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랑민의 역사 속에 나타난 언약의 백성'(정영근 편저) -
바벨론의 예루살렘 함락과 남방유다왕국의 최후의 멸망
1. 남방유다의 강대국 애급과 바벨론 침략
1) 여호아하스(Joahaz)의 폐위와 여호야김(Jehoiakim)의 악정은 유다를 멸망으로 이끌었다.
요시야왕이 무깃도에서 전사한 후 유다백성들은 요시야왕의 세 아들중 둘째 아들인 23세의 여호아하스를 왕으로 삼았으나(609 BC) 므깃도에서
요시야 왕을 죽인 애급의 느고는 북방에서 전쟁을 마치고 돌아오다가 여호아하스가 왕이 된지 3개월만에 그를 폐위시키고 그의 형인 25세의 엘
리야김(Eliakim)으로 왕을 삼게 하고 그 이름을 여호야김(Jehoiakim)으로 고처 불렀다. 3개월만에 폐위된 여호아하스는 애급으로 포로되어 가서
거기서 죽었다.(대하36:2-5, 왕하 23:34). 그의 죽음은 이미 예레미아 선지자로 예언한 대로였다.(렘 22:11)
애당초 유다백성들이 형인 엘리야김(여호야김)을 구태어 놔두고 그 동생인 여호아하스로 왕을 삼은 것은 동생이 더 유망할 뿐더러 형에게는 그
만한 결격사유가 있었다고 보아지는데 이 일로 형이 분개하여 애급의 느고에게 밀고하여 당시 왕이었던 동생 여호아하스를 제거했을 것이라는
학자들의 설이 인정되어지고 있다.
어떻든 여호야김은 왕이 된 후 애급의 조공을 위해 백성들에게 많은 것을 늑징했고(왕하 23:35 참조), 큰 왕궁을 짖는다는 명목으로 백성들을 괴
롭히고 압박하여 무죄한 피를 많이 흘렸다.(렘 23:13-19, 왕하 24:4 참조) 그는 우리야 선지자를 죽였고(렘 26:20-23) 예레미야 선지자도 죽이려고
시도했다.(렘 26:23, 36:26)
예레미야는 여호야김의 죄를 신란하게 견책했다.(렘 22:18). 하박국도 탄식했는데 이것이 바로 여호야김 통치시대를 두고 한 말이었다.(합 1:3-4).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갈대아사람을 이르켰다'(합 1:6)고 말했다.특별히 그는 예레미야가 받은 계시의 두루마리를 빼았아 불에 던져 태우는 등의
끔직하고 말못할 악정을 감행했다.(렘 36:23 차조)
2) 애급과 바벨론의 무깃도전쟁 상황 사이에서 여호야김은 선지자의 기별을 무시했다.
무깃도의 전쟁에서 유다의 요시야왕을 이긴 애급의 느고는 하란을 정복하지는 못했으나 수리야지역과 발레스틴을 완전히 점령했었다. 그후 바
벨론왕 나포폴리살은 병석에 있었지만 힘을 얻고 있던 그이 아들 느브갓네살(Nebuchanezzar 605-562 BC)이 수리아 북부지방 갈그미스
(Carchemish)에서 앗수르의 동맹국인 애급의 바로인 느고와 싸워 그를 처참하게 격퇴시켰는데 이때 애급군은 전멸되다시피 했다.
'바벨론왕이 애급 하수에서부터 유브라데 하수까지 애급왕에게 ㅅ고한 땅을 다 취하였음이라.'(왕하 24:7)
이 전투의 결과로 북방 이스라엘을 멸망시켰던(722 BC) 앗수르는 역사에서 영원히 사라지고 애급은 약한 나라로 전락하여 오늘날까지 이르렀다.
한편 강세가 된 느브갓네살은 점령지들에서 조공을 받아들이게 되었는데 유다의 여호야김도 그를 섬겼다.(왕하 24:1) 이렇게 여호야김이 바벨론
을 섬긴지 3년 후 느브갓네살은 아직도 잼재적인 원수로 남아있는 애급의 느고를 치기 위해 애급의 국경까지 진격했다. 그러나 양편이 많은 사상
자를 냈을뿐 느브갓네살도 후퇴하고 말았다.
여호야김은 이 기회를 이용하여 느브갓네살을 배반했다.(왕하 24:1 참조) 이같은 연고는 선지자의 기별을 듣지 않는 연고였다. 이제 이 사실을
긴파한 느브갓네살은 유다 근방에 있는 아람과 모압과 암몬의 부대를 급파하여 여호야김을 치고 또 보강된 군대를 보내 유다를 다스리게 했다.
