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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어떤가. 불혹(不惑)을 지나 지천명(知天命)을 향하지만 지족상락은커녕 오히려 모든 게 흐릿하고 의문스럽다. 하늘의 이치는 너무 멀고 아득하다. 예전에 다 알았다고 믿었던 것마저 의심스럽다. 그렇다고 절망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내 주제를 제대로 파악할 수 있게 됐으니까. 역설이지만, 그 말씀의 생명력이 수천 년인 까닭은, 그게 인간으로선 쉽사리 닿을 수 없는 경지기 때문일 것이다.
40세 | 불혹(不惑) | 사물의 이치를 터득하고 세상일에 흔들리지 않을 나이 | 90세 | 졸수(卒壽) | 나이 90세를 이르는 말 |
50세 | 지천명(知天命) | 하늘의 뜻을 앎 |
지족상락. 그것 또한 궁극적으로는 행복을 위한 나침반이다. 문제는 그 나침반의 효력인데, 내 또래의 많은 사람은 그 낡은 나침반에 깊은 향수를 가졌을 것이다. 적어도 심정적으로는 말이다. 물론 아직까지 몸으로 그 나침반을 밀고 가는 이는 드문 게 현실이라고 봐야 할 것 같다. 더구나 요즘 젊은이라면 그 말씀을 공유하기가 그리 쉽지는 않겠다. 나 또한 그게 가능한 일인지 의심하고 있을 정도니.
이와 관련해 최근 내 주변에서 발생한 일 세 가지. 10년을 같이 했던 후배가 회사를 떠났다. 떠나는 이유는 어느 정도 짐작한다. 개인적으로 더 큰 걸 얻기 위함이겠지. 이해한다. 그가 바라는 것을 주지 못한 선배로서 미안한 마음이 클 따름이다. 무능을 실감한다. 더 큰 곳으로 갔으니 더 많은 것을 얻어 부디 잘 먹고 잘 살길…. 아쉬운 게 있다면 지난 10년 지족상락을 논할 기회마저 없었다는 점이다.
여러 달 째 한 선배가 꼬드긴다. 지금보다 행복하게 해줄 거라고. 전직하라는 말이다. 경제적으로나 인간적으로 더 잘 해주겠다는 이야기겠지. 가보지 않은 길이니 내 깜냥으로는 지금 느끼는 행복의 크기와 비교 불가다. 기분 나쁘지 않게 사양하는데도 그 선배는 거의 막무가내다. 현명한 사람이고 날 아끼니 아마 그 길이 결과적으로는 더 행복할 수도 있을 거라는 가능성을 부정하진 않는다.
한 달간 미국을 구경하고 돌아온 아내와 두 아이가 2~3년간 유학을 가기로 했다. 나도 같이 가자는 게 그들의 제안이다. 거부했다. 한 때 반미(反美)야 말로 우리가 행복해지는 길이라고 생각했던 적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진중권 식으로 하면 극소수에 불과하지만 내 글을 읽어주는 사람이 여기 있기 때문이라는 이유를 댔다. 일단 각자가 원하는 곳에서 살아보고 다시 이야기 하자는 게 결론이다.
세 사례를 맞비교하는 건 아내와 두 애한테 무척 미안한 일이다. 아내의 결정에 추호의 감정도 없다. 오히려 쉽지 않은 용기에 큰 박수와 격려를 보낸다. 남자가 보내는 적은 돈으로 낯설고 물 선 땅에서 살아내기가 오죽하겠는가. 더구나 ‘여선생’이라는 안정된 직장까지 버리려니 심사가 어찌 간단할 것인가. 다만 새 땅에서 다름과 차이를 경험하고 이해하는 것도 좋은 공부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럼에도 비교를 했던 것은 다시 ‘지족상락’을 말하기 위함이다. 이제야 나는 ‘지족(知足)’을 단순하게 ‘현재에 만족하는 것’이라고 이해하지 않는다. 그건 인간이 닿을 수 없는 까마득한 ‘말씀’이다. 허망하다. 그러나 지족상락이 틀린 말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새로운 이해가 필요하다. 이건 어떤가. “갈림길에서는 쉽고 편한 쪽보다 어렵고 난해한 쪽을 선택하면 틀림없다.” 사는 곳을 옮기든 말든.
아내 선택에 지지를 보내고 선배 요청을 물리치면서도 전혀 갈등을 느끼지 않는 건 그 때문이다. 갈림길에서 조금은 더 어려운 걸 선택했다. 노력하겠다는 의지다. 어차피 인생은 일엽편주로 42.195 킬로미터를 달리는 외롭고 고독한 것이다. 이 장엄한 일에 ‘성공(成功)’이란 결과만 들이대는 건 잔인하다. 그저 그게 삶이기에 행진할 뿐이고, 요령 피지 않으면서 갈 길 뚜벅뚜벅 가는 것이 지족상락이다.
故 길 화백께서 말씀하신 뜻이 그런 게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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