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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한 사마리아인 비유
어느 날 예수님이 가르치는 도중 구약성경에 능통한 한 율법사로부터 질문을 받았다. 그의 질문은 “내가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겠습니까?”였다. 물론 이 질문은 몰라서 한 질문은 아니고, 단지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성경은 증언한다. 이 질문에 예수님은 역으로 질문하셨다.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예배할 때)어떻게 낭송하는가?”고. 이에 율법사는 거의 기계적으로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나이다”고 대답했다. 이에 예수님은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영생하리라)”고 말씀하셨다. 율법사는 예수님에게 옳게 보이기 위해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라는 질문을 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예수님이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들게 된 이유였다. 이 율법사의 질문은 마치 부자청년이 예수님을 찾아와 영생에 관한 질문을 했던 것과 유사하다. 부자 청년 역시 율법사와 마찬가지의 질문을 했으나, 예수님은 청년의 재산을 모두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 주고 와서 자신을 따를 것을 말씀하셨고, 청년은 재물이 많은 고로 근심하며 돌아갔다(마 19:16-24). 율법사는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 질문을 했지만, 청년은 제법 진지한 마음으로 질문을 했던 것이다. 율법사의 “누가 내 이웃입니까?”라는 질문에 예수님은 비유를 베풀어 대답하셨다. 그것이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이다.
비유는 이렇게 시작된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났다. 강도를 만난 사람은 얻어맞아 죽음 직전에 이르렀고, 그가 옷까지 벌거벗겨져서 유대인인지 아니면 다른 나라의 국적을 가진 사람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예수님 당시의 옷차림은 국적과 신분을 나타냈기 때문이다. 강도들은 그 사람을 때려서 거의 죽게 되었을 때에야 그를 버려두고 사라진 것이다. 그때 마침 제사장이 그리로 지나가다가 그를 보았지만, 의도적으로 그를 피하여 지나쳐버리고 말았다. 제사장은 아마도 그 사람이 죽게 되어 시체를 만지게 되면 부정해지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피하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제사장이 지나간 뒤, 그 뒤를 이어 그리로 지나가다가 강도를 만나서 거반 죽게 된 사람을 발견하였다. 레위인 역시 그를 지나쳐버리고 말았다. 레위인도 제사장 계열로서, 그의 제사업무와 관련하여 그냥 지나쳤는지 모른다. 그리고 한 사마리아인이 이 길을 지나가다 강도 만난 사람을 발견했다. 그는 죽게 된 사람을 “나 몰라라” 지나칠 수 없었다. 사마리아인은 가까이 다가가 응급조치로 그의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자기의 말에 태워 주막으로 갔다. 그를 치료하여 가까스로 그의 목숨을 살린 후, 이튿날에 사마리아인은 주막 주인에게 부탁했다. “이 사람을 돌보아주시오.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 지불하겠소” 하였다.
예루살렘에서 여리고까지의 거리는 약 27km의 내리막길이었다. 예루살렘은 해발 750m나 되는 산언덕에 위치하고 있었다면, 여리고는 반대로 해수면보다 250m 아래 위치해 있다. 그 길은 바위가 많아서 강도들이 많이 숨어 있었으며, 여행자들이 무리를 지어 동행하지 않으면 강도들에게 죽임을 당하기 일쑤여서, 사람들은 그 도로를 ‘피의 도로’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 길은 강도들의 소굴로 워낙 유명해서 로마인 역사가 스트라보(Strabo)는 폼페이 장군이 여리고에 가까이 있는 ‘요단의 요새’를 파괴할 수밖에 없었다고 설명을 한다. 그래서 후에 십자군 원정 때는 이길 중간 중간에 성채를 세워 순례자들이 안전하게 지나가도록 배려를 했다고 한다. 유대인 출신의 정치가이면서도 역사가인 라틴어 이름인 플라비우스 요세푸스는(Flavius Josephus)열심당을 가리켜 강도(λησταὶ)라고 지칭하는데, 이는 아마도 예수님의 비유를 듣는 사람들 중에 어떤 사람들은 요세푸스처럼 ‘열심당’을 강도로 이해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사막지대인 이곳은 낮엔 무척 건조하고 뜨겁기 때문에 강도를 만난 사람은 탈진하여 죽을 수밖에 없었고, 또 밤이 되면 급격하게 내려가는 기온 때문에 벌거벗겨진 몸으로 견딜 수 없는 곳이었다.
