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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요한칼럼] 마르크스 유령이 온 세상에 떠돌고 있다 -성령 충만을 통한 예배 회복과 관계 회복이 해결책이다-
이것은 칼 마르크스(1818~1883)의 『공산당 선언』(1848.2.21)의 서문에 나오는 말이다. 이제는 이렇게 고쳐 쓰야 할 것 같다.
한편, 경제 문제에 실패한 구(舊) 마르크스주의는 이제 신(新) 마르크스주의의 탈을 쓰고 유럽이나 미국과 같은 기독교 선진국에서 동성애와 동성결혼 합법화, 종교 차별금지법 및 성 평등 운동을 통해 전통적 기독교 가치관을 허물면서 교회를 대적하고 있다.
한국도 이제는 구 마르크스주의와 신 마르크스주의의 온상이 되어 가고 있다. 좌파 정권의 핵심 정책은 마르크스주의의 실현이다. 좌파 정권은 구 마르크스주의를 바탕으로 자유 민주주의와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허물고 인민(민중) 민주주의-사실상 공산주의-와 마르크스 경제관인 사회주의 경제를 시험 중이다.
사회적이고 문화적인 면에서는 지난 7일의 국가인권정책기본계획(NAP)의 국무회의 통과를 시작으로 인권과 평등이란 미명 하에 동성결혼 합법화, 차별금지법 및 성 평등 정책을 노골화하고 있다.
마르크스주의를 바탕으로 한 좌파 정권의 정책은 친(親) 북한 정책으로 인한 안보 위기, 마르크스 사회주의 경제로 인한 경제 파탄, 김일성 주체사상을 전파하는 전교조가 장악한 교육의 황폐화, 비성경적인 동성 결혼과 성(性) 평등 운동 허용으로 인한 창조 질서와 가정 파괴로 이어지고 있다. 이 모든 현상은 직접적으로 가정 파괴, 교회 파괴 및 자본주의 경제체제 파괴를 목표로 하고 있다.
유럽 교회가 이런 마르크스주의를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여 유럽이 영적으로 초토화 되었고, 미국은 지금 힘든 전쟁을 치르고 있고, 한국도 지금 마르크스주의의 유령으로 인해 나라 전체가 소용돌이 속에 있다.
마르크스주의가 도대체 무엇이길래 이토록 온 세상을 흔들고 있는가?
마르크스주의와 아류들
-마르크스주의 : 경제적 소외와 억압과 착취에서 해방
칼 마르크스(1818~1883)가 주장한 마르크스주의는 첫째, 세상은 끊임 없이 변하고, 둘째 변화의 동력은 ‘계급 투쟁’이라고 주장한다. 특히 마르크스는 자본주의는 자본가가 노동자의 잉여가치를 착취하는 체제이므로, 전 세계의 노동자가 단결하여 자본가 계급(부르조아)을 혁명이나 폭력으로 타도하여 노동자 계급(프롤레타리아)이 지배하는 완전 평등의 공산주의 천국을 건설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언행이 완전히 일치하는 분은 예수님 밖에 없지만 일반적으로 우리가 존경하는 사람은 나름대로 언행이 일치한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말과 행동이 전혀 다른 구제불능의 책상물림이었다. 현장 경험도 전혀 없는 그는 책상에 앉아 공산주의라는 비현실적인 이상향을 꿈꾼 것이다.
마르크스는 평생 산업에 대한 글을 쓰면서 산업 현장에 한번도 방문한 적이 없고 관련자들과 대화한 적도 없다. 노동자의 애환과 현실을 모르는 자가 노동자 계급의 해방 운운하는 자체가 위선이다. 마르크스의 『자본론』 또한 친구인 프리드리히 엥겔스(1820~1895)의 『영국 노동자계급의 상태』란 책 한 권에만 의존한 것이다. 엥겔스 또한 20세 때 섬유업을 잠시 경험한 것을 바탕으로 책을 썼을 뿐이다.
마르크스는 4가지 고약한 성격이 있었는데, 폭력에 대한 애호, 권력욕, 금전문제 대한 무능함 및 주변 사람들에 대한 착취 성향이었다. 마르크스는 노동자에 대한 자본가의 착취를 제일의 악덕으로 지목했다. 그렇다면 정작 그 자신은 어떤 삶을 살았는가?
그의 첫 번째 착취 대상은 부모와 친인척이었다. 마르크스는 부모나 친인척에 대해 냉정할 정도로 무관심했고 돈이 필요할 때만 그들을 찾았다. 즉 마르크스는 친인척들의 돈으로 편안한 부르조아 삶을 영위했던 사람이다. 마르크스는 평생 글만 썼지 자기 힘으로 돈을 벌어본 적이 없는 자이다. 그의 연 수입은 숙련노동자의 3배나 될 정도로 많았지만 게으르고 낭비벽이 심하여 늘 돈에 쪼들리는 삶을 살았다.
마르크스의 두 번째 착취 대상은 부자집 아들이자 동지인 엥겔스였다. 마르크스는 엥겔스의 재정 후원 덕분에 평생 부르조아 수준의 삶을 산 자이다. 그런 그가 자본주의 체제를 비난한 것은 강남 좌파, 샴페인 좌파 및 캐딜락 좌파 같은 위선적 행동이다.
세 번째 착취 대상은 4살 연상의 아내와 자녀들이다. 아내는 평생 마르크스의 뒤치다꺼리를 하다가 죽어갔고 딸들의 교육에도 무관심하여 두 딸은 결국 자살로 인생을 마감했다.
