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쌀과 민주주의
우리 쌀농사의 역사는 오래지만,그것을 본격적으로 재배한 때는 수전농이 보편화되고 수경 이앙농법
기술이 도입된 14세기 고려 말 이후부터다
수전농은 원래 산속의 밭작물이던 벼를 물을 대줄 수 있는 밭인 수전,즉 논에 심고 재배하는 농사법을
말한다
그리고 벼의 이앙농법이란 모를 미리 길러서 정지된 무논에 옮겨 심음으로써 직파농법의 가장 큰
문제였던 제초작업의 노동력을 5분의 1로 줄일 수 있는,제대로 정착만 되면 당시로서는 가히 혁명적인
기술이었다.
이앙농법을 통한 이조 후기의 쌀농사 확대는 쌀농사를 짓는 농민들에게 두가지 측면에서 일정한 여유를
가져다주었다
하나는,쌀 자체의 다산성과 이앙농법이란 생산기술의 결합으로 전통적 밭벼나 수전농에 비해 그 생산량을
배가시킨 물질적 여유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제초노동력의 획기적 절약에 따른 시간적 여유다
공동체의 자급자족이란 관점에서 볼 때 단위면적당 생산량이 가장 높은 쌀농사와 보리 이모작 농사가
없었다면 산지가 7할인 이 좁은 땅에서,또 양반 지배계급의 수탈속에서 우리 민중이 이만큼 종족을
퍼트리며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단위면적당 쌀만큼 많은 열량을 생산해주는 어떤 대체 작목이 나오지
않는 한, 앞으로도 쌀은 과거와 같은 기능을 계속할 것이다.
현대의 기술혁신이 새로운 기계를 출현시켜 사람을 반민주적인 자본과 기술에 예속시켜 가는 것과 달리
쌀농사에서의 이앙농법 기술혁신은 오히려 자치민주화를 돕는 민중적 지혜이기도 했다.
쌀의 수경 이앙농법은 우리 지역의 기후 특성상 벼와 함께 엄청난 기세로 무성하게 자라는 잡초제거
인력을 5분의 1로 절감시킨 대신,벼 이앙이라는 결코 적지도 않고 매우 집약적이며 강도 높은 노동을
필요로 한다.특히 당시로서는 쌀과 함께 보리 이모작이 필수였던 남부지방의 경우,6월 10일 전후의
보리 수확 뒤부터 벼 이앙시한인 6월 말까지의 모내기 기한은 불과 20일밖에 안된다.
이 짧은 기간에 무논갈이와 그 정지하는 일만도 벅찬데,씨만 뿌리면 되는 직파보다 훨씬 복잡하고
많은 모심기 노동은 결코 만만한 일일 수 없다.
쌀 이앙농법은 14세기 이전에 도입된 이후 적어도 3백년 이상이나 당국의 금지대상이었다.
지배계급이 금지하는 농사를 농민들이 반대를 무릅쓰고 확대‘정착시켜 가자면 그에 따른 모든 책임도
농민 자신의 몫이 될 수밖에 없다.이앙농법의 획기적인 제초노동력 절약 대신에 이에 따르는 강도 높은
집약노동을 해소하는 것도,가뭄에 대한 위험부담이 그 어떤 농사보다 크기에 물 부족으로 인한 흉년에
대한 책임도 농민 자신의 몫이었다.바로 이런 이앙농법에 따른 위험성에 대한 대응이 마을두레로
나타난 것이다.마을 두레는 마을 단위의 협동 생산을 위한 마을의례와 농사관리권 등을 마을 공동으로
관장하는 마을 단위 자치민주주의였던 것이다.
-보신 유기농주의의 극복
유기농을 왜 하느냐고 물으면 땅 살리고, 물 살리고, 밥상 살리고, 생명 살리기 위해서나른 상투적인
대답을 듣는다.과연 지금의 유기농이 생명을 제대로 살려내고 있는가? 그 답변을 제대로 듣기 위해서는
현재의 유기농의 생산수단과 방식을 먼저 따져보지 않으면 안된다.
사람들은 보통 비료와 농약을 안 쓰고 짓는 농사를 모두 유기농이라고 한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충분한 규정은 아니다.유기농이 온전한 유기농이 되기 위해서는 그 생산수단을 외부에 전혀 의존하지
않아야 하고 생산방식 또한 유기농 생산주체 단위로 완전히 유기적이고 순환적이어야 한다.
비료와 농약이 반유기농적인 것은 비료와 농약을 생산하는 다국적기업에 농민을 철저하게 의존시킬 뿐
아니라 비료와 농약이란 화학물질이 땅과 그 위의 모든 생명의 유기적 순환을 차단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의 유기농은 비료를 안 쓰는 대신 많은 양의 외부의존 퇴비를 쓴다.유기농의 기본조건이
외부에 의존을 안 하는 것이라고 했는데, 현행 유기농의 퇴비는 자기 농토에서 순환하는 자급 유기물퇴비가 아니고 거의 외부 퇴비다.그것도 100% 수입곡물사료에 의존하는 반지속적‘반생태적인 대표 산업 중의
하나인 축산업의 부산물이다.이런 반생태적이고 반인륜적인 축산업에 대해 고민하고 극복하려 하지않고,
오히려 그것에 바탕을 둠으로써 그것을 정당화하는 농업을 유기농이라 할 수 있는가?
고민을 통한 극복은 커녕 이런 반생태적‘반지속적 퇴비 사용의 유기농 자체가 이미 반성과 비판의 여지
없는 관행농으로 굳었다.
지금의 유기농이 안고 있는 또 하나의 문제는,화학농약을 안 쓰는 대신에 생물농약과 영양제 등 지나치게
많은 대체에너지를 투입하는 것이다.농약 안 친 포도나 사과를 먹기 위해 가난한 나라 사람들의 피땀이고
생명 자체인 설탕으로 만든 갖가지 효소를 뿌리고 무슨 엑기tm와 목초액,막걸리와 식초를 뿌린다.
생산자에게는 이익이 되고 소비자의 기호는 만족시켜 주는지 몰라도, 생태계와 에너지 투입의 관점에서
보면,그것은 그야말로 밥 팔아 똥 사먹는 짓이고 완전히 밑지는 장사다.
다시말해,그렇게 많은 생물에너지를 투입하여 과일을 먹는 것보다 설탕효소, 막걸리,식초를 그대로 먹는 것이 훨씬 생태적이고 경제적이라는 것이다
현행의 유기농에서 가장 심각한 문제는 비닐 사용이다
쌀‘보리’밀 농사말고 거의 모든 유기농 농사에도 관행농과 똑같이 비닐을 쓰고 있다.
오히려 유기농에서 그것이 더 확대되고 있는데도 아무도 이 문제에 대해 고민하지도 않고 문제 삼지도
않는다
비닐을 안 쓰는 쌀농사도 오리나 우렁이에게 제초를 의존하는 한 제대로 된 유기농,지속가능한 생태농이
될 수 없기는 마찬가지다.오리나 열대산 수입 우렁이에 의존하는 쌀농사는 비닐이나 농약과 비료에 의존하는 농사처럼 화학적 오염 문제는 제기하지 않을 지 모른다.
그러나 7월부터 9월까지의 두달 남짓한 제초기간을 위해 9개월이 넘게 다국적기업의 수입사료로 오리와
우렁이를 양식해야하는 사료낭비와 외부의존 문제,그 농법이 전국화되었을 경우 야기될 수 있는 생태계 문제 등도 고려하고 대처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가장 생태적이고 공생적인 제초방식은 사람의 손으로 하는 노동집약적 제초법이다.
