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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1.29.13:09. 弘齋全書卷六 詩二 敬次酒泉縣樓所奉肅廟朝御製詩韻 幷小序○戊申
원문과 해역본을 추가하다.
2015.09.24.11:30. 雲石遺稿卷之三 詩 淸虛樓, 酒泉夜宿 기록추가하다
영월의 잊혀진 역사 되찾기
안녕하세요. 영월군문화관광해설사 김원식입니다.
하는 일이 문화와 관광에 대한 해설이다 보니 자연스럽게 옛 어른들은 어떠한 삶을 살으셨을까에 대한 생각들이 모아지게 되었고,
특정한 사안을 집중하여야만 될 것 같아 정한 주제가 영월의 잊혀진 역사 되찾기 이었습니다.
그 첫 번째를 주천의 빙허루와 청허루로 정하고 고문서들을 찾다보니 소중한 기록들이 있었습니다.
이황선생을 비롯하여 양사언, 이우, 등 조선국시대의 조정의 고위관료와 대학자, 시인 분들이 주천을 방문하여 여러 편의 시조에 감동을 남기신 소중한 기록의 자료가 있었습니다.여기 그 내용들을 기록하였습니다.
주천의 망산에는 빙허루가 복원되어 있고, 기록으로만 남아있는 청허루는 그 있던 자리가 현청터 옆이었다하니 발췌된 옛 어른들의 기록을 바탕으로 청허루가 복원되는데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조선시대 관아의 건물 특징은 현이든 부이든 현청 옆에는 반드시 누각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사례가 관풍헌과 매죽루입니다.
2012년 2월28일 초안작성
2012년 5월06일 원고확정.
영월군 문화관광해설사 김원식 드림
목차
1. 주천 청허루 중건기-------------------------------4~6
2. 세종실록 지리지 에서의 주천 기록----------------------7
3. 신증동국여지승람 에서의
주천석(酒泉石) 설명과 선인들의 시 작품들-------------8~10
4. 퇴계 이황선생 문집에서의 빙허루-------------------11~12
5. 퇴계 이황선생의 주천 시 酒泉縣酒泉石 姜晉山韻--------13~16
6. 양사언(楊士彦)봉래시집(蓬萊詩集)에서의 청허루와 빙허루 -17~20
7. 허백당 시집(虛白堂詩集) 에서의 빙허루------------------21
8. 계은 선생유고 溪隱先生遺稿-----------------------22~23
9. 심언광(沈彦光) 漁村集卷之六 에서의 주천 빙허루 詩-----24~25
10. 이우(李堣) 송재집(松齋集) 에서의 빙허루-------------26~27
11. 이우(李堣) 松齋集 關東行錄 憑虛樓韻-------------------28
12. 이우(李堣) 송재시집(松齋詩集)에서의 빙허루-----------29~32
13. 이행(李荇, 1478-1534) 용재집(容齋集)에서의 빙허루 시-----33
14. 홍재전서 에서의 주천 청허루와 빙허루---------------34~36
15. 조인영(趙寅永) 운석유고 ( 雲石遺稿 ) 에서의 청허루-------37
16. 홍석주(洪奭周)연천집(淵泉集)에서의 청허루--------------38
17. 조욱(趙昱) 용문선생집(龍門先生集)에서의 청허루--------39~41
18. 이춘원(李春元) 구원집(九畹集)에서의 청허루-----------42~44
19. 빙허루 재건기------------------------------------45
20. 조선왕조실록에서의 주천 빙허루 기록-------------------46
21. 숙종대왕 어제시 해설-------------------------------47
22. 영조대왕어제어필 해설------------------------------48
23. 정조대왕 어제어필시문------------------------------49
24. 청허루[淸虛樓]와 빙허루[憑虛樓]白頭翁/강원대학교 삼척켐퍼스--50~52
1. 주천 청허루중건기-서울대 규장각 보관
서명 淸虛樓重建記
현대어 서명 청허루중건기
편저자 洪象漢(朝鮮) 撰 청구기호 奎 10175
간행년대 [刊年未詳]
책권수 1帖(4折 8面) 권수 0001
사이즈 36.2×24.6cm
판본사항 拓本 (척본/탁본)
卷末:崇禎紀元後三戊寅(1758)…洪象漢記
자료소개 江原道 原州郡 酒泉에 있는 淸虛樓 重建記의 拓本帖탁본첩
기사 제목 淸虛樓重建記
淸虛樓重建記
原州之酒泉有淸虛樓以江山名焉往在
庚子春沈公廷輔牧是州我 肅考聞
淸虛之勝 特賜七律一篇仍 宣法醞
公敬奉 寵命刻掲於樓大集賓僚以侈
恩光於是樓之名益彰焉歲癸酉樓不
幸大災蕩爲灰燼之塲而流峙雲烟之趣
殆無所管領焉譬如三千珠履失原嘗風
流世間不復知有淸虛樓冠盖之由是路
者莫不指點遺墟而咨嗟焉及今年秋余
以宗伯祗役于 莊陵路出酒泉有樓
翼然于淸讌堂之右卽所謂淸虛樓也盖
牧使任侯慨然興感捐廩鳩材而新之
將以重奉 肅廟遺什也余歸奏于朝
聖上泫然 下敎曰斯詩也予嘗覩
于 侍湯時也仍 親書以下繼之以
小識以寓 追慕之聖孝 命銀臺之臣
奉往以掲之特 賜牧使文皮嘉尙其重
建之誠猗歟盛哉嗚呼雖有江山非樓觀
之美則無以發揮光景雖有樓觀非題詠
之盛則無以流傳形勝此江山所以必待
樓臺也樓臺所以必貴題詠也關以東樓
臺江山之勝指不勝屈而若三陟之竹西
樓春川之昭陽亭扞城之淸澗亭獨最著
者不特境區之淸秀耳誠以鴻匠巨手題
詠之照人耳目也然若論題詠之播萬口
而垂百代則豈有如 奎章之璀璨輝
暎於斯樓者哉然四海之廣樓臺之衆亦
豈無帝王之遺蹟而 先王之什 今
王之筆又豈有如斯樓者哉然則今日之
淸虛樓非特昔日之淸虛樓而已也侯之
所以重建者亦可謂知所重已矣侯累書
請記其事故書此以歸且願侯書掲重奎
軒三字於楣間以表其實也時
崇禎紀元後三戊寅復月崇政大夫行禮
曹判書兼知 經筵春秋館事洪象漢記
본문
" 江原道 原州郡 酒泉에 있는 淸虛樓 重建記의 拓本帖이다.
원래 淸虛樓는 1723년(景宗 3)에 화재로 불타 없어졌던 것을 1758년(英祖 34) 原州牧使 任𪜇이 重建하게 되자
禮曹判書인 洪象漢이 記를 지어 板刻하여 걸었던 것이다. 洪象漢(1701·1769)의 자는 雲章, 본관은 豊山, 魚有鳳의 門人이다.
1728년 進士試에 합격. 1735년 增廣文科에 丙科로 及第, 이후 大司諫, 大司憲을 역임.
1754년 禮曹判書로 趙憲의 文集을 간행하였고, 彰節, 愍民의 두 書院을 重修, 1759년 判義禁府事로서 世孫 師傅를 역임했다.
내용을 보면 "原州의 酒泉에 있는 淸虛樓는 경치로 이름이 있는 곳이었는데 1720년(肅宗 46) 沈廷輔가 原州 牧使로 있을 때에
肅宗이 이의 경치가 뛰어나다는 소식을 듣고 七言律詩 1편을 지어 下賜하였으므로 板에 刻하여 걸고 많은 사람이 모여 宴會를 벌렸으므로 淸虛樓의 이름이 더욱 떨쳤었다.
1723년에 불행히도 화재가 나서 불에 타서 없어졌다. 그 후 1758년 任𪜇이 原州에 牧使로 와서 重建하고
다시 肅宗의 遺詩를 請하는 글을 올려
英祖께서 친필로 써서 내려보내고 牧使에게도 文皮를 내려 嘉尙하였다"는 내용과
또한 淸虛樓의 勝景 등을 찬양하는 글로 되어 있다. 卷尾에 洪象漢의 刊記가 있다.
본문
洪象漢(1701-1769)이 1758年(英祖 34) 11월에 강원도 원주 酒泉에 있는 淸虛樓 중건 사실에 대하여 적은 기문의 拓本帖이다.
청허루는 1720年(肅宗 46)에 세워져 숙종의 御製詩를 하사받았는데 1723年(景宗 3)에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1758년에 중건되었다.
홍상한의 자는 雲章‚ 본관은 豊山으로 魚有鳳의 문인이다.
1758년 가을 莊陵에 갔다가 청허루가 중건된 것을 보고 돌아와 이 글을 지었는데 탁본 연대는 미상이다.
청허루는 1720년 원주목사 沈廷輔가 세운 누각으로 주변의 경관이 뛰어날 뿐만 아니라 숙종이 하사한 칠언율시 1편이 걸려 있어 문인들이 즐겨 찾아 詩會를 열기도 하였다.
그러나 1723년에 화재로 소실되어 지나는 사람들이 늘 이를 애석하게 여겼는데‚ 그 후 任𪜇이 원주목사로 부임하여 1758년에 청허루를 중수하였다.
홍상한은 이해 가을에 莊陵에 갔다가 酒泉에 들러 청허루가 중수된 것을 보고 조정에 돌아와 숙종의 어제시를 청하는 글을 올렸으며‚
영조가 숙종의 어제시를 친필로 써서 내려보내고 목사에게도 文皮를 내려 그 공을 치하하였다고 한다.
말미에는 청허루는 경관이 아름답고 임금의 題詠詩가 있으므로 그 이름이 더욱 떨치게 될 것이라는 글이 실려 있다. (김남기)
2. 세종실록 지리지 에서의 주천 기록
세종실록 > 지리지 > 강원도 / 원주목
⊙ 원주목(原州牧)
주천(酒泉)은 본래 고구려의 주연현(酒淵縣)인데, 신라 때에 지금 이름으로 고쳐서 내성군(柰城郡)의 영현(領縣)으로 하였다.
고려 현종(顯宗) 9년 무오에 원주 임내에 이속(移屬)하였고, 본조에서도 그대로 따랐는데, 별호는 학성(鶴城)이라 한다.
명산(名山)
·거슬갑산(琚瑟岬山)【주천현 북쪽에 있는데, 그 고을 관원이 제사지낸다. 】
*거슬갑산(琚瑟岬山)이【속칭 백덕산(白德山). 】원주 임내 주천현(酒泉縣) 북쪽에 있으며-지리지 / 강원도· 사자산(師子山)이다.【주천현 동북쪽에 있다. 】
호수.인구 : 주천현의 호수가 1백 63호요, 인구가 2백 80명이다
주천의 성이 3이니, 조(趙)·윤(尹)·노(盧)요, 망래성(亡來姓)이 2이니, 왕(王)·동(童)이요,
속성(續姓)이 1이니, 강(康)이다.【진주(晉州)에서 왔는데, 향리(鄕吏)이다. 】
역(驛)이 5이니, 단구(丹丘)·신림(神林)·안창(安昌)【본래 안양(安壤). 】·유원(由原)【본래 유원(幽原). 】·
신흥(神興)【주천현에 있다.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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琚 패옥 거
[역사] 조선 시대, 왕과 왕비의 법복이나 문무백관의 조복(朝服)과 제복을 입을 때 좌우로 늘여 차던 장식. 흰 옥을 서로 엮어 얇은 사(紗)로 긴 주머니를 지어 그 속에 넣어서 찼다.
瑟 큰 거문고 슬 .큰 거문고. 많은 모양. 엄숙하다. 엄격함. 차고 바람이 사납다. 쓸쓸하다. 선명한 모양. 바람소리.
岬 산허리 갑
3. 신증동국여지승람 에서의
주천석(酒泉石) 설명과 선인들의 시 작품들
신증동국여지승람 제46권 강원도(江原道) 원주목(原州牧)
한국고전종합DB> 고전번역총서 > 신증동국여지승람 > 신증동국여지승람 제46권 > 강원도(江原道) >
http://db.itkc.or.kr/index.jsp?bizName=MK&url=/itkcdb/text/bookListIframe.jsp?bizName=MK&seojiId=kc_mk_g012&gunchaId=av046&NodeId=&setid=1297712
【고적】 주천석(酒泉石) 주천현(酒泉縣)의 남쪽 길가에 둘이 있으니 형상이 반 깨어진 돌 술통 같다.
세상에서 전해 오는 말에, “이 돌 술통은 예전에는 서천(西川) 가에 있었는데 가서 마시는 자에게는 넉넉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읍(邑)의 아전이 술 마시려고 거기까지 왕래하는 것을 싫어하여 현(縣) 안에 옮겨다 놓으려고 여러 사람들과 함께 옮기니,
갑자기 크게 우레치고 돌에 벼락이 쳐서 부서져 세 개로 되어 한 개는 못[淵]에 잠기고, 한 개는 있는 데를 알 수 없고, 한 개는 곧 이 돌이다.” 한다.
○ 강희맹(姜希孟)의 시에,
“별은 술로써 하늘에 이름이 있고,
땅의 신령은 액체(液體)를 빚어서 샘물에 흘려 보낸다.
몽매한 풍속이 어찌 다 헛말임을 알겠는가,
기괴한 이야기가 되어 지금까지 전해진다네.
원성 부곡(原城部曲) 옛 고을 서쪽에,
깎아 세운 듯한 높은 봉우리 우뚝 솟아 창연(蒼然)히 섰네.
벼랑 아래에는 물이 깊고 맑아 굽어보면 검푸른데,
돌 술통이 부숴져 강가에 가로놓였네.
사람들이 말하기를,
‘술통이 높은 벼랑 위에 있을 때에는 맑은 술도 탁주도 저절로 솟아오르고 술값은 말하지 않았다네.
천 종(鍾)을 마시면 요(堯)가 되고 백 괵(斛)을 마시면 공자(孔子)가 된다.’ 하더니,
옥산(玉山)이 봄바람 앞에 스스로 무너졌네.
하늘이 만든 뜻은 자연에 맞게 하는 데에 있는 것인데,
어찌 사람이 억지로 마을 가운데로 옮기고자 하였던가.
여러 신령들 성내어 신물(神物)에게 시켜서
술통 돌을 부수어 깊은 못에 돌리었다네.
신령한 물결은 비록 고갈되었으나
돌은 오히려 완강하여 이제까지 남긴 흔적이 큰 내 물가에 있다.
나는 이 말을 듣고 믿기도 하고 의심하기도 하나
못에 가보면 혹시라도 이무기가 침을 흘릴까 두렵다.
나는 물결을 고동시켜 맑고 서늘한 원천(源泉)에 거슬러 올라가,
옛날 그때처럼 벽력(霹靂)을 두드려 일으키고,
도중에 있는 한 조각 돌을 합해 가져다가 모두 다 물나라에 던져서
이 적선(李謫仙)에게 바치고자 하노라.” 하였다.
○ 성임(成任)의 시에,
“이것이 무회씨(無懷氏)가 아니면 갈천씨(葛天氏)일 것이다.
술이 있다, 술이 있어 샘물처럼 흘렀다네.
똑똑 물방울처럼 떨어져 바윗돌 사이로 흘러 떨어지는가 하였더니
어느 사이에 철철 넘쳐서 이미 통술을 향하여 전해졌네.
술 빚는 것이 누룩의 힘을 의지한 것이 아니고,
지극한 맛을 탄 것도 없이 자연 그대로라네.
한 번 마시면 정신이 혈요(泬寥)한 위에 노니는 것 같고,
두 번 마시면 꿈이 봉래산(蓬萊山)의 빈 터에 이르게 된다.
줄줄 흘러 써도 써도 마르지 않으니,
다만 마시고 취하는데 수응(隨應)할 뿐, 어찌 값을 말하였으랴.
당시에 고을 이름 붙인 것은 뜻이 있는 것이었다.
그 혁혁한 신령은 진정 전에는 없던 일이다.
마침내 산 속의 귀신들이 아껴서 갑자기 우레와 폭우로 한밤중에 옮겨 버렸네.
옥검(玉檢)을 위하여 깊은 동학(洞壑)에 폐쇄한 것이 아니면,
반드시 금 단지에 저축하여 깊디깊은 못에 감춘 것이리라.
감감하고 비어서 남긴 자취 다시 볼 수 없게 되었다.