마지막 착취 대상은 집안 하녀로 45년간 헌신한 헬렌 데무스다. 처가에서 아내를 안쓰럽게 여겨 보낸 하녀인데 마르크스는 그녀에게 평생 동전 한잎 주지 않았고 그녀를 성 노리개화 하여 사생아까지 낳았지만 자신의 아들로 인정하지 않아서 데무스란 이름으로 호적에 올려야 했다.
골수 마르크스주의자들인 레닌, 스탈린, 모택동, 김일성 등이 이런 성격의 소유자들이었다. 이들의 괴팍하고 독선적인 독재로 인해 수억 명에 달하는 무고한 사람들이 착취와 억압을 당하거나 강제수용소에서 고통을 당하거나 처형되었다.
*공산주의는 비현실적인 상상의 세계
마르크스가 꿈꾸는 공산주의는 무산자가 지배하는 완전 평등한 사회다. 그러나 이런 세상은 현실 세계에서 불가능하다.
그 이유는 첫째, 이 세상은 타락한 세상이다. 타락한 세상을 인간의 노력으로 완전한 이상향으로 만들 수 없다.
둘째, 마르크스가 말하는 자본가와 노동자의 계급 투쟁은 사회주의나 공산주의 사회에서도 존재한다. 지금의 북한을 보라. 자본주의에서 자본가가 ‘갑’이고 노동자가 ‘을’이라면 사회주의에서는 국가가 ‘갑’이고 인민이 ‘을’이다. 어느 사회나 지배층과 피지배층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인간은 일단 권력을 쥐면 독재하려는 죄성이 있다. 그러므로 마르크스가 비판하는 부르조아(자본가, 유산자) 독재든 그가 제시하는 프롤레타리아(노동자. 무산자) 독재든 독재는 독재다. 오히려 경제 권력과 정치 권력을 모두 장악한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경제 권력만 가진 부르조아 독재 보다 더 끔찍하고 잔인하다는 사실을 소련 공산주의나 북한 공산주의에서 여실히 증명이 되고 있다.
인간이 얼마나 사악한 존재인가를 마르크스는 모른다. 그와 추종자들이 만민 평등의 공산주의 사상을 주창한다고 해서 그들이 권력을 잡았을 때
‘천사’가 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피압박자였기 때문에 인간으로서 권력을 휘두르고 물질적 탐욕을 추구하고 반대파를 억압하는 본성이 더 강렬하게
내재하고 있다. 지금의 좌파 정권이 적폐 청산을 외치면서 더 심한 적폐를 저지르고 있다는 사실이 인간의 타락을 웅변적으로
증거한다. 이런 점에서 마르크스주의의 실패는 인간의 본성에 대한 몰이해에서 비롯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신 마르크스주의 : 문화적 사회적 소외, 억압 및 착취에서 해방?
신 마르크스주의는 1990년 말에 마르크스주의를 바탕으로 한 소련과 위성국가들이 망하자 다수자의 억압과 착취 및 소수자의 소외와 억압을 문화적, 사회적 차원으로 확장한 운동이다.
신 마르크스주의자를 자처하는 자들 또한 마르크스의 이중적이고 위선적이고 괴팍한 성격을 가진 자들이 너무나 많다. 프레드리히 니체는 죽을 때 독실한 신자의 어머니와 여동생의 간호를 받으면서 죽어갔으면서도 “모든 금지하는 것을 금지하라”면서 신 마르크스주의의 기초를 놓았고, 기독교인을 가장 저급하고 동물적인 인간들로 묘사했다.
성 해방을 주창한 빌헬름 라이히는 간통한 어머니가 자기의 고자질로 인해 자살하고 아버지 마저 우울증으로 죽자 간통을 죄로 규정한 기독교를 대적하면서 무제한의 성 해방을 주창했다.
이런 패륜아들이 동성애를 포함한 각종 성도착증을 피억압자를 해방시키는 마르크스주의와 실존주의 철학과 지그문트 프로이드의 정신분석학으로 교묘하게 포장하여 성(性) 정치란 명목으로 양성화 시키자, 그동안 음지에서 각종 도착적인 음욕을 즐기던 자들이 이제는 인면수심이 되어 양지에서 당당하게 누리자고 나선 것이 바로 신 마르크스주의이자 성(性) 정치혁명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신 마르크스주의는 기독교로 인해 경제가 번성하여 배가 부르자 그 다음 수순인 음란과 방탕의 도가니에 빠진 것에 불과하다. 사람이 배가 부르면 그 다음 찾는 것이 우상숭배와 음란이다. 이것은 성경이 웅변적으로 증거한다. 사사기나 열왕기를 보면 하나님이 축복을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이 쇠퇴해지면 그 다음은 우상숭배와 각종 음란에 빠졌다
한국은 북한의 존재로 인한 구 마르크스주의와 경제적 번영으로 인한 성 윤리 타락으로 인한 신 마르크스주의가 공존하는 복잡한 사회가 되어 버렸다. 신 마르크스주의가 심각한 이유는 자기 주장들을 법제화 하고 다른 사람의 비판이나 영향력을 차단하여 오히려 정상인을 잠재적 범죄자로 만들기 때문이다.
페미니즘 : 남성은 억압자 여성은 피해자
페미니즘(Feminism. 여성주의) 은 원래 여성의 참정권과 법적 권리를 남성과 평등하게 누리는데 초점을 두었다. 그러나 1970년대에 시작된 제2세대 페미니즘은 모든 형태의 남성 가부장제에 대항하는 여성 해방운동을 주창했다. 이들은 가족제도를 가부장제의 기초로 보고 직장여성을 미화하고 전업주부와 모성을 폄하했다.