하지만 이런 생태적인 제초방법을 실행하자면 지금의 농촌 노동력으로서는 도저히 불가능하다
더 많은 사람들이, 특히 젊은이들이 농촌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래서 지금 당면한 운동은 도시에서 가짜 유기농 장사나 하는 생협운동이 아니라 지속가능한 생태농 공동체를 꾸려내기 위한 귀농운동이다.
-쌀도 화경작물이었다
평지 근방에 살면서도 원시농경은 왜 평지 아닌 화전,즉 구릉지에서 먼저 시작했을까? 그 첫째 이유는
구석기시대까지 산림에서 살면서 불탄 산지에서 돋아난 열매를 먹어본 학습효과 때문일 것으로 추정된다
두 번째는 원시농경이 철저하게 천수에 의존하는 밭농사로 시작되었기 때문일 것이다.밭작물은 가뭄피해도 많이 입지만 그보다는 습해에 더 취약하다.아무리 심한 가뭄에도 씨종자는 살아남지만 계속되는 긴 장마에는 무성한 잡초 속에서 작물이 모두 녹아 씨종자도 건지지 못했던 전통농민들의 일상경험이 이런 추정을 가능하게 한다.
무엇보다 농경사 1만년의 대부분 동안에 구릉지 화경농을 계속한 가장 큰 이유는 틀림없이 잡초 때문이었을 것이다. 지금과 달리 제초제는 물론 쓸 만한 농기구가 없던 옛날에는 농사에서 가장 힘들고 어려운 일이
김매기였다. 단 한번의 제초제 투입으로 잡초 문제를 해결하는 관행농은 물론,심지어 유기농조차 오리나
우렁이로 대신하는 요즘과는 달리 전통시대에는 하늘의 순조로운 비와 함께, 아니 비보다 이 잡초를
제 때 매느냐 못 매느냐에 농사의 성패가 달렸다.
농경에서 가장 편한 잡초 대책은 말할 필요없이 애초부터 잡초를 안나게 하거나 적게 나게 하는 것이다
화경은 불로써 나무와 잡초 그리고 그 씨앗까지 태우는 농법이다.물론 낮은 평지에도 불태울 땔감은 많다
하지만 낮은 평지의 땔감이 주로 화력이 낮은 풀과 관목류인데 견주어 구릉지나 산지는 그보다 땔감이
주로 화력이 훨씬 높은 키 크고 울창한 수목으로 덮여 있다. 어느 쪽이 잡초씨앗을 태워 풀이 나지 않게
하고 동시에 재거름을 많이 만드는 데 효과적이겠는가?
전통농법에서의 두 번째 잡초 대책은 손이나 연장으로 풀을 매어주는 것이다
잡초는 잡초이기 때문에 작물보다 습기에 강한 것도 많다. 주로 찰땅인 낮은 평지는 배수 양호한 산지의
마사토보다 풀이 훨씬 많이 나고 당연히 그것을 제거하는데 훨씬 많은 일손이 들어간다
보통 장마기간이 한달 이상인 우리땅에서는 그 사이에 잡초가 이미 작물을 제압해버려 제초가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무의미해진다
강력제초제가 지천인 오늘날에도 심한 장마에 밭을 묵히는 경우가 없지 않다
세 번째는 시비 때문이다.인위적인 퇴비 생산의 필요성을 아진 경험 못한 고대인들의 화전시절에는 수목을
불태워서 경지를 얻는 것과 동시에 그 수목의 재를 유일한 시비원으로 삼은 것이다.
주로 수분으로 구성된 평지의 잡초보다 산지의 울창한 산림은 탈 때 나는 고열로 풀씨를 죽이는 데
유리할 뿐만 아니라 재거름을 많이 얻는 데에도 훨씬 유리했던 것이다
-화경농법의 한계
그러나 화경에는 이런 이점만 있는 것이 아니고 문제점이 더 많다.불은 잡초 씨앗만 태우는 것이 아니고
그와 함께 미생물과 유기물도 태워 오히려 땅을 더 척박하게 만든다.화경을 통한 잡초의 억제효과도
당년이나 그 다음해 정도까지 가지 오래 가는 것은 아니다.잡초 특유의 왕성한 전파력과 바람이나 빗물
등에 실려온 잡초씨로 화경지는 곧바로 풀밭이 된다
수목을 태운 재의 시비효과 역시 수목을 썩힌 유기물 퇴비와는 비교가 안되게 단기적이고 또
비효율적이다.산더미처럼 쌓인 수목도 불태우면 그야말로 한줌밖에 안되는 재만 남는다.모든 유기질
퇴비 성분은 모두 타서 공기 중에 다 날려보내고 남은 것은 한줌의 재,곧 비료 성분 중의 칼륨 성분만
조금 남는다.재거름은 칼륨 성분과 땅 속에 이미 있는 거름 성분을 빨리 흡수시키는 역할 외에
다른 거름 성분은 거의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전통농의 경종법에는 어떤 것이 있었나
조선 세종 때인 1429년에 나온 우리나라 최초의 농서인 [농사직설]에는 벼를 비롯한 여러 가지
작물의 경종법이 실려 있다.경종법이란 땅을 갈아 다듬는 방법과 씨앗을 뿌리는 방법을 아우르는
말이다.
경작지의 제도법에는 전경과 골지르기,곰배질과 써레질,이랑짓기,골짓기 등이 있다.
전경은 땅바닥 전체를 모두갈이 하는 방법이다.골지르기 또는 골타기는 전경한 땅의 굵은 흙덩이를
대충 부수어 주기 위해 다시 일정한 간격을 두어 가는 것과 일손이 달릴 때 일을 줄이기 위해
경작지의 이랑에만 골을 타서 보리씨 등을 파종하는 방법을 말한다.이밖에도 작물이 자랄 때
제초를 좀더 쉽게 하기 위해 작물의 밭골을 쟁기로 갈아주는 것과 사이파종(간종)을 할 때 작물의
사이를 쟁기로 한번 가는 것도 골타기라 한다.
곰배질은 자루가 긴 나무매로 거친 흙덩이를 부수거나 때로는 씨앗을 땅에 묻기 위해 흙덩이를
쳐주는 일이다.써레질도 곰배질과 같이 일차적으로 무논이나 마른 밭의 흙덩이르 부수고 풀어주기
위해서도 하지만,때로는 땅을 고르고 파종한 씨앗을 묻어주기 위한 것도 있다
이랑짓기를 하기 위해서는 일단 모두갈이(전경)를 한 뒤에 흙덩이가 있으면 곰배질로 다스려보고
그래도 흙덩이가 많으면 써레질 등 다른 방법을 동원해서 흙을 부드럽고 평탄하게 만든다.
흙이 부드러워지면서 이것을 다시 쟁기로 갈아 밭이랑과 밭골을 만든다.이랑짓기도 씨앗의 파종
방법이나 곡식의 성질과 종류에 따라 여러 가지가 있다. 한자 정도의 이랑과 4치 내외의 놀골(밭골)
이 일정한 간격으로 되풀이되는 이랑짓기가 보통이지만,때로는 한자 정도의 밭골(놀골)이 서너자
정도의 넓은 이랑도 있다.골짓기도 이랑짓기와 같은 방법으로 한다.
파종법에는 크게 직파와 이앙법이 있고, 벼 파종의 경우 물의 유무에 따른 수파와 건파,파종 모양에
따른 흩어뿌리기(산파,만파),점뿌리기(점파).줄뿌리기(선파) 등으로 나눌 수 있다.직파는 씨앗을 직접
뿌리는 것이고,이앙은 씨앗을 뿌려 가꾼 모종을 옮겨 심는 방법이다.건파는 말 그대로 나른 땅을
갈아 하는 파종이고,수파는 수전의 볍씨 직파 때 하는 방법처럼 물을 대놓고 씨앗을 뿌리는 방법이다
흩어뿌리기는 정지한 경지에다 씨앗을 골고루 흩어뿌려 놓고 땅을 얕게 다시 갈거나 아니면 짚, 풀
등으로 덮어주는 파종법이다.