오직 끊어진 돌조각이 길가에 가로놓였네.
내 하늘을 되돌려 옛날 샘의 맥(脈)을 돌려놓고자 하거니와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군침 흘리지 말게 하라.
내가 원하는 것은 반도(蟠桃)를 안주 삼아 밝으신 임금께 바치고
한 잔을 올리면 천년의 수(壽)를 누릴 것이다.
일만 잔 올린다면 다시 만만세(萬萬歲)를 기약하리니,
길이 법궁(法宮)에 납시어 뭇 신선과 만나소서.” 하였다.
4. 퇴계 이황선생 문집에서의 빙허루
退溪先生文集卷之一 詩
原州憑虛樓。有懷州敎金質夫。次樓韻。留贈。災傷御史
此地乖逢又此行。紛紛離合況平生。
頭因別久欲添雪。愁爲秋深更築城。
鳥過豪英多偉蹟。龍蟠形勢稱雄名。
思君坐數同襟樂。祇在山中耦舌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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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작품에 대한 해석(시 : 퇴계. 역 : 능안)
Daum 블로그 blog.daum.net/neung1an/67 | 志香|2011.11.17.23:30
原州憑虛樓。有懷州敎金質夫。次樓韻。留贈。災傷御史
원주의 빙허루에서 원주교관 김사문金士文을 생각하며 빙허루 현판에 적혀있는 시의 각 운 자에 맞추어 시를 지어 그에게 남겨 보냄
此地乖逢又此行。紛紛離合況平生。
나 퇴계가 여기 이곳 원주 지방을 들렀다가 다시 떠났다가 하늘 일이 잡았는데 이처럼 또다시 원주지방을 찾아오는 일을 거듭 반복하게 하니
이처럼 떠들석하고 뒤숭숭하게 내가 원주 지방을 찾아와 들렀다가 다시금 떠나곤 하는 일이 이제는 평소의 내 삶의 습관처럼 되어버린 것 같고
頭因別久欲添雪。愁爲秋深更築城。
내 김질부 그대를 처음 만나 의지하게 된 이후로 그대를 못 본지가 꽤 오래 되었으나 사귐의 고결함은 더욱 더해지기만 하니 사귐이 오래되어도 서로가 서로를 대하는 예를 잃지 않는 것이겠고
자주 서로의 얼굴을 보지 못하는 데에서 생겨나는 그리움은 해가 거듭될수록 깊어져만 가기에 해마다 거듭 쌓이고 또 쌓이기만 하는 이 그리움을 내가 어찌해야 하는지.
鳥過豪英多偉蹟。龍蟠形勢稱雄名。
새가 내 눈앞을 스치며 날아가는 것처럼 세월의 흐름이 이처럼 빠르기만 하여 만약 뛰어나고 빼어난 인물이 있었다면 헤아릴 수도 없을 만치의 업적을 다 이루고도 남았을 그런 기나긴 세월이 벌써 지났고
또 비범한 인재라면 그 자신의 뛰어남을 이미 충분히 떨쳐서 그 자신이 지닌 그릇의 크기에 걸맞은 아름다운 세상의 평판을 이미 충분히 얻고도 남았을 그런 오랜 세월이 지났건만
思君坐數同襟樂。祇在山中耦舌耕。
내가 그대를 생각하는 마음은 다만 첫 마음과 같을 뿐이어서 거듭거듭 그 첫 마음을 지켜나가고 있을 뿐이니 내가 그대와 함께 그 어떤 즐거움을 누리고자 하는 까닭은 그대의 마음과 생각이 나처럼 한결같음에 있는 것이니
아직까지도 다만 우리가 함께 나누고 있는 마음과 생각은 그저 산 깊은 조용한 곳으로 함께 들어가서 학동들이나 몇 모아놓고서 둘이 함께 나란히 공부의 밭을 갈려고 하는 것일 뿐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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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황(李滉).1501년 음력 11월 25일 ~ 1570년 음력 12월 8일. 조선국 명종·선조 시대의 문신, 정치인, 성리학자, 시인.
5. 퇴계 이황선생의 주천 시 酒泉縣酒泉石 姜晉山韻
이황 주천 시 酒泉縣酒泉石 姜晉山韻 |주천현주천석-강진산운 의 해석
주천현주천석-강진산운 酒泉縣酒泉石 姜晉山韻
Daum 블로그 blog.daum.net/neung1an/67 | 志香| 작년, 2011년 9월 12일 20:58
酒泉縣酒泉石 姜晉山韻
주천현에 술이 솟는 샘이 있다는 바위에 대하여
강희맹希孟의 시에서 운을 따서 지음
神槽雷劈已上天
하늘에서 신령스러운 술통이 떨어져 내려와 주천석이라는 바위를 쪼개버리고 그 자리에 박힌 채 다시는 하늘로 되올라가지 않았다 하고
至今以酒名其泉
지금에 이르기까지 그런 까닭으로 해서 이 바위틈에서 술이 샘솟는다 하여 그 이름을 주천석이라 한다고 하는데
人言土俗信荒怪
이는 세상사람들의 입 밖으로 나와 이 지방에서 유독 떠도는 소문일 뿐이니 그 신빙성을 따지고 든다면 그저 허황되고 괴이한 이야기일 뿐일 것인데
繼之好事非眞傳
이런 이야기가 끊이질 않고 쓸데없이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떠돌고 있으니 이는 참되지 못한 뜬소문에 불과한 것이리라.
我疑造物本難測
생각건대 나는 천지만물이 도대체 어떻게 해서 만들어졌는가 하는 그 기원에 관해서는 우리 인간이 다 헤아려 알아챌 수는 없는 일이 아니겠는가 싶고
厥初安知有由然
하여 이 주천석이 이렇듯이 만들어진 것 또한 어떠한 말미암음으로 인해서 그러한지를 우리가 어찌 다 알아낼 수는 없는 일이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 뿐이니
當時仙釀非世法
다만 이 주천석이 이렇게 만들어질 그때를 우리가 상상해서 신선의 술동이라고 이름을 지어 부르는 까닭은 우리가 미처 상상하지 못하는 즉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범위를 뛰어넘어 이 주천석ㅇ 처음 만들어졌을 것이기 때문일 뿐일 것이니
糟牀日注靈波堧
그것을 두고서 사람들은 갖가지 상상력을 다 발휘해서 하늘에서 차린 술상의 술 찌꺼기가 날이면 날마다 여기 주천석에 쏟아지는 까닭에 이 주천석에서 신묘한 샘이 솟는다고 억지로 섣불리 억측할 뿐이리라.
幔亭虹橋降眞侶
만약 하늘의 주막집으로부터 여기 이곳가지 무지개다리가 놓이고 하늘의 주막집에서 신선이 술동이를 안고서 여기 이곳으로 찾아왔다면 그것은 자신이 벗할 참된 벗과 함께 술을 나누고자 함일 뿐일 것이니
瀛尊嶽豆無論錢
바다처럼 드넓은 신선의 술동이와 높은 산처럼 크나큰 신선의 술동이라면 술과 안주의 좋고 나쁨을 전혀 문제 삼지 않고서 그저 술을 즐기기만 하면 될 것인데
瓊漿如流樂且湛
어찌하여 여기 이곳을 찾는 사람들은 이 물을 길어 값비싼 술을 만드는 일만을 고집하면서 신선이 지닌 참된 뜻을 거스르는 잘못으로 흘러들어 온갖 향락을 즐기다가 마침내는 자신의 마음을 망치는 미혹됨에 이르게 되기까지 하는지
官府久廢玉皇前
여기 이곳 원주 관아의 벼슬아치들은 주천석이라는 이름을 내세우면서 그토록 오랫동안 갖가지 향락의 고질병을 쌓아왔으니 그대들이 참으로 신선이 맞다 한다면 과연 옥황상제 앞에 나아가 제대로 옥황상제를 뵐 면목이나 있겠는가.
上界有謫一念差
그대들이 진정 옥황상제가 하늘에서 이 지상으로 휴가를 보낸 참된 신선들이라 자처한다면 생각 한 번이 잘 가고 못 가는 것에 따라서 다시 하늘로 올라갈지 말지가 결정된다는 점을 명심해야 할 것이고
赫然下命六丁遷
촉 땅의 임금처럼 한때의 왈칵하는 기분으로 명령을 내리어 돌로 만든 소가 황금 동을 눈다고 하는 헛된 소문에 들떠서 여섯 힘센 장정을 시켜서 그 돌로 만든 소를 가져오기 위해 촉 땅으로 들어올 수 있는 잔도를 만드는 실수를 저질러서는 안 될 것이나
區區反爲龍所貪
떳떳하지 못하고 구차스럽게 이 주천석을 찾는 사람들은 잘고 용렬할 뿐이니 사물의 대소와 경중 그리고 전후를 뒤바꾸어 신선의 비범함마저 그릇된 방향으로 뒤바꾸어 탐내고 있을 뿐이니
一片誤落金沙淵
다만 단 한 조각이라도 마음을 그릇되게 쓰게 된다면 이 주천석이 갖는 진정한 의미로부터 단번에 멀어지게 될 것이니 그리하면 그대들은 마치 촉 땅의 임금처럼 이 주천석을 황금 똥을 누는 돌로 만든 소처럼 잘못 앍 될 뿐일 것이다
復留一片豈無意
여기 이곳 주천석을 찾아와 마음의 여유를 찾고 마음을 다시 다잡는 일이라면 마음에서 일어난 변화가 아무리 작고 보잘 것이 없는 것이라 할지라도 어찌 그런 변화가 무의미한 변화에 그칠 뿐일 것일까
天戒衆飮官途邊
주천석이라는 이름을 통해서 하늘이 진정 가르치고자 하는 것은 여기 이곳 주천석에서 샘솟는 물은 어느 누구라도 빠짐없이 다 마시면서 즐길 수 있는 샘물이라는 뜻일 것이니 결코 벼슬길에 들어선 사람들만이 이 주천석에서의 즐거움을 누릴 만 하다는 뜻은 아닐 것이니
世人不曉靈眞跡
세상 사람들은 아직도 전혀 깨닫지 못하겠는가. 이 영험하고 신묘한 샘물이 어떻게 스여야만 그 진정한 쓰임새를 되찾게 되는지를
渴喉但覺流饞涎
온 백성이 마셔야 할 이 샘물로 그저 목구멍이나 축이는 술 취한 허탄함에서 관아의 벼슬아치들이 깨어나야 할 것인데 아직것 탐욕스런 침을 질질 흘리고만 있는 잘못에서 그대들은 전혀 헤어나지 못하고 있을 뿐이구나.
謂神之怒坐一吏
주천석의 진정한 속뜻은 차라리 그 신령함에 노기가 서릴 경우를 경계하는 것일 테고 그렇다면 그 어떤 벼슬아치라 할지라도 그의 아주 작고 사소한 잘못이라 할지라도 무릎을 꿇게 하고 그 책임을 따져 묻을지도 모를 그런 신령함을 지닌 샘물이라는 뜻일 것인데
謾說相誇今幾年
무례하고 거만한 낭설을 퍼뜨려 이 주천석의 참된 뜻을흐리게 하면서 서로가 서로에게 공허하게 아첨한지가 벌서 그 몇 해였던지 도데체 그 헷수를 셀 수가 없을 정도로 오래 되고 말았으니
徵奇詰異竟誰是
이 주천석에 얽힌 괴이한 이야기들은다 거둬들이고 앞으로는 이 주천석에 얽힌 괴상한 이야기를 더 이상 하지 못하도록 막아야 할 것 같은데 도데체 그 누가 이런 잘못을 바로잡는 일을 종결지을 수 있을까 싶고
我欲就問騎鯨仙
하여 나는 마치 고래를 타고서 말을 탄다고 말하는 것을 신선다움이라고 여기는 그대들에게 이렇게 따져 묻고자 하는 것이니 그대들이 자의적으로 이 주천석이라는 이름의 의미를 풀이함을 경계하고자 하는 것이 내 물음이 지닌 나름대로의 속뜻이지 않겠는가.
또 다른 해석---------------------------------------------
이황 주천 시 酒泉縣酒泉石 姜晉山韻 | 조상의 향기
이후림(우포22세) | 2011.10.06. 10:56 | 진성이씨 우포파 cafe.daum.net/lhl0775
酒泉縣酒泉石 姜晉山韻
주천현 주천석을, 강진산의 시를 차운하다
퇴계선생 作
神槽雷劈已上天 구유는 벼락 맞아 하늘로 올라가고
至今以酒名其泉 여태까지 샘물 솟아 술샘이라 이름했네
人言土俗信荒怪 사람들이 말하는 시골 풍속 허황하고
繼之好事非眞傳 호사가들 덧붙인 것 진실 전함 아닐세
我疑造物本難測 나도 그 일 의심하되 하늘 마음 잘 모르니
厥初安知有由然 옛날 일 어찌 알기에 그런 유래 있다 하랴
當時仙釀非世法 당시에 술 빚는 법 세속 솜씨 아니어서
糟牀日注靈波堧 술틀에서 쉴새 없이 빈땅에 흘러나와
幔亭虹橋降眞侶 만정봉 무지개 타고 신선이 내려오고
瀛尊嶽豆無論錢 바다로 술을 삼고 산으로 안주 그릇 삼으니 돈을 논해 무엇하리
瓊漿如流樂且湛 경장이 물 흐르는 듯하여 즐겁고 편안하네
官府久廢玉皇前 옥황님 계신 곳엔 관청일 폐지되어
上界有謫一念差 잠시 생각 그릇되어 하계로 귀양왔네
赫然下命六丁遷 육정에게 엄명 내려 이곳으로 옮기다가
區區反爲龍所貪 어쩌다 도룡용이 이 물건을 탐해서
一片誤落金沙淵 한쪽은 잘못하여 금모래 못에 빠뜨리고
復留一片豈無意 한쪽은 남겼으니 뜻 없다 할 것인가
天戒衆飮官途邊 관가 옆에 술 마심을 하늘이 경계하나
世人不曉靈眞跡 신령한 이 일을 세속 사람 알지 못해
渴喉但覺流饞涎 목마를 땐 술 생각에 침만 흘릴 뿐일러라
謂神之怒坐一吏 신께서 노하는 일 아전 한 사람일까
謾說相誇今幾年 부질없이 과장한 말 이제 이미 몇 해인가
徵奇詰異竟誰是 이상한 일 따져 볼 이 필경 누구일고
我欲就問騎鯨仙 고래 탄신선에게 나는 물어 보련다
酒泉 : 강원도 영월군 주천면 주천리
퇴계선생께서 42세인 8월에 재상어사로 강원도로 나가시어 주천현을 검찰하시고
지명유래를 두고 지은 강희맹(1424-1483)의 시를 차운하신 시의 시작지이기도 하다.
주천강변의 산비탈 암석에서 흐르는 실같은 물줄기가 끊임없이 흐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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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황(李滉)
1501년 음력 11월 25일 ~ 1570년 음력 12월 8일
조선국 명종·선조 시대의 문신, 정치인, 성리학자, 시인.
