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게 찾은 행복
유별나던 찜통더위가 수그러들고 아침 공기는 제법 상쾌하다. 며느리와 손자 깨어나기 전에 살짝 밖으로 나와 밭으로 간다. 햇살이 뜨거워지기 전에 어제 뽑다 둔 풀을 매고 돌아오면 문 여는 소리를 알아듣고 손자 녀석이 내 발로 달려와서 팔을 뻗어 매달린다. 흙과 땀에 절어 안아 올릴 수 없어서 ‘아서라 할머니 지지’ 하면 알아듣는 듯 멈춘다. 서둘러 씻고 나와서 높이 들어 올려 주면 좋아하는데 며칠 새에 부쩍 무거워져서 점점 힘에 부친다.
지난여름 안아 주기도 조심스럽던 그 작은애기가 차츰 말뜻을 깨우치기 시작하는 것이 어찌나 신통방통한지 신비 그 자체이다. 때맞추어 젖 먹이고 씻기고 옷 갈아 입혀 주면 울지도 않고 배시시 웃기만 해서 울음소리가 궁금했는데 뒤집고 안고 기면서부터 스스로 생존 경쟁에 참여 하려는 듯 식사 때면 전 속력으로 기어와 상 위의 것들을 먹겠다고 나대니 잠시도 애기에게서 눈을 땔 수가 없다. 이유식이랑 우유를 미리 충분히 먹였는데도 먹을 것을 보면 달려드니 식탁 의자에 앉혀 놓고 아기용 비스킷 등을 펴 놓으면 집어 먹다가도 내려 달라고 떼를 써 달래느라 진땀을 쏟아야 식사가 끝난다.
돌이 지나고 한 달이 다 되는데 혼자 걷지는 못한다. 며칠 전 곁에 붙잡을 것이 없는데 바닥에서 일어나 자기도 신기한지 앉았다 일어나기를 반복하며 춤을 추어서 금방 걸을 줄 알았는데 또 며칠째 잠잠하다. 키나 몸무개는 평균을 웃도는데 아직 엄마 소리도 못 한다. 엄마 어디 있냐 하면 두리번거리다 찾아가는 것이 알지만 말이 아직 안 된다. 주위에서 경험담을 들으면 말 늦게 하는 건 걱정 안 해도 된다기에 그냥 지켜보자고 느긋이 기다린다. 나를 보면 쏜 살로 말에게 달려가서 발판을 두드린다. 태워달라는 표현을 확실히 하는 걸 보니 우리 손자 똑똑하구나 싶어 걱정을 버렸다.
외국에서 바다 건너온 어린 며느리가 나이보다 성숙한 성품을 보여서 고맙고 대견하다. 체격도 왜소한데 하루가 다르게 커가는 아이를 어찌나 알뜰히 살피는지 기운이 달릴지 걱정된다. 장난감이나 간식으로 아이를 붙잡아놓고 틈틈이 빨래며 청소를 하는지 집안이 완벽하게 깔끔하다. 들일에 지쳐서 들어오면 반찬거리가 부실해도 지혜를 모아 두 나라 음식으로 저녁상을 차려 놓는다. 대신에 아침엔 각자 알아서 해결하고 충분히 자도록 소리 나지 않게 일터로 나간다.
하루는 하우스에 널어놓은 고추를 뒤집어 펴놓고 일찍부터 고추를 따고 있는데 하우스에 사람이 웅성 거려서 내려와 보니 아침에 펴 놓은 고추를 담고 있었다. 밤새 습기를 빨아들여 낮에 말렸다 해 진 다음에 담아야 되는데 그런 걸 알 리 없는 며느리가 일손 돕는다는 마음으로 헛수고 했는데 그 마음이 전해져서 너무 고마웠다. 다시 펴 널어놓고 상황 설명을 해 주며 유쾌하게 한바탕 웃었다. 그 행위가 이로운 결과가 되면 좋겠지만 꼭 그렇지 못하더라도 좋은 마음으로 한 것이라면 헛수고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좋은 경험을 한 며느리도 땀 흘린 값은 얻었으리라.
며느리가 처음 오던 날 신비로운 별나라에서 온 듯 작고 예쁜 모습이 하도 귀해서 너무 기뻤다. 처음은 그 아이가 집에 있는 것만으로도 집안에 밝은 기운이 감도는 것 같았다. 마침 추수철이어서 어두워질 때까지 들일을 마치고 돌아오니 송아지랑 병아리 밥을 다 주었다는데 너무 신기했다. 아무 기대가 없었기에 더 감동을 받았던 것 같다. 그렇게 조금씩 우리 가족이 되어 벌써 2년 차가 되어가니 한국 사람이 다 되어간다. 오기 전에 운전면허를 따 와서 가까운 곳은 다니며 급한 일은 해결하니 나는 서서히 자동차 열쇠를 넘겨도 될 것 같다.
먼저 간 친구에게
추수가 끝난 골목은 늘 밤마실 나온 사람들로 붐볐지요. 그 시절엔 처녀 총각도 많았습니다. 누구네 제사라도 있는 날이면 청년들이 앞장서 단자요 하고 외친 뒤 담 너머로 커다란 대바구니를 던져 놓고 담 밑에서 기다리면 떡이랑 돼지고기 덩어리, 나물과 과일까지 넉넉히 챙겨서 울타리 밖으로 내어 주면 동네 사랑방으로 모여 즐겁게 놀던 추억이 어제처럼 떠오릅니다. 모두가 가난하던 시절 이웃과 나눌 만큼 마음은 넉넉했지요. 처음부터 여분으로 마련해 두었다가 내어 주었어요. 또 그 시절 농촌에는 겨울이면 각종 계모임으로 작은 잔치가 자주 열렸습니다. 동갑계부터 상포계 (지금의 상조회) ,아이들 결혼 시킬 때 도우는것 까지 다양한 이름의 모임이 있었는데 회원이 아니어도 두루 함께하는 나눔의 장이었습니다.
