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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 : 2024년 9월 22일(제38주) 오전 11:00
장소 : 인천은혜교회당
본문 : 하박국 3:16-19
제목 : 희망을 노래하는 사람
요즘은 희망을 이야기하기가 어려운 시대입니다. 정치나 경제가 어렵고, 특히 정부와 의학계의 갈등에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고 합니다. ‘희망’은 자신의 삶이나 세계의 사건이나 상황에 대한 긍정적인 결과에 대한 기대를 바탕으로 하는 낙관적인 심리 상태를 말합니다. 그런데 희망이란 실현 시간이 불명확하다는 약점도 갖고 있습니다.
희망은 인류 역사상 많은 문학과 예술의 소재가 되어왔으며 영화 등의 주요 테마이기도 합니다. 고유 한국어로 희망은 바람이며, 동사로서 그것의 정의는 ‘자신 있게 기대하라’와 ‘기대로 욕망을 소중히 하라’를 포함한다고 합니다.
정호승 시인은 ‘인간의 가장 큰 죄악은 희망을 잃는 것이다. 절망이라는 죄는 신도 용서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절망적 상황 속에서도 끝까지 희망을 간직하라고 말했습니다. 희망은 인간을 인간이게 만드는 가장 중요한 특성이라고 합니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판도라 상자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 판도라 상자 이야기는 서양 사람들이 희망에 관해 이야기할 때 자주 인용된다고 합니다. 그리스 신화에 의하면 ‘판도라’는 저 하늘에서 만들어진 최초의 여자입니다. 그 이름 그대로 모든 선물을 다 받아 가지고 있는 아름다움의 극치의 여인입니다. 이 여인이 지상으로 보내져 에피메테우스의 아내가 되었습니다.
판도라의 남편 에피메테우스는 신들에게 받은 상자 하나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신들은 절대로 그 상자를 열지 말라고 당부했습니다. 그런데 판도라는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남편 없는 틈을 타서 상자를 열었습니다. 그 때 상자 속에서 온갖 재앙과 재악이 뛰쳐나와 세상에 퍼지고 상자 속에는 희망만이 남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땅에는 질병, 고통, 슬픔, 전쟁... 이런 것들로 넘쳐나고 희망은 찾아볼래야 찾아 볼 수 없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판도라 상자 이야기는 인간사에 희망을 찾아보기 힘들기에 지어낸 이야기일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은 누구에게나 질병, 가난, 재난, 각종 사고, 전쟁 등 이런 것들 하나하나가 견디기 힘든 고통입니다. 그러나 가장 견디기 힘든 것은 바로 희망을 잃어버린 것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희망이 있다면 다른 것은 다 견딜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희망을 잃어버리고 나면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에게는, 특히 성도들에게는 희망이 중요합니다.
오늘 은혜를 나누려는 하박국서는 유다의 18대왕 여호야김이 통치하고 있을 때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여호야김 왕은 므깃도에서 전사한 부왕 요시야의 뒤를 이어 왕 위에 오른 형 여호아하스가 왕 위에 오른지 3개월 만에 애굽에 잡혀가자 유다의 왕이 되었습니다.
여호야김 왕은 애굽 왕의 환심을 사기 위해 백성들로부터 부당한 세금을 거두어 들였고 노동력을 착취하였습니다. 이러한 학정에 괴로워하던 백성들의 편에 서서 하박국 선지자는 하나님께 탄원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역사적 상황에 비추어 볼 때 하박국서는 악한 갈대아인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기록함으로써 유다의 신실한 백성들을 위로하며 희망을 주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의인에게는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의로우심 및 믿음의 필요성을 가르쳐주는 동시에 의인은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는 희망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오늘은 봉독한 말씀을 가지고 “희망을 노래하는 사람”이라는 제목으로 하나님 말씀을 증거하겠습니다.
1. 희망이란 무엇인가?
우리나라의 유명한 산악인 엄홍길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분이 쓴 “오직 희망만을 말하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 책의 겉표지에 보면 [희망 없이 우리는 단 2초도 살 수 없다. 1프로의 희망만으로도 분명 99프로의 절망을 이길 수 있다. 확신하라. 오직 희망이다. 그래서 살아라. 이겨내라]는 글이 있습니다.
