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정의 및 개념
문명국가의 서민사회에 전승되는 기층문화.
민속문화는 민중에 의하여 역사적으로 전승되어온 전통적인 문화이다. 따라서 그 나라의 원시·고대 문화가 역사적으로 지속되어온 것이 민속이다. 그래서 민속문화는 원시문화나 고대문화에 어느 정도의 친근성을 가진다. 그러면서도 민속문화는 현대사회에 잔존하는 당대문화의 한 부분이다. 여기에 민속문화의 두 가지 성격이 있다. 하나는 역사적인 성격이고 다른 하나는 현대적인 성격이다.
한 나라의 문화는 여러 가지 부분문화의 결합으로 이루어져 있다. 상층문화와 하층문화, 도시문화와 농어촌문화뿐만 아니라 대중문화니 청년문화니 하는 갈래들도 있다. 이 중 민속문화는 상층문화에 대한 하층문화, 더 정확하게 말하면 기층문화가 되겠다.
상층문화가 외국문화의 수용적인 성격이 강한 데 비해서, 기층문화는 그 나라의 고유성이 강한 문화이다. 외래적 성격이 강한 상층문화에 대해서 고유성이 강한 기층문화적인 민속문화의 성격은 도시문화에 대비된 농어촌문화에서도 지적될 수가 있다. 즉, 도시문화는 외래적 성격이 강한 데 비해서 농어촌문화에는 그 나라의 고유성이 많이 지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민속이란 상층보다는 기층에, 도시보다는 농어촌에 보다 많이 존재하게 된다.
한국의 문화는 신석기시대 이래로 유구하게, 적어도 오늘날까지는 농경문화가 그 전반적인 기반을 이루어 왔다. 따라서 한국의 민속은 아득한 석기시대 이래로 생업상의 필요에 의해서 점진적으로 생성, 발전해온 농경문화가 기반이며 핵심이었다. 그를 토대로 불교나 유교의 전래와 정착에 의하여 더 다양화되고 발전되어온 것이 지금의 우리 민속이라 하겠다.
그러나 지금은 우리 민속문화의 개념도 그렇게 단순할 수는 없게 되었다. 오늘날의 한국은 농업사회에서 산업사회로 전환하고 있고, 도시인구가 70%를 넘고 있다. 한편, 서울 인구의 80%는 지방 출신이므로 각 지방 문화의 집합체로서 한국의 민속이 서울문화에도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오늘날 민속의 개념에서는 도시문화를 전적으로 도외시할 수는 없다.
문화는 생명체이고 항상 변동한다. 따라서, 현대의 기층문화이자 전통문화인 민속은 단순히 고고학적인 출토품이나 지난날의 역사와는 다른 점이 있다.
2. 민속의 분류와 범위
민속의 분류는 나라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다. 비교적 일반화된 영역설정은 도슨(Dorson, R.)의 ≪민속과 생활≫에서 찾을 수 있다. 이 책에서는 민속학의 영역을, 첫째 구비문학(oral literature), 둘째 물질문화(material culture), 셋째 사회적인 민속관습(social folk custom), 넷째 연행되는 민속예술(performing folk art)로 나누고 있다.
우리 나라의 경우는 조지훈(趙芝薰)에 의하여 민속학 강의가 시작되면서, 비로소 체계적인 분류가 이루어지기 시작하였다.
분류내용은 ① 구비전승 : 설화(신화·전설·민담·동화·야담·소화)·민요·판소리·무가·속담·수수께끼·방언·은어 및 민속극의 대사.
② 신앙전승 : 예조(豫兆)·점복·금기·주부(呪符)·자연숭배·동물숭배·이인숭배(異人崇拜)·가택신·마을신·무속(무격·무의).
③ 의식·행사전승 : 산속(産俗)·혼속(婚俗)·상장(喪葬)·제례·연중행사(세시풍속).
④ 기예전승 : 음식·의복·주거·민구·민속유희·민속경기·민속무용·민속음악·민속극·인형극·민간의료.
⑤ 공동생활구조전승 : 가족제도·사회구조·경제조직·생업기술(농촌·어촌·산촌) 등이다.
이 다섯 영역은 상당히 체계적이고 과학적인 분류일 뿐 아니라 민속의 대상을 두루 포괄하는 분류임을 알 수 있다. 그 뒤 개론서나 민속조사보고서에서 분류가 시도된 바 있으나, 책의 체재 및 보고서의 양식을 염두에 둔 편의적인 분류에 그치고 있다.
≪한국민속학개설≫(1975)에서는 민속을 ① 마을과 가족생활, ② 의식주, ③ 민간신앙, ④ 세시풍속, ⑤ 민속예술, ⑥ 구비문학의 여섯 가지로 분류하였는데, 여기에는 농업·어업·수렵·채집·직조 등의 생업기술이 하나 더 첨가되어야 했다. 그리고 세시풍속은 독립되어 있는데 통과의례(관혼상제)는 독립된 영역으로 설정되지 않았다.
≪한국민속대관≫(1980∼1982) 전6권의 민속분류는 ① 사회구조·관혼상제편, ② 일상생활·의식주편, ③ 민간신앙·종교편, ④ 세시풍속·전승놀이편, ⑤ 민속예술·생업기술편, ⑥ 구비전승·기타편 등으로 되어 있고, ≪한국민속종합조사보고서≫(1969∼1981) 전12권도 그 분류는 ① 사회, ② 민간신앙, ③ 산업기술, ④ 의식주, ⑤ 민속예술, ⑥ 세시풍속과 오락, ⑦ 구비전승 등으로 유사하게 되어 있다.
이상의 분류는 어느 것이나 서술의 편의상 이루어졌다는 공통점을 찾을 수가 있다.
한편, 1983년 제2차 한국민속학학술회의에서는 ‘한국 민속학의 연구방법’이라는 주제를 놓고 민속학의 영역별 방법론을 논의하였다. 이 학술회의에서 논의된 민속학의 영역이 상당히 체계적이라 할 수 있다. 이 내용은 ≪한국민속학의 과제와 방법≫(1986)에 수록되어 있는데, ① 민속문학, ② 민속사회, ③ 민속종교, ④ 민속예술, ⑤ 민속물질 등 다섯 개 영역으로 민속학의 영역을 범주화하고 있다.
1987년 안동대학에 민속학과가 처음 생기면서 민속학의 과제 및 영역과 방법에 관심을 기울이는 민속학 학술회의를 몇 차례 가진 바 있다.
민속이란 인간생활의 전 영역에 걸치는 광범위한 문화체이므로, 민속의 각 영역들은 자연스러운 통합상태로서 서로 긴밀한 관련을 가지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분류도 쉽지 않다. 예컨대, 세시풍속의 하나인 동제(洞祭)는 민간신앙의 한 양식이며 마을이라는 사회공동체의 행사이고, 거기에는 신화적인 흔적이나 전설 등 구비문학이 결부되어 있고, 또 풍물(농악)을 비롯한 민속예술이 따르게 되는 동시에 그것은 생업의 풍요를 기원하는 주술적 행사가 된다.
그래서 여기에서는 세시풍속이라는 한 구체적 대상을 중심으로 민속 전반의 역사나 현황을 종합하여 살피기로 하겠다.
민속의 범위에 대해서 또 다른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 즉, 조선조의 유교적인 관복이나 궁중복식 같은 경우를 한국 민속으로 볼 수 있겠느냐 하는 문제이다. 전기했듯이 민속은 서민층에 전승되는 전통적인 기층문화인 데 비해, 유교문화는 중국에서 전래된 상층사회의 통치이념으로서 군림하던 문화였다. 더구나 한국의 관복을 보고는 중국인들도 쉽게 알아차리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는 상황이다.
우리는 전파된 지 얼마 되지 않는, 따라서 아직 토착화의 과정 중에 있다고 보여지는 기독교적인 문화들을 도저히 민속이라 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불교적인 초파일 관등놀이나, 유교적인 차례나 시제(時祭) 같은 것들은 오랜 역사과정 속에서 고유문화와의 상호작용을 통하여 그 성격이 변용되고 토착화됨으로써 우리의 세시풍속의 견고한 일부로 정착한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것들을 민속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고, 이러한 맥락에서 유교적 복식이나 궁중복식 같은 것도 넓은 의미의 민속의 범주 속에 포함시킬 수 있을 것이다. 이럴 때 넓은 의미의 민속에 포괄되는 다양한 연원과 성격의 문화들을 구분할 수 있는 세분된 개념들의 개발이 앞으로 요구됨은 물론이다.
- 한국 민속의 역사 -
1. 선사시대
옛 문헌의 기록들은 어느 나라에서나 영웅·왕공(王公:왕과 신분이 높은 사람)·귀족들에게 치우치고, 민속의 기록자료는 매우 드물다는 것이 공통현상이다. 한국에서는 그런 경향이 더 강하였다. 예컨대, 세시풍속 같은 것을 기록한 책이 나타나는 것은 조선시대 후기에 와서 된 일이었다.
따라서, 상대(上代)의 민속을 서술한다는 것은 무리이다. 전거(典據:근거가 될 만한 문헌상의 출처)를 찾아서 한다고는 하여도, 결국은 단편적이거나 추측의 역사를 벗어나기 어렵다. 민속의 역사만 아니고 문화사 자체가 기본적으로는 농경문화의 역사였다.
농경의 시작은 신석기시대부터이고 연대는 서기전 5,000∼1,000년 사이의 4,000년간으로 여겨지고 있다. 아직 출토된 곡물은 조·피·수수 정도이지만, 그래도 이 장구한 기간에 초기농경사회적인 정착생활과 그에 따르는 세시풍속은 그 나름대로 형성되어 왔으리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더구나, 기본적으로 세시풍속이란 인류의 생활에 계절의 환경적 변화만 있으면 형성될 수 있는 것이라는 점도 고려할 만하다.
청동기시대는 곡식 종류가 조·수수·피에서 보리·기장·콩·팥·쌀까지 늘어났으며, 농경적인 정착생활은 곡식을 거두어들인 뒤 동장(冬藏)의 한가한 계절을 휴식과 종교와 예술과 놀이로 보내게 된다는 것이 인류학적인 한 상식이다. 청동기시대는 어디서나 금속문화가 시작되는 시기로서, 초기의 국가형태를 갖추게 되는 시대이다.
청동기시대에 한국 무속의 장엄하고 뚜렷한 첫 증거품으로서 청동의기(靑銅儀器)들인 거울과 방울과 검의 세 종류가 있다. 이 종류는 지금껏 금속 무구(巫具)로서 중요시되고 있는 명두와 무당방울과 신칼과 종류가 합치되어서 무속의 역사를 아울러서 증명해 주고 있다.
먼저 거울인 다뉴세문경(多鈕細文鏡)은 그 정교한 문양으로, 현대의 명두를 완전히 무색하게 한다. 방울도 마찬가지이나 특히 방울은 팔두령(八頭鈴)·오두령, 그리고 다시 다양한 두 개의 방울 형태들이 출토되어서 무속의 춤과 노래의 형태가 다양했으리라는 것을 짐작시켜 주고 있다. 창검 종류로는다시 세형동검(細形銅劍)에 과(戈)·모(矛)들이 있고, 그 중 전혀 날이 서 있지 않아서 고고학계에서도 종교의기라고 지적하는 것들이 있다.
