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곡재중건기(楚谷齋重建記)
영천시 동쪽 20리쯤 되는 고경면(古鏡面) 초일리(草日里) 천경산(淸景山) 초곡(楚谷) 신향(辛向)의 언덕에 우뚝한 봉분(封墳)이 있으니 바로 귀미입향조(龜尾入鄕祖) 조선(朝鮮) 인조조(仁祖朝) 유학자(儒學者) 승훈랑(承訓郎) 삼휴공(三休公) 諱 호신(諱 好信)의 유택(幽宅)이다. 그 아래 초일리(草日里) 안쪽에 아담한 재사(齋舍)가 있으니 곧 공(公)의 묘재(墓齋)인 초곡재(草谷齋)이다.
공(公)은 정씨(鄭氏)이니 계출영일(系出迎日)이며 비조(鼻祖)는 고려(高麗) 추밀원지주사(樞密院知奏事) 휘 습명(諱 襲明)이고 7세 휘 인언(諱 仁彦)은 전공판서(典工判書)로 처음 영천(永川)에 전거(奠居)하였으며 8세 휘 광후(諱 光厚)는 조선조(朝鮮朝)의 공조판서(工曹判書)이고 16세 휘 세아(諱 世雅)는 호(號)가 호수(湖叟)이니 임진왜란(壬辰倭亂)때 의병장(義兵將)으로 영천복성(永川復城)의 공(功)으로 증직(贈職)이 병조판서(兵曹判書)요 시(諡) 강의공(剛義公)이니 공(公)의 조(祖)이다.
공(公)은 선조을사(宣祖乙巳)(1605년)에 태어나니 품성(稟性)이 준수(俊秀)하고 영특(潁特)하며 과거(科擧)에는 뜻을 두지 않고 오로지 위기지학(爲己之學)에 힘써서 전서강(全西岡), 손모당(孫慕堂), 장여헌선생등(張旅軒先生等)을 사사(師事) 했으며 심경설(心經設)을 이루었고 동정(動靜)의 학(學)에 밝았다.
항상(恒常) 귀미(龜尾) 산수(山水)를 벗 삼아 우유자적(優遊自適)하면서 방진상화(芳辰賞花)라가 화락칙휴(花落則休)요, 양소대월(良宵對月)이라가 월경칙휴(月傾則休)요, 한중득주(閑中得酒)라가 주진칙휴(酒盡則休)라. 시(詩)를 지어 이 삼휴(三休)를 자호(自號)로 삼았다.
향년(享年 45세로 조몰(早歿)하시니 음직(蔭職)으로 승훈랑(承訓郎)에 보(補)해졌다. 배(配)는 의인창녕성씨(宜人昌寧成氏)로 찰방(察訪) 이직(以直)의 따님이다.
원래(原來) 공(公)의 묘재(墓齋)는 없었으나 을유년(을유년)(1945년)에 현지(現地) 초일리(草日里)의 4간주택(四間住宅)을 구입(購入)하여 개조(改造)해서 이용(利用)하다가 경신년(庚申年)(1980년)에 한차례 크게 보수(補修)했으나 세월(歲月)이 흘러 비가 새고 허물어짐에 갑신년(갑신년)(2004년) 봄 묘사(墓祀) 계좌석상(啓座席上)에서 중건(重建)하기로 결의(決議)하여 추진위원회(推進委員會)를 구성(構成)함에 위원장(委員長) 炳旭, 부위원장(副委員長) 淵學, 殷植(귀미), 奇植, 淵晟, 총무(總務) 敦植, 재무(財務) 胎基, 감사(監事) 漢植, 時容, 洸植(이외는 略함) 등(等)을 선출(選出)하여 추진(推進)하니 그 기금(基金)은 문배전(門排錢) 세대당(世帶當) 삼만(參萬)원씩과 표성금(表誠金)을 모금(募金)하여 그해 8월에 기공(起工)하여 동년(同年) 11월말에 竣工(준공)하니 正堂(정당)이 3간반퇴(三間半退)로부연(婦椽)을 달고 우산각(雨傘閣)에 동서(東西)로 방1간(房一間)씩이며 중앙(中央)에 대청(大廳)을 하였고 포사(庖舍)도 방2간(房二間) 주방1간(廚房一間)으로 개축(改築)하고 대문(大門)도 건립(建立)하여 대문(大門)밖에 주차장(駐車場)도 마련하니 총공사비(總工事費)는 8900만(八千九百萬)원 이었다.
이 역사(役事)를 이렇게 무사(無事)히 마치게 됨은 오직 임원(任員)여러분의 피나는 노력(努力)과 후예(後裔)된 여러분의 적극적(積極的)인 협조(協助)의 덕택(德澤)이라 생각된다.
앞으로 이 재사(齋舍)를 해마다 시사(時祀)때 재숙(齋宿)하고 묘역(墓域)을 수호(守護)하는데 요긴(要緊)하게 이용(利用)하면서 선조(先祖)에 대(對)해 보본(報本)하는 정신(精神)을 기르고 아울러 족친(族親)끼리 돈목(敦睦)하는 전당(殿堂)이 될 수 있도록 힘쓰며 자손대대(子孫代代)로 영원무궁(永遠無窮)토록 수호(守護)하여 보전(保全)하기를 간절(懇切)히 바라면서 이에 기(記)하노라.
을유년(을유년)(2005년) 2月 15日
12대손 병 욱 근기(十二代孫 炳旭 謹記)
*위 중건기는 초곡재 중건위원회 위원장(정병욱)께서 이사업을 종료하시면서 쓰시고 중건기를
현판에 세기여 재사에 현판 하였다.
첫댓글 운계형님께서는 생시에 남의 어려운 일을 많이맡아 하셨다. 특히 묘갈명(비문)을 쓰신 것을 살펴보면, 청도 이익장, 황보씨효렬비문을 비롯하여 영산 (휘 유조)언하할배, 초당 (휘 진성)대밭골할배, 계암 (휘 한기)덕동할배, 청암 (휘 연각)광이할배의 비문을 지으셨고, 초곡재중건기문도 쓰셨다.
오랜만에 사진이지만 작은아버지의 얼굴을 뵈니 반갑네요
어느덧 15년의 세월이 흘렀네요.
꼭 한번 들러서 조상님과 아버님의 흔적을 만나고 싶습니다
오빠 올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일부러 카톡 주셔서 이 글을 읽게 되었네요.
그리운 아버님 사진과 글을 접하게 돼 더욱 생각이 납니다.ㅠ
그때 동분서주 하시든 아버지 모습이 생각납니다.불과 엊그제 같은데 벌써 많은 세월이 흘렀네요.
봄 삼휴공 묘사때 초곡재 가면 항상 아버지와 함께한 묘사가 눈에 어른거립니다.
중건기 올려 주셔서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