책의 내용 중에 ‘99%의 절망을 이기는 힘’이라는 글이 있습니다. 내용 중에 이런 글이 있습니다. [작은 불빛일수록 어두운 곳에서 더 빛을 발한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캄캄한 시골 길을 걷다가 좁쌀만 한 크기의 반딧불이를 본 적이 있다. 그때 문득 스쳐지나간 생각이 있다. ‘1프로의 빛이 99프로의 어둠을 밝히는 구나.’
참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장애를 가진 어린이들과 함께 백두산에도 올라보고 암에 걸린 환자들과 병을 이겨내자며 암벽을 타기도 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은 모두 공통점이 있다. 자신의 아픔과 싸워 이겨내려고 하는 사람일수록 그 모습이 한없이 밝았다. 그리고 긍정적이었다. 비관하거나 탐 탓을 한다든가 세상을 향해 욕을 하지도 않았다. 그들은 정상적인 사람들과 달리 너무도 많은 아픔과 절망을 안고 살아간다. 그러나 절망을 말하지 않는다. 의학적으로 99프로로 살 가망성이 없는 사람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프로의 삶을 향한 희망을 보며 자신의 어깨에 걸망처럼 얹힌 무거운 절망, 그리고 아픔과 싸워 이겨 내고 있었다.
어두운 자신의 마음을 1프로의 희망으로 비추고 있는 모습이 너무나 아름다워 보였다. 지구는 그런 사람들로 인해 움직이는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기적은 그런 이들 덕분에 일어나는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도 해 보았다.
50프로 이상의 희망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절망하는 사람이 있다. 함께 산에 올라보면 그 사람의 속내를 조금은 알 수 있게 된다. 산 중턱쯤 올라가다 보면 가끔 나에게 이렇게 묻는 사람들이 있다. “엄 대장님, 정상까지 얼마나 남았어요?” 내가 대답해 주면 그들의 반응은 두 가지로 나뉜다. “아이고 아직도 반이나 더 올라가야 하는구나” “야 벌써 반이나 올라왔네. 이제 올라온 길을 다시 오른다고 생각하고 오르면 되겠구나.”
그 사람들 속에서 나는 나를 향해 묻는다. 그리고 지금 무엇인가를 향해 도전하는 사람들에게 자신은 어떤 유형의 사람인지 자문해 보라고 권한다.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이지 자신이 절반 이상의 희망을 가졌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신체가 건강하기만 해도 이미 90프로를 가진 것이나 다름없는데도 말이다. 우리가 삶을 살아가며 실패한 부분은 전체 삶의 10프로에 불과하다. 힘들고 아픈 것은 그 이하일 수도 있다. 몸과 마음에 부정적인 어둠을 쌓지 말고 긍정의 불씨를 밝혀야 한다.
지금 우리 앞길이 한 걸음도 내딛을 수 없는 벼랑 끝인가? 더 이상 길이 없는가? 그렇지 않다. 길이 끝난 곳에 다시 다른 길을 찾고 만들어 가는 사람들이 있다. 도전 정신만 있다면 길은 반드시 생겨나는 것이다....]
오늘 대한민국의 현실, 우리의 현실은 어떤가요? 희망적인가요? 사실은 암담합니다. 특히 경제적 측면이 그렇습니다. 최악의 내수침체, 대출 문제 등 앞을 내다보기 힘든 악재들이 겹치면서 정말 힘겨운 시기를 보내고 있습니다. 거리에는 청년 실업자가 넘쳐나고 있고, 극심한 경제난 속에 개인 창업자들이 1년을 버티기 어렵다고 합니다.
이런 상황인데도 정치계는 끝없는 갈등과 대립 속에 마치 식물인간처럼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깊은 수렁에 빠져있습니다.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 정치는 북한 핵문제로 한 치도 앞으로 나가지 못한 채 공전만 거듭하고 있습니다. 사회는 노사 갈등과 각 이익단체들의 제 몫 챙기기에 볼모로 잡혀 생산적인 상생의 분위기를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정부와 의학계의 갈등은 환자들을 죽어가게 만들고 있습니다. 교회도 코로나 이후 영적 침체에 빠져서 허우적거리고 있습니다.
어디 희망을 찾아볼 구석이 한 곳도 없어 보입니다. 아무리 둘러 봐도 염려하는 소리만 들리고, 한숨소리만 땅이 꺼져라 메아리치고 있습니다. 그래도 교회와 성도들은 희망을 이야기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은 다 절망의 노래를 불러도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희망의 노래를 불러야 합니다.