이상 청동의기들이 현대의 금속 무구들보다도 놀랍도록 정교하고 훌륭한 이유는 간단히 설명될 수 있다. 오늘날 무속은 서민층의 민속으로서 미신의 대명사처럼 되어 있고, 이 청동의기들은 제정일치사회의 군장이자 제사장의 존엄성까지를 보여주는 상징성을 느낄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일찍이 최남선(崔南善)은 단군을 제정일치사회의 제사장으로 보고 그 천부인(天符印) 세 개를 거울·검 그리고 북과 방울 중의 어느 하나인 셋이라고 추정한 바 있었다. 이렇듯이, 청동의기들은 귀중한 종교의식의 도구이기 때문에 그 출토수도 많지 않다. 그러나 그 분포는 남만주·한국·일본 북구주(北九州)에 걸친다.
이 사실은 이러한 무속의 초기 증거품들이 대국적으로는 시베리아 샤머니즘의 흐름 위의 것이지만, 부여·고구려의 옛터와 한반도에서 완전히 이미 한국화되고, 그 흐름의 한 갈래가 일본에서도 또한 오늘날까지 전승되는 신도(神道)의 한 원류를 이루었다는 것을 시사하고 남음이 있다. 이러한 사실은 한일 양국에 유사성을 보이는 청동기 출토품, 현대의 무구, 신화에 나타나는 3종의 신성기구 등이 더불어 말해 주고 있다.
같은 청동의기의 한 종류로 농경문청동의기(農耕文靑銅儀器)가 있는데, 여기에는 한국 최초의 풍속도이자 풍요 기원의 농경 그림이 새겨져 있는 것이 주목된다.
그 한 면에는 나뭇가지에 새가 있는 솟대인 듯한 그림이 있다. 또, 한 면의 왼쪽에는 곡식을 항아리에 퍼담는 듯한 모습이 있고, 오른쪽에는 따비와 괭이로 각각 밭갈이하는 두 인물의 모습이 있다. 그리고 유일하게 전신이 다 보이는 한 남성은 큰 성기가 풍요 기원의 의식을 표현하는 듯하다. 이를 통해서 고금의 괭이와 따비 등의 농기구의 역사도 확인할 수 있다.
부족국가시대에 오면 우선 단편적이나마 중국 사서의 기록들이 보인다. 3세기의 문헌인 ≪삼국지≫ 동이전·부여전에는 흰 옷을 숭상한다든가, 가물어서 농사가 안 되면 책임을 왕에게 돌리고 마땅히 바꾸거나 죽여야 한다는 등 심히 종교적인 농경 기원성의 기록을 보이고 있다.
또, 유명한 형사취수(兄死娶嫂)나 고구려의 서옥(壻屋 : 고구려시대 딸이 시집으로 옮겨갈 때까지 사위가 머무는 집) 같은 결혼풍속들도 기록으로 전하고 있다. 동옥저전에는 분명히 2차장(二次葬)의 장법을 연상하게 하는 기록에 쌀미(米)자의 기록도 나온다. 변진전(弁辰傳)에도 오곡과 벼[稻]를 심기에 알맞다는 기록이 보여서 벼농사가 이미 상당히 보급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또, 한전은 물론 예전(濊傳)에도 “삼베와 누에 뽕이 있다(有麻布蠶桑).”고 하였으니 이때 명주짜기도 보급된 듯하다. 논농사에 삼베·명주까지 짜게 되면 세시풍속은 이제 상당히 복잡화된 것일 수밖에 없다. 기록상에는 먼저 각 부족국가들의 제천의식들이 매우 크게 주목된다.
부여의 영고(迎鼓)는 “은력(殷曆) 정월로서 하늘에 제사하고 나라 사람들이 크게 모여서 연일 음주가무하니 영고라 한다. 이때는 형벌과 옥사를 중단하고 죄수의 무리들을 풀어 준다.”고 했다. 은력의 정월은 하력(夏曆)이나 현재 음력으로 치면 12월이나, 그것은 복잡한 역법상의 기준 차이일 뿐, 연초라는 관념에는 차이가 없을 것이다.
즉, 지금도 신년 정초를 명절이나 공휴일로 삼고 경축하며 죄수들을 특별히 사면하는 것과 조금도 다를 바 없는 것으로 비유된다. 다만, 여기서 주목할 것은 세시풍속의 명확한 기준이 되는 역법을 이미 이때는 사용하였다는 점이다.
이것이 같은 3세기 ≪삼국지≫ 위지 동이전뿐만 아니라, 훨씬 후대 7세기 초의 ≪양서 梁書≫ 동이전에도 그 왜인전(倭人傳)에는 아직 “정확한 세월과 4계절을 모르고 다만 봄이면 갈고 가을이면 거둔다(其俗不知正歲四節 但記春耕秋收 爲年紀).”고 기록되어 있다. 역법의 보급에 그만큼 오랜 시일이 걸렸던 것 같다.
예전(濊傳)의 무천(舞天)도 유사한 내용이나, 다만 그 시기가 10월이고 범을 제사한다는 기록이 주목을 끈다. 이 범신[虎神]관념은 특히 지금까지도 영동지방의 산간에 더 많고 대표적으로는 강릉 홍제동 여서낭신그림에까지도 곁들여진 범의 그림을 들 수 있다. 범을 신령으로 섬기는 신앙행위는 잇달아 있어온 우리의 전통이라 하겠다.
10월은 동맹(東盟)의 기록과 같이 10월 상달에 관련되며, 역시 농경의례의 하나인 추수감사제라는 세시풍속이 행해지는 중요한 달이다. 고구려전은 10월 제천에 국중대회하는 것을 ‘동맹’이라 한다고 하고, 다음과 같은 설명을 붙이고 있다.
“그 나라 동쪽에 수혈이라는 큰 굴이 있고 10월 국중대회에는 이 수신을 맞아서 나라 동쪽에 모시고 제사하는데 목수를 신좌에 놓는다(其國東有大穴 名隧穴 十月國中大會 迎隧神 還於國東上祭之 置木隧於神坐).” 수(隧)는 굴, 또는 대혈신(大穴神)이라는 뜻의 글자이니, 목수는 목각굴신상(木刻窟神像)이라는 말이 되겠다.
후세의 ≪주서 周書≫나 ≪북사 北史≫ 고구려전에는 ‘나무로 깎은 여신상(刻木作婦人之像)’ 기록이 나오는데, 고구려의 목수도 그러한 여신상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본토에서도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지만, 특히 제주도 신당 중에는 굴[穴]을 당으로 삼는 경향이 강하고, 또 당신으로 여신을 섬기는 경향이 많은 것으로 보아서, 이것도 또한 오늘날 동제당과 맥이 상통하는 하나의 원초형태로 충분히 생각할 수 있을 듯하다.
다시 ‘한전(韓傳)’에는 “늘 5월에 씨뿌리기를 마치고 나서 귀신을 제사하고…… 10월에 농사가 끝나면 역시 다시 이같이 한다.”고 하였다. 여기서는 이것이 농경의례라는 것을 직접 분명하게 기록하고 있다.
이상을 종합해 볼 때 이 부족국가들의 제천의식은 오늘날 동제(洞祭)의 원초적인 상황을 충분히 연상시켜 주고 있다. 그것은 오늘날의 동제와 시기·장소·신격(神格) 등이 당시의 제천의식과 유사하기 때문이다.
다만, 엄숙한 제전이 아니라, 즐겁고 활기찬 축제라는 점에서 지금의 동제와 다소 차이가 있으나, 아직도 축제형식의 마을굿이 동제의 제의 양식으로 전승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고형(古形)의 동제는 국중대회의 제의 양식에 바탕을 두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정월·5월·10월이라는 시기도 오늘날 설·대보름·단오, 그리고 시월 상달 등의 명절들과 상통하는 바가 뚜렷하다.
이상 모든 사항들을 종합해 보면, 오늘날 모든 민속·세시풍속들을 일일이 구체적으로 기록해 주지는 않았어도, 이미 거기에는 농경문화를 근간으로 해서, 오늘날 민속 원류의 대강이 형성되어 있었던 것을 짐작할 수 있다.
2. 삼국시대
놀이나 민속의 역사를 문헌의 기록들을 근거로 고구려·백제·신라의 차례로 살펴보면, 먼저 고구려에서는 정초 풍속으로 ≪수서≫·≪북사≫ 등에 거의 같이 묘사된 간단한 수석전(水石戰) 기록이 눈을 끈다.
“매년 초 패수에 모여 노는데, 왕이 요여(가마)를 타고 의식을 갖추고 이것을 본다. 일이 끝나면 왕이 의복을 입은 채로 물에 들어가고, 좌우를 나누어서 2부로 삼고 물과 돌을 서로 던지며 소리지르고 뛰고 쫓고 하기를 여러 번 하다가 그친다.” 매우 기묘한 느낌을 주는 내용으로 편싸움(石戰)이 옛적에 지니고 있던 종교성을 파악하게 하는 기록이다. 이는 패를 갈라 서로 겨루는 놀이(兩派角逐戱)로서 풍년을 다짐하는 세시풍속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평안도의 추운 정월 국왕이 직접 강물 속에 들어간다는 점에서 종교적 기원의 심각성을 헤아리게 한다. 이때는 국왕뿐만 아니라 민간에서도 종교적 의식으로서 석전을 하였을 것이며, 그 밖의 많은 정초 세시풍속과 더불어 전승해 왔을 것이다.
이러한 석전은 대보름과 단오로 시기를 달리하면서 일제시대까지 전승되어 왔다. 또, 그것은 석투군(石投軍)이라는 이름으로 고구려·신라·고려·조선초까지 전쟁에도 이용되었다.
이러한 상무적인 놀이의 하나로 씨름을 들 수 있다. 씨름하는 모습이 고구려 고분벽화에 그려져 있어 씨름의 오랜 역사를 말해 주고 있다. 벽화로는 계절을 알 수가 없으나, 지금도 북방 몽고에서는 봄에 거행하는 축제의 대행사 중 하나이다. 단오를 중심으로 널리 전승되었을 것이며, 상무적인 기풍과 체력훈련으로도 널리 행해졌을 것이라고 추측해볼 수 있다.
≪신당서 新唐書≫(11세기)나 ≪구당서≫의 고구려전에는 나라 동쪽에 신수(神隧)라는 큰 굴이 있는데 10월에 왕이 스스로 제사지낸다는 기록이 보인다. 이 기록에서 동맹의 전통성을 계승하면서 아직도 제정일치의 전통을 유지하고 있는 국왕의 사제자적인 일면을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또 요동성(遼東省)에 주몽(朱蒙)의 사당이 있는데, 당군(唐軍)의 포위와 공격이 심한 가운데 무당이 제사지내고 나니 주몽이 기꺼이 받았다고 하면서 성이 반드시 안전할 것이라고 하였다는 기록이 보인다. 무속이 장병의 사기를 진작시키는 국가 종교적 기능의 일면을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이러한 당서의 기록들은 ≪삼국사기≫의 제사조와 보장왕조에도 각각 인용, 기록되고 있다.