대표적인 주창자이자「미즈」(Ms) 잡지의 발행인인 글로리아 스타이넘은 자신을 자기희생적인 인도주의자로 포장하지만 실제로는 상류층, 귀족층 및 유명 인사와 어울렸다. 그녀는 “물고기에게 자전거가 필요 없듯이 여성에게도 남성은 필요 없다”고 주장하면서도 호화 파티 장에는 어김 없이 남성의 팔짱을 끼고 나타났다고 한다. 강남 좌파, 샴페인 좌파, 캐딜락 좌파 같은 위선적 행동을 한 것이다.
남성성과 여성성은 내재적 본성이 아니라 사회적 구성물이라고 주장하는 제3세대 페미니즘은 젠더(Gender) 연구로 변모한다. 이들은 하나님이 제정하신 ‘생물학적 남녀 구분’을 부인하고 ‘사회적이고 주관적인 젠더’를 주창하면서 남성과 여성은 물론 간성, 무성 등 50 여 가지의 젠더를 주창한다. 좌파 정부가 추진하는 성 평등은 남녀의 양성 평등이 아니라 50여 가지의 주관적 성 정체성을 인정해 주자는 것이다.
페미니스트들은 마르크스의 계급 투쟁의 관점에서 남성은 억압자, 여성은 피억압자로 규정하고, 지금까지의 기존 문화가 남성중심의 억압적 문화이므로 이제는 성 평등 운동에 의해 기존의 모든 문화나 사회적 규범을 뒤엎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런 관점에서 이들은 남성과 여성이란 명칭을 부인하고 각자의 주관적 성향에 따라 50가지 젠더를 사용할 것을 주창하고, 아버지(아빠)와 어머니(엄마)란 단어도 성 차별 단어라면서 부모1과 부모2로, 남학생과 여학생이란 성 차별 단어도 사용하지 말자라고 한다. 실제로 스위스나 스웨덴에서는 이런 명칭을 사용하게 하고 있다.
교육 : 한국 초·중·고 교육을 점령한 전교조, 유럽과 미국 대학을 점령한 마르크스 좌파들
한국의 중등교육(초·중·고)은 종북 좌파가 지배하고 있다. 지난 6·13지방선거에서 교육감 17명 중 전교조 출신이 10명이고 친 전교조 성향이 4명이다. 전교조가 주창하는 교육은 ‘참교육’이다. 참교육은 김일성 주체사상을 가르치는 교육이다.
문교부의 중등교육 사회 및 역사 교과서 왜곡도 심각하다. 이들에 의하면 “남한은 태어나지 말았어야 하는 나라”이고 북한은 한민족 정통성을 이어 받은 나라다. 건국 대통령 이승만과 경제 대통령 박정희는 실패한 독재자이고, 친북과 종북 성향의 김대중과 노무현이야 말로 대한민국의 진정한 대통령이다.
분신 자살한 전태열은 사진과 함께 노동자의 영웅으로 칭송되고 한국 경제 건설의 기수인 정주영이나 이병철에 대한 기록은 아예 없다. 이들은 노동자만 잘 되면 사람들이 잘 살고 나라가 부강해 진다고 착각한다. 자본가 없는 노동자가 어디 있는가? 노동자도 중요하지만 자본가가 더 중요하다.
유럽이나 미국의 대학은 한술 더 뜬다. 미국 내 유수 대학 교수들 중 80% 정도가 좌파고 우파는 10%도 채 되지 않는다고 한다. 좌파들의 공세가 얼마나 거센지, 대학 내에서 우파라고 표명하면 직업에 위협을 받고 교수의 연구비 할당에서 제외된다고 한다.
2001년 조사에 의하면, 대학교 신입생의 성향은 좌파가 29.9%이고 우파는 20.7%로 10% 정도 밖에 차이가 나지 않았지만 졸업생의 성향은 좌파와 우파가 50%이상 차이가 난다고 한다. 이런 일이 우연이 아니다. 대부분의 미국 대학의 교양 과목 시간에 마르크스 경제학이나 신 마르크스주의 사상을 가르치기 때문이다.
대학생들이 우파 행세를 하거나 행동을 하면 금방 학교 행정실에서 소수자에 대한 혐오 발언(Hate Speech)을 했다는 경고장이 날아온다. 한국에서 1980년대에 운동권들이 숨어서 좌파 사상을 전파했듯, 이제는 우파 사상을 견지하거나 가르치는 자들이 숨어서 해야 하는 형국이다. 요즈음 한국의 좌파 정권과 좌파들이 워낙 극성을 부리다 보니 우파들이 소수자가 되어 시위를 하고 우파 사상을 갖고 있으면서 공격이 두려워서 쉬쉬하는 형국과 다를 바가 없다.
