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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산. 골수 산꾼들 이야기. 2014년 2월호>
젊은 날 등산의 올가미에 걸려 있던 산꾼들
4월의 잔설이 남아있는 칠형제봉에서(좌로부터 양폭산채 두목 이영식. 필자. 영국인 샌디)
뒤에 보이는 배경은 범봉
설악동의 금강운수 구 종점(현 소공원 자리)
울산암 아래 야영지에서
설탕포대를 멘 신승모(일명 신 브라운)
설악산 ‘등반 비사’ 속의 클라이머들 이야기
글·사진 이용대 코오롱등산학교 교장
산악인들에게 남한 최고의 명산을 뽑으라면 어느 산을 택할까. 그건 두 말할 나위 없이 단연 설악산을 으뜸으로 꼽을 것이다.
광복 이전 만해도 이 산은 금강산의 그늘에 가리어 산 이름조차 아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백두대간의 준령 깊숙이 모습을 감추고 있던 은자(隱者)의 산이었다.
다듬어진 경관이 금강산이라면 설악산은 자연 그대로의 감추어진 경관을 지닌 산이며 금강산에 버금가는 화려함과 웅장함마저 모두 지니고 있는 산이다. 일찍이 육당 최남선은 <朝鮮의 山水>(1947년 동명사)에서 두 산을 다음과 같이 비교했다. ‘금강산은 너무나 제 모습을 모두 드러내어 마치 주막집 색시같이 아무에게나 손을 내미는 모습이지만, 설악산은 절세미인이 그윽한 계곡 속에 숨어 수줍은 듯이 손짓하는 여인의 모습과 같다’라고 두 산을 비교했다.
남한 제일의 절경과 등반성 고루 갖춘 설악산
설악산은 한국 전쟁 이후 이름을 떨치기 시작한 산이다. 설악산이 수복된 것은 1953년이다. 이후 남한에 편입되어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다. 전쟁이 끝난 후 사회가 안정기에 접어들고 1971년 영동고속도로와 설악산 산업관광도로가 개통되면서 등산의 대중화시대가 개막된다. 특히 영서와 영동의 분수령을 이룬 한계령이 뚫리면서 양양까지 120km의 거리를 46km로 단축되어 한계령, 오색, 장수대를 기점으로 하는 등산로에 많은 사람들이 쇄도하기 시작했다. 이런 등산 붐이 일어나면서 설악산은 대중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했고, 남한 제일의 절경과 등반 성 모두를 갖춘 명산으로서의 왕좌를 굳힌다.
설악산은 험준한 암봉과 암릉이 골격을 이루고 있어 암벽등반 대상지가 도처에 널려 있다. 한반도 최대의 폭포인 토왕성폭, 대승폭, 소승폭, 그밖에 실폭, 갱기폭, 형제폭, 백미폭 등 난이도 높을 폭포들이 수 없이 걸려 있어 겨울철이면 수준 높은 빙벽등반 대상지를 제공하고 있다. 한국 최대를 자랑하는 울산암, 장군봉, 적벽, 유선대, 범봉, 장군석봉 이외도 암릉등반 대상지인 천화대, 흑범길, 석주길, 염라길, 칠형제 봉리지, 몽유도원도, 봉화대리지, 죽순봉리지, 적십자길, 삼형제길, 노적봉리지, 용아 장성릉, 남설악전망대리지, 오색 만경대리지, 울산바위리지 등 수많은 등반대상지가 산재해 있는 한국 알피니즘의 심장부가 되는 산이다.
지금은 설악산까지 포장 도로망이 잘 정비되어 접근이 용이하지만, 등반가들이 찾기 시작한 1960년대 후반과 197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설악산까지의 접근은 편도 7~8시간이 걸렸다. 서울 마장동에서 출발한 시외버스는 비포장도로를 따라 인제와 원통을 경유해 진부령을 넘어 속초로 갔다. 당시 원통~용대리는 일방통행 구간이었고, 한계령과 미시령은 군사도로로 일반 차량이 통제되던 시절이었으니 당시를 회상해보면 격세지감이 있다. 흙먼지를 뒤집어쓰고 속초까지 운행하던 금강여객 버스에는 안내양이 동승하던 시대였으며, 당시 설악산을 찾는다는 것은 지금의 해외원정보다 더 어려웠다.
그렇게 찾아가기 어려웠던 설악산은 알피니즘을 꿈꾸는 많은 클라이머들에게 훈련의 장이자, 마음의 고향 같은 곳이었고, 그래서 그 산 안에는 전설 같은 얘깃거리와 노래. 시까지 생겨났다.
