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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7회
우에노전답서(上野殿答書)
신앙은 생애 불퇴의 전진에 있다!
<강의>
젊은 지용의 연대가 확대되어 바야흐로 지구를 크게 감싸는 시대에 접어들었습니다.
인간혁명의 희망의 철리(哲理)는 세계시민에게 지혜와 용기를 보내고 있습니다.
평화를 바라는 민중과 민중의 대화의 스크럼이 폭력의 고리를 끊어버리고 인류의 미래를 여는 새로운 우정을 키워 나가고 있습니다.
이 위대한 업적은 모두 착실한 일대일의 ‘격려’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참으로 여기에 불법의 최대의 특징이 있습니다.
일찍이 미래학자인 헨더슨 박사<주1>에게 “SGI 활동은 왜 이렇게까지 세계적으로 발전할 수 있었나요?”라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나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철저하게 한 사람을 소중히 해 왔기 때문’입니다.”
격려가 벗의 마음에 ‘희망의 등불’을 지핍니다. 그리고 ‘용기’를 불러일으키고 ‘벽을 부수는 힘’을 끌어냅니다.
격려는 ‘소생의 원천’이자 ‘변혁의 문’이며 ‘승리의 대도(大道)’입니다.
‘희망의 빛’이자 ‘용기의 음성’이며 ‘미래의 건설’입니다.
‘암굴왕(巖窟王)처럼 강한 반석 같은 정신으로’
천리, 만리 길을 떠나는 머나먼 광선유포(廣宣流布)의 길이라 해도, 근본은 일대일의 격려로 시작됩니다.
우리 SGI는 불법의 격려 정신을 기조로 인류의 평화와 가치창조에 기여하는 ‘자립한 사람’ ‘사명을 자각한 사람’ ‘자타 함께 행복의 실현을 위해 싸우는 사람’을 무수히 탄생시켜 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오늘날의 세계적 발전에 이르기까지는 지용의 선구자들에게 말로 다할 수 없는 고난의 역사가 있었습니다. 편견과 중상을 물리치고 박해를 극복한 공로자 여러분의 복덕은 영원합니다. 틀림없이 권속을 감싸고 지역을 미래에까지 비출 것입니다.
은사 도다 선생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광선유포의 대투쟁이다. 암굴왕(巖窟王)처럼 무슨 일이든 꿰뚫고 나가는 강한 반석 같은 정신으로 나아가라.”
불법(佛法)은 멈추지 않는 전진입니다. 여기서 다시 한번 이야기하는데, 신앙의 핵심은 ‘불퇴(不退)의 전진’을 관철하는 데 있다는 점을 확인해 두고 싶습니다.
이번에는 <우에노전답서(수화이신초<水化二信抄>)>에서 이 불퇴전의 신심을 배웁시다.
<본문> (우에노전답서 어서 1544쪽 1행 ~ 5행) 토란의 어미줄기, 곶감, 찐쌀, 밤, 버섯, 초통 받았소이다. 월지(月氏)에 아육대왕(阿育大王)이라고 하는 왕이 계셨는데, 일염부제(一閻浮提)의 사분(四分)의 일(一)을 장중(掌中)에 넣고 용왕(龍王)을 따르게 하여 비를 뜻대로 하고 귀신(鬼神)을 곁에 두고 부리셨다. 처음엔 악왕(惡王)이었지만 후(後)에는 불법(佛法)에 귀의(歸依)하여 육만인(六萬人)의 승(僧)을 나날이 공양(供養)하고 팔만사천(八萬四千)의 석탑(石塔)을 세우시었다. 이 대왕(大王)의 과거(過去)를 밝혀 보면 부처의 재세(在世)에 덕승동자(德勝童子)·무승동자(無勝童子)라는 두 아이가 있었는데 흙으로 만든 떡을 부처에게 공양드리고 일백년내(一百年內)에 대왕(大王)으로 태어났느니라. <현대어역> 토란의 어미줄기, 곶감, 찐, •밤, 버섯, 초통 받았소이다. 고대 인도에 아소카 대왕이라는 임금이 계셨는데 일염부제(전 세계)의 사분의 일을 손아귀에 넣고, 용왕을 따르게 하여 비를 뜻대로 내리게 하고 귀신을 곁에 두고 부리셨다. 