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인간 646호 포덕145(2004)년 6월
영해 교조신원운동 이야기(하)
표영삼__ 서울교구·선도사
밤 9시에 읍성 공격
별무사(소대장)들은
푸른색 반소매 덧저고리에 허리띠를 둘렀고
일반 도인들은 각각 유건을 썼다.
평풍(병풍)바위에 모였던 이들 동학도 5백 명은
저녁 7시 반경에 출동하였다.
우정골로 내려가는 골짜기는 비좁고 험하였다.
우정골 신주막에 도착하자 준비해 둔 죽창을 하나씩 거머쥐었다.
조총과 환도로 무장한 이도 각각 3명씩이나 있었다.
여기서 20리를 달려간 동학도는
영해부성에 이르자 서문과 남문 앞으로 나누어 포진했다.
저녁 9시 반경이었다.
이윽고 성문이 열렸고 두 사람이 나타났다.
모두 잠들었으니 마음놓고 들어 오라 하였다.
공격 명령이 떨어지자 횃불을 켜들고 함성을 지르며 밀고 들어갔다.
성중을 지키는 포수는
수교(首校) 윤석중(尹錫中)과 한 명의 포수뿐이었다.
왜적들의 출몰을 막기 위해 정부는
지난해에 20명의 포교를 특선하여 급료를 주어 관아를 지키게 하였다.
그런데 포수들은 이날 모두 집으로 돌아갔다.
몇 명을 불러다 당번을 세웠다.
그 중 3명은 서쪽 지역에 수상한 사람들이 나타났다는 보고를 받고
탐색에 나갔고 결국 2명만이 성을 지키게 되었다.
교졸은 얼떨결에 발포하였다.
앞장섰던 이필제는 뜻밖에 포성에 놀라 성밖으로 물러났다.
정신을 차린 교졸은
그 사이에 작청(作廳) 아래에 엎드려 사격할 준비를 갖추었다.
곧 다시 쳐들어오자 3차례 발포하였다.
앞장섰던 선봉장인 박동혁이 즉사했고
뒤따르던 강사원도 옆구리에 총을 맞았다.
강사원은 즉각 “여기 포수가 있다. 저놈을 잡으라.”고 소리쳤다.
2명의 교졸은 놀라 담장을 타고 넘어 달아났다.
『신미영해부적변문축(辛未寧海府賊變文軸』에는
“선봉장은
경주 북면에 사는 박동혁(朴東赫)이었으나 총에 맞아 죽게 되자
영덕에 사는 강수(姜洙)가 중군(中軍)을 맡아 선봉에 나섰다.”고 했다.
별무사인 “김창덕(金昌德), 정창학(鄭昌鶴), 한상엽(韓相燁) 등은
분대를 거느리고 따랐으며
김천석(金千石), 이기수(李基秀), 남기진(南基鎭) 등은
서로 다투어 군기를 탈취하였다.
그리고 신화범(申和範)은 동헌으로 들어가 문을 부수었고
권석두(權石斗)는 포청으로 달려가 동정을 살폈다.”고 했다.
반시간도 못되어 영해관아는 동학도에 의해 완전히 장악되고 말았다.
부사 이정을 치죄
동학도는 동헌에 이르러 사면에 둘려 있는 담장 이엉에 불을 질렀다.
삽시간에 동헌은 불길에 휩싸였고
성밖 주민들은 화광이 치솟고 포성이 울리자 겁에 질려 버렸다.
『나암수록』에는
“부성으로 쳐들어오자 부사는 당황하여
뙤창문 구멍으로 도망치려다 잡혀서 해를 입었다.”고 하였다.
동헌으로 들어간 동학도는 부사 이정을 잡아 앞뜰에 꿇어앉혔다.
부사의 자제들도 결박해 유치(留置)하였다.
이필제는 김낙균, 강사원과 같이 대청에 올랐다.
그리고 인부(印符)를 빼앗아 강사원에게 넘겨주고
꿇어 앉힌 이정 부사를 치죄하였다.