(왕하 21:2, 레 35:11 참조)
끝내는 바벨론의 주부대가 예루살렘에 진입했으나(598 BC)그때는 어떤 자에 의해서 여호야김은 죽임을 당하고 없었다고 한다. 여호야김은 11년
간 왕위에 있으면서 많은 죄악된 일을 저질렀으며 그의 전책도 애급을 섬기다가 또 바벨론을 섬기는 등 심히 불안정한 처지에 있다가 드디어 비
참한 최후를 맞았던 것이다.(왕하 24:3-4, 렘 22:18 참조)
3) 여호야긴(Jehoiachin)의 바벨론 포로에 뒤이어 시드기야(Zedekiah)의 포로는 유다의 멸망이나 다름 없었다.
여호야긴이 서기전 598년 18세에 왕이 되어 제위 3개월 10일 동안 악을 행하였으나(왕하 24:6), 느브갓네살이 또다시 유다를 친입하였을 때(597
BC) 그와 더불어 그의 어머니와 아내들과 내시와 나라의 유력한 자들 8,000명 이상을 포로로 붙잡혀 갔다.(왕하 24:15 참조) 포로로 붓잡혀갔던
여호야긴은 그후 후한 대접을 받다가 마침내는 감옥에서 해방되었다. 그는 다른 나라에서 잡혀온 어느 왕들 보다 높임을 받아 일평생을 바벨론
왕궁에서 먹으며 일용할 모든 것을 종신토록 공급받았다.(왕하 25:27-30 참조)
이렇게 여호야김이 잡혀간 후 바벨론왕 느브갓네살은 요시야의 셋째 아들이요 여호야긴의 숙부인 맛다니야를 세워 왕으로 삼고 그 이름을
시드기야(597-586 BC)라고 고쳤다.(왕하 24:17 참조) 그러나 역사의 여러 문헌에 의하면 유다인들이 그를 왕으로 인정하지 않았을뿐 아니라 바
벨론에서도 포로로 잡아간 여호야긴을 왕으로 인정하고 시드기야를 섭정왕으로 인정했던 것으로 알 수 있다고 말한다.
2. 예루살렘 함락과 남방유다왕국의 최후 멸망
1) 시드기야의 반 바벨론사상이 급속도로 유다의 멸망을 초래했다.
시드기야가 왜 반 바벨론사상을 갖게 되었을까?
ㄱ. 시드기야는 애급의 원조를 구하여 바벨론을 막아야 한다는 반 바벨론파들의 압력을 받았다. 당시 시드기야의 왕위는 확고하지 못햇을뿐 아
니라 통치자로서 그의 능력도 부족하였다. 그는 바벨론왕의 세움을 입어 왕이 되었으나 반 바벨론적인 관원들과 백성들의 압력으로 불안한 위
치에서 나라를 다스렸다. 그러므로 나라는 더욱 혼란했다. 마침내 반 바벨론파의 압력에 굴복하여 바벨론을 배반하는데 이르게 되었다.
ㄴ. 당시의 이웃나라의 정세가 반 바벨론 사상을 가중시켰다. 당시 에돔과 모압과 암몬과 베니게의 여러 나라들에서는 새로운 반 바벨론 동맹
이 이루어졌고(렘 27:1-3, 겔 21:18-23, 21:8 참조) 유다도 여기에 가담하여 달라는 다른 나라의 사신들이 시드기야를 찾아와 설듯했다.(렘 27:3)
ㄷ. 거짓 선지자들이 나타나서 하나님은 반드시 예루살렘을 지킬 것이요 바벨론으로 잡혀간 동포들은 반드시 돌아올 것이며 바벨론왕 느브갓
네살의 멍에는 2해가 가기 전에 하나님께서 꺾어버리실 것이라고 예언했다.(렘 28:1-12) 그 거짓 선지자들은 '평안하다'라고 외치면서 여호와께
서는 그의 성전을 반드시 지키심다 라고 열심히 호소했다.(렘 7:4 참조)
반면에 시드기야는 하나님에게서 지혜와 능력과 은혜와 기별을 구하지 아니하였다. 그는 하나님의 기별을 전하여 주는 예레미야 선지자의 경
고를 부시할뿐 아니라 오히려 그를 가두기까지 하였다. 그는 결국 반 바벨론파의 그럴듯한 설득에 의존하여 안전처를 찾고 애급의 원조를 의지
하면서 느브갓네살을 배반하였던 것이다.(왕하 24:10 참조)
2) 바벨론의 최후의 친입으로 예루살렘이 함락되었다.
