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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한훤당선생기념사업회 추계학술대회
*한훤당 김굉필선생의 道學 · 師友 · 追崇樣相에 관한 연구*
일시 : 2014년 11월15일 12:00(토요일)
장소 : 대구시 중구 장관동 담수회관 3층
⚫주제1 한훤당 김굉필선생의 道學의 實相과 그 意味
발표자 : 권오영 학국학중앙연구원 교수
⚫주제2 한훤당 김굉필선생에 대한 評價와 追崇樣相
발표자 : 황위주 경북대학교 한문학과 교수
⚫주제3 한훤당 김굉필선생의 師友關係와 時代精神
발표자 : 정출헌 점필재연구소장, 부산대학교 한문학과 교수
▲황 위 주 黃 渭 周 경북대학교 한문학과 교수
한훤당 김굉필에 대한 평가과 추숭양상追崇樣相
황 위 주
경북대학교 한문학과 교수
1. 머리말
1970년 한훤당기념사업회에서 간행한 『국역경현록國譯景賢錄』 을 보면 한훤당 관련 자료가 거의 망라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명종20년(1565) 순천부사 이정李楨이 처음 간행한 『경현록』부터, 선조37년(1604) 정구鄭逑가 이를 보완한 『경현속록景賢續錄』, 숙종45년(1719) 김하석金夏錫이 다시 증보한 『경현속록보유景賢續錄補遺』, 국역 당시 추가한 「경현부록景賢附錄」과 「한훤당관계문헌초록寒暄堂關係文獻抄錄」, 「한훤당관계조선왕조실록초존寒暄堂關係朝鮮王朝實錄鈔存」 등 관련 문헌 일체를 두루 망라하였는데, 수집 자료 전체의 분량이 1000여 쪽에 달할 정도로 규모가 방대하고 조사 내용 또한 정밀하다.
그러나 실재 책을 들춰보면 한훤당이 직접 남긴 글이 너무 적어서 실망을 금할 수 없다. 한훤당이 지은 글이라곤 시詩 16수, 부賦 1편, 제문祭文 2편, 서간書簡 4통, 상소문 1통이 전부로[*註1] 전체내용의 1%가 채 되지 않고, 그마저도 몇 작품은 한훤당의 글이라고 확정하기 어렵다는 지적이 있어왔기 때문이다.[*註2]
나머지는 모두 후대에 한훤당을 평가하고 추숭하는 과정에 작성한 글이었는데, 이런점에서 『국역경현록』은 한훤당의 문집이라기보다 한훤당의 평가와 추숭에 관련된 후대 자료의 집성이라고 해야 적합할 듯하다.
이런 사정을 감안할 때 한훤당에 대한 연구는 그가 직접 남긴 글은 물론, 후대의 평가와 추승에 관련된 자료를 세밀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을법한데, 아직 이를 체계적으로 검토한 연구를 찾아보기 어렵다. 『국역경현록』 간행 이후 4차례의 학술대회를 개최하였고, 기타 개별 연구를 포함할 경우 기존 논문이 약 40여 편에 달하지만, 대부분이 필요에 따라 이런 자료를 알맞게 활용하여 세계관, 도덕론, 도학사상, 선비정신, 교육사상, 소학적 삶, 도통과 위상 등 엇비슷한 문제를 다소 지루하게 반복하였던 것이다.[*註3]
본고는 저간의 이런 연구 동향을 비판적으로 주목하면서, 한훤당에 대한 후대의 평가와 추숭에 관련된 자료를 집중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그리고 이를 통해 그가 남긴 글이 미미함에도 불구하고 동국유종東國儒宗으로 추숭되기까지 일련의 과정을 검증해보고자 한다. 이와 같은 작업은 한훤당에 대한 역사적 평가와 추숭의 실상을 사실에 입각해서 보다 엄정하고 객관적으로 이해하는데 일정하게 기여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2. 한훤당에 대한 당대의 평가
한훤당은 선대에 벼슬이 끊이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현저하게 드러난 집안도아니었다. 고조부 선보善保 봉순대부奉順大夫(정3품) 판서운관사判書雲觀事를 역임한 정도였고, 현풍 솔례(率禮 처가 곳)로 처음 입향했던 증조부 중곤中坤은 봉순대부(奉順大夫 정3품) 예조참의禮曹參議를 역임하였으며, 조부 小亨소형은 봉훈랑(奉訓郞 종5품) 의영고사義盈庫使를, 부친 뉴紐는 무관으로 어모장군(禦侮將軍 정3품) 행충좌위사용行忠佐衛司勇을 역임하는데 그쳤다. 고관대작 집안이 아니라 평범한 사대부가였던 것이다.[*註4]
한훤당 자신 또한 벼슬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았다. 27세(성종11년.1480) 때 생원시(3등32인)에 입격하였지만 대과와는 인연이 없었고, 41세(성종25년.1494) 때 비로소 경상감사의 추천을 받아 남부참봉(南部參奉 종9품)에 임명되었다.
이후 약 4년에 걸쳐 전생서참봉(典牲暑參奉 종9품. 42세), 군자감주부(軍資監主簿 종6품. 43세),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 정6품. 43세), 형조좌랑(刑曹佐郞 정6품. 44세) 등을 역임하였다. 그러나 45세(연산군4년. 1498) 7월 무오사화가 발발하자 곧 바로 평안도 희천으로 유배되었고, 2년 후 47세(연산6년. 1500) 때 전라도 순천으로 이배되었다가, 연산군 10년(1504) 51세를 일기로 순천 유배지에 세상을 떠났다. 50여 평생동안 유일遺逸로 관계에 진출하여 약 4년간 6품관을 역임한 것이 관직 생활의 전부였던 것이다.[*註5]
이처럼 한훤당은 문벌이아 관직이력 상으로는 당대에 명성이 드러날 아무런 근거가 없었다. 다만 공부하는 자세가 남달랐고, 추구하는 학문의 성격이 예사롭지 않았으며, 공부한 내용을 평소 생활에 구현하는 실천성과 후학의 양성에 특별히 정성을 기울였다는 점 등은 생존 당시부터 이미 정평이 나 있었다. 이와 같은 사실은 한훤당과 동문이면서 동갑내기 친구이기도 한 남효온의 다음과 같은 언급에 잘 드러나 있다.
① 김굉필은 字가 대유大猷로, 점필재佔畢齋에게 수업하였다. 경자년(성종11년.1480) 생원에 입격하였다. 나이가 나와 같지만 생일은 나 보다 늦다. 현풍에 살았다. 우뚝한 행실이 견줄 데 없고, 평소에도 반드시 갓을 쓰고 띠를 매었으며, 아내 외에는 여색을 가까이 한 적이 없다. 손에서 『小學』책을 놓지 않았다. 인정(人定 밤10시)에 잠자리에 들어 계명(鷄鳴 새벽2시)이면 일어났다. 사람들이 혹 나라일을 물으며 반드시 ‘소학동자小學童子가 어찌 대의大義를 알겠는가.’ 하였다.
일찍이 시를 지어 ‘글공부 하면서 여태 천기를 몰랐는데. 『소학』 책 가운데서 지난 잘못 깨달았네.’라고 하자. 점필재 선생이 비평하기를 ‘이 말은 곧 성인聖人 될 기초니. 허노제許魯齊[*註6] 후에 어찌 그런 인물이 없으랴’ 하였으니, 그 소중하게 여김이 이와 같았다. 나이 30세 이후에 비로소 다른 책을 읽었다. 후진 가르치기를 게을리 하지 않아서 현손賢孫[*註7] 이장길李長吉 이적李勣 최충성崔忠成 박한공朴漢恭 윤신尹信 같은 이들이 모두 그 문하 출신으로, 훌륭한 재능과 돈독한 행실이 그 스승과 같았다. 나이가 많아질수록 도가 더욱 높아갔지만 세상을 돌이킬 수 없고 道를 실천할 수 없음을 알고는 재능을 숨기고 자취를 감추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또한 이를 알아주었다. [*註8]
② 김굉필은『小學』으로 자신을 다스리고, 옛 성인을 표준으로 삼았으며, 후학을 불러 모아 성심껏 쇄소灑掃의 예를 집행하니, 육예六藝의 학문을 닦는 사람이 앞뒤에 가득하였다. 장차 비방의 논의가 비등하려 함에 정여창이 그만두기를 권하였으나 그는 듣지 않았다. 일찍이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승려 육행陸行이 불법佛法을 가르쳐 공부하는 제자가 천여 명이나 되었다. 그 친구가 이를 말리며 ‘화환禍患이 두렵다’ 하니, 육행이 ‘먼저 안 사람이 뒤에 알 사람을 깨우치고 먼저 깨달을 사람을 깨우치도록 함이니, 나는 아는 것을 남에게 알려줄 따름이오, 그 화복禍福은 하늘에 달렸다. 내가 어찌 상관하리오.’하였다. 육행은 비록 중이라서 취할 것이 없지만 그 말만은 지극히 공정하다” 하였다.[*註9]
③ 業文猶未識天機 글공부 하면서 여태 천기를 몰랐는데,
小學書中悟作非 소학 책 가운데 지난 잘못 깨달았네.
從此盡心供子職 이제부터 마음껏 지식 도리를 해야지,
區區何用羨輕肥 구구하게 어찌 부귀영화를 부러워하랴.[*註10]
① ②는 남효온이 당대에 직접 보고 들은 내용을 기록한 것이고, ③은 ①에서 밑줄 친 부분, 곧 한훤당 자신이 지은 「독소학讀小學」이란 시의 전문이다. 남효온은 한훤당과 아주 가까우면서도 비판적 태도를 견지한 인물이었다. 32세 무렵 금강산과 개성을 유림할 때는 그 곳에 적혀 있던 한훤당의 이름과 시를 보고 ‘친구 대유大猷’ ‘친구 金大猷의 정다운 이름’이라 하였고,[*註11] 38세 때는 성서城西에서 독서하고 있던 한훤당을 직접 찾아가기도 하였다.[*註12] 그리고 이즈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잠시 절교를 한 적도 있고,[*註13] 39세 때는 절교한 사이임에도 불구하고 한훤당이 다시 남효온을 찾아가 병문안을 하기도 하였다.[*註14] 서로 아주 친밀하면서도 언제나 비판 할 수 있는 개성의 소유자였던 것이다. 그래서 남효온의 한훤당에 대한 평가는 대단히 객관적인 것으로 후대에 널리 신뢰를 받았는데, 이런 점에서 위에 인용한 남효온의 언급은 한훤당에 대한 당대의 가장 정확한 기록이라고 할 수 있을 법하다.
남효온이 기록한 내용의 핵심은 대략 4가지이다.
첫째, 그는 『소학』을 읽고 지난 공부의 잘못을 깨달았고, 스스로 소학동자라 자처하면서 30세까지 다른 책을 보지 않았다 할 정도로 『소학』 공부에 매진하였다. 둘째, 공부한 것 (특히 『소학』)을 실천에 옮겨 몸가짐과 행실이 반듯하고 성실하였으며 우뚝하여 견줄 데가 없었다. 셋째, 제자 양성에 노력하여 훌륭한 인재가 그 문하에서 많이 나왔고, 이에 대한 비판과 충고가 없지 않았으나 개의치 않고 정성을 기우렸다. 넷째, 나이가 들수록 도가 높아졌고, 도를 실천할 수 없음을 알고 재주를 숨기고 자취를 감추었지만 사람들이 또한 알아주었다는 등이다.
