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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게시판 스크랩 정신건강론-딥스 독후감
이쁜바보 추천 0 조회 260 13.04.01 15:14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딥스 독후감 1

딥스는 자페증에 걸린 아이이다. 딥스는 사회적으로 성공하신 부모님에 밑에서 자랐고, 경제적으로도 부족함이 없었다. 하지만 딥스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다른 어떤 것이 아닌 부모님의 사랑이었다. 딥스는 비싼 장난감보다 어머니의 자신을 믿어주는 눈빛과 아버지의 넓은 가슴이 필요했을 것이다.

딥스를 보면서 내내 든 생각은 아이는 사랑을 먹고 산다는 것이다.

물론 한학기동안 수업을 통해서도 많이 든 생각이었지만 아이는 처음 태어나 우리가 아무것도 모를 것이라고 생각하는 그 순간부터 여러 과정들을 통해 자기를 만들어 간다. 그 과정들을 통해 경험한 느낌들이 어쩌면 그 아이의 내면을 자신감으로 가득 채울수도 있고, 남들의 눈에 드러나 있는 자신을 항상 두려워하는 불안감으로 가득 채울 수도 있는 것 같다.

그 경험이 바로 어머니 혹은 부모님을 통해 만들어 진다고 생각하면 정말이지 부모의 역할은,특히 어머니의 역할은 그 아이가 어떤 음식을 먹었는가 보다 그 아이가 어떤 옷을 입었는가 보다 훨씬더 중요할 것이다. 딥스가 그랬던 것처럼...

세상의 많은 부모님들은 하나같이 "열손가락 깨물어 안아픈 손가락이 어디 있느냐?" 내지는 "고슴도치도 지 자식은 예뻐한다"는 식의 얘기들을 하면서 어머니란, 또는 부모란 자식을 사랑할 수 밖에 없게 운명지어진 것처럼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 아이들이 큰 뒤에 자식은 부모가 그랬던 것처럼 부모에게 희생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부모는 항상 자녀들에게 말한다. "내가 널 어떻게 키웠는데""자식새끼 뼈빠 지게 키워봤자 아무 소용없다."

하지만 난 생각해 봤다. 과연 이땅의 모든 부모는 아이를 그토록 사랑만했는가?....딥스를 읽으면서 그 물음을 다시한번 던졌다. 부모는 자녀를 사랑하도록 운명지워진 자들인가? 과연 사랑이 필요했던 건 딥스만일까?....물론 자페증이라는 증상은분명 특별하다. 하지만 이미 성인인 된 우리는 어떤가? 정상적인 과정을 거치며 고등학교까지 보내고 어려운 수능시험도 치르고 군대까지 무사히 마치고 돌아왔다.

이런 우리에게도 부모님 하면 "사랑"만 떠올릴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모든 부모님들은 다 자녀를 목숨만큼 사랑한다고 하시는데 왜 우리나라 고등학생의 80%에 육박하는 아이들이 "우리집은 행복하지 않다"고 대답한 것 일까?

작년쯤인가 부모님을 토막살인한 한 대학생에 대한 기사가 세상을 떠들석하게 한 일이 있었다. 우리나라에서 알아주는 명문대 학생이었고, 평소에 성격이 조금 소심했을 뿐 정신분열과 같은 정신 질환을 앓고 있는 사람도 아니었다.

그 사건을 대하면서 혹자는 "불효막심한 놈, 죽일 놈" 등의 욕을 퍼붓기도 했고 "현대사회의 윤리, 도덕은 사라졌다" 라며 세상을 탓한 이도 있었다.

그후로 며칠뒤 죽은 어머니의 일기장이 발견되었고, 아들은 "어머니가 나를 이렇게 사랑하는 지 몰랐다"라고 말했고, 그의 형은 "난 동생을 충분히 이해 한다"고 검찰 조사에서 밝혔다.

그 형에 말을 시작으로 그에 대한 책이 쓰여졌고 그것이 "미안하다고 말하기가 그렇게 힘들었나요"라는 책이다. 그 책을 보면 어느 누구도 그를 욕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가 어린 시절 받아온 학대와 사랑의 부재는 오히려 그를 안아주고 싶게 만든다. 딥스처럼...

위 사건을 대했을 때도 난 우리가 알고 있는 "사랑"의 모순을 발견했다. 아이를 사랑한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그건 아마도 한학기 동안 수업을 통해서도 얘기 되었고, 책속에 액슬린박사에게서도 답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고 그 아이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고 믿어주는 것. 그것이 사랑일 것이다. 부모님들이 너무도 많이 간과하는 것, 내가 생각하는 아이의 행복한 모습이 아니라 아이 자신이 좋아하고 행복해 하는대로 믿는 맘으로 지켜봐주는 것, 그것이 아이가 느낄 수 있는 사랑이 될것이다.

아이가 자라면서 그 시기 시기마다 필요한 것을 충분히 충족시킨 아이들은 믿음과 신뢰를 배우기때문에 평안할 수 있고, 언제나 부족했던 아이는 그것에 집착하며 불안해 질 수 밖에 없는 것이 아닐까.....

딥스 독후감 2

딥스..글쎄..딥스 역시 우리가 흔히 '자폐아'라고 부르는 그런 아이들 중 하나였을 것이다. 우리는 책을 통해서 딥스와 같은 아이들에 대한 편견이 약간 없어졌는지도 모른다. 물론 이책을 통해 가장 얻을수 있고, 깨달을 수 있는것은 부모와 자녀간의 상호관계와 사랑과 관심의 중요성, 놀이치료의 효과 등일 것이다. 하지만, 이른바' 자폐아'라서 외면하고 거리감을 두었던 나 자신에 대해서도 반성을 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나 역시 딥스의 부모와 다를것이 뭐가 있겠는가..

부모의 사랑과 관심으로부터 외면당한, 버림받은 한 아이에 대한 성장과정을 그린 "딥스" .. 책을 읽으며 '난 참 행복하게 자랐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원치않던 임신이라 하나의 존귀한 생명체인, 더군다나 자신들의 자식을 그토록 매몰차게 외면한 부모의 태도는 정말 많은 것을 생각하게 했다. 의사, 과학자라는 사회적 지위를 가진 자신들의 명예에 해가 될까 두려워 아이를 부정하기에 바쁜 부모의 모습을 보며, 그렇지 않게, 관심과 사랑을 받고 자라온 나는 참 행복하다라는 것을 느끼게 했다.

