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자 준비한 암송으로 수업을 시작 했다. 암송할 구절이 많은 책. 한마디로 조르바 어록...
4학기에 읽을 아함경은-불교의 기본 경전으로 이 책을 이해해야 다른 경전을 이해할 수 있다고 한다.
19~20C초, 이 시대는 동서양의 사상이 무르익었던 시기다. 이시기에 동서양의 구획은 이분법적인 오리엔탈리즘의 시대로 동양은 신비롭지만 열등하게 생각하고, 서양은 진보적이면서 앞서가는 것으로 생각해서 빨리 받아들이는 것이 관건이었다.
문명은 전쟁을 불러 온다. 이성과 문명이 자립하면서 전 세계가 전쟁에 빠졌다. 문명 안에 야만적 파괴와 잔혹함을 경험했다. 그런 반면 다른 쪽에서 사유가 등장한다. 대표적 예로 6.8혁명 등이 있다.
21C는 섞여서 나눌 수가 없다. 우리나라는 200% 서양이다. 아이티 강국으로 다른 나라는 이렇게 까지 뒤집지는 않는다고 한다. 서양이 오히려 더 동양적인 모습도 있다고 ..
우리나라는 역사적 콤플렉스가 없다. 서울 도심 속에 오래된 경복궁 같은 건물이 자리 잡고 있어 그중에 하나만 남겨놓고 10년에 한번 씩 건물이 바뀌고 있다. 역사가 짧은 미국은 건물들의 외관은 그대로 둔 채 속만 고친다고 한다.
국가와 사회 그리고 문명 속에서 살고 있는 우리의 삶을 ‘산다는 것이 말썽이다.’라고 조르바는 말하고 있다. 조르바가 조르바로 될 수 있었던 것은 두목이 그 여정을 밟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자기 정신의 여정이 없으면 조르바를 형상화 할 수 없었다. 정신과 육체가 크로스 되는 지점, 교차가 되어야 한다. 이 지점을 불교라고 이야기 하고 있고. 자유를 의미한다. 영혼, 육체가 공감하는 지점을 알아야 한다. 조르바는 죽고 조르바의 몸이 문자를 통해 자유가 되었다. 두목은 어느 순간 연대기를 쓰면서 조르바의 몸이 이미 언어가 된 것을 알기 시작한다. conceptio: 임신, 언어 진리를 낳다. 예수를 낳다.
몸이면서 진리인 것, 사람의 몸이 곧 진리다. 사람과 사람을 통해서만이 진리가 가능하다. 육체가 말이고 ‘도’다. 삶이 ‘도’이면서 진리다. 말하는 삶이 곧 진리이다. 제도는 절대로 진리를 전달 할 수 없다.
두목과 조르바는 서로 평행선이다. 그러나 서로에게 끌리는 사이였다. 제도는 절대로 진리를 전 할 수 없다. 우파니샤드의 무릎과 무릎사이에서 도가 나온다고 볼 수 있다.
산전수전 풍찬노숙을 겪으면 인생을 알 수 있을까? 육체와 정신 중 어느 것이 우위일까?
추상을 통해 육체를 얻고 육체는 추상을 통해 진리로 도약할 때 ‘개념’ 창출의 출산이 가능하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불임의 시대를 살고 있다. 개념 창출을 하지 않으니 말이다.
삶의 편폭이 큰 세대에 파노라마를 경함한 65세의 조르바는 말이 많아도 너무 많다. 한마디로 식상 작렬이다.
조르바가 가장 먼저 벗어난 것은 무엇인가?
1. 가장 먼저 국가를 벗어난다. 국가를 벗어나지 않고는 자유를 얻을 수 없었다. 자유는 생명의 세계를 탐구할 수 있는데 국가를 통해서는 죽인다. 경험을 많이 했다고 인생을 더 잘 아는 것은 아니다. 자유는 막역한 것이 아니다.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탐구해야 한다.
상처를 되씹는 것 자체가 어린애다.
2. 결혼, 가족에서 벗어난다. 관계가 나의 행복을 주는 가가 문제지 사람에 꽂히는 것은 불행이다. 사랑은 신체를 움직이게 한다. ‘추워서 결혼했다’ 진짜 리얼하다. 따뜻함.. 얼어 죽지 않기 위해 결혼한다. 배치나 관계 안에서 삶을 볼 수 있었던 조르바였다. 즉 육화된다는 것 내 언어에 육화를 부여한다. 대 자유 해탈을 우상화화 하지 말고 육화되서 현장에서 찾아야 한다. 내 언어에 육체를 부여한 것이 조르바다. 조르바를 호색한이라고 하지 않는 이유는 순간 순가 최선을 다하고, 미래를 약속하지도 않는다. 조르바가 갈탄 광에서 산투리 칠 때와 과부와 단 둘이 있을 때 신체적 변환이 참으로 놀랍다. 들레쥬 식 ‘되기’로 봐야 한다.
