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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 별 헤는 사람
은숙은 날이 갈수록 건강이 악화되어 이제는 가게일 보는 것조차 여간 힘들어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식구들에게 증세의 심각성을 얘기하지 않았다. 아니 얘기할 수가 없었다. 병원에 다녀와서도 딸들이 물으면 그녀는 남의 얘기처럼
"별 것 아냐, 몸이 좀 약해 졌대더라. 너무 무리하지 말라는 구나. 영양제 주사 한 대 맞고 왔다." 할뿐이었다.
그렇게 말은 했지만 지금 그녀는 큰 병마와 투병 중이었다. 의사는 폐암이라는 진단을 내리면서 무리하지 말고 공기 좋은 곳에서 쉬라고 말했다. 의사는 그녀의 증세가 위중하여 다른 방도가 없음을 잘 알고 있었지만 당분간 요양원에 내려가 쉬면서 영양 섭취를 하면 쾌차할 것이라고, 용기를 북돋아 줬던 것이다.
은숙은 자신에게 달라붙은 병마에게 이길 수 없음을 알았다. 또 집안 형편이 빤한데 한가하게 병구완이나 하고 있을 수가 없었으므로 무리인 줄 알면서도 일하고 있었다. 아니 죽음과 매일 맞닥뜨려 처절한 싸움을 지속하고 있었다. 적어도 설희가 대학에 들어갈 때까지만 이를 악물고 버텨 볼 심산이었다.
은숙은 고통이 엄습해올 때면 눈을 감고 성모마리아를 불렀다. 그러면 인자한 마리아가 나타나 그녀에게 잠시나마 평안과 행복감을 주었다. 성모마리아는 그녀가 이 세상에 생명을 부지하도록 도와주는 ‘마지막 잎 새’였던 셈이다. 그런데 은숙은 요즘 들어 몸은 아프지만 마음만은 가벼워져서 이제 죽어도 되겠다고 자위하는 일이 잦아졌다.
설희가 여고생이 되어 더 똑똑하고 예쁜 딸로 자라는 것을 보면서 은숙은 은근히 자기가 못다 이룬 꿈을 설희가 이뤄주길 바랐다. 다행히 설희는 엄마를 닮아 감성이 풍부한 반면에, 아버지를 닮은 구석도 많아 한 번 마음먹은 일은 끝을 보는 성미여서 엄마가 죽고 없어도 어지간한 고통쯤은 스스로 감내할 수 있을 것이라 여겨졌다. 또 하나 은숙이 기대를 갖는 것은 딸의 글솜씨가 예사롭지 않다는 점이었다.
설희는 어려서부터 책읽기를 좋아했고 또 글짓기를 잘 했다.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부터 쓴 그림일기와 일기장이 라면 상자에 꽉 찰 정도로 설희는 글을 많이 썼고, 솜씨도 뛰어났다. 그리하여 은숙은 설희가 머지않아 작가가 되어 사람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고, 이 삭막한 세상을 따뜻하게 만드는데 큰 도움을 주길 바라고 있었다. 특히 은숙과 백 대위의 진실한 사랑과 아픈 이별 그리고 고단했던 자기의 삶의 여정이 딸의 손에 의해 순애보적인 드라마로 엮어져 나오기를 은연중 바라고 있었다. 딸의 손에 의해 그런 작품이 나온다면 그녀는 죽어서도 환희에 가득 찰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녀는 딸이 훌륭한 인성(人性)을 갖추도록 하기 위하여 무던히도 애를 썼다. 아비 없이 자란 딸이라는 비난을 듣기 싫어서 그녀는 아이들을 밝게 키우고자 정성을 다하였다. 훌륭한 인성을 지닌 사람, 모든 것을 포용하고 사랑할 줄 아는 사람만이 훌륭한 인물이 될 수 있다는 그녀의 지론과 신념이 아이들을 키우는 큰 지침이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자연’은 곧 인간에게 무한한 창의력을 안겨주는 보물 창고와 같은 것이라 믿는 그녀는 자연의 운행과 질서 그리고 신비로움에 대하여 어린 설희에게 끊임없이 말해 주었다. 말뿐이 아니었다. 그녀는 딸을 데리고 가까운 들과 산을 찾아다니며 흙의 철학과 생명의 오묘함을 딸의 오감(五感)에 주입시켜 주려 애를 썼다. 아울러 계절이 바뀔 때마다 집안의 구도를 변경하는 데에 설희가 직접 동참하도록 하는 등 딸의 감성 훈련, 요즘 말로 하면 이큐(EQ)훈련에 세심한 배려를 하였다. 은숙은 안방 문에는 유리창 대신 꼭 창호지를 발랐다. 그리고 문고리 부근에만 손바닥만한 유리를 달고 안쪽에서 살짝 작은 종이의 윗쪽만 풀을 붙여 유리를 덮어 달았다. 그리고 문에는 문풍지를 붙였다. 겨울밤에 문풍지가 울면 그녀는 죽은 남편의 영혼이 찾아와 그리움의 노래를 불러주는 것이라 생각하였다. 창호지 문에 작은 유리창을 달아 둔 것은 가족 모두 편히 잠들어 있는 모습을 남편의 영혼이 찾아와 드려다 볼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었다.
여름밤이면 모녀는 뜰 앞의 평상에 나앉아 밤하늘을 바라보고 많은 얘기를 나누었다. 70년대만 해도 이곳 전농동 밤하늘엔 제법 많은 별이 떴으므로 모녀는 별과 별자리에 관하여 이야기를 나누고 노래도 함께 불렀다.