언론을 지배하는 마르크스 좌파들
요즈음 한국에서도 공중파나 일부 종편 방송들이 친 정부적 어용 뉴스를 띄우는 바람에 시청 거부 현상이 일어나서 수천 억대의 적자가 발생했다고 한다. 미국의 언론도 마찬가지다. 우리에게 친숙한 CNN, NYT(뉴욕타임즈), WP(워싱톤 포스트), LA Times, ABC, CBS, NBC 등이 좌파 언론들이다. 2016년 미국 대선 당신 미국 내 좌파 언론들은 동성애자이자 양성애자이며, 극우파 무슬림 형제단 관련 여자 보좌관을 둔 힐러리의 낙승을 예고하면서 반(反) 트럼프 대열에 앞장섰지만 결과는 트럼프의 승리로 끝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좌파 언론들은 사과하기는커녕 여전히 트럼프 대통령을 몰아세우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CNN을 가짜 뉴스의 본거지로 간주하고 CNN 기자의 질문은 모두 거절하고 있다. 언론은 공정하다는 통념을 좌파 언론 스스로 깨고 있다. 미국의 우파 시민들은 주류 언론 보다는 유튜브(YouTube)의 우파 언론을 통해 공정한 정보를 얻고 있다. 참고로 미국에서는 Fox News, WSJ(Wall Street Journal) 등이 우파 언론이다.
한국도 마찬가지다. 친 좌파가 장악한 공중파 언론의 편파적 보도로 인해 역대 최대로 시청률이 곤두박질하고 있다. KBS는 한때 시청률 30%(2012년8월)에서 지금은 10%대로 급락했고 MBC는 10%대에서 2%이하로 급락했다. 지나치게 친 좌파적이고 친 정부적 성향을 보이는 언론에 대해 시청자들이 시청 거부 현상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공중파 언론을 더 이상 믿지 못하는 우파 시민들은 미국 처럼 독립 언론인 유튜브나 SNS에서 제대로 된 정보를 얻고 있다.
한국과 마찬가지로 유럽이나 미국의 언론, 교육, 예술계 및 EU 행정부나 UN의 핵심 엘리트들은 모두 신 마르크스주의자들이다. 보수 교회와 보수(우파) 진영이 교회의 양적 성장과 개인의 성공에 몰입해 있는 동안 신 마르크스주의자들은 금융, 교육 및 언론계를 장악하여 이제는 온 세상을 좌파의 붉은 물로 침수시키고 있다.
소수 민족 비호 : 이슬람은 평화의 종교이자 피억압자?
요즈음 예멘인들의 난민 지위 부여에 대한 찬반 양론이 들끓고 있다. 소수자의 인권과 평등을 주창하는 좌파들은 예수님도 난민이셨고 성경은 난민을 존중해야 한다고 주창하면서 그들에게 난민 지위를 부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반대자들은 난민 자체는 수용해야 하지만 무슬림(이슬람 신자들) 난민은 수용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지금 유럽이나 미국에서 골머리를 앓는 것이 무슬림 난민들이다.
이들이 처음에는 난민이나 학생이나 노동 이민자로 와서 소수일 때는 조용하게 살다가 어느 정도 세력을 형성하면, 거주국의 법령이나 관습에 순응하는 것이 아니라 이슬람 고유의 생활관습을 주창하고 거주국 법 보다 이슬람의 샤리아 법 적용을 강요한다.
이슬람교의 목표는 이들이 어디로 가든 갈리프(이슬람 교황)국가를 건설하는 것이다. 이들은 마르크스 공산주의자들처럼 자기들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거짓말이나 폭력 사용을 정당화 한다. 이슬람은 공산주의자들처럼 자기들이 약할 때는 평화를 주창하다가 자기들이 강하면 폭력적이 된다. 이슬람은 공산주의자들처럼 표면적으로는 평화와 공존을 외치지만 실제로는 폭력과 칼리프 왕국 건국을 주목적으로 한다.
유럽은 섣부른 다문화주의로 무슬림을 대거 수용하고 그들에게 난민 지위를 부여하면서 나라 전체가 각종-폭력, 강간 등-강력 범죄와 자국민 보다 우선적인 복지혜택 부여로 홍역을 치르고 있다. 특히 신 마르크스주의에 경도되어 소수 민족 우대를 주창했던 젊은 여자 청년들이 무슬림에 의한 성 폭력의 희생자가 되고 있다.
무슬림은 마르크스주의 좌파 입장에서 보면 가장 극우파다. 무슬림은 일부다처제를 허용하고, 동성애자는 처형하며, 여자가 간음하면 명예 살인을 서슴지 않는다. 북한 김씨 왕조정권이 어릴 때부터 북한이 못사는 이유는 미 제국주의와 자본주의 탓이라고 가르치듯, 무슬림도 어릴 때부터 유대인과 기독교 신자 및 기독교 종주국인 미제국주의 타도를 가르친다.
그런데 좌파들은 무슬림과 동조한다. 좌파들은 일반 우파들을 외부인의 접근 방식에 의해 남성중심적인 남성가부장자들, 성차별주의자들, 파시즘적 인종차별주의자들이라고 비난하면서도 무슬림들이 그렇게 하면 내재적 접근 방식에 의해 그들의 주장을 인정해 줘야 한다는 내로남불(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의 이분법적 주장을 서슴지 않는다. 자본주의와 기독교 타도라는 공통의 적이 있기 때문이다.
이슬람이 이렇게 용인되는 이유는 이들이 석유 호황으로 잘 나갈 때 친 이슬람 세력들을 많이 양성했기 때문이다. 이슬람의 금전 공세에 많은 학자들과 UN과 서구 좌파들이 이들의 주장에 적극적으로 동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리 하면, 마르크스주의는 인류의 발전을 억압자와 피억압자 간의 계급 투쟁의 과정으로 설명하면서, 모든 인간 관계를 대립과 갈등과 투쟁의 관계로 간주하여 계급 투쟁에 전심전력할 것을 촉구한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계급 투쟁을 위해 피 흘리기를 주저 않는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자기들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계급 투쟁을 위해 선전과 선동과 혁명과 폭력을 마다 하지 않는다. 그 결과 지금 마르크스주의가 한국을 포함한 기독교 선진대국을 초토화 하고 있다.