설악산은 너무나 많은 것을 가지고 있다. 바위로 골격을 이룬 산과 짙푸른 동해까지‘’‘’‘’ 여기에다 ‘나는 산이 좋더라. 파란 하늘을 통째로 호흡하는 나는 산이 좋더라. 멀리 동해가 보이는 설. 설악. 설악산이 좋더라. 로 시작되는 <설악산 얘기. 진교준 작시>라는 시를 가지고 있고, 또 서러움이 복받쳐 오르는 애절한 가락의 <설악가.이정훈 작사. 작곡>라는 노래까지 가지고 있다. 이 시기에 가장 애창되었던 산 노래는 <설악가>가 단연 으뜸이었다. 별빛이 긴 꼬리를 그리며 떨어지는 설악산 자락에서 우쿨렐레의 반주에 맞추어 <설악 가>를 부르면 평소 뽕짝에만 익숙했던 일반인들도 이내 감동할 정도였다. 당시 한국의 산쟁이들 사이에서 <설악 가>를 모른다면 간첩으로 오해받을 정도로 1970년 발표된 이후 지금까지 널리 애창되고 있다.
“굽이져 휜 띠 두른 능선 길 따라 달빛에 걸어가던 계곡의 여운을
내 어이 이즈리오 꿈같은 산행을 잘 잇 거라 설악아 내 다시 오리니“
애조를 띤 3/4 박자의 설악 가는 설악을 찾는 많은 산 꾼들을 감동시켰다.
추락이 가져온 횡재, 천연 자수정
옛날이나 지금이나 산쟁이들은 장비 욕심이 대단하다. 등산장비가 턱없이 부족했던 1960~1970년대는 더욱 그랬다. 장비를 소중하게 다루고 아끼는 것이 산쟁이들에겐 계율처럼 여겨지던 시대였다. 어쩌다 모르고 자일을 밟거나 깔고 않으면 엉덩이에서 불이 날 정도로 선배로부터 얼차려를 받았다.
어느 해 여름 설악산 울산암으로 등반을 갔다. 선등자 김진원(남극 빈슨매시프 한국 초등반대 대원)이 리딩을 하면서 순조롭게 두 번째 마디를 끝내고 세 번째 마디의 오버행 턱을 넘어서려는 순간 갑자기 10여 m를 추락했다. 그는 허공에 대롱대롱 매어달려 빙글빙글 회전을 하다가 멈춰 섰다.
아래에서 이를 지켜보던 선배 한 사람이 “야! 진원아 자일 상한 데 없니?”라고 소리쳐 추락자의 부상보다는 자일의 손상 여부부터 확인했다. 김지원은 “형, 사람보다 자일이 더 중합니까. 부상부터 확인하는 것이 순서가 아닌 가요”라고 볼멘소리로 퉁명스럽게 응수했다. 당시는 이처럼 장비를 자신의 분신이나 자식 이상으로 애지중지하던 시절이었다.
이날 김진원은 추락 지점에서 전화위복의 기회를 잡아 횡재한다. 그는 뒤집힌 자세로 전면의 바위 구멍을 바라본 순간 보랏빛의 광채를 띤 천연 자수정을 발견한다. 자기 눈을 의심했다. 추락의 충격으로 인한 착시현상인가 의심하면서 다시 확인했다. 그러나 그 바위구멍 속에는 분명 어른 허벅지 굵기의 천연 자수정이 빛을 발하고 있었다. 수백 년 동안 삭마작용을 일으켜 속살을 드러낸 채 그를 기다려온 자수정과의 운명적인 해후였다. 추락의 노고를 보상하기 위해 울산바위 산신령이 그에게 큰 선물을 한 것이다.
이날 저녁 계조암 옆 캠프지로 돌아온 대원들은 뜻밖의 전리품을 놓고 분배방식에 대해 논의했다. 팀 전체의 소득이니 공정한 방식으로 분배하자는 의견과 최초 발견자에 대한 선취특권을 인정하자는 두 가지 의견이 대립되었다. 결국 이 수정은 최초의 발견자에게 돌아갔고 백수인 그는 장비 구입을 위해 당시 주공의 중견간부로 있던 선배 G씨의 손에 이 수정을 넘긴다.
그 후 그는 한국 남극 탐험대(대장 홍석하)의 일원으로 허욱(악우회), 이찬영(보우회, 사망), 허정식(은벽산악회), 권오환(하켄클럽)과 함께 남극 최고봉 빈슨매시프에서 한국인 최초의 등정을 이룩한다.
퇴직금과 맞바꾼 히말라야 티켓
울산암에서 추락하면서 횡재를 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거금을 잃었다가 다시 찾은 사람의 이야기 또한 추억으로 떠오른다.
1980년대 국산 등산화의 선두주자로 국내시장을 제패했던 레드페이스 CEO를 역임했던 최성수. 그의 원래의 직업은 국세청에 적을 둔 세리(稅吏)였으나 자기가 선택한 길을 가기 위해 천직으로 삼았던 공직생활에 마침표를 찍고 1984년 히말라야 자누(7,710m) 북벽(대장 김기혁 양정고 OB)을 향해 인생항로를 수정한다.