‘어두운 밤 구름 위에 저 달이 뜨면, 괜시리 날 찾아와 울리고 가네. 그 누가 만들었나, 저 별과 달을, 고요한 밤이 되면 살며시 찾아와. 임 그리워 우는 마음 알아나 주는 듯이, 하늘나라 저 멀리서 나를 오라 반짝이네.’
조용하고 애조 띈 음성으로 노래를 부르는 엄마의 옆얼굴을 바라보면서 설희는 엄마가 참 아름답고 슬프게 보인다고 생각했었다. 엄마의 눈가에 이슬이 맺힌 것을 설희가 손끝으로 닦아 준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은숙은 남편을 그리는 사부곡(思夫曲)을 밤하늘의 별에게 수 없이 띄워 보냈고, 설희는 엄마 옆에 앉아 세월이라는 봉투에 침을 발라 사랑이라는 우표를 붙이는 일을 십년 넘게 계속하면서 모녀는 어느새 친구가 되어 갔다. 여자는 나이를 먹어 가면서 딸을 친구로 삼는다던데, 남편을 일찍 떠나보낸 은숙은 어지간한 일들은 딸들과 상의를 하였고, 딸들은 엄마의 그런 감정 이입까지도 이해할 줄 알았다. 설희의 일기장은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더 두터워져 갔고, 일기의 형식도 다양하여 시나 명언, 잠언 형태의 짧은 글귀에서부터 편지글과 수필 등 여러 종류였다. 그 길이도 두 줄짜리부터 두 장까지 있었다. 3때 쓴 일기장에는「별 헤는 밤의 고독」이라 이름 붙여진 시가 있었는데, 멀리 떠난 님을 그리는 여인의 심정을 토방 아래에서 우는 귀뚜라미에 비유하고 있었다. 겨울이 되면 귀뚜라미는 님의 신발 속에 숨어 님이 눈을 밟을 때마다 님 몰래 울어 준다고 쓰고 있었다. 사춘기 소녀의 단순한 꿈이라기보다는 인생의 쓴맛 단맛을 보고 경험하고 난 뒤의 느낌인 듯 제법 어른스러웠다. 아마 엄마의 영향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은숙은 설희가 석진을 매우 따르고 있음을 잘 알았다. 석진은 은숙 자신이 호감을 가질 정도의 남자였으므로 순진무구한 꿈 많은 문학소녀에겐 더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싶어서 모른 체 하고 있었다. 딸이 석진을 좋아하는 데는, 아버지의 정을 모르고 자란 아이의 보상 심리가 상승 작용을 하고 있다는 점도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한 가지 걱정이라면 혹시 딸의 마음에 상처라도 남으면 어쩌나, 순백의 여심에 짓궂은 벌레라도 달려들면 어쩌나 하는 걱정뿐이었다. 그런 상처를 입기 전에 석진에 대한 감정이 아름다운 추억으로 승화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소원을 그녀는 가지고 있었다. 이 세상 딸 가진 엄마들이 가지고 있는 똑 같은 바람이요 느낌처럼.
그런데 어느 날 석진이 갑자기 발을 뚝 끊었다. 왜 그런 행동을 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그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어서 은숙은 혼란에 빠져 며칠을 뒤숭숭한 마음으로 보냈는데, 딸은 은숙 자신보다 더 빨리 그를 잊어버리는 것 같아 의아해 하기도 하였었다.
‘역시 신세대는 다르구나. 사랑도 이별도 아픔 없이 해 치우는 것이 신세대인가’ 하여 조금은 씁쓸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딸이 빨리 평정을 찾게 되어 여간 다행이 아니라고 여겼던 은숙이었다.
하지만 은숙은 설희가 저 혼자 있을 때 짓고 있는 표정에서 형언할 수 없는 허탈과 좌절을 읽어낼 수 있었다. 어떤 때는 딸이 무한 절망에 빠진 표정까지 짓고 있었음을 그녀는 똑똑히 기억하였다.
석진이 발을 끊은 지 몇 달이 되면서부터 어린 딸은 마치 중병을 앓고 난 환자처럼 동공에 빛이 사라지고 말이 적어져 갔다. 고교 입시를 치른 후유증 때문이려니 생각해 보기도 했지만,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라는 생각이 은숙을 당황케 하였다. 엄마 앞에서 까불고 재잘대고, 병아리가 어미 닭 뒤를 따르듯 항상 어미를 찾던 딸이, 어느 날 갑자기 성숙한 모습으로 바뀌어 나타난 것 같은 느낌을 받게 되면서부터 은숙은 딸이 걱정스럽고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딸의 놀라울 정도의 변신과 성숙에는 석진의 배신(?)이 크게 작용하였음을 그녀도 알고 있었으므로 더 걱정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설희는 이러한 엄마의 걱정에서는 벗어나 있었다. 석진으로 인한 마음의 아픔에 괴로워하던 시기를 지나 그것을 성숙으로 오르는 탄탄한 돌계단으로 만들어 내기 시작했던 것이다. 급기야 그를 제 마음에서 떠나보내야겠다고 결심하면서 설희는 차츰차츰 어른으로 바뀌어 가는 자신을 발견하고 스스로도 대견해 하였다.
‘그래, 난 달라. 아니, 달라야 돼. 내가 누군데 그만한 일에 눈물이나 찔끔대고 있어? 바보같이….’
설희는 자신의 심장에 흐르던 뜨거운 물의 흐름이 바뀌고 있음을 감지해 냈다. 예전의 가냘픈 샤워 꼭지에서 흘러내리던 물줄기 같던 정감이 어느새 물레방아의 도도하고 힘찬 물줄기로 바뀌어 가는 고동 소리를 들으며 ‘성숙’이라는 단어를 실감하고 있었다.
그랬다. 설희는 강한 아이였다.
