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로 본 서양 철학계에서 가장 큰 영향을 끼친 학자는 소크라테스였다. 소크라테스적 전통의 미덕은 합리성, 자제, 자기의식, 중용 등 이성적 체계다. 소크라테스적 전통에서는 정신에 위계가 있다고 보는데 의식적이고, 이성적인 부분이 최상위에 있고, 직관적이며, 감정적이고 욕구와 관련된 부분이 최하위라 여긴다. 이 위계에 따라 소크라테스의 제자들은 예술가, 군인, 농부 같은 이들의 좀 더 육체적이고 직관적인 삶에 비해 철학자의 지적인 삶이 최선이라고 말한다.
이런 주류에 반기를 든 철학적 사조가 있었다. 바로 디오니소스적 전통이었다. 블레이크, 니체, 하만, 로렌스, 융, 밀러 같은 낭만주의 사상가들이었다. 디오니소스적 전통은 소크라테스적 전통과는 완전히 다른 생활방식을 찬양한다. 소크라테스가 자제력을 설파할 때, 디오니소스는 섹스, 음악, 춤, 황홀감에 빠져 지내라고 부추킨다. 소크라테스가 중용과 합리성을 설파할 때 디오니소스는 중용과 통제를 넘어서라고 꼬드긴다. 디오니소스의 별명 중 하나인 ‘호 리시오스’는 ‘해방시키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디오니소스는 인간을 신중, 조심, 절제로부터 해방시킨다. 소크라테스가 사람들에게 자신을 의식적, 과학적으로 알아야 한다고 설파할 때, 디오니소스의 추종자들은 로렌스가 ‘피로 얻은 지식’이라고 부른 무의식적이고 직관적인 힘을 찬양하고 춤을 추거나 사랑을 나누거나 술에 취해 있을 때 느끼는 활기와 즐거운 삶을 찬양한다. 디오니소스와 추종자들은 소크라테스와 그의 무리들을 비웃고 ‘반성하지 않는 삶은 살 가치가 없다’는 그들의 주장을 비웃는다. 반대로 그들은 삶이란 반성하면 할수록 현미경 아래에서 점점 시들어 말라 죽을 거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자기반성이 없는 디오니소스적 전통은 궁극적으로 삶의 찬미가 아니라 삶의 냉소를 낳았다. 통제되지 않고 끝이 없는 직관과 무의식, 자기 해방은 멈춤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설령 멈춘다 한들 소크라테스적 전통으로 돌아갈 수는 없는 것이다. 물론 삶의 마지막에 소크라테스 역시 제자들에게 음악을 듣고 양성하는 꿈을 거듭해서 꾸었다고 말했다. 그건 아마도 이성적, 합리적 철학으로는 충분하지 않으니 가끔은 우리 본성을 관장하는 직관의 덕목에게 경의를 표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닐까?
찜질방 같은 무더위의 나날들.. 서늘한 해방을 상상하다가 디오니소스적 일탈을 꿈꾼다. 어쨌건 내일이 말복이고 입추다. 모기의 입이 돌아간다는 처서도 이 달에 있다. 절기를 이기는 날씨는 없다. 다 시간이 가르쳐준 지혜다. 그럴지니 참자! 조금만 더 참자!!
첫댓글 참아야겠네요...
정말 많이 덥군요. 디오니소스적인 일탈, 아니 섬취가 절로 그리워집니다.
언어가 분별해 놓은 분별의 세계를 뛰어넘은 관조의 눈길로 자연과 하나가 되는 것. 이해하시라 믿습니다.
문제의 디오니소스的 인간! 나도 때론 그처럼 완전한 아나키스트가 되고 싶었다.
"말하라. 그대가 원하는 것은 뭐든 들어 주겠다." - 알렉산더
"대왕, 거 햇빛 좀 쐬게 비켜주시지!" - 디오니소스
앗싸! 디오니소스여! 그까짓꺼 물질적 꿈을이루는 게 뭐 대수라고,
지금 내겐 당장의 한줄기 따뜻한 햇빛이 소중하거늘..
하여 디오니소스는 술의 신, 포도주의 신 쯤으로 숭앙된다. 비몽사몽의 세계.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