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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서흥김씨 대종보 원문보기 글쓴이: 편집자
유홍준이 새로 걷는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도동서원’이
월간중앙(2009년 12월호) 머릿이야기로 사진들과 함께 11쪽에 걸쳐 게재되었습니다.
유교수는 월간중앙의 문화기획 첫 답사지로 도동서원을 선택한 이유를 밝히고
독자들에 도동서원에 대한 설명에 앞서 한훤당 김굉필과 소학에 대해 이야기 합니다.
유홍준이 새로 쓰는 문화유산답사기를 통해 한훤당 김굉필과 도동서원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었으면 하여 내용을 발췌하여 올립니다.(편집자주)
도학의 대종, 한훤당 김굉필
도동서원은 현재 행정구역상 대구광역시 달성군 구지면 도동리로 되어 있지만, 옛날로 치면 경상우도의 우뚝한 유림(儒林)의 고장인 현풍(玄風)에 있다. 도동서원은 도산·옥산·병산·소수서원과 함께 조선 5대 서원 중 하나로 손꼽히며, 그 권위와 명성은 한훤당(寒喧堂) 김굉필(金宏弼·1454~1504)로부터 나온다.
역사책에 나오는 김굉필의 인간상은 무오사화 때 김종직의 제자라는 이유로 유배 가고 갑자사화 때 사사(賜死)당한 사림파의 문인으로 되어 있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역사 서술이란 간혹 이렇게 가볍고 잔인한 데가 있다. 옛 사람들이 훌륭한 유학자를 표현할 때는 거유(巨儒)·굉유(宏儒)라고 하는데, 이것으로도 김굉필을 말했다고 할 수 없다.
동양화에서 달을 그릴 때는 달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그 주위의 달무리를 그려 달이 드러나게 하는 공염법(空染法)이 있는데, 한훤당의 주위를 보면 점필재 김종직이 그의 스승이고, 벗으로는 일두 정여창, 추강 남효온, 임계 유호인이 있고, 제자로는 정암 조광조를 비롯하여 이장곤·성세창·김일손·김안국 등이 있으니 일세의 거공명유(鉅公名儒)들이 망라된다.
한훤당 김굉필을 한마디로 말하라면 퇴계가 한훤당을 가리켜 “근세도학지종(近世道學之宗)”이라고 말했듯 그는 우리나라 도학(道學)의 대종(大宗)이다. 그리하여 중종 때부터 근 50년간의 논의를 거쳐 광해군 2년(1610)에 문묘(文廟)에서 제향할 유학자로 동국5현(東國五賢)이 결정될 때 그 순서가 한훤당 김굉필, 일두 정여창, 정암 조광조, 회재 이언적, 퇴계 이황 등의 순이었으니 한훤당은 오현 중에서도 수현(首賢)이었던 것이다.
김굉필의 일생
김굉필은 단종 2년(1454), 무관으로 어모장군(御侮將軍)이었던 김뉴(金紐)의 아들로 서울 정동(貞洞)에서 태어났다. 자는 대유(大猷)였다. 본관은 황해도 서흥(瑞興)이지만 예조참의를 지낸 증조부가 현풍 곽씨와 결혼해 처가인 현풍으로 내려오면서부터 현풍인이 되었고, 할아버지가 개국공신인 조반의 사위가 되어 서울 정동에 살게 되어 여기서 태어난 것이다.
그의 집안은 상당한 재력을 갖추었던 중소지주로 알려져 있다. 어렸을 때 그는 호방하고 거리낌 없어 저잣거리에서 잘못된 것을 보면 그 자리에서 메치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19살에 순천 박씨와 결혼해 합천군 야로(冶爐)현에 있는 처갓집 개울 건너편에 서재를 짓고 한훤당이라는 당호를 붙이고 지내다 뒤에 현풍으로 돌아와서는 지금 도동서원 뒷산인 대니산(戴尼山) 아래에 살았다.
이 시절 한훤당은 서울의 본가, 야로의 처가, 성주 가천(伽川)의 처외가 등지를 오가며 선비들과 사귀고 학문에 힘썼다. 1474년 봄 20세의 한훤당은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이 함양군수로 있을 때 찾아가 그의 문인이 되었는데, 그때 한훤당이 <독소학(讀小學)>이라는 시를 지으면서 “소학 책 속에서 어제까지의 잘못을 깨달았네(小學書中悟昨非)”라는 구절이 있는 것을 보고 점필재는 “이 구절은 성인이 될 수 있는 근기(根基)”라며 찬탄했다고 한다.