비록 남들처럼 아빠의 정을 못 받고, 여자들만의 세계에서 자란 그녀, 한때는 석진에게서 부정(父情) 겸 남성의 체취를 스쳐 맡아 본 병아리였지만 이제는 달랐다.
그녀의 무서운 용기와 각오는 향학으로 집중되어 큰 성과를 내었다. 고교 들어 첫 학기 중간고사에서 그녀는 학년 톱을 차지하여 엄마에게 큰 기쁨을 선사하였다. 은숙은 딸이 빠르게 감정을 치유하고 공부에 몰두하는 것을 보고 대견해 하였다.
‘그러면 그렇지. 누구 딸인데….’
은숙은 딸이 너무너무 고마웠다. 수희도 동생이 얼굴에서 수심을 걷어 내고 공부에만 매진하는 것을 보면서 한시름 놓고 있었다.
80년대 중반, 그 당시는 데모로 해가 뜨고 날이 지는 세상이었지만, 경쟁 위주의 교육 풍토가 이 땅의 고교생에게 주는 압박에는 변함이 없었다. 대학 입시 제도가 있는 한 그리고 대학에 대한 질타와 무한평가가 지속되는 한 입시 경쟁은 가열되고, 고급 교육의 수요가 늘어나면서 경쟁에 가속도가 붙어 학부모와 아이들의 가슴은 새까맣게 타들어 가고 있었다. 바른 인간을 만들어내자는 숭고한 목표를 가진 교육이 인간을 어려서부터 피 튀기는 경쟁으로 매몰아 사람을 죽이는 근원으로 작용하고 있는 이상한 사회 풍토는 변할 줄을 몰랐다. 설희네 H여고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젊음의 꿈과 낭만 대신 무서운 점수 경쟁, 살인적인 등수 경쟁이 매일매일 전쟁처럼 치러지고 있었다. 공부를 못하는 학생은 숫제 사람이 아니었다. 그리하여 공공 행사에 학생 동원이 필요할 때면 공부 잘 하는 애들은 교실에 남고, 공부 못하는 ‘친애하는 기타 여러분’이 동원되었다. 특히 취업반에 대해서는 아예 사람대접을 하려 들지 않았다. 4년제 대학에만 들어가면 인생의 꿈도, 자아실현도, 높은 삶의 질도 모두 자연적으로 해결될 것이라는 우둔과 착각이 퇴락한 먼지처럼 가득 쌓인 학교는 겉의 평온과는 달리 흡사 광인(狂人)들의 기도회 장처럼 변해 가고 있었다. 학교m측은 80여 명의 1, 2반에게 모든 희망과 가능성을 걸고 다그쳤다. 아니 기름 친 프라이팬 위의 돈가스처럼 달달달 볶아대었다. 설희는 1반에 편성되었다. 1반 담임은 S대 수학과 출신의 배형철 선생이었다. 그의 외모나 드러난 이미지가 너무나 날카로워서 별명이 삐딱꼬라스(피타고라스)였다. 그렇지만 출중한 실력의 소유자여서 어지간한 허물은 다 묻히고 있었다. 들리는 바로는 시내 일류 학원인 J학원에서 2억 원에 스카웃 제의가 들어왔었다고 할 정도로 실력파였다. 아무튼 배 선생은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 인간처럼 학생들을 다그쳤고, 이에 못 따라오는 학생들은 예외 없이 도태시키고 말았다. 그가 수업 중에 한 말 중에서 학생들의 간을 얼어붙게 한 명언(?)으로 꼽히는 말을 정리해 보면, 우리나라 학교 교육의 현주소를 알 수 있을 것이다.
-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라고 하지만 그건 공부 못하는 자들의 옹색한 변명일 뿐이다. 인생의 기로를 좌우하는 대학 입시는 분명히 성적순이라는 점이다.
- 우리나라의 여건에서 ‘보통 사람’은 절대로 위대한 인물이 될 수 없다.
- 올림픽 경기에서도 메달은 3등까지밖에 안 준다. 4등 이하를 기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 울지 못하는 애는 젖을 얻어먹지 못한다. 고로 질문하지 않는 학생은 실력이 향상되지 않는다.
- 오늘 할 일은 당연히 오늘 해야 한다. 그러나 희망 있는 사람은 내일 할 일을 오늘 찾아서 미리 해 치운다.
- 일류대학생들의 사랑은 그보다 못한 사람들의 사랑과는 질적인 차이가 있다.
- 현대 사회에서의 사람 팔자는 대학졸업장에 씌어 있는 학교 명칭이 팔자를 좌우한다.
이렇게 되고 보니, 1반 학생들 사이에는 항상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같은 클래스메이트들끼리는 일주일마다 성적순에 의해 매겨지는 자리다툼이 치열하게 벌어져서 마치 여왕벌을 차지하려는 일벌들처럼 처절한 싸움을 계속하였다. 특히 맨 앞줄에 앉아 있는 여덟 명은 제 자리를 고수하거나 혹은 그 앞자리를 빼앗으려고 사생결단하듯이 눈치 싸움, 잠 덜 자기 싸움, 성적 싸움을 전개하였다.
한편, 석진은 3년 반 만에 전역을 하였다. 의무 경찰로 병역 의무를 마친 것이다.