처음엔 악왕이었지만 후에는 불법에 귀의하여 육만명의 승려를 날마다 공양하고 팔만사천의 석탑을 세우셨다. 이 대왕의 과거를 밝혀 보면, 부처 재세 시에 덕승동자와 무승동자라는 두 아이가 있었는데 (이 동자가) 흙으로 만든 떡을 부처에게 공양하여 그 공덕으로 일백년 내에 아소카 왕으로 태어났다. 순수한 신심을 관철하는 문하를 칭찬 ‘불퇴’, 이 말에 대성인불법(大聖人佛法)의 근본정신이 있습니다. 그것은 어본존에 대한 강한 ‘신(信)’과 표리일체이기도 합니다. 지난번 강의(11월호 <난조효에시치로전어서>)에서 확인했듯이 난조 도키미쓰(南條時光)의 부친 난조 효에시치로는 어디까지나 ‘스승과 함께’라는 정신을 관철하고 묘법(妙法)을 수지하여 승리의 인생을 다했습니다. 아들 도키미쓰는 그 아버지의 유지를 이어받아 신심을 계승했습니다. 이번에 배독하는 어서는 아버지에게 주신 어서와 마찬가지로 흔들리지 않는 신심의 중요성을 가르친 내용입니다. 난조 도키미쓰가 이 어서를 받은 건치연간(建治年間, 1275~1278년)에는 몽고의 재내습에 대한 공포와 역병의 대유행 등으로 사회가 어수선한 시기였습니다. 또 스루가 지방은 호조일문(北條一門)의 소령이 많아, 대성인 문하에 대한 박해가 강해졌습니다. 난조 가문은 돌아가신 아버지의 뒤를 이어 도키미쓰가 지두(地頭)로서 가문을 책임지고 있었지만 결코 생활이 넉넉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조금이라도 니치렌대성인(日蓮大聖人)을 지키려고 기근이 덮치는 가운데 신변에 있는 보존식품 등을 모아 공양했습니다. 사제의 마음 하나로 순수한 신앙을 관철했습니다. 대성인께서는 이토록 변하지 않는 신심을 관철하는 난조 도키미쓰를 진심으로 칭찬하고 격려하셨습니다. 이 어서를 보내 설령 지금은 고난에 찬 상황이라 하더라도 “이 신심으로 반드시 타개할 수 있다.” “반드시 숙명전환 할 수 있다.”는 확신을 심어주십니다. 흙떡을 공양한 덕승동자 이 어서 첫머리에 공양의 공덕에 대해 인도에 실제로 존재한 아소카 대왕의 출생에 얽힌 일화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처음엔 악왕이었지만 후에는 불법에 귀의하여 여러 가지 공양을 했다.”(취의)고 말씀하시듯 아소카 대왕은 당초 포학하기 이를 데 없어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악왕이었습니다. 칼링가국(현재 인도의 오릿사 지방)을 정복할 때에는 10만명의 목숨을 빼앗고 포로로 15만명을 잡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대왕은 그 참상을 보고 마음을 바꿔 무력으로 정복하는 일을 그만 멈춥니다. 그 뒤로 불법을 깊이 받들며 공경하고 법(다르마)에 따른 시책(施策)을 실행했습니다. 구체적으로는 전쟁 포기와 복지를 실현하는 정치, 평화외교를 펼쳐 불교 이외의 여러 종교에도 관용의 자세를 관철했습니다. 또 불교 보호자로도 알려져 불전결집(佛典結集)을 지원했다고 전합니다. 내가 대담을 한 대부분의 세계적 지성인도 ‘가장 이상적인 지도자’의 한 사람으로 아소카 대왕을 들었습니다. 그 출생에 얽힌 ‘덕승동자’ 설화가 전해오고 있습니다. 옛날 석존이 인도 왕사성에 계셨을 때, 흙을 가지고 사이 좋게 노는 두 아이가 있었습니다. 한 사람을 덕승동자, 또 한 사람을 무승동자라고 하는데 두 사람은 석존의 모습을 보고 환희의 마음을 일으켰습니다. 그래서 덕승동자는 흙으로 떡을 만들어 석존에게 공양하고 무승동자는 석존을 향해 합장을 했습니다. 석존은 곁에서 시중드는 제자에게 말했습니다. “그대는 지금 이 두 동자를 보았을 것이오. 이 동자는 내가 죽고 나서 백년 뒤에 정법(正法)으로 세계를 통치하는 이상적인 왕으로 태어날 것이다.” 