에 달린 빨간 리본이 하얗게 변하게 되고, 이는 이스라엘을 향한 사탄의 참소가 더 이상 합법적이지 못함을 상징합니다.
아사셀의 염소는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예수님께서 인간의 죄를 대신 지고 광야에 나가사 찢겨 돌아가심으로써 인간을 향한 사탄의 참소를 온전히 잠재우실 아사셀 염소입니다. 우리에게 죄를 멀리 옮기고 죄로 인한 참소를 영원히 사라지게 하신 예수님, 세례 요한이 증언한 것은 죄 문제를 해결하러 오신 예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어린 양’은 ‘유월절 어린 양’을 말합니다. 유월절이 어떤 날입니까? 온 이집트에 죽음의 사자가 덮쳐 올 때, 문설주에 어린 양의 피를 바른 집은 지나나고 넘어간 날입니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 세례 요한이 증거한 예수님은 ‘죄와 사망에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구원자’입니다. ‘죄와 사망’에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셨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시는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이 누구신가? 나를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시는 분입니다. 이 사실은 매우 중요합니다.
인간의 근본 문제는 죄 문제 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죄란 하나님을 중심으로 살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진리를 중심에 두지 않는 것,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것, 소유와 쾌락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소아적 이기심이 인생의 중심에 있는 것이 죄입니다. 하나님을 중심에 두지 않고 진리를 중심에 두지 않고 살아갈 때 분쟁과 원통함과 불의와 무정함과 시기와 미움과 번뇌와 고통이 뒤따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피로써만이 그 대가를 치를 수 있습니다. 사망의 대가를 치르고 나면 인간은 더 이상 존재할 수 없습니다. 인간은 절망적입니다. 죄문제 해결함 없이는 행복할 수 없고, 그렇다고 죄에 대한 대가를 치루자면 인간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절망적인 인간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준비하시고 보내시겠다 약속하신 그리스도를 보내주셨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죄와 사망의 문제를 해결하셨습니다. 우리의 모든 죄를 뒤집어쓰시고 멀리 가져가는 염소가 되셨고, 세상의 모든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는 희생의 어린 양이 되셨습니다. 하나님은 심판대신 용서와 영벌대신 영생을 예수님을 믿는 자들에게 주십니다. 세례요한은 큰 기쁨과 찬미로 소리쳤습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30절을 보십시오. 세례요한은 예수님을 “나보다 먼저 계신 분”으로 증거하였습니다. 그는 예수님보다 생일이 빨랐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신 삼위일체의 하나님이신 것을 알았으므로 당연히 자신보다 먼저 계신 분으로 증거하였습니다.
31절을 보십시오. 세례요한이 물로 세례를 주는 것도 오직 예수님을 이스라엘에 나타내려 함이었습니다. 모든 백성이 물세례를 받음으로써 죄를 깨닫고 죄인임을 깊이 인식하게 한 것은 바로 죄와 사망의 문제를 해결하러 오신 예수님께로 나아가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32-34절을 보십시오. 세례요한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어린 양인 줄 알아보게 하신 분은 성령이십니다. 성령께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그 위에 내려와 머무시는 것을 보고 세례요한은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신 줄 알게 되었습니다. 세례요한은 물로 세례를 주었으나 예수님은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독생자로서 이땅에 오신 하나님의 어린 양 그리스도이십니다.