6. 양사언(楊士彦)봉래시집(蓬萊詩集)에서의 청허루와 빙허루
원서명 : 蓬萊詩集
현대어서명 : 봉래시집
청구기호 奎 5108
편저자(한자) 楊士彦(朝鮮) 著 편저자(한글) 양사언(조선) 저
판본사항 木版本
간행지 [刊地未詳] 간행자 [刊者未詳]
책권수 3卷 1冊(86張)
간행연도 [16世紀 末 以後]
책크기 30.8×19.3cm
匡郭 : 四周雙邊, 半葉匡郭:20.8×15.4cm, 有界, 10行 20字
版心 : 上下花紋魚尾
附 : 楓皐詩(楊士俊), 靑溪詩(楊士奇)
자료소개 : 楊士彦(1517-1584)의 遺集에다가 楊士奇(1531-1586)와 揚士俊(生沒年 未詳)의 詩를 附錄한 책
卷1:詩:五言絶句:題僧軸山水圖, 金剛山, 畵有溪橋歸僧, 送李季獻, 題愛蓮齋, 次咸原驛板上韻, 贈雲上人, 東村十詠(靈谷賞春, 東臺翫月, 盤石賞秋, 蘆川晩漲, 道峯暮雪, 千佛朝雲, 三角夕照, 西寺尋僧, 鴨池聞鶴, 妓淵釣魚), 擬古(二首), 岑樓, 半月山, 八竹詠(枯竹, 筍, 新, 雨, 雙, 老, 叢, 風), 元德優松齋八詠(栗亭觀稼, 西崖採薇, 水檻賞蓮, 柳溪釣魚, 笛峯遠眺, 成佛尋僧, 竹塢泛菊), 雪梅詩軸, 風流巖, 洲上次尹加平, 謝上尹加平, 迎祥詩, 春帖字, 南浦夕眺, 剪林, 俯仰, 聲出虛籟號示仁覺輩, 登大平樓次紫陽先生(二首), 平望亭次許草堂韻, 送許草堂出使江南, 卽事, 佛頂臺次車紫洞韻(三首), 贈遠上人, 有懷, 降仙樓, 書玄緝詩軸. 六言:登嶺, 書山石次王半山. 七言絶句:灘聲, 次懶齋韻, 秋夏菊, 次白仲紹贈, 書元上舍紙窓, 觀溪漲次仲玉, 漁村卽事八絶(吾家, 憶去, 庚癸, 明朝, 辜負, 齒沙, 騎牛, 拔筍), 不見, 蓮, 陽德縣監趙文國挽詞(二首), 哭南施伯, 重陽日聞彈琴次金士亨復, 奉先住持天則惠紙走筆謝用前韻, 寄徐鎭之, 洞陰山亭次休齋, 謝加平送圬奴晋石鏝治玉壁, 賦得峴山奇邀太守共遊白洲守以故未赴, 白游日呈三七絶邀永平城主主辭以病送白衣挈雙壺兩雉簡視多恨村人見官人來供以我爲太守也故書以此謝慰, 簡嘲柳廣文詢之托不會, 洲上次尹加平兄氏韻, 簡寄弟應擧應龍, 淵頭次如丘韻, 尹加平見我望國山詩明日作七絶余適受還職牒故三叫走次其韻, 除夜用古韻, 自得, 石龜嵒老松, 小車(1571), 金城, 湖海寄南仲素, 靑白, 口號, 次一行韻, 鏡湖次宋進士韻(四首), 沙丘臺望北海諸嶠, 贈天然, 半月山彈琴, 崔翰林大中壽席, 楊口別墅, 日月籠中鳥次休仲諸君韻, 挽玄鶴, 白雲寺, 石樓(十首), 丘山驛亭次趙石磵韻, 崔門壽席見贈, 別金孝子譚(五絶), 次鄭湖陰韻-附元韻, 三日浦, 寄崔大中, 降仙亭戱爲留眼蓀谷李謫仙, 降仙亭待車紫洞, 贈送臨瀛歌妓, 觀屠鯨, 萬景臺次林石泉韻, 答友人, 九仙峯, 普德窟, 感遇贈李蓀谷, 浦外次古人韻, 送李蓀谷, 浦外, 錦水亭, 仙遊潭, 鑑湖堂, 贈江西寺住持, 佛頂臺, 楡岾寺, 水樂寺, 謝懷呈六藝諸生, 成川, 道峯書院洞瀑流, 次鈍菴詠盆松, 借馬, 平望亭次古詩, 鑑湖北九仙洞四磬石下得冷泉泉有蛟龍, 送平安都事金彦亨(十首之一), 夢登四名山, 贈漱玉洞文益成, 贈送平安都事兼寄李謫仙(十首之四), 迎祥詩, 春帖字, 順陵途中次朴建之, 三山雪觀, 次觀頤道人贈法達韻, 遊楓嶽和車紫洞, 簡抱川城主乞蓮菊竹三絶(蓮, 菊, 竹), 釣南浦盡日不得魚樵兒曰餌大水淺空爾爲勞須遠去乃去遂感我懷笑成此作, 贈無爲, 鶴城寄友人, 江陵詠懷示蓀谷, 父子, 君臣, 夫婦, 長幼, 朋友, 天地, 日月, 星辰, 山川, 草木, 風雲, 寄拘犴諸生, 新卜關東, 簡寄應遇弟(二首之一)-附次(應遇), 題安邊民家新板, 洛山寺, 寄平海倅紫洞先生, 別紫洞寧覲, 金剛山天逸臺, 詠瀑布, 挽完山令, 題琴腹, 贈崔孤竹, 贈琴翁, 題鉢淵磬石上, 次蓀谷挽玄鶴. 卷2:詩:五言律詩:次六弟楊子和韻, 謝南仲玉惠蕨, 觀漁, 欲晴(二首之一), 孤亭, 高山獨不降, 築榭, 天使迎送題名契軸, 水木, 休同,卜居, 春帖字, 贈別, 謝贈玉, 謝惠草堂杜詩, 箕城次奏請聖節書狀三先生韻, 白生員挽詞, 春帖字, 水原山, 半月山, 金柱山, 簡寄重答楊景霖時中, 飛來亭, 鷺鷥, 寒梅次蓀谷韻-附元韻(蓀谷), 經夏(1574), 丘山書院謁聖像, 次孝友堂壁上韻, 次四美亭韻, 楓嶽中臺, 狗峴, 盧偆井, 獐項嶺, 歡喜峴, 白雲橋, 山映樓, 楡岾寺, 梨岾, 佛頂菴觀日出, 題龍鳳寺壁上, 遊仙寺. 七言律詩:春帖字, 臘天, 南參判挽詞, 秖事文昭殿, 重九日次南仲玉, 婦人挽, 五部契軸, 嘉靖三十六年丁巳歲秋八月十七日冊封元子于景福 宮之思政殿爲世子越七日某甲行會百官宴于勤政殿庭敎曰予以否德叨承丕基戰兢自守十有三載而獲譴于天連歲凶荒今因封世子之慶乃設群臣宴於勤政殿此實君臣同德魚水一堂之秋也卿等宜各醉飮俾盡宴會之情因命題今日參宴宗宰文武百官曁五衛諸將後日徐當製進予將覽焉(1557), 迎祥試詩, 廢妃愼氏挽, 又次湖陰龍門笑仙三賢之韻贈雪梅, 雪岳山, 王方山, 白鷗洲次應擧韻效變體-附元韻(應擧), 白鷗洲韻復次尹加平, 次尹加平(四首之三), 退溪先生挽詞, 次竹西樓韻, 題金公賞流堂, 遊國島, 寄徐鎭之, 淸磵亭, 送別姻弟朴明甫, 次白樂天志喜韻, 送崔大中曝曬南州, 上伯氏, 琴岳山, 斷簡. 五言排律:次趙松江浻叔詠雪十韻, 送李正字歸覲惟新六十韻, 贈花嵒尙宗師. 七言排律:次沙村韻仍遺懷十二韻, 挽洪應嚮, 外叔母柳氏挽. 拾遺:贈休靜, 贈靈雲, 贈學澄, 書無爲軸, 春帖字, 林巖兄家聞絲竹而作, 簡邀洞陰廣文柳詢之, 贈安上人, 哭內, 贈洪忠南, 白玉贊, 卜居關東, 高城東閣次車紫洞韻. 卷3:詩:五言古風:翠白仙人過余曰扶桑之海際于蓬萊靈蹤異跡天秘而地藏 今我與爾盍往觀乎風雲壯懷灑落珠璣臨將分手許拾殘馥追奇星駕辭不獲已綴荒獻菲非愚則妄伏希斤敎(瓊瑤許李臺, 寒松丹竈井, 沙洲白玉樓, 同乘貫月槎, 詩文掞天光, 嘲客星, 記舊聞, 修軍籍), 寄鄭八溪君(三首), 浩然亭八詠(三聖晩秋, 花山春暮, 浩然玩月, 南川霽雨, 綠陰舞鶴, 北津泛舟, 浮鴨曉鐘, 平沙落照), 朝發(四首之三), 香山三章別參寥, 送沈叔平先生守豊德郡三篇, 聯環篇奉呈江原林監司, 挽洪應嚮, 雪竹, 有感, 贈別春州奇刺使東岡先生, 寄徐鎭之, 國島歌寄李鰲峯, 開家後新亭, 朗月吟, 靑溪懷足也寄漢城, 作松屐戱書, 白雲山, 次遺響遠別寄淸虛道眼, 有人投詩求眞訣次其韻贈之. 七言古風:食松皮, 淸溪歌. 長短句:牛女詞, 磯水石引, 兢渡怨, 白鷺歌次如丘投韻, 詠白鷺-幷序, 上城主求白鵞民始學語酷好是 鳥求諸人竟莫能致幸謁琴軒忽見池上群鵞欣然恰望走成詩以乞, 美人曲, 白生員挽詞, 鴛鴦行寄箕城知己, 題平壤善政碑, 贈友人. 丹砂賦-庚子榜上之中. 殿策-丙午庭試壯元上之下. 杭州圖跋. 閱雲亭記. 鄭掌令浦記. 孝友門前. 友人祭文. 萬曆二年甲戌江陵祈雨祭文. 寄淸虛書. 又. 飛字記. 楓皐詩附:詩:征倭大捷, 九秋, 次峯韻, 詠菊, 次華使韓世能謁箕子廟韻, 贈李廣文, 次寄黔叟, 復用前韻, 次李茂仲韻, 送金判書往忠州省墓十韻, 次靑溪弟留別韻, 回文, 雪山菊, 晩菊, 又次韓世能謁箕子廟韻, 次鄭綏吉贈別沈景參韻, 次天使韓世能遊漢江樓韻. 靑溪詩附:詩:感寓, 沙洲白鷺, 阿郞浦早起, 僧, 金沙寺次璧上韻, 椒島春雲, 息波亭次板上韻, 碧瀾渡頭次三體詩韻, 過松都南大門記見, 次贈靈雲, 舟次益城下寄贈楊根守李榮佇, 次憑虛樓韻呈崔廣文寮伯, 次淸虛樓韻, 修證寺拜始祖影像感吟, 祭始祖文.
印記 弘齋, 震章, 帝室圖書之章
四部분류: 集部 別集類 一般
기타 복제주기:영인본 서울 민족문화추진회 1989 한국문집총간(v.36)
M/F번호 M/F78-103-215-C
문집명 봉래시집 (蓬萊詩集)(15-16c)
간략서지 奎 5108蓬萊 楊士彦의 문집. 3권 1책.
간략해제 :
序와 跋이 없어 편집 및 간행연대를 알 수 없다.
권1에 오언절구 58수‚ 6언시 2수‚ 칠언절구 149수가 수록되어 있고‚
권2에 오언율시 41수와 칠언율시 34수‚ 오언배율 3수‚ 칠언배율 3수와 拾遺한 시 13수를 수록하고 있다.
권3에는 오언고시 52수‚ 칠언고시 2수‚ 장단구 11수 등을 수록한 외에 賦와 策‚ 跋과 傳이 각 1편‚ 記가 3편‚ 제문 2편‚ 書 2편을 싣고 있다.
또 권3의 끝부분에는 그의 형인 楊士俊의 시를 모은 <楓皐詩附>와 동생인 楊士奇의 시를 모은 <靑溪詩附>를 부록하였다.
그는 주로 외직을 많이 맡았는데 특히 淮陽太守로 있을 때는 근처의 금강산을 자주 드나들며 산수를 즐겨‚ 그의 시에는 금강산을 소재로 한 것이 매우 많다.
李瀷은 그의 ≪星湖僿說≫에서‚ 楊士彦을 두고 신선 가운데의 인물이라고 하고‚ 그의 글씨 또한 그 인물과 같은데‚ 사람들이 그 글씨가 塵俗을 벗어난 줄로 알아도 그 시가 세상사람들의 말이 아니라는 것을 알지 못한다고 하여‚ 세속의 태를 벗어난 천진하고도 청아한 시풍을 높이 평가한 바 있다.
<贈崔孤竹詩>는 사람들의 입에 널리 회자되었고‚
<獐項嶺詩>는 1713년 宋相琦가 편집한 ≪東文選≫에도 수록되었다.
특히 그의 <題鉢淵磬石上>과 같은 작품은 여러 시화에 인용되고 있을 정도로 유명하고‚ 허균은 이를 두고 ‘仙標拔俗’이란 평을 남기기도 하였다.
<殿策>에는 나무가 자라 말라죽지 않음이 흙 속에 뿌리를 내리고 있기 때문임과 같이‚ 국가가 편안하여 위태롭지 아니한 것은 선비의 기운을 부축하여 배양하기 때문이라고 하여‚ 여러번의 사화를 겪으면서 꺾인 士氣를 하루 빨리 진작시킬 것을 주청하기도 하였다.
편저자 양사언 (楊士彦)
저자개요 1517-1584 (중종12-선조17) 字: 應聘‚ 號: 蓬萊·完邱·滄海·海客·完丘子‚
本貫: 淸州‚
父: 希洙
저자내용
형 士俊(楓皐)‚ 아우 士奇(竹齋·靑溪: 1531-1586)와 함께 문명을 떨쳐 중국의 眉山三蘇에 견주어졌고‚ 아들 萬古도 문장과 서예로 이름이 전한다.
1546년(명종 1) 문과에 급제하여 大同(평안남도 서남부) 지방의 驛丞을 거쳐
三登·咸興·平昌·江陵·淮陽·安邊·鐵原 등 8고을의 수령을 지냈다.
자연을 즐겨 회양군수로 있을 때는 금강산에 자주 가서 경치를 완상하였으며‚ 萬瀑洞의 바위에 ‘蓬萊楓岳元化洞天’이라 새겨진 그의 글씨가 지금도 남아 있다.
안변군수로 있을 때는 선정으로 通政大夫의 官階를 받았고‚ 북변의 병란을 예지하고 마초를 많이 비축하여 위급을 구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智陵에 일어난 화재의 책임을 지고 海西로 귀양갔다가 2년 뒤 풀려 돌아오는 길에 죽었다.
그는 40년간이나 관직에 있으면서도 전혀 부정이 없었고 유족에게 재산을 남기지도 아니하였다.
그의 글씨는 해서와 초서에 능하여 安平大君·金絿·韓濩와 함께 조선 전기 四大書家로 일컬어졌으며‚ 특히 큰 글자를 잘 썼다.
漢詩는 작위성이 없고 자연스러워 天衣無縫이라는 평판이 있었다.
한편 그는 格菴 南師古에게서 易術을 배워 임진왜란을 정확히 예언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7. 허백당 시집(虛白堂詩集) 에서의 빙허루
虛白堂詩集卷之十 男世昌編集
詩
登原州北樓
憑虛樓前溪水曲。萬條楊柳蔭平陸。東風吹弄黃金絲。黃金裊裊換新綠。篩煙櫛雨十里餘。春陰茫茫遮大屋。虹橋雁塔康衢中。溝塍繡錯囷倉豐。家家務本少春遊。葛屨宛有陶唐風。居人編戶自安樂。客子倚柱愁寂寞。過盡芳菲搖落時。還逢白雪是歸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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次憑虛樓韻 二首
幼學詩書欲壯行。君恩如海沭鯫生。謾持牙節巡河陜。頻聽絃歌到武城。宣化棠陰無實惠。題詩板上愧虛名。寄言辛苦田間叟。耕野何如我舌耕。
冒景常愁跋涉行。登樓偏愛嫩涼生。數叢芍藥紅翻砌。萬縷垂楊綠滿城。乳鸞傍簷初學語。流鶯穿樹自呼名。一簾疏雨驚殘夢。起看肥犉赴隴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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憑虛樓前溪水曲 빙허루전계수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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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현 成俔
1439년(세종21)-1504년(연산군10)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경숙(磬叔) , 호는 허백당(虛白堂), 부휴자(浮休子), 국오(菊塢), 용재(慵齋), 시호는 문대(文戴)
글씨·음악에도 능한 문장가… '용재총화' '악학궤범' 등 대작 남겨
[출처] 昌寧 成氏 虛白堂 成俔 |작성자 청록
8. 계은 선생유고 溪隱先生遺稿
한국고전번역원DB>한국문집총간 > 계은유고(溪隱遺稿) > 溪隱先生遺稿 > 詩○七言絶句 > 詩○ 七言絶句
淸虛樓
淸虛樓前眺望通。淸虛樓下水如空。客來欲着思歸夢。只怕灘聲便夜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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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수제 溪隱先生遺稿 .판심제 溪隱先生遺稿 .간종 목판본
간행년 1708年刊 .권책 原集, 附錄 합 1책 .행자 10행 18자 .규격 20.5×16.5(㎝) .어미 上下花紋魚尾
소장처 국립중앙도서관 .소장도서번호 일산古3648-文62-92 .총간집수 한국문집총간 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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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성명 이정립(李廷立)
생년 1556년(명종 11) 몰년 1595년(선조 28)
자 子政 호 溪隱 본관 廣州 봉호 廣林君 시호 文僖
특기사항 李珥, 朴淳의 門人. 李恒福, 李德馨과 함께 宣廟朝 三學士로 불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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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찬 및 간행
저자의 시문은 두 차례의 왜란을 겪으면서도 비교적 잘 보전되었다. 이것을 아들 李眞聃이 수집하여 白沙 李恒福에게 編次를 부탁함에 그가 手寫까지 하였다. 여기에는 아들 李玄聃의 부탁으로 이항복이 지은 墓誌와 이항복이 1617년에 지은 序가 포함되었는데, 이항복이 이듬해 세상을 떠남으로써 간행하지 못하였다.