어서에는 이 어서 외에도 “옛날 덕승동자라고 하는 어린 자(者)는 흙떡을 석가불에 공양해 드리고 아육대왕으로 태어나 염부제의 주(主)가 되어 종국(終局)에는 부처가 되었는데”(어서 1380쪽) 등, 석존에게 진심 어린 공양을 드린 소년 덕승동자가 그 공덕에 의해 역사가 빛나는 아소카 대왕이 되었다는 설화가 종종 등장합니다. 흙떡은 당연히 먹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깨끗한 진심이 복덕의 씨앗이 되어 세계를 풍요롭게 그리고 평화롭게 하는 대왕이 되었다고 합니다. <본문> (우에노전답서 1544쪽 5행 ~ 8행) 부처는 훌륭하다고 하지만 법화경(法華經)과 비교해 보면 형화(螢火)와 일월(日月)과의 승렬(勝劣), 하늘과 땅과의 고하(高下)이니라. 부처를 공양해서 이와 같은 공덕이 있으니 하물며 법화경에 있어서랴. 흙떡을 바치고서 이와 같은 불가사의함이 있으니 하물며 종종(種種)의 과실(菓實)에 있어서랴. 그때는 기갈(飢渴)하지 않았고 지금은 굶주린 나라이니라. 이로써 생각건대 석가불, 다보불(多寶佛), 십나찰녀(十羅刹女)가 어찌 수호(守護)하시지 않겠느뇨. <현대어역> 부처는 훌륭하다고 하지만 법화경에 비교하면 반딧불과 일월만큼의 승렬이 있고, 하늘과 땅만큼의 높낮이가 있다. 부처를 공양해서 이와 같은 공덕이 있으니 하물며 법화경을 공양함에 있어서랴. 흙떡을 공양하고서는 이와 같은 공덕이 있었으니 하물며 (그대는) 여러 가지 과실을 공양하셨다. (덕승동자, 무승동자가 부처에게 흙떡을 공양했을 당시) 나라는 굶주리지 않았으나 지금은 온 나라가 굶주리고 있다. 이로써 생각하건대 석가불, 다보불, 십나찰녀가 어찌 (그대를) 수호하지 않을 일이 있겠는가. ‘‘마음’을 소중히 하는 불법(佛法)정신 여기서 대성인께서는 ‘부처와 법화경’ ‘흙떡과 종종의 과실’ ‘풍요로운 시대와 굶주린 시대’라는 세 가지 대비로 도키미쓰의 정성 어린 공양이 가져오는 공덕의 크기를 말씀하십니다. 이중에서 부처 즉 석존에 대한 공양보다도 법화경에 대한 공양의 공덕이 뛰어난 점을 확신하십니다. 대성인께서는 그 공덕의 차이는 ‘반딧불과 일월만큼의 승렬’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 라고까지 말씀하십니다. 먼저 부처에게 공양한 공덕 자체가 얼마나 큰지는 덕승동자의 설화에서 소개한 대로입니다. 그러나 그 공덕조차도 ‘반딧불’에 불과하며 법화경에 대한 공양이야말로 ‘일월’만큼의 광대무변한 공덕이 있다고 하십니다. 그 까닭은 석존을 비롯해 온갖 부처는 모두 법화경에 의해 성불했기 때문입니다. 법화경 특히 그 간요(肝要)인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는 모든 부처의 온갖 공덕을 낳게 하는 근본이고 근원입니다. 그러므로 법화경에 대한 공양의 공덕이 뛰어납니다. 법화경에 대한 공양이란 묘법과 함께 끝까지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만물을 윤택하게 하고 본유(本有)의 생명을 빛나게 하는 묘법을 자신도 실천하고 남에게도 권한다, 이 공덕은 일월의 광명처럼 무상(無上)의 가치를 낳고 다하는 일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현대에서도 묘법 외곬으로 광선유포를 위해 사회를 위해 나날이 헌신하는 학회원의 공덕은 이루 헤아릴 수 없습니다. 엄연한 생명의 인과법칙(因果法則)에 비춰보면 모든 행동이 장차 무량의 복덕이 되어, 음덕양보(陰德陽報)의 꽃을 활짝 피운다는 것은 틀림없습니다. 신심의 실천에는 헛됨은 일체 아무것도 없습니다. 불법에서는 “마음만이 중요하니라.”(어서 1192쪽) 하고 설합니다. 민중의 행복을 바라는 부처의 대원(大願)을 내 마음으로 하려고 하는 ‘올곧은 마음’ ‘깨끗한 마음’이 있으면 온갖 노고는 모두 공덕으로 바뀝니다. 전부 ‘마음’으로 정해집니다. 또 대성인께서는 제자의 진심을 무엇보다도 소중히 하셨습니다. 