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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선암 산악회 원문보기 글쓴이: pharansan
이땅에도 리지가
있다
강진 만덕산에서 땅끝까지 46Km
5월 5일, 날이 흐린 가운데 일행은 백련사 만경루 앞뜰에서 출발준비를 한다. 김태호(34세·전남악동회), 강동수(26세·순천대산악회), 장애란씨(25세·순천 한울산악회) 등 5명이다. 천기철씨(36세·해남 땅끝산악회)와 순천의 최종이, 목포 김흥규기자는 석문산에서 만나기로 한다. 숲길로 들어서니 온통 동백나무다. 마지막 남은 붉은 동백 몇 송이가 땅 위에 떨어져 있다. 얼마를 가니 쌓인 낙엽의 촉감이 푹신한데 산길 아래로는 불에 탄 나무가 보인다. 산 남쪽 자락에는 고사동마을이 조용하다. 산 모롱이를 도니 바람재 안부에 서너 채의 집이 나타난다. 기도원인 듯하다. 고갯마루에 올라선다. 바람이 거세다. 멀리 북으로 월출산의 암봉이 아련하고 동남으로는 구강포가 푸르다. 뒤로는 만덕산이 성채같다. 10시 30분, 무인통신시설과 헬기장이 있는 261봉에 도착한다. 잠시 휴식을 취한다. 하늘은 짙은 회색으로 낮게 내려앉아있다. 산은 짙푸른 빛을 내품고 있다. 가녀린 가지 하나에 여러 송이의 탐스런 꽃을 피운 철쭉이 한가롭게 흔들린다. 숲속에서 장끼 울음소리가 들린다. 초여름 산하의 활기참이 곳곳에서 느껴진다.
일행은 앞의 작은 봉우리를 넘기 위해 큰길을 버리고 오솔길로 들어선다. 희미하게 이어지던 산길이 이내 사라진다. 295암봉이 눈앞에 빤히 뵈건만 내려가는 길이 없다. 잡목숲을 헤치고 얼마를 내려서니 고사동에서 영락마을을 오가는 고갯길이다. 295봉으로 오르는 길로 들어서자 빗방울이 후두둑 떨어진다. 길 가운데 사람 크기만한 바위가 떡 버티고 있는데 생긴 게 영락없이 남성을 닮았다. 얼마간의 걸음품을 팔아 295봉을 오르자 갑자기 바람이 달려든다. 앞의 암봉과 이루는 안부는 완전 바람골이다. 하늬바람이 미친 듯이 골을 타고 넘어온다. 빗방울은 만유인력을 무시하고 수평으로 능선을 넘는다. 나뭇잎은 찢어질 듯이 떨고 가지는 부러져 나갈 것만 같다. 이기자가 사진을 찍자며 일행을 세우자 바람에 휩쓸리지 않으려고 모두 바위를 움켜잡는다. 안부에서 벗어나자 바람이 잔다. 돌아보니 골에는 여전히 미친 바람이다. 일행은 한숨을 돌리고 석문천이 내려다뵈는 암봉에 올라선다. 건너 석문산이 우뚝 서있는데 정상으로 올라가는 세 갈래의 암릉이 힘차다. 인적이 없는 바위를 오르내리거나 우회하며 석문에 내려서니 1시 40분이다. 도로 양쪽에 우뚝 선 바위는 말 그대로 석문(石門)같다. 도로를 따라가다 최기자를 만난다. 천씨와 김기자는 일행을 기다리다 갔다고 한다. 마침 한국유리공업 함바집이 비어있어 일행은 그곳에서 점심을 한다. 때가 다소 지나서인지 모두들 게걸스럽게 먹어댄다. 석문산 초입에 든 시간은 오후 3시. 최기자도 합류를 한다. 처음엔 잡목숲을 헤치다가 나지막한 암릉을 탄다. 하늘은 여전히 낮다. 석문산 정상을 지나 잡목숲을 헤친다. 내려서는 길은 여러 갈래의 암릉이다. 제일 왼쪽의 남쪽으로 뻗은 칼날같이 생긴 암릉이 눈길을 끈다. 일행의 발길은 그리로 향한다. 리지와 리지 사이의 협곡은 너덜지대다. 칼날 같은 리지를 오르며 건너편 리지를 바라보니 틈이 성긴 곳에 돌로 성을 쌓았던 흔적이 보인다. 리지는 멀리서 보듯 그리 날카롭지 않아 자일을 사용치 않고 그냥 넘어선다. 내려서는 계곡길에는 두릅나무가 많이 있지만 벌써 대부분 쇠었다. 봉황천에 내려서니 오후 6시 10분. 물이 아주 맑다. 일행은 오늘 산행은 여기서 마치기로 하고 숙소로 정한
북평면 남창리 벧엘가든으로 향한다.