태어날 때부터, 아니 태어나기 전, 엄마 뱃속에 있을때부터 딥스는 부모의 자신에 대한 무관심과 부정을 알았을 것이다. 아이들에 있어 태교가 중요하다는 말을 많이 듣는다. 또, 실제 뱃속에 있는 아기는 그것을 느낄 수 있을것이다. 딥스또한 그랬을것이다. 하지만, 딥스의 부모는 감사의 마음으로 아이에게 정성을 다하는 여느 부모들과는 달리, 아이의 존재가치를 인정하지 않으려했기에, 아이는 후에 더욱 어두웠는지 모른다.

아이가 다른 아이들과 그들만의 작은 사회 관계를 맺어가며, 부모의 따뜻한 사랑을 받아가며 자라는 것과는 너무나 대조적으로 딥스는 늘 혼자 있으며,누구에게도 정을 주지도, 받지도 못하는 자폐아로 되어간다.

이런 딥스에게 필요한 것은 의사인 어머니의 의술도 아닌, 과학자인 아버지의 발명품도 아닌, 누구나가 할 수 있는 진심어린 관심과 따뜻한 사랑을 받는 것 뿐 이었다.

딥스는 일주일에 한 번씩, 액슬린 선생님에게 인도되어 "놀이치료"를 받는다. 솔직히 놀이치료에 대한 것은, 이번 수업을 들으며 처음 접하였지만, 효과가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하지만, 딥스가 놀이 치료를 받으며 어두운 굴에서 나와 밝은 세상으로 점점 나오는 것을 보고, 놀이 치료에 대해 신비함 마저도 들었다.

이 책을 읽으며 가장 크게 느낀 것은, 부모와 자녀의 관계이다. 자녀에게 있어 가장 필요한 것은, 비싼 장난감도 아니요,좋은 옷도 아니다. 바로 자신에 대한 부모의 사랑인 것이다. 물론 우리는 모두 이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못한 아이들을 본다면...

난 작년에 몇달간 용인의 어느 보육원에서 봉사활동을 한 적이 있었다. 매주 토요일마다 찾아가서 아이들 학교 공부도 도와주고, 같이 물총싸움도하고, 찰흙으로 만들기놀이 등 여러 학습도 하면서 뜻깊은 날들을 보낸 기억이 있다.

처음 그 곳을 방문했을때, 마치 딥스와 같은, 닫혀있는 아이를 본 적이 있었다. 아이는 7살 여자아이 였는데,친구들과 잘 어울리지 않고, 특히, 처음 본 사람을 심하게 경계했다. 그 아이의 그런 모습에 처음엔 당황하고 속상했지만, 친해지려고 많이 노력했다. 결국 3~4주가 지나 아이와 친해질 수 있었다. 맛있는 과자를 준 것도 아니고, 특별한 선물을 한 것도 아니다. 아이와 눈높이를 맞추려고 내가 먼저 노력을 했다. 그리고 지금도 가끔, 길지만은 않았던 그 때를 생각하면, 그 아이가 가장 먼저 생각난다. 처음엔 경계하며 눈길조차 주지않았지만, 나중에는 원에 도착하면 맨발로 뛰어나와 맨 먼저 안기던 그 아이를..

비록, 부모의 이기심과 잘못된 생각으로, 어두운 성장을 했던 딥스. 하지만, 자신에게 준 관심을 받아가며 후에 그 만의 세계에서 모두의 세계로 나온 딥스. 비단, 책 속에서만이 아닌 우리 주위를 둘러보자. 꼭 그들의 부모가 아니더라도, 우리는 그들을 돌보고 치료할 수 있을 것이다.

다시금 지금까지 행복하게 자랄수 있도록 애써주신 우리 부모님께 감사인사를 드린다.

딥스 독후감 3

"나는 안아픈척하고 웃어 줄 꺼예요~...."

이 책은 딥스라는 한 소년이 자신의 정신적 장애를 정신 요법 치료 과정, 자세히 말하면 놀이치료를 통해 자아를 되찾고 사회에 적응해가는 것을 말한 실제의 있었던 사실을 바탕으로 한다.

무엇보다도 나는 이 책을 읽고 부모의 잘못된 생각과 편견이 아이를 어떻게 망치는지 생각해 보았다. 비록 부모가 좋은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지만 아이에게 감정적인 것과 지적인 면의 균형을 이루지 못하고 가장 필요한 사랑과 관심, 이해가 부족함으로 딥스가 자신의 세계에 갇혀버린 것이라 생각된다.

이 책을 읽는 순간 순간 섬뜩할 정도의 책임감을 느끼곤 하였다. 이책의 딥스의 모든 행동들은 간단히 그냥 넘어갈 수 있는 '정신적 충격을 가진 아이가 극복한 내용이구나' 라고 생각하기에는 너무나 미묘한 모든 것을 담고 있는 것 같다.

이 딥스의 행동들을 보면서 만일 내가 다니는 유치원에 이런 아이가 온다면 이 아이에게 다른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따뜻한 사랑을 보내면서 돌봐 줄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자신이 없다는 생각이 들자 부끄러운 마음 마저 들었다.

나의 놀라운 감정은 딥스의 놀이방 치료 시간부터 시작되었다. 딥스의 행동들 말들 느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딥스와 곁에 있으므로 느껴지는 분위기까지 모든 것은 나에게 수수께끼...풀어야할 사건? 아무튼 줄줄이 계속 나로 하여금 내 생각들을 모두 끄집어내어 짜마춰보게했다. 수없이 많은 의문들을 제시하고 풀어가고 그러면서 딥스와 하나 되어가고 있었다. 놀이자체도 딥스이고 딥스 자체도 놀이이다.

