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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2회 세계탁구선수권대회
한국여자탁구 세계제패
남녀 개인전 결전 및 박미라 선수 개인단식 3위 획득
1973년 4월 10일, 단체전 모두를 끝마친 우리 선수단은 이튿날 휴식을 가졌다. 12일부터 시작되는 개인전을 하루 앞두고 있던 우리 선수단에겐 단체전 제패에 이은 개인전 제패에의 의지를 다지는 하루이기도 했다.
그러나 본선 1회전에서 크게 기대했던 이에리사 선수가 무명 선수인 스웨덴의 래드베르그 선수에게 예상을 뒤엎고 2:3으로 패배, 탈락하고 말았다. 18세의 신데렐라로 당시 대회 최대 각광을 모은 이에리사는 톱시드를 받은 세계 최강들이 처음 출전한 본선 1회전에서 너무나 어이없게 패해 이 또한 세계 각국을 놀라게 했다. 특히 단체전에서 8전 8승을 하는 동안 복식전을 뺀 개인전 15게임에서 단 한 세트도 빼앗기지 않고 완전무결한 경기를 치러낸 우승의 주역이었기에 개인단식에서의 패배는 실로 분루를 삼키는 일이었다.
이날 경기에서 이에리사 선수는 첫 세트를 15:21로 빼앗긴 후 2세트를 22:20으로 가까스로 따내었으나 3세트를 18:21로 다시 잃고 4세트를 21:11로 이겨 세트 스코어 2:2의 시소를 벌이며 지켜보는 관중들을 숨죽이게 했다. 그러나 최악의 컨디션이었던 이에리사는 최종 세트를 맞아 10:21 더블 스코어로 탈락하고 말았다. 단체전으로 인한 어깨 통증과 꼭 이겨야 한다는 중압감이 최악의 컨디션을 가져온 패인이라는 평가였다. 자타가 인정하는 당시 대회의 챔피언 유망주인 이에리사가 불행하게도 대망의 꿈을 놓친 것은 온 국민의 통한이며 본인의 평생 잊지 못할 아쉬움으로 남을 것이다.
한편 이를 봉상이라도 하듯 우리의 박미라 선수는 본선 1회전에서 영국의 해머슬리를 3:2로, 2회전에서 전 유럽 챔피언인 소련의 루드노바를 3:1, 3회전에서 일본의 에다노를 3:1, 4회전(준준결승)에서 일본의 오제키를 3:1로 물리치며 선전했다. 일본 선수 중 최고 베테랑인 오제키는 대 중국전에서 호옥란 선수를 꺾은 유력한 단식 우승 후보자의 하나였는데 우리 박미라 선수가 오제키 선수를 이기고 준결승에 올랐다는 건 참으로 대견한 일이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게 기대를 한 몸에 받은 박미라 선수는 준결승전에서 체코의 그로포바 선수를 맞아 최선을 다했으나 고전, 첫 세트를 19:21로, 제2세트를 18:21로 빼앗겼다. 제3세트에서는 그로포바의 끈덕진 추격을 받으면서 몇 번의 시소를 벌인 끝에 21:19로 한 세트를 만회하기도 했지만 제4세트에서 거구의 그로포바에게 14:21로 져 토털 스코어 1:3으로 결국 물러서고 중국의 창리 선수와 함께 동메달(3위)에 머물러야 했다. 그러나 박미라 선수의 여자단식 3위 입상은 한국탁구가 세계대회에서 거둔 최초의 개인전 메달이었으며, 우리 한국으로서도 뜻밖의 성과였다.
