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사랑 내 곁에" 보러갔습니다. 아내가 사회복지사의 관점에서 보고 감상문을 써서
대학에 제출해야 한다기에 졸레졸레 따라갔습니다. (영화는 그렇게 보는 것이 아닌데도~)
김명민이 루게릭 병 환자를 연기하면서 체중을 20키로그램이나 줄이면서 연기했다고
해서 화제가 되었다는 정보와 아내와 관점, 이 두 가지 선입견을 가지고 봤습니다.
이런 사전 정보로부터 벗어나서 이제부터가 저의 영화 감상 평입니다.
하지원은 한쪽 발이 없는 장의사 아버지 밑에서 자라난 외동딸입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시신을 닦고 염습하는 아버지를 보면서 자란 탓에 '죽음' '시체' '장례' '매장' 등과 같은
음습하고 섬찟하여 외면하고자 하는 인간의 편견으로부터 자유로운 '맹랑한' 여자로
자랐습니다.
그래서 직업도 '장례사'가 되어 상조회사에 취업하여 '염습'전문가가 되었습니다. 정성
껏 시체를 닦는 일에서 직업적 성취감을 느끼는 그녀에게 남편들(2번 이혼)은 소름이 돋
았던가 봅니다. 시체를 닦은 손으로 자기 몸을 어루만지는 것을 견디지 못한 '찌질이'
남편들은 그녀와 진정한 사랑을 키워가지 못하고 찢어져야 했습니다.
결혼에 두 번 실패함으로써 '사랑 키우기'에 성공하지 못한 하지원은 상조회사에서 열
심히 일을 함으로써 삶의 의미를 찾고자 합니다. 그러나 '일'이 인생의 목적에 다다르게
하지는 못합니다. 삶의 보람은 일에서가 아니라 사실은 '사랑'에서 입니다. 이것은 인간
의 본래 모습입니다. 사랑에 목마른 사람은 결코 행복하지 못합니다.
열심히 시체를 닦다가 하지원은 어린 시절 이웃집에 살았던 김명민의 부모 상을 맡음으
로써 김명민과 조우합니다. 그러나 김명민은 시한부 삶을 사는 루게릭 환자입니다.
사랑에 목마르기는 김명민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이것이 두 사람에 공통점이었습니
다. 장난처럼 '우리 사귀어볼까?' 했다가 겉잡을 수 없는 사랑에 휘말린 두 사람의 이야
기가 이 영화 줄거립니다.
사람들은 사랑하지 않고 가많히 있을 수 없을까요?
사랑에 목말라 하다가 여자 장의사와 시한부 환자가 불같은 사랑을 나눕니다.
인간들의 시선으로 보면 '웃기는 이야기'입니다. 이들은 '불장난'으로 인생을 낭비하는
나이 든 철부지들입니다.
죽을 병든 사람은 조용히 죽어가고, 시체닦는 걸 직업으로 가졌으면 혼자 일이나 하면
서 살면 된다는 것이 사회의 시선입니다. 그러나 내일 죽더라도 사랑하고 싶은 것이 인
간이고, 시체를 닦았지만, 그 손으로 사랑을 누리고 싶은 것이 또한 인간입니다.
왜 사랑입니까? 왜?
하나님이 인간을 그렇게 지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사랑의 대상으로 피조하
셨습니다.
세상의 편견으로 말하자면, 하나님도 '가만히 계셨더라면' 좋았을 것을 사랑하고 싶은
'욕심'을 제어하지 못하고 인간을 지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사람) 때문에 고통을
당하고, 사랑(사람) 때문에 눈물을 흘립니다.
모든 것은 사랑 때문입니다.
그래서 시체 닦은 손으로 남편을 애무하는 하지원에게 눈 흘기면 안 되지요.
오죽하면 죽을 줄 뻔히 알면서도 김명민과 사랑을 시작했을까요.
시한부 삶이라고 사랑하지 말란 법은 없습니다. 그 사랑으로 인해 불행해진다고
참지만, 그러나 사랑은 화산처럼 분출합니다. 누가 그걸 막아요?
뭐, 그런 영화더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