이 정고본을 이항복의 아들 李星男이 보관해 두었고, 그 뒤 李星男의 증손 李光佐가 이를 수습하였다. 그러나 이미 호란 등의 병화를 겪으면서 많은 부분이 유실된 상태였다. 李光佐는 이 遺文에다 宋時烈이 지은 諡狀을 부록에 첨부하여 1708년 全羅道觀察使 兼 全州府尹 재임 시 不分卷 1책의 목판으로 간행하였다. 《초간본》 현재 국립중앙도서관(일산古3648-文62-92)에 소장되어 있다. 이후의 중간 기록은 없다.
본서의 저본은 이 국립중앙도서관장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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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성과 내용
본 문집은 원집과 부록 합 1책으로 되어 있다.
권수에는 1617년에 지은 李恒福의 序가 있고, 目錄이 그 뒤에 있다.
원집에는 文이 앞에, 詩가 뒤에 편차되어 있다. 文에는 箋 6편에 啓, 敎書, 赦文, 批答, 疏, 序, 記, 上樑文, 祭文이 한두 편씩 실려 있다. 箋으로는 1582년 應製로 지은 〈讀書堂謝賜扇箋〉, 1590년 평난공신에 봉해진 뒤에 올린 〈平難功臣謝賜宴箋〉 등이 실렸고, 赦文으로는 1589년에 지어 올린 〈斬逆魁鄭汝立赦文〉이 있다. 批答으로는 〈右議政鄭澈不允批答〉이 실렸는데, 鄭澈에 대해 ‘流俗에서 천 길이나 멀리 있었기 때문에 當路者에게 거스림을 받은 것이 10년이나 된다.’고 한 구절을 놓고 「宣祖實錄」에서 비난하였던 글이다. 序 가운데 〈贈礪山倅鄭渫序〉는 礪山으로 장인을 歸葬하러 간 길에 여산 땅과의 인연을 말한 글로, 졸하기 얼마 전에 지은 것이다. 祭文도 礪山 郡守를 대신하여 祈雨祭文을 지어 준 것이다.
그 뒤에 賦 1편과 詩가 실려 있다. 賦는 〈處江湖憂其君〉으로 1571년 16세 때 지은 것이다. 詩는 칠언고시, 오언고시, 오언절구, 칠언절구, 오언사운, 칠언사운, 오언배율로 분류되고 이어 저작 연대순으로 배열되어 있다. 1584년 구황어사로 전라도에 나갔을 때 지은 〈以救荒御史宿南原地…〉 등의 시, 〈出遊湖堂…〉이나 〈病臥憶湖堂〉 등 호당을 주제로 한 시, 〈入直玉堂上番…〉 등 옥당의 동료와 나눈 시, 1590년 평난공신이 될 때 지은 〈平難功臣會盟分軸…〉이나 〈錄勳〉 등의 시가 다수 실려 있다.
부록에는 1613년에 이항복이 지은 墓誌와 1670년 송시열이 지은 諡狀, 1595년의 致祭文이 실려 있다. 권미에는 李光佐가 1708년 문집을 간행할 때 지은 跋이 붙어 있다.
필자 : 吳世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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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고전번역원DB>한국문집총간 > 계은유고(溪隱遺稿) > 溪隱先生遺稿 > 詩○七言絶句 >
9. 심언광(沈彦光) 漁村集卷之六 에서의 주천 빙허루 詩
한국고전번역원> 한국문집총간 > 어촌집(漁村集) > 漁村集卷之六 > [詩] > 최종정보
심언광(沈彦光) 漁村集卷之六
[詩]
在酒泉。次成使相原州憑虛樓韻。
棲遑此日又東行。
古縣蕭條旅況生。
百種禽聲連野樹。
半空樓影落江城。
酒須有力知排悶。
詩欲無題怕漏名。
早得洛陽田二頃。
弊裘蘇子解歸耕。
심언광(沈彦光) : 자는 사형(士炯), 호는 어촌(漁村).
언경(彦慶)의 아우, 시호는 문공(文恭). 중종(中宗) 이조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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在酒泉。次成使相原州憑虛樓韻。
재주천 차성사상원주빙허루운
棲遑此日又東行。
서황차일우동행
棲 살 서 .살다. 깃들이다. 거처를 정하여 살다.
遑 허둥거릴 황 .허둥거리다. 황망한 모양. 겨를. 여가.
古縣蕭條旅況生。
고현소조려황생
蕭 쑥 소.쑥. 맑은대쑥. 쓸쓸하다. 고적한 모양.
條 가지 조, 씻을 적 .가지. 나뭇가지. 곁가지. 개오동나무. 멀다. 뻗어나감. 길다. 통하다. 다다름.
旅 나그네 려 .여행함. 행상(行商). 군사. 군대. 무리. 많은 사람들 況 하물며 황
百種禽聲連野樹。
백종금성련야수
禽 날짐승 금 連 이을 련, 잇닿을 련, 손숫물 련
半空樓影落江城。
반공루영락강성
影 그림자 영 . 落 떨어질 락
酒須有力知排悶。
주수유력지배민
須 모름지기 수 .有 있을 유. 知 알 지, 슬기 지. 排 밀칠 배, 풀무 배 .悶 번민할 민
詩欲無題怕漏名。
시욕무제파루명
欲 하고자 할 욕 無 없을 무 題 이마 제, 볼 제 怕 두려워할 파, 편안할 박 漏 샐 루, 냄새날 루
早得洛陽田二頃。
조득락양전2경
早 일찍 조 得 얻을 득 洛 낙수 락 陽 볕 양, 나 장 田 밭 전, 밭 갈 전
二 두 이 둘. 같다. 대등함. 짝함 頃 밭넓이 경, 기울 경, 반 걸음 규
弊裘蘇子解歸耕。
폐구소자해귀경
弊 해어질 폐. 해지다. 부수다. 쓰러지다. 裘 갖옷 구 蘇 차조기 소, 향할 소
子 아들 자, 사랑할 자 解 풀 해, 흩어질 해 歸 돌아갈 귀 耕 갈 경. 갈다. 농기구로 논밭을 갊.
10. 이우(李堣) 송재집(松齋集) 에서의 빙허루
松齋集
李堣
詩集
卷一
關東行錄 관동행록
酒泉縣酒泉石姜晉山韻 주천현주천석강진산운
憑虛樓韻 빙허루운
宿酒泉縣 숙주천현
한국고전번역원> 한국문집총간 > 어촌집(漁村集) > 漁村集卷之六 > [詩] > 최종정보
이우 宿酒泉縣
松齋集卷之一
關東行錄
宿酒泉縣
原東百數里。
古縣名酒泉。
荒涼一村墟。
淡淡寒生煙。
殘吏三四餘。
貿貿迎道邊。
靑衿半總角。
絶句僅成篇。
雖令開案牘。
牒訴稀庭前。
斷山橫翠壁。
小樓南臨川。
淸幽足可賞。
觴詠非詩仙。
獨將江邊石。
醉臥欹華顚。
夜深寂無聞。
石瀨鳴濺濺。
醒來一宿覺。
洗盡多生緣。
石卽酒泉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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憑 기댈 빙
기대다. 몸이나 물건을 무엇에 의지하다. 남의 힘에 의지하다. 의거하다. 전거로 삼음. 붙다. 신들림. 맡기다. 의탁함. 의거할 곳. 의거하는 대상. 증거. 증서. 성하다. 대단함. 큼. 건너다. 걸어서 건넘. 차다. 가득 참.
虛 빌 허
비다. 없다. 드물다. 적음. 모자라다. 약하다. 공허하다. 속이 빔. 비우다. 틈. 구멍. 무념무상(無念無想)의 상태. 하늘. 위치. 방위. 별자리. 28수(宿)의 하나. 터. 언덕. 육갑(六甲)의 고허법(孤虛法)에서 고(孤)에 대한 진(辰). 마음. 살다. 앓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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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블러그 수산[사람의 근본 양식] http://blog.daum.net/kil0930/49 에서의 이우 선생 기록
송재(松齋) 이우(李堣, 1469∼1517)는
1498년(연산군4) 생원으로서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지냈으며, 중종반정에 공을 세워 정국공신(靖國功臣) 4등에 책봉된 후 청해군(靑海君)에 봉해졌다. 이 초상화는 공신도상(功臣圖像)으로써 안동시 종가내(宗家內)에 봉안되어있던 것이다. 바닥에 깔린 채전과 족좌대(足座臺)를 묘사하는 방식이 이전의 초상화에서는 볼 수 없던 새로운 요소이며, 신체의 윤곽선이 부드럽고 옷 주름선이 각지게 처리된 것이 특징이다. 특히 단령의 짙푸른 색은 후대에 가채(加彩)한 것으로 보인다.
11. 이우(李堣) 松齋集 關東行錄 憑虛樓韻
한국고전종합 DB> 한국문집총간 > 송재집(松齋集) > 松齋集卷之一 > 關東行錄 > 최종정보
松齋集卷之一
關東行錄
憑虛樓韻
淸奇見說未曾行。
淹泊黃塵負半生。
畿界西連經幾里。
鴒原東入第初城。
蕭騷此地還多憾。
形勝當時浪得名。
日暮炊煙不生戶。
從知春旱失山耕。
12. 이우(李堣) 송재시집(松齋詩集)에서의 빙허루
원서명 : 松齋詩集 송재시집
청구기호 奎 6530-v.1-3
편저자(한자) 李堣 이우(朝鮮) 著
판본사항 木版本
간행지 [刊地未詳]
책권수 2卷, 拾遺, 續3卷, 合3冊
松齋 李堣의 시문집. 原集 2권‚ 拾遺 1권‚ 續集 3권‚ 합 6권 3책.
간행연도 [光武4年(1900)]
책크기 30.1×20cm
匡郭 : 四周雙邊, 半葉匡郭:18.8×15cm, 有界, 10行 18字
版心 : 上下花紋魚尾
序,跋,卷首,卷末 : 卷末:關東跋, 萬歷甲申…吳澐跋, 崇禎紀元後五庚子李中麟跋, 十二代孫李元魯跋
자료소개 : 松齋 李堣(1469-1517)의 詩文集
목차
卷1(詩:關東行錄):
酒泉縣酒泉石姜晋山韻, 原州興法寺韻, 憑虛樓韻, 都事-陳植-見和復次, 宿酒泉縣, 平昌東軒韻, 星磨嶺, 臨溪驛, 除雪, 三陟路上, 羽溪縣軒韻, 十二月初一日江陵次東軒韻, 栗嶺, 寄擇之, 月精寺擇之韻, 連谷縣韻, 襄陽東軒韻, 降仙驛, 十五日行向闕禮, 丘山驛, 大嶺新院, 仁樂院早行, 十二月二十一日原州(二絶), 蒼峯驛韻, 洪川道邊石塔, 春川原昌驛, 鳳儀樓韻, 見家書, 昭陽江値風雪江氷已解乘舟而渡用郭輿韻, 春川仁嵐驛, 狼川客舍韻, 金城東軒韻, 淮陽東軒韻, 金城次姜晋山菩提津韻, 鐵原東軒韻, 金化獨谷先生韻, 狼川驛, 原昌驛次前韻, 上元馬上, 洪川東軒韻, 歸覲途中作(三絶), 提川早行, 蔚珍東軒韻, 交可驛韻, 食蟹, 羽溪山城, 珍富驛韻, 次擇之韻-附擇之詩, 杻洞風仆老松, 酒泉縣馬上睡, 平昌民掘石得銅穴, 次子眞韻却寄-附子眞詩, 洪川寒食, 泉甘驛韻, 麟蹄路上雨, 麟蹄東軒韻, 馬奴驛韻, 楊口雨留金翰林-克己-韻, 過淸平山, 昭陽亭韻, 渡母津江, 山陽驛西洞, 春寒, 安峽途中, 安峽東軒韻, 安峽路上, 睡覺聞雨-回文, 過玉谷, 玉洞驛韻, 馬上折花, 和川縣路上, 次子眞寄韻, 鐵嶺次金翰林-克己-韻, 叢石亭韻, 歙谷東軒韻, 侍中臺, 通川東軒韻, 養珍驛韻, 遊三日浦次古韻, 次洪涵虛先生三日浦刻石韻, 大康驛惕若齋韻, 杆城樓韻, 明波驛古松, 杆城傷春, 襄陽路上, 與都事陳君約遊鏡浦病未遂都事與徐君往遊次臺韻以寄, 仙遊潭, 夜晴, 都事陣君子建遆還留長韻以別奉次以送病語多拙情見乎辭, 六月二十四日三陟竹西樓韻, 江陵東軒韻效洪成兩公記四時, 庚午十一月余杖節來東至江陵値風雪不得遊鏡浦今年春暮與都事陳君逾楸池嶺而南若叢石三日萬景凡遊觀之地靡所不覽至襄陽陳君請曰鏡浦在今南行之路可一往矣余亦以得見爲幸隔期數日卒患風眩陳與徐生獨往秋孟之月又到江陵新都事郭君復以斯遊爲請拉余而行府使金君亦隨往噫余來東九閱月而乃一得遊况瓜期已逼繼今重來未可卜也有所感而作短篇示郭金兩君(1510), 詠越樓, 次襄陽東軒韻, 寒溪山, 渡麟蹄南江, 過淸平山, 鳳儀樓風雨, 將覲宣城到寧越遇雨次軒韻, 宿寧越注文村民家, 龍花驛途中, 詠白鷗, 盆菊, 襄陽 東軒菊, 淸澗驛途中, 海中石生老松, 逾楸池嶺宿和川縣, 歸覲途中紀行, 丹陽二樂樓次金檢詳韻, 關東錄跋:《關東錄》의 跋文(申用漑), 卷2(詩:歸田錄):畏影堂, 薯蕷, 龍頭寺月夜棐仲同宿, 山寺晩吟, 春寒, 自山寺始到家, 三月三日遊前溪, 授壽苓論語, 雲無心, 稚桐, 成節度臨訪, 鄭生員子美來見持饋川魚, 秋日安監司瑭來訪, 移家後閱臧書, 松蕈, 中秋月, 稻熟, 採芋, 次野書問詩以奉復兼示仲野時服未闋, 述懷, 秋懷, 十月初四日壽母生辰, 冬蠅, 龍山別權仲虛(二首), 十四日霧, 冬至, 哀二畜, 中夜病吟, 病吟, 蔘湯, 靑山, 致遠兄來見, 讀麗史恭愍紀, 讀東史箕子紀, 喜金伯起-楊震-臨往, 晩吟, 謝人送凍魚, 任同年翰文來, 思竹, 冬霖, 寄瀣輩讀書龍山, 庭松, 題岐城十景圖(彦洞賞花, 龍島觀德, 花坊修稧, 虎巖送客, 長帖采蕨, 八松踏雪, 普海尋僧, 達田觀獵, 鼎淵釣魚, 見巖瀑布), 十二月二十日立春, 窓明, 燈花, 元日, 元日後二日寄君式, 春日病吟, 雪中龜城守來訪, 送曺吳兩郞與瀣輩讀書淸凉山, 次君式韻, 遣懷, 復昭陵挽章, 曺舜卿-致虞-承點馬之命過見避所, 謝主守餉銀唇魚, 送金國秉以引儀應聘赴京, 新稻, 聞金頤叔三伯仲重陽日設榮宴于榮川錄寄, 中秋月-六言, 避寓奴家夜雪, 雪吟, 十二月二十六日雪次子眞韻-附子眞詩, 雪朝, 啄木, 避居, 無藥, 日暮, 浮生, 脚婆, 嗚琴, 白髮, 暮雪, 少睡, 止酎, 身世, 鷹嘆, 矮屋, 臘日, 山雪, 避雨山舍, 自歎, 消中, 逸鷹, 食柚, 二十四日聞致遠輩掃先塋, 佩劍, 元日, 立春, 遣懷, 古意, 能飮, 人日雪, 穀日雪, 上元日驗月, 聞蠅, 正月十九日夢先君, 二十一日雨, 種藥, 夜雨, 雲日, 寄次野仲虛, 閶闔, 寒食, 見棐仲書, 三月三日, 新燕, 喜見擇之書, 次棐仲(二絶), 金知章見訪, 謝金敬叔來訪, 次子眞送裴仲示我之作, 拾遺:用安驛早行, 太平院石彌勒, 乙亥秋七月與擇之遇于漢江邊同聯(1515), 與擇之子眞飮士華宅復用前韻-附擇之詩, 附士華詩, 子眞國卿又用前韻爲別仍次-附國卿詩, 示子眞-附子眞詩, 次公碩韻-附公碩詩, 題歸來亭-以下係安東作, 襄陽與文欽之夜吟, 松院醉贈秦智用, 仲夏偕文欽之到宣城金敬叔李棐仲亦至共話終宵, 六月六日雨後早發向襄陽, 雨後與欽之輩飮蓮亭, 次韻擇之, 次金監司國卿勸示安東諸生韻, 中秋夜呈金監司, 十六夜次前韻, 次映湖樓韻贈敎授-金長卿, 被長卿挑韻復次奉呈聊免逋慢耳, 復次, 自明疏, 年譜(李滉), 叔父戶曹參判府君墓碣銘, 有明朝鮮國嘉善大夫行安東都護府使李公墓誌銘(李滉), 嘉善大夫戶曹參判李公墓誌銘(李沆), 墓碣銘(崔淑生), 跋文(1584, 吳澐),附樂圃詩(1583), 續集 卷1:詩:率兒輩遊兜溪盤石, 仁同望湖軒韻, 次安孝思-承宗-集勝亭韻(二首), 風樹, 慽慽, 題歸來亭, 送曺舜卿-致虞-歸養, 平城府院君-朴元宗-輓, 送峯宋相國-軼-輓, 送黃叔度-孟獻-安察嶺東, 輓黃長原君叔度, 權相國-鉤-輓(二首), 送方太和-有寧-節度咸慶, 送金伯起-楊震-之任慶州, 伏次御製(二絶), 製內農詩于政院分題得野蠶成繭, 失題, 送金士衡之任江陵, 祭洪直卿-彦忠-墓, 司諫院稧會圖, 題礪原山庄十二詠(西閣, 西巖, 西亭, 橫巖, 石澗, 蘿門, 蓮池, 墻梅, 櫟井, 楸亭, 萬枝松, 茱萸矯), 龍壽寺, 江陵東軒, 全州懷古, 續集 卷2:虛庵遺集序(1510), 字民樓重修記-附跋(1795), 環水亭記, 續集 卷3:敎書, 遺事, 遺事摭錄/海東名臣錄, 遺事摭錄/宣城邑誌, 遺事摭錄/鄭虛庵師友錄, 遺事摭錄/東史, 遺事摭錄/陰厓日記, 遺事摭錄/海東源流, 事摭錄/海東名臣錄-朴元宗條, 遺事摭錄/朝野會通, 遺事摭錄/靑野漫輯, 續集識(1900, 李中麟), 續集跋(李元魯)
이 문집은 원래 그가 죽은 뒤 조카인 이황이 그의 저술 가운데 남아 있던 <關東行錄>과 <歸田錄> 등 시를 모아 필사본으로 전하던 것을 이황의 제자이며 저자의 외증손인 吳澐이 1584(선조 17)년 충주목사로 있을 때 간행한 것으로‚ 이것이 초판본의 원집 3권 1책이다.