비유 속 강도를 만나 거반 죽게 된 사람을 목격한 제사장과 레위인, 사마리아인 세 사람의 행동을 관찰하고자 한다. 강도를 만나 거반 죽게 된 것을 발견한 첫 사람은 ‘제사장’이다. 당시의 많은 제사장들은 여리고에 살면서 예루살렘에 올라가 두 주간을 성전에서 봉사했다. 여리고에서 예루살렘의 거리는 27km나 되는 길이어서 제사장들은 주로 나귀를 타고 여행했던 것이다. 그런 제사장이 길을 가다가 강도 만나서 거의 죽게 된 사람을 본 것이다. 제사장이 이 사람을 의도적으로 피한 이유가 자신의 직책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제사장은 청결의 규례를 따라야 하기 때문이다. 만일 죽은 사람을 접촉할 경우 제사장은 청결의 규례를 어긴 고로 예루살렘 성전으로 다시 올라가 불결하게 된 제사장들과 함께 동쪽 문 앞에 서야 한다. 이것을 행하는 이유는 불결한 것을 접촉한 제사장을 부끄럽게 하려는 것이라고 ‘미쉬나’(Mishnah)에서 말한다. 더구나 청결의 회복을 위한 과정에도 많은 시간과 비용이 소모된다고 한다. 정결케 하는 예식은 일주일이 걸리고, 새끼를 낳지 않은 3년 미만 된 붉은 암소를 사서 태워 재가 되게 해야 한다. 제사장은 무조건 청결을 유지해야 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강도를 만나 죽게 된 사람을 보고도 그냥 지나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제사장의 행동에 윤리적인 문제를 제기할 수는 없다고 볼 수도 있다.
그렇다고 제사장의 행동에 전혀 문제가 없다고 말할 수만은 없다. 미쉬나에서는 대제사장과 나실인은 사실상 성별(聖別)을 같이 취급하는데, 이들에게는 죽은 시체를 만지는 것을 금하고 있다. 그러나 시체를 만지고도 부정해지지 않는 예외규정이 존재한다. 불결해질 위험이 전혀 없는 경우는 버려져서 장례할 사람이 없는 시체의 경우인데, 이는 제사장이 장례를 치러야 하기 때문이다. 탈무드는 더 상세하게 이 부분을 설명하는데, 만일 대제사장이 자기 아버지와 여행할 때, 아버지가 목 베임을 당하여 죽어도 그 시체를 만질 경우 부정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는 아버지이기 때문에 불결해지지 않는 것이 아니라, 대제사장이 직접 장례를 해야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토라(torah, 율법)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미쉬나나 탈무드에는 이 점을 다루고 있다. 미쉬나나 탈무드의 입장에서 제사장은 윤리적인 지적을 피할 수 없다. 그러나 사두개인들은 오직 ‘토라’를 엄격하게 지키려고 했기 때문에 시체를 만지는 것을 회피한다는 점에서 본문에 등장하는 제사장은 사두개파 사람이 아닌가를 유추해볼 수도 있다. 레위인도 제사장과 마찬가지로 강도 만난 사람을 지나쳤다. 레위인에 관한 율법 조항도 제사장만큼 까다롭지 않다. 레위인은 예식을 맡은 기간에만 청결해야 했기 때문에 제사장보다는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강도 만난 자를 도울 수 있었음에도 그냥 지나친 것이다. 어찌 되었든 제사장과 레위인 이 두 사람이 강도를 지나치게 된 것은 청결에 대한 규례가 적어도 표면적인 이유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제사장과 레위인을 이어 지나가던 사마리아인은 앞의 두 사람처럼 그냥 지나치지 않았고, 이 사람은 강도 만난 사람을 자기 말에 태워 주막으로 데려다가 밤을 새워 치료해주었을 뿐 아니라, 치료비는 물론 부대비용까지 자기가 부담했다는 예수님의 비유를 듣고 있는 율법사를 비롯해 다른 청중들은 “누가 나의 이웃인가?”