[농사직설]에는 늦게 파종해도 빨리 익는 조의 재배법이 나와 있는데 그 방법은 이렇다.
먼저 비옥하고 오래 묵은 밭이나 산림을 벌초하여 이를 그 땅에 펴서 말리고 불로 태운다.
불탄 재가 식기 전에 조 씨앗을 흩어뿌려서 쇠스랑 따위로 흙을 일으켜 종자를 묻으면 제초작업이
수월하고 소출도 배가 난다는 내용이다.이것은 나무와 풀을 태우고는 갈지도 않고 이랑과 골도
물론 만들지 않고 그대로 씨앗을 온 밭에 뿌려 쇠스랑으로 묻어주기만 하는 원시적인 화경산파
파종법이다.
이 방법은 아마 농경 시작 이후부터 당시까지 계속하여 온 가장 오래된 고전적 화경농의 파종법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이것은 그 뒤에 발전한 파종법인 점뿌리기,줄(골)뿌리기 등에 밀려 세월이 지날수록
거의 사라진다.그런데 최근에 경운기와 트랙터가 등장한 뒤부터는, 극히 일부밖에 이 땅에 재배되지
않지만 보리나 밀 파종 때 이 산파법이 다시 등장하고 있다.
이 방법은 기술이 미비하고 인구 밀도의 압박이 덜했던 고해사회에서나, 요즘처럼 곡물이 단지 하나의
시장상품으로 그것도 싼값의 상품가치일 때는 가능한 방법일 수 있다. 그러나 곡물이 바로 사람의
목숨값과 같았던 중세 시절로서는 용납하기 어려운 씨앗 낭비일 뿐 아니라,파종이 너무 배거나
드물게 되어서 자칫 실농의 가능성도 있는 파종법임을 곧 알게 되었을 것이다.
이를 극복하는 파종법이 점파법이다. 그러나 이 점파법이 언제 최초로 도입되고 어떤 경로를 통해
오늘과 같은 방식으로 정착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다만 앞에서 인용한 [농사직설]의 올벼 재배법에서
‘2월 상순에 땅을 갈고 3월 상순부터 중순 사이에 또 갈아 이랑을 만들어 족종을 마친 다음,
이랑의 등을 발로 단단하게 한다‘고 했던 것으로 보아 [농사직설]이 나오기 전부터 널리 행해지던
파종법임에 틀림없다.
족종법은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가장 이상적인 점파법이다.그러나 최초의 점파법이 족종법은 아니었을
것이다.처음에는 아마도 이랑을 지어 놓고 그 이랑을 따라 꼬챙이나 나무조각 등으로 일정한 간격의
파종구를 만들어 씨앗을 뿌리고 흙을 묻는 방법으로 시작했을 것이다.그 이랑을 좁게 만들었을 때는
외줄 점파를 했을 것이고,넓은 이랑에서는 그 너비에 맞게 두줄 이상의 점파를 했을 것이다.
점파법은 이런 여러 가지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최근까지 이어져온 족종법으로 정착했을 것이다.
족종법은 ‘발재축치기’라고도 하는데 말로 설명하기는 쉽지 않다.이랑을 따라 오른발 뒤꿈치로 왼발의
앞쪽에다 살짝 감아쳐서 발자국을 깊이 내고 본래 자리로 돌아오면 그 발자국에 손으로 씨앗을 점
찍듯이 서너알 떨어뜨린다. 이 동작에 연이어 왼발로 그 씨앗 뿌린 발자국에 슬쩍 흙을 덮음과 동시에
오른발 쪽으로 감아돌려 또 발자국을 내고 그 자리에 또 씨앗을 떨어뜨리면 다시 오른발로 씨앗을
묻고 왼발 쪽에 재축을 치는 동작을 교대로 되풀이한다.물론 이것은 전통 농민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던
파종법이다.그러나 실제의 행동으로 보여주지 않고 말로 형용하기는 대단히 어렵다.매우 숙달된 족종은
오묘한 경지의 무용행위의 한 부분과도 비슷하다.그 동작이 얼마나 오묘한 예술적 경지였기에
사실적 관찰과 묘사에 능한 실학자 연암 박지원도, 족종법을 ‘거문고 화음에 얹어 부르는 노래’와
‘늙은 거미의 거미줄 치는 모습’에 비유한 말을 인용했을까?
이 발꿈치 파종법은 지금도 나이든 농민들에 의해 콩,팥,녹두,수수,기장,조,밭벼,참깨,들깨 등의
밭농사에서 부분적으로 전승되고 있지만,곧 사라지고 말 유서깊고 아름다운 파종법이다
앞에서 간단히 설명한 논밭 다듬기와 파종법은 실제에서는 작물의 성질과 토질 등에 따라
서로 궁합이 맞는 것끼리 여러 형태로 결합되어 실행된다. [농사직설]의 종도조의 올벼 재배법에는
‘올벼 2분,기장 2분,팥 1분을 섞어 뿌리기도 한다’는 구절이 있다.카리브해의 이스파니오섬을
처음 발견한 콜럼버스도 감탄해 마지않았던 원주민 타이노족의 혼작농법은 타이노족뿐 아니라
지구상의 모든 도착 원주민에게는 보편적인 농법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혼작법의 실제 파종은 어떻게 전개되었을까? [농사직설]의 조와 팥과 참깨의
혼작‘잡파 파종법은 아래와 같다
밭을 한번 갈아 먼저 팥씨를 드물게 흩어뿌린 뒤에 다시 갈아 이랑을 짓는다.이 밭이랑을 따라
발뒤꿈치로 밟아 종자 뿌릴 곳을 만들고 거기에다 참깨와 조를 1대 3의 비율로 섞어서 하종하고
좌우 발을 교대로 움직여서 흙을 덮는다.
[농사직설]에서 족종은 이렇게 파종구와 하종,복토가 각기 나누어져 설명되어 있다.아마도 족종법에
대한 관찰이 부족했거나 그것을 문자로 표현하기가 어려워,그 행위들을 나누어 순차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듯이 묘사했을 것이다.그러나 사실은 앞에서 설명한 대로 파종구 파기와 하종,
그리고 흙덮기가 교묘한 좌우 발의 교차 놀림으로 거의 동시에 진행되는 것이다.
이 파종법에 연이어 조밭의 관리도 설명하고 있다. 모의 성장과 함께 잡초가 생기고 조의 포기가
지나치게 조밀하면 호미로 솎아 매고 흙을 긁어올려 뿌리를 덮어준다.이랑과 이랑 사이의 골에
잡초가 무성하면 입마개를 씌운 소에 쟁기를 채워 그 골을 갈아 제초를 한다.이랑 위에도 풀이 나서
거칠면 쟁기로 간 흙을 뿌리에 덮어 고르게 매준다.
이같은 조 재배를 위한 땅 정지법과 파종법을 곰곰이 따져보면 여러 가지 방식이 섞여있다.
여기에 등장한 땅의 정지법은 전체갈이와 팥 파종 뒤의 이랑짓기,그리고 모종이 자란 뒤의 제초용
골타기와 호미질 등의 네가지가 연이어 이루어진다.파종법도 팥은 흩어뿌리기를 했고,조와 참깨는
이랑을 따라 일종의 줄 및 점뿌리기를 했다.그리고 또 이것을 땅의 정지법에 따라 다시
그 파종법을 분류하면 팥은 골과 이랑을 무시한, 최근의 기계농이 밀‘보리’벼 직파재배 때 하는 것과
같이 흩어뿌리기 즉,만파를 했고,조와 참깨는 이랑 위 파종을 한 것이다.
