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호남에 동학 진출
영. 호남 지역 순회
1887년 가을 해월은 전라북도 익산군 남참의리로 가서 포덕을 시작한 지 얼마 안되어 많은 도인을 얻었다. 남계천, 김정운, 김집중 등이 활약하였다.
1888년[무자년] 1월 호남 북부 도인들의 요청으로 순회에 나섰다. 전주에서 기도식을 하고 삼례로 내려갔다. 이후로 호남의 동학이 자리를 잡아갔다.
보은으로 돌아온 해월은 천식으로 고생하는 손씨 부인의 간호에 성심을 다했다. 육임직의 측근들은 병간호에 매달려 있는 스승을 안타깝게 여기어, 새 부인을 맞이하여 살림을 맡기기로 의견을 모았다. 손병희가 나서서 누이동생을 소개했다.
해월은 62세로 환갑을 지난 나이에다 김씨부인이 돌아간 지 겨우 1년이 넘었는데 새 부인을 맞는다는 것은 도리가 아니라며 거절하였다. 스승의 승낙은 가망 없다고 판단한 손병희는 그냥 청주에서 누이동생을 가마에 태워 보은으로 데려왔다. 해월도 어쩔 수없이 떠밀려 26세의 손씨 부인을 세 번째 부인으로 맞이했다.
이 해 3월 10일에 수운의 순도기념제를 지내고 도인들이 행할 새로운 절목(節目)을 공포하였다. 총 10개 항으로 되어 있고 잘 지키는 사람에게는 상을 주도록 하였다.
신정절목(新定節目)
1. 법사 어른과 자리할 때에 감히 위아래 없이 섞어 앉아 담화를 해서는 안된다.
1. 어른과 자리할 때는 장로와 법사 어른을 한결같이 존경해야 한다.
1. 육임이 만약 사리가 밝지 못하면 즉시 바꾸도록 한다.
1. 법헌이 육임 강도시에 교.집.정 3인은 15일 마다 교대한다.
1. 수도(修道)를 바르게 하지 않으면 해당 접주(接主)와 범한 사람을 같이 벌한다.
1. 충효가 남보다 뛰어나면 특별히 상을 후히 준다. 법헌이 불러다 상벌을 행한다.
1. 가족간에 사이가 좋고 가난한 벗을 구제하면 충효한 사람의 사례에 따라 상을 준다.
1. 대소사에 예절이 밝고 밝지 못함은 인의록(仁義錄)에 소상히 기재하고 성인이 될 날에는 어른에게 보이도록 한다.
1. 법사 어른에서 육임과 접주에 이르기까지 각기 표준을 두도록 하라.
1. 춘추로 향례를 봉할 때 비록 육임이라도 시임(時任)이 아니면 도인들과 같이 법식에 따 라야 한다. 이하 6개 조항은 도집(都執)이 주관한다.
1. 도중의 공용은 일일이 총찰한다.
1. 법사 어른댁의 모든 사무를 총찰한다.
1. 혹시 빈궁한 벗이 있으면 형편에 따라 구급한다.
1. 각처에서 오는 물품은 다과를 막론하고 명백히 기록하고 쓰도록 한다.
1. 장석에서 장로에게 주는 세찬은 매년 8월초 10일과 12월 20일에 엽전 5냥을 어김없이 봉송한다.
1. 포덕(布德)을 엄히 금지하여 지목(指目;관으로부터 주목받는 일)이 없도록 한다.
『동경대전』중간 (무자판, 1888)
이 해 3월 인제접의 김병내가 앞장서서 동경대전과 용담유사를 중간하였다. 김병내는 수운의 둘째 아들 최세청의 처당숙이 되는 사람이다. 현재 경진판(1880년, 인제 갑둔리) 『동경대전』과 신사판(1881년, 단양 샘골)『용담유사』는 망실되었다. 이 무자판본은 정확도가 믿음이 가는 판본이다.