그는 원정훈련의 일환으로 출국 몇 개월을 앞두고 울산암을 등반했다. 울산암 중앙벽 세 마디를 오른 뒤 넓은 테라스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기 위해 배낭을 벗어 바위에 올려놓는 순간 실수로 배낭을 놓쳐 버렸다. 허공을 향해 사라져가는 빨강색의 배낭을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그의 얼굴이 백지처럼 창백하게 질리면서 허둥댔다.
“형, 큰일 났습니다. 저 배낭 속에는 원정 비용에 쓸 500만 원 현찰이 들어 있으니 이 일을 어찌하면 좋지요.”
그는 이렇게 말하면서 벌레를 씹은 표정을 지었다.
우리는 즉시 서둘러 하강을 했고 배낭이 떨어진 지점을 찾아 숲속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배낭의 행방은 묘연했다. 모두가 지쳐 체념했을 무렵 울산암 밑에서 야영하는 한 무리의 대학산악부 학생(관동대 산악부)을 만나 배낭의 행방을 물어보았다. 이때 한 여학생이 텐트 안에 들어가 빨강색 배낭을 들고 나왔다. 그가 전한 배낭 안에는 묵직한 화폐 뭉치가 온전하게 들어 있었다.
아마도 이 배낭을 영영 찾지 못했다면 그의 하얀 산에 대한 열망은 접었을 것이고, 그의 인생행로가 조금은 달라졌을 것이다. 그가 직장과 맞바꾼 원정의 성과는 자누 북벽 세계 최초의 동계 초등정이라는 영예를 남겼다.
뚝심의 사나이 무데포(無鐵砲) 홍 이야기.
1970년대 초 한국 알피니즘의 무대는 8000m급 만년설이나 1000m급의 거벽이 아닌 표고가 낮은 설악의 암장에서 기교적인 등반에 만족하면서 머물러 있었다. 당시 우리나라 바위꾼들에게 군계일학격의 등반대상지가 된 곳은 설악의 울산암과 토왕폭 이다. 당시는 경제여건상 해외진출이 어렵던 시절이었기에 울산암과 같은 암장에서의 활동도 돋보이던 시대였으니 울산암만 자주 다녀도 대단한 활동으로 평가했다. 당시 일 년의 절반정도를 울산암의 품에서 살아왔던 사람이 지금의 <사람과 산>대표 홍석하다.
이후 그는 한동안 바위를 떠나 있었다. 사연인즉 한 학기 학교등록금을 투자하여 관광 사업을 시작하고 있었다. 당시 설악산을 간다는 것은 지금의 해외원정 보다 더 어려웠던 시절이다. 한계령 비포장 군용도로가 개통 된지 얼마 되지 않았고 고속도로가 없던 시절이었다.
그의 시대를 앞서가는 사업적인 선견지명은 이미 70년대에 다가올 관광 사업의 미래를 예견한 듯 설악산 자양 전(장수 대) 일원에 하계 휴양 캠프장을 조성하여 관광객을 유치하는 사업을 시작했다. 인제군청의 허가를 받아 캠프장을 조성하고 휴양객 유치사업을 시작했다. 캠프지 조성은 그가 속한 보우 산악회의 후배들을 동원하고 그들을 가이드로 채용했었다. 그러나 시대를 앞서가는 그의 사업적인 안목은 실패로 끝났다. 당시 그가 임대하여 운행했던 버스는 초원관광으로 기억된다.
70년대 초 우리나라 국민 소득은 한가롭게 관광버스를 타고 놀러갈 만치 성숙되어 있지 않았고 레저 문화에 대한 일반의 인식이 사치스럽게만 느껴지던 시기였다. 당시 우리의 경제 소득은 레저를 즐길 정도의 여유를 지니지 못했고, 농촌에서는 보릿고개라는 춘궁기가 있던 시절이었으니. 바캉스나 레저문화라는 개념조차 낮 설기 만 하던 시대였다.
그는 하루에 한 번식 운행하는 버스의 손님을 채우기에 급급한 나머지 적자 운영의 타개책으로 내설악 일대의 암벽등반 개척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바위 꾼들을 모집하여 버스를 운행하였다. 그의 고객 대부분은 휴양이나, 관광과는 거리가 먼 백수의 바위 꾼들이 대부분이다 보니 공짜 고객이 절반정도였다는 것은 당연한 결과다.
그가 소속된 보우 산악회원이나, 평소 가까이 지내던 계우 산악회원등 공짜 승객을 태우고 다녔으니 수익을 챙기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결국 이 사업이 남긴 손익계산서는 한 학기 등록금만 길바닥에 흩어버리고 그가 얻은 소득은 내설악 일대의 치마 바위. 장군석봉. 선바위 등에 바윗길을 얻은 것뿐이다. 보우 와 계우 합동등반으로 9개의 초등 루트개척을 성공시키는 성과로 끝맺음을 하는데 그쳤다. 관광 사업은 실패하고 그가 얻은 소득은 새로운 바윗길을 얻는데 그친다. 그가 유독 내설악 일대의 계곡과 암장 등 모든 지형에 대해 손금 보듯 소상하게 알고 있는 것은 이때의 경험 때문이다.