늘 “눈물이 앞을 가립니다.” 등 감사의 마음을 표현하시고 있습니다. 진심에는 진심으로 부응한다, 성실에는 성실을 관철한다, 거기에 인간으로서의 진정한 유대가 생겨난다. 이것이 대성인의 마음이고 창가(創價)의 ‘한 사람을 소중히 하는 정신’입니다. ‘마음만이 중요하다’는 금언을 리더는 절대로 잊으면 안됩니다. <본문> (우에노전답서 1544쪽 9행 ~ 11행) 대저 지금의 때 법화경을 믿는 사람이 있는데 혹은 불과 같이 믿는 사람도 있고, 혹은 물과 같이 믿는 사람도 있더라. 청문(聽聞)했을 때는 타오르듯이 생각하지만 멀어지고 나면 버리는 마음이 일어나느니라. 물과 같이 라고 함은 항상 퇴(退)하지 않고 믿는 것이니라. 귀하(貴下)는 어떠한 때라도 항상 퇴하지 않고 찾아 주시니 물과 같이 믿고 계시는 것일까. 존귀(尊貴)하고 존귀하도다. <현대어역> 지금의 때, 법화경을 믿는 사람이 있다. 혹은 불과 같이 믿는 사람도 있고, 혹은 물이 흐르듯 믿는 사람도 있다. (불처럼 믿는 사람은 법문<法門>을) 청문했을 때는 불이 타오르듯이 생각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그것을 버리는 마음이 일어난다. 물과 같이 믿는 사람이라 함은 항상 물러서는 마음을 갖지 않고 믿는 사람을 말한다. 그대는 어떠한 때라도 항상 물러서지 않고 나(니치렌)를 찾아 주시니 물이 흐르듯이 믿고 계시는 것일까. 존귀하도다 존귀하도다. ‘불과 같은 신심’과 ‘물과 같은 신심’ 도다선생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멈추지 않고 흐르는 물과 같은 신심이어라! 고인 물은 움직이지 않기 때문에 썩는다. 인간도 마찬가지. 전진하지 않음은 퇴전이다.” 한때는 과감하게 신심에 면려해도 도중에서 불신을 일으켜 신심에서 멀어지면 결국은 성불할 수 없습니다. 어떠한 장마에도 분동되지 않는 불퇴의 신심. 여기서는 그 마음가짐에 대해 설하십니다. 대성인께서는 고난 속에서도 변하지 않는 신심에 면려하는 도키미쓰에게 신앙의 자세에 대해 ‘불과 같이’ 와 ‘물과 같이’의 두 가지가 있다고 가르치십니다. 그 유명한 ‘불과 같은 신심’과 ‘물과 같은 신심의 원리인데 다시 한번 확인해 두기로 합시다. 본디 ‘불과 같은 신심’은 법문을 들었을 때에는 감격하여 땔감을 얻은 불이 불타오르듯 신심에 면려하지만, 때가 지나면 불이 꺼지듯이 신심이 없어지고 마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은 안에서 솟아오르는 ‘내발(內發)’의 힘이 아니라 밖에서 오는 자극으로 움직이는 ‘외발(外發)’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땔감이 떨어지면 그만 꺼져버리거나 다른 연에 분동되어 ‘버리는 마음’이 생겨나고 맙니다. 이에 비해 ‘물의 신심’은 내면에서 솟아오르는 구도심을 가지고 어떠한 연에도 분동되지 않으면서 끊임없는 전진, 지속을 관철해 나가는 것을 말합니다. 올바른 스승과 올바른 불법을 만났을 때의 ‘환희’와 ‘감사’를 잊지 않고 고난에 직면할 때마다 원점으로 돌아간다, 설령 순풍에 돛을 단 때라도 스스로의 나침반에 손을 놓지 않고 방심없이 용기의 키를 잡는다, 그리고 항상 새롭게 신심으로 도전하여 승리해내고 성장의 마디를 새기고서는 또다시 전진을 계속한다, 이것이 ‘물과 같은 신심’입니다. 한 방울의 물이 시냇물이 되어 이윽고 대하(大河)가 되고 마침내는 큰 바다로 흘러가듯이, 자신의 경애를 넓히면서 광포를 위해 끝까지 살면서 사람들에게 사회에 이익을 베풀어 나가야 합니다. 앞을 가로막는 바위를 뚫고 결코 멈추지 않는 ‘지속하는 신심’이 바로 ‘물과 같은 신심’의 본질입니다. 선지식(善知識)의 존재가 중요 어서에는 “물과 같은 행자(行者)라고 함은 물은 주야불퇴(晝夜不退)로 흐르는 것이며 조금도 쉬는 일이 없다. 