그가 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 본서에서는 그의 신분이 탄로 날까 봐 전전긍긍하다가 전격적으로 전역을 결정해 버렸다. 당초 계획대로라면 복무 기간이 아직 3개월 여 남아 있지만, 사실 따지고 보면 남보다 1년 반 가까이 더 근무했기 때문에 경찰로서도 더 이상 미련을 가질 수가 없었다. 대학 운동권의 기세도 만만찮고, 또 총학생회의 정보망이 예상외로 치밀하여 만에 하나 잘못하여 석진이 학원프락치라는 사실이 들통 나는 날이면 서장의 목이 날아가고 치안본부장까지 위태로울 수 있다는 판단에 따라 ‘짭새’ 한 마리를 용도 폐기해 버린 것이다. 사실, 학생 신분으로 위장하여 학업과 정보 수집, 교직원 행세를 해 내기는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강인하고 센스 있는 사람이 아니고는 수행할 수 없는 중노동이요 아주 어려운 과업이었다. 문제는 일의 고됨만이 아니었다. 정상적인 젊은이라면 그와 같은 이중 인격적인 가치를 몸에 지니고 행동할 수 없는 일이었다. 바로 그 점이 석진을 지독히도 괴롭힌 고민이었다.
‘난 창녀와 같은 인간이야.’
그는 학우와 교수들의 움직임을 파악해 공안기관에 고자질하면서 학문을 탐구하고 진리와 정의를 추구한다는 것은 용서받을 수 없는 양심의 배반이요 비인간적인 행위였으므로 내심 몹시 괴로워하였다. 하지만 현실은 그의 고민을 사치한 것으로 치부할만큼 수많은 짐들이 떠 맡겨졌다. 그리하여 그것이 자기에게 지워진 역사의 질곡이자 아픔이라고 자위하면서 의도적으로 잊어버리려 도리질을 하고 있었다.
혜지는 석진이 학원에 출입하는 정보 형사인 줄로 알았고, 또 앞으로 그와 결혼한 뒤에 그가 더 높은 지위로 올라가면 나으리 사모님이 되어 위세를 부릴 수 있으리라는 어줍잖은 희망을 가지고 있어서, 석진의 내면적 아픔을 이해할 줄 몰랐다. 그런 까닭에 그는 혜지에게 자기가 의무 경찰이라는 것을 알릴 필요도 없었고, 오늘 전역한다는 것도 비밀에 부쳤던 것이다.
그런데 석진의 가슴에 대못을 박은 것은 놀랍게도 경찰이었다.
S경찰서에서는 쓸개까지 내줄 것 같이 대하던 태도에서 돌변하여 파장 노름판의 재떨이 취급을 하려들었다. 그가 사무실에 들어가면 무슨 위험물이라도 들어온 듯 이리저리 피하려는 기색이 역력하였다. 원래 정보맨들의 인성 자체가 입에 달면 삼키고 쓰면 뱉어버리는 특성을 지니고 있고, 인간을 의심하고 조종하는 데는 귀신같은 존재들이기 때문에, 상황이 변하여 쓸모 없어진 석진에게 따뜻하게 대해 줄 까닭이 없었지만 석진은 그것을 알 리가 없었다. 본서 정보과장은 당초 약속했던 순경 특채 문제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이 ‘국가 민족을 위해 그리고 사회와 학원 안정을 위해 그 동안 몸 바쳐 노력해 온 공을 치하한다.’는 의례적인 문구가 적힌 서장의 표창장과 싸구려 탁상시계 하나를 내밀었다. 그리고 직속상관인 박 계장은 바쁘다며 점심이나 사 먹으라고 얇은 봉투 하나를 던져 놓곤 피해 달아났다.
석진은 화가 치밀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가 지금까지 받은 장학금은 국비가 아니라 H대학의 전액 장학금이었다. 국가에서는 돈 한 푼 안들이고 맨입으로 학원 사찰의 끄나풀로 석진을 이용해 놓고서, 필요가 없어지니까 푸대접하는구나 생각한 그는 내심 괘씸한 생각이 들었다. 그는 지난 3년 반이라는 세월이 너무 허망하고 죄스러웠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석진의 순진한 생각일 뿐이었다. 사냥감이 잡히고 나면 쓸모없어진 개는 보신 탕 감밖에 안 된다는 토사구팽(兎死狗烹)의 이치는 인간 사회 어디에나 살아있는 진실이요 상식이었다. 여하튼 그는 전역 신고를 마친 후 표창장을 갈기갈기 찢어버렸고, 탁상시계를 쓰레기통에 던져버린 다음에 뒤틀린 속을 안고 밖으로 나왔다. 모든 게 허망하여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았다. 그보다는 자기의 앞날에 대해 정리해 볼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곤 뒷골목을 헤맸다. 혼자 있고 싶었다. 아니 멀리 떠나버리고 싶었다. 그리하여 그는 동료들이 그를 찾느라 법석인 시간에 뒷골목 해장국 집에 앉아 울분을 소주잔에 섞어 마시며 곰곰 생각을 가다듬고 있었다. 앞으로 한 학기 동안 어떻게 학비를 대며, 어디서 무슨 돈으로 하숙을 해야 할지. 그리고 서에서 학교에 신분 변동을 통보하여 학생과와도 인연이 끊어졌을 것이 뻔하였으므로 그는 갈 곳이 없었다. 그는 이제 명백히 주인으로부터 버림받은 사냥개였다.
다음날 오후, 그는 짐을 챙겨 나왔다. 막 문을 나서려는 그에게 평소 형님처럼 대해주던 김 형사가 다가와 소주나 한 잔 하자고 팔을 끌었다. 김 형사는 석진의 처지를 이해하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자 동갑내기였다. 전라도 해남이 고향인 그는 고등학교를 마친 후 군에 다녀와서 경찰에 들어와 2년밖에 안된 풋내기였지만 정의감이 풋풋하게 살아 있는 사람이었다.
두 사람은 쌍과부 집에서 돼지갈비를 구워 몇 잔의 술이 오갈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한참만에야 김 형사가 벌개진 얼굴을 들어 뱉듯이 말했다.