속집은 저자의 12대손인 元魯가 中麟과 함께 1900년에 편집 간행하여 원집과 함께 전해왔다.
이 원집과 속집의 합간본이 규장각 소장의 본 문집이다.
이우의 문집은 그 뒤에도 원로의 손자인 鍾洙가 1937년 다시 도산서원에서 별집 3권 1책을 간행하여‚ 전체가 天·地·人 9권 3책으로 편집되었지만(성균관대 소장본)‚ 이 부분은 규장각 소장 본 문집에는 반영되어 있지 않다.
원집 다음의 습유에는 습유시·<자명소> <연보> 등이 수록되어 있지만‚ 면수가 일렬로 매겨지지 않고 소제목 단위당 면수를 매기고 있다.
습유 부분은 나중 성균관대 소장본에서 원집 권3으로 분류되어 있다.
속집은 원집에 빠져 있는 家藏의 글을 모은 것으로‚ 그 첫머리에 원집에는 없었던 원집의 목록을 첨가하고 있다.
속집 권3의 <遺事摭錄>에는 9곳에서 이우 관련 사적을 전재하면서 출처를 본문 끝에 소주 형식으로 기록하거나(앞의 3건) 소제목으로 독립해서 표기하기도 한다.
체제의 통일을 기하기 위해 9항목을 모두 독립된 소제목으로 간주하여 내용개요를 달았다.
이 책의 표지 서명은 ≪송재선생문집≫으로 되어 있지만‚ 卷頭나 版心 모두 ≪송재시집≫으로 되어 있으며‚ ≪규장각도서한국본종합목록≫에도 ≪송재시집≫으로 수록되어 있다.
편저자 : 이우 (李堣)
저자개요 : 1469-1517 (중종12-예종1)字: 明仲‚ 號: 松齋‚ 本貫: 眞寶‚ 父: 繼陽‚ 母: 英陽 金氏
1492년(성종 23) 생원이 되고‚ 1498년(연산군 4)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承文院權知副正字가 되었다.
이어 藝文館 檢閱·待敎·奉敎를 거쳐 1501년 成均館 典籍에 올라 사간원정언·이조좌랑·사헌부헌납·병조정랑 겸 지제교·사헌부장령 겸 춘추관기주관·봉상시첨정·사간·군기시부정 등을 역임하였다.
1506년 동부승지에 임명되어 지제교와 춘추관 수찬관을 겸하였다가 마침 입직하던 날 중종반정이 일어나자 이에 가담‚ 공로로 靖國功臣 4등에 봉해지고 우부승지로 벼슬이 승진되어 경연참참관을 겸하였다.
1508년(중종 3) 부모 봉양을 위하여 外職을 희망‚ 진주 목사로 부임하여 청렴과 검소를 위주로 백성을 다스려 왕으로부터 表裏를 하사받았다.
이듬해 동지중추부사로 전임‚ 호조참판 겸 오위도충부총관·형조참판을 거쳐 江原道觀察使가 되었으나 양친 봉양을 이유로 사직하였다.
그뒤 영해부사·김해부사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읺았다.
그는 문장이 맑고 典雅하다는 평을 받았으며‚ 특히 시에 뛰어났다. 후일 淸溪書院에 봉안되었다.
권제목:詩集 卷二
酒泉縣酒泉石姜晋山韻‚ 原州興法寺韻‚ 憑虛樓韻‚ 都事- 陳植- 見和復次‚ 宿酒泉縣‚ 平昌東軒韻‚ 星磨嶺‚ 臨溪驛‚ 除雪‚ 三陟路上‚ 羽溪縣軒韻‚ 十二月初一日江陵次東軒韻‚ 栗嶺‚ 寄擇之‚ 月精寺擇之韻‚ 連谷縣韻‚ 襄陽東軒韻‚ 降仙驛‚ 十五日行向闕禮‚ 丘山驛‚ 大嶺新院‚ 仁樂院早行‚ 十二月二十一日原州(二絶)‚ 蒼峯驛韻‚ 洪川道邊石塔‚ 春川原昌驛‚ 鳳儀樓韻‚ 見家書‚ 昭陽江値風雪江氷已解乘舟而渡用郭輿韻‚ 春川仁嵐驛‚ 狼川客舍韻‚ 金城東軒韻‚ 淮陽東軒韻‚ 金城次姜晋山菩提津韻‚ 鐵原東軒韻‚ 金化獨谷先生韻‚ 狼川驛‚ 原昌驛次前韻‚ 上元馬上‚ 洪川東軒韻‚ 歸覲途中作(三絶)‚ 提川早行‚ 蔚珍東軒韻‚ 交可驛韻‚ 食蟹‚ 羽溪山城‚ 珍富驛韻‚ 次擇之韻- 附擇之詩‚ 杻洞風仆老松‚ 酒泉縣馬上睡‚ 平昌民掘石得銅穴‚ 次子眞韻却寄- 附子眞詩‚ 洪川寒食‚ 泉甘驛韻‚ 麟蹄路上雨‚ 麟蹄東軒韻‚ 馬奴驛韻‚ 楊口雨留金翰林- 克己- 韻‚ 過淸平山‚ 昭陽亭韻‚ 渡母津江‚ 山陽驛西洞‚ 春寒‚ 安峽途中‚ 安峽東軒韻‚ 安峽路上‚ 睡覺聞雨- 回文‚ 過玉谷‚ 玉洞驛韻‚ 馬上折花‚ 和川縣路上‚ 次子眞寄韻‚ 鐵嶺次金翰林- 克己- 韻‚ 叢石亭韻‚ 歙谷東軒韻‚ 侍中臺‚ 通川東軒韻‚ 養珍驛韻‚ 遊三日浦次古韻‚ 次洪涵虛先生三日浦刻石韻‚ 大康驛惕若齋韻‚ 杆城樓韻‚ 明波驛古松‚ 杆城傷春‚ 襄陽路上‚ 與都事陳君約遊鏡浦病未遂都事與徐君往遊次臺韻以寄‚ 仙遊潭‚ 夜晴‚ 都事陣君子建遆還留長韻以別奉次以送病語多拙情見乎辭‚ 六月二十四日三陟竹西樓韻‚ 江陵東軒韻效洪成兩公記四時‚ 庚午十一月余杖節來東至江陵値風雪不得遊鏡浦今年春暮與都事陳君逾楸池嶺而南若叢石三日萬景凡遊觀之地靡所不覽至襄陽陳君請曰鏡浦在今南行之路可一往矣余亦以得見爲幸隔期數日卒患風眩陳與徐生獨往秋孟之月又到江陵新都事郭君復以斯遊爲請拉余而行府使金君亦隨往噫余來東九閱月而乃一得遊况瓜期已逼繼今重來未可卜也有所感而作短篇示郭金兩君(1510)‚ 詠越樓‚ 次襄陽東軒韻‚ 寒溪山‚ 渡麟蹄南江‚ 過淸平山‚ 鳳儀樓風雨‚ 將覲宣城到寧越遇雨次軒韻‚ 宿寧越注文村民家‚ 龍花驛途中‚ 詠白鷗‚ 盆菊‚ 襄陽 東軒菊‚ 淸澗驛途中‚ 海中石生老松‚ 逾楸池嶺宿和川縣‚ 歸覲途中紀行‚ 丹陽二樂樓次金檢詳韻
13. 이행(李荇, 1478-1534) 용재집(容齋集)에서의 빙허루 시
용재집 제3권
칠언율(七言律)
원주(原州)의 빙허루(憑虛樓)
마음 내어 관동으로 사명 받들고 가니 / 作意關東使者行
작은 다리 버들가지엔 봄기운이 이누나 / 小橋楊柳見春生
천년의 비석에는 옛 글이 유전하고 / 流傳文字千年碣
한 조각 성에는 영웅이 할거했었지 / 割據英雄一片城
취한 몸 높은 누각에 기대 바람을 타고 / 醉倚層樓風是馭
웃으며 쇠잔한 돌 어루만지니 술이 이름이라 / 笑摩殘石酒爲名
강산은 이처럼 끝내 진토가 되고 마느니 / 江山如許終塵土
구구히 녹봉으로 연명하는 게 부끄러워라 / 慙愧區區祿代耕
[주D-001]술이 이름이라 : 자세하지 않으나, 돌의 이름이 취석(醉石)이었던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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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재(容齋) 이행(李荇, 1478-1534)
연산군·중종대의 문신이자 동국여지승람의 신증(新增) 편찬 책
14. 홍재전서 에서의 주천 청허루와 빙허루
弘齋全書卷六
詩二
敬次酒泉縣樓所奉肅廟朝御製詩韻 幷小序○戊申
酒泉。古縣也。今屬原州。有淸虛,憑虛二樓之勝。
在昔沈廷輔之牧是州也。肅廟寵之以詩。間經回祿之災。
先朝戊寅。守臣重建之。
上聞之。手書原篇。繼以小識。命近臣往揭之。
夫一樓成毁。若無所輕重。而宸章寶墨。前後焜耀。不獨樓之賴以顯。
凡州之山川。亦將由樓而增重。則樓之爲是州輕重何如也。
繼此葺修之役。可以知所勉夫。敬次詩韻。略叙其槩。俾揭于傍云爾。
尙說黃封降酒泉。淸虛從此勝名全。
樓容重與雲章煥。地氣還應壁宿連。
百里桑麻渾不改。一春花鳥摠依前。
瞻言咫尺分憂在。太守休爲醉後眠。
敬次酒泉縣樓所奉肅廟朝御製詩韻 幷小序○戊申
경차주천현루소봉숙묘조어제시운 병소서○무신
주천현(酒泉縣)의 누대(樓臺)에 봉안된 숙묘조(肅廟朝) 어제의 시운에 삼가 차하다
소서를 아울러 쓰다 ○ 무신년
酒泉。古縣也。今屬原州。주천。고현야。금속원주。
주천은 고현(古縣)인데, 지금은 원주(原州)에 소속되어 있고,
有淸虛,憑虛二樓之勝。유청허,빙허이루지승。
청허(淸虛)와 빙허(憑虛) 두 누대의 좋은 경치가 있다.
在昔沈廷輔之牧是州也。재석침정보지목시주야。
옛날 심정보(沈廷輔)가 원주 목사(原州牧使)로 있을 적에
肅廟寵之以詩。숙묘총지이시。
숙묘(肅廟)께서 시(詩)를 지어 보내어 그 누대를 영예롭게 해 주었는데,
間經回祿之災。간경회록지재。
중간에 화재(火災)를 만나 불타 버렸다.
先朝戊寅。선조무인。
그 후 선조(先朝) 무인년에
守臣重建之。수신중건지。
수신(守臣)이 그 누대를 중건(重建)하였는데,
上聞之。상문지。상께서 그 사실을 듣고는
手書原篇。수서원편。손수 원편(原篇)을 다시 쓰고
繼以小識。계이소식。이어 짤막한 지문(識文)을 적어서
命近臣往揭之。명근신왕게지。
근신(近臣)에게 명하여 가서 걸게 하였다.
夫一樓成毁。부일루성훼。
대체로 누대 하나가 지어지거나 헐리는 것은
若無所輕重。약무소경중。
그다지 영향을 끼치는 것이 없을 듯하나,
而宸章寶墨。이신장보묵。
임금의 문필(文筆)이
前後焜耀。전후혼요。
전후로 광휘를 발함으로 인하여,
不獨樓之賴以顯。불독루지뢰이현。
유독 누대만 이를 힘입어 드러났을 뿐 아니라,
凡州之山川。범주지산천。
이 고을의 모든 산천(山川)도
亦將由樓而增重。역장유루이증중。
장차 이 누대로 말미암아 중함을 더하게 되었으니,
則樓之爲是州輕重何如也。칙루지위시주경중하여야。
이 누대가 이 고을에 영향을 끼친 것이 그 어떠한가.
繼此葺修之役。계차즙수지역。
이후로 계속해서 누대를 수리하는 일에 대하여
可以知所勉夫。가이지소면부。
힘쓸 바를 알아야 할 것이다.
敬次詩韻。경차시운。삼가 숙묘의 시운을 차하고
略叙其槩。략서기개。그 내력의 대강을 대략 서술하여
俾揭于傍云爾。비게우방운이。그 곁에 걸게 하는 바이다.
상설황봉강주천。尙說黃封降酒泉。왕의 수찰이 주천에 내렸다고 아직도 말하니
청허종차승명전。淸虛從此勝名全。청허루는 이로부터 승지란 이름 온전하였네.
루용중여운장환。樓容重與雲章煥。누대 모습은 거듭 왕의 수찰과 함께 빛나고
지기환응벽숙련。地氣還應壁宿連。땅 기운은 도리어 벽수와 서로 연하였도다.