[농사직설]이 나온 조선조 초기에는 이런 모든 파종법이 혼재 병행된 것 같다.이랑 위의 점파종은
종자를 아끼기 위해서나 장마철에 습해를 입는 저지대에서는 최선의 파종법일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파종시간도 비교적 오래 걸리고 제초관리나 수확량 면에서 별로 효과적인 파종법이
아니다.이에 대한 고민과 대안으로 나온 것 가운데 하나가 사이뿌리기(간종)이다.간종법은 예컨대
보리의 수확기가 가까운 봄에 보리 이랑 사이를 갈아서 골을 지르고 거기다 조‘콩’기장‘녹두’수수‘목화
등의 가을 수확 작물 한두 가지를 심는 방법이다.
농업문화사의 대가 김용섭 교수는 이 간종법을 설명하면서,이것은 얼핏 밭고랑 파종법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밭이랑(두둑) 파종법(묘종법 또는 농종법)이라 하고 있다.그러나 구체적인 설명이나 그 설명
을 보충하기 위해 끌어온 예가 모두 애매모호하다.실제 농사행위를 우리의 농사말도 아닌 한자말로
옮긴 [농사직설] 등의 설명이 제대로 되었을 리 없고, 제대로 되었다 해도 농사 경험 없는 학자가
제대로 이해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간종법이 골파종 아닌 밭이랑 파종법이란 김용섭 교수의
설명은,당시까지 일모작 보리 파종이 이랑 위 파종이고,그 후작인 조나 콩 등 가을 작물의 재배도
이랑 위 파종이기 때문에 간종도 결국 이랑파종으로 봐야 하지 않겠나 하는 추측에 불과하다.
아니면 간종한 작물이 다음에 말할 제초관리에 의해 결과적으로 이랑 위에 파종된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 아닐까?
[농사직설]과 [금양잡록] 등을 증보한 [농가집성]에 사이뿌리기한 조의 관리법이 나오는데,김용섭
교수는 이것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이는 보리밭에 간종한 조가 잦은 비로 인하여 마디가 과도하게 무성하면(보리 수확 뒤에) 소의 입에
망(쇠찌거리)를 씌워 두 이랑 사이를 쟁기로 갈아 그 웃자란 조의 마디를 흙으로 덮어주라는 것인데
두 이랑 사이를 쟁기로 갈아준다는 것은 이랑 위에 조가 파종되어 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간종적인 농지정지에서의 조 파종도 역시 이랑 위 파종이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라 하겠다‘
그러나 이는 간종의 이랑 위 파종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밭고랑 파종을 증명하는
인용이다.보리골 사이를 조나 콩이 심겨지고 그 조와 콩의 이랑 사이를 쟁기로 갈아줄 수
있다고 해서 처음부터 이랑 위에 조나 콩 등이 심겨 있다고 본 것은 잘못이다.보리 심은 이랑
아래의 밭고랑에 조나 콩이 심겨 있다 해도 수확 뒤에 그 보리골(이랑)을 얼마든지 갈아줄 수
있다.
[농가집성]에서 조를 파종한 이랑 사이를 쟁기로 갈아준다는 것은 바로 이 보리골을 갈아
북을 돋운다는 사실의 부정확한 묘사일 것이다.왜냐하면 가을에 보리를 밭이랑에 심은 밭은
말할 것도 없고 밭골에 심은 보리밭이라도 그 보리골은 제초관리와 북주기로 인해 보리이랑을
이루고 있어 그 사이는 이미 밭고랑이 지어져 있다.밭이랑 위에는 아직 보리가 심어져 있는데
조나 콩의 간종 때에 이미 만들어져 있는 밭골을 이랑으로 만들 흙은 없다.
그래서 간종은 그 밭골에다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설사 앞의 작물이 이랑 위 파종이 아니고
골파종이라고 해도 그 작물에 북을 주기위해서나 제초를 위해서 본래의 이랑 흙은 작물이
심어진 골 쪽으로 복토되어 그 작물이 심겨진 고랑은 이랑이 되고 전작의 이랑이 반대로 고랑이
되는 것이 실제 재배의 현실이다.
조선조 후기에 와서 널리 보급된 경종 방식인 이 간종법의 도입 이유는 후기작물의 파종기를
앞당기기 위한 것도 있지만 그보다는 잡초 억제와 관리가 훨씬 유리한 데 있다.
모든 식물은 그 식물의 유전적 능력에 따라 성장 경합을 하는데 인간이 길들인 작물은 초기
성장 경쟁력이 잡초보다 대개 떨어진다.그래서 김매기 등으로 잡초를 사람이 제압해주는 동안에
작물이 크게 자라고 나면 왕성한 생장력의 잡초도 거의 맥을 못춘다.
거의 다 자란 보리 또는 다른 작물의 고랑에는 풀이 거의 자라지 못한다. 이 사이에다 후기작을
파종해 주면,물론 풀이 전혀 안 나는 것은 아니지만 노지 파종보다 훨씬 덜 나고 작물은 햇볕을
제대로 받지 못해 연약하지만 웃자란다.바로 이 웃자란 작물이 이미 잡초와 어느 정도 분리되고
있기 때문에 앞작물을 수확한 뒤 그 이랑을 갈아 그 흙으로 풀도 묻고 북도 돋우는 일석이조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앞으로 얘기할 밭작물의 골파종법과 벼의 수경 이앙농 등 거의 모든 새로운
농사 방법의 확대 정착도 오로지 어떻게 하면 제초노동력을 줄이느냐는 한 방향으로 전개되고 있다.
간종법이 이랑 위의 파종이냐 이랑 아래의 골파종이냐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앞서 얘기한 대로
앞작물이 이랑파종으로 시작되었다면 그 사이에 하는 간종은 골파종이 될 수밖에 없다.그러나
전작의 수확 뒤에 그 이랑갈이로,골파종된 뒷그루가 있는 골 쪽으로 흙을 복토시키게 되니,
결국은 이 골파종도 이랑재배가 되는 순환을 되풀이한다. 결과는 이랑재배이지만 곧이 따지면
간종은 골파종에 속하고, 조선 후기인 19세기 초에 이앙농과 거의 동시에 확대,정착하는 밭작물
골파종의 선구와 대종이 된다.
골파종법은 밭을 전경한 뒤에 다시 이랑과 골을 지어놓고 씨앗을 이랑 위가 아니라 이랑 아래의
골에다 파종하는 것이다.이랑 위에 하는 용종법이 주로 발꿈치로 하는 족종점파법인데 견주어
이 골파종은 주로 줄파(선파)를 전제로 한다.
골파종법의 실익의 첫째는 골파종은 외줄파종이기 때문에 파종과 중경(사이갈이)제초 등의 노동력을
우경을 통해 크게 최소화할 수 있다는 것이다.우경 제초는 사람 손으로 하는 제초와 달리 직선 또는
궁선으로밖에 할 수 없다.두번째는 이랑에 쌓인 많은 흙으로 중경 때 마다 잡초를 복토로 제압할 수
있는 데다, 이 계속된 복토가 작물의 뿌리을 깊고 튼튼하게 발육시킨다는 점이다.세번째로는 위의
결과에 따라 작물이 바람에도 쓰러지지 않고 가뭄도 덜 탄다는 것이다. 네 번째는 시비의 낭비가
없고 골 사이의 통풍 등으로 결과적으로 수확량을 크게 증대시킨다는 점이다.