딥스의 놀이는 딥스의 모든 것을 함축해놓고 있었다. 딥스가 하루하루 올때마다 더 많은 상상도 못할 무한한 가능성을 가지고 왔다. 어린아이인가 싶을 정도로 많은것들을 할고 하고 있었다. 아이임에도 그런 행동이 나온다는 모습에 섬뜻하고도 불쌍한 느낌 또한 들었다. 딥스가 인형의집 놀이를 하며 "닫지마!"라고 외쳤을 때 정말 너무나도 놀라서 눈물이 찔끔하고 나왔다. 얼마나 방안에 갇혔으면 그런 온몸을 떨며 외칠까라는 생각이 들면서 딥스의 부모가 정말 너무나 원망스러웠다. 또 벽을 뜯어내며 "딥스는 벽이 싫어" 라고 외칠 때 딥스의 갑갑함과 분노 등이 내 가슴속에서 터져나와 폭파되어갔다. 그리고 노란색을 싫어하며 쏟아붇고 물에 행구고 할 때는 나도 모르게 억하는 소리마져 나오게 했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원색인 노란색 대부분의 아이들이 귀여워 하는 색일 것이다. 그러나 딥스가 이렇게까지 경멸하는걸 보면 아마도 놀이방 색이 노란색이어서 그다지도 소름끼치게 싫어하는게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딥스가 나무나 토끼 등을 좋아하고 사랑한다는 내용에서는 딥스에게서 따뜻함과 사람다움이 물신 풍겨났다. 딥스도 하나의 따뜻하고 맑은 영혼을 가진 아이이다. 다만 상처받은 영혼을 달래줄 그 누군가가 없어서일 뿐이다 라는 생각을 하니 또다시 울적해 지기도 했다. 아빠 인형을 모래속에 파묻고 괴로움을 호소하며 폭력적으로 나올때는 아빠가 어떻하길래 딥스가 저런 행동을 할까 라고 생각하면서 딥스가 조금은 심한게 아닐까라고 생각해 보았지만 딥스를 아버지가 대려 오셨을 때 그 모습이라고는...아이를 이해하기는커녕 조금도 사랑하지 않는 것 처럼 보였다. 정말 옆에 있었으면 한 대 때려주고 싶은 마음까지 들어다. 사랑 받아 본적이 없는 사람인가? 라고 느낄 정도로 사회속에서 메말라 있었다. 합리주의라는 고통된 삶이 사람을 저렇게 만들었구나...라고 생각하자 딥스의 아버지 또한 딥스처럼 희생자라는 생각과 함께 불쌍함마져 느끼게 했다. 그리고 딥스가 주사 맞으러 가는 날 딥스의 여동생에대한 딥스의 감정은 정말 잔인함마저 느껴졌다. "나는 안아픈척하고 웃어 줄 꺼예요~"이 말안에는 정말로 많은 것이 담겨진 것 같다. 아이가 저렇게 감정을 숨길 수 있을까 동생에 대한 질투심과 증오심같은 모든 감정들과 생각들이 담겨있었다. 언제봐도 정말 무서운 놀라운 아이였다. 그림을 그리고 인형놀이를 하면서 딥스는 계속 자신을 찾았다.

점점 나아지는 딥스의 모습은 정말 행복해 보였다 완전한 행복은 아니었지만 점점 자신을 찾아가고 자신을 그 누군가가 좋아해준다는 생각을 깨닳으면서 사랑스러운 모습을 보일 때 정말 천사 같아 보였다. 딥스가 엄마에게 안기는 장면에서는 눈물마저 흘렀다. 얼마나 사랑스러운 아이인가 이런 사랑스러운 모습을 감추기위해 이 아이는 얼마나 괴로웠을까란 생각에 정말 안타까운 심정이 벅차올랐다. 딥스가 거의 치료를 완성해 갈 즈음에 유치원 교사들과의 대화에서 딥스의 이중성을 보이는 모습에서 또한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의 능력을 숨기는 딥스... 사회화를 배우는 것일까? 정말 딥스의 생각은 너무도 깊었고 딥스의 행동은 너무나 치밀했다.

상상 할 수 없는 아이...아니 거의 모든 아이가 그렇겠지만 딥스는 좀더 특별했다. 적어도 내가 느낀 바로는 말이다. 교회에 처음 가본날은 웅장함 마져 거룩함마저 들었다. 커다랗고 높다란 교회의 모습을 보고 딥스는 표현하지 못한 어떠한 많은 생각을 했을까 더욱 알고 싶은 마음이 들자 내가 아주 어릴 때 처음 교회에 갔을 때 느끼던 느낌이 들었다. 무섭지만 편안하고 낯설지만 따뜻한 느낌이 들었던 딥스도 그런 느낌을 가지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을 해보았다. 딥스와의 마지막 만남에서는 (나중에 또 만나지만 사무실에서의 마지막 만남은) 가슴이 찡했다. 서류함에 선생님과 딥스만 남겨둔 추억들 녹음기로 녹음한 딥스의 목소리 모든 것이 눈앞에서 펼쳐졌고 귓가에서 맴돌았다. 아쉬움과 뿌듯함 기쁨과 슬픔등 정말 딥스는 항상 모든 감정을 한꺼번에 느끼게 해 주었다. 마지막으로 딥스와의 재회에서는 너무나도 반가웠다. 너무나도 멋지게 훌륭하게 자란 딥스의 모습은 정말 티없이 맑고 예뻐 보였다. 믿음직스러움 마져 느낄 수 있었다. 천재학교 이름도 들어 보지 못할 뻔했던 딥스에게 이런일이일어나게 한 에이선생님이 너무나 존경스러워 보였다. 모든 것을 받아들이게하고 찾게되도록 도와주신 에이선생님을 보면서 정말 너무 대단한 느낌이었다. 딥스의 모습은 너무나도 성공적이었다. 그리고 책이 끝나갈 무렵 딥스는 나에게 또 한번의 감동을 주었다. 학교 신문사설의 내용은 역시 딥스다 라는 생각이 들게했다. 너무나 멋진 행동 역시 인정받고있는 딥스 정말 뿌듯함이 물신 풍겼으며 자랑스러웠다.

딥스의 가족은 서로를 너무 모르는데서 이런 결과가 나온 것 같다. 부모는 아이에 대해서 좀더 알고 또 사랑해야 했으며 아빠는 일보다도 가정을 가꿔야 했고 자신의 행동과 언행에 책임을 질 줄 알아야 했다. 가끔 아들에 대한 사랑을 그냥 장난감을 사주는 걸로 만족한다고 생각한것도 서로 상호작용을 하였다면 그것이 다가 아니었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또한 엄마는 그런 아빠와 딥스 사이에서 서로의 사랑을 연결하는 중간역할을 했어야 하는데 그냥 남편만을 생각하며 차가운 엄마가 되어 이렇게 된 것 같다. 딥스 또한 태어나기 전부터 증오와 불안감만을 받고 자랐으므로 부모가 나를 싫어한다고만 느끼므로 이 가정은 딥스의 모든 모습은 이루어진 것 같다.