지금 이 순간 과거 미래에 흔들이지 않는 불교적 진리의 온전한 삶이 나툼이다.
이념과 공적제도에 절대 포획되지 않는 삶이 서사가 된다. 식상 작렬을 보여준다.
삶이 일상과 연동되어 있기 때문에 포르노그라피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삶과 연동되면 성이 낯설지 않다. 성 자체만 우뚝 서면 신경증 강박증이 된다. 여관방 같은 닫힌 공간에서 뭔가를 숨기고자 할 때 성기절단 같은 폭력이 생긴다. 호기심 많은 20대에 서사가 없는 포르노비디오를 볼 때 지겨움이 이런 것이리라.
예전에는 거리나 골목에서 오픈 바디 성의 향연이었다. 변강쇠의 ‘성기타령’도 오픈 되어서 그냥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서사 구성은 시간성의 힘을 갖는다. 시간 축 공간축이 있다. 공간 축은 배열이 입자 적이다. 공간은 분할을 보여주고 정확해서 재미가 없다. 시간 축은 정확도는 떨어지지만 변화를 준다.
귀가 발달한 조르바, 잘 듣고 자기화 하는 식상작렬의 조르바, 목소리도 엄청 좋아서 이야기 할때 도움이 되었으리라. 떠돌이, 일을 사랑하지만 머물러 있지도 않는다. 리더십이 있다. 탄관이 무너지려 할 때 모두 내보내고 마지막까지 탄광의 버팀목을 지킨 조르바. 간섭도 너무 싫어한다. 신체성이 자유의 여정에서 얻은 것이다.
자유를 얻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1. 자기욕망과 정면 대결을 해라.
2. 자기 성찰 능력 깨닫기-자기를 정확하게 보고 타자를 보는 힘을 가져야 한다. 자기도 모르게? 이지점이 충동의 지점
3. 욕망이 보이는 순간 단칼에 끈어 내는 힘
4. 하다가 죽을 때 까지 해봐라. 두목이 책을 토할 때 까지 읽어 본다는...
두목은 조르바의 영향을 받지만 자신의 길을 포기 하지 않았다. 항상 어설픈 것이 문제다. 소인배다. 대인 배를 질투하는 것도 서사가 질펀하고 웃긴 것 이것이 진정한 식상이다.
경험을 이런 식으로 풀어 줘야 한다. 과묵한 것도 표현의 한 방법이다. 관찰력이 없어서 똑같은 스타일의 번복, 말이 나온다. 보고 듣는 힘이 있어야 자신만의 말이 나온다. 기준점이 같아서 똑같은 말을 한다. 서사가 아닌 반복 유머가 아닌 똑 같은 패턴이 된다. 이런 것을 가족이 가장 먼저 안다. 엄마들의 다음 말이 상상이 가는 것을 보면...
침해는 언어 능력이다. 단어를 잃는다. 단어를 잃으면 대상을 잃는다. 뭐라 명명할 수 있어야 관계형성이 된다. 하나씩 잃어가면서 단어를 잃고 스위치 자체도 없어진다.
언어만이 작동 할 수 있다. 언어로서만 세상과 관계를 맺는다.
언어활동만이 인간적인 것이다. 언어를 언어로 말할 수 없는 언어 밖을 사유하는 것 이것이 언어도단 생명의 세계다. 언어는 감옥이 없다. 언어를 벗어나는 것 불교, 불립문자다. 삶의 창조는 언어를 통해서 가능하다. 읽고 쓰는 것이 가장 인간 적이다. 예전에 여자는 출산이 창조 작업이었고 기르기가 자연에 참여하는 것이었다. 반면 남자는 철학을 잉태하고 보이지 않은 가치 창조에 매진했다. 철학자 남자들 개념을 낳는다는 것이 concepio와 같다.
창조 말을 낳는 것이다. 명리학에서 기본 토대는 식상이다. 말의 힘을 식자층이라 생각하는데 그런 것을 깬 것이 조르바다. 서사와 유머를 가미해서 깼다. 유마 힐이다.