박미라 선수는 1972년 11월 스칸디나비안 오픈대회 개인복식에서 이에리사 선수와 함께 우승하며 세계 랭킹 21위를 마트, 동 대회 단식 시드를 받았으나 신예이며 후배인 김순옥 선수에게 양보, 사실상 개인단식에 참가하지 않기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나인숙 선수의 컨디션이 극히 좋지 않아 대신 박미라 선수가 참가하게 되었고 의외의 호성적을 거둔 것이다. 그 전해 스칸디나비안 오픈대회와 아시아선수권대회에 출전했던 박미라 선수는 몸이 좋지 않아 귀국하자마자 입원을 해야 했고, 그래서 종합선수권대회와 선수 선발전에도 참가하지 못한 관계로 대표선수 선발 대상에서도 제외된 바 있었다. 이에 천영석 감독이 그의 필요성을 주장, 협회 이사회를 거쳐 그를 대표선수로 기용하면서 탁구계의 잡음까지 빚은 일도 있었다. 전 동덕여고 코치 윤세용 씨가 전주여중에서 스카우트하여 중앙무대에 데뷔한 박미라 선수는 1971년까지 무명의 선수였지만, 정현숙 선수와 함께 산업은행에 픽업되어 천영석 감독의 지도로 급격히 성장, 그날의 눈부신 활약으로 세계무대에 우뚝 서게 된 것이다. 중국선수의 스타일과 같은 전진 속공의 펜 홀더 전형의 명석한 두뇌 플레이어로, 또는 그녀는 남다른 미모 선수로도 두각을 나타냈다.
한편 정현숙 선수는 본선 1회전에서 서독의 쉘러 선수를 3:0으로 이기고, 2회전에서 유고의 레슬러 선수를 3:1로, 3회전에서 체코의 리코로바 선수를 3:1로 이기며 준준결승까지 올랐으나 중국의 최고 스타 장립 선수에게 2:3으로 역전패를 당해 아깝게 탈락하고 말았다.
중반전까지 정현숙 선수는 장립 선수의 루프를 잘 받아 21:18, 22:20으로 2세트를 리드했으나, 3세트부터 역전되지 시작하여 18:21, 11:21, 8:21로 고전, 준결승 진출에 실패하고 말았다. 그 게임의 고비만 넘겼으면 준결승에서는 중국의 호옥란 선수이고 결승의 체코의 그로포바로 우승의 확률이 높았기에 정현숙 선수로서는 더욱 가슴 아픈 불운의 일전이 되었다. 김순옥 선수는 중국의 정민지 선수에게 1:3으로 패하고 말았다.
남자부 선수들은 최승국 선수가 본선 1회전에서 덴마크의 램버그 선수를 3:1로 이기고 2회전에서 벨지움의 디월레 선수를 3:0으로 이겼으나 3회전에서 금번 대회 단체우승의 주역이며 단식 준우승자인 스웨덴의 요한슨에게 0:3으로 패해 준준결승을 눈앞에 두고 탈락하고 말았다.
강문수 선수는 본선 1회전에서 오스트리아의 타링 성수에게 3:1로 이기고 2회전에서 소련의 버니지어 선수에게 0:3으로 패했으며, 홍종현 선수는 중국의 이부영 선수에게 1;3으로, 김은태 선수는 일본의 이마노 선수에게 0:3으로 각각 패하고 말았다.
여자복식은 이에리사.박미라 조가 준준결승에서 중국의 추판오친.린메이순 조에게 1:3으로 져 아깝게 탈락했으며 혼합복식전에서는 본선 1회전에서 이에리시.최승국 조가 서독의 스치미팅거.크리거 조를 3:1로 이기로 2회전에서 중국의 요요체.장립 조에게 2:3으로 패해 입상권에서 모두 탈락하고 말았다.
이렇게 4월 5일부터 11일간 유고 사라예보 스켄데리아 체육관에서 열렸던 세계선수권대회는 중국 3개 종목 우승(남.여 단식 및 혼합복식), 스웨덴 2개 종목 우승(남자단체 및 남자복식), 한국의 1개 종목 우승(여자단체전), 일본, 루마니아 1개 종목 우승(여자복식)을 기록하며 4월 16일, 대전의 막을 내리게 되었다.
여자 단체전 우승 시상식
1973년 4월 10일, 여자단체전 우승의 역사적인 날, 이윽고 팡파르가 은은히 울려 퍼지는 가운데 여자 단체전 시상식이 거행되었다.
