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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훤당 연구학술논문 한훤당 김굉필선생에 대한 평가와 추숭양상追崇樣相-2014년 추계학술발표②
편집자 추천 0 조회 118 15.01.28 14:36 댓글 7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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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작성자 15.01.28 17:46

    첫댓글 *편집자 註1 : 계왕개래繼往開來는 옛가르침을 이어받아 후대에 전한다, 과거를 이어서 미래를 열어 준다는 뜻으로 쓰이고 있습니다. 주희朱熹가 서문을 쓴 중용장구 머릿글[中庸章句序]의 한 구절입니다.
    『우리 부자夫子 같은 이는 비록 그 지위를 얻지 못하였으나, 옛 성인을 잇고 앞날의 학문을 열어준 바는 그 공로가 도리어 요와 순보다 훌륭함이 있었다. 若吾夫子, 則雖不得其位, 而所以繼往聖, 開來學,』
    순천 옥천서원 경현사景賢祠 亨祀祝文과 선조7년 조헌趙憲의 상소문 등에 한훤당 선생을
    “옛 성현을 계승하여 후학을 열어준 계왕개래繼往開來의 업적이 있는 사람”이라고 평가했습니다.

  • 작성자 15.01.28 21:09

    *편집자 註2 : 염락관민濂洛關閔 : 중국 송나라 때 주돈이周敦頤, 정호程顥, 정이程頤, 장재張載, 주희朱熹 등이 주장한 성리학을 염락관민지학이라 부릅니다. 그들의 출신 지명을 따서 붙인 이름입니다.
    정구鄭逑는 「祭景賢祠文」의 글에서 한훤당 선생을 “끊어진 학문[絶學]을 홀로 일으키고 오랜 세월 정심精深하여 염락濂洛의 정전正傳을 먼 후대에 계승하였고, 동방의 미개함을 깨어 백대의 참 스승이 되었다.” 밝혔고,
    류성용柳成龍도 염락관민濂洛關閩의 실마리를 찾은 사람이 김굉필임을 밝혔습니다.

  • 작성자 15.01.28 17:53

    *편집자 註3 : 명조 선조 시대에 세워진 사우와 서원 건립현황 중에서 선조 때 사액서원으로 승격된 熙川書院[평북 희천]과 花谷書院[황해 서흥], 전남 나주의 錦陽書院이 정유재란으로 소실돼 景賢書院으로 사액된 내용을 편집자가 추가했습니다. 사선글자로 표시된 부분입니다.

  • 작성자 15.01.28 17:54

    *편집자 註4: 한훤당선생을 배향하는 서원은 14곳으로 조사됐습니다.[서흥군과 한훤당 81-83쪽 참조] 이 가운데 남한내 미복원 서원은 川谷書院, 伊淵書院, 仁山書院, 道山書院 네 곳이고 북한내 서원은 熙川書院, 象賢書院, 白鹿洞書院, 花谷書院, 飛鳳書院, 盤谷書院 다섯 곳입니다. 민족백과사전에 따르면 북한지역 서원은 미복원 상태이나 광복 이후 상황은 알 수 없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 작성자 15.01.28 18:17

    선생의 사후 100년의 발자취를 풀어헤쳐 주신 황위주 교수님께 감사드립니다. 장래가 촉망되는 학자에서 향선생을 거쳐 마침내 東國儒宗으로, 더 나아가 한 시대를 구제한 국가적 인물[國器]로 나라에서 어떤 과정을 거쳐 공식 인정했는지 그 추숭 과정을 제시해 주셨습니다. 그러면서 이 과정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추후 연구 과제로 남겨두셨습니다. 4대 사화士禍로 주눅 든 사회 속에서, 임진왜란 정유재란으로 피폐해진 사회 속에서 그 시대의 양심, 조선의 젊은 지성들이 한훤당 선생을 조선의 정신적 스승으로 받들어 모시기 위해 100년을 이어가며 지속적으로 상소를 올린 역사적 사실들을 새삼 일깨워주셨습니다. 거듭 감사합니다.

  • 15.01.29 07:31

    한훤당께서 세상을 뜨신 후 문묘에 배향되기까지 100년간은 조선 성리학이 통치 기반의 이데올로기로 확정되었고, 사림이 활발하게 중앙관직에 진출했던 시기입니다. 황위주 교수는 한훤당께서는 당파를 초월하여 동 시대의 정신적 아이콘으로서 모든 유림으로부터 숭배를 받았다는 것을 밝혀 주었습니다. 특히, 당시 치열하게 경쟁하면서 파당을 짓던 퇴계 이황과 남명 조식의 후학들이 한마음으로 한훤당께 존경심이 가득한 헌사를 보냈다는 데 대해 놀랐습니다. 또 선생께서는 생육신이면서 동 시대의 가장 큰 비평가였던 대문호 남효온으로부터도 두터운 평판을 얻으셨습니다. 부끄럽지 않은 후손이 되고자 스스로 옷깃을 여밉니다.

  • 작성자 15.02.01 15:42

    *편집자註5 : 천곡서원의 창건년도가 경현록과 한국민족문화대백과에 각각 다르게 기술되어 있습니다.
    한훤당선생서원록/국역경현록 895쪽 - 중종23년戊子(1528) 建. 선조6년癸酉(1573) 사액, 선조40년丁未(1607) 원장 李天培 重建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1558년(명종 13) 이조년李兆年, 이인복李仁復, 김굉필金宏弼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연봉서원延鳳書院으로 창건되었으나, 이후 정구鄭) 등에 의해 천곡서원으로 개명되었으며 주향자로 숙정자(叔程子: 北宋 程頣), 주자朱子, 김굉필 등을 배향하였다. 1573년(선조 6) 사액되고 1607년 중액되었으며, 1623년(인조 1) 정구, 1642년(인조 20) 장현광張顯光을 추가 배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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