“너는 나라의 녹을 먹는 신하로서 정사를 잘못하여 세상을 어지럽혔다.
백성을 학대하고 재물을 탐하기가 저와 같았으니
네거리에 방이 나붙게 되었고 시중에는 원성이 높아지게 되었다.
이것이 읍내의 실정이니 네 죄가 어디 가겠는가.
용서하려 하지만 탐관오리인 부사는 의살(義殺)해 마땅하다.”고 꾸짖었다.
『나암수록』에는
“이정이 영해읍을 다스릴 때 비할 데 없이 부정하게 재물을 탐했다.
생일에 경내(境內)의 대소민들을 모두 불러다가 잔치를 베풀면서
떡국 한 그릇에 30금씩 거두어 들였다.”고 하였다.
이정 부사는 삼척부사로 재임할 때에도
탐관오리의 악정을 폈다 하며
1870년 봄에 영해부사로 부임하자
전형적인 탐관오리의 행패를 부렸다고 한다.
권영화는
“이제발이 강사원을 시켜 관가를 잡아다 항서를 받으려하였다.”고 했다.
이정 부사는 죽기로 굴하지 않고 오히려 꾸짖어댔다.
이제발(이필제)은
서울에 사는 김진균(김낙균)에게 명하여 칼로 찔러 죽였다.
『고종실록』에 보면
”인부(印符)를 굳게 지키며 의로 항거하다 변을 당한 것”을 높이 사서
그에게 이조판서 벼슬을 추서했다고 하였다.
이필제는 날이 밝자 읍민을 달래기 위해
관아에 있던 공전 150냥을 털어 5개 동민에게 나누어주었다.
길 아래 유위택(柳渭澤), 허문(墟門)의 신석훈(申石勳),
길 동쪽 원기주(元基周),
길 위의 임개이(林介伊),
성안의 김성근(金性根) 등 주민대표들을 불러다 20냥씩 나눠주었다.
『나암수록』에는
“술 3동이를 사다가 군사를 먹이고 훈유했다.”고 하였다.
이필제는 동민에게
“이번 거사는 탐학무비한 부사의 죄를 성토하자는 데 있으며
백성들을 상하게 하지 않을 것이니 너희들은 걱정 말라.”고 하였다.
11일 아침이 밝아오자 이필제는
돌연 영덕군 관아를 공격하자고 제안하였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날이 이미 밝았으며
50리나 떨어져 있어 상당한 시간이 걸리며
이곳 소식을 듣고 대비하고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
동학도들은 당초부터 다른 군·현을 공격할 계획이 없었다.
『교남공적』 박영수 문초에
“형님(박영관)이 무리들을 이끌고 우리 집을 지나갈 때
나에게 말하기를
내일 영해읍을 떠나 태백산 황지(潢池)로 가려 하니
너는 식구를 거느리고 따라오라.”고 하였다.
거사 전에 이미 영해읍성만 점령한 다음 철수하기로 약속되어 있었다.
영양 교졸 윗대치 공격
해월신사는 읍성 공격에 참가하지 않았다.
평풍(병풍)바위에서 천제를 지낸 다음 곧바로 용화동 윗대치로 돌아왔다.
읍성을 공격한 후 윗대치에 모이기로 약속하였으므로
이들이 숙식을 준비하기 위해 미리 돌아온 것이다.
이필제·정치겸·박영관 등 약 50명은 인아리(仁雅里) 쪽으로 철수하여
해월이 기다리는 용화동 윗대치로 향하였다.
『신미아변시일기』에는
흩어진 적들은 서협(西峽) 인아리와 남면 웅곡(熊谷)과
북면 백석(白石洞, 흰돌)으로 갔다 하였다.
인아리로 접어들은 동학도들은 몇 개의 무리로 나뉘어
해발 650m의 쉼섬재와 옷재(오령), 허릿재(屹里嶺) 등을 넘어
영양 수비면 기산(岐山) 쪽으로 갔다.