백제도 시조 온조왕이 주몽의 아들이기 때문에 동명왕묘(東明王廟)를 세웠다고 기록하고 그 뒤 역대로 이에 제사지낸 기록들이 드문드문 보이고 있다. 놀이로서는 투호·축국(蹴鞠)·바둑을 좋아한다는 기록이 ≪신당서≫ 고구려전에 보이고, ≪북사≫ 백제전에도 “투호·저포(樗蒲)·농주(弄珠)·악삭(握槊) 등의 잡희가 있는데 바둑을 더욱 좋아한다.”는 기록이 보인다.
신라의 세시풍속으로는 ≪수서≫·≪구당서≫ 등에 설날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기록이 보인다. “설날에는 서로 경하해서 왕이 잔치를 베풀고 이 날에는 늘 일월신을 배례한다. 또 8월 15일에도 풍악을 울리고 연회을 베푼다.” 이것은 오늘날과 같이 설과 추석이 큰 명절이었고, 그 역사가 유구함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기록이다.
다음에 ≪삼국유사≫에는 “이때부터 나라 풍속에 매년 정월 상해(上亥)·상자(上子)·상오일(上午日)에는 모든 일을 삼가고 15일을 오기일(烏忌日)이라 하여 찰밥으로 까마귀에 제사지내니 지금도 행하고 있다. 이것을 달도(怛忉)라 하니 슬퍼하고 근심해서 백사를 금기하는 뜻이다.”라는 기록이 있다. 여기에는 쥐·돼지·까마귀 그리고 서출지(書出池)에서 나온 노인의 글의 도움으로 왕이 위험을 면하였다는 설화가 얽혀 있는데, 결국은 오기일이나 서출지 등의 유래를 설명해주는 전설이다.
따라서 대보름을 명절로 여기고 까마귀에게 제사를 지내며 종교적인 근신을 한다는 세시풍속은 그 이전부터 전승되어왔다고 해석되는 것이다. “지금도 행하고 있다.”는 ≪삼국유사≫의 기록으로 보아 일연(一然) 때에도 행해졌을 뿐 아니라, 현재도 민간에 전승되는 유구한 세시풍속의 하나이다.
다음으로 기록상에 주목할 만한 것으로 ≪삼국사기≫ 유리왕대 한가위[嘉俳]의 기록이 있는데, 이것은 7월 16일[旣望]부터 8월 15일까지의 집단 길쌈내기이다. 진 편에서 부른 <회소곡>의 음이 슬프고 아름다웠다고 하니, 최근까지 같은 영남지방에 많았던 두레 길쌈 풍속과 그 구성진 민요의 가락을 연상시킨다.
이 가배나 <회소곡>도 역시 유리왕대나 그 무렵의 기원으로 교과서식 해석은 하지 말아야 할 듯하다. 이유는 추석이나 대보름 같은 망일 명절(望日名節)은 중국식의 칠석(7월 7일)이나 중구(9월 9일)같은 중일 명절(重日名節)과는 달리 우리의 고유성이 더 많은 오랜 명절들이기 때문이다.
전기했듯이 우리는 그 전에 신석기시대 농경문화를 4천년 동안, 다시 청동기시대 천년의 세월을 이어왔다. 또, 직조의 역사도 예컨대 방추차(紡錘車) 출토와 같이 신석기시대부터 직물관계유물이 보이고 있고, 한전(韓傳)·예전(濊傳) 등 부족국가시대는 이미 삼베에 잠상(蠶桑)의 기록도 몇 군데 보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음에는 박혁거세(朴赫居世)·김알지(金閼智)등 시조신화를 통해서 당시의 조상숭배와 관련되는 세시풍속을 추측해보면, 현재 영남 민속에서 마을의 동제신을 골맥이 ○씨 할배 또는 할매라 부르는 사례가 많다. 이 골맥이라는 낱말은 고을[洞, 邑]·막[防]·이(명사형어미)의 복합명사이다. 즉, 마을 공동체의 수호신이 골맥이 할배들인데, 이들은 동시에 그 마을의 시조신이자 창건신(創建神)으로도 인식되고 있다. 제삿날은 대보름이 대부분이고, 당신(堂神) 형태는 큰 신목(神木)이 대부분이다.
≪삼국사기≫에는 박혁거세 즉위일을 정월 15일이라고 하였고, 김알지는 계림의 나뭇가지의 황금궤에서 탄생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박혁거세는 박씨골맥이이고, 김알지는 김씨골맥이라 추정해볼 수 있다. 이들은 각기 그 공동체의 시조신이며, 창건신이며 수호신이기도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듯 그 성격도 같고, 제의 장소와 날짜도 같으므로, 이들이 초기국가 씨족공동체의 제신으로서 시조신화에도 투영된 것임을 파악할 수 있다.
그러니 오늘날 대보름을 전후해서 지내는 많은 골맥이동제의 세시풍속은 신라 초기의 시조신화에서부터 그 역사를 구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된다. 또, 신라 김씨 왕가의 시조신 김알지를 탄생시켰다는 계림의 황금궤는 결국 조령숭배(祖靈崇拜)의 한 형태를 보여주는 것이다.
지금도 영남·호남 지방에서는 조상단지에 매년 봄·가을마다 보리와 쌀을 수확하는 대로 갈아 담는 조령숭배의 세시풍속을 전승시키고 있다. 농어촌답게 그 조령의 용기(容器)는 황금궤가 아닌 오지그릇이다. 이러한 사실에서 오늘날 행하여지는 조령숭배의 내력을 초기 신라 시조신화에서 찾아볼 수 있다.
현재 우리의 조상숭배는 기제(忌祭)·차례(茶禮)·묘제(墓祭) 등 유교적인 조상숭배형태로 일반화되어 있다. 그러나 그것은 주지하듯이 고려 말 이후의 역사이다. 강력한 유교식 조상숭배 형태에 가려져서 그 밖의 조상숭배 형태는 희미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으나, 이상에서 우리는 곡령숭배(穀靈崇拜)를 겸한 농경색이 짙은 한국인의 조상숭배의 본연의 모습을 엿볼 수가 있다.
한편 세시풍속과는 별도로 삼국 초기 무속의 역사성으로 신라의 금관을 살펴볼 수 있다. 신라의 금관은 시베리아 무당 관을 조형(祖型)으로 삼고 사슴뿔과 수목 숭배의 기하학적 문양화로 이루어진 예술품이라는 것이 정설이다.
아울러 신라 제2대왕 남해차차웅(南解次次雄)의 ‘차차웅’이 무당이나 국왕, 존장자의 호칭이었다는 것도 ≪삼국유사≫가 명기한 바이다.
앞의 청동의기들 이래로 1,000년을 제정일치적인 무왕(巫王)으로서 군림하였던 신라 제왕들의 모습을 여기서 볼 수 있다.
주로 삼국시대까지의 세시풍속과 놀이의 역사를 간추려서 정리해 보면 정월·5월·10월의 국중대회의 흐름이 먼저 농경의례·명절들의 연원을 이루고 있었다.
그리고 신라의 사금갑·가배 등이 다시 대보름과 추석 등 대표적인 2대 만월명절을 구체화시켜준 셈이었다. 여기에 삼베와 명주 등 길쌈노동과 관련되어 계절적인 세시풍속이 다양화해 가는 상황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보리가을·벼가을 때마다 조상단지 숭상의 세시풍속이 보였다. 또한 보다 구체화된 기록자료가 제시되었던 정월 대보름의 골맥이동제의 역사성들도 보였다. 석전과 씨름·바둑을 비롯한 여러 가지 잡희의 기록들도 보였다.
이렇게 일단 형성된 세시풍속들은 하나의 생활체계로서 다른 민속들을 동반하면서 전개되었을 것이다.
3. 고려시대
고려시대는 먼저 불교적인 세시행사의 첫째로 팔관회(八關會)가 있다. 팔관회는 전사령(戰死靈)을 위안하기 위해서 신라의 진흥왕대부터 비롯되었다는 기록도 있지만, 고려의 팔관회는 전통적인 고구려의 동맹을 계승, 발전시킨 것으로 11월에는 개성(開城)에서, 10월에는 서경(西京)에서만 지내던 국가적인 대제전이었다.
그러나 그 이름과는 달리 불교 색채가 주된 것은 아니었다. ≪송사 宋史≫에 “나라 동쪽에 굴이 있어 세신(歲神)이라 일컬었는데, 늘 10월 보름을 맞아 제사하니 이것을 팔관재라 한다. 의례가 성대하고 왕과 비빈이 등루(登樓)하여 크게 풍악과 연음((宴飮)을 베푼다.”는 기록이 보인다. 이때 왕은 군신·지방관·외국사신들의 축하를 받고, 가무백희(歌舞百戱:나라 행사 때 벌이던 노래와 춤 및 온갖 놀이)가 전개되었다.
팔관회는 시대에 따르는 변화가 있었으나 고려 500년간 국가 최고의식이었고, 몽고의 침입으로 인한 강화천도 때도 지속되었다. 결국 그것은 한국적 전통제의로서는 최고의 발전형이었으나, 조선시대에 들어서자 배불정책(排佛政策)에 따라 폐지되고 말았다. 이 팔관회와 같이 고려시대 더욱 성하였던 세시풍속에 연등회(燃燈會)가 있었다.
고려 태조의 <훈요십조 訓要十條> 속에 “내가 지극히 원하는 바는 연등과 팔관에 있다.”고 하고 그 성격을 기록한 바가 있다. 2대 도읍에서만 행하였던 팔관회와는 달리 연등회는 불교행사로서 시골까지 전국적으로 거행되었다. 연등회는 신라시대부터 있었던 것으로 추측되나, 고려시대에 와서는 국가의 중요행사가 되었다.
그것은 봄철에 등불을 밝히고, 다과를 베풀고 음악과 춤으로 국민들이 함께 즐기며, 부처님을 즐겁게 하고 국가와 왕실의 태평을 비는 행사였다. 2월에 행하던 것을 의종 때는 2월이 전 임금 인종의 기월(忌月:제삿날이 있는 달)이라고 해서 정월대보름에 옮겨서 하였고, 그 뒤로도 행하는 달에 변화가 있었다. 성종 때에는 유학자들의 반대로 일시 중단된 일도 있으나 헌종 1년 윤2월에 다시 행하였다.
공민왕 때도 2월에 몇 차례 연등을 한 기록이 보인다. 그러나 공민왕 13년 4월 나라 풍속이 4월 8일 석가탄일에 연등을 한다는 기록이 보인다. 그 뒤 조선시대에 와서도 연등은 팔관회와는 달리 오늘날까지 4월 8일에 계속되어 오고 있으며, 조선 후기에도 성황을 이루었음을 기록에서 볼 수가 있다.