그 다음 예수님을 증언하는 사람은 안드레와 다른 제자입니다. 35-37절을 보십시오. 안드레와 다른 한 제자는 원래는 세례요한의 제자였습니다. 그들은 세례요한이 예수님을 보고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하는 증거를 듣고 예수님을 좇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들에게 질문하십니다. 38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그 좇는 것을 보시고 물어 가라사대 무엇을 구하느냐 가로되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이까 하니(랍비는 번역하면 선생이라)” 예수님께서는 두 사람의 제자들이 무슨 의도로 예수님을 따르는지 분명한 입장과 방향을 갖도록 물으셨습니다. 이에 제자들은 예수님께 어디 계시는가? 여쭈었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계시는 곳에 따라가 예수님께 듣고 예수님을 배우고 예수님을 알고 싶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 자체에 대해서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세례요한이 증거를 듣고 예수님께 대해서 순수한 관심을 가진 것입니다. 39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이들에게 “와 보라”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예수님께 관심을 갖고 예수님을 배우고자 하는 자들에게 일체의 자격조건이나 까다로운 기준을 세우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예수님께 관심 갖고 예수님을 배우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깊이 체험하며 배우도록 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안드레와 다른 제자가 예수님과 함께 하며 옣수님을 배웠습니다. 말씀에 기록한 10시는 로마 시간으로 하면 다음날 오후 4시이고 유대인 시간으로 하면 다음날 아침 10시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들이 예수님을 충분히 배우는 시간동안 예수님과 함께 했다는 것입니다. 이들이 예수님을 배운 결과 어떤 열매가 나타났습니까? 40,41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 그들이 예수님께 관심을 갖고 예수님을 배웠을 때, 결론은 “메시야”였습니다. “메시야” 구원자입니다. 구원이 필요한 이 시대, 구원이 필요한 이 세상은 구원자를 꼭 필요로 합니다. 이 세상에는 반드시 구원자가 오셔야 합니다. 세상을 덮고 있는 것은 어두움입니다. 세상을 잡고 있는 것은 불의입니다. 우리가 조금만 이 세상의 모습을 들여다 보아도 탄식이 나오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조금만 세상의 실상을 알게 되어도 생겨나는 것은 마음의 분노입니다. 근본적으로 우리는 이 세상 뿐 아니라 나 자신에 대해서도 탄식이 나옵니다. 세상이 불합리하고 세상이 악하고 세상이 정의롭지 못하지만 사실 더 불합리하고 악한 것은 나 자신입니다. 나야말로 이중적이고 나야말로 탐욕적이고 나야말로 뻔뻔하기 이를 데 없는 욕심과 이기심의 노예입니다. 이런 나와 세상은 그 죄악된 본성과 뿌려놓은 악행으로 인하여 스스로 고통받으며 살고 있습니다. 이런 절망적인 나에게는 구원자가 오셔야 합니다. 소망없고 불합리하고 죄로 가득한 세상에는 메시야가 오셔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 메시야 이십니다. 나의 희망이시며 세상의 희망이십니다. 나의 구원이시며 세상의 구원이십니다. 안드레는 예수님을 배우고 예수님을 알고 보니, 새로운 희망과 감동이 넘쳐 났습니다. 그의 내면에는 메시야를 만난 희열과 넘치는 소망이 가득하였습니다. 그는 그대로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는 누구에게든 이 소식을 전해야 했습니다. 안드레는 자기의 형제 시몬을 불렀습니다. 그에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 안드레는 비록 말씀에 깊은 조예가 없었지만, 단순하고 분명한 간증을 통해 형제를 초청했습니다. 이것이 내 인생의 메시야, 이 세상의 메시야를 만난 사람의 특징입니다.
42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는 안드레의 인도로 나온 시몬에게 게바-반석 이라는 이름을 주셨습니다. 이는 그를 반석으로 삼아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하는 원대한 비전을 주시는 이름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처음부터 비전의 눈으로 제자를 키우십니다.
예수님을 메시야로 만나는 안드레의 증언과 안드레의 변화하는 모습은 오늘날 교회와 교회를 통한 생명역사를 모범적으로 보여줍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계시를 받은 세례 요한은 선지자였습니다. 그는 마지막 선지자였기에 하나님께로부터 예수님께 대한 직접 계시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안드레는 증거자의 증언을 통해서 예수님께로 간 케이스입니다. 예수님 자체에 관심을 갖고 예수님 자체를 배웠습니다. 그 결과 예수님을 메시야로 만났습니다. 예수님을 메시야로 만난 후 다른 사람에게 또 예수님에 대하여 증언했습니다. 오늘날의 교회가 해야 하는 일, 오늘날 교회를 통해서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을 정확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증거자들의 증언을 통해서 예수님께 나옵니다. 그것이면 충분합니다. 다른 계시를 원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께로 나올 때 어떻게 나오느냐? 증거자의 증언이면 충분한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 나와서 예수님을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돈 버는 것, 예수님을 통해서 시대의 타이밍을 잡는 법을 배우는 것, 예수님을 통해서 뭔가 다른 것을 하는 것은 신앙생활의 본질이 아니며 교회에 모인 목적도 아닙니다. 우리는 모여서 예수님 자체를 배워야 합니다. 예수님을 사회운동가나, 교육자나, 선동가로 만나지 말고 메시야! 구원자로 만나야 합니다. 증거자의 증언을 통하여 예수님을 배운 안드레의 증언은 “예수님은 메시야!”입니다.
