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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공예가 남편, 판소리꾼 아내 얼씨구 절씨구, 예인부부 인생 | ||||||||||||
주요무형문화재 기능보존협회 서각 부문 도내 유일한 회원 장용호 씨 무형문화재 14호 강산제 심청가 이수자 홍승자 씨 부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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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살 경상도 진주 총각이 동갑내기 전라도 강진 처녀를 처음 본 그 순간, 마음에 담아버렸다. 이런 게 인연이고, 운명이라는 거다. 목공예가 장용호 씨와 남도 판소리꾼 홍승자 씨는 친구 소개로 만나 평생의 반려자가 되었다. 각자 예술의 길을 걸어가는 부부 사이에는 한의학을 전공하는 아들과 가야금을 전공하는 딸이 있다. 혼자 있으면 자기 분야를 묵묵히 걸어가는 개인이지만, 함께 있으면 눈빛만 봐도 마음을 읽어내는 가족이다. 이들 부부를 만나기 위해 연락을 취했다. 장용호 씨는 신어산 자락 영운마을의 작업실 '학고방'에서 전화를 받았다. "홍 선생이 바쁘니 그 스케줄에 맞추겠습니다"라는 답변이 왔다. 홍승자 씨는 소리수업 중 전화를 받았다. "오후에 마산에 공연이 있어요. 다녀오면 저녁 8시는 되어야겠는데요." 각자의 일로 바쁜 부부는 "우리도 밤 늦게야 얼굴을 봅니다. 주말에나 겨우 함께 있을 수 있죠"라며 다른 전화기에서 같은 목소리를 냈다. 이런 게 천생연분이라는 거다. 채 분장을 지우지도 못하고 김해로 돌아온 홍승자 씨를 기다려 삼계동 수리공원 앞 '홍승자 판소리 연구소 국악의 집'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남편 장용호(한국미술협회 전통공예분과이사) 씨는 중요무형문화재 기능보존협회 회원 중 서각 부문의 경남도내 유일한 회원이다. 부인 홍승자 씨는 무형문화재 14호 강산제 심청가 이수자이다. 이들의 만남, 예술인으로 걸어온 길, 사는 이야기가 판소리처럼 이어졌다. 두 사람이 만나 결혼하기까지의 인연이 재미있었다. "딱 보는 순간, 이 여자와 결혼하면 태어날 아이들을 정말 잘 키워주겠구나 하는 느낌이 오더군요." 장용호 씨는 첫 순간부터 마음을 결정했지만, 홍승자 씨는 그 정도는 아니었단다. 어느 날 시어머니 될 분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내용은 "우리 아들이 처녀 생각에 밥도 못 먹고 다 죽어가니, 우리 아들 좀 살려달라"는 것. 내가 뭐라고 멀쩡한 사내를 잡는단 말인가, 겁이 더럭 난 홍 씨는 한 걸음에 달려갔단다. 지면 상 아주 간단하게 상황을 정리했지만, 이 이야기를 부인이 풀어내는 동안 짧은 판소리 한 마당이 벌어지는 듯 했다. "가 보니 멀쩡하더군요." 홍 씨를 본 시어머니 역시 한눈에 며느리 감으로 점찍어 버렸단다. 아무래도 모자간의 한판 연극에 넘어간 것이 아닌가, 왁작 웃음이 터지는데 남편은 덤덤하다. "정말 밥맛도 없고 그랬어요." 이야기 끝에 한마디 한다. 이런 식이었다. 판소리 사설처럼 부인이 이야기를 풀어내면 남편은 마지막에 한 두 마디로 요점정리를 했다. 두 사람은 연애도 산에서 했다. 지리산을 종주하길 수 십 차례. 두 사람이 손을 꼭 잡고 걸었던 산길 끝에 함께 하는 삶이 기다리고 있었다. 결혼 후에도 산행은 계속되었다. 아이들은 엄마 뱃속에서부터 산을 올랐다. 아들 지욱이는 덕유산을, 딸 지현이는 지리산을, 태어나기도 전에 종주했다. 진주도 강진도 아닌 김해에서 살게 된 이유도 재미있다. 시동생이 김해 주촌, 수령 오래된 나무 옆에 집을 짓고 살았다. 그런데 그 나무가 얼마나 성성한지 나무 가지가 집을 덮을 정도였다. 시동생은 누구도 아닌 형수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형수, 저 나무를 버틸 기를 가진 사람이 형수밖에 없소. 저 집에서 좀 살아주시오." 부부는 나무 옆에서 16년을 살았다. 그 나무의 정기가 부부에게로 옮겨 왔는지, 그 세월동안 두 사람은 조금씩 예인으로서의 이름을 얻었고 사람들에게 알려졌다. 