길없는 암릉의 표지기 5월 6일, 다행스럽게 날이 아주 맑다. 최기자와 강씨, 장씨는 순천으로 돌아가고 남은 인원은 김씨를 비롯한 세 명이다. 도암중학교 근처 신리마을에서 산행을 시작한다. 희미하게 이어지던 산길은 여지없이 묘지가 있는 곳에서 길이 끊긴다. 길을 만들어가며 첫 봉우리에 오른 시간은 9시 40분. 바위에 앉아 시원한 바람을 쐬다보니 빛바랜 붉은 표지기가 눈에 들어온다. 반가움에 벌떡 일어나 다가가 이미
희미해진 글귀를 읽는다. '강진 산악동우회 백두지간 만덕 달마 종주' 암릉에 핀 붉은 철쭉꽃에 초여름의 따가운 햇살이 내려앉는다. 어제 미친 듯이 불던 바람은 꼴도 보기 싫더니 오늘은 뙤약볕이라 바람이 그립다. 덕룡산은 길이 없는 리지와 잡목이 섞여 길게 이어져 있다. 대부분의 바위에는 이끼가 있고 담쟁이덩굴이 붙어 있다. 무릎 정도 높이의 잡목을 지나 아기자기한 암릉을 얼마간 오르내리니 정상인 듯한 봉우리다.
덕룡산은 그만그만한 봉우리가 연이어 있어 어느게 상봉인지 가늠하기가 힘들다. 시원한 바람이 나물 캐는 아낙들의 목소리를 싣고 불어온다. 산행중에 처음 듣는 사람 목소리라 아주 반갑다. 바위 틈새로 길을 찾다가 쉬는데 김씨가 절뚝거리며 나타난다. 조금전에 보았던, 철쭉이 소담스레 핀 아담한 하늘벽이 예쁘다고 생각했더니 김씨는 그곳을 오르다가 오른손으로 잡았던 돌이 빠지는 바람에 한바퀴 덤블링을 한 것이다. 떨어질 때 나뭇가지에 긁혔는지 허벅지에 길게 상처가 있다. 김씨는 절룩거리면서도 계속 괜찮다고 한다. 오후 1시 25분. 점심을 먹기 위해 전망 좋은 바위에 자리를 잡는다. 점심이라고 해야 빵 몇 조각과 사과 몇 알이 전부다. 동쪽에서 날아온 제비가 산마루를 넘는 바람을 타고 하늘로 높이 솟구쳐 오르더니 구강포쪽으로 날아가 버린다. 산의 서남쪽 사면은 검게 탄 나무들이 곧게 뻗어있다. 마치 저승사자 같다. 그래도 어디선가 산새소리는 피리릭 피리릭 그치지 않고 울린다. 앞을 가로막는 바위 연봉은 등반하기가 까다로워 보여 우회한다. 불에 탄 싸리나무 가지가 힘없이 뚝뚝 부러져나간다. 산딸기나무와 명감나무는 이번 산행의 최고의 적이다. 이미 불타버렸음에도 그 가시와 넝쿨은 끊임없이 일행을 괴롭힌다. 새싹도 길을 방해하기는 마찬가지다. 산행의 적 가시덤불 30분만에 숲에서 벗어나니 누구라 할 것 없이 얼굴에 숯검댕이칠이다. 우리는 서로의 얼굴을 가리키며 마음껏 웃어 젖힌다. 능선으로 올라서자 시원한 바람이 분다. 상쾌하다. 나물꾼이나 약초꾼이 다닌 흔적이 있는 억새능선이 밋밋한 선을 그리고 있다. 누런 억새밭에 불탄 시커먼 소나무가 서 있는 광경은 추상화를 보는 듯하다. 30분을 걸었는데도 여전히 억새밭이다. 키를 넘는 억새밭을 헤집고 지나는 맛은 다른 잡목의 그것보다 각별하다. 키 작은 철쭉 군락지를 따라 425봉을 오른 뒤 불에 탄 나무를 베어내 초원처럼 변한 470봉을 넘어 대작골 펑퍼짐한 안부에 도착한 것은 4시 25분. 남쪽 계곡으로 30미터 가량 내려가니 물이 있다. 갈증을 속인 다음 피트병으로 물을 받고보니 탁하다. 이상하게 생각하며 계류를 자세히 보니 가재란 놈이 물을 흐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기자가 그놈을 잡아든다. 우리는 그 가재를 5미터 아래쪽에 강제 이주시키는 벌을 주고는 고갯마루로 올라온다. 잡목을 헤치느라 힘이 빠진 일행은 둔덕에 등을 기댄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이다 .바람이 건 듯 불자 억새가 앞뒤에서 끼이익끼익 하고 운다. 멀리서 뻐꾸기가 응답을 한다.
5시에 자리를 뜬다. 이끼가 많아 등반이 어려운 바위는 우회하고 연이어 있는 리지를 오르락 내리락 한다. 육산인가
싶으면 암봉이 나타나 리지인가 싶으면 잡목이더니 동남으로 주작산이란 이름으로 산줄기가 갈러지는 곳부터 솟아난 봉우리는 바위로만 되어 있어서
리지등반에 적당하다. 6미터 가량의 바위를 올라치자 서쪽으로는 해가 뉘엿뉘엿한다. 5분을 내려서니 관악전이다. 물이 아주 풍부하다. 5분을 더 내려서니 승용차도 다닐 수 있는 너른 비포장도로가
나온다. 이 도로는 어관마을까지는 비포장이다. 어둑한 칼을 내려오다 뒤돌아보니 고주파 같은 하늘금이 황홀하다. |
제공:오케이마운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