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을 떠나는 시간까지 갈까, 말까를 고민한 것은 처음이었다. 곰배령을 갈 수 있다는 설레임과 시간이 촉박한 일을 마무리 지어야 한다는 갈등은 마치 천사의 유혹(!) 같은 것이었다. 그래서 여행 내내 마음이 편하지 않았고 이내 얼굴에 그리고 다녔다. ‘까지껏 이미 떠나온 여행인데 일을 걱정한들 무슨 소용이 있어?’라고 속으로는 안심하려 했지만 어딘가 모르게 불편함이 베여 나왔다.
그렇게 무리를 하고 찾아간 곳이 곰배령길이었다. 곰배령은 쉽게 찾아가기 힘든 곳이다. 하루에 산에 올라갈 수 있는 사람을 200명으로 제한해 미리 인터넷으로 입산신청을 해야 하고 또 시간에 맞추어서 올라가야 한다.
서울에서 놀며 쉬며 차를 타고 인제까지 네 시간쯤 걸렸다. 중간에 단풍이 하도 고와서 단풍구경도 하고 가느라 조금 많이 걸린 듯하다. 인제로 가는 길은 정말 첩첩산중이었다. 자동차 미터기를 살펴보니 서울에서 출발 한 후 200km가 채 되지 않았는데도 네 시간을 달렸으니 말이다. 도로에 시속 30km라고 표시되어 있는 것이 이해가 될 정도였다.
어쨌든 네시 반쯤에 팬션에 도착했다. 주인아저씨가 우리가 쓸 방을 따뜻하게 덮혀 놓아서 이불속으로 파고 들어갔다. 따뜻하고 아늑해서 좋다.
사방이 고즈넉하다. 이불 속으로 파고 든 나는 그냥 누워서 자고 싶다. 밖에 산책을 다녀오자고 꼬시는 일행들을 뒤로하고 그대로 누어있었다. 산밑이라서 그런지 금방 해가 떨어진다. 10월 중순인지라 해가 떨어지자마자 쌀쌀한 기운이 감돈다. 준비해온 것들로 간단히 저녁을 해 먹었다. 가게도 하나 없고 오직 팬션만 몇 곳 있는지라 있는 것들로만 해결해야 했다. 이럴 때는 왜 그렇게 먹고 싶은 것도 많을까^^
저녁을 먹고 나서 밖에 나갈 수도 없고 해서 텔레비전 앞에서 뒹굴면서 놀았다. 텔레비전을 우리가 보는지 텔레비전이 우리를 구경하는지 알 수가 없었지만!
다음 날 아침, 맑은 새소리와 함께 잠이 깨어났다. 몸이 개운하다. 산속에서 맞이하는 아침이 늘 그렇다. 첫 번째 입산시간이 9시다. 아직은 시간이 많이 남았다. 곰배령의 사람들은 이 산골에서 어떻게 살까, 해가 떨어지면 긴 저녁시간을 어떻게 보낼까^^ 상상하며 관리사무소 앞까지 갔다. 웬걸, 우리가 머문 숙소에서 곰배령 관리사무소까지 가는 길에도 촘촘히 팬션들이 있다. 온 마을 전체가 팬션이다. 지난 여름 거제도 여행을 가서 온마을이 팬션이네 하고 조금 씁쓸한 느낌을 느꼈더랬는데 곰배령 가는 길도 마찬가지다.
관리사무소로 가는 길에 붉게 물든 단풍이며 얼굴까지 비칠 듯 맑은 물들이 흐르는 풍경은 장관이었다. 어제와는 달리 한결 마음이 가벼워지고 들뜨기 까지 했다.
9시에 입산이 허락된 사람은 60명이다. 입구에서 주민등록증으로 확인을 한 다음 입산허가증을 받아 목에 걸고 걷기 시작했다.
곰배령길은 약 5.5km, 같던 길로 되돌아 와야 하기 때문에 총 11km라고 한다. 등산길처럼 오르고 내리는 길이 없고 편안히 걸을 수 있는 길이란다. 입구에 들어서자 마자 조그마한 다람쥐 한 마리가 우리를 반긴다. 사람이 옆으로 지나가도 그다지 무서워하거나 경계심을 가지지 않는다. 곰배령을 걷는 동안 다람쥐 천지다. 어디를 가도 작고 귀여운 다람쥐가 길을 안내해 주듯 다니고 있다. 오래 전 에딘버러에 있는 보타닉가든에서 보았듯이 이곳 곰배령 역시 다람쥐들의 천국인가 보다.
많은 사람들이 곰배령 길에 올랐다. 사람들은 각자의 이야기를 담고 길을 나선다. 그 길을 다니는 동안 길 위에서 만난 다른 이들과, 나무들과, 숲과 자연 속에서 이야기를 풀고 더 진화된 이야기를 만들어 나온다.
곰배령의 가을은 이미 지고 있었다. 곰배령 관리사무소의 트레킹 안내자 말에 의하면 지난주의 단풍이 최고로 멋있었다고 한다. 한 주가 지났을 뿐인데도 단풍보다는 발에 밟히는 낙엽소리에 더 만족해야 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곰배령 숲속은 내게 너무 환상적이었다. 놀며 쉬며 걷다보니 우리가 조금 많이 뒤쳐졌다. 하지만 끝까지 걸을 수 있었으니 이 또한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곰배령 길의 마지막 코스는 조금 가파랐다. 하지만 무사히 오를 수 있었다. 9시에 함께 올라왔던 대부분의 사람들이 다 내려간 후에 우리도 발길을 돌렸다. 내려가는 길은 상쾌하기까지 했다. 11km의 길을 네 시간이나 걸려서 오르 내렸으니^^
내려가는 길에 주막에 들러 맛있는 도토리묵과 곰취전을 사먹었다. 곰취나물로 만든 전이라고 하는데 역시 향이 강하다. 햇살이 내리쬐는 식탁에 앉아서 준비해온 도시락과 함께 맛있게 먹었다. 두시가 넘어서 다시 어제 왔던 것처럼 놀며 쉬며 서울로 향했다. 아쉬움을 뒤로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