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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콩트(Isidore Marie Auguste François Xavier Comte, 1798-1857) 년표
1798 콩트(Isidore Marie Auguste François Xavier Comte, 1798-1857) 몽펠리에(Montpellier)에서 태어났다. 종교는 카톨릭이며, 군주제 옹호 가정이었다. - 프랑스는 그가 태어나 죽을 때까지 안정적인 정치체계를 이루지 못했고[혁명과정에 있었다], 사회적으로 산업화가 이루어지면서 혼란은 더해져 가고 있었다.
아버지는 (Louis-Auguste-Xavier Comte, 1776-1859), 세무원: 어머니(Félicité-Rosalie Boyer 1764-1837) 이다. un frère, Adolphe, et une sœur, Alix
1807[아홉] 몽페리에에 있는 조프르(Lycée Joffre) 고등학교에 다니다(1807-1814)
당시 학교는 혁명의 분위기가 있었다.
1811[열셋] 그는 신앙을 잃었다. 카톨릭에서 벗어났다.
앙꽁트르 교수에게 수학을 따로 배우다 [앙꽁트르(Daniel Encontre, 1762-1818) 목사, 수학자 몽펠리에 대학 교수, 몽토방 프로테스탄트 신학교수]
1813(열다섯) 에꼴 폴리테크니크에 합격 하였으나, 나이가 어려서 입학하지 못했다.
1814(열여섯) 에꼴 폴리테크니크(École polytechnique, 7 octobre 1814 - 14 avril 1816)을 다니다 중퇴하였다. [입학시 키가 1.59미터였다고 한다.]
당시 학교에는 쁘왕소(Louis Poinsot 1777-1859), 아라고(François Arago 1786-1853), Louis-Jacques Thénard, Alexis Petit ou encore Augustin Cauchy.
그의 별명은 Sganarelle[몰리에르 희극 작품 이름], 또는 le Philosophe.
1815 수학교수 푸르시와 대립각을 세웠다. [푸르시(Louis Lefébure de Fourcy, 1787-1869) 프랑스 수학자.]
1816 2년차에 학교에서 쫓겨나고, 학교 동지회를 창설하였다(une Association des Élèves de l’École polytechnique destinée à renforcer leurs liens de solidarité). 경찰의 감시하에 있었다. [데카즈(Élie Louis Decazes, 1780-1860), 변호사 정치가, 1815년 이후 루이18세 치하에 경찰총감이었다.]
새로이 친구들을 사귀었다. Prosper Enfantin, Frédéric Le Play, Victor Considerant ou encore Georges Sorel.
1816(열여덟) 두 달 반 몽펠리에 되돌아가 머물다가, 7월에 다시 파리로 돌아오다. 라틴가에서 친척들의 도움과 수학 강의로 지냈다.
베르나르(Simon Bernard, 1779-1839) 프랑스 장군 정치가의 제안으로 미국 학교의 교수자리가 있었으나 구체화되지 못했다.
극장가와 창녀촌을 다니며 방황하는 시기였다.
스코틀랜드 수학자가 쓴 책의 번역을 시작하였다. 아셰뜨의 권유로. [아셰뜨(Jean Nicolas Pierre Hachette, 1769-1834) 프랑스 수학자. ]
당시 수많은 간행물들이 번창하였다. 그는 기자로서 활동하기 시작했다.
1817(열아홉) 생시몽(Claude-Henri de Rouvroy, comte de Saint-Simon)을 만났다. 비서가 되었다(1817 et 1824).
생시몽의 산업(L’Industrie)(1816-1817)의 셋째 권에서 노트(네 꼭지)를 작성했다. 여기서 세 상태들의 법칙(La loi des trois états)를 구상하였다.
그는 결혼해 아이있는 이탈리아 피아니스트(Pauline)를 사랑했다. 아마도 꽁트의 유일한 딸(Louise. 1818-1827, 아홉)이 이 여인으로부터 라고 한다.
1818(스물) 레이노 남작(le baron Antoine Reynaud))의 기숙사에서 은행가인 뻬리에에게 강의를 하였다. [뻬리에(Casimir-Pierre Périer, 1777-1832), 은행가, 정부요인.].
Le Politique ou Essais sur la politique qui convient aux hommes du XIXe siècle
1818 12월부터 생시몽이 발간하는 정기간행물에 주기적으로 글을 쓰고, Le Censeur européen.를 썼다. 필명을 I.C.에서 A.C로 썼다.
1819(스물하나) 견해들과 욕망들 사이의 일반적 분리(Séparation générale entre les opinions et les désirs, 1819) 출판.
11월 생시몽이 시작한 간행물 L'Organisateur에 참여했다.
프롤레타리아계급와 여성들을 위한 참여를 시작했다. ,
1820(스물둘) 근대 과거의 일체에 대한 요약평가(Sommaire appréciation de l’ensemble du passé moderne, 1820)
생시몽의 사상에서 자유로워졌다. 1820-1824 사이의 활동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단지 1822년 작품이 하나있다.
1821 마생(Caroline Massin, 1802-1877)을 처음 만났다. 헤어졌다가 1822년 독서모임에서 다시 만났다. 그녀는 세르끌레(Antoine Louis Cerclet, 1797-1849)와 사귀고 있었다.
1822 안내서(Prospectus des travaux scientifiques nécessaires pour réorganiser la société, 1822) [사회의 재조작화를 위한 필수적인 과학적 작업들에 대한 계획(Plan des travaux scientifiques nécessaires pour réorganiser la société, 1822)]
1825(스물일곱) 마생(Caroline Massin, 1802-1877)과 결혼하다(1825-1842).
정신적 힘에 관한 고찰(Considérations sur le pouvoir spirituel)(1825?)
과학과 과학들에 관한 철학적 고찰들(Considérations philosophiques sur la science et les savants (1825)
이 두 편의 논문을 쓰면서, 신부이며 신학자인 람네(Félicité de La Mennais [lamnɛ], Lamennais, 1782-1854)를 만났다.
이해 세르클레(Antoine Cerclet)의 권고로 생산자(Le Producteur(Journal de l'Industrie, des sciences et des beaux-arts)에 참여하다. 이 간행물은 생시몽의 학설을 바탕으로 로드리드(Olinde Rodrigues, 1795-1851)와 앙팡땡(Prosper Enfantin, 1796-1864)에 의해 창간되었다.
1826(스물여덟) 2월 첫 신경 경련(발작)을 체험하였다. 그리고 18시간 계속에서 명상(성찰)하기도 하였다. 그러면서도 실증철학 강의를 준비하면서 Le Producteur에 꼭지(기사)들을 작성했다(자택에서 합계 200프랑의 지출을 예상했다.)