나이는 차이가 나도 함께 어울릴 만 한 사람끼리 상포계란 이름으로 조직을 만들던 날 우리들의 꿈은 참 소박했습니다. 30 초반부터 40 중반 까지 끌어모았어도 일곱 명이었습니다. 첫째, 서로 친목을 도모하고 ,둘째, 노부모님 돌아가셨을 때 각자 소주 한 상자 값을 거출하여 부조금으로 내고 모여서 모든 행사를 맡아 치르는 역할을 하자는 목적 이었으니 참으로 까마득한 옛날 이야기내요. 어느 해 곗날 오일장에서 물오징어를 사다 무국 끌이고 찰밥 해서 머리에 이고 산속에 있는 계원 집까지 밤길을 더듬어 가서 배가 아프도록 깔깔거리며 밤새 놀았던 추억은 지금 생각해도 오진 자유였습니다.
어른 눈치 보느라 긴장된 생활에서 잠시라도 벗어나 보자고 없는 지혜를 짜내서 얻은 결론은 남편들을 계 운영에 끌어 들이자는 것이었지요. 공동 작업으로 자금도 마련하고 부부 동반으로 나들이도 가자는 의견에 남자들은 우리보다 더 좋아했습니다. 무밭에서 하루 종일 무단 묶으면 품값 2.000원, 차에 무단 실어주는 남자들은 2.500 원 하던 시절이었으니 겪어본 나도 실감이 안 나는군요. 돈의 가치로 치면 80배의 차이가 났지만 물질이 넘치는 지금보다 크게 불행하단 생각은 하지 않았다고 기억합니다. 마을엔 사람들이 있었고 따뜻한 인정이 넘쳤어요. 처음 계획대로 마침내 첫 나들이를 월출산 도갑사로 갔었지요. 대바구니에 찰밥 담고 나물 반찬 마련하여 보자기에 싸서 짊어지고 가는 고달픈 길이었지만 봄나들이는 설렜습니다. 계곡의 물소리 들으며 나무 그늘에 앉아 점심도 먹고 부부끼리 손잡고 노래도 부르며 처음 나온 나들이를 즐겼지요. 시작은 간소하지만 나중에 부자 되면 좋은 곳으로 멋진 여행 가자던 그날이 그나마 오롯이 모였던, 소꿉장난 같아도 행복했던 기억인 것은 나만의 생각일까요,
좋은 날 오기도 전에 한 사람이 이사 가는 바람에 우리는 여섯 명으로 줄었습니다. 그 후로도 그런 나들이는 몇 년간 이어지다가. 더 먼 곳으로 가 보자며 12인승 미니버스를 대절해서 내장산 단풍놀이를 갔었지요. 정원에서 한 사람이 남으니 단속 구간을 지날 때면 키가 작은 사람이 의자 밑으로 엎드리면서도 즐거워 웃던 우리들, 무엇이 그리 좋았는지, 내년에는 더 멀리 더 멋진 곳으로 갈 거란 희망이 우리를 들뜨게 했겠지요. 오늘보다 더 좋은 날이 온다는 보장이 없다는 걸 몰랐기에 그 소중한 기회를 온전히 즐기지 못하고 남자들 술주정이 지겨워 싸우기도 했지요. 다시는 안 간다며 돌아오지만 그래도 몇 차례 더 여행을 했지요. 제법 여러 관광지를 돌아봤지만 기억이 가물거리내요. 곳마다 술 취한 남자들 챙기느라 속상했던 기억만 또렷이 남았습니다. 예고 없이 한 사람씩 떠나면서 우리의 꿈은 접어야 했지요. 그래도 40년 세월의 울타리에 가두어 둔 우리들의 추억은 아픔보다는 기쁨이 더 많았어요.
어른들도 다 떠나고 이제 내가 그 자리에 서니 골목은 횅하니 비워져 적막합니다. 치맛자락 휘날리며 월출산으로 유달산으로 대바구니 짊어지고 다니던 젊은 날의 꿈이 애처롭지만 참 아름다운 추억입니다. 풋풋했던 젊음이 있어 짐을 들고 수 키로를 달릴 수 있던 그때와 바꾸고 싶은 것은 없습니다. 처음 세운 목표도 완성되었으니 한 사람이라도 더 남아 있을 때 마지막 결산을 하자고 의논 중입니다. 코로나 때문에 만나지 못하는 동안 우리도 많이 변했습니다. 거동이 불편한 사람이 있어 소풍도 사치가 되어버렸기에 맛있는 거 사다가 마을 회관에서 밤 세우며 옛날로 돌아가 보자고 마지막 꿈을 그립니다. 그날은 좋아하는 노래를 실컷 불러야겠습니다. 못 다한 아쉬움 남기지 말고 함께 즐겨 주기 바랍니다. 40대 고운 모습으로 남은 친구여 많이 보고 싶습니다.
안순희|2016년 『시아문학』 수필 신인상 등단. 2015 『시아문학』 시아
상, 2021 제7회 시아문학상 수상. 영암군 백일장 수필 부문 우수상 수상.
목포대학교 평생교육원 현대시반 수료. 시아문학 부회장.
산문집 2024 『어머니의 뜰안』 펴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