필자와 홍 사장은 그 후 설악산의 울산 암. 등에서 틈만 나면 바위를 올랐다. 어느 해인가는 울산 암 동 북면에서 그 친구 특유의 막무가내 식의 무데포 기질을 발휘 저돌적인 기세로 선등을 하다가 10여 미터를 추락하여 늑골이 부러지는 골절상을 입고도 동료들의 도움 없이 태연스럽게 설악 동 까지 걸어 내려와 귀경 후 입원을 한 적 도 있었다. 당시 필자는 그의 육중한 몸을 업을만한 힘이 없었으니 그가 태연한척하며 걸어 내려오도록 방관할 수밖에 어쩔 도리가 없었다.
이후 그는 남극 세종기지 설립의 전초전으로 1985년 ‘한국남극 관측탐험대’를 지휘하여 한국최초로 영하 42도의 정점 남극대륙 최고봉 빈슨매시프(5140m)에 허욱. 이 찬영. 허 정식 등을 정상에 오르게 하여 세종기지를 건설할 수 있도록 교두보 역할을 한다. 이와 같은 공로로 그는 정부로부터 국민훈장 동백장을 수여 받는다.
두둑한 뱃심과 뚝심이 트레이드마크인 그는 지식산업을 창출하는 출판업자라기보다는 모래판의 씨름꾼과 같은 100kg의 거구를 지닌 사람이다. 몇 년 전 파키스탄 히말라야의 레디핑거를 원정한 그는 베이스캠프까지의 트레킹과정에서 운송수단으로 임대한 조랑말을 타고 가다가 그의 체중을 못 이긴 말이 발목 골절상을 입고 주저앉기도 했다. 이런 모습의 그가 20대에는 날렵한 몸매로 암벽등반을 즐겼던 사람이라고 한다면 그 누가 믿겠는가.
행위만 있고 기록문화가 남겨지지 않는 우리 산악문화의 척박한 풍토를 바람직한 방향으로 활성화하기 위해 만든 오늘의 “韓國 山書會”는 20년 전에 홍 사장과 필자 그리고 허 창성 씨 등에 의해 준비된 모임이다. 그가 임기 2년의 산서회의 회장을 맡아 등산문화 활성화를 위해 시도한 일은 많다. 우수 산악도서를 선정하여 일반 독자들에게 산서(山書)의 세계를 널리 알렸으며, 중앙에만 편중한 등산문화 환경을 지방 도시로 확산시키기 위해 부산 등지에서 산악도서전시회를 열기도하였다.
그는 등산뿐만 아니라 잡기에도 능한 사람이다. 장기. 바둑은 고수급의 실력을 지니고 있으며, 누구와 겨루어도 패하지 않는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강한 승부근성 과 집착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가 바둑돌을 잡으면 국수전의 대국을 방불케 할 정도다. 우직한 성정과 추진력. 그리고 두둑한 배짱은 그의 크나 큰 강점이기도하다. 그러나 이런 무데포 근성이 실패를 자초 한 일이 여러 차례 있었다. 매사 한계의 끝까지 바닥이 날 때까지 밀어 붙이는 그의 근성과 뚝심은 낭패를 불러오기도 했다. 어느 해 여름 울산 암에서의 일이다. 그는 후배들의 쌈지 돈 모두를 빌려 소공원의 빠징코 장에서 가진 돈 모두를 잃는다. 귀경할 차비마저 바닥이 나자 후배를 서울 어머님에게 구원특사로 파견하여 차비를 마련해오기도 한다.
그의 이런 장점이 가장 잘 드러난 분야가 재정난으로 허덕이는 창간직후의 월간<사람과 산>을 어음 한 장으로 배짱 좋게 인수하여 숫한 우여곡절을 극복하면서 국내 최고의 등산전문 잡지로 굳건한 터전을 일군 일이다.
사삼(蛇參) 약발로 고소에 오른 ‘申브라운’
한국 산쟁이 중 살아있는 백과사전으로 불리는 문무 겸장의 학구파로 평가받는 신승모. 그는 밀가루 포대에 피켈을 찔러 넣고 빙장에 등장하거나 산신당의 제물을 비상식으로 챙겨오는 등 바위꾼들 사이에서 기인행각으로 유명했던 친구다. 1987년 한국 최초로 동계 에베레스트 등정을 성공시킨 원정대의 등반대장이자 국내 최초로 동계 에베레스트 영문보고서 <Orient Express to Crystal Summit>를 펴낸 학구파 산악인이다. 그는 평소 영국의 전후세대를 대표하는 유명한 등반가 조 브라운(Joe Brown)을 좋아했다. 이런 연유로 그에게 붙여짐 별명이 ‘신 브라운’이다. 그도 그렇게 호칭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듯 만족해했다. 그는 영문 보고서 외에도 1990년 <정상의 순례자들>(수문출판사)이라는 제호의 세계 유명 알피니스트 27인의 열전을 펴내기도 한다. 그는 지금 재미 뉴욕산악회와 미국의 한 대학에서 교수로 활동하고 있다.