주지하다시피 『소학』은 유교의 핵심적 실천 윤리를 「입교立敎」, 「명륜明倫」, 「경신敬身」, 「계고稽古」, 「가언嘉言」, 「선행善行」 등 6편으로 나누어 편찬한 책이다. 이 책은 고려 말에 수입되어 조선 초부터 이미 누차 그 중요성을 강조한 바 있고, 과거시험 예비과목으로 삼아 독서를 강권하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제대로 읽고 실천한 사람이 드물었다. 어린이용 윤리 교과서 혹은 과거시험 준비용 도서 정도로 활용하는 수준에 그쳤다. 그런데 한훤당은 달랐다. 이를 통해 이전 공부의 잘못을 깨달았고, 30세까지 다른 책을 보지 않았다고 할 정도로 『소학』 공부에 특별히 공력을 기우렸다. 『소학』이 당시 지식계에 만연한 문장학文章學이나 과거지학枓擧之學과 달리 의리학義理學의 근본임을 깊이 깨닫고 실천하는데 매진하였단 말이다. 남효온의 평가는 바로 이를 지적한 것에 다름 아니다.
그래서 그가 『소학小學』에 기초한 의리학의 탐색과 실천에 매진함으로써 자신의 몸가짐이 반듯하고 우뚝했음은 물론, 제자 양성을 통해 이런 새로운 학풍 조성에 진력함으로써 당대에 이미 명성이 드러났다고 평가한 것이다.[*註15]
남효온 외에도 한훤당의 인품이나 학문을 직·간접적으로 언급한 사람이 더러 있다. 김맹성(金孟性 1437∼1487), 양희지(楊熙止 1439∼1504), 이심원(李深源 1454∼1504)같은 이가 그런 사람들이다. 김맹성은 한훤당의 처가 고향인 성주군 가천면에 살았고, 스승 김종직의 친구이기도 했는데, 한훤당은 처가 고향을 자주 드나들며 그를 찾아뵙고 스승처럼 모셨다.[*註16] 양희지는 그가 희천으로 귀양 갈 때 위험을 무릅쓰고 위로의 편지를 보냈고, 희천에 있던 그에게 조광조를 제자로 천거했던 장본인이기도 하다.[*註17] 그리고 주계군朱溪君 이심원은 효령대군의 증손자로 한훤당과 아주 가까운 친구사이였으며, 갑자사화 때 함께 처형을 당하였다.
이처럼 이들은 모두 한훤당과 친분이 각별한 스승과 선배 친구였다. 그래서 한훤당에 대한 이들의 평가 또한 칭찬 일색이었다. “점필재 문하에서 소학을 공부하며 조용히 진리의 참 맛을 음미한 인물”[*註18] “마음이 깨끗하고 세속에 물들지 않아 장래가 크게 촉망되는 인물”[*註19] “어려운 시대를 안분자락安分自樂하고 후학을 가르쳐 마침내 오도吾道를 크게 떨칠 사람”[*註20]이라 한 것이 그런 예이다. 이런 칭찬은 그와 친분이 남다른 인사들의 일방적 언급이란 점에 한계가 없지 않다.
그러나 그가 시류에 휩쓸리지 않는 삶을 살았고, 소학을 통해 진리의 참 맛을 음미하는 색다른 공부를 지향하였으며, 후학 양성을 통해 유학의 도를 크게 진작시킬 인물로 촉망받았던 사실 등은 여기서도 충분히 확인할 수 있다.
3. 추증追贈 가증加贈 과정상의 평가
한훤당에 대한 평가는 그가 세상을 떠나고 2년 뒤에 발발한 중종반정(1506)을 계기로 새로운 차원에 들어섰다. 중종반정은 성희안成希顏, 박원종朴元宗, 유순정柳順汀 등 이른바 훈구파가 신수근愼守勤, 임사홍任士洪 등을 살해한 다음 연산군을 폐위시키고 성종의 둘째아들 진성대군(晉城大君 연산군의 이복동생)을 왕으로 추대한 사건이다. 반정 이듬해(1507) 중종은 연산군 당시 무오사화(1498)와 갑자사화(1504) 등으로 해를 당한 인물들에 대한 신원伸寃과 추증追贈을 단행하였다.
이 일을 먼저 건의한 자는 김흠조金欽祖”[*註21]였고 김안로金安老, 정광필鄭光弼, 신용개申用漑, 김전金銓, 이자李耔 등이 여기에 호응하였다. 한훤당 또한 이 때 정여창鄭汝昌과 함께 신원되어 통정대부(通政大夫 정3품) 승정원도승지承政院都承旨에 추증되고, 자손을 녹용錄用하라는 명을 받았다. 그리고 이를 논의하는 과정에 자연스럽게 그에 대한 인물평이 뒤따랐는데, 평가 내용은 대략 그가 ‘유학의 정맥正脈을 얻은 사람’, ‘학문이 순정醇正하고’, ‘실천이 독실篤實하며’, ‘학자들이 종사宗師로 여긴’, ‘현자賢者’라는 것이었다.
“8월 2일 주상이 여러 신하를 불러 종묘宗廟 뵙는 일과 절의節義에 관한 일 등을 물었다. 김안로金安老가 ‘김굉필 정여창이 연산군 때 죄를 입었으나 그 자손을 죄를 입은 사람의 자손에 대한 예로 녹용해서는 안 됩니다. 마땅히 賢者의 후손으로 녹용하여 그 처자식이 굶주림과 추위를 면하도록 해야 합니다’ 하였다.
주상이 정광필과 신용개를 돌아보며 ‘대신의 생각에는 어떠한가?’ 하니, 정광필 등이 같은 말대로 대답하기를 ‘지조를 지키고 실천한 사람이니 포상하고 장려해야 합니다.’ 하였다. 김전은 ‘그 사람은 학문이 순정하고 명예와 권세를 좆지 않았으며 유학의 정맥을 얻은 사람입니다. 학자들이 종사로 여겼는데, 마침내 그 학문과 행실 때문에 화가 미쳤으니 매우 애통하고 안타깝습니다.’ 하였다. 이자李耔는 ‘김굉필과 정여창은 학술이 순정하여 우리나라에 이 같은 사람이 없었으니 유자儒者가 지향할 바를 안 것은 오직 이 두 분 덕분입니다. 옛날에 관직을 주고 표창한 일이 있었지만, 이것이 현자에게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나라를 가진 임금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이니, 그 자손을 녹용해야 합니다.’ 하였다. 승정원에 전교하기를 ‘김굉필 등의 자손을 녹용하면 좋겠다.’ 하였다.”[*註22]
중종2년(1507) 6월 한훤당에게 도승지를 추증한 다음, 2달이 더 지난 8월 2일 중종이 그의 자손을 벼슬에 등용할 것인가에 대하여 金安老 鄭光弼 申用漑 金銓 李耔 등과 의논한 내용이다. 여기서 김안로는 한훤당을 ‘현자’로 예우해야 한다고 하였고, 정광필과 신용개는 지조를 지키고 실천에 힘쓴 ‘조수천이지인操守踐履之人’이라 하였다. 그리고 김전은 ‘유학의 정맥을 얻어 학문이 순정하고 학자들이 종사로 여긴 사람’이라 하였고, 이자는 ‘학술이 순정하여 유자가 지향할 바를 알게 해 준 인물’이라고 평가하였다.
이들 가운데 한훤당을 일방적으로 호평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김안로(1481-1537)는 왕실 척족으로”[*註23] 기묘사화 이후 죄의정에 올라 이언적을 유배시키는 등 사림파와 대립각을 세웠던 인물이다. 정광필(1462~1538)은 이조판서 정난종鄭蘭宗의 아들로 중종반정 이후 영의정을 역임하였고, 기묘사화 때 조광조를 구원하려다 잠시 좌천된 적은 있으나, 곧 바로 영의정에 복직하여 중종 말년까지 고위관직을 두루 역임한 대표적 훈구관료이다. 김전(1458~1523)은 기묘사화를 야기한 장본인으로”[*註24] 1521년 한훤당의 문인 최수성崔壽城을 죽인 인물이다. 신용개(1463~1519)는 한훤당과 김종직 문화의 동문이고, 李耔(1480~1533)는 기묘명현己卯名賢 중 한 사람으로, 한훤당과 비교적 가까운 인물들이라 할 만하다.
그러나 신용개는 영의정 신숙주의 손자로 양관 대제학 우의정(1516) 좌의정(1518) 등을 역임한 훈신이었고, 이자 또한 대사간 이례견李禮堅의 아들로 형조판서 우참찬 등을 역임한 관료였으며, 김안로 남곤 등 훈구 관료들과도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그리고 김전과 정광필은 한훤당보다 각각 4살 8살 연하로 연배가 비슷하여 한훤당의 인물과 학문에 대해 직접 견문한 바도 있었다.
이런 점을 고려할 때 이들의 한훤당에 대한 평가는 비교적 냉정하고 비판적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혈연이나 학연에 구애되지 않았고, 정치적 입장 또한 다른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평가는 한훤당 생존 당시보다 한층 나았다. ‘학문이 순정하다’거 한 것은 『소학』 중심의 의리학에 진력했던 것을, ‘조수천이지인操守踐履之人’이라 한 것은 공부한 내용의 실천에 힘썼던 것을 ‘유자가 지향할 바를 알게 해 주었다’는 것은 후학 양성에 노력하였던 것을 확대 해석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유학의 정맥을 얻었가’거나 학자들이 종사로 여긴 인물’ ‘현자로 예우해야 마땅하다’는 등은 전에 볼 수 없었다. 이것은 한훤당을 개인이 아니라 특정 학풍의 대표자로, 공시적共時的이 아니라 유학의 도통 계승이란 통시적通時的 관점에서 이해하고자 한 것이었으며, 제한적이기는 하나 여기에 ‘宗師’ ‘賢者’ 등의 위상을 부여함으로써 한국 유학사에 현저한 공적이 있는 인물로 평가했던 것이다.
이와 같은 평가는 조광조(趙光祖 1482~1519)를 비롯아여 정붕(鄭鵬 1467~1512) 김안국(金安國 1478~1543) 성세창(成世昌 1481~1548) 김정국(金正國 1485~1541) 김정(金淨 1486~1521) 김구(金球 1488~1543) 등 많은 제자들이 관직에 진출하여 한훤당에 대한 차별화를 시도하고, 가증加贈 증시贈諡 문묘종사文廟從祀 등을 추진하면서 한 단계 더 나아갔다. 이들의 한훤당에 대한 인식은 한훤당 당대의 동문 동료는 물론 후대의 훈구관료와도 차이가 많았다. 한훤당의 학문이 ‘유학의 정맥을 얻는’데 그친 것이 아니라 이미 단절된 절학絶學 부전지학不傳之學, 곧 도학道學을 우리 유학사에서 처음 창도한 유일한 사람이라 추숭하였고, 『小學』과 그 실천에만 특징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대학大學』과 『육경六經』을 두루 탐색하여 존양성찰存養省察을 본체(體)로 삼고 제가齊家 치국治國 평천하平天下를 활용(用)으로 삼아 도착道學 자체가 고도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하였으며, 학자들이 종사宗師로 여겼다 했을 뿐만 아니라 태산북두泰山北斗처럼 존숭하여 유림의 종장宗匠, 곧 유종儒宗이 되었다고 하는 데까지 나갔다.