2위를 차지한 중국선수단에 이어 천영석 감독을 선두로 한 코리아의 글자도 선명한 유니폼을 입은 한국의 딸 정현숙, 박미라, 이에리사, 나인숙 선수들이 입장했고 뒤이어 3위의 일본, 4위의 헝가리 선수들이 따랐다.
천영석 감독을 위시한 우리 한국선수들이 자랑스럽게 수상대에 올라섰다. 그리고 46년의 역사를 지닌 우승의 상징. 코르비용컵이 국제탁구연맹 로이 에반스 회장으로부터 천영석 감독에게 전해졌고, 수많은 취재진의 조명 세례가 터져 나왔으며 이에 천영석 감독은 화려하게 빛나는 컵을 높이 추켜 환호하는 관중들에게 답했다.
얼마나 기다려온 순간인가. 오직 그 한 순간을 위해 우린 또 얼마나 많은 땀을 흘렸던가. 그곳에 모인 7천 여 관중들은 우레와 같은 박수를 보내며 동방의 작은 나라 코리아의 승리에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이어 우리 선수들의 목에는 금메달이 하나하나 걸렸다. 우리 선수들은 밝게 웃으면서 관중들을 향해 양손을 번쩍 치켜들고 환호에 답하고 좌우를 둘러싼 중국, 일본, 헝가리 선수들의 축하를 받으며 시상대를 내려왔다.
여자 단체전 제패로 인한 국내의 표정
세계제패의 소식을 접한 박정희 대통령 내외는 4월 10일자로 축전을 보냈다. 이번 대회에서 우리 선수들이 획득한 우승을 온 국민과 더불어 축하하며, 이 승리가 선수단 스스로의 영광이자 온 거레의 자랑이고 또한 우리 체육사의 찬란한 금자탑임을 치하하는 내용을 골자로 한 것이었다. 그간 선전, 분투하여 오늘의 승리를 가져온 선수들과 아낌없이 이들을 지원해온 임원을 노고를 치하하는 이 장문의 축전은 정일권 국회의장, 김종필 국무총리, 민관식 문교부장관, 김택수 대한체육회장 등 각 기관장 및 탁구를 사랑하는 동호인들의 많은 축전과 함께 전달되었다.
한편 한국여자탁구 세계제패 소식이 각 언론을 통해 보도되자 전국 곳곳은 뜨거운 탁구 열기 속에 휘감겨 들고 있었다. 누구 하나 기뻐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그 가운데에서도 가장 기뻐하는 사람들은 역시 모든 탁구인을 포함한 출전선수들의 가족이었다. 제패의 소식을 접한 협회 임원과 선수들의 가족은 서로 부둥켜 감격의 눈물을 흘렸고, 이를 지켜보는 시민들도 박수를 이끼지 않았다. 이 오랜만의 쾌거는 가정, 직장, 거리 곳곳에 탁구 이야기를 넘쳐나게 했다.
탁구의 세계제패로 얻은 ‘하면 된다.'는 산 교훈은 굳건한 국민의 의지를 이끌며 세계로의 비약을 다짐하게 했다. 특히 각 TV 방송은 주요 뉴스 시간 및 여타 시간을 거의 탁구 세계제패에 관련한 화제로 며칠에 걸쳐 방영했으며, 각 일간지 신문 또한 <우리 여자탁구 세계왕좌에, 한국탁구시대 개방, 한국여자탁구의 세계제패, 세계에 울려 퍼니 승전보, 노력은 실력이라는 위훈을 얻었다, 브라보 코리아, 유고 하늘에 높이 오른 태극기, 새장 펼쳐진 한국탁구시대, 환성 터진 사라예보의 승전보, 한국체육사의 새 기원, 환성 속에 튄 핑퐁시대, 노력 앞에 불가능은 없다> 등등의 제목을 달아 사설은 물론 신문 전면에 탁구 기사의 꽃을 피웠다.