이 글을 읽으면서 난 한 정신장애를 가진 어린이가 놀이 치료라는 것을 통하여 정상적인 정신을 회복하는 과정에서 교육의 중요성을 느꼈다. 액슬린 박사가 딥스 그 정신박약아의 눈높이에 맞추어 딥스의 수준을 파악하고 그 문제를 풀어 한 아이의 인생을 바꾼 그 사실에 감동을 받았다. 여기에서 나는 교육을 가르치는 교육자의 역할도 아주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교육자는 개개인의 특징을 잘 파악하고 이해하여야 하고 그 특성을 펼칠 수 있도록 한 사람의 잠재력을 최대한 끌어내었을 때 그 사람의 능력이 잘 발휘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딥스의 예처럼 부모가 아이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하고 부모의 입장에서만 어린아이의 행동을 요구하게 되면 그 아이는 그로 인하여 좌절하고 실망하여 더 이상 어떤 행동도 할 수 없게 된다. 또한 부모가 아이들의 빠른 성장을 기대하여 이런 많은 기대가 아이들에게 해를 준다는 것을 모르고 있다. 이로써 딥스는 소위 문제아, 정신박약아가 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어린이의 학습 능력에서 개인마다 차이가 있다는 것에도 알아야 할 것이다. 딥스가 원했던 것은 세상 사람들 모두가 원하는 바로 그런 것이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자기자신의 가치를 깨닫는 바로 그것이다. 다른 사람들에게 필요한 사람, 존중받을 수 있는 사람, 그리고 인간적 존엄성을 지닌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그런 사람이 되는 것이다.

이 글을 읽고 난 후 나의 인생에서의 명암을 알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내 자신을 좀 더 깊게 이해하며 깨달을 수 있게 된 것 같다.

딥스 독후감 4

딥스, 자아를 찾아서..란 이 책은 자기 속에서 고립되어 세상과 타협하지 않는 자신에게 다가서는 모든 것이 두려운 대상인 한 아이가 놀이 치료법을 통해 자신이 만든 울타리를 벗어나 정상적인 삶을 살아가게 되는 이야기를 그린 것이다. 놀이 치료법이란 아이들이 가진 정서적 부적응이나 발달상의 문제를 놀이를 통해서 도와주는 심리치료방법이다.

저자이자 딥스를 치료한 액슬린 박사는 "어떤 행동이나 반응이 단 하나의 경험이나 감정에서 연유하는 일은 없다. 개개인에게 동기를 부여하고 그 개인이 반응하는 방식의 배후에는 대단히 개인적인 감정과 목표, 가치관들과 얽혀진 경험의 축적이 있다."라고 말을 한다. 딥스가 두려움과 분노로 자신의 울타리 안에서만 생활하게 된 것도 액슬린 박사의 말처럼 동기가 있었던 것이다. 딥스의 부모들은 딥스를 액슬린 박사에게 보내면서 조건을 달았다. 그건 딥스의 부모..자신들은 심리치료사와의 상담은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아이의 행동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볼 수 있고 또 조언을 받을 수 있는 부모들의 냉담은 답답한 노릇이었지만 액슬린 박사는 그들에게 상담을 권했다가는 딥스 마저도 치료를 받지 못할 것이란 걸 알고 있었기에 말조차 꺼내지 않는다. 하지만 치료가 시작되고 딥스가 조금씩 좋아질 무렵 딥스의 어머니가 상담을 요청해옴으로써 액슬린 박사는 딥스의 자폐아적인 행동의 동기를 찾아낼 수 있었다.

딥스의 어머니는 촉망받는 외과의사, 아버지는 유능한 과학자로써 이들은 아이를 갖기를 원치 않았다. 딥스의 아버지는 아내가 전문직에서 성공하는 것을 격려했고 그것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이들은 행복한 결혼생활이었고 그것에 만족하였다. 하지만 딥스가 태어나면서 이들의 삶과 생활은 완전히 뭉개지기 시작했다고 한다. 다른 아이들이 태어날 땐 축복과 많은 이들의 기대 속에서 태어났지만 딥스는 그가 태어나는 것과 동시에 거부당했으며 그의 부모에겐 딥스는 자신들의 삶을 망치는 어떤 개체에 지나지 않았다. 태교를 중요시하는 이유는 아이가 뱃속에 있을 때부터 어머니와 자신의 상황에 대한 지각 능력과 청각 능력 등의 거의 모든 것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런 중요한 시기에 그의 부모들의 실수로 생긴 아이로 인한 스트레스와 애정 없는 태교는 딥스를 정서적으로 불안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딥스의 부모는 딥스는 정신 지체아로 오인을 했다. 지적 능력을 최우선시하는 집안에서 자란 부부는 원하지 않는 아이를 가진대 다가 정신지체아라는 것은 더욱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딥스가 정신지체아라는 것은 애정 결핍으로 인해 딥스가 장애를 일으키는 것이 자신들의 책임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못하는 부모의 일관적인 생각이었다. 딥스의 어머니는 직장을 그만두고 자신의 아이를 드러내놓지 않기 위해 모든 사람들과의 만남을 두절한다. 딥스가 그랬듯이 부모들 또한 자신들의 결함을 감추기 위해 지적능력을 방패로 사용해왔던 것이다. 이것은 감정의 교류나 그들이 처한 상황을 이해하려 들지 않았다. 이것이 바로 딥스를 두려움과 분노라는 것으로 내면의 세계에 감옥을 만드는 동기가 된 것이다.

또 하나의 동기는 딥스 부모들의 육아 방식이다. 딥스의 어머니는 딥스 자신에게 능력이 있다는 것을 항상 증명하도록 교육을 시켰다. 2살밖에 안 되는 아이에게 사물을 지각하고 그것의 이름을 맞추는 일을 강요한 것이었다. 그녀도 피해자이리라..자신의 애정을 표현하는 길을 몰랐던 것 같다. 그녀는 아이에게 강압적으로 그의 능력을 증명하도록 함으로써 자기위안을 삼았을지도...여하튼 이런 교육방식이 딥스를 탁자 속으로 밀어 넣는 계기가 된 것임은 틀림없다. 또한 딥스의 아버지는 딥스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딥스가 하는 말은 모두 쓸데없는 말이라고 여기고 그의 난폭한 행동을 볼 때면 딥스를 방에 가두고 밖에서 자물쇠로 문을 잠그는 것이었다. 큰 죄를 지어 감옥에 갇히는 어른들도 감당하기 힘든 이런 행위를 딥스의 아버지는 감성적으로 무방비상태에 있는 어린아이에게 자행한 것이다. 딥스의 어머니의 말을 들으며 액슬린 박사는 "그런 환경에 있는 아이가 자신을 통제하면서 감수성을 유지해왔다는 사실이 오히려 놀라울 뿐이었다"라는 말을 한다. 공감할만한 부분이다. 놀이 치료를 하면서 보여준 딥스의 감수성은 구박이나 강압, 애정 없는 관심이란 것을 모르고 자란 나보다 더 뛰어나다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이런 아버지의 무관심과 무시, 면전 앞에서의 핀잔..이것들은 딥스가 사람들의 질문에 반응하지 않는 아이로 만들었다.