이들은 언어 혼란 전술과 선전·선동으로 표면적으로는 인권, 정의, 평화, 평등을 내세우면서 실제로는 각 인간 관계를 ‘계급 투쟁’으로 이간질하고 충동질하여 기독교와 인류 보편 가치인 남녀 구분과 가정, 이를 지탱하는 기독교 가치관을 허물면서 결국은 자본주의를 타도하고 몽상적인 공산주의 세상을 꿈꾸고 있다.
이들은 완전 평등의 공산주의 가치관과 다른 모든 전통적 가치관을 부인하면서 비판자나 반대자를 파시스트나 인종차별주의자로 저주하면서 떼거리로 몰아붙인다. 좌파들의 극성과 저주에 기가 질린 우파들이 침묵하거나 잠수 타는 사이에 좌파들은 자기들의 영역-정치, 경제, 문화, 사회, 언론, 교육, 예술 등-을 하나하나 넓혀간다.
마지막 남은 보루는 기독교 우파뿐이다. 유럽 기독교는 뱀이 토한 마르크스주의 강물에 이미 침수되었고(계 12:15), 미국의 기독교 우파는 아직도 세대주의 종말론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먼 산 구경하듯 뒷짐 지고 있고, 한국의 기독교 우파만이 힘겨운 싸움을 하고 있다.
그러나 아직도 한국의 일부 대형 교단이나 지도자들은 친 좌파 성향을 띠면서 남북평화 공세에 여념이 없고, 일부 대형 교회들은 정교분리 원칙에 충실해서인지, 교인 이탈을 두려워하는지, 좌파 정부에 무슨 약점이 잡혔거나 북한의 미인계에 빠졌는지 꿀 먹은 벙어리처럼 난국(亂國)에 대해 일체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
마르크스주의에 편승한 주장들의 허구
마르크스주의에 기름을 붓는 각종 인본주의 주장들이 있다.
-후기 현대주의(post-modernism)
후기 현대주의는 상대주의다. 상대주의는 절대적 진리나 절대적 도덕규범을 인정하지 않고 모든 것이 상대적이라고 주장한다. 당연히 ‘절대적 진리’나 ‘절대적 도덕’을 주장하는 기독교에 대한 반대로 이어진다.
사실 상대주의는 자유주의 신학에서 태동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유럽에서 18세기부터 극성을 부리기 시작한 자유주의 신학은 성경의 무오성,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 성경의 기적, 예수님의 신성과 대속적 죽음 등을 부인한다. 성경은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이 기록한 것이고, 성경의 기록은 전설이나 우화로 치부하면서 도덕적 가르침만 인정한다. 예수님은 구세주가 아니라 석가, 공자, 마호멧과 같은 성자로서 단지 ‘도덕적 모범’일 뿐이다.
자유주의 신학은 성경의 기적은 물론 교회 시대의 기적을 부인한다. 한편, 보수주의는 성경의 무오성,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 예수님의 신성과 대속적 죽음은 인정하지만 교회 시대의 기적을 부인하여 하나님의 초자연적 능력, 성경적 절대 진리와 절대적 도덕규범을 약화시켜 유럽 교회의 쇠퇴와 타락에 일조했고, 그 결과 상대주의가 기승을 부렸다고 할 수 있다.
자유주의는 지옥도 부인하기 때문에 개인의 영혼 구원 보다는 이 땅에 경제 정의와 생태 정의가 충만한 지상 천국을 인간의 노력으로 건설하는 것을 최종 목표로 삼는다. WCC가 이러한 주장을 적극 수용하고 있고, 마르크스주의도 이 땅에 완전 평등이 이루어진 공산주의 사회를 건설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결국 자유주의와 WCC와 마르크스주의 및 신 마르크스주의와 후기 현대주의는 중요한 점에서 한 통속인 셈이다.
그러나 기독교 우파는 ‘이미’ 이 세상에 예수님의 통치가 임했지만 ‘아직’ 완전히 임한 것은 아니므로, 비록 신자가 세상의 소금과 빛의 역할을 하면서 세상을 변화시켜 가야 하지만 완전한 이상 세계는 저 천국에서 이루어진다고 가르친다.
후기 현대주의는 절대적 진리와 절대적 도덕규범을 부인하고, 더 나아가서 이성과 합리성을 부인하고 감성과 느낌을 강조하는 개인적 느낌과 주관적 진리를 중시하게 되었다.
후기 현대주의는 이성과 합리는 억압자인 남성 중심의 산물이므로 이제는 피억압자인 여성 중심의 감성과 느낌이 진리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페미니스트들은 여성이 남성 보다 우세한 것은 본성적으로 그런 것이고 남성이 여성 보다 우세한 것은 남성 중심의 문화가 형성해 온 사회적 구성물의 결과라고 강변한다.