① 우리나라는 기자箕子 때부터 문자가 있어서 삼국과 고려를 거쳐 조선에 이르기까지 문학이 찬란히 빛났다. 그러나 도학에 대해서 들어보지 못하였으니, 도학을 처음 창도하여 일으킨 것은 오직 공 한 사람뿐이다.....날마다 『小學』 『大學』 책을 읽어 규모規模로 삼았고, 육경을 깊이 탐색하고 성誠과 경敬을 힘써 견지하였으며, 존양성찰存養省察을 본체[體]로 삼고 제가 치국 평천하를 활용[用]으로 삼아 큰 성인의 경지에 이르고자 하였다. ...... 공의 학문은 전해지지 않던 학문[不傳之學]을 얻어 굳건하게 우뚝 서서 한 시대 학자들이 태산북두泰山北斗처럼 존경하였고, 미처 문하에 나가지 못하고 사숙私淑하여 훌륭하게 된 사람 또한 많으니, 그 베푸심이 원대하도다.”[*註25]
② 김안국이 일찍 경상도관찰사가 되어 간절한 마음으로 교화를 우선하고, 여러 고을 향교에 소학을 가르치게 하였으며, 시를 지어서 권면하였다. 현풍 학자들을 권면하면서 ‘김굉필선생께서 성리학을 首倡하셨으니, 오늘에 이르기까지 학자들이 지향할 바를 알고 정자程子 주자朱子 배우기를 바램은 모두 선생의 힘이다“고 하였다.”[*註26]
③ 김굉필은 성품과 도량이 온화하면서 강인하고, 재주와 식견이 명철하고도 민첩하며, 젊을 때부터 큰 뜻을 품고 힘써 성현을 공부하였습니다. 충성스럽고 미덥고 독실하고 공경하여 모든 행동이 예의를 준수하였고, 학문이 정심精深하고 도덕이 성립되어 끊어진 학문(絶學)을 떨쳐 일으켜 한 시대 유림의 종장[儒宗]이 되었으니, 유학에 끼친 공이 큽니다. 청컨대, 관작을 높이고 시호를 내리며 문묘에 모셔서 선비가 나아갈 길을 밝히도록 하십시오.[*註27]
④ 조정과 민간에 유명한 인물과 훌륭한 학자로 칭송할만한 사람이 어찌 없겠습니까? 그러나 道를 자임하여 은연중 멀리 정몽주의 학통을 계승한 자는 김굉필 같은 이가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 그 문하에 공부한 사람들이 도학道學으로 훈도해 줌을 듣고 태산북두泰山北斗처럼 여겼습니다. 지금 학자들이 오히려 덕행德行을 귀하게 여기고 문예文藝는 천시하며 경술經術을 존숭하고 이단은 배척할 줄 알게 되었으니, 전하께서 호오好惡를 분명히 하고 취하고 버릴 것을 살펴 기강을 바로잡아 교화를 선양하고자 함도 실상 김굉필의 힘에서 유래하였습니다.[*註28]
①은 문인 이적李績이 스승 한훤당의 「행장行狀」을 지으면서 언급한 것이고, ②는 『해동야언海東野言』에 등재된 문인 김정국의 일화를 인용한 것이다. ③은 중종12년(1517) 8월 10일 홍문관에서 올린 서계書啓의 일부인데, 당시 홍문관에는 한훤당의 문인 김정金淨이 부제학, 성세창成世昌이 직제학, 조광조趙光祖가 응교, 김구金球가 부교리로 있었다. 그래서 사실상 한훤당의 핵심 문인들이 이 서계를 주도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며[*註29], 평가내용 또한 이들의 공통된 견해를 반영한 것이라 할만하다. ④는 같은 달 성균관에서 올린 상소문의 일부인데[*註30], 성균관에도 한훤다의 핵심 문인이었던 김정국金正國이 바로 대사성 다음 직책인 사성司成을 맡고 있었다.
이런 글에서 언급한 내용을 보면 문인들의 한훤당에 대한 인식이 기존의 평가보다 훨씬 높았음을 알 수가 있다. 우리나라 유학사에서 부전지학不傳之學, 도학道學을 처음으로 창도한 수창도학자首倡道學者로 칭송하였고, 『小學』은 물론 『대학大學』과 『육경六經』 등 주요 경전을 두루 깊이 공부한 선각자 주자학자로 인식하였으며, 그래서 학자들이 동국 유종儒宗처럼 태산북두泰山北斗처럼 존숭하였다고 추켜세웠다. 이런 관점의 연장선상에서 김안국은 현풍향교를 두고 지은 시에서 “선생의 학문을 세상이 으뜸으로 받들어, 염락濂洛의 남은 기풍을 해동海東에 떨치셨다” 고[*註31] 하여 한훤당이 『小學』은 물론 염락관민濂洛關閩의 송대 성리학 자체에 정통한 유종儒宗이라 말하였고, 또 가야산에서 독서하고 있던 유생들에게 시를 지어주면서 “듣건데 그곳이 金公께서 살던 곳이라 하니 가야산이 응당 무이산武夷山[*註32] 이리라”고 하여 한훤다의 학문 터전이었던 가야산을 주자의 학문터전이었던 무이산에 곧바로 비견해서 말하기까지 하였던 것이다.
이런 인식을 바탕으로 이들은 반정 이후 정6품 형조좌랑에서 정3품 도승지로 일차 추증한 바 있던 한훤당의 관직을 한층 더 높여주는 가증加贈과 이에 따른 증시贈諡 및 문묘종사文廟從祀 등을 함께 추진하였다. 이에 가장 앞장선 사람은 물론 조광조였다. 조광조는 중종12년(1517) 2월 선비들의 기풍이 무너진 현실을 걱정하면서 이를 바로 잡을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 바로 김굉필 정여창 같은 사람을 포장襃獎하는 것이라고 건의하였다.[*註33] 그리고 조광조의 이 건의가 발단이 되어 가증加贈 증시贈諡 문묘종사文廟從祀 요청이 이어졌다.[*註34] 8월 10일 홍문관에서는 부제학 김정金淨이 주도하여 관직을 높이고 시호를 내려 문묘에 종사해야 한다는 내용의 서계書啓를 올렸고[*註35] , 같은 날 의정부에서는 정광필鄭光弼 신용개申用漑 이계맹李繼孟 등이 주도하여 벼슬을 도승지로 추증한 정도르는 부족하니 관작을 더 높여주고 자손을 찾아 등용하라고 건의하였다.[*註36] 그래서 8월26일에는 실재 관작을 정1품 우의정 가증加贈하라는 윤허가 내려왔다.[*註37]
이와 같은 문인들의 남다른 인식과 추숭 활동의 이면에는 그 문하에서 공부하며 직접 보고 들은 경험이 작용했을 터이다. 따라서 이들의 평가는 저술이 거의 남아 있지 않는, 그래서 글로 확인하기 어려운 한훤당의 진면곡을 보여준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이 모두 학문적으로나 정치적으로 한훤당과 특수 관계에 있었던 검을 감안하면 객관성과 공정성에 문제가 없다고 할 수 없으며, 실재 이를 너무 지나치다고 비판하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사헌부 집의執義 조언형曺彦亨과 지평持平 박수량朴守良, 사간원 사간司諫 조한필曺漢弼 등은 그를 우의정으로 다시 가증하는 자체가 지나친 은전이라 비판하였고, 그 아내에게 해마다 곡식을 제공하도록 한 조처 또한 전례 없는 일이라고 비판하였다.[*註38] 그리고 정광필鄭光弼 신용개申用漑 김전金詮 고형산高荊山 이계맹李繼孟 안당安瑭 윤계적尹繼啇 등 가증加贈이나 세름歲廩이 제공에 동의하고 동참했던 인물들조차 증시贈諡와 문묘종사文廟從祀에는 동의하지 않았다. 문묘에 모셔 국가적으로 받들어야 할 국유國儒가 아니라 지방에 사우祠宇를 세워 제자와 자손 중심으로 모셔야 마띵힌 향선생鄕先生 정도로 평가하였던 것이다.
“문묘에 종사함은 지극히 중대한 문제입니다. 양시楊時 이동李侗 같은 현인으로서도 오히려 이에 참여하지 못하였는데 한 때의 논의에 따라 갑자기 허락한다면 경솔할까 두렵습니다. 삼가 살펴보건데 禮에 鄕先生을 社(지방 祠堂)에 제사 드린다는 글이 있습니다. 신의 생각에는 마땅히 송나라 때 염락제현濂洛諸賢을 포상하고 높였던 고사를 본받아 높은 관직을 주고 자손을 등용하여 또 평소 강도講道하던 곳에 사우祠宇를 세워 여러 제사의 반열에 참여시켜 관청에서 제사를 드리게 함이 마땅할 듯합니다. 이렇게 하면 비록 문묘 종사에 들지 못하더라도 나라에서 선비를 높이고 도를 중시하는 취지에는 하나도 모자람이 없을 것입니다.”[*註39]
중종12년(1517) 홍문관 성균관 의정부 등에서 한훤당의 문인을 중심으로 加贈 贈諡 文廟從祀 등을 연이어 건의하자 중종이 재신宰臣들에게 이 문제에 대한 수의[收議 의견수렴]를 요청하였는데, 위는 바로 그 수의 결과인 의득議得의 일부이다. 의득議得은 국왕이 중요 사안에 대하여 의견수렴을 요청할 겨우 재신들이 여러 견해를 청취하고 논의하여 정리된 공론을 국왕에게 보고하는 문서 양식이다. 따라서 단순한 의견 개진인 의議와 달리 조정 중신들이 대체로 동의하는 최종적인 견해를 담은 것이라 할 수 있겠는데, 여기에 나타난 한훤당에 대한 평가는 제자들의 견해와 큰 차이가 있었다. 관직을 더 높여주고 자손을 찾앙 등용하는 것까지는 용납할 수 있지만, 문묘에 종사하여 조정에서 국유國儒로 예우함은 성급하고 경솔할 수 있다고 경계하였으며, 향선생을 제사하는 예에 따라 평소 강학하던 장소에 사우祠宇를 세워 지방관으로 하여금 제사를 드리게 해도 모자람이 없다는 입장을 표명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의득議得의 내용은 이후 그대로 국가의 공식 입장이 되었다. 그래서 관작을 도승지에서 우의정으로 다시 높여 주는 일[加贈], 후손을 찾아 관직에 등용시켜 주는 일[錄用], 처자에게 해마다 곡식을 보내주는 일[歲廩] 등은 지나친 예우라는 비판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대로 시행하도록 하였고, 반면 시호諡號를 내려주고 문묘文廟에 종사從祀하는 일은 줄기찬 요구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허락하지 않았으며, 대신 강학처에 사우祠宇를 세워 봄과 가을 중월仲月에 관官에서 제사를 드리도록 조치하였다. 추숭追崇에 적극적인 문인들과 이를 견제하고 비판하는 인사들 간의 주장을 적당하게 절충한 타협안으로 시행했던 것이다.