1826, 1826년 4월 2일, 첫 강의를 시작하였다. 참석자들은 블랭빌(Blainville 1777-1850), 아라고(Arago 1786-1853), 푸리에(Fourier, 1772-1837), 훔볼트(Humboldt, 1769-1859), 브루세(Broussais), 뒤누와이에(Dunoyer)이며, 또한 세르끌레(Cerclet 1797-1849), 마찬가지로 파리의 인물들(un certain nombre de personnalités parisiennes)도 참석했다.
- 첫째 자살 시도: 마생(Caroline Massin, 1802-1877)이 구출하고, 정신과 의사인 에스키롤(Jean-Étienne Dominique Esquirol, 1772-1840)의 진료소에 입원하다.est
1827(스물아홉) 그는 예술의 다리(le pont aux Arts)에서 둘째로 자살을 시도했다. 왕실 근위대에 의해 구출되었다.
1828(서른) 새로 신설된 상업과 수공업 장관직에서 상업 검열관을 신청했으나 파기되었다.
- 삘레(Léon Pillet, 1803-1868)가 창간한 신문 Le Nouveau Journal de Paris에 기고하기 시작하다.
1829(서른하나) 1월 4일 집에서 강의를 다시 열었다. quatre membres de l'Académie des Sciences (Blainville, Fourier, Poinsot et Navier), et d'Esquirol, Broussais, ou encore Jacques Binet, ainsi que d'autres personnalités. 72강의의 흔적은 어디에도 남아있지 않다. [비네(Jacques Philippe Marie Binet, 1786-1856), 프랑스 수학자, 천문학자.]
[1830 7월 혁명, 27일, 28일, 29일 영광의 3일(« Trois Glorieuses »)이라 불린다. 루이-필립 1세가 왕위에 오르다.]
1830(서른둘) 실증 철학 강의(Cours de philosophie positive) (1830-1842)
Tome 1 Les préliminaires généraux et la philosophie mathématique, 1830 ;
Tome 2 La Philosophie astronomique et la philosophie de la physique, 1835 ;
Tome 3 La Philosophie chimique et la philosophie biologique, 1838 ;
Tome 4 La Philosophie sociale et les conclusions générales, 1839 ;
Tome 5 La Partie historique de la philosophie sociale, 1841 ;
Tome 6 Le Complément de la philosophie sociale, et les conclusions générales, 1842 ;
그는 수학, 천문학, 물리학, 화학, 생물학, 사회학으로 분류했다.
1833 기조(François Guizot, 1787-1874)장관에게 꼴레쥬 드 프랑스에 자리를 간청했으나, 헛되었다.
1841 꽁트와 밀(John Stuart Mill, 1806-1873)은 우정과 협력관계가 이루어진다(6년간).
1843 꽁트와 밀은 여성 조건에 대해 의견이 대립되었다. / 해리어트 테일러 밀(Harriet Taylor Mill, née Hardy, 1807-1858) 영국 철학자, 여성주의자 밀의 둘째 부인. 꽁트에게 끌로띨드 보(1815-1846)와 같은 여인이 밀에게 해리어트 테일러 밀 이 있다.
- Traité élémentaire de géométrie analytique à deux et à trois dimensions, contenant toutes les théories générales de géométrie accessibles à l'analyse ordinaire, Paris, Carilian-Gœury et V. Dalmont, 1843.
1844(마흔여섯) 실증적 정신에 관한 담론(Discours sur l'esprit positif, 1844)
개편한 에꼴 폴리테크니끄에서 시험관 자리를 잃었다. 삶이 어려웠다. 후원자들을 얻는다. 영국인들인데, 그로뜨(George Grote, 1794-1871), 윌리엄 몰레스워드(Sir William Molesworth, 1810–1855), 큐리(Raikes Currie. 1801–1881) 등이다.
- Discours sur l'esprit positif, Paris, Carilian-Gœury et V. Dalmont, février 1844 ;
- Traité philosophique d'astronomie populaire, Paris, Carilian-Gœury et V. Dalmont, 1844 ; 당시의 저명한 연구자인 ... 과 교류하였으며,
1846그의 연인 보(Clotilde de Vaux, 1815-1846)의 죽음, 1844년에 만나, 꽁트에게 “인류교(« religion de l'Humanité »)의 영감을 주었다.
1848 실증주의 일체에 관한 담론(Discours sur l'ensemble du positivisme, 1848)(Discours sur l'ensemble du positivisme ou Exposition sommaire de la doctrine philosophique et sociale propre à la grande république occidentale, Paris, Librairie scientifique-industrielle L. Mathias et chez Carilian-Gœury et V. Dalmont, juillet 1848)
1851-1854 실증정치학 체계(Système de Politique positive (1851-1854)(4권) : Système de politique positive ou Traité de sociologie instituant la religion de l'Humanité, édition originale en quatre tomes, 1851-1854.
Tome 1 contenant le Discours préliminaire, et l'Introduction fondamentale, juillet 1851;
Tome 2 contenant la Statique sociale ou le Traité abstrait de l'être humain, mai 1852;
Tome 3 contenant la Dynamique sociale ou le Traité général du progrès humain, août 1853;
Tome 4 et dernier contenant le Tableau synthétique de l'esprit humain, août 1854 ;
1852(쉰넷) 실증주의 교리문답(Catéchisme positiviste, 1852)
- 블리뉘에르(Célestin de Blignières, 1823-1905)에게 편지를 쓴다.
1856(쉰여덟) 주관적 종합(Synthèse subjective, 1856) [주관적 체계, 즉 인류의 정상적 상태에 맞는 개념작업들의 보편적 체계(Synthèse subjective ou système universel des conceptions propres à l’état normal de l’humanité, 1856)]
Appel aux conservateurs, Paris, V. Dalmont, novembre 1856 ;
1857 파리에서 세상을 뜨다. 5 septembre 1857 à Paris
묘지(Cimetière du Père-Lachaise, Grave of Auguste Comte)에 묻히다. (d)
*1885 Le 17 juin 1885, une rue Auguste Comte est inaugurée dans le VIe arrondissement97.
1902 Réalisée par Jean-Antoine Injalbert, une statue d'Auguste Comte a été inaugurée en 1902 place de la Sorbonne, sous la présidence du général André, en présence de membres de la société positiviste. Des personnalités telles que Jules Ferry, Émile Durkheim, Camille Pelletan, Georges Clemenceau et Ernest Renan font partie du comité de patronage.
* 생애 동안에 ... 또는 영향을 받은
287 아르키메데스(Archimède, Ἀρχιμήδης, 전287경-전212), 고대 그리스의 시라쿠사 출신의 철학자, 수학자, 천문학자, 물리학자, 공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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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64 갈릴레오 갈릴레이(Galileo Galilei, 1564-1642), 이탈리아의 철학자, 과학자, 물리학자, 천문학자.