그의 주량은 소주 한 잔이 정량이다. 그러나 가끔은 보약대용으로 술을 즐긴다. 어느 해 여름, 그와 나는 설악산 울산암에 갔다. 내가 먼저 오른 뒤에도 그는 바위에 오를 생각을 접은 채 주위를 살피면서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승모야! 빨리 등반 끝내고 오징어 회 먹으러 속초에 가자”
그 소리에 그는 뒤늦게 허둥대며 올라왔고, 무엇인가 꿈틀대는 군용양말을 허리에 차고 내 앞으로 다가왔다.
“형님. 오늘 횡재했습니다. 이 양말 속에 사삼(蛇參 : 살모사) 한 마리 챙겨 넣었습니다. 사주를 담가 체력 보강에 쓰겠습니다.”
그날의 신승모는 산꾼이 아닌 영락없는 땅꾼의 모습이었다. 물론 집에 돌아와 보신용으로 사주를 담가 먹었다.
1982년 마칼루(8,463m) 원정에 나선 그는 최종 캠프까지 진출하여 허영호의 등정을 지원했다. 그는 사주를 복용한 탓인지 한 번도 고소증세에 시달린 적이 없었다고 했다. 당시 이 원정대는 허욱, 허정식, 남선우(월간 마운틴 대표), 이찬영, 송병민(토왕성빙폭 초등자), 신형기(연세대 국문과 교수), 허영호 등 최강의 멤버라 불릴 만한 걸출한 산쟁이가 많이 모여 있었다. 당시 신승모 등반대장의 희생적인 지원이 성공의 바탕이 되었다고 후배들은 입을 모았다. 이 등반에서 허영호는 세계적인 등산가 예지 쿠쿠츠카가 1981년 가을 정상에 놓고 온 무당벌레 마스코트를 등정 증거물로 가지고 내려와 미등정 의혹에 휩싸였던 쿠쿠츠카의 마칼루 단독등정을 증명해준다.
이들 중 허정식은 타고난 바위꾼일 뿐만 아니라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주당이었다. 그는 1981년 한국 최초로 수직고 1,000m의 알프스 최난벽 드류(3,733m)를 올랐고, 1980년 요세미티의 하프돔을 한국인 최초로 오른 뛰어난 바위꾼이다. 그는 지금 월간 <사람과 산>에서 밥벌이를 하고 있다.
이미 저세상 사람이 된 이찬영은 한국 최고의 폐활량을 지닌 산쟁이였다. 7,500m 이상의 고소 캠프에서 10일 이상을 머물고도 건재했던 그다. 그는 위계질서가 엄한 산악회 조직 속에서 기지를 발휘하여 지긋 지긋한 취사 당번을 면하기도 한다. 쌀 속에 돌과 비린내 나는 조기를 함께 넣고 밥을 지어 선배들의 비위를 상하게 하고, 이빨을 망가뜨려 그 후부터 그는 식사당번에서 퇴출당한다. 식사 따까리 면제는 평소 그가 바랐던 바다.
설악의 오묘함을 터득한 천화대의 비박
산속에서 한데 잠을 경험한 산악인이라면 비박이 등산의 세계에서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에 대해 구구한 설명을 안 해도 대강은 알고 있기 마련이다. 숙소가 없는 사람들이 지하철역 대합실에서 밤을 지내는 것을 노숙한다고 하고 이런 사람들을 노숙자라고 하지만 등산세계에서의 노숙은 그 목적부터가 사뭇 다르다.
마땅한 주거지가 없는 노숙자들은 생활의 방편으로 노숙을 하지만 산악인들은 절대 절명의 위기 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최선책으로, 또는 등반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비박을 택하는 경우가 많다.
하늘의 아름다움을 가장 잘 접할 수 있는 기회는 비박을 하면서 뜬 눈으로 밤을 새울 때였다. 반짝이는 별들을 구경하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다. 밤하늘은 어느 위도 어느 경도에서 봐도 아름답지만 산 위에서 볼 때가 제일 아름답다는 것을 나는 설악의 암릉에서 경험했다.
필자가 경험한 첫 비박은 감동적이기보다는 태풍 속에 갇혀 날밤을 보낸 기억이 전부다. 그때는 너무나 고통스러웠기 때문에 아직도 선명한 잔영으로 남아 있다. 한창 혈기 방장하던 30대 중반 때 이야기다. 눈만 뜨면 보이는 것이 암벽뿐인 시절이다. 당시 산의 자유를 찾아나서는 데는 직장이라는 사회적인 제약이 발목을 잡던 시절이었다. 주 1회로 제한된 암벽등반에 대한 갈증은 항시 아쉬움만 남겼다.