한훤당의 문인들이 이런 타협안에 순순히 승복했던 것은 물론 아니다. 이후에도 기회가 있을 때마다 증시贈諡와 문묘종사文廟從祀를 건의하였다.[*註40] 그러나 중종14년(1519) 기묘사화의 발발과 함께 모든 논의가 사실상 중지되었다. 조광조를 비롯한 주요 문인들이 대부분 처형되거나 파직을 당하여 더 이상 손쓸 도리가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강학처에 사우祠宇를 세우도록 한 일도 물거품이 되었다. 강학처가 분명하지 않은데 모처럼 억지로 저장하여 사우를 세우는 것이 사실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이유 때문이다. 그래서 결국 관에서 현풍에 있는 집안 가묘家廟에 제사를 드리는 것으로 대치하고 말았던 것이다.[*註41]
이처럼 한훤당에 대한 평가는 중종반정 이후 생존 당시 보다 한결 높아지고, 특히 문인들의 존경과 추숭 의지가 대단하였지만, 동국유종東國儒宗으로 공인 받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절학絶學을 수창首倡한 문묘에 종사해야 마땅하다는 문인들의 생각과 달리, 대다수 훈구파 관료들은 후손과 문인이 주축이 되어 지방 사우祠宇에 모실 향선생鄕先生 정도로만 인정하였으며, 이마저도 지나치다는 비판이 적지 않았던 것이 당시의 냉정한 현실이었다.
4. 퇴계退溪 • 남명南冥 양문兩門의 평가와 추숭追崇
한훤당寒暄堂에 대한 평가와 추숭追崇은 선조 이후 이황李滉과 주식曺植 및 그 문인들이 한훤당의 직전 제자들과 궤를 같이하는 주장을 펼치기 시작하면서 다시 한 차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이 때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은 바로 이황이었다. 이황은 먼저 한훤당과 김종직의 학문적 차별성에 주목하였다. 한훤당이 김종직 문하에서 공부하였고, 이 때문에 무오사화에 연루되어 결국 목슴을 잃었던 것이라는 것은 누구나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러나 실상 한훤당은 32세 무렵부터 이미 김종직과 갈라서서 독자적인 길을 걷기 시작하였다. 이와 같은 사실은 한훤당 생존 당시에 남효온이 이미 이렇게 지적한 바 있다.
“점필재 선생이 이조참판이 되었음에도 조정에 건의한 일이 없자 김굉필이 시를 지어 올려 「도란 겨울이면 가죽옷 입고 여름이면 얼음을 마시는데 있으니, 날이 개면 다니고 장마 들면 그치기를 어찌 완전히 할 수 있겠습니까? 난초도 세속에 따르면 마침내 변하고 마니, 소가 밭 갈고 말을 탄다 한들 누가 믿겠습니까?」하였다. 점필재 선생이 회답하는 시를 지어 말하기를, 「분수에 넘친 관직이 참판에 이르렀건만, 임금 바로잡고 세속 바로 잡는 일을 내 어찌 할 수 있으랴. 후배들이 나를 못났다고 조롱을 하게 만들었지만, 구구하게 권세와 명리에 편승하지는 않는다네.」 하였으니. 대개 이(김굉필의 시)를 언짢게 여겨서다. 이후로 점필재와 갈라섰다.”[*註42]
남효온이 『사우명행록』에 기록해 놓은 기사이다. 종지;ㄱ이 이조참판에 올라서도 조정에 제대로 건의한 일이 없자 한훤당이 시를 지어 풍자하였다. 시에서 한훤당은 ‘道’란 추운 겨울이면 가죽옷을 입고 더운 여름이면 얼음물을 마시듯 외부 환경에 휘둘리는 것이 아니라 이에 대처하는 자세에 달려있는 것인데, 날이 개면 나가 다니고 장마가 오면 들어앉듯 외부환경에 순응하기만 해서야 온전히 행할 수 있겠냐고 반문하였다. 그리고 이렇게 세속에 순응만 하다 보면 난초 같은 존재로 마침내 속물로 변하고 말 것이니. 그렇게 되면 소가 밭을 갈고 말이 타는 존재란 당연한 이치인들 누가 믿고 따르겟냐고 하였다.
표현이야 비유를 통해 아주 완곡하게 했지만 그 속에 투영한 의미는 자못 준엄하고도 날카롭다. 이렇게 했으니 김종직의 마음이 편할 리 없었다. 그래서 분에 넘치는 높은 자리에 올라 임금을 바로잡고 세속을 구제할 능력이 없는 사람이라 스스로 겸양한 다음, ‘그대가 나를 이렇게 못났다고 조롱하지만 내가 구구하게 권세에 편승하고 명리를 좆고 있는 것은 아닐세.’라고 어렵게 항변하였다. 남효온은 바로 이 사실을 적시하면서 이를 계기로 한훤당과 김종직이 사제지간임에도 불구하고 갈라서게 되었다고 하였다. 김종직이 이조참판에 재직한 것이 성종15년(1484) 10월부터 16년(1485) 여름까지 였으니, 대략 한훤당 32세 무렵인 셈이다.[*註43]
두 분이 정말 남효온의 지적처럼 이 시 때문에 갈러섰는지는 알 수 없다. 그리고 이 시의 풀이를 두고 후대에 의견이 분분하였으며, 시 한 수 때문에 스승과 제자가 갈라섰다고 할 수 있는 지에 대해서도 설왕설래가 많았다. 이황은 바로 이즈음에 제자들의 질문을 받고 이 시에 대한 재해석을 시도하였다.[*註44] 그런 다음 꼭 이 시 때문은 아니라 할지라도 두 분이 갈라선 것은 분명하다고 단정하였다. “점필재문집을 보면 오직 시문詩文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였고 도학道學에는 유의한 적이 없어서 한훤당이 이를 귀책사유로 삼았다. 사제간의 의리가 아무리 중요하다 한들 이렇게 지기志氣가 같지 않으면 갈라지지 않을 수 없으니, 어찌 특정 사건으로 나타나서 서로 드러내놓고 비방하고 배척한 뒤에라야 갈라섰다고 하겠는가.”[*註45] 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김종직은 시문을 중요하게 생각하였고 한훤당은 도학을 추구하여 서로 뜻한 바가 달랐기 때문에 갈라설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서로 드러내놓고 비방하고 배척한 일이 없었다 하여 사제 간의 의리 운운하면서 갈라서지 않았다고 할 수 있겠냐는 것이 이황의 견해였다. 이와 같은 이황의 견해는 한훤당을 김종직과 차별화시켜 비로소 그늘에서 해방시켰고, 사제 간의 의리를 벗어나면서까지 도학을 추구한 꿋꿋한 도학자로 부각시킴으로써, 그에게 독자적인 위상을 부여할 수 있는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그리고 이황은 이전에 조광조를 비롯한 한훤당의 직전제자들이 스승의 증시贈諡 문묘종사文廟從祀 등을 추진하며 제기했던 견해를 참고하여 유학사에서의 한훤당의 위상에 대한 새로운 의견을 직접 피력하기도 하였다. 나라에서 훈구관료를 중심으로 평가한 향선생鄕先生이 아니라 단연코 근세도학지종近世道學之宗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註46]
“김선생의 도학연원은 진실로 후학이 감히 헤아릴 수 있는 바가 아닙니다. 그러나 선왕조 때(중종) 추장追獎했던 뜻으로 미루어 보면 단연코 근세도학의 으뜸(近世道學之宗)이라고 생각합니다. 한 가지 훌륭함을 가지고 향현鄕賢으로 제사드릴 만한 두 李公(李兆年 李仁復)에 비하면 덕업과 명성이 이미 다른 점이 있으니, 그 존숭의 취지 또한 달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처럼 같은 사당에 함께 제사 드린다면 아마 훗날 비판 의론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註47]
율곡 이이李珥의 장인인 성주목사 노경린(盧慶麟 1516-1568)이 명종13년(1558) 관내에 연봉서원延鳳書院을 세우고 여기에 고려 말 성주지역 출신 학자인 이조년李兆年 이인복李仁復과 인근 달성지역 출신의 한훤당을 함께 모시고자 하면서 이황에게 의견을 구하자 이황이 여기에 답한 편지의 일부이다. 노경린은 당초 이 서원에 세분을 함께 모시면서 서벽에는 한훤당을 주벽으로, 동벽에는 이조년을 주벽으로 하고, 이인복을 여기에 종향하는 방식으로 모시려 하였다. 그러나 위치 문제를 두고 유림의 의견이 분분해지자 이황에게 편지를 보내 자문을 구하였는데, 이황은 이에 답하면서 자신의 분명하고 단호한 견해를 표명하였다. 한훤당은 이조년 이인복과 함께 고을에서 향현鄕賢으로 모실 인물이 아니며, 두 분에 비해 덕업과 명성이 훨씬 높은 근세 도학의 종장(近世道學之宗)이니 예우 또한 당연히 달리해야 한다는 것이다. 고을에서 남들과 함께 모실 향선생 정도가 아니라 그보다 격이 높은 국유國儒요 유종儒宗으로 모셔야 한다는 말이며, 그렇게 하지 않을 경우 후세의 비판을 면치 못할까 걱정이라고 하였다.
이황이 이와 같은 견해를 표명한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실제 연봉서원이 개편되었다. 선조1년(1568) 이황의 대표적 문인 중 한 사람으로 당시 성주에 살고 있건 정구鄭逑가 주관하여 서원에 종사할 인물을 중국의 정이[程頤, 호 이천伊川]과 주자[朱子 본명 희熹]를 주향으로, 한훤당을 배향으로 완전히 재조정하였고, 서원 이름 또한 정이천의 학문 터전이었던 伊川과 朱子의 학문 터전이었던 운곡雲谷의 두 글자를 다서 천곡서원川谷書院으로 고쳤으며, 함께 모시던 이조년 이인복은 향현으로 분리하여 서원 동편에 별도의 사당을 마련하여 모시도록 조치하였다. 그리고 선조6년(1573) 마침내 이렇게 조정된 형태로 사액을 받았는데, 이와 같은 배향인물의 재조정과 위치의 결정 및 명칭의 변경 등에 이황의 자문이 있었음은 물론이다.[*註48]
이 외에도 이황은 한훤당을 추숭하는데 많은 역할을 하였다. 순천부사로 있던 문인 이정李楨이 한훤당의 글을 모아 간행한 『경현록』을 보내오자 한훤당의 손자 김립金立과 외증손 정곤수鄭崑壽가 보내온 자료를 근거로 세계世系 사실事實 시문詩文 청종사請從祀 등 4개 항목에 걸쳐 이를 정밀하게 수정 보완한 『景賢錄編定別錄總目』을 편찬하였고, 순천에 옥천서원玉川書院을 짓자 경현당景賢堂 임청대臨淸臺 옥천정사玉川精舍 및 옥천정사의 지도재志道齋, 의인재依仁齋 같은 편액을 직접 써 보냈으며, 선조40년(1607) 도동서원道東書院에 사액을 할 때도 이황의 글씨를 집자集字해 보내도록 하였다. 한훤당을 김종직과 다른 순정한 도학자道學者로 부각시키고, 향선생鄕先生이 아닌 근세도학지종近世道學之宗으로 평가한 뒤, 추숭追崇 작업에 실제 힘을 보탬으로써 그 위상을 높이는데 결정적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당시 이황과 학문적으로 쌍벽을 이루고 있던 조식曺植 또한 한훤당에 대한 평가에 있어서 크게 다르지 않은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 역시 한훤당이 김종직과 사제 간임에도 불구하고 분명하게 갈라섰음을 거듭 확인한 바 있다. 그리고 김종직과 길을 달리하여 서문이 아닌 도학의 창도를 자임하였으며, 그래서 마침내 근세유종近世儒宗이 되었다고 천명하였는데, 이런 사실이 「유사보유遺事補遺」」」와 「사우록師友錄」 등에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선생이 점필재와 갈라선 것은 선생의 처신 상 중요한 방책이었다. 점필재의 행동은 후세에 비판이 없을 수 없었느나, 만약 선생이 점필재와 갈라서지 않았다면 선생 또한 훗날 비판이 없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것이 실상 선생께서 갈라서지 않을 수 없었던 점이다.”[*註49]
“선생은 몸소 도학의 창도[道學之倡]을 자임하여 근세유종近世儒宗이 되었다. 『小學』을 실천하여 근본을 배양하였고, 『大學』을 준수하여 규모規模를 정립하였으며, 성誠과 경敬을 힘써 견지하고 유경六經을 발휘해서 성현의 경지에 이르고자 기약하였으니, 이것이 선생께서 학문한 대략이다.”[*註50]
「遺事補遺」」」와 「師友錄」에서 관련 사항을 간단하게 적시해 본 것이다. 이를 보면 조식 역시 이황과 마찬가지로 한훤당이 김종직과 갈라섰고, 스승과 달리 도학을 창도하는 독자적인 길을 갔으며, 마침네 근세유종近世儒宗이 되었다고 평가했음을 분명히 알 수 있다. 다만 김종직과 갈라진 이유를 학문적 차이보다 처신 상의 문제에 초첨을 두어 서술하고, 近世道學之宗이란 말을 近世儒宗으로 표현한 것이 차이라면 차이라 할 것이다. 그리고 한훤다의 학문적 특징을 小學에 국한시키지 않고 大學과 六經 및 誠과 敬을 견지하는 데까지 확대 해석한 점 또한 한훤당 직전제자들의 논리에 맞닿아 있음을 알 수 있다.