그들이 말하는 “모든 진리는 상대적이다”는 주장 자체도 실제로는 ‘절대적 진리’다. 왜냐하면 ‘자기들만이 옳고 절대적 진리를 주장하는 자들은 틀렸다’하는 주장 자체도 ‘절대적 진리’-독단-라는 논리적 오류를 범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설령 자기들이 틀렸다고 하더라도 백인 남성과 같은 다수자들이 워낙 오래 동안 군림하고 억압해 왔기 때문에 반대자들은 말할 자격이 없다고 주장한다. 소수의 권리를 위해 다수의 권리가 희생되어도 상관 없다는 주장이다. 다수자가 소수자를 폄하하면 혐오 발언이고 소수자가 다수자를 폄하하면 상처를 받지 않기 때문에 혐오 발언이 아니라고 떼를 쓴다. 소수자가 다수자를 역차별하는 것이다.
이것을 ‘억압적 관용’이라고 하며 진정한 관용은 우파-다수자-의 발언이나 운동을 용납하지 않는 것이라는 궤변을 늘어놓는다. 문제는 이런 말도 안 되는 주장을 하는 자 들이 유럽이나 미국 및 캐나다는 물론 한국의 정치, 사회, 문화, 교육, 언론을 장악하여 떼거리 벼랑 끝 전술로 세상을 흔들고 있다는 사실이다.
-계급 투쟁
마르크스주의자는 모든 인간 관계를 ‘계급 투쟁’의 관계로 이해한다. 물론 역사적으로 가진 자는 못 가진 자를, 강대국은 약소국을, 남자는 여자를 억압하고 착취하고 억압해 왔다. 그러나 이것은 타락한 인간의 잘못된 관계의 결과물이며 이의 대안은 계급 투쟁이 아니라 상생과 공존이다.
만일 노동자가 자본가를 타도하고 나면 누가 경영을 할 것인가? 노동자 독재를 이룬 공산주의 소련과 위성국가들이 왜 망했는가? 자본가 계급이 없으니 경영능력과 기술력이 빈약하고 노동자의 노동 의욕이 사라져서 망한 것이 아닌가? 자본가를 타도 대상으로 본 마르크스 공산주의는 망했고, 자본가의 억압과 착취를 시정하고 개선한 유럽은 경제적으로 번영하지 않았는가?
남녀 관계도 마찬가지다. 억압 받은 여자들이 계급 투쟁의 관점에서 남자들을 타도하고, 남자는 남자끼리, 여자는 여자 끼리 따로 살면 100년 내에 인류는 지구상에서 사라질 것이다. 이것이 페미니스트들이 원하는 세상인가? 인권과 평등을 위해 반대 성(性)을 배척하고 타도하는 것이 대안이 아니다. 상생의 길을 모색하는 것이 대안이다. 남자는 역사적으로 여자를 억압해 온 죄를 회개하고 여자는 남자가 타도의 대상이 아니라 돕는 배필이라는 사실을 재인식하는 것이 필요하다.
성경적 진리를 회복하는 것이 대안이다
기독교 우파의 사명은 성경적 절대 진리와 절대적 도덕규범을 회복하는 것이다. 동성애나 젠더 정체성은 타락한 인간의 결과물이다. 하나님은 사람을 남성과 여성으로 창조하셨고(창 1:27), 성 관계는 남녀로 이루어진 부부에게만 허락하신 선물이다(창 2:24; 고전 7:2; 엡 5:22-33). 타락으로 인해 소수의 간성이나 무성이 있을 수 있지만 이것은 예외이다. 그들도 그리스도 안에 형제 자매로 대우 받고 사랑 받을 자격이 있지만, 예외가 일반화 되어서는 안 된다.
구약에서 하나님은 동성애가 만연한 소돔과 고모라를 심판하셨다. 그런데 친 동성애자들은 이것은 구약의 기록이므로 신약의 성도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는 궤변을 내세운다. 동성애는 구약에서만 금지된 것이 아니다. 로마서는 동성애는 분명히 하나님의 심판 즉 ‘신적 유기’의 결과라고 기록하고(롬 1:26-27), 남색[GAY]을 금지한다.
남색을 금지하면 유추에 의해 레즈비안(여자 동성애자)을 금지하는 것은 당연하다(고전 6:9). 하나님이 금지하신 것을 하면 반드시 징계가 따른다. 각종 성병이 부부 외의 무분별한 성 관계에 대한 징계이듯 에이즈는 불법적 성 관계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다.
고전 6장이 말하는 불의한 내용에는 음행, 우상숭배, 간음, 술 취하는 것, 모욕하는 것, 사기치는 것이 포함된다(9~10절) . 이런 죄들을 성경은 용납하지 않는다. 그러나 기독교인들도 이런 죄를 짓는 사람이 많다. 연약해서 짓고 완악해서 짓는다. 그렇다고 해서 ‘나는 천성적으로 도벽이 있으니 도벽을 합법화 해달라’는 사람이 있는가? ‘나는 사기성이 있지만 인간답게 살고 싶으므로 인간 대우 해달라’는 사람이 있는가?
그런데 왜 동성애자들은 자기 죄들을 제도적으로 합법화 해달라고 하는가? 동성애를 합법화 하려면 도둑, 사기꾼, 간음자도 합법화 해달라고
해야 하는가? 동성애는 상호합의에 의한 것이므로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지 않으므로 괜찮다고? 그렇다면 마약 중독자, 게임 중독자도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지 않으므로 괜찮은가? 연약해서 죄를 짓는 것을 회개와 치유로 인도하는 것과 방치하고 합법화하는 것은 전혀
다르다.