이필제와 정치겸은 교를 타고 무리들과 같이 인천까지 들어갔다.
여기서 일박하고 12일에는 보림동까지 들어갔다.
저녁 때부터 비바람이 세차게 불기 시작하더니
13일에는 폭우가 쏟아졌다.
『신미아변시일기』에는
“13일에 종일 큰 비바람이 불어 모래를 일으키고
돌을 날릴 정도여서
길가는 사람이 없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관군이 온다는 소문을 듣자 이필제 일행은
13일 오후에 비바람을 무릅쓰고 옷재(烏嶺)를 넘었다.
영양군 수비(首比)로 넘어오자
동민들의 눈초리가 영해지역과는 달랐다.
처음에는 겁에 질려 피하는 눈치였으나
관군이 출동했다는 소식이 들리자
용기를 얻어 동학도들을 잡기 시작하였다.
이곳을 빠져 나온 일부 동학도는
14일 저녁 때가 되어서야 겨우 윗대치에 도착하였다.
가족까지 합쳐 겨우 40명에 지나지 않았다.
15일에는 천제를 지낼 예정이었다.
『신미아변시일기』에는
“적도들이 인부(印符)를 장대 끝에 매달아 단상에 꽂아 놓고
천제를 막 올리려던 참이었다”고 하였다.
한편 정부는 이 소식을 접하자
14일자로 흥해군수 김홍관(金弘灌)을
영해부에 겸관으로 임명하는 한편
영덕현령 정중우(鄭仲愚)로 하여금
영해부에 병력을 출동시키게 했다.
그리고
인근의 연일(延日), 장기(長髮), 청하(淸河) 세 고을의 현감도 출동시켰다.
16일에는 안동진영과 경주진영에서도 병력을 이끌고 왔다.
『영해부적변문축』에는
경주진영 영장은 별포(別砲)와 이교 120여 명을,
장기 현감은 별포 및 이교 110여 명을 이끌고
당일(15일) 당도하였다고 하였다.
또한 안동진영에서도 상당수의 병력을 보내왔다고 하였다.
한편 안동진영의 명령을 받은 영양(英陽) 현감 서중보(徐中輔)는
15일 아침에 별포를 이끌고
동학도가 모여 있다는 일월산 윗대치로 출동하였다.
『영해부적변문축』에는
“영양현감이 … 교졸과 포수들을 이끌고 용화동에 도착하여
곧 발포케하여 13명을 포살(砲殺)하였고
10여 명과 여자 수십 명(가족)을 사로잡았으나 괴수들은 도망쳤으며
적도가 모여 있던 곳에서 분실했던
영해부 병부(兵符)와 관인을 찾았다.”고 하였다.
『최선생문집도원기서』에는
“영양현감이 포군을 이끌고 와서 포위 공격하니
사태가 급하여 각자가 흩어져 도망하였다.”고 하였다.
그리고 해월신사는 이필제, 강수, 전성문을 대동하고
용화동에서 탈출, 대치(竹峴)를 넘어 봉화로 피신하였다.
주동자를 놓쳐버린 관군은
일월산에 숨어들었으리라 믿고 연일 샅샅이 뒤지게 하였다.
영양의 산골은 원래 험한 곳으로 이름이 나 있었다.
순영은 각 고을에서 병력을 차출하여 일월산 쪽으로 파견하였다.
안동진영에 국청
정부는 16일에 비로소 영해부사에 이정필(李正弼)을,
영해부 안핵사에 안동부사 박제관(朴齊寬)을,
영덕현감에 한치림(韓致林)을 임명하여 현지에 급파하였다.
새로 임명된 영해부시와 영덕현감은
7일 만인 3월 22일에야 현지에 부임하였다.
『신미아변시일기』에는
“이날 밤 초경에 신관이 말을 타고 왔으며 성명은 이정필(李正弼)이다.
… 새로 임명된 영덕현감도 같이 왔다.
… 겸관(흥해군수)은 이날 돌아갔으며
본 군에서 정사를 본지 8일 만이다.”라고 하였다.