이황과 조식의 이와 같은 견해는 제자들에게 거의 그대로 우용되었다. 이황과 수차 편지를 주고받으며 구체적으로 이 문제를 토론한 바 있는 李楨 奇大升 鄭逑 등은 말할 것도 없고, 여타 문인들 중에도 이와 유사한 견해를 표명한 사람을 다수 확인할 수 있으며, 사제관계를 떠나 이런 견해에 동의하는 사람도 매우 많았다.
① 이정[李楨 1512-1571]
“정밀하게 사유하고 힘써 실천하여, 도가 높고 덕이 성대하며, 옛 성인을 계승하여 후학을 열어준[繼往開來*편집자 註1] 공이 二程[정호程顥•정이程頤]과 동일하다. [*註51]
② 박승임[朴承任 1517-1586]
“이 세 선생[김굉필 조광조 이언적]은 태산교악泰山喬嶽 같아 우뚝 높게 조선에 세 발 솔처럼 섰습니다. 아래로 아동과 마부에 이르기가지도 모두 다 충분히 듣고 익히 말하니 그 道의 높음과 德의 성대함이 어떻겠습니까.”[*註52]
③ 기대승[奇大升 1527-1572]
“우리나라는 본래 문헌의 나라로 일컬어져 삼국시대 이래로 호걸스런 선비가 없지 않았지만, 그 도덕의 빛남이 후세에까지 비추어진 사람을 찾아보면 대체로 드물다. 한훤당선생은 천년 뒤에 태어나 우뚝하게 서서 힘써 고인의 학문을 닦아 그 流風餘韻이 사람의 마음을 착하게 하고 세도世道를 부지하기에 넉넉하다. 지금 학자들이 자못 성현을 공부해야 함을 알고 예의의 가르침에 힘쓰면서 어찌 그것이 유래한 바를 몰라서야 되겠는가”[*註53]
④ 류성용[柳成龍 1542-1607]
“우리나라 인사들은 모두 文詞를 업으로 삼았으니, 성리학에 깊이 마음을 두고 자신을 禮로 다스리며 염락관민濂洛關閩[*편집자 註2]의 실마리를 찾음은 김굉필로부터 시작되었다.[*註54]
⑤ 정구[鄭逑 1543-1620]
“일찍이 천기天機를 깨달아 홀로 끊어진 학문(絶學)을 일으켰다. 성誠을 능히 하고 경敬을 능히 하여 오랜 세월 정심精深하였다. 염락濂洛의 정전正傳을 먼 후대에 계승하였고, 동방의 미개함을 깨어 백대의 참 스승이 되었다.”[*註55] “저희들은 또한 기자箕子 이후 2700여년에 학문이 한훤당만큼 바른 이가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기자 이후 2700여년 간에 어찌 학문을 일삼은 이가 없겠으며, 또 어찌 유학을 자임한 이가 없겠습니까만, 저희들은 감히 이렇게 말씀드리니, 듣는 자가 믿어 의심치 않을지는 저희들이 감히 알 수 있는 바가 아닙니다.”[*註56] “고 문경공文敬公 김선생 모는 동방성리학의 으뜸[東方理學之宗]이 되니, 서원을 건립하고 사당을 세움이 모두 조정의 지휘에서 나왔습니다.[*註57] ” “훌륭하신 문경공은 대종유종大東儒宗이라, 도학을 창도해 밝힘이 추노鄒魯의 기풍일세. 백대의 우러름이 누구의 공덕인가”[*註58]
위는 이황과 조식의 문하를 출입한 주요 문인들의 한훤당에 대한 언급의 일부를 제시해 본 것이다. 여기서 이들은 모두 한훤당이 조선에 성리학을 처음으로 창도한 인물이란 점을 한껏 강조하였다. 그래서 이정느 그공이 송나라 정명도 정이천과 같다고 하였고, 박승임은 고광조 이언적과 함께 태산교악泰山喬嶽과 같은 존재라고 하였으며, 기대승은 삼국 이래 천년 유학사에서 가장 우뚝한 사람이라 하였다. 특히 한훤당의 외증손이기도 한 정구의 생각은 특별했는데, 그는 한훤다이 송대 성리학의 바른 전통을 처음으로 이 땅에 전파하여 파천황破天荒의 공이 있는 사람이라 하였고, 기자箕子이래 2700여년 역사에서 가장 바른 학문을 한 사람이라고 주장하였으며, 동방성리학의 으뜸[東方理學之宗], 우리나라 유학의 종장[大東儒宗], 백대의 참 스승[百代眞師] 등 언어로 형용할 수 있는 최대의 찬사를 보냈다.
이와 같은 인식을 근거로 이들은 한훤당에 대한 추숭 작업에 적극 나섰다. 중앙 조정에서는 선조 즉위년(1567) 이래 거의 매년 문묘종사를 요청하였고, 지방에서는 이와 별도로 사우祠宇와 서원書院의 건립을 추진하였으며 문헌으로이를 뒷받침할 수 있도록 당시 이미 거의 남아있지 않던 문적을 널리 모아 문집 간행을 추진하였다.
명종13년(1558) 延鳳書院[경북 성주] 성주목사 盧慶麟 주관 창건[*편집자 註5]
명종19년(1564) 景賢堂[전남 순천] 순천부사 李楨 주관 창건
명종20년(1564) 玉川書院[전남 순천] 순천부사 李楨 주관, 景賢堂 통합
선조1년(1568) 사액, 선조37년(1604) 중건
창건년도 미상 熙川書院[평북 희천] , 선조37년(1604) 重修 사액
선조1년(1568) 川谷書院[경북 성주] 정구鄭逑가 주관하여 延鳳書院을 개편
선조6년(1573) 사액, 선조40년(1607) 중건 후 다시 사액
선조1년(1568) 雙溪書院[경북 현풍], 임진왜한 소실
현풍사림 주관 창건. 선조6년(1573) 사액
선조1년(1568) 花谷書院[황해 서흥] 선조25년(1592) 사액
선조9년(1576) 兩賢祠[평북 희천] 광해군 초에 상현서원象賢書院으로 승격
선조16년(1583) 錦陽書院[전남 나주] 정유재란 소실
나주목사 金誠一 및 지방 유림 주관 창건
선조22년(1589) 조광조 정여창 이언적 이황을 追享
광해군1년(1609) ‘경현서원景賢書院’으로 사액.
선조20년(1587) 伊淵書院[경남 합천] 정여창 同享
현종1년(1660) 사액
선조35년(1602) 迷原書院[경기 양근] 조광조 同享
선조38년(1605) 甫勞洞書院[경북 현풍] 임진왜한 소실 雙溪書院 중건 후 개명
선조40년(1607) ‘도동서원道東書院’으로 사액
선조30년(1606) 道南書院[경북 상주] 상주 유림 주관
정몽주 정여창 이언적 이황 同享, 숙종2년91676) 사액
위는 명종 선조 연간에 한훤당과 관련된 사우와 서원 건립 현황을 간단히 정리해본 것이다.[*편집자 註3] 이를 보면 이황과 조식이 학문적으로 가장 활발하게 활동한 명종13년(1558) 이후 한훤당을 추숭하기 위해 서원과 사당이 전국 연고지에 널리 세워졌던 사실을 분명하게 알 수 있다.
고향인 경북 달성에는 쌍계서원[雙溪書院→甫勞洞書院→道東書院]을, 서울에서 내려와 공부하던 처가 곳 합천에는 이연서원伊淵書院을, 서울 근교의 공부하던 터전이었던 경기도 양근에는 미원서원迷原書院을, 유배지였던 평안북도 희천과 전라남도 순천에는 각각 양현사兩賢祠[象賢書院]와 경현당景賢堂[옥천서원玉川書院]을, 기타 달성 인근의 성주에는 연봉서원延鳳書院[천곡서원川谷書院]을, 퇴계문인 김성일이 지방관으로 있던 전라남도 나주에는 경현서원景賢書院을 세우는 등 명종 선조 연간에 그를 단독 혹은 여타 인물들과 함께 봉향한 전국사우와 서원이 거의 8개[*편집자 註4] 달하였던 것이다.
문집의 간행에는 이황과 조식 양문을 동시에 출입한 이정과 정구의 역할이 가장 컸다. 문집 간행을 처음 시도한 사람은 이정이었다. 그는 명종18년(1563) 순천부사로 부임하여 곧 바로 한훤당 관련 추숭작업을 시작하였다. 부임한 이듬해(1564) 임청대臨淸臺 옆에 경현당景賢堂을 창건하였고, 그 다음해에는 경현당 옆에 다시 옥천정사玉川精舍를 지었으며, 경현당에 한훤당의 위패를 모셔 마침내 서원 형태로 만들었다. 그리고 이와 동시에 한훤당 관련 世系, 事實, 行狀(李績), 시문詩文, 추증追贈, 포증褒贈, 가증加贈, 종사從祀 등에 관련된 자료를 두루 정리하여 처음으로 『景賢錄』 1책을 편찬하였는데, 이후 이 『景賢錄』의 교감 편집 수정 등을 위해 스승 이황과 주고받은 편지가 8통이 넘을 정도로[*註59] 각별한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註60]
2차 간행은 약 40년 뒤인 선조37년(1604) 정구가 주관하였다. 정구가 『景賢錄』을 다시 편찬한 데는 두어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는 문묘종사 건의를 받고 선조가 한훤당의 저술을 보고자 하였는데[*註61] 이정이 당초 편찬한 『景賢錄』 은 조위曺偉의 사적을 여기에 부록한 것이어서 개편할 필요가 있었고, 둘째는 1차 간행 때 미처 수록하지 못한 자료와 이후 생산한 중요 자료 몇가지를 보완할 필요가 있었디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정이 편찬한 『景賢錄』에서 한훤당 관련 글만 따로 분리하여 상하 2권으로 만들고 [*註62] 『景賢錄』에 누락된 「성화경자상소成化庚子上疏」 등 유문 일부와 기대승이 다시 작성한 「행장行狀」, 조식 등의 「遺事補遺」, 자신이 추가로 작성한 「年譜」와 「師友門人錄」, 기타 그 즈음에 건립한 서재書齋 서원書院 사우祠宇 관련 기록 등을 모두 모아 편집하여 『景賢續錄』 상하 2권을 엮었던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한훤당을 문묘에 종사할 수 있는 평가와 문헌의 준비가 거의 완비된 셈이다.