무엇보다 큰 이점은 노동력의 절약에 있다.가장 힘든 중경 제초만을 두고 봐도 이랑파종에 비해
골파종의 노동력이 3~4분의 1로 절약된다는 것이다.골파종이 확대되던 이 시기의 농사일은 임금
노동의 전제 위에서 행해지는 상업농의 초기 단계였고 따라서 농사소득의 다소는 소요 노동력의
양에 직결되었다.게다가 이런 선구적 기술의 도입도 어느 정도 여유가 있던 부농의 몫이고, 그
모험적인 실험도 여유가 있는 부농들의 일부 농경지에서만 가능했던 것이다.
-이앙농법의 도입과 그 전개
이앙논의 첫걸음은 음력 2월 하순에서 늦어도 4월 초순까지 모판을 설치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모판을 만들기 위해서는 먼저 모낼 면적의 10분의 1쯤되는 면적의 논에다 물을 넣어 물갈이(수경)
를 하고 써레질을 하여 일차 정지한다.흙탕물을 가라앉힌 다음에는 물을 빼고 일정 너비로
놀골(모판 관리하는 길)을 둔다.제초 등의 손질에 불편이 없을 정도의 일정한 너비로 된,볍씨를
뿌린 모상에 놀골 흙을 끌어올린 뒤,번지나 당그레 등의 기구로 수평이 되도록 다시 정지한다.
이 모판 설치작업과 동시에 볍씨를 물로 수선하여 충실한 볍씨만 다시 물에 담가 충분히
불린 뒤에 건져 짚이나 가마니 등에 싸서 따뜻한 곳에 두고 싹을 틔운다.알맞게 싹튼 볍씨를
모판에 뿌리는 방법에는 두가지가 있다.하나는 모판물을 완전히 빼고 볍씨를 뿌리는 방법으로
모판이 질 때는 판자 등으로 볍씨를 살짝 발라주고,이미 모판이 굳어있을 때는 두들겨서 싹이
난 볍씨가 보이지 않게 묻어준다.그래야만 야생의 새들로부터 볍씨를 보호할 수 있고 습기를
받아 발아할 수 있다.
다른 하나의 볍씨 파종법은 모판에다 물을 적당히 대놓고 싹이 난 볍씨를 물 속에 뿌려두는
방법이다.이때는 며칠 뒤 싹이 어느 정도 자라면 반드시 물을 빼줘서 볍씨의 뿌리가 땅에 박혀
모가 바로 설 수 있도록 이른바 입묘를 시켜줘야 한다.만약 물을 질펀하게 대어 그대로 두면
볍씨가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물 속에서 썩어버린다.물을 빼서 볍씨가 뿌리박고 일어선 뒤
얼마쯤 자라면 그때 가서 모 끝이 안 잠길 만큼 물을 다시 대줘야 한다.그때까지는 ‘모판새보기’
를 해야 하는데,이 일은 거의 아이들 차지였다.이처럼 이앙법은 그 첫단계인 모판 때부터 물을
자유자재로 대줄 수 있어야 제대로 농사가 된다.
그러나 수리시설이 없거나 부족한 지역에서 물 없이도 하는 마른 못자리법(건모법)도 있다.
이것은 마른갈이(건사미) 직파법과 유사하다.건사미 직파법이 본답 전부에다 벼의 생육 뒤에도
문제가 없을 만큼 적당한 간격으로 볍씨를 두물게 뿌리는 데 견주어,이것은 못자리이기 때문에
볍씨를 옮겨 심을 논의 10분의 1 정도 되는 면적에다 촘촘하게 밀파한다.이렇게 파종한 뒤
풀이 나면 제초작업을 몇차례 해준다.건모판인 경우에도 모판 만든 뒤 45일 전후의 이앙기가
되기 전에 비가 오면 물을 잡아두는 것이 이앙할 때 모찌기에 훨씬 편리하다.
모판 작업이 끝나면 본답의 모심기 준비를 해야 한다.수리시설이 있는 일모작답이라면 일찌감치
물을 넣고 수경을 해둔다.말이 쉬워 수경이지 수리시설이 귀했던 그 시절에는 논물관리가
농사의 성패를 좌우했다.그래서 수경의 제1단계는 누수가 가장 많이 되는 부분인 앞과 옆 논두렁
쪽의 논두렁뜨기로부터 시작한다.
먼저 논두렁 흙의 절반쯤을 쟁기로 떼어낸 뒤에 왕복 다섯 차례 이상 깊이 갈아 물과 흙을
짓이겨 농두렁밥이라고 하는 진흙탕을 만드는 일을 ‘논두렁뜨기’라고 한다.그 다음이 ‘논두렁
하기‘인데,그 첫단계가 짓이겨진 논두렁밥을 사람의 손이나 가래,당그래,또는 삽으로 다시
논두렁 쪽으로 갖다 붙여두는 일이다.논두렁밥이라고 했지만 사실은 논두렁죽이라고 해야
마땅한 이 진흙탕을 논두렁에 갖다 붙여 한나절쯤 두어 알맞게 굳어지면 두 번째로 그것을
논두렁 쪽으로 끌어올려 둔다.일이 급할 때나 물이 흔한 수전에서는 이렇게 끌어올린
논두렁밥 흙을 그대로 발라 논두렁을 완성하기도 한다.하지만 세 번째로 이것을 또 한나절
두었다 다시 한번 더 끌어올리고서 말끔하게 발라 논두렁을 완성하는 것이 원칙이다.
이 일은 장정이라도 상당한 경험과 요령을 필요로 하는 힘든 작업이다.이것은 또 최소의
땅면적으로 최대한의 논두렁 누수방지 작업이면서 동시에 이왕이면 보기 좋게 논두렁을
만든다는 면에서는 하나의 창작 행위다.
논두렁을 떠서 만드는 작업과 동시에 논바닥을 전경한다.전경 뒤에는 ‘골지르기’라고 하여
쟁기로 일정 간격을 띄어 깊게 다시 간다.바로 모내기를 하고자 할 때는 써레질을 해서
흙탕물이 가라앉는 하루쯤 뒤에 모내기를 하지만,그렇지 않다면 전경과 골지르기를 한 뒤에
그냥 두었다가 모내기 하루 전쯤에 써레질을 한다.모내기 직전보다는 하루 전 쯤에 써레질을
하는 이유는,첫째는 흙탕물을 가라앉히지 않고 바로 심으면 모가 너무 깊이 심길 우려가 있고
둘째는 그렇다고 써레질을 해서 너무 오래두면 모내기 전에 잡초가 나고 땅이 굳어 손으로
모를 심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써레질은 흙덩이를 부수고 땅을 수평화시키기 위한 정지작업이 목적이기도 하지만,논바닥으로
새는 물을 최소화시켜서 담수를 오래하기 위한 논바닥 땜질작업이기도 하다.그래서 써레질도
대충 한번에 끝내지 않고,농부가 이만하면 수평도 됐고 누수 방지와 담수에 충분하다고 느낄
때까지 최소 두 번 이상 해둔다.
보리 이모작 수경이나 천수답의 수경과 이앙법도 위의 일모작답과 같다.다만 천수답은 수경을
미리 해두지 못하고 비가 올 때를 기다려야 하기 때문에 이앙 적기를 놓치기가 쉽다.때로는
비가 영 오지 않아 모내기를 못하고 모판의 모까지 가뭄에 태워죽이는 경우도 몇 년 걸러
한번씩 찾아왔다.이렇게 빨갛게 타버린 그 모판에다 불을 질러놓고 ‘하느님,꼬십니까?’하던
어떤 농부가 생각난다.
이같이 이앙할 본답 정지가 끝나면 모판으로 돌아간다. 45일 전후로 알맞게 키 자란 모판에다
먼저 물을 충분히 대놓아야 한다.이앙할 모수거는 ‘모 뽑는다’고 하지 않고 ‘모 찐다고’고 한다.