백리상마혼불개。百里桑麻渾不改。백 리의 시골 풍경은 전혀 변함이 없거니와
일춘화조총의전。一春花鳥摠依前。한 봄의 꽃과 새들은 모두 예전 그대로일세.
첨언지척분우재。瞻言咫尺分憂在。내가 지척에서 분우를 넘어다보고 있노니
태수휴위취후면。太守休爲醉後眠。태수는 부디 술 마시고 자우르지 말지어다.
홍재전서 제6권
시(詩) 2
주천현(酒泉縣)의 누대(樓臺)에 봉안된 숙묘조(肅廟朝) 어제의 시운에 삼가 차하다 소서를 아울러 쓰다 ○ 무신년
주천은 고현(古縣)인데, 지금은 원주(原州)에 소속되어 있고, 청허(淸虛)와 빙허(憑虛) 두 누대의 좋은 경치가 있다.
옛날 심정보(沈廷輔)가 원주 목사(原州牧使)로 있을 적에 숙묘(肅廟)께서 시(詩)를 지어 보내어 그 누대를 영예롭게 해 주었는데, 중간에 화재(火災)를 만나 불타 버렸다.
그후 선조(先朝) 무인년에 수신(守臣)이 그 누대를 중건(重建)하였는데,
상께서 그 사실을 듣고는 손수 원편(原篇)을 다시 쓰고 이어 짤막한 지문(識文)을 적어서 근신(近臣)에게 명하여 가서 걸게 하였다.
대체로 누대 하나가 지어지거나 헐리는 것은 그다지 영향을 끼치는 것이 없을 듯하나,
임금의 문필(文筆)이 전후로 광휘를 발함으로 인하여,
유독 누대만 이를 힘입어 드러났을 뿐 아니라,
이 고을의 모든 산천(山川)도 장차 이 누대로 말미암아 중함을 더하게 되었으니,
이 누대가 이 고을에 영향을 끼친 것이 그 어떠한가.
이후로 계속해서 누대를 수리하는 일에 대하여 힘쓸 바를 알아야 할 것이다.
삼가 숙묘의 시운을 차하고 그 내력의 대강을 대략 서술하여 그 곁에 걸게 하는 바이다.
왕의 수찰이 주천에 내렸다고 아직도 말하니 / 尙說黃封降酒泉
청허루는 이로부터 승지란 이름 온전하였네 / 淸虛從此勝名全
누대 모습은 거듭 왕의 수찰과 함께 빛나고 / 樓容重與雲章煥
땅 기운은 도리어 벽수와 서로 연하였도다 / 地氣還應壁宿連
백 리의 시골 풍경은 전혀 변함이 없거니와 / 百里桑麻渾不改
한봄의 꽃과 새들은 모두 예전 그대로일세 / 一春花鳥摠依前
내가 지척에서 분우를 넘어다보고 있노니 / 瞻言咫尺分憂在
태수는 부디 술 마시고 자우르지 말지어다 / 太守休爲醉後眠
[주D-001]벽수(壁宿) : 별 이름으로, 천하의 문서(文書)를 주관한다고 한다.
[주D-002]분우(分憂) : 지방관(地方官)을 가리킨다. 지방관은 임금의 근심을 나눈다는 데서 온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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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재전서 [弘齋全書]
조선 시대, 1799(정조 23)년에 규장각에서 정조의 시문(詩文), 윤음(綸音), 교지(敎旨) 등을 모아 엮은 책. 184권 100책이다.
홍재전서 [弘齋全書]정조 문집 |
조선 제22대 임금인 정조(正祖:1752~1800)의 시문·윤음·교지 및 기타 편저를 모은 전집.
184권 100책. 활자본. 본서는 정조의 생존시에 정리되기 시작하여 몇 차례 재정리 과정을 거쳤다. 1799년(정조 23) 규장각 직제학 서호수(徐浩修)가 주가 되어 어제회수법(御製會粹法)을 정하고 의례(義例)를 세워 편집했다. 도중에 서호수가 죽자 서영보(徐榮輔)에게 속편(續編)하게 하여 당시까지의 어제를 4집 30목으로 나누어 모두 190편으로 편찬했다. 이 작업은 미완성이었으므로 정조가 죽은 뒤 1801년(순조 1) 심상규(沈象奎)가 주무를 맡아 총 184편으로 편찬하여 1814년에 출간했다. 순조 연간에 출간된 〈홍재전서〉는 정조 연간에 편찬된 〈홍재전서〉에 비해 상당히 많은 부분을 산필(刪筆)하거나 추가했다. 현존하는 〈홍재전서〉는 순조대에 편찬된 것이다.
본편에는 책머리에 총목록을 두고, 권1~4는 춘저록(春邸錄)으로 정조의 동궁시절 작품이 수록되어 있다. 권5~7은 시(詩), 권8~13은 서인(序引), 권14는 기(記), 권15는 비문(碑文), 권16은 지(誌), 권17은 행록(行錄), 권18은 행장(行狀), 권19~25는 제문(祭文), 권26~29는 윤음(綸音), 권30~36은 교(敎), 권37은 돈유(敦諭), 권38은 유서(諭書), 권39~41은 봉서(封書), 권42~46은 비(批), 권47은 판(判), 권48~52는 책문(策問), 권53은 설(說)·찬(贊)·명(銘), 권 54~63은 잡저(雜著), 권64~119는 〈경사강의 經史講義〉라는 제목으로 되어 있다. 이는 정조가 유학에 조예가 깊은 여러 신하 및 경연관(經筵官)들과 함께 〈근사록 近思錄〉·〈심경 心經〉·〈대학〉·〈논어〉·〈맹자〉·〈중용〉·〈시경〉·〈서경〉·〈역경〉·〈강목 綱目〉 등 각종 경서를 강(講)하면서 여러 가지 의문나는 점에 문답한 내용이다. 권120~121은 맹자의 학설에 주를 단 추서춘기(鄒書春記), 권122~125는 〈노론칠편 魯論七篇〉을 읽고 정조가 주를 단 노론하전(魯論夏箋), 권126은 여러 신하들과 〈증전 曾傳〉의 교의에 대하여 논의한 증전추록(曾傳秋錄), 권127~128은 여러 신하들과 〈대학류의 大學類義〉에 대하여 논의한 유의평례(類義評例), 권129~134는 〈주자대전 朱子大全〉·〈국조고사 國朝故事〉에 수록된 내용을 중심으로 신하들과 토론한 고연(古宴), 권135~160은 각 지역 죄인들의 옥사(獄事)에 관하여 정조가 판결내린 심리록(審理錄), 권161~178은 〈일득록 日得錄〉으로 정조의 어록을 수록한 글이다. 즉 〈일득록〉은 문체(文體)에 관한 문학편(文學篇), 인군(人君)·군제(軍制) 등 각종 정책에 관한 정사편(政事篇), 우리나라 및 중국의 역대 인물에 대한 인물편(人物篇), 우리나라의 전반적인 문물·풍속·제도 등에 대한 훈어편(訓語篇)으로 구성되어 있다. 권179~184에는 정조 자신이 지은 서책과 신하에게 명하여 찬(撰)하게 한 서책에 대한 해제집인 〈군서표기 群書標記〉 등이 수록되어 있다.
본서를 통해 볼 때 정조의 문체론은 문풍(文風)이 현실정치의 반영이라는 전제 아래, 국초 이래 도학자의 기본 입장인 학문에 근본을 둔 문장, 즉 도문일체론(道文一體論)이며, 나아가 문장을 고문과 금문으로 나누어 고문에 중점을 두고 가치평가를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정조의 복고적인 문체론은 양난 이후 풍미하게 된 패관소설류(稗官小說類), 서학(西學), 북학파의 신문체(新文體) 등을 명분과 기존질서에 배치되는 요소로 파악하고, 문체정책을 통해 무너져가는 명분과 질서를 바로잡아보려는 의지의 소산이라고 평가된다(→ 색인 : 문체반정). 이 책에는 전례(典禮)·출척(黜陟)·부세(賦稅) 등 각종 정책에 대한 정조의 견해가 잘 나타나 있고, 경사강의(經史講義)에는 중앙의 유생은 물론 지방의 이름난 유생도 거의 참석하고 있어 이를 통해 당시 유학사의 흐름 및 사상의 동향을 살펴볼 수 있다. 규장각·장서각에 소장되어 있다.
15. 조인영(趙寅永) 운석유고 ( 雲石遺稿 ) 에서의 청허루
운석유고 ( 雲石遺稿 ) .권수제 운석유고(雲石遺稿) .판심제 운석유고(雲石遺稿) .간종 활자본(全史字)
간행년 1868년 간행 .권책 20권 10책 .행자 10행 20자 .규격 21.9×15.7(cm) .어미 上黑魚尾
소장처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도서번호 奎4653 .총간집수 한국문집총간 299
저자 성명 조인영(趙寅永)
생년 1782년(정조 6) 몰년 1850년(철종 1)
자 희경(羲卿) 호 운석(雲石) .본관 풍양(豐壤) 시호 문충(文忠)
특기사항
이지연(李止淵), 정원용(鄭元容), 조수삼(趙秀三) 등과 교유
헌종 4년 1838년 57세 7월, 문형이 되다.
권3에는 1830년부터 1838년까지의 시가 수록되어 있다.
1838년 가을 原州 省墓 길에 淸虛樓, 酒泉, 子規樓, 淸泠浦 등에 들러 지은 시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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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석(雲石) 조인영(趙寅永. 1782년~1850년). 순조· 헌종 임금 대의 문신
雲石遺稿卷之三 詩
淸虛樓。恭次兩朝御製韻 청허루。공차량조어제운
齊諧且置酒名泉。邑去樓存景自全。山發泰岐靑未已。水歸泠浦碧相連。
제해차치주명천。읍거루존경자전。산발태기청미이。수귀령포벽상련。
那堪寂寞靈光下。尙復徘徊翠石前。烟捲汀洲秋色遠。蓼花無數白鷗眠。
나감적막령광하。상부배회취석전。연권정주추색원。료화무수백구면。
雲石遺稿卷之三 詩
酒泉夜宿 주천야숙
峽江僅三尺。峽山多百尋。縱違平曠勢。頗愜寂寥心。
협강근삼척。협산다백심。종위평광세。파협적요심。
廢縣人民少。空樓歲月深。卸鞍仍撰杖。月出有登臨。
폐현인민소。공루세월심。사안잉찬장。월출유등림。
16. 홍석주(洪奭周) 연천집(淵泉集) 에서의 청허루
연천집 ( 淵泉集 )
淵泉先生文集卷之四 豊山洪奭周成伯著
연천선생문집권지4 풍산홍석주성백저
詩[四] 시[4]
題檀園海山帖 七十首。選二十三。○檀園。畵師金弘道號。
제단원해산첩 칠십수。선이십삼。○단원。화사김홍도호。
文藻江山兩世緣。畵中相對獨悽然。此生不復東州路。腸斷滄桑十一年。
문조강산량세연。화중상대독처연。차생불부동주로。장단창상십일년。
淸虛樓。樓在原州。有曾王考及伯父所作記若詩
청허루。루재원주。유증왕고급백부소작기약시
권수제 연천선생문집(淵泉先生文集)
간종 사본(寫本)
간행년 필사년 미상(筆寫年未詳)
권책 44권 20책
행자 10행 20자
규격 20.5×13.5(cm)
어미 無魚尾
소장처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도서번호 奎12420
총간집수 한국문집총간 293~294
저자
성명 홍석주(洪奭周)
생년 1774년(영조 50) 몰년 1842년(헌종 8)
초명 호기(鎬基) 자 성백(成伯) 호 연천(淵泉) 본관 풍산(豐山) 시호 문간(文簡)
특기사항
김매순(金邁淳), 정약용(丁若鏞) 등과 교유
순조 21년 1821년 48세 5월, 좌부빈객이 되다.
○ 6월, 홍문관 부제학이 되다.
○ 11월, 이조 참판이 되다. ○ 「續史略翼箋」을 짓다.
권4는 1820년부터 1834년경 사이에 지은 시이다. 1821년에 지은 〈題檀園海山帖〉은 檀園 金弘道가 淸虛樓, 上院寺, 大關嶺, 竹西樓, 武陵溪 등 關東의 名勝을 그린 畫帖에 쓴 시이고, ~~
17. 조욱(趙昱) 용문선생집(龍門先生集)에서의 청허루
龍門先生集卷之四
遯村錄
次酒泉縣淸虛樓韻二首
夢中如得羽翰通。百丈丹梯上碧空。喚取仙人來作伴。不須辛苦去乘風。
亂山環合擁高樓。樓外閑雲映水流。借問三淸何處所。群仙應向此經由
형태서지
권수제 龍門先生集 판심제 龍門集 간종 활자본 .간행년 1779年刊
권책 總目ㆍ本集 6권 합 3책 .행자 10행 21자 .규격 21.8×13.9(㎝) .어미 上白魚尾
소장처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도서번호 奎4705 .총간집수 한국문집총간 28
저자
성명 조욱(趙昱)
생년 1498년(연산군 4) 몰년 1557년(명종 12)
자 景陽 호 愚菴, 葆眞菴, 龍門, 洗心堂 본관 平壤 시호 文康
특기사항
趙光祖의 문인, 徐敬德ㆍ李滉 등과 교유
명종 1년 1546년 49세 9월, 寧越 金剛亭을 유람하다.
편찬 및 간행
저자의 詩文은 저자가 自定한 것이라 하는 「葆眞菴藁」 10권과 제자들이 記錄한 「言行錄」 1권이 간행되지 못하고 稿本으로 남아 있었으나, 壬辰倭亂 때 流失되었다고 한다.
1778년(정조 2)에 7대손 趙時簡이 유실되고 남은 詩稿를 4권으로 나누고, 家藏되어 오던 몇 편의 書簡과 雜著 등을 收錄하고, 世系圖ㆍ年譜를 작성하여 附錄과 함께 첨부, 모두 6권 3책으로 편집하였다. 이를 1779년(정조 3)에 金鍾厚의 序文을 받아 목활자로 간행하였다.《초간본》 이 초간본은 현재 규장각(奎4705), 연세대 중앙도서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
본서의 저본은 1779年刊 초간본으로 규장각장본이다.
구성과 내용
본 문집은 賦ㆍ辭ㆍ詩의 韻文 4권, 書ㆍ墓表 등의 散文 1권, 世系圖ㆍ年譜ㆍ附錄 1권을 합하여 6권 3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권수에는 1779년에 쓴 金鍾厚의 序文과 總目이 있다. 권1~4의 韻文 부분은, 유실되고 남은 「葆眞菴藁」를 수록한 것으로서 저작 시대순으로 엮어져 있다. 권1에는 賦 1편, 辭 3편을 비롯하여 129수의 詩가 실려 있는데, 初期의 作品과 1520년 兄 趙晟과 함께 경기도 朔寧에서 수학하던 때 지은 〈寧城錄〉, 1526년 報恩郡 三山을 유람할 때 지은 〈三山錄〉이 포함되어 있다. 권2에는 1531년 金剛山을 유람하면서 지은 〈金剛錄〉, 1532년 公務로 德源에 가면서 지은 〈北行錄〉, 1533년 개성에서 順陵參奉을 지내던 때 지은 〈西齋錄〉 등 190여 수의 詩가 실려 있다. 권3에는 1543년 靑坡里에 거처하며 文殊庵 등을 유람한 이후부터 1545년 龍門寺를 유람한 시기까지 지은 詩로서 193수가 수록되어 있다. 권4에는 砥平 土最美洞에 隱居한 1546년~1547년 사이의 詩作으로 보이는 〈遯村錄〉과 그 이후 1554년 長水에 부임하면서 지은 작품들로 247수가 수록되어 있다.
권5에는 3편의 書簡과 先考墓表 등의 雜著가 수록되어 있다.
권6은 世系圖ㆍ年譜ㆍ附錄인데, 年譜 뒤에는 1778년 문집을 편집하고 年譜를 작성한 경위를 밝힌 7대손 趙時簡의 跋이 있다. 附錄은 趙翼이 지은 行狀과 壙記 등의 墓道文字, 龍門書院 관계 기록, 贈職時의 筵說 등을 모은 것이다. 또한 「海東名臣錄」ㆍ「淸江小說」ㆍ「靜庵集」 등에서 관계 기록을 채록한 〈言行摭錄〉과 교분을 맺었던 李滉ㆍ申光漢 및 후인의 詩章이 수록되어 있다.