그와 같이 법화경을 믿는 것을 물과 같은 행자라고 하느니라.”(어서 841쪽) 하고 설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홀로 서서 ‘물과 같은 신심’을 관철하는 ‘물과 같은 행자’로서 투쟁을 계속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닙니다. “불과 같은 행자는 많고, 물과 같은 행자는 드무니라.”(어서 841쪽) 하고 말씀하시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선지식(善知識)’이 중요합니다. 좋은 선배, 좋은 동지라는 존재입니다. 함께 스승의 가르침을 배워 신심의 원점을 상기하면서 나날의 광포 활동 속에서 심화시켜 나가는 동료가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반대로 모두 함께 절차탁마(切磋琢磨)하는 것을 꺼리고 ‘나는 특별하다’고 착각하여 거만해져서 자신의 성장을 멈추었을 때는 신심의 후퇴가 시작됩니다. 지금까지 퇴전, 반역한 인간들은 모두 자기중심이 되어 만심에 빠져 착실하게 광포활동에 면려하는 동지를 깔보고 결국은 문제를 일으켜서 청정한 학회에 있을 수 없게 되었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선지식인 학회와 함께 동지와 함께 어디까지나 전진하려고 하는 마음을 잃어버리면 신심을 완성할 수 없습니다. 다달이 나날이 향상하는 신심을 대성인께서는 또 “어떠한 때라도 항상 퇴하지 않고”라고 말씀하시듯 어떤 일이 있어도 변함없이 대성인을 끝까지 구도(求道)하는 난조 도키미쓰의 불퇴(不退)의 신심을 찬탄하십니다. 도다 선생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닫힌 청년이면 안 된다. 물과 같은 신심이라 하지만, 물도 때와 조건에 따라서는 끓어오를 때도 있다. 혁명아는 그저 평온하고 느긋하기만 한 생활을 꿈꾸면 더 이상 성장할 수 없게 된다.” 불타오르는 신심의 정열로 물이 흐르듯 지속하는 소위 ‘열탕과 같은 신심’이 바로 이상적인 모습이라 하겠습니다. 광선유포는 인류의 숙명전환을 건 투쟁입니다. 광선유포 대서원을 위해 꿋꿋이 살아가는 정열을 우리는 평생 견지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결국은 신심의 전진을 가로막는 마(魔)에게 꺾이고 말기 때문입니다. 법화경 행자에게는 반드시 ‘삼장사마(三障四魔)’<주2>와 ‘삼류강적(三類强敵)’<주3>이 덮칩니다. 이러한 장마(障魔)와 난(難)에 대해, 대성인께서는 결코 두려워하면 안 된다, 물러서면 안 된다고 거듭 강조하십니다. <개목초>에는 “어리석은 자의 버릇이란 약속한 일을 필요한 때에는 잊어버리느니라.”(어서 234쪽)라고 씌어 있습니다. 또 “월월(月月) 일일(日日) 강성(强盛)해지시라. 조금이라도 해이(解弛)한 마음이 있다면 마(魔)가 틈탈 것이니라.”(어서 1190쪽) “이 경(經)을 듣고 받는 사람은 많지만, 진실로 듣고 받은 바와 같이 대난(大難)이 오더라도 억지불망(億持不忘)하는 사람은 드무니라. 받기는 쉽고 가지기는 어렵다. 그러므로 성불(成佛)은 가지는데 있으며”(어서 1136쪽)라고도 씌어 있습니다. 신심은 순간순간이 마와의 투쟁입니다. 이 장마를 타파하고 어제보다는 오늘, 오늘보다 내일로 구도심을 불태워 성장하고 향상하는 한 사람 한 사람이었으면 합니다. <본문> (우에노전답서 1544쪽 12행~14행) 가내(家內)에 우환(憂患)이 있다 함은 사실이옵니까, 설마 귀신의 소위(所爲)는 아닐 것이며 십나찰녀(十羅刹女)가 신심의 정도를 시험해 보고 있는 것이리라. 진실한 귀신이라면 법화경의 행자를 괴롭혀서 머리가 깨지기를 바라는 귀신이 있을소냐, 또 석가불, 법화경에 허사(虛事)가 있을소냐 하고 깊이 생각하실지어다, 공공근언(恐恐謹言). <현대어역> 귀하의 집안에 병자가 있다 함은 사실이옵니까. 