1571 케플러(Johannes Kepler, 1571-1630), 독일 천문학자. 코페르니쿠스의 태양중심설 연구자.
1620 마리오뜨(L’abbé Edme Mariotte, 1620-1684), 프랑스 물리학자, 식물학자. 열을 가할 때 기체의 체적과 압력에 관한 연구.
1627 보일 (Robert Boyle, 1627-1691) 아일랜드 물리학자, 화학자.
1643 아이작 뉴턴(Isaac Newton, 1643-1727), 영국 수학자, 천문학자. 과학자.
1689 몽테스키외(Charles-Louis de Secondat, La Brède et de Montesquieu, 1689-1755) 프랑스 빛들 시대의 정치사상가. 권력분립론에 관한 설명으로 유명하다.
1700 베르누이(Daniel Bernoulli, 1700-1782) 스위스 의사, 물리학자, 수학자.
1707 오일러(Leonhard Euler, 1707-1783) 스위스 수학자, 물리학자. 러시아와 독일에서 주로 살았다. 베를린에 있는 프러시아 과학 아카데미 회원.
1709 브로스(Charles de Brosses, comte de Tournay, baron de Montfalcon, seigneur de Pregny et Chambésy, de Vezin et de Prevessin, 1709-1777), 프랑스 법관, 역사가, 언어학자, 작가. Du culte des dieux Fétiches 1760, 꽁트는 브로스에게서 물신주의를 읽었다.
1716 도방똥(Louis Jean-Marie Daubenton, 1716-1799) 프랑스 박물학자, 의사. 자연사 국립박물관 관장(Directeur du Muséum national d'histoire naturelle, 1793-1794). 전임관장 Auguste Charles Cesar du Flahault ou Charles Auguste César Flahaut de La Billarderie (né le 10 avril 1724 à Nesles-la-Vallée en Seine-et-Oise, mort le 29 mai 1811
1727 튀르고(Anne Robert Jacques Turgot, baron de l'Aulne, 1727-1781) 프랑스 정치가, 경제학자, 튀르고에게도 3상태의 법칙과 유사한 것이 있었다.
1736 라그랑쥬(Joseph Louis de Lagrange, it. Giuseppe Luigi Lagrangia, 1736-1813), 사르데뉴 출신으로 프랑스 국적 취득. 이탈리아 수학자, 역학자, 천문학자.
1743 라부아지에(Antoine-Laurent de Lavoisier, 1743-1794), 프랑스 화학자. 알화학(연금술)을 화학을 바꾼 화학자. 연소에 관하여 플로지스톤설을 폐기하고 산화과정에서 산소의 역할을 주장하는 새로운 이론을 제시했다.
1743 꽁도르세(Nicolas de Condorcet, 1743-1794), 프랑스 철학자, 수학자, 정치학자(politologue).
1746 몽쥬(Gaspard Monge, comte de Péluse, 1746-1818) 프랑스 수학자, 정치가. 베르톨레( Berthollet), 샾딸(Chaptal), 라플라스(Laplace)와 함께 기예 직업학교(에콜폴리테크니끄) 창설에 협력하다.
1748 베르톨레(Claude-Louis Berthollet, 1748-1822), 프랑스 화학자.
1749 라플라스(Pierre-Simon, marquis de Laplace, 1749-1827), 프랑스 수학자.
1753 메스트르(comte Joseph de Maistre, 1753-1821) 프랑스 정치가, 보날과 함께 프랑스혁명의 반대자였다.
1754 보날(Louis-Gabriel-Ambroise, vicomte de Bonald, 1754-1840) 프랑스 정치가, 철학자, 수필가, 대혁명 반대자.
1758 로베스피에르(Maximilien François Marie Isidore de Robespierre, 1758-1794), 프랑스 대혁명기의 정치인, 철학자, 법률가, 혁명가, 작가.
1758 갈(Franz Joseph Gall ou Jean-Joseph Gall1, 1758-1828) 독일 의사, 1819년 프랑스 국적. 골상학(la phrénologie)의 정초자.
1759 당통(Georges Jacques Danton, d'Anton, 1759-1794)[서른다섯], 프랑스 정치가, 왕의 자문 변호사, 법무부 장관.
1760 생-시몽(Claude Henri de Rouvroy, comte de Saint-Simon, 1760-1825) 프랑스 철학자이자 경제학자이며, 1814년에 비서로서 띠에리(1795-1856)(사범출신), 1819년에 협력자 로서 꽁트(1798-1857)(폴리테크니크 중퇴)를 만났다.
1760 바뵈프(François-Noël Babeuf, 1760-1797), 별명 그라쿠스 바뵈프(Gracchus Babeuf), 평등인들 결사(Societé des égaux)를 조직하였다 기요띤에 의해 사라졌다.
1762 앙꽁트르(Daniel Encontre, 1762-1818) 목사, 수학자 몽펠리에 대학 교수, 몽토방 프로테스탄트 신학교수.
1765 뷔르당(Jean Burdin, 1765-1835) 프랑스 의사. 소르본에서 의학박사학위. 프랑스 의학 아카데미 회원.
1768 조셉 푸리에(Jean Baptiste Joseph Fourier, 1768-1830), 프랑스 수학자, 물리학자. 열에 대한 분석론(Théorie analytique de la chaleur, 1822)
1769 뀌비에(Georges Cuvier, 1769-1832), 프랑스 동물학자, 고생물학자, 과학아카데미 회원.
1769 훔볼트(Alexander von Humboldt, Friedrich Karl Wilhelm Heinrich Alexander, 1769-1859) 독일 자연학자, 지리학자, 탐험가. [그의 형인, 빌헬름 폰 훔볼트(Friedrich Wilhelm von Humboldt, 1767-1835) 독일의 철학자, 교육학자, 정치가. 언어철학에 기여.
1771 비샤(Marie François Xavier Bichat, 1771-1802)(31살) 600명 시체해부 프랑스 의사 생물학자 생리학자. 삶과 죽음에 관한 생리학적 탐구들(des Recherches physiologiques sur la vie et la mort, 1800) 꽁트는 생리학의 영향을 비샤에게서 받았다.
1772 샤를 푸리에(François Marie Charles Fourier, 1772-1837), 프랑스 철학자. (현실)사회학파(École sociétaire)의 창설자.
1772 브루세(François Joseph Victor Broussais, 1772-1838) 프랑스 의사, 외과의사. « l'empereur de la médecine » sous la Restauration. Traité de physiologie appliquée à la pathologie, 1822 Traité de physiologie pathologique, 1825 분노과 광기에 관한 논의(Traité sur l'irritation et sur la folie, 1828)
1777 브랭빌(Henri-Marie Ducrotay de Blainville, 1777-1850), 프랑스 동물학자, 해부학자.