이후 그는 오로지 <소학(小學)>만 공부했고, 소학의 가르침대로 살고자 했다. 10년 동안 <소학>만 읽고 다른 책은 보지 않았으며 스스로 소학동자라고 했다. <소학>이라는 책은 일상생활에서 실천해야 할 윤리를 말한 교과서다. 내용인즉 가정예절부터 부모를 사랑하고(愛親), 어른을 공경하고(敬長), 임금에 충성하고(忠君), 스승을 높이고(隆師), 벗과 친하는(親友) 길(道) 등이다.
이 지루하고 평범한 일상의 몸가짐을 이야기하는 <소학>만 10년간 읽고 다른 책으로 나아가지 않았다는 것은 불가(佛家)로 치면 거의 수도승의 자세와 같은 것이었다. 비유하자면 그는 학승(學僧)이 아니라 수도승(修道僧)의 자세였고, 이렇게 해서 얻은 그의 도력(道力)은 주위로부터 자연히 존경받게 되었다고 한다.
성리학이 고려 말 우리나라에 들어온 이래 조선 왕조 들어 주도적 이데올로기가 되면서 유학자들은 출세를 위한 기본 학문으로 익히는 풍조가 생기고 문장도 이른바 사장(詞章)으로 흘러 아름답게 꾸미기에 힘쓰는 경향이 생겼다. 이에 성리학은 의리지학(義理之學)이고 한 인간으로서 완성을 위한 위기지학(爲己之學)이라는 근본 철학, 즉 도학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을 때 한훤당이 나타난 것이다.
나이 36세 되던 1480년(성종 11년) 생원시에 합격해 성균관에 들어가고, 1494년에는 학문에 밝고 지조가 굳다는 점을 들어 유일지사(遺逸之士)로 천거되어 남부 참봉에 제수되면서 관직을 시작하였다. 이어 여러 낮은 관직을 거쳐 1498년 무오사화가 일어나기 직전에는 형조좌랑까지 올랐다.
김종직의 <조의제문>에서 유발된 무오사화 때 한훤당은 오직 김종직의 제자라는 이유 때문에 같은 도당(徒黨)이라는 혐의를 받고 곤장 80대에 원방부처(遠方付處)라는 유배형을 받고 평안북도 희천(熙川)으로 귀양갔다. 그때 한훤당은 나이 45세였다. 여기서 한훤당은 운명적으로 조광조를 만났다.
당시 조광조는 열네 살로 찰방인 아버지를 따라 평안북도 어천(魚川)에 가 있었는데, 인근에 한훤당이 유배왔다는 것을 알고 찾아가 사제의 연을 맺게 된 것이었다.
47세 되던 해 한훤당은 전라도 순천으로 이배(移配)되어 북문 밖에서 조용히 지냈다. 그러나 연산군 10년(1504) 갑자사화가 일어나 무오사화의 관련자들에게 죄를 추가하여 한훤당은 사사당하니 7년간의 귀양살이 끝에 죽음으로 생을 마감한 것이다. 향년 51세였다. 묘소는 현풍 선영 가까이에 모셨다.
선생의 저술은 무오사화 때 이미 후환이 두려워 모두 불태워버렸고 친지 간에 오간 글의 소장을 꺼렸기 때문에 집안에 내려오는 <경현록(景賢錄)>이 전부인데, 10여 수의 시와 네댓 편의 문(文)이 전부이기 때문에 그의 도학을 문헌으로 알아볼 길이 없다.
그러나 사후 문묘종사 등 사림의 논의가 있을 때마다 그의 도학에 대해서는 거의 이론이 없는 칭송으로 가득하여 이를 모두 모아 편집한 <국역 경현집>(1970, 한훤당기념사업회)은 900쪽에 달하니 한훤당은 역시 몸으로 도학을 세운 분이라 할 것이다.
