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 동원령(動員令)
이야기 안으로 들어선다. 소극장에 들어설 때마다 그렇게 생각한다. 객석은 때로 의자가 아닐 수도 있다. 그건 바닥이나 주변 사물을 이용할 수도, 혹은 그냥 서 있는 자체가 될 수도 있다. 상관없다. 그것이 무엇이든 관객을 이야기 속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최고의 방법일 테니.
불이 꺼지고 드디어 이야기가 시작된다. 즉석에서 연주하는 기타와 드럼 소리에 가슴 속 일탈이 가장자리서부터 고개를 든다. 배우들의 목소리가 그 위에 덧입혀진다. 그리고 그들의 호흡이 내 귓바퀴에 와 닿는다. 무대 위 발소리가 나무만의 투박함으로 텅텅 울린다. 그리고 내 발밑에서도 그와 같은 소리가 난다.
시간이 흐르고 어느새 비 오는 장면으로 들어간다. 관객 동원령이 내려진다. 인라인스케이트를 신은 배우들이 물총을 들고 관객석으로 뛰어든다. 그리곤 어린 사내아이들의 놀이처럼 사방으로 갈겨버린다. 데이트를 나섰다 예상치 못한 소나기를 만난 것처럼 모두가 아수라장이다. 코르셋과 가터벨트 차림의 배우들이 객석을 휘젓고 다니며 관객들 다리 위에 앉아 교태를 부린다. 그리고 장면이 모두 끝났을 땐 우리 모두 폭우 속을 정신 없이 지나온 차림새로 착석한다. 이미 관객은 이야기 세계에 사는 사람이 되어 있다. 배우와 똑같이 그 상황에 부닥쳐 웃고, 울고, 소리 지르고, 연기한다.
이번엔 논란의 여지가 많았던 현대 음악가 존 케이지의 <4분 33초> 안으로 들어선다. 연주자는 정확히 4분 33초 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이 곡은 연주할 때마다 다른 음악이 된다. 조용한 홀 안에는 누군가의 기침 소리, 숨소리, 속삭이는 소리, 종이 넘기는 소리, 옷이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그리고 그 모든 소리가 합쳐져 하나의 음악을 완성한다. 이것이 이 곡이 매 순간 달라지는 이유다. 청중, 연주자의 컨디션, 상황과 환경이 매번 같을 순 없기 때문이다.
그의 친구 라우센버그의 작품 <그리지 않은 그림> 안으로 들어서면 비슷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이 작품은 제목 그대로 아무것도 그리지 않은 흰 캔버스가 전부다. 그러나 시시각각 달라지는 햇빛, 관객의 움직임에 의해 생기는 그림자가 이 작품을 완성한다. 어찌 보면 영원히 완성되지 않을 그림이라 할 수도 있고, 그래서 더욱 관객의 호기심을 끄는 매력을 지녔다 하겠다.
그렇다면 책은 어떤가. 그 어떤 매개체보다 유구한 역사를 가지고 독자들을 붙들지 않았던가. 독자는 작가가 이끌어가는 이야기 안으로 들어가 주인공과 함께 상상 속에서 만난다. 그의 샴쌍둥이 형제처럼 한 몸이 되어 사랑하고, 싸우고, 생각하다 보면 어느새 심장이 풍선처럼 부풀었다 줄었다 한다.
작가는 ‘나’였다가 ‘너’이기도 하고, ‘그’ 혹은 ‘그녀’가 되어 태도를 바꾼다. 그 말은 주인공이었다가 관찰자였다가 방관자가 되기도 한다는 뜻이지만, 어느 입장에서 볼지는 전적으로 작가에게 달렸다. 그리고 작가는 무엇이든 독자를 이야기 속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최고의 방법을 택할 것이다. 하지만 1인칭, 2인칭, 3인칭만으로 독자를 유혹하는 이야기보다 더 적극적인 수를 쓰려는 작가는 없을까. 가령, 독자더러 대 놓고 이 안으로 들어와. 네 생각은 어때? 이런 식이다.
친구들과 놀이로 하던 ‘소설 이어 쓰기’가 그렇다. 메인 작가인 내가 기본 틀을 잡아 시작하면 독자인 친구들이 돌아가며 자기가 원하는 이야기를 이어가는 식이다. 독자들은 자기가 이야기에 참여할 수 있다는 것에 열광했다. 내가 원하는 대로 주인공이 움직이고, 생각하는 건 얼마나 매력적인지. 이걸 집단지성이라 부를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여러 사람의 생각을 뭉쳐 하나의 이야기로 만들어 내는 일은 꽤 큰 쾌감을 가져왔다. 다 차려 놓은 밥상에 앉아 그저 맛에만 집중하게 하느냐, 아니면 밥상을 함께 차려 먹느냐의 차이가 아닐는지. 그렇다면 전자의 경우, 더욱 전문적인 맛을 창작자가 내밀면 독자는 우아하게 칼질을 하며 음미할 것이고, 후자는 누구나 만들기 쉬운 요리를 독자 스스로 만들어 보며 큰 공감을 맛볼 것이다.
몇 해 전 설날, 드라마를 보다가 깜짝 놀란 적이 있었다. 티브이 속 주인공과 그의 가족들이 함께 아침을 먹으려는 장면이었는데 모든 배우가 시청자인 나, 즉 카메라를 보며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하곤 밥을 먹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연기를 이어갔다. 순간 내가 그 드라마 안에 들어가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런 걸 우린 ‘4인칭’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무대, 악보, 캔버스, 스크린 밖의 관객, 청중, 독자를 끌어들여 하나의 작품에 포함하는 일. 수동적 감상평이 아닌 능동적 참여로 한 호흡 안에 녹아드는 일.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재미를 넘어선 예술의 경지가 아닐까 감히 생각해 본다.
요즘 시대 예술이 보여주는 4인칭의 시도를 문학계에서 꿈꿔 보는 건 아직 무리일까? 하지만 어느 시대나 괴짜가 탄생하듯 어떤 작가가 짠 나타나 독자 동원령을 내릴 날이 올인지도 모르겠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도 내 말에 동의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