본문 17-18절 말씀은 오늘 우리들보다 훨씬 더 어려운 처지에 있던 유다 백성들을 향하여 하박국 선지자가 부른 노래의 한 구절입니다. “17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18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우리들도 그렇게 할 수 있을까요?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면 무화과 열매를 딸 수가 없습니다. 무화과를 먹을 수 없습니다. 우리들도 무화과를 먹어보아서 알겠지만 그 열매가 얼마나 달고 맛있습니까? 영양가도 최고입니다.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면 포도를 딸 수가 없습니다. 포도주를 담그지 못합니다. 포도주가 없다는 것은 기쁨이 사라진다는 말입니다.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면 감람유를 짤 수가 없습니다. 감람유는 오메가 쓰리가 많은 아주 좋은 식용유요 약재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런데 감람나무 열매가 없습니다. 좋은 것이, 좋은 약이 없어졌다는 것입니다. 밭에 먹을 것이 없습니다. 밭에서 나는 곡식들과 채소들이 없으면 먹을 것이 굶어죽습니다.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습니다. 양과 소는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로 사용될 뿐만 아니라 사람이 먹을 수 있는 우유의 생산자요 고기입니다. 이것이 없으면 영양실조가 됩니다.
그런데도 하박국 선지자는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가능한 일일까요? 제가 볼 때는 불가능합니다.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하박국 선지자는 세상에 희망을 두지 않고 하나님께 희망을 두었기 때문입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이것은 자연 재해로 인한 자연현상입니다. 그런데도 하박국 선지자는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고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고 하였습니다. 왜요? 어떻게요? 하나님께서 이런 자연 재해의 현상을 뒤집어 없을 수 있는 분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하박국 선지자가 선포한 이 말씀의 정치적 배경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유다가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로부터 세 번에 걸쳐 침략을 당합니다. 주전 605년, 주전 597년, 주전 586년입니다. 마지막 주전 586년에 바벨론에게 완전히 멸망을 당하였습니다. 그때 왕과 왕족과 귀족들이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그리고 70년의 종살이를 하고서 3번에 걸쳐 포로 귀환이 이루어집니다. 주전 539년 스룹바벨의 인도, 458년 에스라의 인도, 444년 느헤미야의 인도로 귀환이 이루어집니다. 그때 바벨론을 멸망시킨 것이 바사 왕 고레스입니다.
에스라 1:1-4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1 바사 왕 고레스 원년에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을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게 하시려고 바사 왕 고레스의 마음을 감동시키시매 그가 온 나라에 공포도 하고 조서로 내려 이르되, 2 바사 왕 고레스는 말하노니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세상 모든 나라를 내게 주셨고 나에게 명령하사 유다 예루살렘에 성전을 건축하라 하셨나니, 3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참 신이시라 너희 중에 그의 백성 된 자는 다 유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성전을 건축하라 그는 예루살렘에 계신 하나님이시라, 4 그 남아 있는 백성이 어느 곳에 머물러 살든지 그곳 사람들은 마땅히 은과 금과 그 밖의 물건과 짐승으로 도와주고 그 외에도 예루살렘에 세울 하나님의 선전을 위하여 예물을 기쁘게 드릴지니라 하였더라.”
유다 백성들이 바벨론 포로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해야 할 일은 하나님 성전을 건축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이 성전 건축에 방해꾼들이 많아서 중단하게 됩니다. 그리고 십 수 년이 지나는 시점에 하나님께서 학개 선지자를 통하여 여호와의 성전을 건축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지금 유다와 백성들의 입장에서 볼 때 성전을 건축할 만한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그동안 성전 건축이 중단된 동안에 백성들을 오직 지가 먹고 사는 일에만 집중하고 자기 집 짓기에만 전념하였습니다. 그래서 학개 선지자가 이렇게 선포하였습니다. “3 여호와의 말씀이 선지자 학개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4 이 성전이 황폐하였거늘 너희가 이때에 판벽한 집에 거주하는 것이 옳으냐, 5 그러므로 이제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너희는 너희의 행위를 살필지니라”(학 1:3-5). 성전을 건축하라는 선지자의 말을 듣고 백성들은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당시의 경제적 상황이 너무나 힘들었기 때문입니다.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합니다.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습니다. 감람나무 소출이 없고, 밭에 먹을 것이 없습니다. 우리와 외양간에 양과 소가 없습니다. 농부에게 절망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한숨과 절망의 노래를 불러야 할 상황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박국 선지자는 희망의 노래를 부르고 있습니다. 왜요? 세상 것이 다 없어져도, 아무 소득이 없어도, 하나님은 그것을 바꾸실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하박국 선지자의 희망이었습니다.