도동서원의 내력
한훤당은 그렇게 허망하게 세상을 떠났지만 중종반정이 일어나고 나서 1507년(중종 2년)에 신원(伸寃)되어 도승지로 증직받고, 1575년(선조 8년)에는 다시 영의정에 증직되고 문경공(文敬公)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그리고 1610년(광해군 2년)에 문묘에 동방오현의 수현으로 받들게 되었으니 생전에 받지 못한 대우를 사후에 더 없는 영광으로 받은 셈이었다.
16세기 중반 서원이 곳곳에 세워지기 시작할 때 퇴계 이황과 한훤당의 외증손이자 예학에 밝았던 한강 정구는 1568년(선조 2년) 한훤당을 모시는 쌍계서원을 현풍현 비슬산 기슭에 세웠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져 1604년(선조 37년) 지금의 자리에 먼저 사당을 지어 위패를 봉안하고 이듬해 강당과 서원 일곽을 완공하였다.
선조는 이 서원에 도동서원이라는 사액을 내려주니 그 뜻은 “도가 동쪽으로 왔다”는 의미였다. 도동서원은 1865년 흥선대원군이 전국에 47개 서원·사당만 남기고 모두 철폐할 때도 훼철되지 않아 조선 5대 서원의 하나로 손꼽히는 것이다. 도동서원은 낙동강이 내려다보이는 대니산(戴尼山) 밑에 있다.
본래 이 산의 이름은 태리산(台離山) 또는 제산(梯山)이라고 불렸는데 한훤당 선생이 이 산 아래 들어와 살게 되면서 사람들이 대니산으로 바꾸어 부르게 되었다. 대(戴)는 머리에 인다는 뜻이고, 니(尼)는 공니(孔尼)를 뜻하는 것이니 공자님을 머리에 이고 있는 것처럼 높이 받드는 산이라는 의미가 된다(공자는 짱구여서 공구/孔丘라고도 했고, 니구산/尼丘山에서 태어났다고 해서 ‘공니’라고도 불렸다).
도동서원 가는 길은 병산서원 가는 길 못지않게 아름답다. 현풍에서 대니산 너머 도동서원으로 가자면 다람쥐처럼 보인다는 다람재가 제법 높고 험하여 나는 걸어서 간 적은 없다.
그 대신 고개 마루에서 반드시 차를 멈추고 거기서 도동서원을 조망하고 간다. 요새는 여기에 한훤당의 시비도 세워놓았고 정자를 지어 도동서원과 도동리 옛 마을을 품에 안고 먼 산자락 사이로 돌아가는 낙동강 가의 그림 같은 강마을 풍광을 만끽할 수 있다.
수월루 누각의 문제
철종 6년(1855) 증축한 수월루. 그러나 도동서원 건축의 높은 격조에 큰 손상을 주었다는 주장도 있다. 도동서원 앞에 당도하면 사람들은 우선 김굉필나무라고 이름 지은 은행나무의 늠름한 자태에 입을 벌인다. 외증손 정구가 이 자리에 도동서원을 세울 때 심은 것으로 수령이 400년 이상 된다. 내가 시각장애인들과 여기를 답사했다면 그들로 하여금 몇 아름 되는지 둘러보게 할 생각이었다.
아마 다섯 명이 손을 잡아야 했을 것이다. 도동서원은 가파른 비탈에 자리 잡아 앞마당부터 사당까지 계속 석축으로 이어진다. 막돌허튼층쌓기로 폭과 높이를 달리하며 전개해 올라가는데 우선 은행나무에서 서원을 가로막듯 서 있는 2층 누마루인 수월루(水月樓)까지만도 4단이다.
시각장애인들과 함께 오면 알려주려고 세어두었는데 무려 18단이나 된다. 이처럼 자연의 형질을 변형시키지 않고 각 레벨을 살리면서 건물을 배치한 것이 도동서원 건축의 큰 자랑이고 특징이다. 그런데 도동서원 건축의 이런 특징이 우리 눈에 잘 들어오지 않는다. 그것은 서원 안쪽을 가로막고 버티듯 서 있는 수월루 때문이다.
본래 1605년 창건 당시에는 수월루가 없었다. 그랬던 것을 철종 6년(1855) 증축한 것이다. 많은 건축가는 이 수월루가 불필요한 건축적 과장이라며 도동서원에 맞지 않을 뿐 아니라 도동서원 건축의 높은 격조에 큰 손상을 주었다고 불만을 말하고는 한다. 본래 도동서원의 대문은 매우 작은 환주문(喚主門)으로, 머리를 숙이지 않으면 갓 쓴 이의 갓이 닿을 정도로 낮다.