딥스를 만난 유아교육이나 정신과를 전문한 사람들뿐 아니라 그의 부모들도 딥스를 정신지체아로 여기기엔 그의 능력은 너무도 뛰어났다. 다른 자폐아들이 보이는 행동을 보이기는 했지만 그들과는 다른 무언가를 가지고 있었다. 그랬기 때문에 딥스의 육아학교 선생님들은 딥스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버리지 않았다. 딥스가 정상으로 돌아오는 가능성을 항상 지니고 있었고 그를 도우려했지만 그들은 딥스의 내면세계는 들여다보려고 하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선생님의 관심과 애정은 좋은 영향을 준 것만은 틀림없다. 만약 딥스를 정신지체아 학교로 보내기를 선생님들이 동의했다면 상상하기도 싫은 한 아이의 인생이 바뀌게 되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딥스와 액슬린 박사의 만남은 아주 조심스럽게 학교의 놀이방에서 시작되었다. 액슬린 박사는 딥스가 원하는 것은 하도록 그대로 내버려두었고 또한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듣고 있다는 것을 표현해주었다. 정식으로 놀이치료를 하는 것이 딥스의 부모로부터 허락되고 딥스와 액슬린 박사는 일주일에 한번 목요일에 1시간만 만나는 시간을 갖게 된다. 이것이 놀이치료의 시작이었다. 액슬린 박사는 절대 딥스를 이리저리 끌고 다니면서 액슬린 박사의 주도권아래 그의 병을 고쳐준 것이 아니었다. 딥스가 자기 내면 깊은 곳에 구축하고 있는 세계에 액슬린 박사는 자신의 눈높이를 맞추어 딥스의 문제를 딥스의 수준에서 이해하려고 애를 썼다. 어린 아이의 눈에 눈높이를 맞추는 일이 쉽지 않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다. 딥스의 치료는 성공적이었다. 그의 부모들도 딥스가 변해 가는 모습을 보면서 자신들의 잘못을 깨닫고 그것을 고쳐 가는데 마음을 열고 딥스를 받아들인다. 더 이상 딥스는 자신이 만들어 놓은 울타리 안에서 움츠리고 있을 필요가 없는 것이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게 되었으며 가족이라는 집단에 자신이 포함된다 것도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 책이 시사하는 바는 액슬린 박사가 시도한 놀이 치료법을 널리 확산시키는 것과 딥스의 부모들이 벌인 만행을 우리가 부모가 돼서는 하지 말아야 한다는 교훈을 준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우리는 어린 아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잘 알지 못한다. 어린 아이 또한 어른들의 생각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어른들의 생각을 강요하기보다는 좀더 오래 살고 그들을 헤아릴 수 있는 좀더 성숙된 감성과 지성으로 그들의 눈높이를 맞추라는 것일 것이다. 비슷한 책인 한 아이라는 책도 읽었는데..그책이 시사하는 바도 역시 어린아이에게 부모의 사랑과 주위의 관심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시사하고있다. 아동을 전공하고 심리와 놀이치료를 공부하고자 하는 나에게 교수님께서 소개해주신 많은 책들이 참으로 많은 도움이 되었다. 특히나 이 두 책들은 버림받고 소외당한 그 아이들을 치료하는 선생님들이 너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나중에 놀이치료 선생님이 된다면 이 책의 경험을 떠올리며 우리의 소외당하고 버림받은 아이들을

사랑으로 감싸주고 싶다..

이 독후감을 쓰면서 많은 것을 느꼈습니다. 분노와 슬픔 기쁨등..또한

아이의 관점에서 생각해 볼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되었습니다.

딥스 독후감 5

이 세상에 아이들만큼 신비한 것이 또 있을까? 내게 있어 아무것도 아니었던 그 조그만 아이들이 점차 관심의 대상이 되고, 귀여워지다가 차츰 궁금해지고 신비해지더니 어느새는 경이롭다는 느낌마저 들게 되던 때에, 딥스라는 아이를 책으로 만나게 되었다. 내가 조금씩 느껴왔던 그 모든 것을 단 한번에 전해주는 딥스의 이야기.

사회적인 명성을 가진 지적인 부모에게 딥스는 원치 않게 생긴 아이였다. 그 때문에 태어날 때부터 딥스는 부모의 따뜻한 사랑대신 차가운 냉대를 받게 되고, 자신의 능력만을 확인하려는 부모의 양육 밑에 있게 된다. 이런 이유로 딥스는 스스로 마음의 문을 닫아, 아무도 자신에 대해 알지 못하도록 철저히 주변의 세계로부터 자신을 가두게 되고, 바보 내지는 정신적 결함이 있는 아이로 몰리게 된다. 그런 딥스를 안타깝게 생각하면서도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몰라 난감해 하던 유치원 선생님들은 놀이치료의 대가인 액슬린 여사에게 아이를 의뢰한다. 딥스는 액슬린 여사의 놀이방에서 매주 1시간씩 지내면서, 놀이를 통해 조금씩 조금씩 부모에 대한 분노를 표현하며 결국에는 자신을 찾게 된다.

책을 읽고 나서, 딥스의 이야기를 통해 부모교육 강의를 통해 얻게 된 이론적인 지식들을 실제적으로 ??????아~정말 그렇구나~??????하며 느낄 수 있게 되었다. 강의시간에 부모와 자녀의 관계는 상호작용의 관계여야 한다고 배웠다. 부모가 일방적으로 아이에게 무언가를 제공하기보다는 아이가 자신의 욕구 및 필요를 자발적으로 표현해 내는 것을 관찰한 후에 그에 부응하는 도움을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 아이와 함께 시간을 보내며, 대화를 나누고 갈등을 토의하는 등의 부모의 양육이 전인적 발달에 큰 영향을 미친다고 했다. 하지만 딥스의 부모는 그렇지 못했다. 딥스에게 필요한 것(특히 물질적인 것)을 제공하기는 했지만 딥스가 부모와 대화를 나누길 원하고 가까기 다가서려 할 때에 그들은 아이를 무시하고 혼자 내버려 두었고, 결국에 딥스는 지적인 영역만 발달한 불균형적인 아이가 되었다. 또 어머니와의 신뢰감 형성등의 경험이 없는 딥스는, 효과적인 의사소통의 방법을 습득하지 못하고, 혼자만의 세계에서 자신과의 대화만을 나눌뿐, 주변의 모든 사람들을 신뢰하지 못하게 된다. 딥스의 부모님은 거부적이고 통제적인 양육태도로 그 나이의 어린이가 의례 실수할 수 있는 사소한 문제도 따뜻하게 용납하지 않으며 방안에 아이를 가두는 등의 체벌과 심리적인 위압감을 딥스에게 줌으로써, 아이가 자아에 대한 분노를 갖게 하고, 내면화된 갈등과 고통을 겪게한다.