고린도전서 13:13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 여기서 성도들에게 반드시 있어야 할 것 세 가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첫째가 믿음이고, 둘째가 소망이고, 셋째가 사랑입니다.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하나로 묶으면 바로 희망입니다. 여기서 더 주목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 세 가지, 즉 희망이 ‘항상’ 이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언제나, 어떤 상황 속에서도, 이 세 가지를 유지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도 희망이 있으면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빛을 잃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희망이 있으면 믿을 수 없는 상황 속에서도 믿을 수 있고, 소망이 없는 상황 속에서도 소망이 있고, 사랑이 없는 상황 속에서도 사랑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희망입니다.
그렇습니다. 성도들은 희망을 가질 수 없는 상황 속에서도 희망을 지켜가는 사람들입니다. 희망을 말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도 희망을 말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지금 본문 속에 하박국 선지자가 그렇습니다. 과수원에 과일의 열매가 달리지 않아 소출할 수 없는 상황인데도 기쁨의 노래를 부르겠다는 것입니다. 우리와 외양간에 동물이 없어도 기쁨의 노래를 부르겠다는 것입니다. 왜요? 희망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없는 것도 있게 만드실 수 있는 분이라는 것을 알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희망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이 말씀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일까요? 없고, 없고, 없고, 없어도 희망의 끈을 놓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도 희망을 노래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하박국 선지자와 같이 항상 희망이 있어야 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첫째, 희망을 노래하려면 희망이 습관이 되어야 한다.
아버지와 아들이 사막을 여행하게 되었습니다. 태양이 이글거리며 타오르는 사막은 불덩어리같이 뜨거웠고 갈 길은 멀었습니다. 아들이 아버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버지, 목이 마르고 지쳐서 죽을 지경입니다.” 그러자 아버지는 아들을 격려했습니다. “얘야, 그렇지만 끝까지 가보아야 하지 않겠니? 얼마 안 가서 사람이 사는 마을을 만날 수 있을 거야.”
아버지와 아들은 계속해서 걸었습니다. 타고 가던 낙타도 허덕이며 곧 쓰러질 것 같았습니다. 그때 두 사람은 무덤 하나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아들이 말했습니다. “저것 보세요! 저 사람도 우리처럼 지쳐서 마침내 죽고 말았어요!” 그러자 아버지가 말했습니다. “아니란다. 무덤이 여기에 있다는 것은 곧 희망이 있다는 것이란다. 여기서 머지않은 곳에 마을이 있을 것이다. 사람이 없는 곳에는 무덤도 없는 거니까.” 아버지와 아들은 가까운 곳에서 마을을 발견하여 쉬었다가 여행을 계속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성도는 가장 어둡고 어렵고 힘들 상황 속에서도 희망을 노래할 수 있어야 합니다. 어떤 상황 속에서도 습관처럼 희망을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성도는 빛의 자녀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늘 빛을 좋아하고, 밝은 곳을 보고, 빛을 노래해야 합니다. 늘 긍정적이고 적극적 사고를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하나의 습관이 되어야 합니다. 밝은 곳에서는 물론 밝은 곳을 봅니다. 그러나 어두운 곳에서도 희망을 잡으면 빛을 볼 수 있게 됩니다. 이런 희망을 이야기 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 희망을 노래하려면 희망을 찾아내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제인 구달’이라는 분이 쓴 ‘희망의 책’이 있습니다. 제인 구달은 동물행동학의 세계적 권위자입니다. 그러나 생물학 분야보다도 현대 사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진지한 노력으로 다양한 찬사를 받고 있습니다. “영웅 없는 시대의 진정한 영웅”,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열 명의 여성 중 한 명” 등 높이 평가를 받는 분입니다.