다음에 백중과 우란분회(盂蘭盆會)가 같이 7월 15일로 예로부터 전승되어 온다. 이날은 중국의 도교식으로는 중원(中元)이기도 하다. 중국의 ≪형초세시기 荊楚歲時記≫(7세기)에도 중원에는 승려·도사·속인들이 모두 분(盆)을 만들어 모든 절에 바친다고 하였다.
한국에서 7월 보름이 주목된 것은, 전기한 대로 신라 유리왕대의 가배(한가위)의 길쌈내기 시작날인 7월 기망(旣望 : 16일)부터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불교 이전이었고, 우란분회 이전이다.
또, 우란분회는 우란분회대로 이미 석가모니가 그것을 7월 15일에 하게 했다고 불교경전에는 기록이 되어 있다. 우란분회가 7월 15일로 되어 있는 것은 한국만의 일이 아니고 중국·일본 등에도 공통되고 있는 불교적인 세시풍속이다.
이상을 종합해서 우란분회·백중날·중원들은 각기 기원은 다르고 날짜는 같은 명절이라 하겠다.
백중날은 역시 망일 명절로서 달을 표준으로 한 한국의 명절체계에서는 중요한 날이 아닐 수가 없다. 이때는 김매기까지 다 끝이 나고 추수만 남기고서 한숨 돌리며 호미씻이도 하는 때이다. 남한에서는 최근까지도 단오보다 훨씬 큰 명절이어서, 이날이 고래의 우리 명절이었을 가능성은 매우 크고 여기에 불교의 우란분회가 후세에 와서 뒤섞였을 것이 충분히 짐작된다.
고려시대는 이날 여러 가지 음식을 만들어서 조상의 영전에 바치고 아귀(餓鬼)에게도 베풀고 조상의 명복을 빌며, 그 받는 고통을 구제한다고 했다. 그 연원은 목련존자(目連尊者)의 어머니가 아귀도(餓鬼道:음식을 보면 불로 변하여 늘 굶주리고 매를 맞는다고 하는 아귀들의 세계)에 떨어져 있을 때 중들을 달래서 대중에게 공양을 올리게 하고 어머니를 구원한 일에서 비롯된 것이라 한다.
불교적인 조상의 넋을 공양한다는 성격이 특히 강한 명절인 셈이었고, 그러한 성격은 후세에도 없어지지는 않았다. 가령, 조선 후기의 ≪동국세시기≫에 이날을 망혼일(亡魂日)이라 부르며 여염집 사람들이 이날 밤 제물을 차리고 죽은 어버이의 혼을 부른다고 했다.
한편, 고려시대는 불교시대였지만 유교적인 세시풍속의 형성도 없지 않았다. 그 첫째로, 우선 석전(釋奠)을 들 수 있다. 석전은 중국 고대 이래의 제의가 한대(漢代) 이후 공자(孔子)를 제사하는 의식이 된 것이고, 한국에도 유교 전래 이후 이 제사가 있었다.
≪고려사≫는 국초부터 문선왕묘(文宣王廟)를 국자감에 세웠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그 뒤 석전의 기록들이 보인다. 석전은 지금도 춘추 2회로 2월과 8월의 첫정일[上丁日]에 거행한다.
서울의 성균관의 석전은 지금까지 많이 알려져 있고 지방 향교들에서도 거행한다. 이것은 향교에서 공부하던 유생들에게 춘추로 연 2회씩은 공자를 비롯한 선현들의 덕을 이어받게 하려는 정신적인 추구를 목적으로 하는 연중행사이기도 했다. 시기와 횟수에서는 오늘날 대학의 봄·가을 축제와 상통하는 바도 많으나, 본질적으로 그 성격에는 시대차가 현격한 것이라 하겠다.
또 다른 유교적인 풍속으로는 우선 주자학(朱子學)의 도입과 조상숭배의 시작을 들 수 있다.
이것은 고려말 유교의 흥성에 따라서 정몽주(鄭夢周)의 건의에 의해서 대부(大夫) 이상은 3대, 6품 이상은 2대, 7품 이하 서민들은 1대 부모만을 제사지내고 각기 가묘(家廟)를 건립하고 종손이 제사지내도록 하는 국령을 내리게 되었다. 그 전까지는 오로지 불교와 무속으로 조상숭배가 이루어졌기 때문에 대부 이상 3대도 조선시대에 와서까지도 실행이 어려웠던 기록이 적지 않고, 많은 논쟁과 우여곡절을 겪었다.
그러나 오늘날 각 명절의 차례, 10월의 묘제, 또 각 가정의 기제까지가 다 가정 나름의 세시풍속이 되어 있다. 그것이 지금 우리 세시풍속이나 민속에서, 정신적으로도 차지하는 비중은 막대한데, 그 시작이 이때 이루어졌다는 것만 해도 우리 민속에서 대단히 비중이 큰 일이라 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리고 유교적인 세시풍속은 고려시대에 일반화된 것은 아니었을지 모르지만 그 종류들이 적지 않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 한 예로 이규보(李奎報)의 ≪동국이상국집 東國李相國集≫에서도 입춘날 대궐 안에 써 붙인 춘첩자(春帖子)의 시가 5, 6편이 보이고 있다. 또, ≪동국이상국집≫에는 9월 9일 중양 등고(登高)의 시도 보인다. 이 행사들이 꼭 유교적이라 할 수 있는 것들은 아닐지 모르지만, 그러나 매우 한문학적이고 선비다운 행사들이어서 유교적인 것으로 같이 묶어 볼 수 있다.
세시풍속적인 놀이로서 많이 눈에 띄는 것에 석전(石戰)·그네·격구(擊毬) 등이 있는데, 이들이 모두 고려시대는 5월 단오에 흥성한 느낌이 많다.
먼저 석전은 위에서 삼국시대 고구려의 경우를 보았거니와 고려의 석전은 시기도 분위기도 이제는 아주 달라졌다. 우선, 계절이 5월이 되고, 또 예컨대 우왕 6년 5월조와 같이 “나라 풍속이 단오에 무뢰(無賴)의 무리들이 거리에 군집해서 돌싸움을 한다.”고 하였다. 고구려 때의 국왕임석하의 종교성 같은 것은 이제는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우왕은 특히 석전을 좋아해서 구경 다닌 기록이 여러 차례 나온다.
그네는 ≪동국이상국집≫에도 “나라 풍속에 단오에 반드시 이 놀이를 한다.”고 하였다. 그네는 물론 상·하층의 사람들이 모두 뛰었겠지만, 기록에 나오는 상층사회의 그네는 호화롭고 현란한 것이었다. 예컨대, 경기체가(景氣體歌)에 나오는 그네도 그렇다. 또, 단오에는 격구를 하였다는 기록도 자주 보인다.
그래서 5월의 단오가 본래 신록이 부활하는 활기찬 젊은이의 명절로 세계의 공통적인 현상이지만, 특히 고려시대의 단오는 석전·씨름·그네·격구 등 오늘날에 비해서 매우 상무적(尙武的)이고 씩씩한 기풍의 큰 명절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선사시대·삼국시대 이래로 전승되어 왔던 세시풍속들 외 이상 고려시대의 세시풍속들만을 나열해 보면 먼저 입춘의 춘첩자에 이어서 정월·2월의 연등, 춘추의 석전, 그리고 단오의 그네·석전(石戰)·격구 등이 있었다. 여름철의 백중, 가을의 중구 그리고 10월의 팔관회 등이 있다. 이상은 주요한 것들이고, 이 밖에도 그 수효는 아주 많다.
4. 조선시대
조선시대의 세시풍속과 민속의 역사에서 당연히 먼저 전제되어야 할 것은 불교관계 행사의 쇠퇴와 유교관계 행사의 흥성이다. 이미 지적하였듯이 고려시대의 팔관회는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폐지되었다. 우란분회는 지속되었으나 상당한 쇠퇴를 보이는 반면에 농경의 계절과 직결되는 백중으로서의 비중은 견지되었다.
연등은 고려시대 귀족층의 호화찬란하였던 행사는 쇠퇴하였지만,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도 계속 민간에서는 성황을 이루었던 것이 후기의 세시기(歲時記)들에도 보인다.
한편, 고려 말부터 장려하였던 ≪가례 家禮≫에 의한 조상제사는 더욱 사회기강으로 강조되었으나, 사당을 짓고 참배한다는 일은 하루아침에 보급되는 일은 아니었다. 그런 점에서는 배불숭유라는 말은 간단하지만 실행은 어려워서 100∼200년의 긴 세월에 걸쳐서야 조금씩 보급되어 갔다. 그러나 관등이나 우란분회처럼 민중사회 속에 자리잡았던 불교적인 세시 관습은 뿌리째 없어지지 않았다.
그렇지만 이렇게 해서 보급된 유교 제례는 강한 혈연성(血緣性)과 가부장권(家父長權)의 강화로 단순히 민속이나 세시풍속뿐만이 아니라 사회풍조에서부터 인간 심성(心性)까지도 크게 변혁시키는 결과가 되었다.
조선시대 후기에 들어서면서 정식으로 세시풍속을 기록한 유득공(柳得恭)의 ≪경도잡지 京都雜志≫(18세기말경), 김매순(金邁淳)의 ≪열양세시기 洌陽歲時記≫(1819), 홍석모(洪錫謨)의 ≪동국세시기 東國歲時記≫(1849) 등이 있어 이제 그 상황은 아주 명확해진다. 이것은 한국 세시풍속의 역사를 살피는 데에는 결정적인 도움을 주는 책들이기 때문이다.
이 중 가장 종합적인 ≪동국세시기≫를 중심으로 조선시대 세시풍속을 개관해 보면, 정월 원일(元日)에는 대궐 안의 조하(朝賀), 민간의 차례, 세장(歲粧:설빔)·세배, 설날 음식인 세찬, 세주·문안비, 새해 인사로 선생이나 관원에게 자기 이름을 적어 보내는 세함(歲銜), 떡국, 대문에 붙이는 잡귀를 쫓는 장수같은 것들을 그린 세화(歲畫)가 있다.
이 설날 풍속에는 70, 80세 이상 노인들에 대한 경로행사, 3재(三災) 면하는 법, 좋은 말로 새해 인사를 하는 덕담, 새해 첫번 들려오는 소리로 일년간의 운수를 점친다는 청참(聽讖), 오행점, 머리카락 사르기, 야광 귀신, 중들이 시주를 얻으려고 치는 법고(法鼓), 무당의 가무에 재물을 내어준다는 제주도의 화반(花盤) 등이 있는데, 이상 14종이 설날의 풍속으로 기록되어 있다.
입춘에는 대궐 안 기둥에 좋은 글을 써 붙이는 춘첩자, 민간에서도 써 붙이는 춘련(春聯), 또는 입춘날의 부적, 봄나물, 함경도 관청에서 권농의 뜻으로 목우를 마을로 끌고 다니는 일들의 순서로 5종이 기록되어 있다.