그리고 강당인 중정당(中正堂)은 아주 높직한 석축 위에 올라앉아 마루에 앉으면 환주문을 눈 아래에 두고 은행나무 너머 낙동강을 멀리 내려다보는 조망을 갖게 되어 있었다.
그런데 그렇게 펼쳐지는 시야가 이 수월루로 인하여 막혀버린 것이다. 철종 때 증축한 분들의 뜻은 “서원의 제도에 맞으려면 누각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과, “서원 출입하기 가파르고 갑갑하다” 이유로 수월루를 세웠다는 것이다. 과연 그랬을까?
도동서원의 기와돌담은 중간 중간에 수막새 기와로 별무늬를 넣는 등 아름답고 독특한 특징을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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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동서원 건축의 디테일
도동서원의 건축 평면은 여느 서원과 다를 것이 없다. 높직이 올라앉은 중정당을 중심으로 안마당 아래쪽 동서로 동재(東齋)와 서재(書齋) 두 기숙사를 두고 뒤편 위쪽으로는 사당을 모셨다. 이는 우리나라 서원 전체에 해당하는 보편적 건축 형태다. 그러나 이제부터 살펴보는 낱낱 디테일은 정말 도동서원만의 특징이고 자랑이 된다.
내가 시각장애인의 답사처로 이곳을 생각한 이유이기도 하다. 환주문을 보면 문지방이 있을 자리에 꽃봉오리 돌부리가 있어 여닫이 문을 고정시키는 역할을 한다.
지붕은 사모지붕에 오지로 구운 절병통이 예쁘게 얹혀 있다. 환주문에서 중정당으로 가는 안마당에는 가지런히 돌길이 놓여 있고, 중정당 석축 앞에 낮게 단을 쌓았는데, 이 돌길과 석단이 만나는 자리에 고개를 내민 돌거북이 조각되어 있다. 이 돌거북은 위에서 보면 꼭 올빼미 같지만 바짝 쪼그리고 앉아 정면으로 보면 이빨이 옆으로 나온 영락없는 거북이인 것을 알 수 있다.
중정당으로 오르는 석축에는 두 개의 돌계단이 좌우로 비껴 있는데 디딤돌이 일곱 단이나 될 정도로 높다. 이 석축은 마당의 얼굴이기 때문에 막돌허튼층쌓기로 되어 있지 않다. 반듯한 돌을 차곡차곡 이 맞추어 가지런히 쌓았는데 돌의 크기도 제각기 다르고, 빛깔도 연한 쑥색, 연한 가짓빛, 연한 분홍빛 등 연한 색이 은은히 퍼지면서 아름다운 조각보를 보는 듯하다.
석축이 머릿돌을 받치고 있는 자리에는 여의주를 문 네 마리의 용머리가 실감나게 조각되어 앞으로 돌출해 있다. 이 용머리 조각을 근래 어느 문화재 절도범이 뽑아간 것을 찾게 되어 네 마리 중 한 마리만 원래대로 남겨놓고 세 마리는 복제품으로 대신하고 원본은 따로 보관하고 있다.
이렇게 정성스러운 치장을 하고도 모자람이 있었는지 석축에는 다시 세호(細虎)라고 불리는 다람쥐 모양의 조각을 양쪽에 배치했다. 이것도 ‘비대칭의 대칭’ 원리에 의하여 한 마리는 올라가고, 한 마리는 내려가는 형상이다. 그리고 그 곁에는 꽃 한 송이씩이 배치되어 있다.
우리나라 건축에서 이처럼 곳곳에 조각을 가하여 아름다운 공간을 연출한 곳은 도동서원 외에는 창덕궁에나 가야 있다. 왜 도동서원에는 이처럼 많은 조각이 새겨져 있을까? 돌 축대가 18단이나 되고 보니 이 지루하고 딱딱한 돌길에 조각을 새겨 시각적 긴장을 풀어주려던 것 아닐까?
도동서원의 중정당을 나라에서 보물 제380호로 지정할 때 돌담까지 포함시켰다. 그만큼 도동서원의 기와돌담은 아름답고 특징이 있다. 자연석 석축으로 기초를 삼고 그 위에 황토 한 겹, 암키와 한 줄을 반복하며 가지런히 쌓고 기와지붕을 얹었다. 그리고 중간중간에 수막새 기와로 별무늬를 넣었다.