현재는 삼계동 수리공원 앞에서 살고 있다. 위층에 '판소리연구소 국악의 집'을 열고 있다. 장용호 씨의 작품은 김해는 물론 우리나라 여러 곳에서 볼 수 있다. 국가와 민족을 위해 희생과 공훈을 한 국가유공자, 참전유공자를 안장하기 위해 지난 2008년 국가보훈처에서 새롭게 단장한 국립이천호국원 현충문과 현충관 현판이 장 씨의 작품이다. 한메 조현판(한국한글서예학회 회장)의 글을 장 씨가 서각한 것이다. 현충문 현판은 폭 1m40㎝, 길이 3m40㎝로 우리나라 역대 현충문 현판 중 제일 크다. 글과 서각이 뛰어나다는 평을 받았다. 김해 한옥체험관 현판도 그의 작품이다. 차 도구 공예품은 다도인들에게 인기가 높다. 장 씨는 전통 책의 표지를 제작하는 목판인 능화판 100장을 만들 계획을 가지고 있다. 홍 씨는 '가야가락 예술단'을 이끌며 판소리연구소를 운영하고, 주촌초등학교 등에서 아이들과 일반인들에게 소리를 가르친다. 소리에 재능이 있는 제자들을 길러내는 것, 그 제자들을 넓은 세상과 이어주는 가교 역할을 하는 사람으로 자리매김 하고 싶다는 마음을 잊어본 적이 없다. 김해문화의전당 공연자문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부모님의 예술적 재능을 물려받고 태어난 딸 지현이도 국악을 전공하고 있다. 지켜보는 엄마로서의 마음은 딸이 기특하고 또 안쓰럽다. "얼마나 힘든 길인지 알기 때문이지요. 제 성격이 겉으로는 활달해 보이지만 사실은 소심하고 여리답니다. 그 성격 바꾸려고 학생회장에 일부러 출마하기도 했죠. 덜컥 당선되는 바람에 회장도 했구요. 그렇게 성격도 바꾸면서 없는 사교성을 끌어내려고 애도 많이 썼습니다. 소리의 길을 걸어가면서 이 길이 얼마나 힘든지 매번 느끼는데, 우리 딸이 함께 걸어가고 있으니 좋기도 하고 마음도 쓰이고 그래요." 말끝에 옆에 앉은 딸을 바라본다. 눈에 넣어도 안 아프다는 표정이다. 부부가 함께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그건 '시간 내서 제대로 된 여행 한 번 가보는 것'이다. 어디로 갔으면 좋겠느냐고 물었다. 부인은 유럽, 남편은 오지여행을 말한다. '오지여행은 힘들다', '그러니 한 살이라도 젊을 때 가야 한다'. 의견충돌이다. "남들이 보면 제 주장이 강한 것 같아 보이겠지만 사실과 전혀 달라요. 완전히 반대랍니다." 홍 씨는 남편의 부드러운 고집에 한 번도 이겨본 적이 없다며 짐짓 억울하다는 어투다. 그러면서 "학고방에서 만났으면 작품 사진도 찍을 수 있었을텐데"하며 아쉬워한다. 아무래도 부부 여행은 오지탐험으로 결론지어질 듯하다. 기자의 부탁으로 홍 씨가 북을 잡고 소리 한 마당을 펼쳤다. 그 소리를 들으며 장 씨가 차를 마신다. 부부의 이야기에 빠져 있다가 비로소 사진을 몇 장 찍었다. "김해는 우리에게 제2의 고향입니다. 18년째 살고 있으니 이제 김해사람입니다. 여기 와서 우리 부부가 걸어가는 길을 만들었고, 인정도 받았어요. 이제 떠날 수도 떠나고 싶은 생각도 없습니다. 김해는 우리에게 의미가 큰 땅입니다." 남편 장 씨가 인터뷰 전체 내용을 요점정리했다. 태어나 자란 각자의 고향을 떠나 김해사람이 된 부부에게 김해는 제2의 고향이 아니라, 두 사람이 일심동체가 되어 태어난 진짜 고향이 되었다. ◆ 장 씨가 제작하려는 '능화판'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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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한편의 휴먼다큐입니다. 두분의 꿈이 이루어지시기를.....
에고...부럽네요 부러워^^
확실한 자리매김 하셨네요!
경상남도 공예품대전 개인상 부문에서 대상 받으신 것 축하드립니다.(김해시보 제607호 기사 중) "향원익청"-십장생과 용호를 조각한 며루, 묵함, 문진과 서산대사의 시'답설'을 서각한 붓걸이, 사군자를 묘사한 붓대 등의 목칠작픔으로 조상들이 지향했던 정신세계를 영생을 살아가는 느티나무와 벚나무에 새겨 넣어 한국적인 미를 잘 표현한 수작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멋지십니다.. 에고 부러버라 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