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부 차상1]
식탁
청주시 청원구 충청대로
이화선
망부석처럼
그대를 기다린 시간을 넘어
단절의 고통
허물어
사각의 공백에
그대를 모시리라
사랑의 언어로 설레일
이 성찬을
그대여
아직도 잊고 있는가
꿈에서도 입술 안을 맴도는
기다림의 말씀들이
무수한 그루터기 사랑되어
그대에게 가 닿기를 기다린다
오라
어서 오라
시공을 넘어
내 기다림의 밧줄을 타고
[일반부 차상2]
가을걷이
강원도 춘천시 후평동 장희숙
이슬이 채 마르지 않는 새벽. 아버님은 논으로 나가신다. 벼 탈곡기계인 콤바인이 들어가지 않는 자리의 벼를 손수 베기 위해서다. 이마에 땀이 송글송글 맺히자 그제서야 허리를 펴신다. 입가에 만족스런 미소가 한해 농사를 말해주고 있다.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하늘이 축하라도 해주나 보다.
각 마을마다 배정된 꼬리표를 나누어 주면서 타작이 시작되었다. 꼬리표를 추첨할 때면 은근히 신경전이 벌어지기도 한다. 농사일은 뱃심으로 해야하기에 들로 나가는 새참 바구니가 묵직하다. 며칠전에 내린 가을비에 생기를 찾은 무는 뽑아서 생채나물을 할 정도로 자랐다. 들녘에는 노오란 색깔이 농부들의 손길을 더욱 바쁘게 만든다.
농로에 접어드니 주황색 콤바인이 눈에 들어온다. 트럭위에서 벼를 받으시던 엄니가 반갑게 손을 흔든다. 새참 바구니를 받을 생각에 급하게 5톤 트럭위에서 내려오시는 게 웬지 불안불안하다. 아뿔사, 트럭위에서 내려오시다가 그만 발을 잘못 디뎌 콘크리트 바닥에 무릎을 찧고 말았다. 우리 동네 이장님의 입김이 쎄신 낫인지 좁은 농로까지 콘크리트로 포장이 되어 있는 게 오늘은 원망스럽다. 옆에서 아버님은 “순자엄마 다리 움직여봐, 다리 움직여봐” 하시며 안절부절 못하시고 가을볕에 그을린 엄니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급한 마음에 장화를 신은 채 병원으로 가시자고 하니 괜찮다며 손사레를 치신다. 새참으로 준비해간 냉면이 코로 들어갔는지 입으로 들어갔는지 모르게 후루룩 들어 마시고 또 트럭위로 올라가시려는 것을 간신히 말렸다.
10여 년 전에 이천에 사는 시동생이 이혼을 했다며 다섯 살짜리 딸아이의 손을 잡고 달랑 가방 하나만 들고 시댁에 들어섰다. 그때 허깨비처럼 풀썩 주저앉는 엄니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때부터 엄니는 신경과를 드나들기 시작했다. 치매의 속도를 늦추는 약까지 드시고 있다. 방금 하신 말씀도 기억을 못하시고 가벼운 계산도 헤매시며 혼자서 외출하기를 꺼리신다. 엄니가 관리하시던 통장도 아버님께 넘기신 지 이미 오래다. 며느리인 나에게 쉽게 곁을 내주시지도 않았고, 언제나 당당하고 크게만 느껴져 감히 내가 다가서기에 큰 존재였는데, 그런 엄니가 조금씩 무너지기 시작하셨다. 나는 마음을 단단히 먹고 인터넷을 검색해가며 어떤 게 엄니를 위한 것인지 찾아가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나는 엄니의 그림자가 되어 드리기로 했다. 미용실도 함께, 목욕탕을 갈 때도 항상 손을 잡고 같이 다녔다. 내가 먼저 마음의 문을 열고 다가서자 그동안 막혔던 강물이 녹아내리듯 엄니와의 무겁고 답답했던 벽들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시댁이 내 집 같고, 시댁 식구가 내 식구처럼 여겨지기 시작했다. 때론 친정엄마에게 응석부리듯 콧소리를 넣어가며 싫은 소리를 해도 그냥 웃어 넘기신다. 가끔은 나의 손을 붙잡고 “너에게 짐이 되어 어쩌누“ 하시며 미안해 하시지만, 나는 오히려 감사하다. 어느새 엄니와 나는 봉바위에서 단짝이 되어 있었다.
다음날 엄니는 다리에 깁스를 하셨다. 깁스도 엄니의 갑갑증을 붙잡아 놓지는 못했다. 절뚝거리시며 논둑에 나와 서 계시는 엄니의 가을은 그저 쓸쓸하기만 하다. 콤바인에서 남편이 갑자기 소리를 지른다. 논 한가운데 고라니가 뛰어다니자 아버님은 나무 작대기 들고 뛰시고 엄니는 아픈 다리를 질질 끌며 다가갔지만, 결국 고라니 소탕작전은 실패로 끝이 났다. 콤바인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빙빙 돌자 메뚜기들이 정신이 몽롱한지 맥을 못 춘다. 그럴 때 잽싸게 움켜쥐면 빈 음료수 병을 채우는데는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그렇게 타작이 끝이 나고 나의 콧속에는 시꺼먼 먼지가 가득하다. 몸은 고돼도 기분은 좋다.
평소 무뚝뚝한 나지만 이제부터는 마음속의 말을 맘껏 엄니와 나누며 살고 싶다. 신발은 오래 신을수록 편하다. 나무도 오래된 나무가 뒤틀림이 없고 견고하듯이 가족이라는 귀한 열매를 맺게 되어 행복하다. 더 욕심 부리지 말고 지금처럼만 살자. 그저 물 흐르듯이 자연스럽게.
결실이라는 귀한 선물을 안겨준 가을이어서 더 감사하다.
※봉바위: 이천시 장호원읍에 있는 자그마한 동네이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