퇴계 • 남명 양문에서 이렇듯 한훤당에 대한 적극적인 평가와 추숭을 실천함에 따라 이들과 특별한 학연이 없는 사람 가운데도 이에 동조하고 나서는 이가 늘어났다. 이준경(李浚慶 1499-1572)이 “문묘에 종사해도 부끄럽지 않은 동방 義理學의 개창자”[*註63] 라 한 것. 조헌(趙憲 1544-1599)이 “道學을 처음 창도하고 옛 성현을 계승하여 후학을 열어준[繼往開來] 업적이 있는 사람”[*註64] 이라 한 것. 이중무(李重茂 1568-1629)가 “덕이 높고 도가 높기는 한훤당이 나라에서 으뜸”[*註65] 이라 한 것, 이민성(李民宬 1570-1625)이 “근래 100여년간 사람들이 부모 같이 받들고 태산북두같이 존경한다.” [*註66] 고 한 것, 임숙영(任叔英 1576-1623)이 “끊어진 학문을 일으켜 한 시대 유학의 종장이 되었다(爲世儒宗)”[*註67] 한 것 등이 모두 그런 예이다.[*註68] 특정 지방의 일개 향선생鄕先生이 아니라 나라에서 받들어야 할 조선 유학사의 대표적인 인물, 곧 국유國儒요 동국유종東國儒宗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지식사회 전반에 널리 공감대를 형성해갔던 것이다.
그래서 마침내 선조8년(1575) “도덕박문道德博聞을 文이라 하고 숙야경계夙夜警戒를 敬이라 한다.”는 시법諡法에 따라 文敬이란 시호를 내렸다.[*註69] 그리고 광해군2년(1610) 9월4일 문묘종사를 결정하였는데, 이 때 국가에서 내린 최종 평가는 “염락관민濂洛關閩의 근원을 극도로 찾아 들고, 의리왕패義利王覇의 구별을 정밀하게 밝혀, 시로 세상에 이름난 유학의 종장[名世之儒宗]이요, 또 시대를 구제할 나라의 그릇[濟時之國器]” [*註70] 이었다. 학문적으로 송대 성리학의 정통을 깊이 연구해낸 국유國儒요 동국유종東國儒宗임은 물론, 정치적으로도 의義와 리利, 왕도王道와 패도覇道를 밝혀 산 시대를 구제한 국기國器라고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추승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이후 한훤당에 대한 평가는 나라에서 공인한 국유國儒요 국기國器라는 평가를 거듭 확인하는 경향이 지배적이었다. 광해군11년(1619) 경상도관찰사 박경신朴慶新이 우리 유학사에 독보적인 인물이라 천명한 것,[*註71] 인조2년(1624) 장현광張顯光이 신도비문에서 국유로 향사된 사실을 다시 지적한 것[*註72], 인조18년(1640) 김세렴金世濂이 조선의 공자 같은 인물로 수천백년에 처음 나타난 진유眞儒라고 말한 것,[*註73] 현종1년(1659) 정필달鄭必達이 동방백세지종사東方百世之宗師라고 언급한 것[*註74] 등이 다 그런 예이다. 물론 후대의 평가 가운데 이와 다소 온도 차이를 드러낸 예가 없지 않고, 특히 서인 노론계열의 기록 가운데 그런 예가 더러 보인다. 그러나 전체적 평가에는 거의 영향을 미치지 못하였으며, 국유國儒요 국기國器라는 평가를 변함없이 유지하였다.
5. 마 무 리
본고는 한훤당과 관련된 현존 자료 대부분이 후대의 평가와 추숭에 관련된 것임을 주목하고, 이런 자료를 정밀하게 검토함으로써 그에 대한 평가와 추숭의 구체적 실상을 집중적으로 검증해보고자 하였다. 결과 그에 대한 평가와 추숭에 그가 생존 했던 성종 연산군 연간, 그의 문인들이 관직에 진출하여 활동한 중종 연간, 퇴계 남명 양문의 활동이 두드러진 명종 선조 연간 등 크게 세 시기로 구분됨을 알 수 있었다.
생존 당시 그에 대한 평가는 그렇게 두드러지지 않았다. 그는 고관대작 집안 출신도 아니었고, 그 자신 또한 벼슬과 거리가 먼 삶을 살았다. 그래서 문벌이나 관직이력 상으로는 당대에 명성이 드러날 아무런 근거가 없었다. 다만 공부하는 자세가 남달랐고, 추구한 학문의 성격이 정통 주자학이었으며, 공부한 내용을 평소 생활에 구현하는 실천성과 후학의 양성에 특별히 정성을 기울였던 점 등으로 정평이 난 정도였다.
중종 연간의 평가는 생존 당시보다 한결 높아졌다. 특히 문인들의 존경과 추승 의지가 두드러졌다. 그래서 그를 우리 유학사상 절학絶學(道學)을 수창首倡한 국유國儒로 받들며 문묘에 종사해야 마땅하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훈구관료 입장은 달랐다. 국가적으로 받을 國儒가 아니라 鄕先生 정도로만 인정하였고, 따라서 문묘에 모실 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하였으며, 결국 이들의 견해가 국가의 공식 견해로 확정되었다. 그래서 관직은 우의정으로 가증加贈하되, 문묘종사 대신 집안 사당에 제사를 모셔주는 정도로 얼버무렸다.
명종 선조 연간에 와서 그는 비로소 동국유종東國儒宗으로 공인받았다. 여기에는 이황과 조식 및 그 문인들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 이황은 그를 향선생과 구별하여 近世道學之宗으로 평가하였으며, 이런 견해는 李楨 朴承任 奇大升 柳成龍 鄭逑 등 주요 문인들에게 그대로 전수되었다. 그리고 이런 견해를 바탕으로 문묘종사 서원건립 문집간행 등 각종 추숭작업을 동시에 추진함으로써 마침내 선조8년(1575)에 贈諡, 광해군2년(1610)에 문묘종사를 관철시켰다. 그래서 학문적으로는 세상에 이름난 유학의 종장[名世之儒宗]으로, 정치적으로는 한 시대를 구제한 국가적 인물[國器]이라고 나라에서 공식적으로 인정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러나 이런 평가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그 평가 근거에 근본적 변화가 없었던 점이 흥미롭다. 한훤당에 대한 평가의 핵심은 늘 소학 공부와 그 실천이 남달랐다는 점에 초점이 있었다. 물론 이 외에 대학과 육경에 조예가 깊었음을 지적한 예가 없지 않았다. 그러나 실상 그는 대학과 육경은 물론 소학에 대해서도 아무런 저술을 남기지 않았으며, 그마저도 동료와 문도들이 보고 전한 일화 몇 가지를 통해 겨우 확인할 수 있는 정도이다. 명종 연간부터 이미 그가 남긴 글을 수습하기 위해 무던히 노력하였지만, 詩賦 祭文 書簡 등 약간 편을 제외하고는 찾아낸 것이 거의 없었으며, 이 때문에 그를 새롭게 평가할만한 특별한 학문적 업적을 추가로 찾아 제시하지 못하였다. 그런데도 그를 당초 장래가 촉망되는 학자에서 鄕先生을 거쳐 東國儒宗으로까지 추숭한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이는 아마 편존 문헌으로 확인하기 어려운 그렇지만 그에게 직접 공부한 제자나 그 계승자들은 경험적으로 알고 있던 깊은 학문세계가 따로 있었기 때문일 터이다. 그러나 보다 주목할 필요가 있는 것은 사림 도학파의 성장과 그 정통성 확립이란 정치적 목적과의 연관성이다. 이들이 주자학적 논리를 더욱 공고하게 확립하고 정치적 영향력을 확장해가면서 소학 공부와 그 실천의 가치에 대한 평가의 관점을 재조정하고 비중을 강화하였으며, 그래서 마침내 환훤당을 東國儒宗으로 추숭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본고는 이런 정치적 측면을 깊이 검토해보지 못하였으며 추후의 관제로 남겨두었다.■
船(38) 最愛梅兄節(103) 書寄通仲(104) 別酒主人(109) 등 5제 5수, 칠언절구 讀小學(38) 伏呈止止堂2수(39) 奉和止止堂(40) 述懷二絶上止止堂(41) 路傍松(44) 書懷(44) 上佔畢齋(30. 秋江師友錄) 次潘佑亨(413) 등 8제9수, 칠언율시 上止止堂(45) 1수, 칠언고시 懷文江城君(475) 1수, 秋毫可並於泰山賦(48) 1편, 祭古順天府使韓哲仝文(51) 祭梅溪文(53) 등 제문 2통, 丙子九月書(106) 弘治十六年書(110) 辛巳六月書(113) 丁巳六月書(114) 등 간찰 4통, 成化庚子上疏(125) 1통 등으로 조사되었다.
*註2) 李滉『景賢錄編定別祿』 「時文」(國譯景賢錄 7쪽)에서 「船上」(36), 「古亭」 「琴濕」 두 逸詩(47), 祭古順天府使韓哲仝文(51) 등이 한훤당 작품인지 확신하기 어렵다 하였다. 그리고 「成化庚子上疏」(125) 1통도 제목 하단에 훤훤당 작품인지 확신하기 어렵다는 주석이 있으며, 次潘佑亨(413) 또한『玉溪集』의 신뢰성에 문제가 있어서 재검토 여지가 있다.
*註3) 한훤당 관련 학술대회는 1979년 한훤당기념사업회 주관 “한훤당 선생의 학문과 사상” 학술대회에서 배종호 강주진 윤사순 손인수 조종업 성락훈 渡部學 등 7인이 발표한 것, 2004년 한훤당서거 500주년기념 추모학술대회에서 김태영 설석규 김훈식 이병휴 김시업 등 5인이 발표한 것, 2012년 영남문화연구원 주관 학술대회에서 정경주 이세동 김훈식 이상성 박균섭 등 5인이 발표한 것, 2013년 동 연구소 주관 학술대회에서 이상성 최영성 황의동 추제엽 우경섭등 5인이 발표한 것 등 4차례가 있었다.
기타 곽귀남 김봉건 박홍식 성교진 신두환 윤인숙 이구의 장덕삼 장도규 정탄재 조원래 홍우흠(가나다순) 등의 논문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 가운데 후대의 평가와 관련된 연구는 한훤당서거500주년 기념학술대회에서 김훈식이 발표한 ‘한훤당에 대한 조선시대의 평가와 그 의미’가 유일한 듯한데, 이 논문은 이후 「한훤당 김굉필에 대한 조선시대의 평가와 그 의미」란 제목으로 동방학지 133집(연세대 국학연구원, 2006)에 발표되었다.