“쓰벌, 정말 이 짓도 인자는 못 해묵을 일이구만…. 니기미 둇같은 새끼덜, 우리 더러 민중의 지팽이라구? 허이구, 얼어죽을. 지팽이 좋아 허네. 숫제 몽둥이라고 하는 게 양심적일 걸. 아니지, 홍두깨라고 하는 것이 맞을 걸. 그려, 우덜은 미친놈의 홍두깨 몽둥이여!”
그는 니기미 니기미 하는 욕을 고추장처럼 발라서 꼬부라진 혀에 실어 걸쭉하게 퍼부어 대기 시작했다. 석진은 주위를 빠르게 돌아보며 김 형사를 제지하였다. 다행히 저녁으로는 아직 이른 시간이라 식당 안은 두 사람뿐이었다.
“김형, 왜 그러세요. 자 술이나 받아요. 울적한 건 내 쪽인데, 왜 김형이….”
“개자슥들! 젊은 놈을 이리 쥑이고 저리 쥑이고, 개자슥들…. 우덜은 그럼 뭐여? 우리가 뭐냐구? 사냥개여?”
그는 불어터진 볼따구에서 연신 불만을 토해 냈다. 그의 사촌형이 5.18때 광주에서 죽었다고 했다. 그 당시 모대학 3학년이었는데 형이‘광주를 사수’하다가 장렬히 전사하였다고 김 형사는 몇 번이고 말하였다. 그 때문인지는 몰라도 그는 석진과 함께 H대학을 담당하면서 남들보다는 조금 양심적인 행동을 하였다. 그는 늘 ‘어린 학상들이 무슨 사심이 있어서 목숨 내걸고 데모를 허겄냐’면서 심정적으로 학생들의 행동을 이해하려 드는 축이었다. 그렇다고 그가 80년대 전반을 관류하는 민주화 운동을 전체적으로 이해하거나 판단할 실력을 지닌 것은 아니었다. 단지 5공 정부의 폭압 정치가 나라 전체를 공안 정국으로 몰아가는 것이 못마땅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의혈 경찰관 중의 한 명이었다.
“어이, 석진 씨도 생각혀 봐. 당신도 앞날이 구만리 같은 인생인디, 학원 사찰에 끄나풀이 되어 개충성이나 하고…, 끄윽. 그려, 얼매나 보람 있어? 어디 말혀 보라고…. 짜슥들. 부상당하고 나니께 걷어 차 버려? 니기미…. 머리 다친 거 언제 어떻게 후유증이 나타날는지 누가 알어? 씨부랄 놈덜. 끄윽.”
석진은 그렇찮아도 속이 부글부글 끓던 참이었는데, 김 형사의 말이 더 속을 뒤집어 놓았다. 그러나 그의 푸념이 전혀 틀린 것은 아니었다. 아니, 백번 옳은 말이었다. 석진은 말없이 연거푸 잔을 비웠다. 빈 소주병이 너 댓 개로 늘어가는 가운데 절주를 강조하시던 아버지의 깡마른 얼굴이 떠올랐고, 그것이 석진을 더 우울하게 만들어 그는 거푸 잔을 들이켰다.
‘아버지 어머니는 대견한 아들이라고 하시겠지. 못된 짭새짓이나 하면서 학점 동냥질하고, 계집 품에 안겨 피도 뼈도 다 말리고 있는 이 못난 자식을 기특한 녀석이라고 생각하시겠지. 아니에요. 전 나쁜 놈이랍니다. 은주야, 나 같은 놈은 네 오빠될 자격도 없단다. 오빠라고 부르지 마라. 오빤 죽은 지 오래다.’
석진은 충혈된 눈으로 소주병으로 계속 나발을 불었다. 그리곤 ‘홍도야 우지 마라 오빠가 있다’를 고래고래 소리지르며 부르기 시작했다. 그건 노래가 아니었다. 차라리 악이었다, 악. 악. 악!
술기운 때문이었을까. 석진 옆에 붙어 서서 돼지갈비를 굽는 주모, 쌍과부 동생의 바알간 얼굴이 뜯어먹고 싶도록 육감적이었다. 석진은 소주잔을 목구멍에 털어 넣으며 여자를 저주하는 욕을 해댔다. 그러자 몽롱해져 가는 의식 속에 혜지가 나타났다. 빨간 등 아래 창녀처럼 화장을 하고 그에게 다가와 뱀처럼 그의 허리를 감으려 하였다. 그 순간 그는 주먹으로 탁자를 내리치며 흐느끼며 울부짖었다.
“어머니 잘못했어요. 전 나쁜 자식입니다. 하지만 이제부터는 깨끗하게 살 겁니다. 두고 보세요, 어머니!”
이렇게 절규하다가 그는 혜지의 살 속에 파묻힌 독충에 쏘여 죽어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를 알게 된 지도 벌써 3년이 되지만 지난달 부상당한 이후 동거에 들어가면서부터 석진의 괴로움은 더 커지기 시작하였다. 거기엔 석진의 생활 능력 부족과 어찌됐든 한 여성의 몸을 범했다는 그의 오죽잖은 죄의식이 큰 작용을 하였다. 그의 생활비는 경찰에서 주는 소액의 활동비로 충당할 수밖에 없어 항상 옹색하였다. 시골 부모님께 향토 장학금을 보내달라고 손을 벌릴 수도 없는 입장이었다. 그런 그에게 혜지는 적잖은 돈을 찔러 넣어 주곤 하였다. 그때마다 석진은 고마움과 미안함이 범벅이 된 묘한 감정으로 그녀를 안아 주었다. 일종의 화대 성격의 돈이었다. 또 젊은 석진으로서는 수밀도 같은 그녀의 육체에 빠져들면서 그 순간이나마 모든 고통을 잊어버릴 수 있었다. 하지만 한바탕의 폭풍이 지나고 나면 자신이 꼭 화대를 받고 봉사하는 호스트 바의 창부(娼夫) 신세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런 느낌은 지난 6월 소요 때 부상을 치료한 후 의상실에서 동거 생활을 시작하면서부터 더 강하게 그를 괴롭혔다.