의 문제에서 제사장과 레위인이 아니라면 당연히 이스라엘인 중 어떤 사람이나, 이스라엘인 전체를 함축하는 대답을 기대했을 터이지만, 예수님은 뜻밖에도 사마리아인을 거론하셨다. 유대인이 사마리아인을 상종치 않는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사마리아인을 선한 주인공으로 등장시키는 예수님의 비유는 상당히 파격적인 것이었다. 요한복음 4:9의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치 아니함이러라”는 말씀은 유대인이 사마리아인들을 몹시 천대했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주전 922년 솔로몬의 뒤를 이은 르호보암 왕에게 북쪽의 열지파가 반기를 들었을 뿐 아니라, 주전 722년에 북왕국이 앗시리아에 점령당한 후 혼혈민족이 되었다. 그러나 유대인의 사마리아인에 대한 감정은 북왕국 이스라엘의 혼혈화에서 국한된 것만은 아니다. 바벨론 포로기 후에 사마리아인들은 예루살렘 성전을 짓는데 협조하려했으나 거절당하자 오히려 성전 작업을 방해하였고(슥 4장-6장), 그리심 산에다 자기들만의 성전을 지어 거기서 예배하였다. 이에 주전 128년 유대인들은 사마리아로 쳐들어가 그리심 산의 성전을 파괴했다. 그러나 주후 6~9년 사이의 어느 유월절 밤중에 사마리아인들이 예루살렘 성전 마당에 시체의 뼈를 묻어서 성전을 더럽혔던 것이다. 유대인들은 블레셋과 에돔 사람들과 똑같이 취급했으며, 그들은 회당에서 사마리아인들을 저주하며 그들에게 영생을 주시지 말 것을 호소했다. 그러나 엄밀하게 말해서 사마리아인들도 이방인은 아니었으며, 그들도 여전히 ‘토라’를 지키고 있었다.
『예수님의 비유』의 저자 사이먼 J. 키스트메이커는 예리한 관찰력으로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를 베푸시는 내용은 율법에 통달한 율법사가 익히 알만한 구약의 구절들 속에서 찾는다. 그 중에 하나가 역대하 28: 5~15의 기록, 특히 마지막절인 15절이다. “이 위에 이름이 기록된 자들이 일어나서 포로를 맞고 노략하여온 중에서 옷을 취하여 벗은 자에게 입히며 신을 신기며 먹이고 마시우며 기름을 바르고 그 약한 자는 나귀에 태워 데리고 종려나무 성 여리고에 이르러 그 형제에게 돌린 후에 사마리아로 돌아갔더라”고 하는데, 이 구절에 나타난 많은 단어들이 예수님의 비유에 핵심적으로 동원되고 있다. 역대하 28: 5~15은 주전 734년 아하스 왕 통치 기간 동안 예루살렘과 유대에 살았던 사람들이 사마리아로 포로가 되어 잡혀갔던 일들의 기록이다. 또 하나는 호세아 6:9이다. “강도떼가 사람을 기다림같이 제사장의 무리가 세겜 길에서 살인하니 저희가 사악을 행하였느니라”고 하고 있는데, 예수님은 율법사가 잘 알고 있을법한 구약의 구절들에서 비유를 인출하심으로 자신의 가르침이 구약의 연속선상에 있음과 동시에, 율법과 선지서의 해석임을 율법사에게 보란 듯이 말씀하신 것이다. 물론 예수님의 비유가 구약에 그대로 전승되었다는 의미가 아니다. 예수님의 비유는 독창적인 것이긴 하지만, 단지 구약의 낯익은 표현들을 통해서 비유를 들으신 것이다. 예수님의 이 비유는 구약성경의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과 일치를 이룬다.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를 베푸신 예수님은 율법사에게 “네 의견에는 이 세 사랑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겠느냐?”