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이 웅성거리며 모여있는 1960년대 제주도의 어느 바닷가. 해남에서 건너온 중학교 1학년 소년도 무슨 일인지 궁금해 사람들 틈을 비집고 들어갔다. 소년은 깜짝 놀랐다. 자기가 늘 수영하던 시골의 실개천보다 더 깊고 넓은 데서 여러 사람이 모여 한 곳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수영 경기였다. 그리고 소년은 또 한번 놀랐다. 1등을 한 선수가 자신보다 영 못한 것 같아서. 물에만 들어갔다 하면 자라며 물고기며 참게가 모두 자기 것이었으니 실개천의 왕인 줄은 알았지만, 그동안 남들과 비교할 수가 없어 수영 실력이 좋은지 나쁜지 가늠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후 소년은 더 넓은 곳에서 더 빨리 더 멀리까지 헤엄치는 수영 선수가 되리라 다짐했다. 조오련은 그로부터 5년 뒤인 1970년 제6회 방콕 아시아경기대회 수영 400m, 1500m에서 1위를 한다. | |
아시아 경기대회 거푸 2관왕, 국민 시름 덜어내는 스타가 되다
1970년 조오련은 양정고 2학년에 재학하고 있었다. 방콕 아시아경기대회에 출전하기 전까지만 해도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 손발이 남달리 커서 수영을 하기 좋은 몸이라는 평가는 있었지만 아무도 그가 금메달을 따리라고는 예상치 못했다. 400m에서 1등을 한 뒤 뒤늦게 기자들이 몰려와 수영복 차림으로 호텔 복도에서 사진을 찍었다. 1500m에서도 금메달을 목에 걸자 조오련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이 눈에 띄게 달라졌다. “최초의 아시아경기대회 수영 2관왕이니 특별하기도 했고. 그리고 당시 제주에서 부산까지 가는 ‘남영호’라는 배가 있었는데 내가 금메달을 따기 이틀 전에 사고가 나서 330명 가까이 죽었지. 국민들이 슬프고 우울할 때 안겨드린 기쁨이라 반응이 더 극적이었던 것 같아. 또 시골에서 물장구나 치던 놈이 금메달을 두 개나 땄으니 사람들이 놀란 것 같기도 하고.” 조오련은 김포국제공항에서 시청까지 카퍼레이드를 했다. 어느 동네 하나 조오련을 반기지 않는 곳이 없었다. 인터뷰를 하면서 당시의 추억에 아련한 표정을 짓던 조오련은 전라도 특유의 사투리로 1970년 경기에 대한 회고를 마무리 했다. “아이고, 근디 어찌나 춥던지. 태국에서 여름 운동복을 입은 채 비행기를 타고 왔는데 김포에서 시청까지 그 길이 얼마나 길었는지 모르오. 손 흔들고 웃으면서도 몸은 추워서 벌벌 떨었잖소.” 때는 12월이었다
1974년 조오련은 23살의 나이로 제7회 테헤란 아시아경기대회에 참가했다. 당시 선수들끼리는 20살이 넘은 수영 선수를 두고 환갑이 넘었다는 우스갯소리를 하곤 했다. 조오련의 마음은 무거웠다. 폐활량은 선수촌에 있던 폐활량 측정기기의 한계치를 넘을 정도로 좋았지만 4년 전보다 더 강한 마음가짐으로 경기에 나서지 않으면 안됐다.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금메달,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또 한번의 2관왕을 차지하기 위해 숨이 끊어질 듯한 고된 훈련에 매달렸다. 테헤란은 덥고 건조한 데다 고지대다. 테헤란의 기후에 적응을 하지 못한 선수들은 당연히 좋은 기록을 내지 못했다. 평소 기록이 조오련보다 훨씬 좋았던 일본 선수들은 경기에서 자기 기록을 내지 못해 조오련에게 금메달을 내주고 말았다. 테헤란의 기후도 조오련의 강한 체력과 정신력을 막지 못했다. 조오련은 다시 한번 아시아경기대회 2관왕의 기록을 만들었다. | |
촌에서 상경, 간판 집 심부름꾼 생활… 싸움 거는 아이들 앞에서 뱀을 깨물기도
1968년 10월 10일 조오련은 해남고등학교에 자퇴 원서를 냈다. “한 20일 동안 추수하고 겨울 보리 갈고, 산에서 나무까지 해 놓고 11월 3일 서울로 올라왔다. 처음에는 누나 집에서 지냈는데 영 눈치가 보이고 갑갑하고 불편해서 안 되겠더라.” 조오련은 종로 2가 YMCA 수영장 근처에 있는 간판 집에 들어갔다. 조오련에게는 잘 데 있고 먹을 것만 있으면 됐다. 간판 집에서 휘발유 심부름도 하고 간판 칠하던 페인트 붓을 빨아 놓기도 하는 등 잔심부름을 하면서 숙식을 해결했다.