‘비겁한 놈! 칠팔월 개 혓바닥 같은 놈! 땀 흘려 일할 생각은 안하고, 공부한답시고 여자 등이나 쳐서 먹고사는, 추잡한 놈.’
이런 생각이 들 때면 그는 술을 찾았다. 술은 그를 정신적 억압에서 다소나마 해방시켜 주고 구원해 주었다. 또 혜지는 술에 취하여 들어오는 석진이 제 분풀이를 할 양으로 그녀에게 다가가면 석진의 폭력을 몸으로 안아 녹였다. 그녀는 점점 색녀로 바뀌어 가고 있었다. 석진은 그런 혜지의 모습이 싫었다. 그보다도 그런 그녀에게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자신이 더 더욱 싫었다.
“흥, 제까짓 게 돈이 있으면 다야? 이봐 김 형사, 돈이면 다냐구?”
석진은 고래고래 소릴 지르며 거칠게 변해 갔다. 빈 술병이 늘어갈수록 그는 점점 이성을 잃어 갔다.
“색마 같은 기집애. 더러운 년이야. 넌, 더러워… 치사하다구. 꺼져 버려! 영원히 사라져 버리라구.”
석진은 술병과 술잔을 닥치는 대로 내동댕이치며 깽판을 부리기 시작했다. 김 형사 역시 만취된 상태여서 둘은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보이는 것마다 손에 잡히는 것마다 두들겨 부쉈다. 네댓 개의 식탁이 박살나고, 집어던진 의자에 유리창이 와장창 다 나가 버렸다. 지나가던 사람들 중에서 힘깨나 쓴다는 남자들이 제지하려 들었다가 둘에게 흠씬 얻어맞고 줄행랑을 놓았다. 그들은 허위와 기만으로 가득한 이 세상과 제도에, 그리고 암울한 공안 정국에 분노한 ‘투캅스’였다. 한참 동안 난동을 부리던 그들은 제풀에 그 자리에 고꾸라졌고, 식당 주인이 부른 백차가 앵앵거리며 달려와 그들을 싣고 사라졌다. 경찰은 이 일을 원만히 수습하고자 없었던 일로 치고, 음식점 측에는 적당히 손해 배상을 해주고 말았다. 석진은 참 비싼 송별연 값을 경찰에 물리고 말았다.
밤 열 시가 넘어 석진은 경찰서에서 나와 혜지 옷가게로 돌아가고 있었다. 한바탕의 소동 탓이었던지 오히려 머리 속은 개운했지만 한편으로는 서글픔이 북받쳐 올라 그는 속울음을 울며 밤길을 걸었다.
‘고 석진! 넌 이제 모든 것이 끝났다. 알아? 아느냐 구? 그래, 끝내자. 더럽고 비겁한 짭새 생활도, 어중다리 대학생활도, 아아 그리고 치사한 사랑 놀음도 그만 끝을 내자. 내가 누군데, 이렇게 살아야 하나. 미친놈! 고 석진! 너 이대로 죽을 거야? 넌 할 일이 많은 놈이야. 알아? 정신 차려 임마!’
그는 취중에도 생각을 가다듬고 피멍이 든 주먹을 쓰다듬으며 허위허위 걸었다. 오늘밤엔 기어코 혜지에게 이별을 선언하고 떠나리라. 그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때 퀸의상실 옆의 꽃가게에는 설희가 와 있었다.
설희는 경찰병원에서 석진의 연락처로 되어 있는 의상실의 전화번호를 알아내고 곧장 이곳으로 달려온 것이다. 석진 오빠를 만나야 한다는 생각 하나만으로 그녀는 꽃가게에 들러 혜지가 운영하는 의상실에 관하여 알아보고 있는 중이었다.
꽃집 언니는 매우 깨끗한 모습을 지니고 있어서 설희와 금방 친해질 수 있었다. 두 사람은 한동안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설희가 슬쩍 의상실에 대해 물었다.
“언니, 옆집 의상실은 생긴 지 얼마 안 됐나 봐요?”
“아마, 4개월쯤 됐을 걸요.”
“솜씨는 어때요. 거기서 옷 맞춰 보셨어요?”
“아유, 말도 말아요. 패션이 전혀 아닌 거 있죠. 패션이라고 말하기조차 부끄러운 옷들이죠. 몸빼 패션이에요.”
“네에? 그렇게 실력이 없어요?”
“말도 말아요. 처음 개업하고 나서는 서비스로 싸게 해준다고 해서 몇 사람이 맞췄는데요. 아이구, 옷도 아니에요. 이건 아예 자루예요, 보리자루. 그 뒤론 아무도 안가요. 암튼, 어떻게 가겔 꾸려 가는지 참 신통하지 뭐예요.”
꽃집 언니는 신이 나서 말했다. 누군가 자기 말을 들어주는 것에 흥이 났던지, 아니면 혜지에 대한 평소의 고까움을 해소라도 하려는 듯이 아이구 소리를 연발하면서 말을 계속했다. 설희가 진지하게 들어주는 것에 신명이 난 듯 하였다.
“그런데도, 용케 장살 계속하네요.”
“이제 맞춤옷은 못해요. 도매시장에서 받아다 파는 기성복 집이 되고 말았어요. 학생도 그 집에서 옷 맞출 생각일랑 말아요.”