아마 그 이유는 위에서 모를 내려다보며 위쪽으로 뽑아 올리지 않고 다음과 같이 하기 때문일
것이다.모찌기 자세는 사람이 최대한 몸을 논바닥 쪽으로 낮추어 모와 눈높이를 맞춘다.
그리고는 모를 네댓 포기씩 양손으로 잡고 사람 쪽으로 양손을 교대로 계속 잡아당겨서(쪄서)
그 모 뿌리에 붙은 흙을 씻는 동작과 모찌기 동작을 모가 한 움큼씩 될 때까지 되풀이한다.
이렇게 한 움큼씩 찐 모는 뿌리 흙을 다시 한번 깨끗이 씻고 나란히 간추려서 한 움큼씩 빗대어
두었다가 네댓 움큼이 되면 그것을 짚으로 단단히 묶어 이른바 모춤을 만든다.
이 모찌기도 아무나 아무렇게 하는 것이 아니고,한다 해도 잘하는 사람과 못하는 사람 사이에는
많은 능력차이가 나므로,요령과 끈기를 필요로 한다.모찌기를 잘못해서 모가 흐트러지면
모심기가 거의 불가능할 정도이기 때문에 숙련된 요령과 지혜가 필요하다.그리고 그것은 본답에
모심는 시간의 3분의1 정도의 시간을 요하는 아주 중요한 작업이다.
모찌기를 다하면 이앙할 본답으로 옮겨 알맞은 간격으로 던져넣은 ‘모벼루기’를 한다.이 모벼루기는
논두렁에 서서 논바닥의 여기저기에로 못단을 던져넣는 것인데, 농민 선수들은 거의 정확하게
벼루어낸다.이것을 만약 모자라게 벼루던 모가 달려 이앙작업이 제대로 안되고,너무 많이 벼루어져도
그것이 뒤에 밀려 제대로 이앙작업이 안된다.
모심기의 실제는, 모춤에서 빼낸 모 한 움큼을 왼손에 잡고 모를 찔 때처럼 오른손으로 네댓 개의
낱모를 한 포기로 잡아 떼어낸다.오른손으로 떼어낸 모포기는 엄지손가락으로 모뿌리가 장지 끝에
닿게 살짝 누르고 그 손가락과 함께 모포기를 땅에 심는다.심는다기보다 모 포기가 물 위로
뜨지 않을 만큼 살짝 땅에 끼운다고 함이 옳겠다.그래서 옛사람들이 모심기란 말과 함께 모를
흙속에 끼운다거나 꽂는다는 ‘삽앙’이란 말을 썼던 것 같다.
서툰 모내기꾼들이 물에 안 뜨게 잘 심는다고 모포기를 너무 깊게 꽂으면 모가 땅내를 맡지
못하고(착근,또는 활착못하고)누렇게 떠 죽거나 살아도 생육이 매우 늦어진다.
이 모심기 솜씨 또한 선수와 비선수 사이에 천양지차가 있다.
모내기에는 흐튼모심기와 줄모심기가 있다.흐튼모는 벼만 심는 일모작답에 모포기 사이만 약
15~20cm 간격으로 떼어 흩어 심는 모심기를 말하고,줄모는 벼 다음의 보리갈이용 이모작을
위해 눈짐작으로 줄을 지어 심거나 실지로 못줄을 논바닥에 대고 줄 따라 심는 두가지가 있다
얼핏 생각하면 줄 따라 안 심고 흩어 심으면 작업이 더 빠를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실제로는 줄모가 지금과 같은 농기계가 없던 시절의 보리 이모작에는 꼭 필요했을 뿐
아니라, 심은 뒤의 관리에도 좋고 능률도 더 높다.
모내기꾼이 많을 때에는 줄꾼 두 사람이 논의 양쪽 가에서 줄만 잡아 당겨주고 줄모를 심기도
한다. 모내기꾼이 많지 않을 때에는 두 사람씩 어깨를 나란히 맞추고 한 줄로 늘어선 뒤
서로 반대 방향으로 줄 사이 15cm, 골 사이 20cm 정도의 간격에 맞추어 한 줄로 심어나간다.
만약 두 사람이 모를 심을 때는 논 한가운데서 서로 어깨를 맞추었다가 각자 반대쪽으로
심어나가면 논두렁을 만날 것이고,두 사람 이상이면 다른 쪽에서 심어오는 사람의 어깨와
만날 것이다.논두렁이든 사람이든 그렇게 만나면 만난 그 자리에서 또다시 각자가 반대방향으로
한 줄씩 심어나가는 동작을 되풀이하여 줄 없는 줄모를 심을 수가 있다.
그러나 사람이 많지 않을 때도 모심는 사람이 스스로 못줄을 넘겨가며 줄모를 심는 것이 관행이다
모심는 사람이 두 사람 이상일 경우에는 논가 쪽의 두 사람이 각기 논가에다 못줄을 팽팽하게
꽂아두고 그 줄을 따라 논 안쪽으로 심어가면, 같은 방향으로 심어간 모나 반대쪽에서 심어오는
사람과 만난다.이렇게 만나면 거기서 다시 심어둔 모의 줄을 따라 반대방향으로 심어와서 처음
시작한 논두렁쪽에 도달한다.이때 양쪽 논가의 두 사람은 다시 못줄을 넘겨 꽂아두고 처음과
같은 방법을 되풀이해서 심는다. 이것을 ‘두줄빼기’ 모내기라 한다.
모내기가 끝난 뒤 한 열흘쯤 되면 논에서 잡초가 돋기 시작한다. 조금만 시기를 놓치면 이 잡초가
무성하게 자라 김매기에 엄청난 품이 들어간다. 그러므로 그 즉시 논에 댄 물을 완전히 빼고
맨손으로, 때로는 손가락 끝에 대나무나 양철로 만든 골무를 끼고 논바닥의 진흙을 뒤집어
흙속에 풀을 묻어 죽인다.자갈돌이 많거나 논바닥이 딱딱할 때는 호미로 매기도 한다. 찰땅이나
모래찰땅이 대부분인 영남지방에서는 맨손으로 주로 논을 맨다.
논매기가 끝나면 그 논배미에 다시 물을 대준다.처음의 이 논매기를 ‘아시논매기’라고 하는데,
이것이 끝나고 또 한 열흘쯤 지나면 또다시 풀이 돋는다.이때 다시 위와 같은 방법으로 하는
논매기를 ‘두벌논매기’라 한다.두벌논매기 때는 벼가 제법 자라 그 다음부터 올라오는 웬만한
잡초는 벼의 위세와 그늘에 제압당하기 때문에 일손이 달리면 두벌논매기로 끝낼 수도 있다.
그러나 완벽한 제초를 위해서는 대개 세벌까지 맨다.
모판 만들기에 수경,그리고 논맬 때마다 물을 빼고 다시 물을 대줘야하는 수경재배는 처음부터
끝까지 물의 풍요를 요구한다.그러나 물을 절약하는 논매기도 있다.제일 아래 논의 물은
어쩔 수 없이 남의 논이나 도랑으로 빼어버리지만 그 논을 다 맨 뒤에는 바로 위의 논이 만일
자기 논이라면 위 논의 물을 빼서 금방 매어둔 아래 논에 대어가는 방법으로,아래쪽 논부터
위쪽으로 논을 매어가다 마지막의 제일 위 논에만 봇물을 대주는 것이다.