도동서원은 멋이 아니라 기능에서도 다른 서원보다 뛰어나다. 제사를 지내는 데 필요한 구조물을 빠짐없이 갖추었다. 사당 옆 담장에는 사각형으로 뚫린 빈 공간이 있는데, 이는 제사가 끝난 다음 제문을 태우는 차→감(次→坎*)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중정당 서쪽 마당에는 사각돌기둥에 네모난 판석을 얹은 것이 있는데, 이것은 생단(牲壇)이라고 해서 제사 때 사용하는 생(牲, 소·양·염소 같은 고기)을 제관들이 제사에 적합한지 아닌지 검사하는 단이다.
이들 시설물은 기능도 기능이지만 서원 건축의 한 액세서리 같은 장식효과가 있다. 그 점에서는 중정당 바로 앞에 세워져 있는 정요대(庭燎臺)가 압권이다. 긴 돌기둥 위에 네모 판석을 얹은 이 정요대는 일종의 조명시설로, 제사 때 이 판석 위에 관솔이나 기름통을 올려 놓고 불을 밝힌다.
(사진설명)한훤당 선생의 위패가 모셔진 도동서원 사당 안에는
좌우 양쪽 벽면에 화제를 써 놓은 큼지막한 수묵화가 그려져 있다.
사당 안의 벽화
서원에서 사당은 좀처럼 열어놓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그동안 도동서원에 여러 번 갔어도 사당 안은 들어가 보지 못했다. 그런데 대학원 미술사 세미나에서 한 학생이 도동서원 사당 안에 벽화가 두 점 있다고 들었다고 했다. 나는 문화재청에 연락해 사당 안에 들어가는 것을 허락받아 일행과 함께 사당 안까지 들어갈 수 있었다.
들어가 보니 진짜 좌우 양쪽 벽면에 큼직한 수묵화가 그려져 있다. 두 벽화는 회벽에 먹으로 그린 것이 분명했고, 두 그림 모두 차분하고 문기가 있고, 무엇보다 격조가 있다. 의자를 빌려 높이 올라가 사진을 찍는데, 내 뒤에서 함께 간 문인 중 누군가가 “야, 이 벽화 참 운치 있다”고 감탄하는 소리가 들렸다.
왼쪽의 벽화는 달빛 아래 낚싯배를 드리운 강변 풍경이고, 오른쪽 벽화는 흐드러진 소나무 가지 사이로 둥근 달이 걸린 그림으로 모두 여백이 넓고 필치는 단정하다. 화풍으로 말할 것 같으면 서원이 세워진 선조 연간의 산수화풍이다.
두 그림 모두 먹 바탕에 흰 글씨로 화제(畵題)를 써놓은 것이, 읽어보니 하나는 ‘설로장송(雪露長松, 눈과 이슬 속의 키 큰 소나무)’이고 또 하나는 ‘강심월일주(江心月一舟, 강속에는 달과 한 조각의 배)’이다. 그림과 화제가 일치하고 필치도 단정한 가운데 고아한 분위기가 있어 이 벽화는 지나가는 답사객이 아니라 면밀한 학술조사를 위해 다시 와야겠다는 마음을 먹고 밖으로 나왔다.
남명 조식이 증언한 한훤당 소장 안견 그림
오세창의 <근역서화징>을 보면 <동국문헌> ‘화가편’에 한훤당은 “그림을 잘 그렸다(善畵)”는 기록이 있고, 그의 스승인 점필재 김종직 또한 “그림과 글씨에 능했다”는 기록이 같은 책 ‘필원편’과 ‘화가편’에 나온다고 했다. 그런 중 한훤당이 <몽유도원도>의 안견(安堅)이 그린 그림을 10폭이나 소장했었다는 증언이 있어 주목된다.
이 증언은 다른 이가 아닌 남명 조식 선생의 문집에 나오기 때문에 더더욱 주목되는 것이다. 조식의 <남명집>에는 ‘한훤당 그림병풍에 부친 발문(寒喧堂畵屛跋)’이라는 글이 있다. 그 대략을 인용해보면 다음과 같다.