다음 7일인 인일(人日)에는 규장각 관리들에게 거울을 나누어주는 동인승(銅人勝), 임시 과거 시험인 인일제(人日製)가 기록되었다. 그리고 상해일(上亥日)의 돼지 주둥이 지지기, 상자일(上子日)의 쥐 주둥이 지지기, 또는 쥐불놀이 등의 기록이 있다.
상원(上元) 대보름날 행사로는 약밥·화적(禾積: 볏가릿대)·제웅치기·어린이들의 호리병차기·복토훔치기·부럼까기·귀밝이술·묵은나물·오곡밥·더위팔기·백가반(百家飯)·개 보름쇠기·과일나무 시집보내기·연날리기·팔랑개비·돈치기·달맞이·달점·다리밟기·석전·밤새우기[守歲]·안택굿·달그림자점·재주발점·닭울음점·용알뜨기·달불이점·횃불싸움·줄다리기·차전(車戰)·놋다리놀이·풍기 아전의 소놀이 등 32건의 기록이 있다.
정월 내의 기타 풍속으로 정초의 가게 휴업, 임시 과거인 춘도기과(春到記科), 첫 쥐·용·말·돼지날 등 삼가하는 날[愼日], 16일의 꺼리는 날, 매년 24일의 흐리는 날씨, 남자들이 조심하는 패일(敗日:8일), 조금날[潮減日], 3패일(5·14·23일) 등 7종이 기록되었다.
2월 1일은 중화절에 농사가 힘써야 할 근본이라고 중화척(中和尺:임금이 내리는 자)을 관리들에게 하사하는 일, 머슴날(奴婢日), 시절 음식의 떡 종류, 노래기 부적, 충청도·경상도·제주도의 영등신앙 등이 있다. 그리고 2월의 풍속으로 삼성점(參星占), 종묘에의 얼음 진상 등이 기록되어 있다.
3월 삼짇날의 화전, 시절 음식들, 진천(鎭川)의 용왕당과 삼신당신앙 등이 있고 청명의 각 관청에 대한 느릅나무나 버드나무로 일으킨 불씨 나누어 주기와 봄갈이 시작, 한식의 산소의 절사(節祀), 한식의 유래, 그 밖의 3월의 풍속으로 각종 술·떡·생선·야채 등 수십 종류의 시절음식이 있다.
또 놀이는 화류놀이·활쏘기·풀각시·버들피리, 강릉의 청춘경로회, 경주의 사철 유택(遊宅), 남원의 활쏘기, 용안(龍安)의 향음주례(鄕飮酒禮), 제주도의 당제사, 청안(淸安)의 국사신 제사 등의 기록이 있다.
4월 8일 등석(燈夕)의 화려하고 자세한 관등 설명, 시절음식, 물동이 바가지 장단놀이, 기타 4월의 풍속으로 또 많은 시절 음식, 손톱의 봉숭아꽃 물들이기, 웅천(熊川)의 웅산신당제(熊山神堂祭)의 기록들이 있다.
5월 단오에는 관리들에게 쑥호랑이[艾虎]를 하사하는 일, 부채를 하사하는 일과 많은 부채의 종류·명칭·사용법들의 설명, 단오·부적·창포탕, 창포 비녀·그네뛰기·씨름·수릿날 어원 설명·쑥떡·쑥잎의 수리취(부싯깃)·약용 익모초·대추나무 시집보내기·김해의 편싸움[石戰], 금산 직지사의 단오 씨름, 군위(軍威) 김유신 사당의 단오제, 삼척의 단오제, 안변(安邊) 상음신사(霜陰神詞) 선위대왕 부부에 대한 단오제 등의 행사가 있다.
또, 5월의 기타 풍속으로 태종우(太宗雨)의 내력, 보리·밀들의 조상에 대한 천신, 장 담그기 등이 있다.
6월 15일 유두의 머리감기·유두연(流頭宴), 10여 종의 시절음식, 삼복(三伏)의 개장과 팥죽 먹는 풍속, 그리고 6월의 기타 풍속으로 다시 여러 종류의 시식, 서울 각처 계곡의 탁족(濯足), 진주의 예년 행사인 임진왜란 때 성 함락 추모 등이 있다.
7월 칠석의 햇볕에 옷 말리기, 15일의 우란분회, 백중의 충청도 씨름놀이, 7월의 기타 풍속으로 경사대부 집의 올벼 천신 등이 기록되고 있다.
8월 추석 명절과 그 유래, 제주도의 줄다리기[照里之戱]와 그네뛰기 등, 8월의 풍속으로 충청도의 16일의 씨름대회, 많은 시절음식의 기록들이 있다.
9월 9일 중구의 국화전·화채 등의 시절음식, 남산·북악산 등의 등고(登高)와 단풍구경 등으로 9월 기록은 제일 간단하다.
10월 말날[午日]의 외양간 기원, 10월의 풍속으로 성주고사·손돌바람[孫乭風]·김장 담그기, 20여종의 시절음식, 보은(報恩) 속리산 꼭대기 대자재천왕(大自在天王) 사당의 제사 기록들이 있다.
11월 동지의 팥죽, 관상감(觀象監)의 달력 나누기, 내의원(內醫院)의 전약(煎藥:달여 놓은 약) 진상, 제주도의 귤 진상과 임시 과거인 감제(柑製), 충청도·경상도의 용갈이점(龍耕), 각 지방의 생선의 종류, 음식의 종류, 김치의 종류들을 든 시절음식 등이 기록되어 있다.
12월 납일(臘日:동지 지난 뒤 셋째 미일)의 종묘사직제사, 내의원에서 청심환 등 각종 환약을 만든 납약 진상과 그것을 나누어 주는 일, 납향(臘享)에 쓰는 고기의 들짐승 사냥이야기, 참새잡이, 제석(除夕)의 묵은 세배, 대궐 안에서의 연종포(年終砲), 연말의 소 도살 임시해금, 밤새우기[守歲], 눈썹 희어진다고 분칠하는 장난 이야기, 윷놀이 설명과 윷점, 널뛰기, 함경도·평안도의 원주(圓柱)에 기름 심지를 박은 듯하다는 빙등(氷燈) 풍속, 의주(義州)의 지포(紙砲) 풍속 등이 기록되어 있다.
기타 12월 풍속으로는, 관리들 성적과 등급조절 자료가 작성, 제출되는 세초(歲抄) 풍속, 각급 지방장관들의 연말 진상, 공차기[蹴鞠], 고성군 사당의 가면놀이 등이 있다.
윤달 풍속으로는 수의(壽衣) 만들기, 광주(廣州) 봉은사의 노파들의 극락왕생 기원 등이 기록되고 있다.
조선시대 민속의 전반적인 경향은 성리학의 전래에 의하여 전통적인 민속들이 유교중심의 세계관에 입각한 유교문화로 변모한 데서 찾을 수 있다.
고려말 성리학이 전래되어 불교에 대한 배척의식이 싹트다가, 유교세력에 의하여 조선이 건국되면서 무속·도교·불교 등 전통적인 신앙에 관련된 민속과 문화 일반에 대한 비판이 거세게 일어났다. 사사혁파(寺社革罷)와 음사(淫祀)의 타파 등을 통해서 옛 질서를 청산하고 유교적인 정치이념을 구현하여, 새로운 체제의 국가를 수립하자고 하였던 것이다.
이에 따라 팔관회 등 전통적인 국중대회가 중단되고, 중국에서 들어온 나례희(儺禮戱)가 새로운 풍속으로 자리잡기 시작하였으며, 이와 더불어 중국의 성황제(城隍祭)라는 명칭이 고려 이래로 전통적인 우리의 동제를 대신하기에 이르렀다. 따라서, 나례도감과 성황도감관(城隍都監官) 등 이를 관장하는 정부기관까지 생겨났다.
제의의 방식도 크게 바뀌었다. 술을 마시고 노래와 춤을 즐기며 가무 사제(歌舞司祭)하던 축제 형식의 제의에서 엄숙한 유교식 제의로 달라졌다. 특히, 널리 보급된 것은 조상에 대한 제사이다. 제사는 고려 말기부터 조선조 명종 전까지 영의정도 4대 봉사를 못하였는데 조선조 후기에 와서는 일반인들까지 4대 봉사(奉祀:조상의 제사를 받듦)가 일반화되었다. 이로써, 제례는 본고장인 중국에서보다 더 강화되었다.
고려시대에 강성하였던 도교행사는 소격서(昭格署)라는 관청을 두어 대폭 줄였다. 무속은 음사로 규정되어 타파의 대상이 되고 무당은 8천(八賤)으로 취급되어 일정한 지역에 수용하거나, 활인서(活人署)에 소속시켜 질병 치료에 이용하였다.
조선조의 유교문화는 중국중심의 사대주의에 빠지는 한편, 혈연중심의 가족주의와 문벌을 형성하게 되었고, 학문과 도덕을 중시하는 인문정신이 강성하게 되었다. 그 결과 상공인을 천시하는 사농공상(士農工商)의 가치관이 형성되었으며, 양반은 생산활동에 참여하는 것을 금기시하여 비생산적인 생활을 하게 되었다.
따라서, 실질보다 명분을 앞세우고 경전(經典)의 문구나 외우면서 족보와 반상이나 따지는 폐단을 낳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반상·관민·적서·남녀의 차별관념이 깊이 조성되고, 당쟁의 과열 및 문벌 다툼으로 민족의식이 분열되고 국력이 약화되는 상황에 이르게 되었다.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등장한 것이 실학사상이다.
중국중심의 모화사상에서 탈피하여 민족 주체성을 발견하고 민족 고유의 전통문화를 계승, 발전시키려는 의식이 민속에 대한 관심을 새롭게 불러일으키게 되었다. 이러한 실학파(實學派)의 민족적 각성은 민속문화에 대한 재인식을 가능하게 하였으나, 성리학에 의하여 단절되거나 변질된 민속을 복원하는 데까지 이르지는 못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실학파의 민속에 대한 자각과 학문적 관심도 일제시대로 접어들면서 계속해서 활성화될 수 없게 되었다. 일제에 의하여 민족문화가 다각적으로 말살되었기 때문이다.
5. 일제강점기
조선시대 성리학이 우리 민속을 변질시킨 뒤, 또 한 고비의 훼손은 개항기부터 시작된다. 개항기에 들어온 기독교는 종교적인 선교활동에 머무르지 않고, 우리의 전통문화를 미개한 것으로 비판하면서 서구의 문물을 들여와 소개하고 보급하는 데 상당한 노력을 하였다.
이들은 유교적인 제사도 조상숭배가 아니라 우상을 섬기는 것이라 하여 금기시하였으니, 무속을 비롯한 동제·기우제 등의 민속신앙은 미신으로 취급되기 마련이었다. 그러나 선교활동의 일환이었기 때문에 민속의 급격한 파괴나 강압적인 힘으로 단절시키는 사례는 없었다.
일제시대에 들어오면서 민속문화 훼손 및 단절은 극도에 달한다. 식민지정책의 수행을 위하여 우리 민족정신을 말살하고자 민속문화를 물리적으로 훼손시키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우리 민속을 ‘개화’라는 제국주의적 용어를 통하여 극복해야 할 문화로 매도하는 한편, 민속신앙을 미신으로 규정하여 타파의 대상으로 삼았다.