1777 쁘왕소(Louis Poinsot, 1777-1859) 프랑스 수학자, 추론적 역학(la mécanique rationnelle)에 기여했다.
1777 테나르(Le baron Louis Jacques Thénard, 1777-1857) 프랑스 화학자. 꼬레쥬 드 프랑스와 에꼴 폴리테크니끄의 교수 역임.
1782 람네(Félicité de La Mennais [lamnɛ], 1782-1854), 프랑스 신부, 작가, 철학자, 정치가.
1786 아라고(Dominique François Arago, 1786-1853) 프랑스 천문학자, 물리학자, 정부요인.
1786 쉬브뢸(Michel-Eugène Chevreul, 1786-1889) 프랑스 화학자, 지방산(les acides gras)과 감화(la saponification) 작업으로 유명.
1787 푸르시(Louis Lefébure de Fourcy, 1787-1869) 프랑스 수학자. 폴리테크니크 교수, 꽁트와 대립적 시각.
1787 기조(François Guizot, 1787-1874), 프랑스 역사가, 정부요인, 아카데미 회원(1836-) 7월 군주제에 여러 번 장관을 지냈다.
1789 꼬쉬(Augustin Louis, baron Cauchy, 1789-1857) 프랑스 수학자, est un mathématicien français, membre de l’Académie des sciences et professeur à l’École polytechnique.
폴리테크니크 친구들 : Louis Poinsot, François Arago, Louis-Jacques Thénard, Alexis Petit ou encore Augustin Cauchy.
1791 쁘띠(Alexis Thérèse Petit, 1791-1820)(à 28 ans) 프랑스 물리학자. 에콜 폴리테끄니끄 출신, 열에 관한 전문가.
1792 꾸장(Victor Cousin, 1792-1867), 프랑스 철학자, 정치가, 정신주의 철학으로 절충주의의 대표자.
1794 그로트(George Grote, 1794-1871), 영국 고대 역사가.
1797 세르끌레(Antoine Louis Cerclet, 1797-1849) 자유사상의 변호사 7월 군주제의 상원의 비서였다. 꽁트의 부인의 전 애인. 그런데 꽁트의 결혼식에 증인으로 참석했다.
1798 콩트(Isidore Marie Auguste François Xavier Comte, 1798-1857), 프랑스의 철학자, 사회학자이다. 실증주의적이고 경험주의적인 사회학의 창시자이다. '실증주의 철학'과 '사회학'이라는 용어를 만들었다. / 프랑스 대혁명과 그리고 18세기 혁명의 과정에서 사회의 변화와 발전을 체험하고, 구체적이고 실증적이며 역동적인 조직의 변화를 설명하는 사회학을 창설하였다. 그런데 한 여인에게 사랑에 빠져 이 사회학을 종교화하려 했다.
1801 큐리(Raikes Currie, 1801–1881), 영국 의회 의원, 오스트레일리아 식민정책에 관여했다. 꽁트 후원자.
1801 리트레(Émile Littré, 1801-1881), 프랑스 의사, 철학자, 문헌학자. Auguste Comte et la philosophie positive, 1863.
1802 마생(Caroline Massin, 1802-1877). 꽁트는 1825에 결혼하다(1825-1842) - 결혼생활이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고 하는데, 꽁트의 페미니즘과 연관이 있을 것이다.
1806 르 플레(Pierre Guillaume Frédéric Le Play, 1806-1882) 프랑스 기술자, 사회학자, 정치가, 사회개혁가.
1806 밀(John Stuart Mill, 1806-1873) 영국 철학자, 논리학자, 경제학자. 자유사상가. 1830년 경에 처음 꽁트를 만났다. Auguste Comte et le positivisme, 1865.밀은 1823년부터 1858까지 35년간 영국 동인도 회사에 근무했다. 꽁트와 1841년부터 협력관계가 이루어진다(6년간).
1810 몰레스워드(Sir William Molesworth, 8th Baronet, 1810–1855), 영국 급진 정치가. 꽁트를 1844년(서른넷)에 후원했다고 하는데, 7대 준남작이어야 할 것 같은데 7대는 안 나온다.
1810 레뇨(Victor Regnault, 1810-1878) 프랑스 화학자, 물리학자, 사진가. 기체의 열 성질들의 정확한 측정 연구.
1813 베르나르(Claude Bernard, 1813-1878) 프랑스 의사, 생리학자, 인식론자.
1814 바쿠닌(Mikhaïl Aleksandrovitch Bakounine, 1814-1876) 러시아 혁명가, 아나키즘 이론가, 인성자유사회주의(socialisme libertaire) 건설자.
1815 보(Clotilde de Vaux née Charlotte Clotilde Joséphine Marie, 1815-1846), 1844년에 만나, 꽁트에게 “인류 종교(« religion de l'Humanité »)의 영감을 주었다.
1823 블리뉘에르(Célestin de Blignières, 1823-1905) 프랑스 군인, 문학가. 1843년 폴리테크니크 입학, 그리고 꽁트 강의를 듣고 제자가 되었다.
1825 드르와생(Hippolyte Philémon Deroisin, 1825-1909), 꽁뜨의 제자, 프랑스 실증주의자, 법관, 정치인, La Philosophie positive지 협력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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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2 베르트랑(Joseph Louis François Bertrand, 1822-1900, 프랑스 수학자, 경제학자, 과학사가, 아카데미 회원 Souvenirs académiques. Auguste Comte et l’École Polytechnique (1896)
1832 페리(Jules Ferry, 1832-1893), 1875년 7월 8일 “대서방 프랑스(le Grand Orient de France)” 집강소(loge)에서 입교한 프랑 마송, 이 때, 리트레(Littré), 비루보프(Grégoire Wyrouboff), 다른 오귀스트 꽁트 제자들(autres disciples d'Auguste Comte)도 함께 입교, 정부장관(문교부), 페리는 꽁트의 제자는 아니지만 실증철학에 경도되어 있었다.
1847 그리마넬리 (Périclès (Paul) Grimanelli (1847-1924), 변호사, 주지사, 고위공무원, 국제실증학회 부회장, 회장(1909-1911 et président en 1912-1913)
[그리마넬리(Pierre Grimanelli, s.d.), 1915년 벩송과 [서신]교환. 그리마넬리 친족일 듯?]
1857 레비-브륄(Lucien Levy-Bruhl, 1857-1939), 프랑스 철학자, 사회학자, 인류학자. La philosophie d’Auguste Comte, 1900
1857 뒤르켕(Émile Durkheim, 1858-1917) 프랑스 사회학자 현대 사회학의 창시자로 불린다.