*註4) 『景賢錄』 上, 「世系」 참고.
그는 “『小學』을 神明같이 믿고 부모같이 공경한다”(小學之書 吾信之如神明 敬之如父母) 하였고, 도 “학문에 나아가는 차례는 반드시 지난날 章句之習을 버리고 小學에 종사해야 한다”고 하면서 과거에 보던 책을 모두 가져다 불태우고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모드 소학에서 입문토록 하였다(許氏嘗曰 進學之序 當棄前日章句之習 從事于小學 因悉取向來簡帙焚之 使無大小 皆自小學入). 『小學』「總論」및 그 주석 참고
*註7) 鳴陽副正 李賢孫을 라기킨다. 이성계의 3男 益安大君의 증손으로, 王孫이라서 성을 쓰지 않았다.
*註9) 南孝溫, 『秋江集』, 7권 雜著, 「師友名行錄」, “大猷 以小學身律身 以古聖人 爲準則 招來後學 恂恂然執酒掃之禮 修六藝之學者 滿於前後 謗議 將騰 伯勗勸止之 大猷不聽 嘗謂人曰 釋陸行 設爲禪敎 弟子考業者數千人 其友止之 禍患可畏 其設至公”
*註11) 『國譯景賢錄』, 158쪽 「年譜」 成宗16년 先生32세, “南秋江 遊金剛산 有錄曰 松蘿庵壁上 有故人大猶名字及絶句一首云 蓋先生 已於前此遊金剛矣 〇秋江 又於九月 遊松都靈鷲山玄寺 前有石塔 塔有故人金大猷優名云”
*註13) 김훈식은 「寒暄堂 金宏弼에 대한 조선시대의 평가와 그 의미」(東方學志 133집, 2006)에서 燕山君日記 4년 8월 己卯 조항에 기록된 “굉필이 처음에는 효온 등과 동지였으나 마침내 과거시험에 응시하였기 때문에 趨向이 고달프다 이른 것이오며”라고 한 기사를 인용하여 “김굉필이 과거시험에 응시했기 때문에 갈라선 것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 같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曹植은 「遺事追補」(『國譯景賢 錄』, 151쪽)에서 “남효온의 식견이 높아서 사화가 발생할 줄 미리 알고 절교하고자 했던 것이 아닌가”(獨計先生 何嘗有失於 名敎者乎 恐秋江見高 已知士禍熾發 曾欲絶交息遊者耶)라고 하여 이와 다른 견해를 표명한 바 있다. 따라서 절교의 계기를 아직은 정확하게 단언하기 어려울 듯하다.
*註14) 『國譯景賢錄』, 158쪽 「年譜」 成宗23년 先生39세, “曾與秋江絶交 及聞其病重 馳往問之 秋江拒不欲 見 先生卽排門 直入其臥內 秋江轉身向璧 則先生手自開衾 撫其肌膚 嬴敗已甚 先生深加嗟惜 從容告 訣而退 秋江終無一語酬答 未幾秋江下世”
(『宣祖實錄』 卽位年, 11월 乙卯, “小學之書流布東土已久 而人無能知其大義 有金宏弼 聚徒講明 其書大行於世”)라고 한 것과, 奇大升이「論思錄」(『高峯集』, 「高峯先生論思錄」 卷之上 初四日)에서 이를 다시 인용하여 “小學之書 流布東土已久 而人無能知其大義 有金宏弼 聚徒講明 其書大行於世”라고 한 것이 대표적이다. *註16) 『景賢續錄』 下, 師友門人錄, 止止堂 金孟性 조항. “世設寒暄先生 師事之 今以徍復詩文而竊 思之 雖未必專奉以師道 而蓋亦師友之也”
*註19) 『景賢錄』 上, 「述懷二絶上止止堂」에 대한 金孟性의 和答詩, “洒落胸中物外春 凌雲逸翮逈離塵 爲問當時題柱客 誰知他日棄繻人”
*註22) 『景賢續錄補遺』 上, 「追雪 褒贈」, “八月初二日 上以廟見節義等事 延訪群臣 金安老曰 金宏弼 鄭汝昌 被罪於廢朝 其子孫 不可以被罪人 子孫例錄用也 當以賢者之後 而使其妻孥得免於飢寒可也 上顧謂鄭光弼申用漑曰 於大臣議何如 光弼等 同辭以對曰 操守踐履之人 襃將可也 金銓曰 其人 小學醇正 不趨名勢 得其正派之人也 學者以爲宗師 終以其學行而禍及之 甚可痛惜 李耔曰 金宏弼鄭汝昌 學術醇正 東國無如此人 儒者知所向方 專賴二人之功也 古有贈職褒美之事 此何預於賢者乎 然有國者所當爲也 其子孫亦可錄用 傳于政院曰 金宏弼等子孫 錄用可也”
*註23) 김안로는 아들 僖가 孝惠公主와 혼인하여 중종의 부마가 되었다.
*註25) 『景賢錄』 上, 門人 李績(或勣)의 「行狀」, “吾東方 自箕子 肇有文字 歷三國高麗氏 至我朝 文學彬彬 然於道學蔑聞也 倡起道學 惟公一人耳 ... 日誦小學大學書 以爲規模 探賾六經 力持誠敬 以存養省察 爲體 齊治平爲用 期至大聖閫域....公之學 得不傳之學 毅然特立 一時學者 尊如山斗 不及尢就門 私淑而善者亦多 其所施者遠矣”
*註26) 『景賢續錄補遺』 上 敍述, “金慕齋 嘗爲嶺南方伯 惓惓以敎化爲先 列邑鄕校 敎以小學 作]詩勸之 勸玄風學者曰 金先生宏弼 首倡性理之學 至今學者知所趨向 願學程朱 皆先生之力也”
*註29) 『景賢續錄』 上 「年譜」 中宗12년 丁丑 8월 12일 조항에 “同日(중종12년 8월 12일) 弘文館副提學金淨等 請隆爵尊諡從祀文廟 以明士趨”이란 기록이 있다. 이를 통해 「弘文館書啓」를 한훤당의 문인 김정 등이 주도했던 사실을 분명히 확인할 수 있다.
*註30) 「館學請從祀文廟疏」는 『景賢錄』 上 「年譜」 中宗12년 丁丑 8월 12일 조항에 金淨 등이 주도하여 올린 「弘文館書啓」 관련 바로 다음에 “是月 館學儒生上疏 請鄭夢周金某 幷從祀文廟”라고 한 것으로 보아 중종12년(1517) 8월에 올린 것이 분명한 듯하다.
*註32) 『景賢錄』 上, 「贈伽倻山讀書諸生」, "諸生叩我無他語 末谷村纔十里間聞有金公棲築處倻山應是武夷山" 시의 末谷村은 한훤당의 처가 곳인 합천군 야료현 말곡을 가리킨다. 한훤당은 성종3년(1472) 19세 때 이곳 朴氏家로 장가든 이후 처갓집 곁 시내 건너 地東巖 아래 작은 서재를 짓고 살면서 당호를 寒暄堂이라 하였다. 『景賢續錄』 上 「年譜」 八年 조항 참고
*註33) 『景賢錄』 上, 저자미상의 「又遺事」, “正德丁丑(1517)二月間 趙靜庵于中廟曰 士習頹靡 莫大之患也 變化之道 豈無有其方 如金宏弼鄭汝昌褒奬 則可以扶植斯文矣”
*註35) 『景賢錄』 上, 同日「弘文館書啓」 참고
*註38) . 『景賢錄』 上, 「館學請從祀文廟疏」하단, “中廟癸未間 臺諫論 贈典過重 歲廩無例 執 義曺彦亨 司諫曺漢弼 持平朴守良等 相繼論列” *註39) 『景賢錄』 上, 「八月二十日講得」, “從祀至重雖以 楊時李侗諸賢尙不得與焉因一時之議而遽許之 恐歸於率易 謹按 禮有祭鄕先生於社之文 臣意以爲宜倣宋朝褒崇濂洛諸賢故事 贈以尊官錄其子孫 又就平日講道之所 置立祠宇 列於群祀官爲致祭 如此則雖不與於廟庭之享 於國家崇儒重道之意 一無所欽”
*註40) 이와같은 사실은 이듬해인 중종13년(1518) 3월 조광조가 다시 이를 건의한 데서 확인할 수 있다. 『景賢錄』 上, 저자미상의 「又遺事」, "戊寅(1518)三月間 靜庵又啓曰 如金某輩 雖不得大施於一時 然聞其風者 興起於爲善 則此人之功也"
*註41) 『景賢錄』 上, 「十月二十八日議政府啟目」 "金宏弼鄭汝昌 未有聚弟子講道之所 强指某處爲講道之所 置立祠宇 似非其實 各於家廟 春秋仲月 官爲致祭 何如 同副承旨柳雲次知 啓依允 金宏弼 家在玄風鄭 汝昌家在咸陽 各其官鄕校及境內窮村僻巷 掛榜知委 使學者盡知國家褒賢 重道之意 一變舊習之陋 專尙性理之學事 本道移文“
*註42) 南孝溫 『秋江集』 권7 「師友名行錄」. "畢齋先生爲吏曹參判 亦無建白事 大猷上詩曰 道在冬裘夏飮氷 霽行潦止豈全能 蘭如從俗 終當變 誰信牛耕馬可乘 先生和韻曰 分外官聯到伐氷 匡君捄俗我何能 從敎後輩嘲迂拙 勢利區區不足乘 蓋惡之也 自是貳於畢齋“ 『景賢續錄』 上 「敍述」 에도 이를 그대로 인용한 동일한 기사가 있다.
*註43) 年譜(『景賢續錄』 上)에는 성종17년(1586) 33세 조항에 이 기사를 수록하였는데, 이 때 김종직은 이조참판을 역임한 후 다시 藝文館提學으로 부임해 있었다.
*註44) 李滉의 이 시에 대한 풀이는 제자 李楨의 질문에 답한 「答李岡而書別紙」(『景賢續錄』 下)에 기록되어 있다. 풀이 내용은 학문적 풀이 중심이어서 필자의 해석보다 다소 부드럽고 완곡한데, 이는 김종직과 한훤당의 입장을 동시에 고려하여 박절하게 말하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황의 풀이는 이렇다. “寒暄公詩. 滉亦有未曉處. 然其大意謂此道至大. 隨時隨處. 無所不在. 如裘葛然. 君子出處之間. 雖欲如霽行潦止之得宜. 豈一一能中其節乎. 此二句已含譏諷意. 言道不行而不能隱. 失時中之義也. 使蘭而苟得列乎衆芳. 則終當變芳香而化蕭艾也必矣. 夫牛可耕. 馬可乘. 物各循性. 謂之道. 若蘭變爲蕭. 物不循性. 如此則人何從而信此道之爲道乎.”
*註45) 『景賢續錄』 下, 「答李岡而書別紙」, “秋江所謂佔畢齋寒暄相貳者 今無以考其爲某時某事. 但今以佔畢公全集觀之. 惟以詩文爲第一義. 未嘗留意於此學此道. 而寒暄以是歸責. 雖以師弟之分之重. 固不能志同氣合而終不相貳也. 又豈待形於事蹟. 顯相排擯. 然後謂之相貳耶.”