어느 해 여름 8월 중순의 더위가 절정에 이른 때였다. 광복절 연휴에 하기휴가를 덤으로 보태 동료 네 명과 외설악 천화대에 붙었다. 중간쯤에서 날이 저물자 적당한 장소를 찾아 비박에 들어갔다. 출발 전날 태풍이 북상할 것이라는 기상예보를 청취했지만 묵살해 버렸다. 하늘엔 주먹만 한 별이 총총했지만 자정 무렵부터 시속 40km로 북상하는 태풍의 진로에 노출된 채 공포의 중압감 속에서 밤을 보냈다.
낭만적인 비박이 될 것이라 생각하며 올랐던 천화대는 태풍 속에 휘말리면서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온밤을 판초로 몸을 감싸고 추위에 벌벌 떨면서 세찬 바람과 싸워야했다. 다행히 새벽녘에 바람이 자기 시작했고, 멋진 일출을 볼 수 있어 다행스러웠다.
나의 첫 비박은 이렇게 끝났다. 대자연의 순리를 어긴 대가는 이처럼 혹독했다. 객기에 가득 찬 젊은 날의 허장성세가 빚은 나의 첫 비박은 이렇게 끝났다.
당시 비박용구는 카시미론 인조솜으로 누빈 침낭과 군용 판초가 방풍용으로 쓰이던 때였다. 지금처럼 가볍고 성능이 뛰어난 고어텍스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보면 고통스러웠던 첫 비박의 체험은 산악인으로서 겪어야 할 일종의 성장통이었다. 그날 천화대에서의 뜬눈으로 지새운 하룻밤은 ‘비박(Biwak)’이 아닌 뜬눈으로 밤샘을 한 비박(非泊)이었다.
농민의 별이 된 산악인 이경해
2003년 멕시코 칸쿤에서 열린 세계 무역기구 제5차 각료회의장 정문 앞에서 한국의 한 사나이가 ‘우루과이 협상’을 반대하며 자해를 시도한다. 그는 정상적인 방법으로 위기에 처한 우리 농민들의 절박한 입지를 설명할 길이 없자 “누가 우리 농민을 죽이는가?”라고 외치며 가슴에 칼을 꽂고 우리 농업의 어려움을 세계에 알린 후 운명한다.
대다수의 국민들은 그를 농민운동가로 기억하고 있지만 한때 그는 에베레스트 등정의 꿈을 키워왔던 산악인이다.
그와 함께했던 1975년 설악산 동계등반은 잊을 수 없는 추억이다. 당시 동양산악회는 일본 산학동지회(山學同志會)의 자누 훈련대와 몇 년에 걸쳐 친교를 맺고 있었다. 그들과 북한산 인수봉에서 첫 만남이 있은 후 한국을 방문할 때마다 그들은 토왕성빙폭에 깊은 관심을 보여 왔으며 1975년에는 토왕성빙폭 합동등반을 제의했다.
그들은 바다 건너에 있는 토왕성을 탐냈으며 상당수준의 정보와 장비를 갖추고 왔다. 등반장비를 보고 우리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당시 한국에서는 구경조차하기 어려운 방수로프(7mm x 150m) 2동과 살레와 제품의 바르트훅 50개 등을 준비해왔다. 토왕폭 등반에는 부족함이 없는 장비였다.
우리가 토왕골로 들어갈 때 비룡폭포 못미처에서 한 산악인을 만났다. 일본인들의 장비를 유심히 살펴본 그는 이 정도 장비와 그들의 기량이라면 초등의 영예를 일본인들에게 빼앗기는 것은 시간문제라고 말해 주었다. 그 말을 듣고 우리들은 난감했다. 순간 민족적인 자존심이 발동했다. 자칫하면 일본인들에게 토왕폭의 처녀성을 내주는 결과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구실을 만들어서라도 이들의 등반을 막아야했다.
하단 벽에 도착했을 때 토왕폭은 우리를 거부하고 있었다. 심한 낙수 때문에 등반이 거의 불가능한 상태였다. 그날 이경해는 집채만 한 키슬링을 메고 나는 듯이 걸었다. 야수 같은 괴력에 놀란 일본인들은 그에게 ‘헤라클레스 리’라는 별명을 붙여 주기도 했다.