1868 모라(Charles Maurras, 1868-1952) 프랑스 기자, 수필가, 정치가, 시인. L'Action française 편집장을 지낸, 카톨릭이며, 극우파. Auguste Comte, 1905(부록: L'Avenir de l'intelligence).
1872 베르틀로(René Berthelot, 1872-1960), 프랑스 철학자, 법학자, 시인. 유용한 낭만주의(Un romantisme utilitaire, étude sur le mouvement pragmatiste, 1911)(3권)
1873 죠르쥬 그리마넬리(Georges Grimanelli, 1873-1938) 국제실증학회 부회장(1928), —
1884 바슐라르(Gaston Bachelard 1884–1962), 프랑스 철학자, 시학과 과학철학 분야 전문가. 어림잡은 인식에 관한 시론(Essai sur la connaissance approchée (1927)(학위 주논문), 물리학 문제의 진화에 관한 연구(Étude sur l'évolution d'un problème de physique: la propagation thermique dans les solides, 1927(학위 부논문)
1898 구이에(Henri Gouhier, 1898-1994), 프랑스 철학자. 크리스트교에 영감을 받은 철학사가. La jeunesse d’Auguste Comte et la formation du positivisme, 3 vol., 1933-1964.
1894 귀르비치(Georges Gurvitch, 1894-1965), 러시아출신 프랑스 사회학자. 1928프랑스 국적. Les fondateurs de la sociologie contemporaine, 1955.
1899 아르부스-바스띠드(Paul Arbousse-Bastide, 1899–1985), 프랑스 철학자, 대학교수, La doctrine de l’éducation universelle dans la philosophie d’Auguste Comte, 1957)(2 vol., 1957)
1905 뒤까세(Pierre Ducassé, 1905-1983), 프랑스 철학자, 과학과 기술 사가. La methode positive et l’intuition comtienne, 1939.(avec bibliogr.)
(3:20, 54SKG) (8:28, 57SLJ)
***철인0501꽁트
꽁트(Auguste Comte, 1796-1857)의 철학 (28/01/05)
Peter Kunzman, Franz-Peter Burkard et Franz Wiedmann, Atlas de la philosophie, trad, fra. Zoe Housez et Stephane Robillard, Livre de Poche, (불어판)1993(1991) (원판 독어판 1991). pp.164-165.(278) - 우리는 불어판을 사용한다. - 국내 독어판 번역 (『그림으로 읽은 철학사』, 홍기수/이정숙 번역, 애경출판사, 1999판: 1991 독어판)이 있다.
꽁트는 그의 주저인 『실증 철학 강의(Cours de philosophie positive)』를 통하여 실증주의의 체계를 정초하였는데 거기서 그가 시도하는 학문적, 이론적 탐구의 목적은 사회에서 적용되는 지식의 발달, 구조, 기능에 대해 물어보는 것이다. 그가 제시한 이론의 기초는 이른바 삼 단계의 법칙(la loi des états) 이다. 이 법칙을 인류의 정신적 발달, 각 개별 과학의 발달 그리고 개인의 발달에 적용된다.
- 신학적또는 허구적(théologique ou fictif) 단계에서 인간은 세계 현상을 초자연적인 존재의 작용으로 설명한다.
- 형이상학적또는 추상적(métaphysique ou abstrait) 단계는 근본적으로는 위장한 신학의 단계이며, 그래서 여기서는 추상적(공허한) 존재가 초자연적인 존재를 대체한다. 이 같은 단계는 비생산적이지만 해체적이며, 그래서 다음 단계로 넘어간다.
- 과학적또는 실증적(scientifique ou positif) 단계에서는 최종 원인을 찾는 것을 포기하고 인식의 관심은 현존하는 사실(fiats)을 향하고 있다. 그 기초는 관찰이며, 이러한 관찰로부터 일반적인 ‘법칙’이 인식될 수 있는 것이다.
이 최종단계에서 인간 정신은 최고 수준에 이르지만 다른 영역에서는 아직도 이전 단계에 머무르고 있다.
실증적(positif)이라는 표현에는 다름과 같은 여러 가지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사실적인 것(le réel)과 유용한 것(l'utile)이라는 의미는 이론이 실천적 적용에서 분리되는 것을 극복한다는 의미이고, 해결될 수 없는 형이상학적인 물음과 구분해서 확실한 것(le certain)이라는 의미도 있고, 정확한 것(le précis)이라는 의미, 구성하는 것(le constructif)이라는 의미도 있고, 절대적인 요구 대신 상대적인 것(le relatif)이라는 의미 등이다.”
위의 세 단계 중 각각의 단계에서 특정한 사회형태가 상응한다. 신학적인 단계는 교회적 봉건적(clércale et féodale)사회 형태, 형이상학적 단계에는 혁명적(révolutionnaire)사회 형태, 실증적인 단계에는 과학적 산업적(scientifique et industrielle)사회 형태가 상응한다.
과학의 내부에서는 수학을 정점으로 하여 천문학, 물리학, 화학, 생물학에서 사회학에 이르기까지 학문의 서열을 제시할 수 있다. 이 같은 위계는 각 과학이 도달한 실증성의 정도와 과학들이 서로 기반으로 하여 구축되는 일련의 계열 관계를 보여준다.
여기에서 각 과학이 취급하는 과정의 복잡성은 전체 계열에서 아래로 갈수록 커진다. [복잡성 뿐만이 아니라 구성이 방식과 원리의 정립도 다른 차원이다. 강도가 증가한다.]
인간관계의 총체성에 관한 학문으로서 크나큰 의미를 갖는 사회학은 아직 실증과학의 수준까지 발달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이런 의미에서 사회학은 계속 구축되어야 한다.
이렇게 되면 사회적 발전의 확실한 예측을 근거로 사회적 삶의 조건들 향상시킬 수 있다. 꽁트가 만년에 제창한 실증적 종교[새로운 공동체 조직화]는 최고의 존재인 인류의 사랑(amour de l'humanité)에 의거하며, 그는 이를 두고 이타주의(altruisme)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38LM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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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인0605꽁트
꽁트(Auguste Comte, 1798-1857)
Didier Julia, Dictionnaire de la pilosophie, Larousse, 1988(1984)
꽁트는 1789년 몽펠리에(Montpellier)에서 태어나, 1857년 파리(Paris)에서 죽었다. 그는 수학을 전공하였고, 에꼴 폴리테그니크(Ecole politechnique)의 학생[16세에 입학]이었으며, 실증주의 철학자이다. [꽁트는 1817년에 셍-시몽(Saint-Simon)과 만났으며, 1824까지 그의 비서로 있었다.]