일제에 의하여 집중적으로 훼손된 것은 가신(家神)과 동신(洞神)을 중심으로 한 민속신앙과 지역공동체가 공동으로 참여하는 대단위 민속놀이였다. 민속놀이는 대중집회를 금지하는 명목으로, 민중들이 집단적인 놀이를 통하여 결속하고 민족적 동질성을 강화하는 것을 우려하여 법령으로 금지하였다.
민속신앙에 대한 탄압과 박해는 더욱 극심하였다. 경찰국에서는 <무녀취체법규 巫女取締法規>를 제정하여 강력한 단속 행정으로 무속을 억눌러서 못 하게 하고, 학무국에서는 신도정책(神道政策)을 펴나가 학생들에게 신사참배를 의무화시켰다. 사회과에서는 민속신앙을 미신으로 간주하는 사회교화운동을 전개하였다. 그 결과 집안의 성주·조왕·삼신 등의 가신들을 수색하여 불사르고 마을의 당집과 당나무를 훼손하여 동제를 중단시켰다.
그리고는 자신들의 민속신앙인 신도를 들여와 조선신궁(朝鮮神宮)을 비롯한 여러 신궁과 신사들을 각처에 짓고 매월 1일을 ‘애국일’로 정하여 신사참배를 의무화시켰다. 이에 따라 집집마다 신단[神棚]이 모셔지기도 하였다.
양력을 사용하게 됨으로써 세시풍속도 크게 변모되었다. 전통적인 명절인 설을 양력에 의하여 신정으로 대치시키고자 하였으며, 우리의 연호 대신에 일본의 연호를 썼다. 뿐만 아니라, 설·보름·단오·추석 등 3일 또는 5일간 놀았던 큰 명절들이 하루도 공휴일로 지정되지 않았다.
일제에 의하여 우리의 유형적(有形的) 민속도 크게 달라졌다. 단발령에 의하여 길게 땋아 내리던 머리를 짧게 깎게 되었고, 관리들과 경찰관들의 국민복이 서구의 신사복과 함께 새로운 복식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양복의 영향으로 남성들의 한복에는 ‘조끼’라는 새로운 양식의 복식이 덧붙여지게 되었다. 조끼의 출현으로 허리춤에 차고 다니던 주머니 대신에 이른바 개화주머니가 유행하였다. 그리고 여성들 복식에는 ‘몸빼’라고 하는 바지 형식의 노동복이 생겨났다. 이것은 일제가 우리 부녀들의 노동력을 착취하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보급한 여성노동복이다. 거기에다 일본식 신발이 들어온 것도 이때부터이다.
가옥의 양식도 일본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 미닫이문이 늘어나고 방바닥에 다다미가 깔리기도 하였다. 철도관사를 비롯한 공공건물 및 여기에 딸린 관사들은 모두 일본식 가옥이었다.
이처럼 일제의 식민지정책과 일본을 통하여 들어온 서구문화의 영향으로 우리 민속은 크게 변질되었다. 그 결과 광복 후에도 일제의 잔재가 민속문화에 여러 모로 남아 있다. 시급히 극복해야 할 잔재로는 우리의 민속신앙을 미신으로 매도하는 관념과 아직도 남아 있는 일본어의 찌꺼기, 그리고 전통적인 설을 신정으로 대치시켜 놓은 것 등을 들 수 있다.
- 한국 민속의 성격과 현황 및 전망 -
1. 한국민속의 성격
한국 민속의 형성과 역사에 뚜렷한 하나의 성격은 농경문화이다. 농경문화는 신석기시대 이래로 지금까지 7,000년간을 일관해온 것이다. 농경생활은 심고 가꾸며 추수동장(秋收冬藏)하는 정착생활의 시작이었다. 몽고를 비롯한 북쪽 유목문화의 기동성에 비하면 이러한 농경문화는 일정한 곳에 자리를 잡아 살아가는 평화적인 성격을 지닌 문화이다.
또 하나 기본적인 한국 민속 형성의 성격으로 기후를 들 수 있다. 한국은 온대에 속하며 사계절의 변화가 분명하다. 그래서 춘하추동의 기후의 변화에 따르는 다양한 세시풍속이 형성되어 왔다.
또한, 자연의 지리적인 요소로서 지세(地勢)도 문제될 수 있다. 여기에는 백두산과 지리산 등 높은 산들도 없지 않지만 많은 인구가 살던 지역은 평야지대이다. 그것도 그리 광막한 대평원들은 아니다. 전국 어디를 가나 배산임수(背山臨水)로 둥근 야산과 강, 그리고 들판들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사람들은 마을을 이루고 농토를 마련하여 자연과 더불어 낙천적으로 즐기는 생활을 영위해 왔다.
농경과의 관련보다 자연적인 계절의 변화에 따르는 화전놀이나 천렵(川獵)·단풍놀이 등이 있는가 하면, 농경과 관련이 있는 단오나 추석 등의 명절은 사계절의 변화에 잘 적응하고 즐거운 생활을 통하여 형성된 문화들이었다.
한편, 청동기시대 부족국가시대 이후로는 벼농사가 수입, 보급되기 시작하고, 삼베나 잠상(蠶桑:누에와 뽕) 등 직조(織造)도 보급됨에 따라 세시풍속도 상당히 정밀하게 짜여졌던 것으로 생각된다.
벼농사에서 기후는 절대적 조건이 된다. 왕조실록에, 특히 3월에서 7월 사이 매년 몇 차례 기우제를 지낸 기록이 나온다. 기우제도 날짜는 고정되어 있지 않았지만 계절적인 세시풍속이었던 셈이다.
그리고 그러한 농경사회다운 기후에 대한 깊은 신앙이나 관심은 초기 기록에서부터 눈에 띈다. ≪위지≫ 동이전 부여전의 “가물어서 농사가 안 되면 허물을 왕에게 돌리고 마땅히 왕을 바꾸거나 죽여야 한다고 한다.”는 기록이 우선 그것을 말하여 준다.
이러한 농경에 대한 신앙성은 한국 최초의 풍속도라고 할 수 있는 ‘농경문 청동의기’의 밭 갈고 거두는 그림에서부터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다. 농경의 주술적 기원(祈願)에서부터 한국의 그림은 나타나기 시작하고 있는 셈이다. 그리고 여기에 인문 지리적인 조건이 역사적으로 작용하면서 한국의 민속은 다양성을 지니게 되었다.
우선, 세시풍속 면에서는 역법(曆法)이 이웃 중국에서부터 전래되어 왔다. 그 기록도 정월·5월·10월 등 각 부족국가들의 제천의식에서 행해지는 농경의례들과 결부되어 있다. 농경의 비중은 그만큼 모든 면에서 결정적인 비중을 차지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삼국시대 이후로는 외래 종교 문화들이, 그 이전에 있어 왔던 5,000년의 농경문화에 새로운 성격들을 첨가해 왔다.
불교는 그 근본 인생관이 염세적(厭世的)인 내세종교로 염세관은 가난한 민중에게 많은 공감을 안겨줄 수 있었고, 또 내세의 행복의 약속은 큰 매력으로서 그들의 마음에 스며들 수 있었다. 그래서 불교는 지금까지도 많은 신도들을 가지고, 불교적인 몇몇 세시풍속이 전승되고 있다. 그러나 그보다도 문제는 한국인의 심성에 동화되어 있는 불교적 심성이다.
그러나 한국은 물론 중국·일본 등 동양 3국의 불교는 다 현세적 성격이 강한 이른바 호국불교로 국가적인 차원에서 수용된 바도 있다. 민중적인 신앙면에서도 무불습합(巫佛習合:무속신앙과 불교의 융화)으로, 불교는 어디서나 그 지역문화에 잘 동화되었다. 한국적 전통신앙이었던 고구려의 동맹이 고려에 와서 팔관회라는 이름을 가졌던 것도 그 한 예이고, 그것도 근원적으로는 농경의례의 발전결과였다.
팔관회를 세시풍속이라는 면에 국한시켜서 볼 때 연등은 줄곧 농경과는 관계가 없는 세시풍속이었으나, 우란분회는 백중과 같은 날 행하여졌다. 역시 7월 15일 망일 명절인 백중은 우리 농경에서도 중요한 시기요 명절이었다.
조선시대의 유교는 불교와는 반대로 현세적인 치국이념이었다. 유교윤리는 한국인을 예절 바르게 하는 데도 공헌하였고, 유교제례는 숭조보근(崇祖保根:조상을 숭배하고 뿌리를 지킴.)이라는 사회의 기강과, 혈연적인 유대강화에도 공헌하였다. 또, 가부장권도 매우 강화하였고, 불교보다는 현실적인 사고를 가지도록 하여 유교가 한국 민속의 성격을 변화시킨 비중은 대단히 큰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게 유교적으로 뿌리를 내린 풍속으로는 우선 제례를 들 수 있다. 차례(茶禮)가 정초·한식·단오·추석·동지 등에 행하여지면서 계절 음식들을 올리는 점에서도 농경세시와는 매우 밀접하였다. 그리고 오늘날 추석과 설날은 2대 명절로서 이른바 민족 대이동일을 형성하기에 이르고 있다.
기제(忌祭)는 조상들의 사망일이니 애초부터 농경과의 관련성은 없으나 시제(묘제)는 대개 10월로 타작 전의 한가한 기간으로서 농경과도 관계가 있는 셈이다.
이러한 한국적인 세시풍속들에는 물론 중국의 영향이 많았으나 중국과는 여러 모로 차이가 있는데, 그 차이는 한국인의 문화형성 능력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다.
여기서 한국·중국 세시풍속의 기본적인 차이를 하나 들어 본다면, 중국은 중일명절의 성격이 강한 데 비해서 한국은 망일 명절의 경향이 강하다는 점이다. 단적인 예로, 한국은 8월 15일 추석이 삼국 초기 신라의 가배(嘉俳)에서부터 일찍 기록에 있으며, 현재 국가공휴일로서 2대 민족 대이동일의 정점의 하나로 되어 있다.
그러나 중국에서는 상대에서부터 그러하였고 당대(唐代)의 시문(詩文)의 소재, 세시행사 등의 분량과 비중에서, 추석은 9월 9일 중구에 비교가 되지 못할 만큼 적었다고 한다. 관리들의 휴가도 중구에는 많았지만, 추석에는 별로 없었다고 한다.
칠월 칠석도 중국에서는 여러 가지 전승이 있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상층 양반사회를 주로 해서 견우(牽牛)·직녀(織女)의 설화적 전승이 이루어지고 있고, 직녀에게 바느질 걸교(乞巧:직녀별에게 바느질을 잘하게 하여 달라고 빌던 일)도 말만 전할 뿐이다.
앞에서 조선시대 세시풍속을 두루 망라한 ≪동국세시기≫의 행사명을 살펴본 바 있으나, 여기에서도 칠석에 대해서는 한마디 언급도 없고, 명절 이름으로도 들지 않고 있는 것으로 보아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대신 한국에서는 7월 15일 백중의 비중이 매우 컸다. 또 6월 15일 유두라는 명절은 중국에도 일본에도 없는 것이다.