이해에 입도자가 엄청 늘어났다. 전북, 충청도 지역에서 많이 입도하였고, 삼남 일대에는 큰 가뭄이 들어 농사를 거의 망쳤다. 9월부터 기근에 시달리는 이들이 노상을 배회하기 시작하였다. 해월은 도인들간에 유무상자하도록 통문을 띄웠다.
“우리 도인들은 다 같은 연원에 몸담고 있는 형제처럼 친한 사이이다. 형이 굶주리는데 동생만 배부르면 되겠는가, 아우는 따뜻한데 형은 추위에 떨고 있어도 되겠는가?” 하며 사람을 구제하는데 힘쓸 것을 권유했다. 아마도 동학이 크게 일어난 것은 이런 동학도인의 인정 때문이다.
관의 탄압이 다시 일어
1889년[기축년] 연초에 정선에서 민란이 일어났다. 군수 이규학의 학정에 시달리던 김주석이 전군직, 최용서와 같이 주동이 되어 1월 15일 민중을 이끌고 관아로 쳐들어가 군수를 축출하였다. 정부는 즉각 이천군수 정리섭을 안핵사로 보내어 무력으로 수습하였다.
해월은 정선 민란의 소식을 듣자, 관의 지목을 염려하여 도소 왕래를 삼가도록 하였다. 뒤이어 인제에서도 민란이 일어났다. 이삼득, 김시덕, 정능이 등이 무리를 이끌고 관아로 들어가 현감을 핍박하고 집을 파괴하였다. 출동한 관군에 의해 곧 진압되었고, 주동자는 효수(梟首)되었다. 동학이 활발하던 정선과 인제에서 민란이 일어나서 직접 관련은 없어도 숨을 죽이고 다녀야 했다. 이후 각지의 관아들은 동학을 다시 지목하기 시작했다.
보은 장내리에 있던 해월은 7월에 육임소를 파하고 괴산 신양동으로 피신하였다. 10월 문경사변으로 서인주, 강한형, 신정엽, 정현섭 등이 관아에 체포되었다. 동학 지도자 일부는 경사(京師)에 체포되었다. 해월을 비롯한 지도자들은 산속으로 피신하였다. 『동학도종역사』에 따르면 4인 중 한형과 현섭은 서울에서 사형되었고, 인주와 정엽은 절해고도에 유배되었다.
1890년[경인년] 1월 지목이 조금 풀리자 해월은 간성 왕곡 마을에서 인제 갑둔리로 넘어왔다. 3월에 손병희에게 연락하여 가족을 충주 외서촌 보평[보뜰]으로 옮겼다. 밀양 손씨부인의 몸에서 아들 봉조[동희]를 낳았다. 5월에는 갑둔리 김연호의 집으로 돌아왔다가 7월초순에 이명수의 집으로 다시 옮겼다. 여기서 그 유명한 “새소리도 시천주 소리”라는 설법을 하였다.
7월 그믐께 서인주가 풀려났으나 재물이 있어야 한다는 소식을 듣고 김연호(인제) 접에 지시하여 5백금을 마련토록하고 뇌물로 바치도록 지시하였다.
첫댓글 '신정절목'에 의하면 교인들 사이에 완전 평등이 이루어진 것은 아니네요. 오늘날 모든 종교들이 직급에 따라 위,아래가 있었던 것처럼, 이런 질서를 통하여 종교의 기틀을 확보해 나갔나 보군요.
120년전의 일입니다. 수운은 자기 노비를 해방시키고 자신의 며느리로 삼기도 했습니다. 해월의 시대에도 해월 자신이 조지서에서 종이 만들던 천직을 하던 분이었고, 도통을 계승하여 30여년간 동학을 보급시켜왔지요. 모든 도인들이 그를 추앙하고 따랐으니 반상의 구별을 많이 넘어서고 있었다고 하겠습니다. 사람이 모여사는 곳에서 질서는 불가피할 것으로 보입니다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