그의 실증주의는 실증철학 강의(Cours de philosophie positive)(1830-1842)에서 인류의 마지막 단계라고 한다. 이 마지막 단계는 모든 것을 마술적으로 실행하는 “신학적 단계(stade théologique)”로부터, 단어의 내용을 설명한 “형이상학적 단계(stade métaphysique)”를 거쳐, 설명한다는 것은 “법칙을 부여하는 것”이라는 “실증적 단계(stade positif)”로 나아감을 말한다. 여기서 “형이상학적 단계”의 설명이란 중세의 스콜라철학을 의미하며, “왜 양귀비(아편)는 잠을 자게 하는가? - 그것은 수면제 덕목(vertu dormitive)을 지졌기 때문이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은 의미이다.
우리는 경험이외 어떤 것도 인식하지 못한다. 즉 “하나의 절대적 격률(maxime)이 있다면, 그것은 절대란 없다는 것이다.” [20세기 후반에서 철학적 특징은 보편이나 절대의 개념은 인간이 만든 착각이자 신화이다. 인간에게 가난은 국가도 구제할 수 없다는 것은 착각을 넘어서 허위를 고착시킨 습관에 속한다. 어떤 제도든지 인간이 고칠 수 없는 제도는 없다. 인민의 저항은 항상 정당하다.]
꽁트는 사회학의 창시자이며, 그는 사회학을, 사회에 물리학의 방식을 적용함으로써, “사회 물리학(physique sociale)”이라 생각했다. [그가 수학을 전공했다는 것을 상기해야 할 것이다.]
그의 도덕론은 이타주의(altruisme)에 귀착된다. 1844년에 그는 끌로띨드 드보(Clotilde de Vaux)양을 알게 되었고, 그는 그녀를 소설적이고 플라톤적인 사랑을 했다. 그녀와 만남이 그를 신비주의로 이끌었으며, 끌로띨드가 죽은 후에 그는 인류교(l'Humanité)로 나아간다.
리뜨레(Maximilien Paul Emile Littré 1801-1881, 철학자, 문헌학자, 정치가이며 꽁트의 제자였다)는 이점에서 꽁트와 멀어졌으며, 그때부터 자기의 개인적인 작품을 썼다.
그의 낡고 아카데믹한 문체에도 불구하고, 실증철학 강의, 실증정치학의 체계(1851-1854)는 여전히 우리에게 풍부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39PK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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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담2023꽁트MMG [마실가 등재]
# 꽁트의 실증주의는 프랑스 학문에서 어떤 분류에 속하는가?
-- 어느 뛰어난 학자들도 시대의 아들이다. [년도에 주의.]
꽁트(Comte 1798-1857)의 실증주의 개념은 넓은 범위에서 사용되었다.
우선 꽁트는 최고의 엘리트들이 다니는 에꼴 폴리테크니끄(기술전문학교)에서 별난 인간[별종]이었으며, 학교를 그만두어야 했지만, 당대의 최고의 지식인들 중의 한명이었다. 그리고 1817년 생시몽의 제자였다. 생시몽의 영향으로 인류의 행복에는 공산사회의 건설에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고, 그런 사회를 구축하기 위해 사회학을 실증적으로 탐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꽁트 사후의 학문의 경향성을 보면 실증주의가 어떻게 쓰여지는 지를 알게 될 것이다.
실증주의를 벩송의 삼위상보다 들뢰즈 식으로 상층, 표면의 이중성(밖과 안), 심층의 네 평면에서 다룬다고 생각해 보자. “실증주의”라는 개념작업(conception)이 서로 사맛디 아니하여 “개념(concept)”을 달리 쓰는데, 서양학문을 수용하는 우리는 개념작업의 과정과 계열을 죽 탐색하기보다 답을 외우듯이 “개념”을 먼저 받아들이고, 그 다음에 개념에 발생과 발전 과정 없이 각자가 자기 읽은 대로 개념으로부터 내가 맞느니 니가 맞느니 한다. 맞고 틀리고가 아니라, 어떤 기원과 생성, 과정과 계통의 분류인지에 대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시간이 필요하고 그 시간만큼의 노력이 필요하다. 벩송, “설탕물이 녹기를 기다려야 한다”고 한다. 그리고 라마르크처럼 노력해야 한다. 벩송처럼 주의 깊은 노력을 해야 한다. 그리고 정확성이 있어야 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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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층은 꽁트의 실증주의가 영국의 스펜서(Herbert Spencer, 1820-1903)에서 학문의 종합적으로 분류하고 체계를 만들었고, 그 다음으로, 앵글로색슨 전반에서는 수학과 언어를 하나로 통일하려는 논리‘실증주의’라는 계보가 만들어진다. 이 논리실증주의의 바탕에는 인간이 자연을 체계화하여 지배할 수 있다는 철학적 오만이 있다. 이 논리 실증주의는 생물학의 분류상으로 이명법을 창안한 린네(Linne, 1707-1778)의 계보이다. 관념연합론의 원인 결과라는 두 점을 연결하는 논리를 펴는 것이다. 이와 달리 생물학의 생성과 생장의 과정에 다른 분류를 한 이는 뷔퐁(Buffon, 1707-1788)이며 그는 계열(serie)라는 개념을 창안했고, 쥐시외(Jussieu, 1748-1836)가 분류표를 작성하였다. 이런 영향으로 프랑스 실증주의는 논리적이라기보다 생리학적이고, 우주발생론적이라 할 수 있다.
표면에서 이중성이 있다. 꽁트는 인간의 삶과 공산사회의 행복에서 실증적으로 어떤 사회를 구축하고 또한 인간은 어떤 행동을 해야 하는데 있다. 꽁트도 인간이 훌륭한 공동체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런 사회를 만들 수 있는데, 구체적 행위와 체제를 만들어야 한다. 공산사회를 인구와 토지위에 세우려는, 맑스가 말하는 공상적 사회주의 계보들은 이에 속한다. 1871년 빠리꼬뮨에도 이런 공산주의자와 아나키스트들이 포함되어 있다. - 이에 비해 맑스는 영국으로 건너가 산업사회가 인구와 토지에서가 아니라, 기술생산에서 생산도구를 장악한 자본가와 이에 종속된 노동자 사이의 문제를 제기하면서 정치경제학의 학문을 세운다. 꽁트의 사회학의 변형 중의 하나가 정치경제학인다. 이런 기술발달이전의 정치경제학의 문제 제기는 루소였다. 자연에서 노동분업에서부터 생기며, 소유에서 소외가 생긴다고 했지만 맑스처럼 산업사회의 실증적 탐구는 아니었다.