그리고 ‘한국여자탁구 세계제패 환영’이라는 문구의 플랜카드가 서울은 물론 주요도시 건물들 구석구석에 걸렸다. 한국여자탁구의 세계제패는 단순한 승리의 기쁨만이 아니라 한국이라는 존재를 국제무대에 알리고 격상하는 결과를 가져왔음에 틀림없었다.
사반세기 간을 강경대립으로 일관해온 미국과 중국 사이를 조그마한 탁구공 하나가 관계를 개선시키고 촉진시킨 일을 너무나도 잘 알려진 얘기다. 그만큼 탁구의 위력은 강했으며 그 관심 또한 깊어갔다. 스포츠뿐만 아니라 어떤 분야이든 세계정상을 이룩한다는 것은 사실 쉽지 않은 일이다. 더욱이 인적 자원이 풍부한 대국들과 정상을 놓고 어깨를 겨룬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이미 수많은 경험을 통해 우리 소국들은 그 비애를 겪어오기도 했다.
이 같이 볼 때 사라예보 세계탁구선수권대회의 경우, 당시 인구 불과 3천여만 명에 지나지 않는 우리나라가 8억 인구의 중국과 1억 인구의 일본을 2위, 3위로 처지게 하면서 여타 세계대국들을 물리쳤다는 것은 정말 새롭게 겪는 장거가 아닐 수 없었다.
특히 20여 년간이나 세계정상을 누려오던 일본과 중국은 왕좌에서 후퇴했다. 그리고 일본, 중국이 새로운 아시아연합(ATTU)을 조직하여 기존 아시아연맹(ATTF)을 국제연맹(ITTF)에서 축출하고 연맹을 주도한 우리 한국을 국제무대에서 고립시키려던 기도를 우리는 실력으로 대립, 복수한 셈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당시의 매스컴은 탁구의 세계제패를 비중 있게 다루었으며 정부에서도 국가적인 차원에서 선수단을 대대적으로 환영해줄 것을 대한체육회에 요청해왔다.
선수단 귀로
세계를 제패한 우리 선수단 일행은 한국으로의 귀국 중, 4월 20일 오후 5시 KAL기편으로 일본 하네다 공항에 도착, 2천 여 재일동포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선수들은 태극기와 플랜카드의 물결 속에 ‘이에리사, 정현숙, 박미라’를 외치는 한복 차림의 부인들과 교포 학생들의 환호 박수를 받으며 트랩을 내렸다.
김창원 단장은 환영식에서 우리의 승리는 선수단의 승리일 뿐 아니라 민족의 승리라고 말하고, 앞으로 더욱 노력하여 오늘의 영광을 지켜나가겠다고 다짐했다. 이에리사 선수는 강한 정신력이 중국과 일본을 이기게 했으며 성원을 아끼지 않은 동포들에게 감사의 뜻을 전한다고 말했다. 일본에 사는 한국 동포가 오늘처럼 한국인으로서의 긍지를 느껴본 적이 없다는 환영사를 전하는 이채우 재일 거류민단 부단장의 목이 메기도 했다.
민단 주최 환영식이 약 50분 간 베풀어지는 동안 하네다 공항은 온통 감격에 겨운 교포들의 “대한민국 만세, 선수단 만세” 소리고 떠나갈 듯 했다. 선수단의 손을 잡아보려고 밀려드는 아주머니, 할머니들 그리고 학생들로 공항 로비는 큰 혼잡을 빚기도 했다.
이처럼 성대한 환영 인파를 뒤로한 선수단 일행은 도쿄 시나가와에 있는 퍼시픽 호텔에 여장을 풀고 곧 민단이 주최한 리셉션에 참가했다. 그 자리에는 일본 탁구계 인사들도 많이 참석했다. 김창원 단장은 우리가 승리한 것은 온 국민의 성원에 힘입은 바 크다고 말하고 우리 민족은 무엇이든지 노력하면 할 수 있고 노력이 바로 실력이라는 것을 재확인했다고 강조했다.
3일간 일본에서 여장을 푼 우리 선수단에겐 4월 23일 서울에서 벌어진 대대적인 환영식의 참가가 또한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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