친 동성애자들은 기독교 우파가 동성애와 동성 결혼 합법화 반대하는 것을 비판한다. 목회자의 성적 타락과 세습은 침묵하면서 '왜 동성애만 기를 쓰고 반대하는가?'이다. 교회가 목회자의 성적 타락과 세습에 침묵하는가? 요즈음에는 미투 운동 등으로 인해 목회자든 누구든 성추행범은 사법의 단죄를 받는다. 각 교단은 성 추행이나 성 폭행 정도가 분명하면 교단에서 제명한다. 그런데 교회가 성적 타락에 대해 침묵한다고?
그렇다고 성 추행자들이 동성애자들처럼 자기들을 합법화 해달라고 떼를 쓰는가? 한국에는 동성애 한다고 해서 사법적으로 단죄하거나 교회에서 비판하지 않았다. 동성애와 동성결혼을 제도적으로 합법화 해달라고 하니까 공개적으로 비판하는 것이다. 어떻게 불륜과 패륜을 합법화 하나?
교회 세습도 그렇다. 세습 자체가 문제인가? 오지나 시골의 소형 교회를 세습하면 오히려 칭찬한다. 그런데 중대형교회 세습은 비난한다. 부와 권력과 명예가 따라오기 때문이다. 지금 한국 교회를 시끄럽게 만드는 예장 통합 명성교회의 세습은 교단법에서 분명히 금지하고 있는데 편법으로 세습해서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 다른 교단에서는 세습을 명시적으로 금지하지 않고 지교회의 재량에 맡기고 있다.
교회 세습 문제는 뜨거운 감자다. 과거에 예장 합동의 충현교회가 후계자 문제로 두고두고 말썽을 일으켰고 아들을 후계자로 두었지만 더 큰 말썽을 부렸다. 후계자와 설립자의 대척으로 인해 후유증을 겪는 교회가 지금도 한둘이 아니다. 그러므로 교회 세습은 신학적 문제라기 보다 현실적이고 실천적인 문제가 되어버렸다.
이런 점에서, 이론적으로 후계자는 개척형 보다는 수성형(守成型)이 되어야 하지만 후계자를 구하는 대부분 중대형교회는 변화를 추구하면서 수성형 보다는 개척형을 후계자로 선정하다 보니 결과적으로 분란을 자초하는 것 같다. 그래서 많은 설립자들이 이런 사례를 보고 수성과 안정을 위해 자기 피붙이를 후계자로 삼는 것 같다. 새로운 후계자로 인해 교회가 분란에 처하는 것보다 안정을 위해 피붙이 후계자를 두는 것이다.
그리고 청어남이라고 피붙이 후계자가 설립자 보다 잘하는 경우도 많고 피붙이 아닌 후계자가 항상 더 잘한다는 법도 없다. 피붙이 아닌 후계자로 인해 현실적으로 분란에 쌓인 교회가 더 많다. 그러므로 이것은 교회 세습 자체의 문제라기 보다 설립자와 후계자 모두 미성숙하여 일으키는 문제라고도 할 수 있다. 그리고 후계자에게 넘긴 후에는 설립자가 상왕(上王) 노릇을 하지 말고 먼 지역으로 떠나거나 아예 교회 일에 일체 개입하지 않는 것도 분란을 방지하는 한 가지 방법이 될 수 있다.
성 정체성도 그렇다. 남성과 여성은 표면적인 생물학적 차이는 물론 두뇌의 기능적 차이-좌뇌중심과 우뇌중심-가 분명히 있다. 이것은
‘차별’이 아니라 ‘차이’다. 물론 남자 중에도 여성성이 강한 사람이 있고 여자 중에도 남성성이 강한 사람이 있다. 그러나 자기의 주관적 심리적
상태에 따라 남자가 되었다가 여자가 되는 현상은 하나님의 창조 질서와 사회와 인류의 보편적 가치에도 어긋나는 억지에 불과하다. 그런데 이들은
"금지하는 모든 것을 금지하라"(니체)는 말도 안되는 주장으로 이런 가치들을 깨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남녀의 관계도 그렇다. 하나님은 남자와 여자를 보완적이고 상생의 관계로 창조하셨지(창 2:18), 대립과 투쟁의 관계로 창조하신 것이 아니다. 다만 타락으로 인해 역사적으로 남자가 여자 위에 군림하고 억압한 것은 사실이지만 여성이 남성을 투쟁의 관계로 간주하고 타도하는 것은 성경적 진리가 아니다.
그러므로 남성은 여성이 군림과 억압의 대상이 아니라 사랑과 섬김의 대상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여성도 하나님이 남성을 여자의 ‘머리’로 두셨으므로 순종과 섬김의 대상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대립과 투쟁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과 순종과 상생의 길을 모색해야 한다.
에베소서가 제시하는 인간 관계 3대 원칙
세상이 타락할수록 신자는 성경 말씀에 충실해야 한다. 신자들이 성경 말씀 대로 살지 못하니까 죄를 타고 역사하는 마귀의 세력들에게 역습을 당하는 것이다.
에베소서 5:21-6:9은 가장 기본적인 3가지 인간 관계에 대해 기록한다. 모든 인간 관계의 대원칙은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는 것이다
이러한 대원칙 하에 에베소서는 3가지 기본 관계인 부부관계, 부모 자녀 관계 및 고용주와 고용인의 관계에 대해 기록한다.