천수답에서는 논맨 뒤에 댈 물이 없기 때문에 제초 때 물을 빼지 못하고 물 속에서 그냥 흙을
긁어 풀을 물 위에 뜨게하는 ‘물꿀렁이’논매기를 한다.이때는 잡초가 땅에 묻히지 않고 물 위에
뜬다.물꿀렁이는 흙탕물 속이라 잡초가 눈에 보이지 않아 그냥 남는 잡초도 많고,흙에서 빠져나와
물 위에 뜬 잡초도 다시 가라앉아 뿌리를 내려 많이 살아남는 불완전한 제초법이다.
그래서 천수답은 비가 많이 와서 도랑에 물이 생길 때에 논의 물을 빼고 다시 맨 뒤 새로 물을
대어주거나,아니면 가물어 논의 물이 말라갈 때 물 따라 다시 김을 깨끗이 매준다.
그러고는 하늘의 처분을 기다리는 것이 천수답의 이앙벼 농사법이다.
수경 때는 물론 모심기와 세벌의 논매기 때까지 물이 흔하지 않으면 어려운 점이 많은 것이
수경 이앙농법이다.그래서 수경 이앙의 확대에는 먼저 수리시설이 필요하고, 수전 개간을 확대해
가는 것이 그 전제조건이 된다.
-금지된 이앙논
이앙농을 계속 금지해온 조선 지배층의 명분은 한결같이 그것이 가뭄에 취약한 농사법이라는데
있었다.수경 이앙벼의 농사법이 가뭄에 취약하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그 첫째 이유는 이앙농법은
물 없이는 수경과 이앙 자체가 불가능하다.두번째는 밭벼나 직파 수전벼가 처음부터 건조한 곳에서
생육됨으로써 가뭄에 견디는 저항성이 매우 강한 데 견주어,수경 이앙벼는 볍씨 때부터 물속에서
싹이 트고 자라 가뭄 저항성이 상대적으로 떨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큰 이유는 밭흙과 논흙의 물리적 성분 차이에 있다.건경직파 뒤에 물을 대주는
것과 처음부터 물을 넣어서 가는 수경은 흙의 이화학적 성분에 크게 다른 영향을 끼친다고 한다.
한마디로 논땅과 밭땅은 그 성질이 많이 다르다.수경은 논땅이고 건경은 수전이라도 밭땅과 같다
수경논의 바닥이라고 해서 전혀 물이 안 새는 것은 아니지만 비가 와도 금방 새버리는 밭이나
건경 수전에 비할 때는 거의 안 샌다고 할 정도로 아주 조금씩 샌다.그러니까 거듭되는 수경은
논바닥에 20~30cm 깊이의 경작토와 그 아래 심층토 사이에 하나의 단단한 단층막을 만든다.
이 단층이 가물 때 지하 깊숙이 있는 수분을 빨아올리는 삼투작용을 방해하여, 그런 삼투작용이
가능한 밭작물이나 건경 수전벼와 달리 수경 이앙벼에 훨씬 심각한 가뭄피해를 입힌다.
이앙농법은 나중에 실증되었듯이 심한 가뭄으로 한해 걸러 한번밖에 벼를 못 먹는 극단적인
경우에도 제초노동력은 80% 줄이고 수확량은 갑절이 되기 때문에 수전직파보다 유리한 농법이다
그러므로 위에 말한 이유는 그것을 금지할 온당한 이유가 아니다.그런데 왜 지배층은 이유도
안되는 억지 이유로 그것을 계속 금지시키고 농민들도 이에 순순히 따랐을까?
조선시대의 지배층도 백성들이나 재야의 반대세력들이 이앙농법을 통해 경제적‘시간적 여유를
가지고 정치‘경제’사회의 민주화를 요구해 올 것이 혹시 두려웠던 것은 아닐까?
후기 조선에서 이앙농을 확대‘정착시킨 주체가 체제에 비판적인 재야 사림세력 내지 좀 여유있는
경영형부농이라는 것이 이를 반증한다.많은 이점이 있는 이앙농법을 금지한 지배층에 대해 밑바닥
농민들이 순응할 수밖에 없었던 것 또한 농민들에게 여유가 없었던 때문일 것이다.
이앙농에는 수많은 이점이 있는 대신,적기에 이앙하지 않으면 안되는 등 일이 한꺼번에 몰려있고
또 그에 기민하게 대처하지 못하면 실패하는 등 문제점이 많다. 예컨대 모내기 적기에 비가 한꺼번에
많이 왔을 경우,논갈이 축력이 모자라거나 인력을 조직적으로 동원하지 못한다면 물을 잡지 못하고
놓칠 수도 있다. 또 물을 잡는다해도 제대로 잡지 못할 경우 농사 실패의 가능성은 더 높아진다.
-이앙농의 정착과 확대 동인
이앙농 확대의 첫째 동인은 이제까지의 건답직파와 수전직파의 생산력 한계에서 찾을 수 있다.
전통적인 직파재배법의 생산력으로는 늘어나는 인구와 부의 축적욕구에 대응할 수 없기 때문에
무언가 새로운 생산양식을 찾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이앙법은 앞서 말한 대로 가뭄에 취약하고
그래서 법으로 금지됨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무시해도 좋을 만큼 수확량을 획기적으로 증가시킨다
이앙농의 확대‘정착에 많은 역할을 한 재야학자나 실학자들의 증언처럼 노력은 절반도 안 들면서
수확량은 배가 된다는 것은 진실이다.
순전히 천수에 의존하는 천봉답의 경우도 수리 안전답만큼의 소출은 기대할 수 없었지만
수경 이앙벼 재배는 밭벼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수확을 내준다.
우선 제초횟수에서 직파가 4~5회인데 수경이앙은 2~3회로 절반 가까이 줄어든다.
제초 횟수보다 제초 과정의 편리성과 노동력의 절감 차이는 훨씬 크다.직파는 온 논에 흩어뿌리기
를 했지만,그 이전에는 전부 산파였다.직파 때는 벼보다 잡초가 먼저 돋아나기 시작하여
벼가 싹트고 자라는 중에도 계속 이어져 잡초가 돋는다.더구나 흩어뿌렸기 때문에 복토로 제초
관리가 불가능하므로 온 밭에 흩어져 올라오는 이 잡초를 하나하나 손으로 뽑아주거나 호미로
매어주어야 한다.
이에 견주어 이앙벼는 잡초가 깨끗이 제거된 논에 이미 20~30cm로 자란 벼를
포기 사이 15cm,골 사이 20cm 정도 간격으로 줄지어 정연하게 심는다.심은 뒤 한 열흘 지나면
이 논바닥에서도 새파랗게 잡초가 돋기 시작하지만,여기서는 벼포기와 풀이 확연하게 분리되어
있다.그래서 이 논의 잡초제거는 직파 때처럼 낱낱의 풀을 호미나 손으로 뽑는 것이 아니라
손으로 논바닥의 진흙을 긁어 뒤집어서 어린 풀을 땅 속에 깨끗이 묻어 제거한다.
벼 이앙농 확산의 또 하나의 동인은 그것이 보리와 밀 등의 이모작을 가능하게 한 데 있다.
벼를 이앙으로 재배할 경우,보리나 밀을 심지 않는 본답의 10분의 1 정도의 적은 땅에 3월
하순경 모판을 만들어 모를 길러서,5월 망종 무렵 보리나 밀 수확뒤에 옮겨 심으면 두 작물의
성장에 아무런 문제가 없이 이모작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앙농-인류가 찾아낸 기적의 농법
인류가 영위해온 일 가운데 유일하게 지속가능한 일은 전통적 방법의 농사라고 한다. 한알의
씨앗을 뿌려 몇십알에서 몇백알까지 생명을 지어내는 일이 농사일이니 그럴 것이다.농사는
설사 지속이 가능하지 않은 일일지라도 그것 없이는 인류 생존이 불가능하므로 짓지 않을
수가 없다.그런데 그것이 지속가능한 일이라니 얼마나 다행인가?