그것은 중국이 오행음양 철학성을 앞세운 데 대해서, 한국은 농경·대지·여성·풍요·태음(太陰) 등의 상징인 달을 앞세운 결과라 하겠다. 그리고 이러한 점에서는 일본도 중국과는 달리 한국에 더 유사하다. 일본에도 오늘날 2대 민족 대이동일이 있는데, 그것이 정초 설날인 점이 같고, 또 하나 7월 15일 우란분회 명절이 우리의 추석처럼 망월일이라는 점에서 유사하다.
그리고 정월 대보름이 일본에서도 큰 명절이지만, 한국의 세시풍속 가운데서 이 날의 비중은 절대적이다. ≪동국세시기≫를 보면, 1년 12개월에 윤달까지 세시풍속 행사명은 총 156종이었는데 대보름 하루 행사가 32종으로 1년 전체의 5분의 1이 넘는다. 세배·차례 등 설날의 14종에도 2배 이상의 큰 비중을 지니고 있으며 지금도 계속 같은 비중을 지니고 있다.
광복 후 저술된 두세 권의 한국 세시풍속의 책들을 보아도 통계상으로는 1년에 총 200종 내외의 세시행사에 정월 한 달의 행사수가 반 정도를 넘나든다. 그리고 대보름 하루의 행사수가 50종을 넘어서 정월 전체의 반 이상, 일년 전체의 4분의 1 이상을 대보름 하루가 차지하는 절대적인 비중을 보인다.
문화는 전파의 경로도 중요하겠지만, 국민이 어느 것을 더 많이 골라서 생활화하고 있고 정착시키고 있는가가 더 중요할 것이다. 특히, 단오와 농경의 관계에서 주목을 끄는 점이 있다. 그것은 남한 각 지방의 큰 단오제 행사들이 조선시대 후기만 하여도 매우 많았고, 단오명절을 크게 지낸 인상이 짙은 점이다.
≪동국세시기≫의 기록만으로도 김해의 편싸움[石戰], 금산의 단오 씨름, 군위·삼척·안변의 단오제들이 그것이다. 영산의 문호장굿, 자인 단오굿의 거창하였던 한장군놀이들도 있었다.
그러나 현재 한국 세시풍속의 조사 결과, 남한에서는 단오명절이 약하고 대신 추석명절의 비중이 큰 것이 뚜렷한 실정으로서 많은 학자들이 그것을 인정하고 주목하고 있다. 반대로, 한강 이북지방은 단오가 추석보다 훨씬 비중이 큰 명절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실제로 단오 때는 벼농사에서 제일 중요한 모내기가 한참인 때로서, 농촌에서는 ‘발등에 오줌을 눈다’는 속담이 있을 만큼 바쁜 때이다.
그래서 단오명절은 거의 행사가 없는 농촌이 대부분이다. 대신 모내고 김매기가 일단 끝나고 한숨을 돌리게 되는 7월 보름 백중에 호미씻이 등으로 한바탕 크게 노는 것이 남한지방의 실정이었다.
단오명절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거창하였던 각 지방 단오굿들이 사라진 이유는 일제시대의 탄압과 단오뿐이 아닌 전반적인 세시행사나 전통문화의 퇴조도 이유가 되겠다. 그러나 보다 더 큰 이유는 전기(前記)하였듯이, 단오가 농사에서 제일 중요하고 바쁜 모내기의 절정기에 겹쳐지던 명절이라는 사실이 가장 큰 이유의 하나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 전에는 모내기가 없어서 단오굿이 성하였던 것인가 하는 이 질문에는 그러하였다고 답변할 수 있는 여지가 충분히 있다. 왜냐하면, 모내기가 일반적으로 보급된 것은 조선 후기이기 때문이다. 그 전에는 이앙을 하지 않고 볍씨를 직접 논에 뿌리는 직파법(直播法)이 일반적이었다는 것이 오늘날 농학의 연구 결과이다.
직파법이 일반적이었던 조선 중기까지의 오랜 농경에서는 단오 전에 볍씨 파종이 끝났을 것이다. 위지 동이전 한전처럼 ‘5월에 씨 뿌리고 나서 국중대회하였다’는 것도 벼농사와 반드시 관계가 없었던 것이라고는 할 수 없을 듯하다. 참고로 볍씨를 뿌려서 모판을 만들었다가 모가 자란 다음 이앙을 하기까지는 45∼50일 정도가 걸렸다.
그러나 최근 다시 비닐 보온 못자리 등 여러 가지 개량 농법으로 단오 무렵 모내기가 거의 끝나도록 시기가 당겨지고 있다. 그리고 위와 같은 견해는 아직 학계의 정설은 아니고 민속조사와 농학연구 결과로 얻은 추론일 뿐이다.
이상을 종합해서 볼 때 한국의 민속에는 상대 이래의 우리 농경문화와 그에 따른 토속신앙 위에 불교의 전래, 특히 근세에 와서 유교의 영향이 컸다.
그러나 태초 이래로 그것은 모두 농경문화라는 큰 줄기를 기반으로 해서 형성되어온 것이었다. 몰론, 여기에는 온대의 사계절의 변화가 분명한 자연 지리적 조건이 크게 작용하였고, 지세와 기후의 영향이 결정적이었다. 그리고 세시풍속의 상징적인 특성의 하나는 중국과는 달리 태음(太陰)의 원리가 크게 작용한 데에 있었다고 하겠다.
2. 한국 민속의 현황
이상 한국 민속의 역사와 성격을 통해서 한국 민속을 형성하는 대표적인 세 가지 기본 요건을 볼 수가 있었다. 그 첫째는 농경 문화적인 역사와 성격이었고, 둘째는 자연 지리적인 요건으로서 사계절의 선명한 변화·기후·지세 등이었는데, 사실은 이것이 더 선행하는 절대요건이 되겠다.
셋째는 외래문화와 외래종교의 영향이다.
이 세 요건들은 서로 복합되어 유기적인 연관성을 가지고 한국 민속의 역사와 성격을 형성해 왔다. 그런데 현대에 와서 자연 지리적 조건에는 큰 변화가 있을 수 없겠지마는, 우리의 농경문화나 외래문화는 그 기본 형태에서부터 대변동의 양상을 띠고 있다.
앞에서 든 요건들과 오늘날의 변화양상을 종합함으로써, 한국 민속의 현황을 파악하고 아울러 장래를 전망하며, 문제점들을 제기해 보기로 한다.
농경문화는 신석기시대이래 지금까지 7,000년의 장구한 역사를 가져온 우리의 기본문화였다. 동시에 지난날의 한국의 인구도 대부분 농촌인구요, 농민이었다. 그러나 그 농촌인구는 1960년대 이후 급속하게 도시화되기 시작하다가 1976년을 고비로 해서 드디어 50%이상이 도시화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그에 병행하여 한국의 산업도 농경에서 상공업화로 급격히 변모하기에 이르렀다.
지금 한국은 세계적으로도 인정받는 상공업국으로서 70% 이상이 도시인구이다. 이는 신석기시대 이래 7,000년의 한국 문화사상의 최대의 변혁이며, 현대는 바로 그러한 전환을 겪는 격동기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인구의 도시화·상공업화는 지금도 많은 증가를 계속해서 보이고 있다.
이렇게 도시인구가 계속 증가한다면 한국의 민속도 지금처럼 농촌중심적으로만 다룰 수는 없다. 도시인의 생활에도 민속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도시의 민속은 그 생활환경이나 생업이 농촌과는 많이 다르지 않을 수가 없다. 이것을 다시 세시풍속에서 보면, 우선 그 생활주기(生活週期)가 달라진다.
1년 12개월의 매년 주기는 같지만 경제생활에서 농민이 1년 단위의 수입과 지출을 해온 데 비해서 도시의 근로자·회사원·공무원 등 많은 사람들이 월급쟁이가 되어서 월 단위의 수입과 지출을 한다. 그리고 그들의 근무는 또 주 단위가 되어 종래의 5일 주기 시장 나들이와 달리 7일 주기의 휴식과 행락(行樂)이 사회적으로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된다.
그래서 도시생활의 주기는 연·월·주로 삼원화가 되는 셈이다. 재래의 화전놀이나 등고를 현대의 등산으로 치고, 천렵을 낚시로 칠 수 있겠는데, 현대는 주말 행락을 주로 삼고 있다. 동시에 등산과 낚시도 철을 가리지 않고 어느 때나 한다.
한국인은 자연을 정원 안에 축소 재현하는 일을 거의 하지 않고, 자연 속에 나아가서 자연을 즐겼다. 그러한 전통적인 화전놀이나 화류놀이도 현대의 개인 행락적 놀이 문화로 변질되고, 증가된 도시인구들이 주말에 시골로 몰리니 여러 가지 부작용을 빚어내는 등 복합적인 요인으로 다양한 변화가 거듭된다.
학생들의 여름·겨울 방학과 직장인들의 여름·겨울 휴가도 전통사회에는 없던 신종 1년 주기의 세시풍속이고, 대학사회의 춘추의 축제도 그렇다. 이때 대학의 축제는 젊음의 낭만이라고 신문에도 기삿거리가 되나, 정작 일하는 농민들의 검소한 마을의 축제는 낭비와 미신으로 몰려 타파대상이 되는 것이 상례였다.
도시화와 공업화는 서구화와 핵가족화를 몰고 온 것만이 아니다. 근대화 개인주의화와 동시에 농경에 중심을 둔 전통문화를 경시하기에 이르렀고, 마침내는 쇠퇴와 소멸을 초래하게 되었다.
대학의 축제와 농촌의 동제는 그 참여도·필요성·내용·비용 등 어느 모로 보나 보다 바람직한 것이 전통적인 공동체의 축제인데, 그것이 오히려 억압되고 있다. 그리고 새마을사업 같은 계기에 당국에 의해서 타파의 지시를 받고 많이 사라져 갔다.
민속문화에 대한 이해와 평가가 제대로 되어 있어야 하나, 학교교육은 오히려 그렇지 못하였다. 민속의 뿌리인 민간신앙에 대해서는 미신으로 모는 경향까지 있었다. 그래서 동제같은 현상들은 장·노년층의 관심을 끌고 있으나, 청년층이 외면을 하므로 민속문화의 계승문제에서는 이중·삼중으로 심각한 위기에 닥쳐 있는 것이 오늘날의 현황이라 하겠다.
자연 지리적 조건을 살펴보면 사계절의 변화·기후·지세 등 온대지역의 기본조건에는 변화가 없다. 다만, 환경의 오염, 인구증가와 교통량에 따르는 복잡화 등, 소위 공해니 자연보존이니 하는 것들이 중요한 문제로 등장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민속이나 세시풍속에 어떤 큰 영향을 아직은 미치지 않고 있다.
