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에 오는 사물들 외 2편
오른팔의 어둠이 오고 왼팔의 빛은
택시를 타고 갔어
이후 반복되는 망각의 경험들
유리 썬팅필름
가운데 식탁으로 모이기 시작해
말로는 설명할 수 없이 접히는 세계
척추로 미끄러지다 부서지는 소소한 기척을
피로 봉합하기
오믈렛으로 시작하는 순환
우연에 맘을 기울였던
관계
아직 지킬 수 없는 나이프와의 약속
복도를 지나 롤빵의 계단을 자꾸 내려가 차가운 문 뒤 쪼그리고 앉은 구석,
경계
트라우마의 신호마다 포개지는 기이한 감각
빛 속에 녹은 얼룩
허브티
다른 허무로 태어나려 충동이 출몰해
충돌
충만을 알지 못해서
증거물과 흔적들을 꺼내 아스파라거스처럼 펼쳐놓아
얼굴 불안한 표정
거짓말이라고 말을 해
레코드 조각을 조합해
가슴으로 돌아와
화이트 성좌로 나타나 와인처럼 흩뿌려지게
음악이 나직이 지나가게.
예고 없음에 대해
예고 없이 찾아오는 안개에 새는 날다 떨어지는데
나는 발바닥에 놓인 믹서기 새의 날갯짓 돌고 있어 마와 바나나는 발바닥이 없는데 유리문을 열고 잘 가 하고 오다 예고 없이 만났던 안개
사라지는 다리로 돌아나갔던, 부드러운 안개를 마셨던 바나나 새의 날개를 믹스해 달콤한,
새였을까
너는 예의와 절차 추적과도 무관한 상태
사라진 발톱에 대해 긴급 예외 되는 안개에 대해 판결 없는 너의 형벌에 대해
안개여서 앞을 볼 수 없는 수풀의 끝자락
균열이다
다가갈수록 희미함 그래서
너와는 이별이다
유스티티움이 되는 시간, 난다는 두려움, 안개를 잊는 사건
불가능에서 가능 사이 예감으로 놓이는 투명 수채화, 와선하는 새의 나무들, 길 위로 발톱만큼씩 자라나,
구원이다
깨어난다고 말했다
같이 가야지
도시의 출근길
사라지던 새들이 날고 있다.
검은 문장
비가 오는데 창문을 열었다
공기를 마시는 나무들
수업이 끝났다는 게 실감이 나지 않아
빗발 속에서 분명 비명소리가 났는데 지나가는 사람은 없었다
은박 뚜껑을 따고 요구르트로 알약을 넘긴 뒤
은박 조각을 버렸다
개죽음이지
감은 눈을 떴을 때 다리에 놓인 무거운 침목들을 올려다본다
피를 너무 쏟아내 멈춘 심장
눈감은 내 얼굴이 낯설게 보였어
누가 나를 죽였을까 생각을 모았지만 낯선 힘은 더 강하고
생각하면 닿을 수 있는 생각
집으로 돌아가는 길목에 찢은 국화들이 널려있었어
유리에 비쳐보이던 몇 명의 얼굴 뒤
나를 조준한 눈을 생각해
그걸 당긴 손가락의 따뜻함을 생각해
아직도 먹먹한 가슴이 불덩이가 된 거
내 머리에 흐르던 피를 바로 지워버린 걸
은박지를 찢으며 아직도 숲 어딘가로 향하고 있어
숨은 날개의 빛깔은 어두워
내 몸은 어둔 침묵을 밟으며 복도로 나갔지
집에 가려는데 비가 내리고 있었어
탄환이 박히기 전까지
눈도 코도 입도 없는 허공을 올려다본다
가는 눈을 더 크게 떴을 때 하늘로 이어지는 물소리가 들려
비가 세차게 내리고 있다.
한지혜韓智慧
《신세계》(1980) 시 발표, 작품 활동. 시집: 《마음에 내리는 꽃비》, 《차와 달의 사랑노래》,
《두 번째 벙커》, 《모든 입체들의 고독》, 《저녁에 오는 사물들》 외.
sangchonje@hanmail.net
경기도 시흥시 은계중앙로97, 505동1801호 (은계센트럴타운)
010-7138-57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