설령 그것이 사실이라 해도 설마 귀신의 소위는 아닐 것이다. 십나찰녀가 신심의 정도를 시험해 보려는 것이리라. 진실한 귀신이라면 법화경 행자를 괴롭혀서 스스로 머리가 깨지기를 바라는 귀신이 있겠는가. 또 석가불, 법화경에 허망(虛妄)이 있을 리 없다고 깊이 믿으시오. 공공근언. ‘시험 받는다’는 신심으로 끝부분에서 가족 중에 병자가 있음을 걱정하시면서, 병은 십나찰녀가 신심의 강약을 시험하려고 하는 것이므로 더 한층 강성한 신심을 관철해 가도록 격려하십니다. 귀신에는 선귀(善鬼)와 악귀(惡鬼)의 두 종류가 있는데 그 작용은 “선귀는 법화경의 적을 먹고, 악귀는 법화경의 행자를 먹는다.”(어서 1246쪽)고 합니다. ‘먹는다’는 것은 방해한다거나 힘을 약화시켜서 생명력을 빼앗는다고 하는 의미입니다. 천태대사(天台大師)는 병이 일어나는 원인으로 여섯 가지를 들고 있는데, 그 네번째가 “귀(鬼)가 득편(得便)함”입니다.<주4> 그러나 지금 가문을 괴롭히는 것은 귀신에 의한 것은 아닐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귀신이 법화경을 실천하는 자를 괴롭힌다면 그것은 석존에 적대하는 행위이며 마지막에는 자신을 멸망시키기 때문입니다. 한편 십나찰녀는 법화경 다라니품(陀羅尼品) 제26에서 법화경을 수지하는 자를 수호한다고 석존에게 맹세하고 있습니다. 현재 난조 집안에 일어난 병환은 법화경 행자를 수호하는 십나찰녀의 작용에 의한 것이며 그것은 신심의 강약을 시험하기 위함일 거라고 말씀하십니다. <형제초>에서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번에야말로 진실한 신심이 나타나서 법화경의 십나찰도 수호하시게 되리라. 설산동자(雪山童子) 앞에 나타난 나찰(羅刹)은 제석(帝釋)이며 시비왕(尸毘王)의 비둘기는 비사문천(毘沙門天)이었느니라. 십나찰이 시험해 보기 위하여 부모의 몸에 들어가서 책망(責望)하는 일도 있을 것이니라. 이것으로 보더라도 신심이 약(弱)하면 후회(後悔)가 있으리라.”(어서 1083쪽) 법화경 행자를 수호하는 십나찰녀가 우리 신심을 시험하는 경우가 있다, 이는 우리에게 중요한 원리입니다. 제천(諸天)의 수호라 해도 자신의 신심을 심화(深化)시키지 않고 수동적으로 뭔가 막연하게 가호를 기다린다는 것은 아닙니다. “반드시 마음의 견고(堅固)함에 따라서 신(信)의 수호 즉 강함이라.”(어서 1220쪽)입니다. 병이나 숙명 등의 어려움에 직면했을 때, 강성한 신심으로 일어남으로써 제천선신의 수호의 작용이 더욱 강해집니다. 니치렌 불법은 어디까지나 자신의 강성한 신앙심을 근본으로 나의 생명력을 용솟음치게 하고 스스로의 의지와 노력으로 단호하게 역경을 타개해 나가는 현실변혁의 종교입니다. 일체는 ‘신심’으로 결정됩니다. 병과 고난에 대해 신심이 후퇴해 버릴지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고 전진하는지, 무엇보다도 자신이 ‘불퇴의 신심’을 관철할 수 있는지 우리의 각오를 시험 받는 것입니다. 고난을 숙명전화의 좋은 기회로 끝맺음에 “석가불, 법화경에 거짓이 있을 리 없다고 깊이 믿으시오.”라고 말씀하시듯, 어디까지나 어본존을 무이(無二)의 마음으로 믿는 자세가 중요합니다. 이 병에는 깊은 의미가 있다. 강하게 어본존을 믿어나간다면 반드시 병도 극복할 수 있다는 대성인의 지도입니다. 신심의 도중에 일어나는 고난은 모두 의미가 있습니다. 좀처럼 출구가 보이지 않는 어려운 상황이라 하더라도 시간이 지나 긴 안목으로 보면 “그래서 그랬구나.” “이것을 위해 그 일이 있었구나.” 하고 반드시 알게 됩니다. 그러므로 당장의 사건에 일희일우할 필요는 없습니다. 영원히 계속되는 태풍은 없듯이 영원히 지속되는 고난은 없습니다. 