그날 밤 우리들은 구비선대산장(지금의 비선산장 위쪽)에 짐을 풀고 취침을 했으나 온돌방의 냉기 때문에 추위에 떨어야 했다. 이때 이경해가 땔감을 구해와 너무나 많은 장작불을 지폈다. 모두가 잠에 취한 한밤중에 나일론 섬유가 타는 매캐한 냄새와 연기 때문에 잠에서 깨어났다. 아랫목에 잠자리를 마련했던 일본 산악인 오미야는 “베리 하트!(very hot)”라고 외치면서 잠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이미 그의 우모 침낭은 온돌의 열기로 검게 녹아 있었고 엉덩이 부분에 가벼운 화상마저 입은 상태였다. 침낭에서 빠져나온 깃털은 방안 가득히 흩날리고 있었다. 우리는 물을 퍼부어 방바닥의 열기를 식히며 한차례 소동을 벌렸다. 그날의 일은 평생 잊지 못할 추억으로 뇌리 속에 남아 있다.
양폭 산채(山寨)의 두목 이영식
외설악 천불동에 자리한 양폭산장은 관리인 없이 방치된 을씨년스러운 건물이었다. 그 후 주씨라는 분이 관리인으로 들어왔고, 몇 년 후에는 요델산악회의 이영식이 관리를 맡게 된다. 그는 이곳에서 탐방객이 없는 평일에는 주변의 암벽들을 희롱하고, 일요일에는 탐방객들을 상대로 물건을 팔았다.
그는 짐 운반에 필요한 인력을 고용창출이란 명분으로 백수후배들로 대체했다. 당시 양폭 산채의 이영식 두목 밑에는 강구영(요델산악회 현 외대교수), 허정식, 최승도(강원대산악부 OB), 이태영(타이탄산악회), 신형기(동양산악회, 현 연세대 교수) 등 사내다운 기개를 가진 바위꾼들이 모여 수호지의 양산박 산채를 방불케 하는 터전을 마련하고 있었다.
이들은 탐방객이 적은 비수기에는 물건을 운반하여 비축하거나 암벽등반을 했고, 봄가을 성수기에는 물건을 팔고 산장 숙박객을 관리했다. 양식 없는 탐방객이 오물을 투기하거나 산장 내부에 남겨두고 가면 난리가 났다. 터프한 인상의 산채 두목 이영식은 아침마다 산장 내부를 돌며 오물을 투기하고 하산하는 탐방객들을 감시하고 몽둥이를 들고 다니며 으름장을 놓았다.
어느 날 이런 공포 분위기에 겁먹은 한 탐방객이 하산 후 설악동의 파출소에 신고했다. ‘양폭산장에 있는 조폭 두목이 탐방객들을 협박한다’는 신고였다.
그 후 이영식은 산장에서 얻은 수익금으로 양폭 산채의 후배들을 이끌고 요세미티 원정자금으로 사용한다. 1980년 이영식, 허정식, 강구영 등 세 사람이 오른 하프돔 북서벽 등반은 한국인 최초의 하프돔 등반으로 기록된다. 이영식은 당시 설악산에 등산을 온 한 아가씨(현재의 부인)와 사랑에 빠졌고 결혼 후 미국으로 이민 가는 계기를 마련한다.
양폭 산채의 두목 이영식. 그는 지금 요세미티를 찾는 한국 산악인들의 뒷바라지를 하며, 남다른 근성과 뚝심으로 LA에서 대농장을 일구는 데 성공했다. 현지 한인사회에서 그는 입지전적인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시신 담긴 물도 영약(靈藥)이 될 수 있다.
어느 해인가 1970년 초쯤으로 기억된다. 물과 관련된 추억 한 가지가 더 있다. 너무나 해괴한 일이였기에 40여년이 지난 지금도 선명한 잔영으로 내 뇌리 속에 그때의 기억이 생생하게 남아있다. 혈기 방장하던 30대 초반의 일이다. 눈만 뜨면 보이는 것이 암벽뿐이던 시절이었다. 광복절연휴에 하기휴가를 덤으로 보태 동료 5명과 함께 설악산 용아장성을 종주했다. 비상식으로 휴대한 찹쌀 미수가루를 타먹기 위해서 상당량의 식수를 휴대했다. 해가 저물자 밤하늘의 별을 보면서 비박에 들어갔고 모두가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아침에 여명이 밝아오며 봉우리사이로 떠오르는 일출의 장관을 보면서 비상식을 서둘러먹고 물을 찾았으나 식수로 챙겨온 물주머니에는 한 방울의 물도 남아있지 않았다. 각자가 휴대한 수통마저 이미 바닥이 난 상태였다. 후배가 수낭을 베개대용으로 베고 자던 중 물주머니가 터져버린 것이다. 우리는 그날 봉정 암으로 내려오기까지 한 방울의 물도 마시지 못한 채 갈증으로 허덕이면서 고사 직전에 이르기까지 등반을 했다. 수렴동대피소로 하산하던 중 한 웅덩이에서 미숫가루를 타먹고 계곡물로 세수를 하면서 더위를 달랬다. 잠시 후 그곳을 떠나려고 배낭에 코펠을 챙기던 중 물속에서 이상한 물체를 발견했다. 3m정도의 수심 속에서 교련복을 입은 고등학생의 퉁퉁 부어오른 시체가 물위로 서서히 떠오르고 있었다. 익사자 시체가 잠겨있는 물로 미수가루를 타먹은 것이다. 시체를 발견한 순간 모두가 구역질을 하였다. 비위가 유독 약한 한 후배는 용대 리 까지 걸어오는 동안 몇 차례나 더 구토를 했다. 나는 그 순간 신라고승 원효가 해골에 괸 물을 마시고 깨달음을 얻었다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는 고사를 들려주면서 그 후배를 위로했다.