YMCA 수영장은 당시 국내 유일한 실내 풀장이었다. 11월 7일자로 등록을 했다. 절박한 마음으로 수영에 매달린 조오련은 몰래 수영장 등록증을 위조한 적도 있었다고 말했다. “11월 7일이라고 찍혀 있는 등록증에다 먹지를 대고 7앞에 2를 써 넣어 11월 27일에 등록한 것으로 만들었다. 꼬리가 길면 밟힌다고 결국은 등록증을 위조한 것이 발각돼 수영장에서 쫓겨날 뻔 했지. 그런데 정말 진심으로 시골에서 농사 짓다 올라와 형편이 안 돼서 그랬다고 용서를 구하니까 나를 적발한 분이 눈감아 줬다.” | |
|
|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 놀라운 실력으로 쭉쭉 뻗어나가는 그를 보고 불안한 마음이 들어서였을까. 간판 집과 수영장만 오가며 소속된 곳 없이 연습하는 조오련을 건드려 보는 아이들도 있었다. 수경 없이 연습을 하다 보면 수영을 하다 마주 오는 다른 선수들과 몸이나 머리를 부딪칠 때가 있었다. 연습을 하다가 조오련도 어느 선수와 부딪쳤는데 그걸 빌미 삼아 중동중학교 야간부 몇몇 선수들이 조오련을 따로 불렀다. “내가 보기에는 별 것도 아니었는데 부르길래 나도 ‘좋다, 옷 입고 나온나’ 그랬다. 그런데 나가 보니까 애들이 15명쯤 있더라. 혼자서 운동 선수 열댓 명을 어떻게 상대 하나. 그 길로 간판 집에 가서 총무한테 500원을 빌려 뱀집에 갔다. 뱀 한 마리를 사서 주머니에 넣고 싸움하러 오라던 한적한 데로 갔지. 뱀을 주머니에서 꺼내 뱀 뒤통수를 씹어서 애들 앞에서 내흔들었다. 서울 애들은 뱀을 보기만 해도 무서워하는데 나는 생으로 씹어 먹고 ‘이 새끼들아, 덤벼라’ 그러니까 반은 굳은 채 가만히 서 있고 반은 혼비백산해 달아나더라. 내가 덤비라며 한 아이의 팔을 입으로 물었는데 죽는다면서 병원으로 달려갔다. 그 후로 아무도 나를 건드리지 않았다.” | |
수영복 없어 사각 팬티 입고 경기하던 소년… 신기록 행진 만드는 기적의 주역으로
한 차례의 해프닝을 겪고 나서 조오련은 자기 페이스대로 연습을 할 수 있었다. 1969년 조오련은 처음으로 대회에 나갔다. 여전히 소속이 없어 조오련은 대학일반부로 출전했다. 1969년 6월 전국체육대회 서울 예선에서 수영복도 없이 사각 팬티만 입은 채 400m와 1500m에서 1위를 했다. 그 경기를 마치고 조오련은 양정고등학교에 스카우트 됐다. 꿈에도 바라던 서울의 고등학교 교복을 입고 고향의 부모 앞에 설 수 있게 된 것이다. 이후 운도 따랐다. 마침 귀빈석에서 민관식 당시 대한체육회장이 경기를 지켜보고 있었다. 조오련의 사정을 들은 민 회장은 조오련이 태릉선수촌에 입촌해 훈련할 수 있도록 했다. 조오련은 물 만난 고기처럼 출전하는 경기마다 한국 기록을 새로 썼다. 1970년, 1974년 아시아경기대회에서 연이어 2관왕에 오른 뒤에도 은퇴할 때까지 50여 개의 한국 신기록을 세웠다. | |
|
|
은퇴 후 조오련은 넓은 세상 대신 넓은 바다에 도전한다. 1980년 13시간16분 만에 대한해협을 횡단한 것을 시작으로 1982년 도버해협, 2003년 한강 600리를 완주했다. 이후 2005년에는 울릉도에서 독도까지 93km를 두 아들과 함께 18시간46초 만에 횡단하는 데 성공했다. 2008년 7월에는 독도 33바퀴 돌기에 성공했다. 특히 독도 33바퀴는 3.1 독립선언문의 33인을 상징해 독도를 생각하는 그의 애틋한 마음을 담은 도전이기도 했다.