“왜요? 비싼 가요?”
“값도 비싸구. 그보다도 뭐랄까, 그 여잔 밥맛이에요. 노는 꼴을 보면 방금 먹은 밥도 올라온다니 까요.”
그러면서 그녀는 혜지가 바람기가 있다, 숱한 남자를 끌어들이는데 이번에 문 남자는 좀 아까운 사람 같다, 약혼자라고 하지만 도저히 어울리지 않는 한 쌍이라는 것. 이 동네에서 인심을 잃어 앞으로 장사하기 힘들 것이라는 것. 너무 사치가 심하고 사람을 차별하여서 사귀기가 어렵다고 했다. 그녀의 말대로 라면 혜지는 질 나쁜 여자, 아니 바람든 겨울 무우였다. 석진은 아주 몹쓸 여자에게 된통 걸려든 셈이었다.
꽃집 언니가 덧붙인 말 중에서 그녀의 남자관계가 복잡하다는 말은 설희에게 충격을 주었다. 그녀가 농락하고 있는 남자 중에 석진 오빠가 끼여 있다는 생각을 하니 억울하여 견딜 수가 없었던 것이다. 설희는 직접 부딪쳐 봐야겠다고 생각하고 꽃집을 나왔다.
의상실에는 손님이라고는 개미 한 마리 얼씬하지 않고 있었다.
주인과 종업원은 저녁 식사를 하다가 설희가 들어서니 힐끗 쳐다볼 뿐이었다. 여종업원이 입가를 훔치고 일어나 ‘잠깐 기다려 달라’고 말하는 동안에도 트레머리를 한 주인여자는 음식을 꾸역꾸역 입안으로 밀어 넣고 있었다. 설희는 옷을 구경하는 척하면서 그녀를 훔쳐보았다. 이십대 초반에서 후반까지 나이를 종잡을 수 없어 보이는 오동통한 육감적인 여자였다. 키는 중키에다 화장이 짙고 흰자위가 유난히 큰 눈을 가지고 있었다. 두터운 입술에 목주름이 서너 개 나 있는 여자. 한마디로 조금 천박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는 인상이었다.
설희가 옷을 구경하고 있을 때, 가게문이 거칠게 열리더니 술에 만취된 남자 하나가 비틀거리며 들어섰다. 설희는 깜짝 놀랐다. 아, 그는 바로 석진이었다. 그가 곤드레가 되어 들어선 것이다. 설희는 깜짝 놀라 진열대 사이에 몸을 숨겼다. 그러자 혜지는 석진을 큰소리로 그를 꾸짖기 시작했다. 마치 누나가 개구쟁이 남동생을 야단치는 것처럼 말이다.
“왜 이제야 오는 거야. 어디서 뭘 했어? 응? 또 누구랑 술 퍼마셨구나. 말 좀 해봐. 어이구 지겨워. 증말 지겨워 죽겠어.”
설희는 그녀의 악다구니를 듣는 순간 까마득한 절벽에서 굴러 떨어지는 충격을 받았다. 세상에, 오빠가 이렇게 되다니. 이런 대접을 받고 살아가고 있다니.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불쌍한 석진 오빠가 이렇게 된 것도 저 여자 때문이 아닐까.
혜지는 소파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는 석진에게 계속해서 퍼부어 대고 있었다.
“아이구, 원수야. 뭘 바라고 나를 따라 다니는 거야, 응? 그만 꺼져 버려. 제발 꺼져버리라 구. 난 당신 애 안 낳을 거야. 내가 미쳤어? 당신의 씨를 낳게? 그래, 내가 미친년이었지. 그러니까 어서 나가! 나가라 구! 보기 싫으니까 어서 꺼져버리라 구!”
석진은 죽은 듯이 널브러져 그녀의 질타를 듣고 있었다. 설희는 그들이 싸우는 모습에, 아니 그녀가 석진을 닦아세우는 것에 소름이 끼쳤다. 아니, 오빠가 형편없이 몰락한 모습을 보는 것이 싫어서 재빨리 나와 버렸다. 갑자기 눈물이 고였다. 그러나 그보다도 ‘애를 안 낳을 것이라’는 그녀의 마지막 악다구니가 설희의 귀에 쟁쟁히 살아 들려 왔다.
‘애를 가졌다 구? 저 여자가 석진 오빠의 애를? 그러면 두 사람은 결혼할 사이? 아냐, 꽃집 아가씨는 두 사람이 동거한다고 그랬어. 그녀에게 다른 남자도 많다고 했고. 그렇담, 저 여자가 석진 오빠의 애를 가졌다는 증거가 없잖아. 혹시 오빠가 악의 구렁텅이에 빠져 버렸는지도 몰라. 애를 낳지 않겠다구 악을 써대잖아. 사랑한다면 저럴 수는 없어. 저 여자 때문에 오빠의 일생이 망가질지도 몰라.’
설희는 꽃집 옆에 서서 발걸음을 옮기지 못하였다. 그냥 가 버릴 수가 없었다. 그
냥 떠난다면 석진을 영원히 못난 인간으로 기억할 수밖에 없을 것이고, 그리 되면 설희 자신이 너무도 불쌍해질지 모른다는 생각에 그녀는 넋을 잃고 한동안 전봇대 옆에서 가로등마냥 서 있었다.
바로 그때였다.
