덥다. 절기상으로도 소서 때인데, 항간에서는 '인사청문회'가 사람들을 더 뜨겁게 달구고 있다. 새삼 세상사 도처에 온통 배울 점 천지라는 걸 깨닫는다. 우리들 중 누가 자유로울 수 있을까. '손수건으로 연신 얼굴을 닦아내고, 우물쭈물 할 말 못하는 그 분들'과 달리 자신은 확실히 다르게 살아왔노라고 누가 당당하게 말할 수 있을까. 될 수 있으면 많이 가지려하고, 할 수만 있다면 남보다 빨리 높은 자리로 오르려 했던 게 바로 우리들 아니었던가.
이 원인은 무엇일까. 도대체 왜 이렇게 되는 걸까? 사는 방법, 삶을 바라보는 방식이 잘못되어서는 아닐까? '모든 좋은 것에도 끝이 있고, 올라가면 내려올 때가 있다. 그러니 올라가는 게 다가 아니라 어떻게 오르는가가 더 중요하다'는 그 자명한 진리를 왜 잊어버리는 걸까.
사실 이 정도 세상사 이치는 살면서 무수히 배워왔다. 최소한의 윤리만 있어도 가능한 일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번번이 잊어먹고, 곤욕을 치른다. 왜일까?
욕심과 탐욕. 이 둘은 욕망과 비슷한 것 같지만 많이 다르다. 욕심은 분수에 맞지 않게 누리고자 하는 마음이다. 그리고 탐욕은 지나치게 욕망을 탐하는 것이다.
그런데 욕망은 생명체들의 원초적 본능이다. 모든 생명체는 '살아가려고' 이 세상에 왔다. 이 살아가는 행위가 바로 욕망이다. 다만 지나치게 탐하거나, 누리려고 할 때 탐욕과 욕심이 생긴다는 데 문제다.
사실 공부란 세상사 이치를 깨닫는 일이다. 동양철학에서는 음양오행의 원리로 세상을 본다. 세상에 출세하고 싶은 마음이 양기라면 그에 비해 음기 즉 자신의 깊은 내면을 닦으라는 게 음양의 이치다.
그리고 '목·화·토·금·수' 즉 오행의 원리는 순환을 의미한다. 여기서 목(木)이란 생성을 의미하는 것으로 새싹이나 봄의 이미지를 떠올리면 쉽다. 화(火)는 불기운 가득한 여름을 상징한다. 토(土)는 중재와 조화의 기운이고, 금(金)은 추상같은 서리가 내리는 가을을 뜻한다. 그리고 수(水)는 결정체, 씨앗을 지키는 응축된 힘인 겨울을 의미한다. 요컨대 태어나고, 성장하고, 늙고 병들어 죽는 것, 이게 모든 생명체의 피할 수 없는 법칙이니, 이 사이클을 숙지하고 있으면 때에 맞게 분수에 맞게 살아갈 수 있다는 얘기다.
쉽게 말해 모든 인생에서 '날마다 봄날'은 결코 없다는 얘기다.
지금 TV 화면에서 '삐질삐질 땀을 흘리며 옹색한 답변을 하는 분들'은 하나같이 한때 공부깨나 하던 분들이었을 것이다. 다음은 연암 박지원이 아들에게 당부한 공부법이다.
"학문이란 별다른 게 아니다. 한 가지를 하더라도 분명하게 하고, 집을 한 채 짓더라도 제대로 지으며, 그릇을 하나 만들더라도 규모 있게 만들고, 물건을 하나 감식하더라도 식견을 갖추는 것, 이것이 모두 학문의 일단이다." (박종채 '나의 아버지 박지원')
헌데 근대에 들어서 우리는 이런 공부를 잊어버렸다. 과정은 무시한 채 결과가 좋으면 그만이라는 의식이 팽배해져 버린 탓이다. 이러다보니 공부를 잘하는 사람과 제대로 살아가는 사람이 결코 같지 않아져 버렸다. 아! 앎과 삶이 결코 다르지 않다는 건, 동서고금의 지고한 스승들의 가르침이건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