고 물으셨고, 율법사는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라고 대답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예수님은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고 말씀하셨다. 즉 율법사는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라고 물었지만, 예수님이 베푸신 비유는 ”나는 누구의 이웃인가?“에 대하여 대답을 던져준 것이다. 바로 여기에 율법의 정신과 예수님 사이의 묘한 대조가 이루어진다. 율법사가 던졌던 “누가 나의 이웃입니까?”에 대한 질문은 지극히 유대종교의 폐쇄된 정신에 근거한 질문이다. 유대인의 이웃관은 율법의 정신이 그러하듯 선민의식을 근거로 하는 자국민적 중심에서 떠나지 못한다. 유대인에게는 서로가 형제의식이 깊었다할지라도, 자기들 이외의 타국민에게는 배타적인 성향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선민이라는 의식 때문에 자국민 외에 모든 사람은 개로 취급하는 정신이 깊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유대인들의 이웃에 대한 사랑의 관념은 진정한 ‘사랑’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배타성을 모체로 형성이 되었기 때문에 자국민만이 진정한 형제요 이웃이며, 그 외에는 원수일 뿐이다. 그러나 새로운 율법, 즉 그리스도 안에 사는 이들에게는 “누가 나의 이웃일까?”보다는 “내가 누구의 이웃일까?”에 관심을 갖는다. 그래서 예수님은 비유 중에 제사장과 레위인도 강도 만난 사람을 외면하고 지나갔지만, 유대인이 질시하는 사마리아인을 등장시켜 강도 만난 사람을 돕게 함으로 율법의 폐쇄적인 이웃관에 대하여 비판하시는 셈이다.
율법사는 “누가 나의 이웃입니까?”라고 물었지만, 그리고 현대의 사람들에 와서는 재력이나 학벌, 사회적인 지위, 멋지고 근사한 외모와 그가 타고 다니는 자동차 등을 통해서 친구의 등급을 매기려고 하지만, 예수님에게서 표현된 ‘이웃’이란 어떤 의미에서 나에게 매력적인 존재는 아니다. 이 비유에서 나타나는 이웃은 강도를 만나서 벌거벗겨지고 거반 죽은 상태의 사람으로 나타난다. 율법사나 현대의 사람들은 “누가 나에게 이익을 가져다주는 이웃입니까?”라고 질문을 하지만, 예수님에게서 나타나는 이웃은 나의 도움과 관심, 진심어린 희생을 요구하는 대상으로 나타난다. 결코 보상을 기대할 수 없는 존재로 나타나는 것이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계명은 우리가 일상으로 만나는 친구나 친척과 지인 혹은 같은 그룹의 기독교인들의 한계를 뛰어넘어 여리고 도상에서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도움과 자비를 베풀어야 한다고 말한다. 비유를 통해서 율법사와 모든 세대의 사람들에게 가르치고자하는 예수님의 메시지는 “너도 가서 이같이 하라”는 말씀에 충분하게 요약되어 있다. 잠언 3:27-28은 이웃에 대하여 “네 손이 베풀 힘이 있거든 마땅히 받을 자에게 베풀기를 아끼지 말며 네게 있거든 이웃에게 이르기를 갔다가 다시 오라 내일 주겠노라 하지 말며”라고 하고 있다. 이웃은 정녕 나에게 어떤 보상을 주는 존재가 아니라, 나의 도움을 절실히 필요로 하는 존재다. 누군가가 나의 이웃이 되어주기를 바라지 말고, 내가 누군가의 이웃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의 주요 골자다. 야고보서 1:22은 이런 가르침에 대하여 “너희는 도를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고 단호하게 명령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