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명 국악인인 김성녀교수의 몸 속에도 흐르고 있는 예향 진도 예술혼의 뿌리를 밝혀
진도가 진정한 예향으로 대한민국 문화예술에 직간접적으로 끼친 영향도 지대함을 잘 모르시고
아전인수나 자화자찬으로만 여기는 분들이 많은것 같아 이곳 저곳에 기록으로 나와 있는 글들을 모아봤습니다.
<2004년 10월 1일자 신문에 난 국악인 박옥진씨의 부음소식>
여성 국악인 박옥진씨가 9월 30일 오후 11시20분 지병인 간암으로 별세했다. 향년 70세.
박씨는 1934년 전남 진도에서 명창 박동준씨의 2녀로 태어나 판소리를 배웠다.
14세에 조선성악연구회에 입단한 후 아성창극단, 김연수창극단, 임춘앵국극단 등에서 활동했다.
그는 50∼60년대 언니 박보아씨와 함께 여성 국극의 명인으로 큰 인기를 모았다.
56년 언니와 함께 삼성국극단을 창단, ‘원술랑’ ‘구슬 공주’ ‘견우와 직녀’ 등을 무대에 올려 여성 국극 붐을 일으키기도 했다.
99년 작고한 남편 김향씨는 삼성국극단의 기획자 겸 연출가였다.
57년에는 김향씨가 감독한 영화 ‘대춘향전’에서 춘향 역을 맡기도 했다. 그는 ‘육자배기’ ‘흥타령’ ‘개고리타령’ 등
남도잡가의 명창으로도 명성을 누렸다.
유족으로는 국악인 김성녀씨를 비롯해 성일 성애 성희 성자 성아씨 등 1남5녀가 있다.
자녀들 모두 예술가의 피를 나눠 가졌다.
고인은 92년 장한 예술가의 어머니상을 수상했다.
<신문에 난 김성녀씨 집안 이야기>
김성녀씨의 친정식구들은 예술의 피를 나눠 태어났다.
부친 김향씨(1999년 79세로 작고)는 여성국극단체 ‘삼성’의 기획자 겸 연출가였고,
모친 박옥진씨(70)는 여성국극의 주연배우로 장안의 무대를 휘어잡던 여주인공이었다.
가정에 충실하지 못했던 부친은 57년 국극으로 번 돈을 영화 ‘대춘향전’에 몽땅 투자했다가 실패하면서
집안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6남매를 부양하던 어머니가 68년 쓰러지자 연극무대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던 장녀 김성녀씨는
소녀가장이 되어 어머니와 다섯 동생들을 책임져야 했다.
***김성녀교수의 외할아버지인 박동준씨는 진도의 대표적인 예능집안의 한 맥이다.
박동준의 예술은 박옥진 이후 옥진의 딸 김성녀, 김성애, 김성아로 3대에 걸쳐 이어진다.
박옥진의 건강이 심히 안 좋을 때 진도향토문화회관에서 중앙대학교 창극단을 데려와 공연하던 날
인사를 통해 김성녀 교수는 자신이 진도의 예술혼을 이어받았음을 항상 자랑스럽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또 다른 기록들을 보면
박보아(朴寶娥) - 임회면 송월리(서울문화재 한갑득 처) 전국 순회 국립국악단
박옥진(朴玉珍) - 의신면 송정리 (자 김성녀) 창극
박보아 박옥진의 모친 강삼단은 국악인이 아닌 주부였고 진도군 지산면에서 시집왔다고 한다.
진도에서 활동하던 박동준이 어떤 연고로 서울무대에 진출했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그로인해
두 딸 보아와 옥진이 일제로부터 해방이후까지 서울에 살면서 전국범위로 활동했으며,
대금 명인 *박종기(朴鍾基)가 진도에서 서울로 진출하게 되었다.
여성국극계 자매스타의 언니 박보아는 1921년생으로 16세에 박종기를 따라 서울로갔다.
그녀는 여성국극단인 동일창극단원으로 활동하면서 남편 거문고 명인 한갑득을 만났다.
동생 박옥진은(1935년생) 언니와 함께 여성국극단원으로‘단종과 사육신’의 단종역을 맡아
일약 스타로 명성을 얻었다.
박보아는 1921년 12월 14일(음력) 전라남도 진도군 의신면 송정리에서 부친 박동준과
모친 강삼단 사이의 2남 3녀 중 장녀로 태어났다.
부친 박동준은 사형제 중 장남, 진도 토박이로서 객지 생활을 많이 하였으며
가야금과 <육자배기>를 잘했고 한 집안사람인 *박종기와 함께 방송, 음반 취입 활동도 하였다.
박보아의 부친 박동준은 박보아의 여동생 박옥진이 9~10살 무렵에 환갑을 못 넘기고 작고하였다 한다.
박보아는 16세 때 *박종기를 따라 서울로 상경하여 조선성악연구회에 소속되어
송만갑 문하에서 1년간 판소리 심청가 초입부터 <주과포혜>까지 배웠고
그 후 박종기의 권유에 따라 정정렬에게 1년간 춘향가 중 <이별가>를 사사하였다.
박보아는 조선창극단, 아성창극단, 동일창극단, 햇님달님 등의 창극, 국극 단체 활동을 하였고
나중에는 가족과 함께 삼성여성국극단을 조직하여 이 국극단의 단장으로 활동하다가 40대 때 국악계를 떠났다.
박보아는 아성창극단 시절 20대 때 이 단체의 대표인 박동실한테 심청가를 사사하였다.
그리고 춤은 전황, 이매방한테 익힌 바 있고 악기는 전혀 배운 바가 없다 한다.
박보아는 1960년대 박초월 등과 함께 남도민요 등의 음반을 여러 장 취입한 바 있다.
박보아는 민요를 어디서 누구한테 앉아서 별도로 배운 게 아니고 남하는 거 많이 듣고서
자연히 깨우치게 되었다 한다.
박보아는 16세 때 한갑득과 처음 만나 연애하다가 30대 때 혼인하였고 슬하에 자손은 없다고 하며
현재 박보아는 김포의 조카(남동생 아들) 집에서 살고 있다.
박보아는 예전에 조카딸인 김성녀, 김성애 자매를 거의 도맡아 키웠다 한다.
박보아는 다년간 거문고산조 인간문화재 한갑득의 가락을 익히 들었기 때문에 그 산조를
훤히 알고 있고 지금도 구음으로 그 가락을 다 부르고 있다.
(2001. 3. 11. 11:00~12:30/ 3. 25. 14:00~16:30/ 4. 24. 15:30~16:00. 박보아 증언)
박송희의 증언에 의하면 박보아는 명창 임방울 장례식에서 상여소리를 기가 막히게 잘 메겨
당시 운집한 수많은 인파를 눈물바다로 만들었다고 한다.
(2001. 1. 15. 10:00~10:20. 박송희 증언)
*박종기*
대금산조의 창시자 박종기는 박보아의 조부 박종삼(비국악인)과 사촌간이고
진도 씻김굿 인간문화재 박병천과 박보아는 팔촌간이다.
박병천의 작은할아버지가 되고 박동준의 오촌 당숙이 되는 박종기(1879~1941)는
악선(樂仙신)이라 불리며 신기에 이른 젓대(대금-진도에서는 절대라고 불렀음) 명인으로서
대금산조의 창시자며, 그간에 “아리랑 타령” “아롱 타령”등으로 각기 다른 후렴들과 함께
여러 가지로 전하던 타령들을 <진도 아리랑>으로 정형화시킨 곡을 만드신 분으로도 유명하다.
그리고 박종기는 김대례 인간문화재의 외할아버지 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