필자 : 吳世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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夢中如得羽翰通。몽중여득우한통
夢 꿈 몽 中 가운데 중, 맞을 중 如 같을 여 得 얻을 득 羽 깃 우, 느슨할 호 翰 날개 한 通 통할 통
百丈丹梯上碧空。백장단제상벽공
百 일백 백, 힘쓸 맥 丈 어른 장 丹 붉을 단 梯 사다리 제 上 위 상, 오를 상 碧 푸를 벽 空 빌 공, 곤궁할 공
喚取仙人來作伴。환취선인래작반
喚 부를 환 取 취할 취 仙 신선 선 人 사람 인 來 올 래, 위로할 래 作 지을 작, 만들 자, 원망할 주 伴 짝 반
不須辛苦去乘風。불수신고거승풍
不 아니 불, 아닌가 부, 클 부 須 모름지기 수 辛 매울 신 苦 쓸 고, 멀미 고 去 갈 거, 덜 거 乘 탈 승, 수레 승 風 바람 풍, 풍자할 풍
亂山環合擁高樓。난산환합옹고루
亂 어지러울 란 山메 산 環 고리 환, 물러날 환 合 합할 합, 홉 갑 擁 안을 옹 高 높을 고, 높이 고 樓 다락 루
樓外閑雲映水流。루외한운영수류
樓 다락 루 外 바깥 외 閑 한가할 한 雲 구름 운 映 비칠 영, 희미할 앙 水 물 수 流 흐를 류
借問三淸何處所。차문삼청하처소
借 빌 차 問 물을 문 三 석 삼, 자주 삼 淸 맑을 청 何 어찌 하, 멜 하 處 머무를 처, 곳 처, 사람 이름 거 所 바 소
群仙應向此經由。 군선응향차경유
群 무리 군 仙 신선 선 應 응할 응 向 향할 향, 성 상 此 이 차 . 이와 같은. 經 날 경, 날실 由 말미암을 유
18. 이춘원(李春元) 구원집(九畹集)에서의 청허루
문집명 구원집 (九畹集)(17c)
간략서지 奎 4326九畹 李春元의 문집. 4권 부록 합 2책.
간략해제 ≪九畹集≫은 이춘원의 셋째아들 楚老가 榮川郡守로 재직할 때 선친이 말년에 남의 요청에 의해 지은 것과 口傳하는 시문들을 수집하여 엮고 행장과 신도비명‚ 만사 등을 부록하여 1656년(효종 7) 영천에서 목판으로 간행한 것이다.
편저자 이춘원 (李春元)
저자개요 1571-1634 (선조4-인조12)字: 立之·元吉(改字)‚ 號: 九畹‚ 本貫: 咸平‚ 父: 瑒‚ 母: 綾城 具氏
권제목:卷一
詩
秋日登園北高岡-三首‚ 夜發山亭‚ 獨起‚ 咏躑躅次伯氏韻-古詩‚ 偶吟得橋字-四首(思鄕‚ 夢仙‚ 圍碁‚ 遺懷)‚ 聽子規-古詩‚ 送伯氏遊嶺南‚ 贈河山正‚ 春望‚ 秋景‚ 次贈鄭元亮-晦‚ 途中‚ 偶吟‚ 度雲遏嶺‚ 富有村飮族兄趙-悰-家‚ 過鄭松江古宅‚ 春日訪梁同年-千運‚ 石底村‚ 巾法里‚ 芳草‚ 黃昏‚ 次辛逸休-長吉-韻留別‚ 次林子愼-𢢜-寄詩-十二韻-排律‚ 春風‚ 訪林同年-愃·懽-昆弟-四首‚ 錦城‚ 羅府夜‚ 過嘉林驛‚ 春愁‚ 草洞謁諸同姓-二首‚ 寒食過南平吳家亭醉姜-恜-酒-二首‚ 留別朴百原-孝誠-二首‚ 贈金之任-胤‚ 贈靈光倅金汝秀-尙寯‚ 務安海上作‚ 發眞溪‚ 客夜‚ 百事‚ 碧草‚ 贈洛妓萊山月‚ 與靈光倅遊法聖浦次姜博士太初-沆-韻‚ 戱題-三首‚ 竹枝詞-三疊‚ 所思‚ 宿長沙館‚ 過四神院‚ 金溝顯納凉‚ 次沙溪堂韻‚ 再次‚ 懷州夕望-二首-乙巳(1605)‚ 汭陽橋辭贈白善鳴-振南‚ 遊天冠山醉題戱東庵僧‚ 秋思‚ 戱贈姜太初-三首‚ 附次韻-幷序(姜沆)‚ 詠碧玉‚ 月夜‚ 旅館卽事‚ 贈圓徹師-古詩‚ 君山聞笛‚ 榕葉滿庭鶯亂啼-古詩‚ 杏園-二十韻-古詩‚ 淘井-十韻-排律‚ 題錦湖亭‚ 送春‚ 次萊州雜詠-十七首-丁未(1607)(萇山國‚ 太宗臺‚ 謙孝臺‚ 蘇瑕亭‚ 海運臺‚ 鄭瓜亭‚ 沒雲臺‚ 釜山‚ 對馬島‚ 梵魚川‚ 溫井‚ 鄭文道墓‚ 李廷馣碑‚ 宋象賢祠‚ 玉孝子‚ 東臺‚ 別館)‚ 平丘驛與淸陰金叔度-尙憲-同宿次韻-四首-戊申(1608)‚ 月溪‚ 龍津‚ 娛賓驛‚ 砥平待徐施伯-景雨-御史不至先發却寄‚ 原州新月軒‚ 病中夜吟‚
酒泉路中-二首‚ 酒泉‚ 淸虛樓別亞使‚ 次企齋韻又贈‚ 又次企齋‚ 李正郞-潔-携酒來訪-古詩‚ 寧越道中‚ 錦江亭次韓益之韻‚ 魯陵行-古詩‚ 寧越校生行-古詩‚ 平昌‚ 星磨嶺‚ 阻水碧呑驛‚ 旌善‚ 百復嶺‚ 竹西樓凝碧軒‚ 召公臺望鬱陵島-二首‚ 觀日出行-古詩‚ 望洋亭‚ 採鰒行-古詩‚ 寒松亭行-古詩‚ 鏡浦臺‚ 許李臺‚ 海濤‚ 江陵大水行-古詩‚ 洞山驛次企齋韻‚ 襄陽軍士行-古詩‚ 洛山寺-二首‚ 書洛山住持軸‚ 留別楓浦‚ 仙遊潭‚ 永郞湖又贈楓浦‚ 淸澗亭‚ 干城詠月樓‚ 乾鳳俊師追及海山亭次鵝溪韻贈之‚ 楡岾熙上人來乞詩-二首‚ 海山亭‚ 望金剛‚ 望三日浦‚ 瓮遷‚ 淮陽途中‚ 新安驛‚ 土城‚ 古東州‚ 採參行-古詩‚ 伐木行-古詩‚ 孤石亭‚ 次李丈-文顯-韻-二首‚ 淸平寺題僧軸-六首‚ 淸平八景(淸平寺‚ 見性庵‚ 仙洞‚ 息庵‚ 西川‚ 南池‚ 龍淵‚ 盤石)‚ 壽春館夜坐得洪輝世-瑞鳳-書吟寄-一律‚ 長短句次答金翁-古詩‚ 新淵江-古詩‚ 醉贈韓汝濟-二首‚ 次靜觀堂壁上韻‚ 贈同年橫城宰黃叔正-盆中-二首‚ 次亞使橫城途中韻‚ 再次贈黃叔正‚ 次贈李正郞‚ 謝元上舍送酒-二首‚ 亞使送舍弟而病未就餞席吟詩贈之‚ 再贈‚ 留別黃叔正-二首
저자내용
1571년 漢城 薰陶坊에서 태어나 이미 6세에 글을 지었으며 洪至誠에게 배우다가 朴淳이 영의정을 그만두고 永平에 은거할 때 찾아가 배웠다. 1591년 사마시에 합격하였으며 1596년(선조29) 文科庭試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정자‚ 1597년 分司注書를 역임하고 광양현감이 되어 남원에 진출한 왜군을 상대로 싸웠다. 1598년 明나라 茅遊擊(茅國器)의 접반관으로 안동에 갔으며‚ 1599년 병조좌랑‚ 지제교‚ 해미현감 등을 제수받았으며‚ 1601년 예조좌랑‚ 시강원사서‚ 사간원정언 등에 전보되었다. 1602년 陳請官으로 중국을 다녀왔으며‚ 1603년 문학을 거쳐 병조정랑으로 옮겼으며 이어 御史를 제수받고 湖西에 내려갔다. 1604년 성균관사예‚ 1605년 長興府使로 나아가 청백리로 선정되었으며‚ 1607년 특명으로 정3품에 올라 東萊府使가 되었다. 1608년 관동지역으로 나아가 방종한 수령들을 징치하였으며‚ 1609년 모친의 병환으로 사직하고 어머니를 봉양하였다. 얼마 후 우승지를 제수받았으나 1610년 모친상을 당하여 3년간 廬墓생활을 하였다. 服後 승정원좌승지로 전임되었으나 1613년 영창대군을 축출하려는 기도에 맞섰다가 모함을 받아 削職되었다. 1614년 다시 서용되어 병조참의‚ 승지를 제수받았다. 1616년 오위도총부부총관‚ 分曹參判‚ 1617년 충청감사를 제수받았다. 1619년 동지돈령부사를 제수받았으며‚ 1620년 천자의 탄신을 축하하는 사행으로 북경에 다녀왔다. 이듬해인 1621년 詔使를 맞으러 安州로 나갔다가 안주의 百祥樓에서 중풍을 맞아 오른쪽 몸을 못쓰게 되면서 벼슬을 그만두었다. 사직후 鍼灸 등을 일체 거절한 채 술과 시로 세월을 보내다가 1634년 7월 26일 사망하였다. 부인은 해평윤씨 尹鎭의 딸이다. 1592년 임진왜란시 병란을 피하여 자결하려고 하였으나 목숨만은 건지게 되었다. 이춘원이 부인의 정절을 칭송하고 더욱 공경하였으며 집안이 화락하였다.
1656.7. 李敬輿(1585-1657)가 지은 구원집의 서문. 시의 어려움은 協韻에 있는 것도 아니요‚ 비유를 교묘하게 하는 것도 아니며 채색을 화려하게 하는 것도 아니다. 外物에 기댐이 없이 마음에 얻는 그대로를 표현하니 氣가 이를 주재하고 神이 調攝하여 화음이 스스로 화협하여야 하는 것이다. 공의 시문은 시원하고 청원하여 神氣가 안정되었으니 이제 그 100분의 1도 못되는 시문들을 아들들이 모아 나에게 한마디 부탁하니 精金·美玉과 같은 그의 문장에 무슨 말을 덧붙이겠는가라는 내용이다.
序 (序2)
1656.7. 鄭斗卿이 지은 구원집의 서문. 宣祖代에 貢擧를 담당했던 尹根壽가 선비들 중 최고의 文才로 이춘원을 꼽았으니 그의 시는 맑고 우아하였다. 광해군대 仁穆大妃의 축출을 완강히 거절한 그의 절개는 후세에 전해져야 하는 것이니‚ 옛날 楚나라의 屈原이 혼탁한 때를 당하여 조정에 간신들이 가득하여 난초(충신)를 멀리하였어도 굴원만은 홀로 九畹(畹은 30畝)에 난초를 심어 자신의 충직과 修行을 보여준 것과 같은 것이다. 이춘원이 구원으로 號를 삼은 것이 참으로 그 뜻이 깊음을 알 수 있다. 근래 평생토록 名利에만 분주한 자들이 溪·山 등의 아호를 삼으니 참으로 가소로운 일이다. 이제 공의 문장만을 찾고 큰 뜻을 깊이 생각하지 않는 자들이 있을까 우려하여 이렇게 경계한다는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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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집 [九畹集]이춘원 시문집
sns 내보내기요즘마이피플트위터싸이월드더보기 페이스북 미투데이 조선 중기의 문신 이춘원(李春元:1571~1634)의 시문집.
4권 2책. 목판본. 1656년(효종 7) 제자들이 편집·간행하였다. 권1~3에 시, 권4에 잡저(雜著)를 수록했다. 부록으로 행장·신도비명·치제문(致祭文)·만사·제문이 있고, 이 책은 대부분 시를 위주로 수록하고 있다. 그의 시는 화려하지 않으나 마음속에서 우러나는 깊은 뜻이 나타나 있어 많은 사람에게 널리 읽혀졌다 한다. 권두에 이경여(李敬輿)와 정두경(鄭斗卿)의 서문이 실려 있다. 규장각·국립중앙도서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
19. 빙허루 재건기
빙허루는 강북대안에 있었던 청허루(문종대 1450년 경판관 조명 창건,
1909년 파양감실)와 더불어 쌍벽을 이루고 있었고, 주변의 산수와 어루러져 뛰어난 경관이었기에 숙종대왕께서 두탄하는 어제시를 하사하셨던 일대 명소였다.
그러나 일제의 풍운속에 퇴락된것을 1930년 당시 양변면장 엄경열은 이한상의 특지로 이 일대의 임야를 매입하고 면민의 성금으로 빙허루를 중건 하였는데 1950년 6.25 동난으로 인하여 또 소실되었다.
이후 주민의 재건 숙원을 국회의원 심명보의 주선으로 성취하고 어제보묵을 복제 봉액하게 되니 이 누각복원 내력은 좌기와 같이 옛 정취를 되찾음이요 선인들의 뜻을 받들고 중망에 부응함이니 어찌 경사가 아니리오
모든 선민과 함께 영훼일생광 토록 최상의 유지관리를 기약하는 바이다.
역대 대왕 어제어필 봉액 내력
1. 숙종46년 경자년 (1720년) 1월18일 숙종대왕은 몽중에 주천의 쌍루승경을 보신바 있어,
원주목사 심정보 로 하여금 현지를 담사케 하여 그 보고가 몽사와 일치하여
환후 중 인데도 이날 작시 어필 하시고 주찬하다.
2. 그 후 청허루가 환실 보묵 역시 연멸되었던 것을
영조34년 무인(1758년) 원주목사 임집 이 복원하였음을 대종백 홍상한 보고하자
영조대왕은 부왕(숙종)의 어제시에 서문을 달아 어필하고
호피 1령을 하사하니 임집 목사는 청허루에 봉액하다.
3. 정조 12년 무신(1788년) 정조대왕은
숙종대왕 어제시운에 따라 새로이 시를 짓고 어필하여 그 옆에 봉액케 하다.
4. 1909년 청허루가 다시 퇴락하여
이들 현판이 일인 수중에 있게 되자 동민 김병위는 고쟁환수하여 받들어 오던 중
5. 1915년 3월 수주면의 이, 원, 곽 3씨는 이들 현판을 봉안하기 위하여
요선암에 정자를 짓고 옮겨 봉안하다.
6. 이제 이 빙허루가 복원 됨으로서 보묵현판을 탑이 복제하여 여기에 봉액하니
비록 원복과 루명은 달라도 비로서 주천에 환원하였으므로 다행이거니와
일 후 청허루의 복원을 다시 기약한다.
서기 1986년 11월 26일
영월군수 안구순
20. 조선왕조실록에서의 주천 빙허루 기록
영조34년(1758 무인) 10월 4일(정사)
장릉을 봉심한 홍상한을 소견하고 창절 서원과 민충사를 개수토록 하다
홍상한이 말하기를,
“원주(原州)에 주천(酒泉)이라는 고읍(古邑)이 있는데 빙허루(憑虛樓)가 있었습니다.
심정보(沈廷輔)가 원주 목사로 있을 때
선조(先朝) 경자년(1720 숙종 46년) 1월 28일에 어시(御詩)를 내려 주고 선온(宣?)을 보내주었습니다.
계유년(1753 영조 29년) 의 화재(火災)로 누각이 불타 없어지고 또한 어제시(御製詩)도 소실되었습니다.
지금 원주 목사 임집(任?)이 바야흐로 이를 등문(登聞)하고 옛날 누각을 중건하고 다시 어제시를 게시(揭示)하고자 합니다.”
하니, 임금이 어제시 중에 ‘술 취해 난간에 기대어 대낮에 졸고 있다.[醉倚?干白日眼]’라는 귀절을 외우고 말하기를,
“심정보는 비록 술에 취하기를 권하지 아니하더라도 오래도록 취해 있을 자이다.