표면의 이중성에서 안감이 있다. 인간이 본성상으로 공산사회를 만들 수 있는, 또는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는가? 인간도 동물의 한 부류에 지나지 않지 않는가? 인간은 이런 사회를 구성할 지식을 신으로부터 타고 났는가? 아니면 오랜 과정에서 인간이 이런 능력을 만들었는가? 그렇게 만들었다면 새로운 공동체 공산사회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이들은 신학의 인간의 역사와 달리 인간이 자연과 투쟁에서 인간의 사유뿐만이 아니라 신체조자도 바꾸어온 것이 아닌가? 이들이 인간의 고고학적 유골과 유적에 대한 연구를 실증적으로 한다. 이들은 겉면이 아니라 벩송이 말하는 안으로 속으로 들어간 이들이다. 이들이 1859년 파리에서 고고인류학이라는 학회를 만든다. - 이에 대한 반동이 있다. 뒤르껭류는 신이 인간을 만들었다고 생각하는 부류이며, 사회현상들을 실증적으로 수학적 도식과 통계적으로 해명할 수 있다고 여겼다. 내가보기에 고고인류학자가 유물론자이고, 뒤르껭은 관념론자(관념연합론자)이다.
심층에서 인간을 들여다보는 쪽은 어떠한가. 일반적으로 생명을 살아있는 몸을 잘라서 다룰 수 없다는 생각은 19세기 까지 여전했다. 생명은 어떻게 다루어야 할까, 아리스토텔레스와 테오프라테스로 돌아가지 말자. 프랑스 식물학자인 쥐시외(Bernard de Jussieu, 1699-1777)와 식물분류학자인 쥐시외(Antoine-Laurent de Jussieu, 1748-1836)가 있다. 이런 전통에서 뷔퐁(Buffon, 1707-1788)이 있다. 그는 스웨덴 박물학자 린네(Linne, 1707-1778)와 같은 해 태어났지만 린네보다 10년을 오래 살았다. 이 두 박물학자의 분류방식은 뷔퐁은 기원과 생성을 다루었다면, 린네는 결과물의 유사성을 다루었다. - 린네의 관념연합적 관점은 아카시아의 콩과 식물에서 볼 수 있는데, 아카시아 꽃과 열매는 강낭콩의 꽃과 열매의 형상(idea)가 같다. -
뷔퐁의 제자인 라마르크(1744-1829)는 생성과 성장에 대한 실증적 탐구를 했다. 새의 날개와 나비의 날개 차이는 왜 생기는가? 생성(genes, 이 단어는 “창세기”와 같은 단어이다, 개념으로부터 출발의 위험이다) 그러면 생물학은 어떻게 왜 생겨났느냐를 탐구해야지 대립적 구별로서 분류는 어린이의 시각과 같지 않을까? 기나긴 과정에서 생명은 왜 다른 형태를 만들었을까? 라마르크의 생성과 발전의 개념작업이 변형론(transformation)이다. 그리고 라마르크 시대 1800-1830까지 형성과 생성에 대한 기나긴 논쟁을 한다. 조프르와 대 퀴비에 논쟁이다. 물론 생명 생성의 기나긴 역사에서 실증적으로 원시생물과 고생물의 계열을 맞출 수 없었기에 형상론(이데아론)의 퀴비에 승리였다. 그럼에도 변화와 변형(나중에 다윈의 진화론)에 대한 연구는 실증적으로 나간다. 뷔퐁까지 식물분류 다음으로 동물분류의 학문이 실증적으로 전개된다. 이런 과정에서 영국에서 다윈의 진화론(1859)에 나온다. 이 진화론에 힘입은 이들이 스펜서와 논리실증주의자이다. 논리실증주의자가 논리와 언어라고 하지만 배경에서 린네와 다윈이 있다.
생명 여러 부류들이 동일 근원에서 나왔는지 서로 다른 기원에서 나왔는지에 대한 논의가 생물학의 발전을 가져온다. 파스퇴르(Louis Pasteur, 1822-1895)를 생가하면 된다. 파스퇴르의 실증적 탐구는 파스퇴르의 황새목의 플라스크를 생각하면 된다. 그런데 프랑스에서 생명학보다 인간의 생명에 대한 관심으로 기울어지면서 의학의 발달이다. 베르나르(Claude Bernard, 1813-1878)이다. 그의 실험의학 입문(Introduction à l’étude de la médecine expérimentale, 1865)은 인간학에서 의학의 방향을 새로이 전개한 것이다. 이 생리학자 베르나르는 두뇌의 뉴런에 대한 관심으로 확장한다. - 1865년이면 꽁트(1798-1857)가 생각한 사회 실증주의와 다른 길에서 “실증” 즉 경험적 축적에 대한 논의로 바뀐 것이다.
다른 계열의 실증적 연구들이 있다. 두뇌의 연구에 대하여, 생리학에서 뉴런 연구는 또 다른 실증적 탐구의 가지치기가 나온다. 프랑스 신경생리학자 브로카(Broca 1824-1888, 인류학회 창설자 중의 한명)와 독일의 신경 생리학자 베로니케(Carl Wernicke, 1848-1905) 등은 인간의 행동이 두뇌에 어떤 부위에 역할을 담당하는 위치가 있을 것이라는 실증적 작업을 하였다. 이런 계통에는 프랑스보다 독일의 실증적 연구가 많은 것 같다. 이와 다른 부분이 있다. 신증경(nevrose)와 달리 정신병(psychose)에 관하여 개인의 특이성에서 신경계와 다른 현전에서 달리 또는 소외된 행위들이 등장한다는 것이다. 이 쪽의 계열에는 프로이트도 프랑스로 배우러 왔던 샤르꼬(Charcot 1825-1893)계보들이 있는데 그 뒤를 이은 삐에르 자네(1859-1947)가 있다. 신증증이 아니라 정신병의 계보학에서 벩송이 정신병리학을 MM 2에서 설명했었다. 그 정신병이 파라노이아와 스키조프레니 사이에 차이가 있다는 것을 프로이트가 잘 몰랐다고 비판하는 이는 정신과의사이며 들뢰즈의 친구인 가타리였다.