여기까지 글을 쓰고 나니 점점 화가 치밀어 오르기 시작한다. 정말 이것이 뭐란 말인가. 이 모든 것이 6살 먹은 어린아이가 감당해내야 하는 문제라니.......나 역시도 그랬지만, 어른들은 아이들도 자기 나름대로의 사고가 있으며, 감정이 있는 인간이란 사실을 잊고 지내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아이는 아무 생각도 없는 한 낱 인형 같은 물건이 아니다. 태어나면서부터 늙어 죽을 때까지의 인간의 모습 중에 가장 신비롭고, 소중하며, 그 만큼 쉽게 깨질 수도 있는 보물 같은 존재. 자신만을 생각하며, 아이를 아무렇게나 해도 되는 자신의 소유물쯤으로 여기는 어른들의 태도는 이러한 귀한 보물을 변질시키고, 상처 내어서 일개 퇴물로 바꿔 버린다. 그러고도 그 책임을 인정치 않고 그 모든 잘못을 아이들에게로 돌려버리는 것이다.

책을 읽으면서 흥미로웠던 사실은, 딥스 스스로가 자신의 문제를 풀어내었다는 점이다. 놀이치료라고는 하지만, 그 시간에 액슬린 여사는 '적극적 경청??????의 방법으로 딥스를 대했을 뿐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시술(?)을 한 것은 아니다. 딥스가 혼자 놀이를 하고 감정을 드러내고 그것을 폭발시키고 하면서 그 문제가 해결된 것이다. 아이는 정말 신비롭다. 그 안에는 문제와 그것의 열쇠가 함께 들어 있다. 조금만 관심과 사랑을 주면, 그 속에서 무한한 가능성이 쏟아져 나온다. 아이의 부모라면, 그런 자신의 자녀의 가능성과 신비함을 볼 줄 알아야 한다. 그래서 그것들을 아이가 씨앗삼아 자신과 자신의 삶을 사랑하며 그 삶의 행복을 스스로 만들어 나가도록 도와줘야 한다. 하지만, 그 씨앗은 사랑이라는 토양아래 심어져야 싹이 튼다. 진심으로 아이를 사랑하며 바라보는 것과, 단지 의무감만으로 바라보는 것을 아이는 귀신처럼 알아낸다. 자신이 사랑받고 있다는 것을 아이가 느낄 때, 그 아이의 싹은 놀라운 성장을 보이지만, 자갈밭에 심어진 씨앗에서는 아무런 것도 기대할 수 없다.

딥스는 상징적인 놀이를 통해서 상처 입은 감정들을 쏟아 놓고, 마침내 소중한 자아를 깨닫게 되었다. 자신을 ??????나??????라고 부르며 ??????나는 내가 좋아요??????라는 말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또한 부모님을 용서하고 마음의 문을 열어 ??????엄마, 엄마가 좋아!??????라는 고백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자신과 가족을 찾은 딥스는 부모의 사랑아래 튼튼한 나무로 무럭무럭 자랐을 것이다. 우리는 모두 나무를 가꾸는, 밭을 일구는 농부의 마음을 갖고 부모의 자리에 서야 할 것이다. 나 자신 스스로도 미성숙한 상태에서 어떻게 아이를 올바르게 키울 수 있겠는가. 우리는 사랑을 갖고 아이를 존중할 줄 아는 성숙한 부모가 되기 위해 끊임없는 노력을 해나가 제2, 제3의 딥스가 생기지 않도록 해야할 것이다.

딥스 독후감 6

처음을 어떻게 써야 할지 모르겠다. [딥스]를 읽으며 느꼈던 분노를 처음부터 막무가내로 표현 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러면 [딥스]의 교훈에 대해서 먼저 얘기해보도록 하겠다.

'딥스'라는 아이의 잃어버린 자아를 찾아주는 과정에서, '액슬린'이라는 박사는 놀이치료를 통한 눈높이 교육의 훌륭함을 보여주고 있다.

'왜 딥스는 장난감 병정들을 모래 구덩이 속에 파묻고 그들이 죽었다고 선언했을까?'

'딥스는 왜 여섯 살이나 되었으면서도 우유병을 빨고 다니길 고집했을까?'

'딥스는 왜 자기 집에서는 읽고, 셈하고, 문제를 해결할 줄 아는 능력을 애써 숨기려하면서 놀이 치료 방에서는 그 능력을 과시하려고 애썼을까?'

'딥스는 왜 갇힌 애완용 동물에 관심이 크고, 나가는 문을 만들길 좋아하는가?'

'딥스는 왜 모래 속에 장난감 병정을 묻어 놓고 아빠라고 불렀는가?'

이런 모든 것이 액슬린 박사가 자신의 눈높이를 낮추어 딥스의 세계를 이해하려고 애쓴 단서들이었다.

그리고 딥스를 대할 때에도 딥스에게 무엇을 하라고 강요하기보다는 딥스의 의견에 존중하기 위한 태도 즉, 딥스가 하고 있는 행동에 대해 "딥스가 하려는 것은 무엇이구나. 이러해서 딥스가 이렇게 하려는 것이지?" 이런 식의 단지 동의뿐이었다.

이것이 무엇이 어려워서 다들 딥스를 이해하지 못했냐고 반문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반문의 답은 '어렵다'이다.

어렵다! 단지 어린아이의 눈높이에 맞춰 그들의 고유한 세계를 이해한다는 것은 어른이 되어가면서, 나이가 점차 들어가면서, 사회에 적응해 가면서 점점 더 어려워진다.

하지만 이 어려움을 이겨나가는 것이 부모가 해야하는 역할이며 책임이다. 딥스의 부모는 이것을 이겨내지 못했고, 사회적 능력에 비해 부모의 능력으로는 빵점에 가까운 듯 보였다. 그리고 내가 딥스의 부모들에게서 더 한 분노를 느꼈던 건 그들의 욕망과 이기심에서 요즘 현대인들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딥스의 부모는 계획하지 않은 아이를 가지게 되자, 태아일 때부터 아이로 인해 절망하고 아이를 사랑으로 보지 않고 그들의 앞길을 막은 걸림돌로 보았으며 사회적 관계를 막게 하는 장애물로 보았던 것이다. 또한 그들 스스로 아이를 정신박약아로 인정해 버렸고 아이의 문제가 그들이 자초한 것임을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그리고 딥스의 문제해결방법에 있어서도 그러했다. 돈으로 자식을 키운다. 돈으로 살 수 있는 것은 모두 사주면서 아이에게 최선을 다했다는 책임감에서 벗어나려는 부모들의 마음... 요즘 돈 많은 부모들이 그러하지 않은가?