신라고승 원효는 당나라 유학길에 올라 남양에 이르렀을 때 날이 저물었다. 그는 어느 무덤 앞 굴속에서 노숙을 했다. 원효는 잠결에 갈증이 나서 물을 마셨는데 날이 밝아 깨어보니 잠결에 마신물이 해골에 괸 물이었음을 알고 사물 자체의 정결함과 불결한 것은 오로지 자신이 마음먹기에 달렸다고 생각하며 큰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원효는 그길로 유학을 포기하고 신라로 돌아와 수도에 더욱 정진하여 고승이 됐다고 한다.
사물자체의 더럽고 깨끗함은 자신이 마음먹기에 달린 것이 아니겠는가. 원효가 해골에 괸 물을 마시고 정(淨). 부정(不淨)에 대한 모든 일은 마음이 자아내는 것이라고 말한 것처럼 원효의 일화를 들려주면서 익사자의 시신이 담겨졌던 무기질이 용해된 물은 영약(靈藥)이 될 수도 있다고 후배를 위로했다.
검문소헌병은 염라대왕 같은 존재
70년대 우리나라 아웃도어 시장의 규모와 국산 장비의 질은 매우 열악했다. 모든 분야가 어렵고 궁핍하던 시절이었다. 당시 등산이나 아웃도어 스포츠라는 개념은 소수계층의 호사스런 놀이처럼 알던 시대였다. 이런 시절이고 보니 수요가 적은 등산장비를 제조하여 호구지책을 연명하려는 사람이 없었던 것은 너무나 당연 한 일이다. 당시 등산장비는 등산복에서 용구까지 모두가 미군의 야전용 장비 일색이었다. 남대문 시장은 탱크만 빼고는 2개 사단병력을 무장시킬만한 물량의 군수물자가 유통되던 시절이었다. 군용청자(청색의 자일). U. S 비너(미군용 카라비너의 줄임말). A형 텐트. 버너. 침낭. 수통. 판초 등 모두가 군용품 일색이었다. 등산복은 군복을 염색 개조하여 입었으며. 지금처럼 세련된 디자인과 색상의 옷들은 상상도 못했던 시절이다. 군용 장구로 무장한 산악인들이 헌병 검문소가 있는 지역의 산으로 갈 때는 군수품의 압수를 피하기 위해 먼 거리를 우회해서 산에 올랐다. 마치 보급투쟁을 끝내고 산속으로 숨어 들어가는 빨치산 행렬과 흡사하다고나 할 까. 하지만 설악산으로 가는 길목인 철정검문소와 원통검문소는 버스 속에서 검색을 했기 때문에 산 꾼들은 압수를 피할 방법이 없었다. 군수품을 휴대한 산 꾼들에게 검문소의 헌병들은 염라대왕 같은 존재였다.
지금 돌이켜보면 세월이 변해도 너무나 많이 변했다. 모자람 없이 모두가 넘쳐나는 시대가 된 것이다. 등산열풍이 지속되면서 등산인구가 1800만 명에 육박했고, 값비싼 기능성의류는 레저시장을 6조원대로 키워냈다. 명 브랜드에 편중하는 산악인들의 수요는 날이 갈수록 늘어만 가고 있다. 이제 등산의류는 기능이나 실용성유무를 떠나 과시적 선택으로 변해가고 있는 시대가 되었다.
지금까지 해온 이야기들은 치기만만했던 젊은 날 등산의 올가미에 걸려 있던 내 주변 산꾼들에 대한 회고담이다. 40여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모두가 보고 싶다. 모두가 어렵던 시절 맨주먹 정신으로 산을 오르던 그들은 이제 칠순을 턱 앞에 둔 초로의 모습으로 변했다. 세월의 덧없음이 새삼 느껴진다.
첫댓글 전설적인 산악인들 이야기...
이 글을쓴 이용대씨 동생 이 도봉산에서 하강중 추락사 할당시 함께 있었던 시애츨 한인 산악회 유동탁형님.
허정식씨와 친구이며 뉴욕에 신승모선생님 과 절친한 강인선 형..
내가 요즘은 시애틀 에서 동탁형과 인선형 하고 함께 등반은 하지 않지만,,,,
산 이란 올무 는 산을 사랑하는 우리 모두에게 엮어 있는것....!!
오랫만에 성진이 소식듣고 글올린것 보니 반갑고 기쁘다.
제가 올 겨울 구곡에서 이용대 윤재학 선생님과 빙벽 여러번 함께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