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이 각별한 것 같다는 질문에 조오련은 손을 내저었다. “나라는 당연히 사랑하지. 그러나 애국하는 마음을 1순위에 두고 수영을 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서 독도를 한 바퀴 돌면 거리가 5km 정도 돼. 독도의 넓이는 축구장 23개 정도 합쳐놓은 것 만한데 그걸 33바퀴 돌았다.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만 가지고는 그걸 해내기가 어렵지. 내가 수영을 끊임없이 하는 진짜 이유는 나를 이기는 힘, 어떤 목표를 정하고 거기에 도달했을 때 성취감, 고통 끝에 찾아오는 희열, 있는 힘을 끝까지 다 써서 마지막에 뭍으로 나와서 사람들에게 손을 흔들 때 쾌감을 자꾸만 다시 느끼고 싶기 때문이다.” | |
"목표에 도달했을 땐 희열이 있어요. 나이 60 됐을 때 대한해협 다시 헤엄칠 거에요"
조오련은 자신의 삶 대부분을 수영에 쏟아 부었다. 그래서 8년 전 갑자기 심장마비로 세상을 뜬 부인에게도 살아 있는 동안 충분히 사랑을 주지 못한 것 같아서 미안한 마음을 갖고 있다고 한다. 그는 또 다른 도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인터뷰를 마치고 조오련은 “이거 한번 보시오”라며 가방에서 서류 봉투를 꺼냈다. 나이 60이 되는 해에 대한해협 횡단에 다시 도전해 자신의 수영 인생을 마무리하고 싶단다. “지난해 독도에 갔다 온 뒤 다시 한번 충동이 생겼지. 1980년 대한해협을 건넜을 때가 30살이었지. 대한해협을 30년 만에 또 한번 건너봤으면 좋겠다 싶어 계획서를 만들었다. 오는 4월부터 2010년 8월까지 17개월 동안 체력 훈련을 계획하고 있어.” 대한해협 횡단 도전이 끝나면 귀향해 고향집에서 지낼 생각이다. 조오련은 도시 생활에 지쳐서 고향에 황토 집을 지었다. 묽은 황토로 집을 짓다 보니 1m쯤 쌓고 굳을 때까지 기다렸다 또 1m를 쌓기를 반복했다. 집을 다 짓는 데만 2년이 걸렸단다. 그래도 벽 두께가 50cm나 되고 건강에 좋다고 자랑을 한다. | |
|
|
이제는 함께 지낼 사람도 있다. 고향 후배의 소개로 만난 같은 해남 사람이다. 3월에 가족들만 모여서 조촐하게 결혼식을 치를 예정이다. 60살에 대한해협 횡단할 때까지만 내조를 부탁하고 남은 인생은 서로 동반자로 의지하며 고향살이를 함께하기로 했다. 집 주변에 배추도 심고 농사도 지을 것이고, 한숨 돌리고 나면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며 자서전도 쓸 것이라며 차곡차곡 마음에 담아두었던 계획을 얘기했다. “해남 사니까 좋아. 한평생을 수영을 하다 보니 사실 육지보다 물에서가 더 편해. 물 안에서는 수영복 한 장 입고 움직이면 되지만 물 밖에서는 넥타이 매야지 양복 입어야지 갑갑해. 요새 해남에서는 물 안에서처럼 벌거벗고 다녀요. 벌거벗고 다녀도 볼 사람도 없고 올 사람도 없고.” 조오련은 이렇게 옆집 아저씨처럼 소탈하고 자유로운 사람인가 하면 한편으로는 60살을 맞는 해에도 지치지 않고 거친 바다에 맞서겠다는 무서운 도전 정신으로 무장한 사람이었다. 17개월의 훈련이 끝난 뒤에 그는 거친 파도보다 더 강해진 모습으로 우리와 마주할 것 같다. | |
첫댓글 열악한 환경에서도 타고난 수영선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