욕망을 그대로 인정하면서 그대로 가는 것이 유마경이다. 조르바의 자유로운 신체성이 가능하다. 조르바 자체가 말씀이다.
사회적 조건으로 여성이 만들어 졌다. 이것을 증명하려면 자유의 철학을 연구해야 한다. 남자는 존재 자체가 말썽이다. 양기가 그렇게 움직인다. 가장 높이 오를 수 있는 경지이기도 하다. 지옥에서도 진리를 찾을 수 있다. 지옥을 천당으로 바꿀 수 있어야 한다. 브리콜라주가 되는 것이다. 음기덩어리인 여성성으로도 도달할 수 있다.
현재에는 디지털이 모든 것을 해방 시켜줘서 남성, 여성이 없다. 도약에 거부가 있는 여자 진리에 대한 열정이 왜 여성을 없을까? 왜 사랑 받지 않으면 안 될까? 세계를 창조하는 것 예전에는 애 낳기였지만 지금, 왜 안 될까? 개념 창조는 왜 안할까? 물질이 움직이는 곳에서 여자만 이 가지고 있는 것으로 창조적인데 자유 창조에 왜 여자는 없을까?
남자가 오면 뭘 만들어 내는 힘이 강해서 10년 후 남자강사 가 많을 것으로 예상한다. 버텨내는 힘이 강한 남성인 반면 여성은 질투도 못 견디고 뻗어나가는 힘이 부족하다. 확률적으로 남성이 공부 쪽으로 변하면 선생은 남자가 되고 여자는 그 때도 수강생이 될 것이다. 양기를 집중만 하면 뻗어나가는 힘이 있다. 음기는 맑으면서 가지만 흔들린다. 이것, 저것에 걸려서 가다보면 줄기가 흩어진다.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놓아져서 사회적 억압 장치가 해소된 후에도 여전히 여자는 학생 남자는 남자인 이유는 퍼센테이지로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원초적인 생명에서 작동되는 것이 의식된다. 여자는 돈 벌어서 남자 얻으려고 한다. 싱싱한 신체성을 보여 주는 조르바, 신체가 살아 있는 죠르바다. 영혼 육체의 통찰력이 있다. 선문답이 많다. 삶의 엄청난 지각이 있다. 부처를 인용하지 않으면서 부처의 탐구가 가능했다.
조르바와 두목은 에로스를 뛰어 넘는 우정을 보여 준다. 동양의 ‘도’ 전수 코스는 사람을 통해서 진리를 순례하면서 사람을 만나는데 영성은 가족이나 사랑하는 이에게 돌아가 버린다. 가져다 바친다. 여자는 주는 것 주게 만드는 것 주면서 소유하는 것이다. 이것은 요물과 보살사이라 할 수 있다. 헌신은 진리의 적이다. 순례자는 헌신적 여성을 만나면 끈고 간다. 혁명의 적은 엄마다. 소코라테스, 톨스토이는 악처가 있어서 철학자가 될 수 있었다.
죠르바의 텍스트를 계속 읽고 분석해 보면 진리성을 잃어버린 껍데기만 남은 것을 리얼하게 보여주는 것을 보면 시기적으로 앞서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미미코와 같은 바보는 어디든 있어야 한다. . 바보를 없애고 또라이가 되버렸다. 이는 구경만 하지 않고 뭔가 자기 역할을 했다. 질펀한 이야기는 보는 사람이 꿰는 것이고 그냥 사건들이 있을 뿐이다. 삶에서 서사능력이 떨어지는 것은 성찰이 없어서 수련과 성찰을 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구경하는 것에만 일가견이 나 있다. 주거니 받거니가 되지 않아서 실제 현장에서 능력 일깨 울 시간이 없다. 언어가 위축된다. 언어는 타고난 능력이다. 이야기 잘 하면 인복 식복이 있다. 현대인은 신체적 능력을 규정하고 있어서 침묵한다. 서사를 재구성하는 것은 특별한 능력이 아니다. 언어는 말하고자하는 기본 양이 있다. 언어의 생각이 너무 도구적이라서 문제다. 말하기 읽기 쓰기가 같이 움직여야 한다. 죽음이 오면서 동시적으로 신체가 아는 것 중간에 정보의 연결이 필요하지 않은 말하는 몸이 따로가 아니다. 말이 육화 된 신체 그런 언어로 말하던 시대가 공자 노자, 말과 글 몸이 같은 시대였다. 언어성으로 절대성을 포기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