또 딥스와 아빠와의 관계는 그를 복수심과 증오로 가득차게 만들었었다. 아빠는 딥스 앞에서 "딥스는 지금 천치처럼 지껄이고 있어" 라고 할 정도로 딥스에 대한 예의(?)와 이해심이 없었고, 딥스를 따뜻한 눈빛으로 봐준 적이 없었던 아주 차가운 사람이었다. 액슬린 박사의 '함께 이야기하고, 함께 놀아 주어라'는 충고로 딥스 부모의 행동변화가 일어났는지는 모르겠지만.. 딥스의 아빠는 딥스가 자아를 찾아가는데 있어 큰 역할을 했다.(비록 문제도 만들긴 했지만...)

어느 날 아침, "아빠 안녕히 주무셨어요? 오늘은 좋은 시간을 가지세요." 하는 딥스의 말에 아빠는 천치처럼 지껄인다는 비난이 아닌 "잘 잤니? 딥스야. 너도 좋은 시간을 가지렴" 하는 따뜻한 말 한마디를 건냈다. 이것! 아빠의 조그만한 행동이 딥스의 큰 문제점의 해결 실마리였던 것이다.

그리고 딥스에게있어서 자신을 찾지 못하는 방황 속에서도 딥스가 자기를 표현하는 두 사람이 있었다. 할머니와 제이크 아저씨. 할머니는 정기적으로 딥스의 집에 오면서 딥스에게 따듯한 눈빛을 주시는 분이었고, 제이크 아저씨는 딥스의 집에서 일을 하고 있는 아저씨인데 딥스는 이 아저씨를 아주 좋아하는 듯 하였다. 늘 딥스의 말이나 의사는 무시해버리고 자기 생각대로만 하는 아빠와는 달리, 제이크 아저씨는 늘 딥스의 말을 들어주고 딥스가 바라는대로 해 주었기 때문이었다. 그 제이크 아저씨의 이해심과 따뜻한 친절이 이 어린 아이의 성장에 얼마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가를 얘기해준다.

여하튼 딥스의 부모들은 끝내는 딥스를 이해하고 딥스와 함께 하는 가족애에 성공하였다. [딥스]의 해피엔딩은 딥스가 자신을 찾아 헤맨 끝에 마침내 자랑스러운 자아를 깨닫게 되는 것이다.

나는 [딥스]를 읽으며 한편으론 이런 생각을 했다. 딥스는 불행중에 그나마 다행인 행복한 아이다. 왜냐하면 그들의 부모에게 그나마 돈이라도 있었으니 말이다. 만약 딥스의 부모가 돈마저 없었다면 액슬린 박사를 만날 수 있었을까? 액슬린 박사를 만나지 못했다면 천재성을 띠고 있는 딥스가 자아를 찾을 수 있었을까? 그들의 부모는 딥스를 이해할 수 있었을까? 우리에게 많은 것을 남겨주는 이 책에 대해 이렇게 얘기한다 것이 썩 내키진 않지만 돈이 없었다면 하는 가정이 든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딥스]를 통하여 이해하게 되는 것은 "어린이들의 고유한 세계가 존재한다." 는 것이며 아동의 학대가 꼭 폭력만이 아니라, 그들의 생각을 무시하고 어른들의 눈으로 보이는 것만을 주장하며 그들의 의견에 무조건 따르라는 강요도 아동들에게는 큰 정신적인 학대이며, [딥스]를 통해 어른들은 어른의 눈높이를 아이의 수준에 맞출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유난히 교육 열의가 높다고 한다. 자녀를 훌륭하게 키우고 싶어 아직 말도 하지 못하는 아이에게 영어를 가르치려 하고 취학 전 아동들에게도 서너개의 학원 일정으로 스트레스를 주며 병을 만들기도 한다. 요즘 부모들은 깨달아야 한다. 아이들이 빨리 자라기만을 바라지 말고 순리대로 두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방법이며 자녀를 훌륭하게 키우려면 부모 자신의 욕구와 고집스런 관점에서 벗어나 아이들의 눈높이에서 그들을 이해하고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또한 그렇게 되려면 우선 부모가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사회의 안정된 가치구조가 있어야 한다. 자라나는 밝은 새싹들을 위해 그들의 부모도, 그들의 살아갈 사회도.. 모두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

딥스 독후감 7

어린이들을 관찰해보면 잠자는 시간 외에 깨어 있는 동안에는 항상 놀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된다. 그들은 놀이를 행하면서 그 자체에 즐거움을 느끼고, 행복해 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또한 어린이들은 놀이를 통해 그 누구도 가르칠 수 없는 많은 것을 배우고 경험하며 성장해 간다. 이렇게 놀이란 어린이에게 생활의 전부라 할 만큼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 웃음과 행복이 없는 딥스라는 아이가 있다. 딥스는 아무도 자신에 대해 알지 못하도록, 철저히 주변의 세계로부터 자신을 단절시켜버린 아이이다. 그러나 놀이를 통해서 상처 입은 쓰라린 감정들을 쏟아내고, 자랑스러운 자아를 되찾게 된다.

딥스는 사립학교에 다니면서 아침에 자기의자에 앉으면 온종일 움직이지도 않고 벙어리처럼 아무 말도 않는다. 그 사립학교의 선생님들도 딥스와의 원만한 관계를 맺어보려고 부단히 애를 써보지만 아무 소용이 없다. 딥스는 누군가 다가오면 움추리고 엎드려서 움직일 줄을 몰랐고 다른 사람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는 법이 없으며, 묻는 말에 대답을 하는 법도 없었다.

딥스의 행동은 선생님도 어떻다고 꼬집어 말할 수 없이 고르지가 못했다. 어떤 때는 정신 장애아처럼 보였고, 어떤 때는 묵묵히 일을 빠르게 처리하여 지능이 높을지도 모른다는 암시를 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딥스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

딥스는 지적으로 뛰어난 부모에게서 태어났지만 부모의 사랑을 받기보다 자신의 능력만을 확인하려는 부모로부터 스스로 마음의 문을 닫아 버렸다. 아무도 자신에 대해 알지 못하도록 철저히 주변의 세계로부터 자신을 단절시켜 버린 것이다.

딥스는 처음보는 아동상담소의 임상병리학자 액슬린 박사를 놀랍게도 자발적으로 잘 따라준다. 하지만 방안을 둘러보는 딥스의 발걸음은 무거웠고 도대체 웃음과 행복이 없는 아이처럼 보였다. 이 아이에겐 생이란 무겁고 두려운 것이었다.