내가 다시 시를 짓지도 아니할 것이며, 감히 후미(後尾)에 잇달아 쓰지도 아니할 것이다.”
하고,
이어서 임금이 소지(小識)를 친히 짓고서 홍낙성(洪樂性)에게 명하여 교지(敎旨)를 받들어 쓰게 하였다.
어제시는 임금이 어상(御床)을 내려와서 친히 베껴 쓰고 말하기를,
“지난날의 어제시를 내가 어찌 감히 어상에 걸터 앉아서 베껴 쓰겠는가?”
하고, 나무에 새겨서 옛날과 같이 게시하도록 명하였다.
21. 숙종대왕 어제시 해설
숙종대왕 어제
빙허, 청허 양루의 한 시는 병중에 읇으신 것으로
원주목사 심정보에게 주시고 술과 안주를 내리시다.
듣건데 쌍루가 주천에 있다던데
몇 번이나 고쳐 이어서 아직도 온전한가
높고 높은 석벽은 구름에 닿았고
맑은 강물은 짙푸르게 이어지도다
산새들은 나무위에서 울고
들풀과 봄풀은 뜰 아래 비치었네
술을 가지고 올라 아이에게 따르게 하니
취해서 난간에 기대어 낮잠을 이루도다
경자 정월 28일(1720 숙종 46년 1월28일)
22. 영조대왕어제어필 해설
지금 내가 생각하니 아바마마의 어제시는
병 구완 중에 본것으로
그 어른의 문집 끝에 써 놓으신 것을
눈물이 턱 밑까지 흐르는 것을 깨닫지 못하매
내 다시 시를 짓지 못하고
나의 책에 기재하여 두었도다
이제 예조판서의 주달이 있어
다시 울면서 써서 승지를 보내어 현판을 달게 한다.
예전의 어제시를 지금 내가 손수 썼으니
추모하는 마음이 간절하여 운을 읊으매
비단 글 뿐이 아니라 상중에 있었던 것을
감히 작은 지식으로 사신을 보내 기록하게 하였으니
아바마마의 찬란한 문장이
뒤에 없어지지 아니하도록 하노라
영조34년(1758년 무인 2월) 울면서 쓰다
이 때 소임을 맡은 목사 임집이 중건하고
이제 시를 받들어 저버리지 않으니
호피 한 장을 내려 가상한 뜻을 보이노라.
23. 정조대왕 어제어필시문
敬 次 酒泉縣 樓所 奉序 경차주천현루소봉.
[영월향교지 661~662]
정조대왕은 청허루에 봉안된 두 분의 선왕(숙종.영조)의 어제시를 소중히 간직할 수 있도록
敬 次 酒泉縣 樓所 奉序 경차주천현루소봉 를 지어 두 분 선왕의 어제시 옆에 걸게 하니 그 글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담겨있다.
敬 次 酒泉縣 樓所 奉序
주천은 옛 고을로서 지금은 원주에 속해 있으며
청허와 빙허의 두 누각이 있는 경치 좋은 곳으로
옛날 심정보 목사가 있던 고을이다.
숙종대왕께서 지으신 시와 현판은
그간 화재를 이었는데
무인년, 고을을 지키던 신하가 중건하였음을
영조대왕께서 들으시고
원필原筆을 찾아 손수 쓰시고
서문을 지으시어 근신에게 명하여 달게 하니
한 누각이 이루어지고 훼손되는데 따라
무겁고 가벼움이 있는데 아니라
좋은 글과 글씨가 황홀하기만 하니
이 루는 이것으로 빛나고
그 고을의 산천 또한 이 루로 인해 빛나니
이 누각이 이 고을의 자랑이 아니겠는가
기와를 잇고 수리하는 일은 가히 힘쓸 줄 믿으니
공경해서 시를 짓고 대략을 적어
그 곁에 달게 하노라
敬 次 酒泉縣 樓所 奉序
敬 공경 경
次 버금 차, 나아가지 못할 차 . 잇다. 이어짐.
酒 술 주
泉 샘 천
縣 고을 현, 달 현
樓 다락 루
所 바 소. 곳,경우,도리
奉 받들 봉
序 차례 서
24. 청허루[淸虛樓]와 빙허루[憑虛樓]
/白頭翁/강원대학교 삼척켐퍼스 토4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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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허루[淸虛樓]와 빙허루[憑虛樓],| ♣┣━━회원회고록━┫
白頭翁 | 2009.03.29. 08:07
자연을 즐기고, 사랑하는 우리네 조상들은 옛부터 아름다운 자연을 즐기면서 경치가 좋은 곳에는 으례이 정자가 아니면 이층으로 된 누각과 주위를 돌아볼 수 있는 곳에는 대라고 하는 이름으로 누, 정, 대가 자리를 하게 되는 모습으로 누와 정, 그리고 대는 옛부터 우리조상들이 자연을 즐기고, 풍류를 알게 하는 조상들의 유물이고, 유적이다.
송강 정철 선생이 강원도 관칠사를 역임하고, 관동팔백리의 주요 명소를 돌아보고, 이름다운 경치를 읊게 되는 관동별곡도 동해안의 아름다운 경치를 보고, 이름난 여덟곳을 팔경으로 정하게 되는 사실이 이를 잘 말해주고 있다.
관동팔경은 동해안의 이름난 여덟 곳으로서 이를 하루에 한곳씩 돌아보기에 적당한 곳으로서 백여리 마다 한곳씩 정하게 되고, 이름도 누가 아니면 대가 되고 정이 되는 실정으로 북쪽에서부터 통천의 총석정, 고성의 삼일포, 간성의 청간정, 양양의 낙산사 의상대, 강릉의 경포대, 삼척의 죽서루, 울진의 망양정, 평해의 월송정으로, 절반이나 되는 대부분이 정자로 이루어지게 되는 모습으로 누와 정은 이층으로 된 누각이냐, 아니냐를 두고, 구분을 하게 되지만 현대에 외서는 구분이 모호해지는 모습으로 종래에 붙게 되는 이름으로만 구분이 되는 실정이다.
경포대와 죽서루는 누각으로 이루어지게 되는 구조로 주변의 풍광을 조망할 수 있는 구조로서 누와 대로 이름을 얻게 되고, 정자가 가장 많은 것은 일대의 경치가 좋고, 풍류객들이 많이 찾게 되는 곳이 정자라고 하는 사실을 알게 한다.
우리나라에는 고을마다 동헌에 가까운 곳에 지방의 목민관들이 독서를 하고, 여가를 보내기 위한 곳으로서 봄과 가을에는 시회를 열고, 기생을 불러서 가무음곡을 하던 곳으로서 지금도 전국의 곳곳에는 이름을 알리게 되는 루각이 많이 있으니, 평양의 대동강을 굽어보며 지어진 부벽루, 경복궁안의 군신이 외국사신을 맞이하여 연회를 베풀던 경회루, 창덕궁 경내에 있는 왕실의 휴식공간인 주합루, 남원의 춘양전의 무대로 이도령과 성춘향의 굳은 절개로 장래를 약속한 광한루, 의기 논개가 적장을 둘씩이나 끌어안고, 남강에 몸을 던진 진주의 촉석루,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해 파천을 하고, 잠시 기거를 한 곳으로 알려진 안동의 영호루의 현판은 공민왕의 몇 안 되는 친필이라는 사실로 유명한 안동의 영호루, 아랑의 정조로 알려진 밀양의 영남루는 영남제일루라고 하는 현판을 달고 있는 모습에 이를 한번씩 보게 되는 사람들은 힘 있게 달필로 쓰여진 글씨의 아름다움에 찬사를 하고, 밀양아리랑의 기원이 되었다고 하는 아랑의 정조를 기리게 되는 아랑각에 경의를 표하게 된다.
강원도에서는 춘천의 봉의산 자락에 있는 소양루, 원주에는 감영의 옛터에 선화당과 포정루, 강릉에는 임영관, 삼척에는 동헌인 칠분당의 서편이 되고, 옛 죽죽선녀의 전설을 안고 있는 죽서루가 대표적인 누각으로 지금까지 이름과 함께 유적이 전해지고 있으며, 옛부터 전해오게 되는 이름난 사찰의 정문은 거의 모두가 누각으로 지어지게 되는 구조로 누구든지 부처님이 상주를 하게 되는 도량에 들어가게 되면
먼저 머리를 숙이게 하느라고 누각으로 된 구조에 정문을 누각 밑으로 통하게 하였다는 사실을 알게 하고, 누각을 지나려면 고개를 숙이게 되고, 법당을 바라보면서 합장을 하도록 건축물의 구조를 만들고, 누각의 이름이 있으나 달을 맞이한다고 하는 망월루니, 누각에서 밝은 달을 음미하게 되는 명월루니 하는 이름으로 초하루와 보름에는 부처님에게 불공을 드리게 되는 사실을 은연중에 알게 하고 있다.
동막에 있는 천년고찰인 신흥사에 이르게 되면 학소루라고 하는 이름으로 지어진 누각 밑으로 통하여 정면에 있는 대웅전을 맞이하게 되는 구조로 좌우에는 칼을 찾아야 한다는 삼검당과 부처님의 말을 들어야 한다는 설선당이 있으니 이를 잘 알게 하고 있다,
영월을 두고, 충절의 고장이라고 하는 이름을 낳게 한 역시적인 사실은 어린 단종이 숙부인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찬탈당하고, 폐위된 노산군이 쳥령포에 위리안치되고, 최후를 영월에서 마쳐야 하는 실정으로 충신은 불사이군이라고 하는 공맹의 가르침을 실천을 하게 되는 초야에 묻힌 많은 사대부들의 후예가 많이 거주를 하게 되고,이들이 단종을 섬기게 되는 충절을 두고, 영월이 충절의 고장으로 불리게 되었다.
그런데 서울에서 영월로 가게 되는 길목에 주천이라고 하는 지방이 있으니 지금은 영월군 주천면의 소재지로 옛날에는 주천현으로 현감이 다스리던 고을이었으니 관아가 있고,빙 허루와 청허루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하고, 없어진 빙허루는 얼마 전에 지역의 국회의원의 협조로 복원이 되었으나 청허루는 아직 복원이 되지 못하고, 기록으로만 전해지고 있다.
그런데 주천이라고 하는 자명이 붙게 된 재미있는 전설로 옛날에 샘에서 술이 나온다고 하여 사대부인 양반이 가면 맑은 술인 청주가 나오고, 상민이 가게 되면 탁주라고 하는 막걸리가 나오는 샘이 있었다 하여 술이 나오는 샘이라고 하여 주천이라는 지명이 생겼다고 한다.
주천에는 주변의 산과 강이 조화를 이루는 곳으로서 수십년이나 자란 낙엽송의 숲에는 그림같은 정자가 누워있으니 빙허루로서 정자가 지어진 망산 정상에는 이층으로 된 누각에 숙종과 영조, 정조대왕의 어제시가 남아있으니 주천은 옛부터 조정에 알려진 유서 깊은 고을임을 알게 한다.
주천을 우리말로 하게 되면 술샘이라는 뜻으로 조선조 중엽 1530년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술이 샘솟아 니왔다는 주천석에서 그 지명이 유래되었다고 한다.
이곳은 고구려시대부터 주천현으로 부르게 되었는데, 옛날에는 신기하게도 망산의 아래 바위틈에서 솟아나는 샘물이 양반이 와서 물을 뜨면 약주가 나오고, 천민이 오면 탁주가 나왔다고 한다.
전설에 의하면 조선시대 한 천민이 양반 복장으로 가장을 하고, 약주가 나오기를 기다렸으나 기다리던 약주는 나오지 읺고, 평소와 같이 탁주가 나오자 화가 난 천민이 샘을 부순 다음부터는 맑고 찬 샘물이 나오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방허루가 복원이 된 망산은 해발 364m의 얕은 산으로 주천면 남쪽 강가에 있다.
망산 밑에는 옛부터 주천을 빛낸 인물들의 선덕비가 있는 비석거리가 있는데 이 비석을 끼고 내려가면 예전에는 별모양의 커다란 암반이 있고, 그 암반의 틈에서 샘이 솟았다고 한다. 주천이라는 지명의 유래가 된 역사적 장소라 하기에는 초라하고, 너무 소흘히 관리되고 있어 안타까운 곳이다.
박물관이 많은 고장으로 알려진 영월에는 여러가지 박믈관이 속속 문을 열게 되고, 주천에 술샘박물관이 올해에 착공을 하게 된다고 하는 데는 술이 나온다고 하는 주천과 무관하지 않음을 알게 한다.
술샘박물관에는 전통주 생산지[더덕주,복분자주,머루주]로서 지역의 전통과 특색에 맞는 박물관 건립의 필요성에 따라 적절한 착안이라는 생각을 하게 한다.
이미 영월은 국내에서는 흔하지 않는 박물관의 고을로 자리매김한 상태라 술샘박물관이 또 하나의 박물관 명소가 되리라는 생각을 하게 한다.
주천의 명물 섶다리는 겨울을 이기고, 차갑고 투명한 강물위에 다정한 그림으로 나그네를 맞이하기에 바쁘다.
이름도 알 수 없는 물고기들이 봄이 왔음을 알리기라고 하듯이 섶다리의 다리사이를 오가며, 춘심이 발동하여 짝을 찾기에 바쁘다.
주위에는 수령 수십년을 자랑하는 낙엽송과 잣나무들이 서로 아름다움을 자랑이라도 하듯이 낙엽송은 푸른 새싹을 틔우기 바쁘고, 혹독한 겨울 추위를 이긴 잣나무와 소나무는 만고상청하는 모습으로 매죽당의 시조에 등장을 하게 되는 독야청청으로 푸르름을 잊지 않고 있다.
망산 정상에는 빙허루라고 하는 아담한 2층 누각으로 정면3칸 측면 두 칸의 전형적인 정자의 모습으로 네 귀퉁이는 하늘을 향해서 날아갈 듯한 모습으로 유서 깊은 누각임을 알게 한다.
원래의 누각이 자리한 곳은 주천현의 객사 서족에 있었다고 하나, 지금의 누각은 1986년도에 국회의원 심모의원과 안모군수에 의해 복원이 된 것으로 빙허루재건기에 소상하게 기록이 되었으니 후대의 사람들에게는 소중한 문화유산이 될 것이다.
빙허루와 청허루가 강을 사이에 두고, 서로 마주하고 있었으며, 이곳에는 원래 청허루가 있었던 곳으로서 청허루가 아니고 빙허루가 복원이 된 모습에서 아마도 주천에는 빙허루가 먼저 지어지고, 주천의 대표적인 누각으로 빙허루가 지어지고, 청허루는 보조적인 누각으로 뒤를 잇게 되지 읺았나 하는 생각으로 어느 독지가가 청허루를 마져 복원을 했으면 하는게 주민들의 기대라고 한다. 빙허루에는 조정에서 하사를 하게 된 숙종과 영조, 정조의 어제시문과 어필이 있었으니 훼손이 되고, 지금은 복제를 한 게판[偈版]을 붙였다고 한다.
강화도령으로 알려진 철종의 태실지처가 있는데 숲가꾸기로 말끔하게 정비를 한 모습으로 주천의 새로운 명소임을 알게 한다.
주천을 대표할 수 있는 빙허루와 청허루도 완벽하게 복원을 하고, 술이 나왔다고 하는 술샘인 주천도 술이 다시 나오도록 복원을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나, 현재까지의 과학으로는 불가능 하니, 흔적만이라도 알리게 하는 모습으로 복원을 하고, 지금 전국적으로 주천을 알리게 하는 주천의 다하누촌의 한우가 실비에 정통한우임을 알게 하는 다하누의 명성으로 주천은 전국에 알려지게 되는 유명세로 추천을 찾게 되는 국민들은 날로 늘어나고 있으니 언젠가는 빙허루와 청허루가 마주하는 사이에서 다하누촌의 한우맛을 즐기며, 웰빙에 일조를 하게 되는 삶이 영위될 것이다.
충절의 고장 영월에서 조상들의 삶의 발자취를 살피게 되는 많은 박물관을 돌아보고, 주천에서 술이 나오는 샘에서 비록 술은 나오지 않지만 땅소주라고 하는 냉수를 술로 생각하고 주천을 돌아볼 수 있는 게기를 만들어 보는 기회를 만들어 보자.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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