“…한훤당 선생께서 집안에 소장해두셨던 옛 그림이 이리저리 굴러다녀 주인의 소유가 되지 못한 지 거의 백년이었다가 이번에 다시 주인 소장으로 되었다… 채색이 아련한 빛을 머금어 완전한 것이 마치 어제 표구한 듯하다. 열 폭 짧은 병풍에 <검푸른 회나무와 늙은 소나무(蒼檜老松)> <푸른 나무와 파릇한 버들(碧樹靑楊)> <고목과 대숲(古木叢篁)> <거문고와 학(琴鶴)> <소(牛)> <양(羊)> <낚싯배와 달(垂綸玩月)> <구름 덮인 산의 초가집(雲山草屋)> <백리장강(百里長河)> <천 길 폭포(千尺懸瀑)> 등이 보인다… 선생께서 마주보고 누워 있을 때나 눈길을 주고 감흥을 일으키실 적에 어떤 생각을 하셨을까 상상해보니… 상쾌한 바람 같은 선생의 영혼이 흐릿하게 그림 속에 남아 있고, 사모하는 마음 사이에 예전의 모습이 오히려 보이는 듯하다… 이 그림은 안견(安堅)이 그린 것이다.”
이어 남명은 이 그림이 어떻게 유전되었는지에 대해 매우 자세하게 증언하고 있다.
“선생께서 불행함을 당하실 때 나라에서 그 집을 몰수하니 집안의 재산이 쓸린 듯 다 없어져 해진 빗자루 하나 남지 않았으나, 다만 이 한 물건만이 도화서(圖畵署)에 소장되었다… 그런데 어느 해인지는 알지 못하지만 민가(民家)로 훌쩍 새어나간 뒤 아무도 간 곳을 알지 못했다. 지난 경오(1570)년에 주상(主上: 선조대왕)께서 우연히 ‘김굉필의 유적(遺跡)을 볼 수 있는가’라고 물으시니, 승지 이충작이 ‘신(臣)이 한 민가에서 김굉필이 소장하던 화병첩(畵屛帖)을 본 적이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초계현감을 지낸 선생의 손자 김립(金立)이 이충작에게 자세히 물어보았더니 ‘일찍이 현감 오언의의 집에서 본 적이 있다’고 하였다. 오언의의 손자인 오운이 그의 처가에서 얻었다는 것인데, 이를 새 비단으로 다시 표구하여 (한훤당의 손자인) 김립에게 주었단다… 김립이 나이가 여든에 가까운데 이 일 때문에 지리산으로 나를 찾아와 그 전말을 기록해주기를 청하여 사양했지만 되지 않아 이렇게 기록해 둔다. 때는 1571년 7월11일이다.”
이렇게 자세히 증언한 것이니 그 내력을 의심할 수 없는데, 이때 남명은 이 화첩을 집에 두지 말고 서원(당시는 쌍계서원이었음)에 두는 것이 좋겠다고 충고했다. 아마도 한훤당의 손자는 필시 그렇게 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쌍계서원은 임진왜란 때 불탔으니 그때 소실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내가 혹시 하고 기대해본 것은 이 벽화가 한훤당이 소장했던 안견의 그림 중에서 따온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었다. 그 점을 염두에 두고 살펴보니 <강심월일주> 벽화는 안견의 <수륜완월>과 같은 것일 수 있지만 <설로장송> 벽화에 맞는 화제는 안 보인다. 그러나 자세한 것은 학술조사 후 말하는 것이 옳겠다.
한훤당과 점필재의 결별
이번 답사에는 한문학자인 송재소(성균관대) 명예교수가 함께하여 우리는 도동서원으로 내려가는 버스 안에서 영남사림에 대해 여러 유익한 이야기를 전해들을 수 있었다. 송재소 선생은 한훤당의 벗이었던 추강 남효온이 <사우록(師友錄)>에서 기록으로 남긴 한훤당과 점필재의 결별 사건을 소개해 주었다.
“점필재가 이조참판이 되었으나 조정에 건의하는 일이 없자 김굉필이 시를 지어 올렸다. ‘도(道)란 겨울에 갖옷을 입고 여름에는 얼음을 마시는 것입니다. 날이 개면 나다니고 장마 지면 멈추는 것을 어찌 완전히 잘할 수야 있겠습니까? 난초도 세속을 따르면 마침내 변하고 말 것이니, 소는 밭을 갈고 말은 사람이 타는 것이라 한들 누가 믿겠습니까(誰信牛耕馬可乘)?’