딥스는 자신을 3인칭으로 표현함으로써 지적인 면의 성취 능력이 고도에 있으면서도 정서적인 장애로 인해 그 능력이 저해 받고 있었다. 딥스는 예측할 수 없는 일관성이 있으며, 현실에 입각한 제한을 받는 데 대해 안정감을 느끼고 있었다.

어느날 액슬린 박사는 딥스의 어머니를 만나게 되고 부모 인생의 장애물이 되었던 아버지로부터 냉대와 미움을 많이 받았던 애기를 듣게 된다..

딥스는 모래놀이를 통해 숨겨진 분노가 터져나오기 시작한다. 모래성에 아버지 인형을 가두면서 난폭하지만 점차 분노를 발산한 후 스스로 한 고비씩 넘기는 것이다. 딥스는 아빠에 대한 미움과 복수심이 개선되면서 비로소 보다 개방적이고 직접적으로 표현하였고 실질적으로도 딥스와 아빠의 사이는 점점 더 좋아지고 있었다.

그는 이제 자아를 찾기 위해 방황했지만, 마침내 자랑스러운 자아를 깨닫게 되었다. 이제 딥스는 자신 속에 존재하는 능력과 맞먹는 균형있는 자아의 개념을 세우기 시작한다.

우리의 생활 속에는 '빨리'라는 속성이 잠재적으로 깔려있다. 그러나 어린아이들은 그들 나름대로의 눈높이가 있기 때문에 빨리 성장하기를 재촉하는 것은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한다. 요즈음의 우리 어린이들은 많은 것을 성취하고 성공하고 즐기도록 무거운 압력을 받고 있다. 재촉을 받는 어린이들은 어릴 때부터 여러 가지 형태의 성취를 하도록 떠밀리고 적응하기를 강요받는다. 성장을 재촉 받는 아동은 실패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해 스트레스를 받으며 또한 준비도 되기 전에 물리적, 심리적 그리고 사회적으로 성인처럼 될 것을 강요받는다. 아이들에게는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보고 생각하고 느끼려 하는 것들을 허락하는 아이들을 위한 눈높이를 맞추는 일이 이루어져야 한다.

우리의 가정에서는 여러 가지 스트레스에 직면하고 있는데 특히 자신의 공허하고 지루한 존재라는 생각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하는 존재가 바로 자녀라고 생각하면서 자식들이 자신을 존경하고 자신에게 관심을 기울여 주기만을 기대하고 있다. 부모는 자녀의 성취에 대한 자부심을 갖고 그들의 교육에 관심을 갖고 부모의 고집스런 관점보다는 아이들에게 눈높이에서 그들을 이해하고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학교에서는 마치 공장의 생산라인에서 빈 병을 가득 채우는 것처럼 아이들을 일괄적으로 대하고 있으며 아이들이 그대로 채워주지 않으면 담당교사에게 압력을 추어 아동의 관리를 철저히 하게 한다. 학교에서 강조하는 것은 아동을 재촉하는 것이며 이는 정신능력과 학습 속도에서의 개인차는 무시하면서 구 체계에 따라갈 수 없는 아동은 학습 불능자 또는 문제아로 취급하여 버리는 것이다. 우리의 학교는 이처럼 아이들의 빠른 성장을 촉구하고 성인의 사고방식으로 대체하려고 한다. 아이들은 그들 자체를 존중해 주어야 하며 눈높이를 맞추어 각 아동의 특성에 맞는 교육과 개인차를 인정하여 아이들의 바람직한 성장을 도와야 한다.

물론 학교와 가정의 바람직한 역할도 필요하지만 이것을 뒷받침 해주는 사회의 안정된 가치구조가 있어야 한다. 제 아무리 학교와 가정이 올바르게 나아간다 하더라도 사회적으로 그들을 지지해줄 보호체계가 서지 않는다면 결국 가정과 학교의 노력이 불필요해 지는 것이다. 학교와 가정이 아이들에게 성인으로 될 것을 요구하고 재촉하지 않으며 아이들의 자신의 능력과 적성에 맞는 교육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사회가 환경자로서의 역할을 충분히 해주어야 한다고 본다. 그리고 문제를 지닌 아이들이 있다면 그 아이들을 그냥 문제아로 취급하고 방치해 둘 것이 아니라 치료하고 보호해 줄 수 있는 체계를 마련해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된 사회적인 원인이 무엇인지를 알고 그 원인을 해결해 나가는 방법을 간구해야 한다.

과거의 어린이였던 우리들은 의외로 어린이들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딥스의 경우 어린 시절 부모에게서 받은 절망적인 상처와 냉대로 어두운 어린 시절을 보내게 된다. 다행히 액슬린 여사의 사랑과 이해로 자아를 되찾게 되지만 자신의 쓰라린 감정들을 쏟아내고, 공통 받았을 딥스를 생각하면 가슴이 뭉클해지고 안타까워진다.

딥스의 치료과정에서 보면 놀이가 얼마만큼 중요한지를 깨달을 수 있다. 놀이는 아이들의 생활자체라는 말처럼 성장 과정의 동화와 적응의 형태로 신체적, 사회적, 정서적, 언어적 그리고 인지적으로 발달해 가는 것이다. 놀이를 치료에 적용함으로써 딥스의 경우처럼 아동들의 독특한 방식을 알 수 있고, 감정을 표현하고, 관계를 탐색하며 과거의 겸험을 재생하고 자기 만족을 하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한 놀이치료 상황에서 치료적인 관계를 맺기 위한 액슬린의 모습처럼 치료자의 역할과 환경도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달을 수 있었다. 딥스는 놀이치료를 받으며 조금씩 공포로부터 해방되어가며 자신을 스스로 발견하고 자기 나름대로 자유롭고 자신있게 사는 것을 사는 것을 배워갔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자아를 되찾아 자신에게서 행복감을 느낄 수 있는 아이로 다시 태어났다는 사실이다. 액슬린 교사의 끊임없는 노력과 딥스에 대한 조건 없는 사랑, 그리고 절대 포기란 없다는 신념을 가지고 딥스를 돌보는 자세가 너무나 훌륭해 보였다. 풍부한 환경도 중요하지만 사랑은 장애를 앓고 있는 아이를 바꾸는데 꼭 필요한 것임을 절실히 느꼈다. 무관심이 아닌 따스한 눈빛과 마음으로 그 아이의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줄 아는 자세가 그 아이가 어둡고 그늘진 터널 안에서 빛을 보고 나와 씩씩하게 살아갈 수 있는 지름길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액슬린 여사의 사려깊고 능숙한 놀이치료에 많은 갈채를 보내며 이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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