*註46) 이황이 한훤당을 김종직과 차별화시켜 평가한 것은 奇大升의 질으에 답한 견해에서도 거듭 확인할 수 있다. 『景賢錄編定別錄總目』 「事實」( 『國譯景賢錄』 3쪽), “明彦所疑秋江錄數語 皆所當疑 ... 然滉嘗以爲 此不必顯相排擯然後爲貳 只師弟之間 趨尙有少異 則亦可謂之貳 佔畢先生 雖非後學所敢輕 議然細考其集中詩文之類 其志常以文章爲第 一義 殊未見有從事於講求學問之實 若如寒暄 則雖亦無徵於學問之事 然其專心致志 力行古義 則有不可誣者 其趨尙有如是之不同”
*註47) 『景賢錄』 下, 「退溪先生答盧仁甫書」, “金先生道學淵源. 固非後學所敢測者. 然以 先朝追獎之意推之. 斷然以爲近世道學之宗也. 其視二李公各取其一節. 以爲鄕賢之可祭者. 其德業風聲. 旣有不同. 而所以尊崇之旨. 亦不能不殊歸矣. 如是而同祀同享. 恐未免尙論者之議其後也.”
*註48) 『景賢續錄』 下, 「書齋 書院 祠宇」, 川谷書院 조항, “議論紛然 未決者十年 至戊辰(1568) 以書院在雲谷之里 欲用朱子祀諸葛侯於臥龍庵故事 以雲谷名院 而祀朱子 取質李先生 則先生欣然愜意 又謂前有伊川 不可獨取雲谷 遂名以川谷 而立廟於正堂之北 竝祀兩先生 以寒暄堂從祀 兩李則以鄕 賢別祠於東偏”
*註53) 奇大升. 『高峯集』 권2, 「玉川書院記」, "吾東方素稱文獻之邦。自三國以來。非無豪傑之士。而求其道德之光。照於後世者。蓋寡矣。寒暄先生。生於數千載之下。挺然特立。力爲古人之學。其遺風餘韻。足以淑人心而扶世道。今之學者。頗知聖賢之爲可學。而自礪於禮義之敎者。烏可不知其所自乎"
*註55) 『景賢續錄補遺』 上, 鄭逑의 「祭景賢祠文」, “早悟天機 獨奮絶學 克誠克敬 積久精深 濂洛正傳 庶幾遠接 東荒斯破 百代眞師”
황위주 「退溪와 龜巖의 往復書翰」[『退溪學과 韓國文化』 47집, 경북대학교 퇴계연구소,2010] 325쪽 참고
*註61) 선조4년(1571) 성균관유생 등이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등 4현의 문묘종사를 요청하자 선조는 이들의 저술을 직접 보고자 하였으며, 이후 柳希春에게 명하여 이들의 찾아내도록 하였고, 결국 이를 모아 『國朝儒先錄』을 편찬하기에 이르렀다. 이런 내용은 다음 글에 있다. 『國譯景賢錄』 「文獻抄錄」 592쪽 柳希春의 「館學儒生講四賢從祀文廟」 “선조4년 4월24일 館學儒生 等 伏閥上疏...上又敎臣希春 令搜訪金鄭趙三先生著述以進 上之好賢崇儒之誠至矣.” 같은 책 588쪽 柳希春의 「國朝儒先錄校正」 “宣祖四年 五月初八日朝 以四賢 (金宏弼 鄭汝昌 趙光祖 李彦迪) 文字校正入啓事早與玉堂 仍爲一會 ... 多改誤處 ...弘文館啓曰 “金宏弼、鄭汝昌、趙光祖文字搜訪, 而所得甚少, 謹校正以入 此後若有所得, 當隨入矣” 傳曰 “四人文字, 收拾校正以入, 至爲可嘉。 隨後隨所得入納事, 如啓.”
*註62) 『景賢續錄』 上, 金夏錫의 「景賢續錄考疑」, "竊想先生之意 以爲景賢錄 本爲寒暄先生而作 則不當以梅溪合編於其中 且不欲以他人 所錄ㅠ混入於李先生手錄中 故梅溪事實則移編 於師友錄 堂臺等記 則移編於書院錄“
*註69) 『景賢續錄』 上 「年譜」 ‘今皇帝萬曆三年’ 조항 "賜贈大匡輔國崇祿 大夫議政府右議政兼領經筵監春秋館事金 宏弼諡文敬公" 주석에 "道德博聞曰文 夙夜警戒曰敬". 이듬해인 1576년7월(선조9년) 이조정랑 金誠一이 시호를 받들어 본가에 宣賜하였다.
*註70) 『景賢續錄補遺』 上, 「御製賜從祀文廟先古事由文」, “濂洛關閩之源 極其沿遡 義利王覇之辨 發其精微 實是名世之儒宗 抑亦濟時之國器.” 광해군2년(1610) 8월16일 종사 직전에 국왕이 예조정랑 琴愷를 보내 家廟에 告由토록 한 글이다.
*註71) 『景賢續錄補遺』 上, 朴慶新의 「祭道東書院文」, "曰我箕封 化闡仁賢 遙遙厥緖 上下千年 弘儒文昌 寔濬其源 釋老是雜 慨道未醇 洎于麗季 圃老是倡 章句亦專 且驚詞章 入于我朝 佔畢諸公 餘風未泯 莫得其宗 不待文王 興我一人 不有先生 正脈誰因“
*註72) 景賢續錄補遺』 上, 張顯光의 「神道碑銘幵序」, “先生遺敎之鄕 及宗尙國儒之地 各自立祠設院” *註73) 『景賢續錄補遺』 上, 「遺事」, "金氏世濂 書苞山學規後曰 我國之有嶺南 猶鄒魯 之於中國 寒暄金夫子作於此邑 則此邑卽我國之闕里 豈不盛哉"
*註74) 『國譯景賢錄』 「文獻抄錄」, 551쪽 鄭必達의 「陶山書院請額疏」, "兩先正[金宏弼 鄭汝昌] 道學之正 爲東方百世之宗師 則先儒旣言之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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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편집자 註1 : 계왕개래繼往開來는 옛가르침을 이어받아 후대에 전한다, 과거를 이어서 미래를 열어 준다는 뜻으로 쓰이고 있습니다. 주희朱熹가 서문을 쓴 중용장구 머릿글[中庸章句序]의 한 구절입니다.
『우리 부자夫子 같은 이는 비록 그 지위를 얻지 못하였으나, 옛 성인을 잇고 앞날의 학문을 열어준 바는 그 공로가 도리어 요와 순보다 훌륭함이 있었다. 若吾夫子, 則雖不得其位, 而所以繼往聖, 開來學,』
순천 옥천서원 경현사景賢祠 亨祀祝文과 선조7년 조헌趙憲의 상소문 등에 한훤당 선생을
“옛 성현을 계승하여 후학을 열어준 계왕개래繼往開來의 업적이 있는 사람”이라고 평가했습니다.
*편집자 註2 : 염락관민濂洛關閔 : 중국 송나라 때 주돈이周敦頤, 정호程顥, 정이程頤, 장재張載, 주희朱熹 등이 주장한 성리학을 염락관민지학이라 부릅니다. 그들의 출신 지명을 따서 붙인 이름입니다.
정구鄭逑는 「祭景賢祠文」의 글에서 한훤당 선생을 “끊어진 학문[絶學]을 홀로 일으키고 오랜 세월 정심精深하여 염락濂洛의 정전正傳을 먼 후대에 계승하였고, 동방의 미개함을 깨어 백대의 참 스승이 되었다.” 밝혔고,
류성용柳成龍도 염락관민濂洛關閩의 실마리를 찾은 사람이 김굉필임을 밝혔습니다.
*편집자 註3 : 명조 선조 시대에 세워진 사우와 서원 건립현황 중에서 선조 때 사액서원으로 승격된 熙川書院[평북 희천]과 花谷書院[황해 서흥], 전남 나주의 錦陽書院이 정유재란으로 소실돼 景賢書院으로 사액된 내용을 편집자가 추가했습니다. 사선글자로 표시된 부분입니다.
*편집자 註4: 한훤당선생을 배향하는 서원은 14곳으로 조사됐습니다.[서흥군과 한훤당 81-83쪽 참조] 이 가운데 남한내 미복원 서원은 川谷書院, 伊淵書院, 仁山書院, 道山書院 네 곳이고 북한내 서원은 熙川書院, 象賢書院, 白鹿洞書院, 花谷書院, 飛鳳書院, 盤谷書院 다섯 곳입니다. 민족백과사전에 따르면 북한지역 서원은 미복원 상태이나 광복 이후 상황은 알 수 없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선생의 사후 100년의 발자취를 풀어헤쳐 주신 황위주 교수님께 감사드립니다. 장래가 촉망되는 학자에서 향선생을 거쳐 마침내 東國儒宗으로, 더 나아가 한 시대를 구제한 국가적 인물[國器]로 나라에서 어떤 과정을 거쳐 공식 인정했는지 그 추숭 과정을 제시해 주셨습니다. 그러면서 이 과정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추후 연구 과제로 남겨두셨습니다. 4대 사화士禍로 주눅 든 사회 속에서, 임진왜란 정유재란으로 피폐해진 사회 속에서 그 시대의 양심, 조선의 젊은 지성들이 한훤당 선생을 조선의 정신적 스승으로 받들어 모시기 위해 100년을 이어가며 지속적으로 상소를 올린 역사적 사실들을 새삼 일깨워주셨습니다. 거듭 감사합니다.
한훤당께서 세상을 뜨신 후 문묘에 배향되기까지 100년간은 조선 성리학이 통치 기반의 이데올로기로 확정되었고, 사림이 활발하게 중앙관직에 진출했던 시기입니다. 황위주 교수는 한훤당께서는 당파를 초월하여 동 시대의 정신적 아이콘으로서 모든 유림으로부터 숭배를 받았다는 것을 밝혀 주었습니다. 특히, 당시 치열하게 경쟁하면서 파당을 짓던 퇴계 이황과 남명 조식의 후학들이 한마음으로 한훤당께 존경심이 가득한 헌사를 보냈다는 데 대해 놀랐습니다. 또 선생께서는 생육신이면서 동 시대의 가장 큰 비평가였던 대문호 남효온으로부터도 두터운 평판을 얻으셨습니다. 부끄럽지 않은 후손이 되고자 스스로 옷깃을 여밉니다.
*편집자註5 : 천곡서원의 창건년도가 경현록과 한국민족문화대백과에 각각 다르게 기술되어 있습니다.
한훤당선생서원록/국역경현록 895쪽 - 중종23년戊子(1528) 建. 선조6년癸酉(1573) 사액, 선조40년丁未(1607) 원장 李天培 重建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1558년(명종 13) 이조년李兆年, 이인복李仁復, 김굉필金宏弼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연봉서원延鳳書院으로 창건되었으나, 이후 정구鄭) 등에 의해 천곡서원으로 개명되었으며 주향자로 숙정자(叔程子: 北宋 程頣), 주자朱子, 김굉필 등을 배향하였다. 1573년(선조 6) 사액되고 1607년 중액되었으며, 1623년(인조 1) 정구, 1642년(인조 20) 장현광張顯光을 추가 배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