이에 점필재 선생은 그 운(韻)을 따라 화답하기를‘분수 밖에 벼슬이 높은 지위에 이르렀건만, 임금을 바르게 하고 세속을 구제하는 일이야 내가 어떻게 해낼 수 있으랴. 후배들이 못났다고 조롱하는 것 받아들일 수 있으나 권세에 구구하게 편승하고 싶지는 않다네(勢利區區不足乘).’라고 하였으니, 이것은 점필재가 한훤당을 덜 좋게 생각한 것이다. 이로부터 점필재와 갈라졌다(貳於畢齋).”
송재소 선생은 이 결별 사건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예부터 여러 견해가 있었다고 했다. 기본적으로 한훤당은 철저히 도학으로 나아갈 수 있었지만, 점필재는 사정이 좀 달랐다는 것이다. 점필재는 사림파의 힘을 키워야 하는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싫어도 훈구파 한명회의 압구정에 붙인 찬시도 지을 수밖에 없었던 사정이 있었던 것이다.
한훤당의 눈에는 이것이 거슬려 이런 시를 지어 비판하고, 종국에는 갈라서게 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두 분이 갈라섰다는 ‘이어필재’에 대해서는 퇴계와 남명 같은 이들이 나름대로 해석한 것이 있으니 나에게 도동서원 답사기에서는 독자들에게 거기까지 소개해주면 좋을 것 같다고 권유하셨다.
송재소 선생의 권유대로 이 문제에 대해 조사해보니 후대 학자들이 이 문제를 본 요체는 스승과 갈라선 한훤당의 처신을 어떻게 볼 것인지에 있었다. 사실 한훤당이 스승과 결별했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충격적인 윤리적 배반이다. 그가 그렇게 열심히 읽었다는 <소학>의 윤리강령에 ‘융사’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 점에서 한훤당은 비판받아 마땅하다. 그런데 퇴계와 남명까지 나서서 그를 두둔했다. 퇴계는 학문상의 이유로 갈라설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스승과 제자 사이라 할지라도 지향하는 바가 조금이라도 다르면 갈라질 수 있는 것이다. 점필재 선생은… 그 뜻이 항상 문장을 위주로 하였으며, 학문을 강구하는 면에 종사한 것은 별로 볼 수가 없다. (그러나) 한훤당은… 마음을 오로지 옛 사람의 의리를 힘써 행한 것은 분명하니… 추강의 말에 심히 놀라거나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남명은 학문의 문제가 아니라 처신의 문제로 보면서 한훤당을 지지했다. “점필재의 행동은 뒷세상에 비난받지 않을 수 없었으니 만일 한훤당이 점필재와 갈라지지 않았더라면 또 뒷날의 비난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이것이 실상 선생이 갈라서지 않을 수 없는 처지였다.”
진보라는 이념을 갖고 어려운 시절을 힘겹게 살아본 사람들이라면 이 이야기는 비록 옛날 이야기이지만 그 행간에 서린 의미를 보면 우리 현대사회에서 벌어졌고 지금도 벌어지고 있는 원칙론과 현실론 사이의 괴리, 후배들의 선배에 대한 가혹한 비판의 모습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으로 새겨들을 수 있다. 그래서 송 선생의 이야기가 전개될 때 함께한 답사객 모두는 숙연한 분위기에서 경청했던 것이다.■
유 홍 준 1949년생. 1993년 펴낸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전3권)가 통합 200쇄, 판매량 230만 권을 돌파해 ‘인문서 최초의 밀리언셀러’ 작가로 기록됐다. 서울대 미학과를 졸업하고 1981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서 미술평론으로 당선한 이후 미술평론가로 활동해 왔다. 영남대 교수와 영남대박물관장, 명지대 문화예술대학원장을 거쳐 2004년 9월부터 2008년 2월까지 문화재청장을 역임한 후 현재 명지대 미술사학과 교수로 재직 중.(월간중앙2009년12월호). |
《서흥김씨대종보 제53호(2010년2월14일)》
첫댓글 위 본문에서 제사가 끝난 다음 제문을 태우는 차(次)는
감(坎) 자를 잘못 표기한 것으로 사료되어 바로잡아야 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