이 불법의 위대한 역용(力用)은 모든 것을 전중경수(轉重輕受)<주5> 할 수 있고, 변독위약(變毒爲藥)<주6> 할 수 있습니다. ‘강의 흐름’과 같은 신앙을 지금 SGI는 세계 192개국·지역으로 넓혀졌습니다. 그중의 하나, 다양성의 나라라 일컬어지는 말레이시아에 첫 창가의 벗이 탄생한 때는 1964년입니다. 올해는 광포 50주년의 가절에 해당합니다. 다민족 국가이며 여러 민족이 독자적인 문화와 종교를 가지고 있는 속에서 말레이시아SGI(SGM)은 불법 인간주의 철리(哲理)를 넓혀 왔습니다. 1988년, 말레이시아를 처음 방문했을 때, 나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강은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앞으로 흐른다. 말레이시아는 강의 흐름처럼 조용히 멈추지 않고 전진해 나가세요.” “앞으로는 대화가 중요합니다. 우정 확대가 중요합니다.” 그 뒤로 말레시아 동지는 ‘좋은 시민’으로서 사회발전에 공헌하면서 다양한 문화의 교량 역할을 하려고 여러 사람들과 대화를 거듭하여 꾸준히 신뢰를 넓혀 왔습니다. 2001년에 완성한 말레이시아종합문화센터에서는 400번이 넘는 전시회와 세미나 등 여러 행사가 열려 ‘문화와 예술의 성(城)’으로 널리 시민들에게 친숙해졌습니다. 또 개원 19년을 맞은 말레이시아 소카유치원도 모범적인 유치원으로 사회에서 높은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민족과 종교를 불문하고 해마다 입학희망자가 많고, 수업은 영어와 말레이어와 중국어의 세 언어로 실시하고 있습니다. 불법의 이념을 근본으로 사회에 많은 인재를 배출하여 바야흐로 ‘평화’ ‘문화’ ‘교육’의 희망 넘치는 대하(大河)와 같은 존재가 되어 말레이시아SGI는 멋진 승리의 역사를 구축했습니다. 인간주의 우정의 연대는 더욱 넓혀졌습니다. 또 모든 방면에 민중의 보성이 되는 훌륭한 회관도 세워졌습니다. 모두가 앞으로 앞으로 ‘강의 흐름’과도 같은 신심을 관철한 결과입니다. 내 인간혁명의 길을 한 걸음 한 걸음 광선유포는 지금 세계 동시진행입니다. 각국이 함께 광포의 대하가 도도히 흐르기 시작했습니다. 광선유포는 인류가 희구하는 위대한 이상입니다. 학회가 아니면 성취할 수 없습니다. 우리 지용의 사명은 정말 깊고 큽니다. 도다 선생님은 “광선유포는 만인의 행복을 쟁취하는 인권투쟁이다. 정의의 투쟁이다. 그것이 학회청년의 사명이다!” 하고 지도하셨습니다. 위대한 내 사명이기에 그것을 실현하려면 하루 하루 ‘물과 같은 신심’을 실천하는 일이 중요합니다. 숙명과 장마의 거센 바람이 불어 닥쳐도 마(魔)의 십군(十軍)<주7>이 마음을 뒤흔들더라도 나날의 불도수행을 멈추지 않고 되풀이 해야 합니다. 부동(不動)의 신심을 관철하고 조석근행을 비롯한 좌담회, 불법대화, 교학, 인재육성 이런 신행학의 실천을 꾸준히 지속하는 사람이 바로 신앙의 왕자입니다. 진짜 불제자입니다. 이런 축적이 자신의 생명에 영원히 무너지지 않는 ‘마음의 재’를 새기고 부처의 경애를 구축합니다. 10년, 20년 내 인간혁명의 언덕길을 사명의 땀을 흘리면서 끈질기게 한 걸음 한 걸음 등반한 사람에게는 어느 누구도 이길 수 없습니다. 불퇴는 신앙의 최고의 훈장입니다. 민중의 대지에서 인재를 키우는 사람.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사람. 사람을 격려하는 사람. 오랜 세월을 꾸준히 싸워 왔고 그리고 앞으로도 싸워나가는 사람, 즉 지용의 서민이 바로 참된 인간의 영웅이며 생명의 승자입니다. 내년은 ‘세계광포 신시대 약진의 해’입니다. “물과 같이 라고 함은 항상 퇴하지 않고 믿는 것이니라.”라는 성훈을 우리는 함께 심간에 새겨, 대성인에게 “물과 같이 믿고 계시는 것일까. 존귀하고 존귀하도다.” 하고 칭찬받는 당당한 대약진을 세계의 벗들과 함께 시작합시다.