43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는 다음날 또 다른 제자 한사람을 부르셨습니다. 안드레와 베드로와 한동네 사람인 빌립이었습니다. 그도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아 예수님을 좇으며 예수님을 배우고 나자 마음에 감동을 받았습니다. 45절을 보십시오. 빌립도 나다나엘을 찾아서 예수님을 소개하였습니다.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 이르되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 모세와 선지자, 율법과 선지자는 구약 성경을 말합니다. 빌립은 “성경에 예언된 그 분”이라고 예수님을 증언합니다. 구약에 기록된 메시야,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메시야입니다. 빌립은 성경말씀에 근거해서 예수님을 알았습니다. 빌립은 성경말씀에 근거해서 예수님을 증언합니다. 빌립은 말씀을 기초로 예수님을 알았고 말씀에 기록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UBF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말씀을 통하여 아는 것은 중요합니다. 말씀을 통하여 알 때, 예수님을 올바로 알 수 있습니다. 말씀에 기록된 예수님을 배울 때, 예수님의 진정한 모습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자의적으로 해석하지 않고 경외심 없이 대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 대한 믿음이 기초부터 튼튼해질 수 있습니다. 빌립은 말씀을 기초로 예수님을 만났고, 구약 성경이 오실 메시야에 대한 기록임을 알았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예언하시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시고 하나님께서 말씀대로 보내신 그리스도 이십니다. 이것이 요한복음 1장 세 번째 증인 빌립의 예수님께 대한 증언입니다.
이러한 빌립의 증거를 통해서 예수님을 소개받은 나다나엘은 예수님께 대하여 어떤 반응을 보였습니까? 나다나엘은 처음에는 나사렛 동네에 대한 선입견 때문에 예수님을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웠습니다. 예수님을 만나 대화 나누는 가운데 인격적으로 자신을 알고 찾으시는 주님을 만났습니다.
47,48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가리켜 이르시되 보라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나다나엘이 이르되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노라“ 예수님께서는 나다나엘을 보시자 그가 마음에 간사함이 없는 사람이라고 하셨습니다.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하셨습니다. 나다나엘의 성격, 나다나엘의 본성, 나다나엘의 인격을 이미 다 아셨습니다. 나다나엘은 자신을 아시는 예수님이 놀라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것만 아시는 분이 아니었습니다. 나다나엘이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 이는 당신 이스라엘사람들이 율법을 공부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다나엘이 구약 성경을 읽으며 이스라엘의 구원과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서 깊이 사모해 온 것을 아셨습니다. 나다나엘의 마음 깊은 곳의 고민과 탄식과 그의 간절한 기도를 아신 것입니다. 나다나엘은 예수님께서 자신의 태어남과 그 정신과 그 영혼까지 다 아시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49절을 보십시오. 나다나엘은 예수님을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고백하였습니다. 나다나엘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이스라엘의 임금으로 고백한 것은 예수님과 개인적이고 인격적인 교제를 통하여 이루어진 것이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나를 아시는 분’ ‘나의 기도를 들으시는 분’으로 만났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신 구원자로 만나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나와 세상을 위하여 오신 하나님의 메시야로 만나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말씀을 통해서 올바로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예수님과 개인적이고 인격적이고 내밀하게 사랑의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나의 주님’으로 만나야 합니다. 그럴 때 예수님을 위하여 고난받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위하여 헌신하고 희생할 수 있으며, 잘할 때나 못할 때나, 허물많을 때나 부족할 때에도 예수님을 굳게 붙잡을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체포되던 날, 닭 울기 전 계집종 앞에서 세 번 예수님을 부인 한 후 예수님을 새롭게 만났습니다. ‘네가 닭이 울기 전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신 예수님, 예수님은 베드로의 연약함과 베드로의 부족함과 베드로의 무너지는 것을 알았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그런 자신을 너무나 잘 아시고 그런 자신을 깊이 이해하시는 분이심을 그제서야 깨달았습니다. 베드로는 울었습니다.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알고 울었습니다. 베드로는 그날 밤 그렇게 만난 ‘나의 모든 허물을 감당해주시는 나의 예수님’을 평생 잊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다나엘에게 더 크고 놀라운 메시야의 역사를 보고 체험할 것을 약속하십니다. 50,51절을 보십시오.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서 보았다 하므로 믿느냐 이보다 더 큰일을 보리라 또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을 통해서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오르락내리락 하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결론적으로 예수님은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러 오신 나의 그리스도 이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메시야 이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을 깊이 사랑하고 예수님을 더 깊이 배워 나가기를 기도합니다. 생명의 주 예수님 안에서 은혜와 진리가 풍성한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기도하고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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