구달은 ‘희망의 책’에서 환경 파괴, 불평등, 대량학살, 전쟁, 테러, 천재지변... 등의 절망적 상황 속에서도 우리는 여전히 희망을 가질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자기가 나름대로 연구한 내용을 기초로 우리가 아직도 희망을 이야기할 수 있는 이유를 네 가지로 정리해 놓고 있습니다. “첫째, 인간의 명석한 두뇌가 있는 한, 우리에게는 희망이 있다. 둘째, 적절한 도움을 주면 되살아나는 자연의 놀라운 회복력 때문에 희망이 있다. 셋째, 전 세계 젊은이들의 새로운 시각과 열정, 그리고 에너지 때문에 희망이 있다. 그리고 넷째, 절망적 상황을 딛고 성공한 사람들이 있어서 희망이 있다.”
물론 저는 그 이유들에 공감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이 책을 읽으면서 이분의 희망을 찾아내는 능력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는 성도들은 어느 시대를 살던지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도 여명의 빛줄기를 찾아낼 수 있어야 합니다. 얼키고설켜 있는 실타래 속에서도 실마리를 찾을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가장 어렵고 힘들었던 하박국 선지자가 희망을 노래했듯이 이 시대를 하나님의 사명으로 사는 우리들도 희망을 노래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주님 안에서 희망을 이야기하라
본문 18절에 하박국 선지자는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라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하박국 선지자가 절망적 상황 속에서도 희망을 말할 수 있었던 이유를 말하고 있습니다. 바로 ‘여호와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말미암아’입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환경이나 조건이 좋아져서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지만 여호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때문에 즐거워하고 기뻐한다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성도들이 희망을 말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주님 때문입니다. 사실 세상을 바라보면 믿음으로 살아야 할 성도들은 실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니 절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의 불의하고 불공정하기 때문입니다. 온갖 죄를 짓고서도 국회의원이 되는 것이 대한민국의 현실입니다. 300명의 국회의원 중 재판을 받아야 할 피의자들이 35명이라고 합니다. 참 기가 막힙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갈릴리 바다 위를 걷던 베드로가 불어오는 바람과 출렁이는 물결을 바라보는 순간 두려움에 휩싸이게 되자 물에 빠지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처럼 세상은 성도들에게도 절망을 가져다 줄 뿐입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세상 바라보지 않고 주님을 바라보았을 때는 물 위를 걸을 수 있었습니다. 그것처럼 주님은 오늘을 사는 성도들에게도 희망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다윗이 골리앗 앞에 섰을 때 다윗이 자신을 바라봤다면 그렇게 용감하게 골리앗 앞으로 달려 나가지 못했을 것입니다. 자기가 그렇게 초라하고 작아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처럼 우리 자신도 우리에게 절망을 가져다 줄 뿐입니다. 그런데 다윗이 여호와 하나님을 바라보았을 때 그는 용감하게 달려 나갈 수 있었습니다. 골리앗 보다 훨씬 큰 능력의 주님을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그것처럼 주님은 오늘 말씀을 듣는 우리들에게 희망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예레미야 선지자는 예레미야 14:8에서 하나님을 이스라엘의 희망이라고 불렀습니다. “이스라엘의 소망시이요 고난당한 구원자시여...” 시편 39:7은 “주여 이제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라고 노래했습니다. 146:5에서는 “야곱의 하나님을 자기의 도움으로 삼으며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 라고 노래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성도의 희망은 하나님 안에 있습니다. 그리고 성도가 주님 안에 있을 때만 진정한 희망을 노래할 수 있습니다. 힘들고 어려운 상황이 닥쳐온다고 해도 성도는 주님 안에서 희망을 노래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의 희망이 주님께 있다고 할 때 희망의 근거는 무엇일까요?
첫째,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
로마서 4:17 이하의 말씀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17 기록된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가 믿은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시는 이시니라, 18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아브라함이 도무지 희망을 가질 수 없는 상황 가운데서도 희망을 잃지 않았다는 말씀입니다. 나이 100세에 자기 몸이 거의 죽은 자의 몸과 같은 상황이고 아내도 그 자궁이나 여성으로서의 기능이 다 죽은 것 같은 상황인데 아들을 주실 것을 희망했다는 말씀입니다. 어떻게 희망을 가질 수 없는 상황 가운데서도 희망을 버리지 않을 수 있었습니까?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네 후손이 이 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즉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었기 때문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성도가 희망을 노래할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도가 진정한 희망을 회복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에로 돌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 속에서만 우리의 희망이 더욱 굳건해 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희망을 잃어버리셨습니까? 하나님의 말씀 앞으로 나오십시오. 희망이 흔들립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굳게 붙드십시오. 이런 성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 기도
역대하 20장을 보면 남왕국 여호사밧 왕 때 모압과 암몬이 공격해 옵니다. 당시 유다로서는 저들을 상대할 형편이 아니었습니다. 절망적인 상황입니다. 그때 여호사밧 왕이 먼저 여호와께 기도하면서 백성들에게 금식하며 기도하라고 명을 내렸습니다. 그 명을 따라 유다 백성들이 한 자리에 모여 여호사밧 왕과 함께 여호와께 기도를 드립니다.