<주1> 헨더슨 박사 : 1933년 ~. 미국의 미래학자. 환경문제의 시민운동에서 출발하여 세계를 무대로 다채로운 평화운동을 전개. 이케다 SGI 회장과 《지구대담 빛나는 여성의 세기》라는 대담집을 발간했다.
<주2> 삼장사마(三障四魔) : 불도수행을 방해하는 세 가지 장애와 네 가지 마(魔)를 말한다. 삼장(三障)은 번뇌장(煩惱障)·업장(業障)·보장(報障)을 말하고, 사마(사마)는 번뇌마(煩惱魔)·음마(陰魔)·사마(死魔)·천자마(天子魔)를 말한다.
<주3> 삼류강적(三類强敵) : 석존멸후 악세에서 법화경을 홍통하는 사람을 박해하는 세 종류의 강적. 법화경 권지품(勸指品)에 설하는 박해자를 중국의 묘락대사(妙樂大師)가 세 종류로 분류했다. ①속중증상만(俗衆增上慢, 재가의 박해자), ②도문증상만(道門增上慢, 출가의 박해자), ③참성증상만(僭聖增上慢, 박해의 원흉이 되는 고승<高僧>).
<주4> <오타입도전답서>(어서 1009쪽)에는 “병(病)이 일어나는 인연(因緣)을 밝힘에 육(六)이 있으니, 일(一)에는 사대(四大)가 불순(不順)하므로 병듦, 이(二)에는 음식(飮食)이 부절(不節)하므로 병듦, 삼(三)에는 좌선(坐禪)이 부조(不調)하므로 병듦, 사(四)에는 귀(鬼)가 득편(得便)함, 오(五)에는 마(魔)의 소위(所爲), 육(六)에는 업(業)이 일어나므로 병듦”이라는 천태대사의 《마하지관(摩訶止觀)》의 말이 씌어 있다.
<주5> 전중경수(轉重輕受) : ‘무거움을 바꾸어 가벼이 받음’이라고 읽음. 열반경(涅槃經) 제31권에 설했다. 정법(正法)을 호지(護持)하는 공덕으로 과거세의 중죄를 바꾸어 현세에서 가볍게 그 과보를 받는다는 의미.
<주6> 변독위약(變毒爲藥) : ‘독을 바꾸어 약으로 함’이라고 읽음. 묘법의 힘으로 고뇌에 지배당한 생명을 부처의 생명으로 전화하는 것을 말함.
<주7> 마(魔)의 십군(十軍) _ 십군은 욕심과 갈애(渴愛), 포외(怖畏), 의회(疑悔), 진에(瞋恚)등 각종 번뇌를 마의 군대로 열 종류로 나누어 분류한 것. 니치렌 대성인께서는 “제육천(第六天)의 마왕(魔王)은 십군(十軍)의 싸움을 일으켜서 법화경의 행자와 생사해(生死海)의 해중(海中)에서, 동거예토(同居穢土)를 빼앗기지 않으려고 빼앗으려고 다투고 있다. 니치렌은 그 당사자(當事者)가 되어 대병(大兵)을 일으킨 지 이십여년(二十餘年)인데, 니치렌은 한번도 물러설 마음이 없었노라.”(어서 1224쪽) 하고 말씀하셨다.
〈우에노전답서〉 강의 끝.
-법련 2014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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