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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무거울 때 (히 12:1-2)
사람이 살다 보면 마음이 무거울 때가 있습니다. 마음이 무겁다는 것은 자신의 잘못은 아니지만 현재의 상황을 생각해 볼 때 일이 잘못되고 있음을 인지하고, 이로 인해 그 일의 해결책을 생각해 내야 하는 점에서 책임감이 느껴진다는 말일니다. 그 책임감이 자신을 짓누르니 무겁다는 느낌을 담고 있습니다. 영어로는 그 일이 자신을 annoying 혹은 pressing 하고 있다고 표현합니다. 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대사전을 보면 무게, 책임, 비중, 분위기, 죄과, 형벌, 소리, 색깔, 움직임, 몸, 마음 등에 사용된다고 합니다. 어쨌든 마음이 유쾌하지 못하고 우울하다는 어감을 줍니다. 또 잘못이나 죄에 비해 그 대가나 형벌이 지나치다는 의미로도 사용됩니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도 무겁다는 표현을 사용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1:28에 보면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무거운 짐 진(πεφορτισμένοι)”이 한 단어로 수동-완료-복수형 분사로 나옵니다. 모든 사람들의 인생 살이의 무게를 나타냄과 동시에 그 책임과 원인을 말하기보다는 그런 상태에 있는 것에 강조점을 둔 말입니다. 또 마태복음 23장 4절에서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가리켜 자신들은 손가락 하나도 움직이지 않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무거운 짐을 어깨에 묶어 지운 자들이라고 합니다. 이때는 “무거운(βαρέα)”이라는 형용사가 사용되었습니다. 이 말은 “매우 고된”이라는 뜻으로 주님의 고난을 연상시키기도 합니다.
또 믿음 장으로 유명한 히브리서 11장 다음의 12장 1절에서는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여기서는 “무거운 것(ὄγκον)”이라는 단수형 명사가 사용됩니다. 그런데 믿음의 사람들은 이를 벗어버리고 인내로써 믿음의 경주를 해야 한다고 권면합니다. 마치 주님이 십자가의 짐을 진 것처럼 말입니다. 또한 이 “무거운 것(ὄγκον)”이라는 말은 방해나 장애물이 되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히브리서 12장 1-2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1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2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1절의 시작어인 “이러므로”는 앞의 믿음 장인 11장에서 모든 믿음의 선진들이 행한 일을 살펴본 결과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릴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11장에 나오는 구름 같이 둘러 싼 허다한 증인들처럼 이러한 고된 인생살이의 무거운 짐을 만나거든 그것에 얽매이거나 괴로워하지 말고 벗어버리고 믿음의 길로 계속 나가라고 합니다. 벗어버리는 길은 인내로 계속 믿음의 경주를 이어가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자신의 잘못과 죄를 바라본다면 이 믿음의 경주는 계속 이어가지 못할 것입니다. 나와는 상관없는 다른 이의 잘못으로 인한 무거운 짐을 바라본다면 그때도 역시 이 믿음의 경주를 계속하지 못할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을 바라본다면 그리고 인내한다면 우리는 이 믿음의 경주를 계속 이어갈 것이고 마침내 우리 역시 우리를 둘러 싼 구름 같이 허다한 증인들 중 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메튜 헨리는 히브리서 12장 1절을 설명하면서 사도가 성도들에게 권면하는 내용을 먼저 잘 관찰하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준비 단계와 완성 단계로 나뉘는데 믿음의 경주를 하기 위한 준비 단계로 이러한 모든 방해물들, 즉 영적인 믿음의 경주를 못하게 하는 세상에 대한 애착과 죄를 벗는 것입니다. 그리고 완성의 단계로 들어가기 위해 성도의 정체성을 확립하도록 말합니다. (주1)
하지만 어떻게 이 세상에 대한 애착을 벗을 수 있습니까? 그 애착은 자신의 부모와 자식,
그리고 형제와 동료들과 관련되어 있기에 벗어 버리기가 무척 힘듭니다. 그들에게 안겨줄 실망감과 그로 인한 불평과 비난을 어떻게 감당하라는 것입니까? 그런 것들을 무조건 믿음의 경주에 방해되는 것으로 정죄한다면 이 믿음의 경주는 가족도 버리고 오직 주만 따라가는 무책임하고 비윤리적인 것이 아닙니까?
이때 필요한 것이 바로 우리의 정체성입니다. 주님은 요한복음 15:18–19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18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19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아쉽지만, 그러나 마땅히 우리는 세상의 것을 사랑해서는 안 됩니다.우리가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므로 세상은 우리를 미워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세상을 미워해서는 안 됩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우리를 미워하는 일이 어떤 일인지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우리는 그들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그들도 깨닫고 이 믿음의 길에 동참하도록 말입니다. 그때까지 우리는 인내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잘 설명해야 합니다. 우리가 그들을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입니다. 또 그들이 우리를 미워하는 것은 그들의 잘못도 아니라고 말함으로써 그들을 이해하고 있음도 그들에게 알려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선택하기에 따라 전혀 새롭고 의미 있는 삶이 있음도 알려주어야 합니다.
사실 이 일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우리에게는 믿음이 있습니다. 그 믿음이란 어떤 내용입니까? 비록 우리의 힘은 연약하고 이 사태를 해결할 능력도 힘도 없지만, 그러나 우리가 기도하고 간구하면 하나님께서 다 해결해 주신다는 것 아닙니까? 그들 역시 자신의 능력을 벗어나는 어려움이 아니라면 왜 우리에게 와서 말하겠습니까? 이런 곤란이 오히려 그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계기가 될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는 다음과 같이 우리를 권면합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도다 (벧전 1:6)
이 말씀처럼 지금의 어려움과 고난으로 인해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 일이 있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1. Verses 1–3
Here observe what is the great duty which the apostle urges upon the Hebrews, and which he so much desires they would comply with, and that is, to lay aside every weight, and the sin that did so easily beset them, and run with patience the race set before them. The duty consists of two parts, the one preparatory, the other perfective.
- Matthew Henry, Matthew Henry’s Commentary on the Whole Bible: Complete and Unabridged in One Volume, (Peabody: Hendrickson, 1994), 히 12: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