12절을 보면 여호사밧 왕이 백성들 앞에서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우리를 치러 오는 이 큰 무리를 우리가 대적할 능력이 없고 어떻게 할 줄도 알지 못하옵고 오직 주만 바라보나이다.” 하나님께서 이 기도를 들으시고 15절을 보면 회중 가운데 레위 사람 아하시엘을 통해서 이렇게 응답하셨습니다. “이 큰 무리로 인하여 두려워하거나 놀라지 말라 이 전쟁이 너희에게 속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라...”
여호사밧 왕이 몸을 굽혀 그 말씀을 받고 경배하고 하나님께 크게 찬양을 드렸습니다. 저들이 절망적 상황 가운데서 희망을 찾은 것입니다. 기도할 때 주님께로부터 임하는 희망을 찾게 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희망을 노래할 수 있는 길은 바로 기도입니다. 우리가 절망 중에 기도할 때 주님께서 기도 안에서 우리에게 새로운 희망을 주십니다. 절망적 상황이 옵니까? 기도하십시오. 기도 안에서 새로운 희망을 찾을 수 있습니다. 한 가닥 희망마저 희미해져갑니까? 기도의 자리로 나오십시오. 주님께서 기도 자리에서 우리들을 만나주시고 그 만남을 통해서 희망을 노래하게 만드실 것입니다. 이 하나님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독교는 희망의 종교입니다. 끝난 것 같은데 끝나지 않고 다시 시작합니다. 심지어 죽었다가도 다시 살아나는 것이 기독교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믿는 부활신앙입니다. 열왕기상에 보면 아람 제국이 이스라엘을 침략했습니다. 사마리아 성을 포위하고 장기전에 들어갔습니다. 성 안에 있던 백성들에게 심각한 식량난이 찾아왔습니다. 얼마나 배가 고팠던지 자기 자녀들을 삶아 먹었습니다. 이런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엘리사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희망을 선포하였습니다. 믿음이 말하는 희망과 소망은 긍정적인 사고방식이 아닙니다. 기독교의 희망은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합니다.
하나님은 낮은 자들을 사용하여 일하십니다. 나병에 걸린 환자 4명이 있었습니다. 이들을 자기 민족에게도 버림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들을 사용하셨습니다. 이들의 발자국 소리가 아람 군대에게 큰 군대의 소리로 들렸습니다. 아람 군대가 혼비백산하여 모든 것을 놓고 도망쳤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나병 환자 4명이 풍요를 누렸습니다. 그러나 자기들만 행복해 하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이 아름다운 소식, 복음을 왕궁에 전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 선지자의 말대로 이스라엘은 다시 풍요가 왔습니다. 한 순간에 물가가 안정되고 서민 경제가 회복되었습니다. 성도들은 대한민국의 이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절망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이렇게 축복하시리라고 믿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희망을 말하는 자와 절망을 말하는 자가 갈라집니다. 엘리사 선지자는 희망을 선언하였습니다. 그러나 한 장관을 절망을 선언하였습니다. 장관의 말대로 장관은 백성들의 부요에 동참하지 못하고 밟혀 죽고 말았습니다. 열왕기하 7:1-2절 “1 엘리사가 이르되... 내일 이맘때에 사마라이 성문에 고운 밀가루 한 스아를 한 세겔로 매매하고 보리 두 스아를 한 세겔로 매매하리라... 그 때에 한 장관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하늘에 창을 내신들 어찌 이린 일이 있으리요.”