영해부 안핵사로 임명된 안동부사 박재관은
3월 21일경에 안동진영에 국청(鞠廳)을 설치했다.
그리고 22일에는 각 고을의 동학 죄수들을
안동으로 이송하라고 명을 내렸다.
3월 24일부터 가혹한 심문이 시작되었다.
연류자가 새로 드러날 때마다
군 현에 명령을 내려 계속 체포하도록 하였다.
5월 2일 현재 영해, 청하, 평해, 영양, 영덕, 청송, 경주, 밀양,
울진, 삼척, 전라도 남원 등지에서 체포된 동학도는
모두 93명에 이르렀다.
5월 초순께 안핵사는 안동진 옥사가 비좁아
여러 군·현에 죄인들을 분산하였다.
대구, 청도, 성주, 고령, 태곡, 경주 등지의 감옥으로 나누어 보냈으며
죄가 가벼운 23명은 해당 군·현에서 처분하도록 위임해 버렸다.
각 군·현별로 이송 수감된 인원을 보면
대구부 48명, 청도군 7명, 고령현 6명. 성주목 4명, 칠곡부 8명,
경주진 1명. 각해읍 환수자 23명이다.
6월 중순경에 일단 심문은 종결되었으며
정부는 6월 24일에 형량을 정하였다.
심문 중에 물고(物故)된 이는 12명이었으며,
형을 받고 효수된 이가 32명,
엄형 3차 후 원악도 정배간 이가 2명,
엄형 2차 후 절도(絶島)로 정배간 이가 5명,
엄형 1차후 원지(遠地)에 정배간 이가 14명이었다.
그리고 29명은
경상감사에게 위임하여 경중을 가려 처리토록 하였으며
나머지 15명은 방면하였다.
자진자와 물고자 그리고 참형되어 목숨을 잃은 분이 45명이다.
결론
영해부성 습격 후 영해, 평해, 울진. 진보, 삼척지역과
남쪽의 영덕, 청하, 영일, 장기, 경주, 울산지역,
서쪽인 안동, 영양, 청송지역에서는 동학도인을 찾아 볼 수 없게 되었다.
『최선생문집도원기서』에 의하면
“이 때에 관문(關文)이 연달아 내려와
방백 수령들은 놀래 두려워 할 짬도 없었다.
각 진영과 군·현 포졸들은 연달아 출몰하였다.”고 한다.
수상한 눈치만 보여도 체포되는 상황에서
동학도들은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숨어 살아야 했다.
이번 사태를 정부는 영해적변(寧海賊變)이라 규정하였다.
일반 학계에서는 이필제란으로 규정한다.
동학의 입장에서는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처음 발의 단계에서부터 천제를 올릴 때
그리고 읍성을 공격할 때까지 명분으로 내세웠던 것은
교조신원운동이었다.
다만 읍성을 공격하고 나서
교조신원을 위한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부사를 치죄하는 자리에서도
동민을 위무하는 자리에서도
수운의 죄를 신원하기 위해 일어났다는 의사를 표시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번 거사는
탐학무비한 부사의 죄를 성토하자는 데 있다.”고 하였을 뿐이다.
그렇다고 이필제에 의해 주도된
일반적인 병란으로 규정하기도 어렵다.
해월신사의 동원령에 의해 16개 지역의 접 조직에서
5백명이라는 동학도가 동원되어 이루어낸 운동이다.
그리고 모든 자금이 해월신사로부터 나왔다는 사실도 간과할 수 없다.
이번 운동을 일반적으로
영해병란이라고 이름하든지 이필제난이라 이름하든지
보는 입장에 따라 달리 해석할 여지는 있다.
그러나 동학도의 입장에서 보면
처음부터 교조신원운동을 명분으로 일으킨 운동이고
해월신사가 소요되는 자금을 전담하였다.
이런 점에서 이번 운동은
동학도가 이루어낸 운동이라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비록 이견이 없지 않으나 동학도의 입장에서 보면
교조신원운동이라 아니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