느브갓네살왕은 배반한 유다를 시드기야 9년(588 BC)에 침공했다. 라기스에 있는 유대인의 지휘관에게 보내어진 질그릇 조각 위에 적힌 편지
들은 바벨론 사람들이 성읍을 차례 차례 점령하면서 진군했음을 나타내 준다. 라기스도 점령되어 불에 탔다. 드디어 포위 2년 후(586 BC) 예루
살렘은 함락되었다.
여리고쪽으로 도망하는 시드기야왕을 잡은 바벨론왕 느브갓네살은 극도로 분하여 그의 앞에서 시드시야왕의 아들들을 죽이고 그를 노려보는
시드기야왕의 두 눈 마져 뽑아버린 후 그를 결박하여 바벨론으로 끌어가서 죽는 날까지 옥에 가두었는데 시드기야왕이 죽을 때는 유다의 80명
의 저명인사와 함께 죽임을 당했다.(렘 52:9-11, 왕하 25:6-7)
슬프게도 이때 예루살렘 함락과 더불어 솔로몬 성전은 훼파되고 남은 백성들은 또 한번 바벨론으로 끌려갔고 오직 비천한 자들만이 본토에
남게 되었다.(렘 25:8)
예루살렘이 바벨론군에게 포위되었을 때 그래도 유다의 관원들은 애급의 원병이 자기들을 구원하기 위해 오리라고 믿고 기대했었다. 이때에 예
레미야는 애급의 원병이 오리라고 백성들이 기뻐하고 있었지만 그러나 애급군이 퇴각하여 돌아갈 것이라고 예언했다.(렘 37:7 참조)
예루살렘과 다른 성들이 차례로 함락된 사실을 잘 알려주는 문헌이 남아있는데 그것이 '라기스의 편지'(The Letter OF Lachish)인데 여기에는
당시의 유다의 형편이 얼마나 긴박했으며 궁중의 지도자들은 너무도 지나치게 미래를 희망하면서 멸망되어가는 중에서도 '우리의 손을 약하게
하나이다'라고 한 말이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3) 남방유다왕국이 멸망하다.
바벨론왕 느브갓네살은 유다의 백성들을 포로로 잡아간 다음 그 남은 자들을 다스리기 위하여 그달리아 (Gedaliah, 587 BC)를 세워 총독으로
삼았다.(왕하 25:22 참조) 그는 한때 예레미야를 보호하여 숨겨주었던 아히감의 아들이며(렘 40:5, 26:24 참조) 그의 조부 사반은 요시야왕의 개
혁 당시 서기관으로 있던 사람이었다.(왕하 22:3 참조)
흩어져 있던 유다백성은 그의 총독됨을 인하여 미스바에 모였으며 그때 유다의 총독이 된 그달리아는 조용히 바벨론왕을 섬길 것을 주문했다.
반드시 그래야만 유익할 것을 알렸다.(렘 40:10 참조) 그러나 그의 뜻과 같이 되지 아니했다.
그달리야의 궈면을 들은 무리들 가운데는 그달리아를 바벨론의 협력자요 매국노로 보아 그를 반대했다. 이들은 대개 모압과 암몬과 애돔땅에
망명해 갔던 사람들이 많이 섞여있었는데 그들은 전부가 반 바벨론의 강경한 주의자들이었다.(렘 40:11)
드디어 그들의 두목인 이스마엘은 총독 그달리야를 죽이고 또 그를 따르는 모든 사람들을 숙청하여 모두 함께 미스바에 있는 구덩이에 던져
매웠던 것이다.(렘 41:4-7, 9). 그러나 살아남은 유다 백성들은 그달리야가 죽은 후 바벨론의 보복이 두려워 멀리 애급으로 떠나가게 되었다.(렘
41:8 참조) 그때 애급으로 가는 것을 그렇게도 만류했던 예레미야도 그들에게 끌려가 그가 원하지 않는 그곳에서 생애를 마치게 되었다. 이것이
남방유다의 최후의 역사이다.
이처럼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를 떠난지 약 1500년 후에 그이 후손들은 이제 자유인이 아닌 포로의 신세로 다시 옛 고토인 갈대아 땅 , 바벨론
으로 끌려가게 되었고 , 또한 소수의 일부는 많은 수난을 겪으면서 출애급했던 땅, 애급을 향해 다시 재발로 찾아가게 되었던 것이다. (다음에
계속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