여러분은 무엇을 말하겠습니까? 비관입니까? 낙관입니까? 절망입니까? 희망입니까? 불행입니까? 행복입니까? 가난입니까? 부요입니까? 우리의 선택에 달려있습니다. 우리는 선택하고 하나님은 일하십니다. 희망을 이야기 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주 안에서 희망을 찾게 되면 그 희망은 열악한 우리의 현실을 축복으로 바꿉니다. 그래서 오늘도 우리가 주 안에서 희망을 이야기해야 하는 것입니다. 어렵더라도 희망을 이야기하는 믿음의 성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희망의 사람이 하는 일
희망이 있는 사람은 현실이 어떻든 늘 감사하며 삽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언제 감사를 해야 할까요?
첫째, 늘 감사해야 한다.
좋은 일이 생겼을 때 크게 입 벌려 감사해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범사에 감사해야 합니다. 흐린 날도 맑은 날도 감사해야 합니다. 더 나아가 없을지라도, 힘들지라도 아플지라도 감사해야 합니다. 다른 모든 조건을 볼 때 감사할 것이 없을지라도 구원의 하나님을 바라보며 감사해야 합니다.
어떤 아주머니의 남편이 매일 밤늦도록 술을 마시고 들어와 술주정을 합니다. 하루는 그 부인이 술에 골아 떨어져 자는 남편 옆에 앉아서 신세타령을 하다 생각해 보니 ‘범사에 감사하라’는 목사님 설교가 문득 생각이 나서 ‘하나님 아무리해도 감사할 것은 없지만 좌우지간 감사하고 기쁩니다’하고 기도했습니다. 그랬더니 정말 성령께서 뜨겁게 역사하시면서 구체적으로 감사할 마음이 떠올랐습니다.
‘그래도 과부보다 낫지 않은가?, 술 취해도 길거리에 누어 얼어 죽지 않고 기어들어오니 감사합니다, 그래도 주일이면 교회 가라며 집 봐주니 감사, 자기는 안가면서 미안하니까 헌금도 주고, 이만하면 고맙지 않은가’ 그래서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게 되었답니다. 그때 남편이 목이 타서 물 찾느라고 눈을 떴습니다. 그런데 울고 있어야 할 부인의 얼굴에 웃음이 가득하지 뭡니까?
남편이 의아하게 생각하며 그 이유를 물으니 부인은 구체적으로 고맙고 감사한 것이 많아 기도하고 있었다며 감사내용을 얘기해 주었답니다. 그러자 남편이 빙그레 웃으면서 ‘나도 내일부터 교회에 나가 줄게’ 하더랍니다.
하박국의 노래, 기도, 감사를 보세요. 포도, 무화과, 감람류는 이스라엘의 특산물입니다. 또한 목축을 하는 이스라엘에게 있어서는 우양은 절대적인 삶의 터전입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이 흉년일지라도, 없을지라도 하나님으로 인해 감사하겠다고 외쳤습니다. 이것이 능력이고 축복입니다. 우리는 어느 때 감사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무엇을 감사해야 할까요?
둘째, 구원의 하나님을 감사해야 한다.
가진 것 없으나 나는 하나님을 인하여 즐거워하고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 그분이 나의 하나님이라는 그 자체로 인하여 감사하며 기뻐해야 할 것입니다. 뭘 받아야 감사하고 뭘 누려야 하는 것이 아니라 아무것도 받은 것, 얻은 것 없으나 하나님이 함께 하며 모든 것을 가진 것임을 믿고 기뻐하며 감사할 수 있는 영적 수준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기뻐하십니다. 어떤 모습으로 감사해야 할까요?
셋째, 감사는 뜨겁게 해야 한다.
생일을 당했다고, 회갑을 당했다고, 집을 샀다고, 결혼을 했다고 수십 만 원씩, 혹은 수백 만 원씩 들여 잔치를 하고, 음식 먹기도 하고, 선물을 주고받으면서 정작 하나님 앞에는 째째한 사람들을 많이 봅니다.
그런 감사로는 하나님을 감동시킬 수 없습니다. 정말 깜짝 놀랄만한 감사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러려면 우리의 마음과 정성, 그리고 우리의 신앙고백이 듬뿍 담긴 그런 감사가 드려져야 합니다.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희망을 노래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박국이 마음의 의문과 원망에도 불구하고 희망의 노래를 부를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오는 축복을 발견하였기 때문입니다. 어려운 현실 앞에 낙심하지 말고 하나님을 바라봄으로 희망을 노래할 수 있는 성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