-부부 관계
서양이든 동양이든 역사적으로 남자는 여자 위에 군림해 왔다. 페미니즘 운동은 이러한 억압에 대해 반작용으로 일어났다고 할 수 있다. 서양은 동양에 비해 남성의 가부장적 억압이 훨씬 약함에도 불구하고 서양에서 먼저 페미니즘 운동이 먼저 일어난 것은 동양에 비해 서양이 민주주의와 보편 교육의 혜택을 먼저 받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부부 관계와 남녀 관계는 페미니즘이 아니더라도 많은 사람들이 힘들어 하고 갈등하는 문제들이다. 교회에서 각종 부부세미나나 결혼세미나가 있지만 아직도 한국에는 남성 중심의 문화가 지배하고 있어서 여성들의 인권이나 권익 신장은 길이 먼 것 같다.
더군다나 요즈음에는 남혐과 여혐도 있어서 남성과 여성이 대치하는 상황도 벌어진다. 미투 운동으로 촉발된 성 추행에 대한 사법부의 단죄가 여느 때보다 강하지만 남성 중심의 성 추행 사건이 도처에서 빈발하고 있다. 그렇더라도 남혐과 여혐이 계층 간의 갈등이나 투쟁으로 인식되어서는 곤란하다. 남자와 여자는 그리스도를 주로 모시면서 서로 양보하고 포용하면서 사랑하고 섬기는 관계가 되어야 한다.
-부모 자녀 관계
후기 현대주의는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시대다. 가정에서 부모의 권위가 실종되고, 학교에서 교사의 권위가 실종되고, 교회에서 목회자의 권위가 실종되고, 사회에서 연장자의 권위가 실종된 지 오래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부모, 교사, 목회자 및 연장자의 권위는 하나님에게 부여 받은 ‘위임된 권위’지 ‘절대적 권위’가 아니다. 더군다나 자녀를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지’ 않고(엡 6:4),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세상 풍조의 후기 현대주의 교육에 맡긴 결과 부모나 연장자의 권위가 서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교회는 하루 빨리 대안 교육에 힘써야 한다. 자녀의 귀중한 영혼을 언제까지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 맡길 것인가?
-고용주와 고용인의 관계
성경은 고용주(상전)와 고용인(종)의 관계를 계급 투쟁의 관계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공동의 주로 모시면서 서로 돌보고 섬기는 관계로 묘사한다. 자본주의의 초기에 고용주들이 이런 관점에서 노동자들을 섬기고 돌보았다면 마르크스주의는 탄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적그리스도(마귀)가 인간의 타락과 탐욕, 그리스도 중심적이 아닌 이기적 관계의 약점을 타고 자본주의 타도를 명분으로 교회를 타도하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력들이다. 고용주와 고용인은 타도와 투쟁의 관계가 아니라 상생의 관계다. 자본가와 노동자는 이 점을 명심해야 한다.
사업이 실패하면 자본가만 망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도 망한다. 노동자가 자본가를 뒤엎어서 사회주의가 되면 자본가는 없어지겠지만, 경제 권력과 정치 권력을 장악한 국가자본주의의 독재 정권이 노동자를 노예처럼 부리면서 억압하고 착취한다. 소련과 위성국가들이 이래서 망했고 북한은 지금 경제 권력과 정치 권력을 장악한 김정은 돼지가 모든 백성들을 영원한 노예로 부리면서 착취하고 있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이런 세상을 원하는가?
한때 종북 좌파들이 모범으로 내세웠던 베네스웰라는 반미 정책과 사회주의 경제 정책으로 산업의 국유화와 무상복지정책으로 승승장구하다가 폭망 했다. 올해 경제는 18% 하향이고 물가상승율은 100만 %(1만 배) 상승 전망이다.
종북 좌파들은 중국이나 월남을 자기들의 전범(典範)으로 내세운다. 중국과 월남은 공산주의 했다가 망한 후 이제 자본주의 초기 단계 있는 나라들이다. 종북 좌파들이 그렇게도 비판하고 혐오한 박정희식 독재정권과 국가주도 계획경제에 자본주의를 혼합한 경제로 이제 겨우 자본주의 초기 단계의 열매를 맛보는 나라들이다.
또한 이들 나라의 민주화 지수나 부패 지수가 지금의 한국 보다 훨씬 더 못하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이런 나라들이 좌파들의 전범이 되는가? 좌파들은 지금 세상을 거꾸로 살고 있는가?
기세 당당하게 정권을 탈취하여 안보, 경제, 교육 및 사회 전반을 들쑤시면서 적폐 청산을 외치던 종북 좌파 정권이 1년여 만에 안보 답보와 경제 침체로 인한 지지율 하락에 위기감을 느꼈는지 투자 확대와 규제 혁파로 선회한 것은 불행 중 다행이다. 정치는 금방 회복할 수 있지만 망가진 경제 회복은 요원하기 때문이다.
성령충만을 통한 영적 승리
성경은 모든 신자들이 성령 충만하여 하나님께 바른 예배를 드리고(엡 5:18-20),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할 때 2가지 기초적인 인간 관계가 회복되어(엡 5:21-6:9), 마귀와의 영적 전쟁에서 승리한다고 기록한다.
결국, 오늘날 특히 기독교 국가들에서 적그리스도의 세력인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설치는 이유는 신자들이 성령 충만하여 하나님을 제대로 예배하지 않고, 3가지 기본적인 인간 관계가 제대로 되지 않았기 때문에 마귀에게 공격의 발판을 제공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외부의 적과도 싸워야 하지만 무엇보다도 신자 각자가 성령 충만하여 하나님께 진정으로 예배를 드리고 3가지 기초적인 인간 관계를 성경적으로 회복하는 것이 무엇 보다 중요하다. 이럴 때 하나님이 역사하셔서 마귀의 세력들을 제압해 주실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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