가게 안에서 무엇을 내던지는 소리와 함께 앙칼진 여자 목소리가 밖에까지 들렸고,
석진이 비틀거리며 뭐라 고함을 지르면서 나오는 것이었다. 설희는 놀란 눈으로 그의 다음 행동을 주시했다. 석진은 비틀거리며 꽃집을 지나 휘적휘적 걸어가고 있었다. 늦은 밤 어두운 골목길에 가끔씩 달리는 차량들이 요란한 경적을 울려 댔다. 설희는 재빨리 약국에 들어가 숙취 약을 사 들고 그의 뒤를 따랐다.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그를 도울 사람은 지금으로서는 자기밖에 없다는 생각을 하면서.
석진은 한강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그를 따르던 설희는 그가 홧김에 한강에 투신이라도 하려는 것이나 아닌 가, 더럭 겁이 났다. 영동대교로 올라서는 길 아래로 들어선 그는 한동안 한강을 굽어보더니 한강 둔치 풀밭으로 내려가는 것이었다. 그녀는 그를 뒤따라 내려섰다. 여름밤 한강변은 불야성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더위를 식히고 있었다. 석진은 한참을 걸어가더니 강둑에 털썩 주저앉아 버렸다. 그는 하염없이 강물을 바라보다가 이윽고 고개를 숙이고 돌부처처럼 꼼짝도 하지 않았다.
‘불쌍한 오빠.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저녁은 먹었을까. 얼마나 괴로우면 저렇게 술을 마셨을까. 사고를 당했던 몸이라 더 조심해야 할텐데. 저렇게 있다가 넘어져서 다치지나 않을는지.’
설희는 십여 미터 떨어진 곳에 앉아 그를 주시하였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그냥 그 자리에 고꾸라져 모로 넘어졌다. 그리곤 잠이 든 듯 조용하였다.
설희는 걱정이 되어 얼른 다가가 그의 창백한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그는 뭐라고 혼잣말을 하다가 물을 찾았다. 설희는 가져간 물약을 조심스럽게 그에게 먹였다. 그의 얼굴은 많이 초췌해 보였다. 그렇게 활달하고 강건하던 모습은 간 곳이 없고 많이 야위어 있었다. 설희는 오빠가 너무 불쌍하여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설희의 눈물방울이 그의 얼굴에 떨어지자 그는 게슴츠레 눈을 뜨고 더듬거리며 말했다.
“누‥구…세요. 댁은 누구…신지요. 하늘에서 내려온 천산가요? 별님인가요? 하하
하. 왜 내게 물을 주시나요? 아니 물이 아닌데요. 이건 약인가요? 설마 날 죽이려고 먹인 건 아니겠지요? 아니죠. 난 죽어야 할 몸이죠. 난 가난뱅이거든요. 가진 게 아무 것도 없어요. 날 동정하지 마시라구 요. 쿡쿡. …난 여자가 싫답니다. …그 여잔 악녀, 악녀거든요. 아 참, 당신도 여자로군 요. …푸우, 후후후. 내 말 좀 들어보실래요? 난 어떤 여자의 유혹에 빠졌었지요. 이봐요, 아가씨도 남자를 아시나요? 후후, 왜 말이 없어요. 내가 미친놈으로 보이나요? 맞아요. 난 미친놈이죠. 미친놈…. 거짓 사랑 놀음이나 하는 미친놈…. 끄윽 끅.”
그는 거기까지 말하고 나더니 꺼이꺼이 울먹이다가 약의 효험을 봤는지 편한 얼굴
로 돌아와 설희의 무릎을 베고 잠이 들었다.
설희는 그만 설움에 지쳐 울기 시작했다. 오빠 얼굴을 내려다보면서 뜨겁게 울었다. 아빠 없이 자란 소녀가 처음으로 만났던 따뜻한 남성, 석진은 설희에겐 마음의 고향이었는데, 그 고향이 차가운 바람이 몰아치는 허허벌판으로 변해버리고 있는 모습에 그녀는 하염없이 울었다. 그는 서늘한 강바람 속에서 고른 숨을 쉬며 단잠을 자고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강변 풀밭 여기저기에 깔린 자리에서 사람들이 하나 둘씩 떠나기 시작하였다. 그는 가끔씩 가슴을 쥐어뜯으며 괴로워하였다. 설희는 그를 그냥 여기에 놔두었다가는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를 흔들어 깨웠다.
“오빠, 일어나세요. 네? 어서 일어나요.”
설희는 석진의 머리칼을 손으로 쓸어 넘기며 손수건으로 그의 얼굴을 닦아주었다.
그제야 그는 비몽사몽간에 지나가는 소리로 말했다.
“아가씬 또 누구지? 꽃집 아가씬가? 그래요, 난 당신 같은 착한 여자가 좋답니다. 끄윽. 혜지가 보내진 않았을테구. 그럼 누구신가요? 아무렴, 내 동생 은주나 설희가 왔을 리는 없구. 암, 없지. 후후후…그 애요, …설흰 천사랍니다. 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천사랍니다. 끄윽. 이봐요, 아가씨. 날 설희한테, 백 설희한테 데려다 줄 수 없어요? 돈은 나중에 벌어서 많이 드릴 테니까. 어디냐구요? 어디더라. 맞아. 전농동이야, 전‥농‥동…….”
그리고 나서 그는 또 잠이 들었다. 석진의 입에서 설희라는 이름이 나오자 그녀는 크게 놀랐다. 뜨거운 눈물이 자꾸 흘러나와 주체할 수가 없었다. 그가 여태까지 자기를 잊지 않고 있을 줄은 몰랐던 것이다. 그때 경찰 오토바이 두 대가 불을 밝히고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설희는 그들에게 부탁하여 길가까지 석진을 부축해서 택시에 태웠다. 그녀는 망설임 없이 그를 전농동 자기 집으로 데리고 왔다. 택시 안에서도 그는 알듯 모를듯한 말을 하면서 설희의 손을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