일만년 이상의 세월 동안 영위해온 농사방법 가운데 상대적 또는 거의 절대적으로 지속가능한
농법은 단 두가지이다.하나는 오랜 전통의 혼작농법이고, 다른 하나는 한반도의 경우 17세기에
와서야 확대‘정착되어간 이앙농법이 그것이다
보리나 밀, 또는 마늘 등의 월동작물을 수확한 뒤에 밭을 전경으로 갈아 목화,고구마,콩,녹두,
옥수수,수수,참깨,들깨,배추,열무,오이, 가지 등 모든 작물 중에서 제 집에서 꼭 필요한 작물을
몇 가지 고르거나 또는 작물 모두를 밭마다 적당한 가짓수로 섞어서 파종한다.그 중에는
빨리 나서 빨리 자라고 빨리 수확할 수 있는 작물도 있고,그 반대도 있으며, 늦게 나지만
빨리 자라 수확은 빠른 작물도 있다.위 나열한 작물을 혼작했을 경우 가장 빨리 수확해 먹을 수
있는 것은 열무와 솎음배추다. 이 열무와 배추를 수확할 때는 김매기도 함께 하게 된다.
아직 다른 작물이 크게 자라기 전이라서 열무와 배추를 빼어낸 자리가 넓으면 그 자리에 다시
열무,배추나 다른 작물을 혼작할 수도 있고,그 자리가 좁으면 그대로 둔다. 그래도 이미 자란
다른 작물이 드리우는 그늘로 잡초가 크게 무성하지 못한다.그 다음에 수확할 수 있는 작물은
옥수수,고구마,수수,참깨,들깨,콩,팥,녹두의 순서로 될 것이나,같은 작물들일지라도 자기 품종의
특성 즉,등숙기를 결정하는 유전자에 따라 그 수확기가 달라질 수 있다.
이 농법의 첫째 장점은 일찍 자라는 작물의 수확때 그 수확과 함께 김매기도 동시에 하고
또 그 자리에 다시 작물을 심어 잡초를 억제시킴으로써 노동력을 크게 절감시킨다는 점이다.
두 번째는 여러 작물을 혼작함에 따라 각 작물들이 면역력을 서로 보완적으로 주고받음으로써
병충해에 공동으로 대처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예컨대, 들깨나 부추,파 등의 독특한 향기는
배추나 무 벌레에게 일종의 기피제 구실을 해서 충해를 예방해준다.목화나 옥수수,수수 등의
병해충 면역력은 이들 채소작물의 병해도 함께 예방해준다.세번째로는 상경연작을 가능하게
한다.예컨대 참깨는 단작일 경우는 7년 이상 연작이 불가능하다고 한다.그러나 위와같은
혼작일 경우는 어느 정도의 연작도 가능하고 설사 연작피해가 있다해도 훨씬 줄일 수 있다.
그리고 옥수수나 수수,목화 등의 다비성 작물은 따로 퇴비를 넣거나 콩처럼 공기 속의 질소를
흡수‘고정하는 작물과 혼작하지 않을 경우 수확을 거의 기대할 수 없고 연작은 더구나
불가능하다.그래서 우리 선대들은 옥수수나 수수는 반드시 밭가에 아니면 공기로부터 질소를
뿌리에 고정하는 콩밭 속에 띄엄띄엄 섞어 심어서 가꿨다.네번째로는 한 가족이 필요로 하는
먹거리를 한 밭에서 한꺼번에 재배하는 자급자족의 이점을 갖는 이점을 갖는 농법이 혼작이다.
농작물아닌 야생식물들은 땅과 햇볕과 물과 공기라는 천연자원만 있으면 얼마든지 순환재생산이
가능하다.그러나 농작물의 경우는 유기물의 재투입이 없으면 지속생산이 불가능하다.그 이유는
열매를 얻기위한 곡식이 목적일 때는 열매 모두를,채소의 뿌리가 목적일 때는 뿌리의 전부를,
잎줄기를 먹기위한 재배 때는 그 잎줄기 전부를 인간이 수확해 먹기 때문에 그 먹은 만큼의
유기물질을 돌려주어야만 생태적 균형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수경 이앙벼 농법은 그런 유기물의 재투입 없는 단작농업인데도 지금처럼 비료와 퇴비를
같이 쓰는 고투입 농법의 절반 이상의 수확을 지속적으로 가능하게 해준다.그래서 수경 이앙
농법을 기적의 농법이라고도 한다.그 기적의 비밀은 물론 물에 있다.혼작법이 밭작물의 병충
방제나 연작피해를 줄이기 위한 농법이듯이,단작물 재배인 벼농사에서의 병충방제는 수경한 논의
물이 대신해 준다.
동남아와 중국,일본 등은 우리처럼 수경 이앙농을 주로 하지만,새로운 쌀 수요로 쌀농사 면적을
늘려가고 있는 미국은 이앙농 아닌 직파 수전농을 주로 한다.직파 수전농은 단작 밭농사보다야
낫겠지만,연작상경은 불가능한 농법이다.그래서 미국의 논농사도 지력보존을 위해 2~3년 단위의
휴경을 한다고 한다.더구나 우리와 같은 맥류 이모작이 아닌 벼단작일 경우는 더욱 그럴 것이다.
밀이나 옥수수 같은 밭작물을 단작하는 미국의 많은 농토는 비료,농약으로 이미 산성화됐거나
사막화가 진행중이라고 한다.
-사라져버린 농사말
*화학비료가 밀어낸 우리 농사말
갱자리캐기(부드러운 봄풀을 캐어다 못자리나 일모작 벼논에 넣는 일)
푸초베기,뽁대기파기(잔디 등 키작은 풀을 뿌리의 흙과 함께 채취하여 거름으로 장만하는 일)
통시(변소),똥거름,똥물,똥장군,
마구거름(소나 말의 외양간에서 나온,짚과 풀이 섞인 마소의 똥오줌)
낫질, 밀낫질(짧은 풀을 뿌리째 채취하기 위해 앞쪽으로 미는 낫질)
귀낫질(낫자루에 나무귀가 달려, 낫을 두 손으로 잡고 자기 앞쪽으로 당겨 풀을 베는 낫질)
*농약이 밀어낸 농사말
피사리(피뽑기),아시논매기,두벌논매기,세벌논매기,밭매기,호미질
*농기계가 밀어낸 농사말
괭이질,삽질,쟁기질,써레질,곰배질,낫질,도리깨질,풍구질,가래질,지게질,톱질,
홍일소(부릴 수 있는 소),어불림소(소겨리,이웃집과 공동으로 부리는 소)
공소(일정한 기간 세를 주고 빌려서 기르며 부리는 소)
*농사일의 개인화로 밀려난 농사말
두레,품앗이,참, 중참,상참(점심),아침참,저녁참,
노동요(학자들이 노동요로 이름지었지만,사실은 농민의 창작행위였던 일노래의 창작 중단이
농민 자신의 농사말을 잃게 된 가장 큰 원인이다)
*사료 투입 식용축산이 밀어낸 농사말
소꼴,꼴먹이기,꼴뜯기기,소꼴베기,꼴주기,꼴해오기,쇠버탕
*옷의 시장의존이 밀어낸 농사말
명따기,명씨앗기,명타기,명잣기,삼삼기,명(삼)베매기,베짜기
*농학자나 농업정책이 밀어낸 농사말
여름지이(농사),아시털(일모작),두벌털(이모작),모종붙이기(이앙, 삽앙)
김매기(제초),배동바지(수잉기) 등
<쌀과 민주주의 / 천규석 / 녹색평론사>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