여기서 한 가지를 더 들자면, 교통의 발달과 관광의 보급이 재래적인 세시풍속에 미치는 영향이다. 고속도로의 개통으로 전국이 일일생활권에 들게 되자, 도시인들의 주말이나 휴가의 행락만이 아니라, 농촌의 농민들도 단체관광을 하는 일들이 생기게 되었다. 이것은 농촌도 한가해지고 시간에 여유가 생겼기 때문이기도 하다.
우선, 농사에서는 제초제를 뿌리고 김매는 일이 없어졌다. 그것은 하나의 예에 불과하고 경작·이앙·수확 등 많은 일들이 기계화되고 있다. 그리고 동시에 옛날 같은 바느질과 길쌈일이 줄어들었다. 누에 치고 삼 삼고 명주 짜고 베 짜는 직조도 거의 사라졌다. 거기에다 교통은 산골마을들도 큰길까지만 나오면 차편을 이용할 수 있다.
물론, 모내기나 추수 등 바쁠 때도 있지만, 그 밖에는 농촌의 친목계원들의 단체관광 정도는 할 틈이 난다. 화전놀이나 단풍놀이들이 이렇게 탈바꿈되는 경향이 있는데, 이것은 결코 도시근교 농촌만이 아니라 벽지에서도 가능한 일이다. 산골 노인들도 민속촌이나 강릉단오제 등은 이미 다 보았다고 할 정도이다. 여기에는 또 한국답게 효도관광이라는 것이 있어서 노인들을 우선으로 모시는 경향이 있다.
마치 세시풍속이 관광이라는 말로 대치되는 느낌이다. 여기에 관광도 건전한 국민관광으로서 연구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전통민속행사도 여기 결부되지 않을 수 없으며, 이것은 민속의 중요한 변화가 아닐 수 없다.
외래문화 특히 외래종교의 영향을 살펴보면 지금까지 역사적으로 형성되고 전승되어온 우리 고유의 민간신앙의 전통 위에 불교·유교·기독교 등의 전래가 있었다. 이들 외래종교는 각기 국민의 일상생활에서부터 세계관과 가치관의 형성까지 커다란 영향을 미쳤고, 새로운 민속들을 생성, 전승시키기도 하였다. 이를테면, 사월 초파일의 관등놀이, 명절의 차례, 크리스마스축제 등은 각기 불교·유교·기독교의 전래 이후 생긴 민속이라 하겠다.
그러나 기독교는 약간 상황이 다르다. 재래의 유교는 물론, 불교도 중국을 거쳐 들어온 동양사회 내 상호간의 이동이었다. 이와 달리 기독교는 서양사회에서 서구문물과 같이 들어왔다. 그리고 그 기세가 강해서 크리스마스는 석가탄일보다 훨씬 앞서 국가공휴일로 지정이 되었다. 교세의 증가도 상당히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문화공보부(현재의 문화관광부)의 종교 통계 발표에 의하면, 1972년도에는 원불교를 합한 불교계 신도 총수는 867만 명으로서 신·구 기독교 신도 총수 425만 명의 2배를 넘고 있었다.
불교의 신도 총수가 기독교의 2배를 넘던 것이 1985년도에는 원불교를 합한 불교계 신도는 815만 명인데, 신·구 기독교계 신도는 835만 명으로 급증하고 있다. 불과 13년 만에 기독교계 신도는 불교계 신도의 절반 이하에서 불교계 신도보다 많아지는 놀라운 증가세를 보이고 있다.
이러한 추세는 지금도 지속되고 있는 것으로 보여서 다시 1995년도의 통계청 발표로는 불교계 신도 총수 1,040만 명에 기독교계 총신도수는 1,171만 명으로 되어 있다. 종교 통계는 정확성을 기하기가 어렵고 논란들도 있어 왔으나, 이상으로 대체적인 그 추세만은 짐작할 수가 있다.
이제 국민의 종교생활 측면이 불교에서 기독교로 비중이 바뀌어가고 있으며 이것은 앞으로도 지속될 것으로 여겨진다. 이것은 점차 통과의례에서 세례나 혼인식·장례식 등이 기독교식으로 되며, 세시풍속에서도 크리스마스나 부활절·추수감사절이 높은 비중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기독교 풍속은 전통적인 문화가 아니기 때문에 아직 이것을 우리의 민속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지난날의 불교나 유교와 마찬가지로, 또 한 갈래의 다른 관습이나 세시풍속들을 새로 보태어 나가고 있는 것이 오늘 우리 민속의 전체적 현황이라 하겠다.
3. 한국 민속의 전망
한국 민속의 전망과 문제점들도 위에서 살펴온 지리적 환경과 종교·문화 그리고 생업기술 등 세 측면을 종합해서 고려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지리적 환경인 사계절의 변화나 기후·지세 등에는 고금에 큰 변화가 없다. 그리고 이러한 자연 속에서 싹터왔던 원초 이래의 생업인 농업은 지속될 것이다. 그리고 특히 벼농사의 결과인 쌀을 주식으로 하는 우리의 식생활양식도 도시화·공업화·국제화가 이루어지는 과정에서도 큰 변화 없이 그 자체로서 발전될 것이다.
둘째, 종교 문화면에서 한국은 고유의 전통적인 민간신앙에 불교·유교·기독교 등을 수용해 왔다. 민간신앙은 주산업이었던 농경문화와 밀접한 연관성을 가져왔다. 지금도 국가공휴일 총 13일 중 종교 신앙 관련이 5일이다. 그 가운데서 개천절·추석·설날 등은 우리 세시풍속의 계승이다. 그리고 외래종교였던 불교의 석가탄일, 기독교의 성탄절 등이 역시 국가공휴일로 제정되어 있다.
이와 같이, 온대의 지리적 조건과 벼농사문화, 그리고 불교·유교·기독교 등 외래종교의 수용이 모두 있었다는 점에서 동양의 한국·중국·일본 3국은 매우 유사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지금 중국대륙은 공산화되었고, 일본은 그들의 민간신앙이었던 신도와 불교를 퍽 고수해 오고 있는 편이다.
이들에 비해서 한국은 조선조 500년간 유교를 많이 숭상하였고, 다시 근래는 기독교의 신앙활동이 적극적이다. 동양사회 내에서도 우리 나라는 전통문화와 외래문화의 조화를 이루는 가운데 한국의 문화를 창조해온 것 같다.
셋째, 산업면에서 볼 때 우리들이 겪고 있는 문화변동은 유구한 우리 문화사 가운데서 최대의 변혁이라 하겠다. 한국 민속문화 또는 전통문화의 근간은 지금까지 누가 뭐라고 해도 농경문화였고, 농업은 한국의 천하지대본(天下之大本)이었다. 그러나 오늘날은 세계화시대이고, 특히 경제면에서는 국제적인 무한경쟁시대로 바뀌고 있다. 농업도 예외일 수가 없게 되었다.
그래서 정부에서도 일찍이 한정된 좁은 농토 때문에 2,000년까지는 농업인구를 5%로 줄이고, 농업의 기계화, 영리화를 추진하여 개방될 수밖에 없는 농업의 국제경쟁에 대비할 것을 발표한 바 있었다.
지금까지 우리는 우리 민속문화의 기반을 우리 인구 분포의 대다수를 차지했던 농촌으로 여기고 농경문화를 그 근간으로 삼아왔었다. 그러나 이제 농경문화는 송두리째 그 뿌리를 잃게 된 상황에 이르고 있다. 앞으로는 도리가 없이 남는 5%의 농업인구마저 그 농업은 기계화, 영리화의 새로운 길을 걸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고 7,000년 이래의 농경문화가 상공업문화로 전환하는 데에 따르는 도시화·기계화·서구화·국제화 등 일련의 변동은 지금 극심하다. 핵가족화, 개인주의화, 물질만능의 풍조, 공해, 자연훼손 등 온갖 문제들이 상호 연관되어 있어서, 많은 다른 문제들도 동시에 파생시키고 있다. 이러한 변동은 한국만의 문제가 아니라 모든 나라들의 공통적인 문제이다.
그러므로 모든 나라들이 전통문화와 현대화 사이의 갈등의 해결, 또는 모순의 조화적 해결이라는 문제를 안고 있다. 그러나 전통문화와 현대문화라는 양자는 반드시 갈등이나 모순관계에 놓여 있는 것만은 아니다. 조화되는 선례들도 적지 않다.
세계가 좁아져가고, 국제화됨에 따라 오히려 각 민족의 전통문화는 서로 더 존중되고, 또 서로 더 내세우고 선전하려고 하는 것이 지금까지도 있어온 일반적인 경향이다. 민족과 국가간의 빈번한 접촉과 교류로 인하여, 인류의 다양한 문화는 그 개성이 제각기 존중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므로 우리도 우리 고유문화를 더 가꾸어 나가야 할 것이다.
민속문화를 계승한다는 점에서 우리 국가공휴일들의 제정은 전통과 국제화의 조화를 계속 모색하고 있다. 추석·4월 초파일에 이어 최근에 전통적인 설날이 공휴일로 지정된 것은 이런 면에서 바람직한 일이다. 지금은 문화적 변동이 매우 심하고 다양한 만큼, 민속 보존의 문제에 좀더 역점을 두고 계속 연구를 하여야 할 것이다.
이러한 자각 아래 국가적인 차원에서 문화재보존정책이 다각도로 검토되고 있다. 이에 못지 않게 민간에서도 전통문화 보존의 기운이 일고, 보존운동이 전개되고 있다.
그러나 궁극적인 문제는 국민 일반이 민속문화에 대해서 긍지와 애정을 가지고 주체적으로 계승하려는 의식을 지녀야 한다. 그래야 민속이 그 전승 주체인 민중과 더불어 온전하게 뿌리내릴 수 있으며, 외래문화도 창조적으로 수용하여 발전시킬 수 있는 문화적인 역량이 길러질 수 있다.
현재 각계 각층에서 민속문화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그 전수와 계승에 열의를 보이고 있다. 전승이 중단되었던 각종 민속들이 재현되는가 하면, 학문적 관심도 증가되어 민속문화의 가치를 재인식하는 이론적 바탕을 제공하는 구실을 하고 있어, 일제 이후 급격히 쇠퇴되었던 우리 민속들이 활성화의 계기를 맞이하고 있다.
이러한 움직임이 일부 대학생이나 지식인들에게 한정되지 않고 민중들에게까지 널리 확산된다면, 우리의 민속문화는 새로운 비약을 맞이할 것으로 기대된다.
[참고문헌]
- 『삼국사기』
- 『삼국유사』
- 『고려사』
-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
- 『한국민속학론고』(임동권, 집문당, 1971)
- 『한국민속학』(김태곤, 원광대학교출판부, 1973)
- 『한국민속학개설』(이두현·장주근·이광규 공저, 민중서관, 1975)
- 『한국민속대관』 1∼6(고려대학교민족문화연구소, 1980∼1982)
- 『한국민속학개설』(박계홍, 형설출판사, 1983)
- 『한국민속학론고』(이두현, 학연사, 1985)
- 『한국민속학의 과제와 방법』(성병희·임재해, 정음사, 1986)
- 『민속문화론』(임재해, 문학과 지성사, 1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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