다윈의 관념연합적 이론 체계로서 진화론과 달리 식물의 생장에서 유전을 찾았던 이는 멘델(Mendel 1822-1884)이며, 멘델을 모르고도, 1900년에 새로이 유전을 발견한 세 학자로 드브리스(Hugo de Vries, 1848-1935), 코렌스(Carl Erich Correns, 1864-1933), 체르마크(Erich Tschermak, 1871–1962)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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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증주의라는 용어 속에서 실증의 개념은 19세기의 전유물인 것 같다. 그리고 학문이 표면의 한쪽으로 나아가, 마치 지층과 같이 심층(深層)으로 안으로 들어간 학문들의 실증은 논리 실증주의와 관념연합의 실증과는 다른 생성과 전개의 원인과 기원에 대한 탐구를 하게 된다. 벩송의 형이상학(우리가 형이심학이라 부르는 것은)의 기원과 원인에서 실증적으로 탐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신화와 신들 또는 유일신으로부터 관념연합이 아니라, 자연에서 질료에서 탐구했던 그리스 탈레스가 학문 또는 철학이 진정으로 형이심학이라는 것이다. 이 휠레가 물질이고, 그 자연이 우주와 지구이다. 벩송이 말하기를 동서양을 막론하고, 고대 중세 르네상스 계몽기에 그 뛰어난 철학자들이 심층으로 들어갈 수 없었느냐 하면, 현미경과 화학의 분자구조에까지 들어갈 수 없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꽁트는 사회 공동체 삶에서 평등, 자유,. 행복을 추구하는 방식을 실증적으로 탐구해야 한다고 했다. 그보다 프랑스의 실증의 학문은 두가지 권위인 왕과 제사장을 단두대의 이술로 보낸 이후에, 신의 피조물로서 자연을 자연 자체로서 탐구하고, 인간적 자연(la nature humaine, human mature, 인간적 본성)을 자연 속에서 자연으로부터 다루기에 자연 속에서(자연의 기원과 생성과 변형, 발전)을 다룬다. 이를 프랑스 실증주의라고 한다. 세계사에서 한번은 탈레스에서부터 다른 하나는 프랑스 1830년대 고생물학적 논쟁에서부터 실증의 길을 걷는다. 나로서는 자연(퓌시스), 물질(휠레)를 다루는 것이 진솔한 유물론이고, 벩송도 그렇게 생각했다. 말하자면 바슐라르의 말을 빌려 보면 심층은 붉고 상층은 푸르다. 이어서 생명과 삶을 논하는 심층 형이심학은 빨강이, 돈벌이와 이익을 논하는 관념연합적 상층형이상학은 파랑이라 부른다. (3:29, 56MMG)
** 참조 *** ***
1707 뷔퐁(Buffon, 1707-1788) 프랑스의 철학자․박물학자
1707 린네(Linne, 1707-1778) 스웨덴의 식물학자. 생물분류법의 기초를 확립했다.
1745 삐넬(Pillippe Pinel 1745-1826) 프랑스 의사
1771 비샤(Marie François Xavier Bichat, 1771-1802)(31살) 600명 시체해부 프랑스 의사 생물학자 생리학자. 삶과 죽음에 관한 생리학적 탐구들(des Recherches physiologiques sur la vie et la mort, 1800)
1801 리트레(Émile Littré (Maximilien Paul) 1801-1881) 프랑스 의사, 사전편찬자, 철학자. 정치가.
1813 베르나르(Claude Bernard, 1813-1878)
1817 다랑베르(Charles Victor Daremberg, 1817-1872) 프랑스 의사, (의학도서관) 서지학자. 의학사가. 꼴레쥬 드 프랑스 강의, - 리트레의 제자.
1822 파스퇴르(Louis Pasteur, 1822-1895) 프랑스의 화학자․미생물학자.
1824 브로카(Pierre Paul Broca 1824-1888) 프랑스 외과의사 인류학자. 빠롤의 두뇌 중심의 위치화 (왼쪽 두뇌 제3회전 돌기) 이것의 귀착점인 실어증(브로카 실어증)에 관한 탐구로 잘 알려져 있다.
1825 샤르꼬(Jean Martin Charcot 1825-1893) 프랑스 신경학자 살페트리에르(Salpêtrière)에서 병리 해부학 교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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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69 퀴비에(Georges Léopold Chrétien Fréderic Dagobert Cuvier 1769-1832) 프랑스의 동물학자. 비교해부학과 고생물학의 창시자이다.
1772 조프루아 생틸레르(Etienne Geoffroy Saint-Hilaire 1772-1844) 프랑스의 동물학자. 생물의 진화에 관해서는 환경의 직접작용을 주장하였다. 진화론사상 라마르크와 다윈을 중계하는 위치에 있으며, 퀴비에와 함께 비교 해부학의 확립에 공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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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인0605꽁트
꽁트(Auguste Comte, 1798-1857)
Didier Julia, Dictionnaire de la pilosophie, Larousse, 1988(1984)
꽁트는 1789년 몽펠리에(Montpellier)에서 태어나, 1857년 파리(Paris)에서 죽었다. 그는 수학을 전공하였고, 에꼴 폴리테그니크(Ecole politechnique)의 학생[16세에 입학]이었으며, 실증주의 철학자이다. [꽁트는 1817년에 셍-시몽(Saint-Simon)과 만났으며, 1824까지 그의 비서로 있었다.]
그의 실증주의는 실증철학 강의(Cours de philosophie positive)(1830-1842)에서 인류의 마지막 단계라고 한다. 이 마지막 단계는 모든 것을 마술적으로 실행하는 “신학적 단계(stade théologique)”로부터, 단어의 내용을 설명한 “형이상학적 단계(stade métaphysique)”를 거쳐, 설명한다는 것은 “법칙을 부여하는 것”이라는 “실증적 단계(stade positif)”로 나아감을 말한다. 여기서 “형이상학적 단계”의 설명이란 중세의 스콜라철학을 의미하며, “왜 양귀비(아편)는 잠을 자게 하는가? - 그것은 수면제 덕목(vertu dormitive)을 지졌기 때문이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은 의미이다.
우리는 경험이외 어떤 것도 인식하지 못한다. 즉 “하나의 절대적 격률(maxime)이 있다면, 그것은 절대란 없다는 것이다.” [20세기 후반에서 철학적 특징은 보편이나 절대의 개념은 인간이 만든 착각이자 신화이다. 인간에게 가난은 국가도 구제할 수 없다는 것은 착각을 넘어서 허위를 고착시킨 습관에 속한다. 어떤 제도든지 인간이 고칠 수 없는 제도는 없다. 인민의 저항은 항상 정당하다.]
꽁트는 사회학의 창시자이며, 그는 사회학을, 사회에 물리학의 방식을 적용함으로써, “사회 물리학(physique sociale)”이라 생각했다. [그가 수학을 전공했다는 것을 상기해야 할 것이다.]
그의 도덕론은 이타주의(altruisme)에 귀착된다. 1844년에 그는 끌로띨드 드보(Clotilde de Vaux)양을 알게 되었고, 그는 그녀를 소설적이고 플라톤적인 사랑을 했다. 그녀와 만남이 그를 신비주의로 이끌었으며, 끌로띨드가 죽은 후에 그는 인류교(l'Humanité)로 나아간다.
리뜨레(Maximilien Paul Emile Littré 1801-1881, 철학자, 문헌학자, 정치가이며 꽁트의 제자였다)는 이점에서 꽁트와 멀어졌으며, 그때부터 자기의 개인적인 작품을 썼다.
그의 낡고 아카데믹한 문체에도 불구하고, 실증철학 강의, 실증정치학의 체계(1851-1854)는 여전히 우리에게 풍부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39PK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