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이었다. 온갖 사물의 실체가 흐릿하게만 보이는 꿈길이었다. 마음속으론 누군가를 만나야겠다고 생각한 탓에 자꾸만 입이 마르고 버석거렸다. 만나야지, 만나야겠어.
정조가 짜증스럽게 집으로 찾아가 만나야겠다고 한 사람은 영의정 김치인(金致仁)이었다.
열 달 넘게 계속된 한발이 민심을 흉흉하게 만들었고 나라 안 곳곳에선 소란스러운 일이 꼬리를 물고 일어났다. 연로한 김치인은 자신이 상감을 잘못 보필했다고 영의정 자릴 내놓았다.
“전하, 성덕을 베푸는 성상의 깊은 뜻을 헤아리지 못하는 어리석은 신의 불충을 벌해 주옵소서.”
“ 날이 가물고 비가 오지 않는 게 어찌 영상의 잘못인가. 그 같은 말을 하지 마오.”
그러나 김치인은 나라에 한발이 드는 건 자신이 잘못 보필한 것이라 강조하며 영의정을 사임하겠다는 말을 아뢰고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영상의 집이 어딘가 알아오라. 승지는 즉시 다녀오라.”
명을 받은 승지가 두 번이나 다녀왔지만 김치인은 병을 핑계 삼아 등청을 거부했다.
선대왕 때 영의정을 지낸 김재로(金在魯)의 아들로 지체있는 가문에서 태어난 김치인은 서른하나에 생원이 되었고 그 이듬해 춘당대문과(春塘臺文科)에 장원해 벼슬길이 영의정에 이른 사람이다. 오랫동안 관직에 있어 정사에 밝아 정조의 신임을 받았지만 사의를 표명한 채 등청을 거부하다 보니 상감의 마음은 그저 답답할 뿐이었다. 하루가 다르게 민심은 사나워지고, 백성들 살림이 어지럽다 보니 정사는 정사대로 엉망이 되고 무엇 하나 손에 잡히는 게 없었다. 내전에 들어가니 김비 역시 말문이 조심스럽다.
“ 마마! 왜 그러오? 마마께서 영상의 사가로 나가시는 건 아니 될 말씀입니다. 본인이 싫다 하면 다른 사람을 그 자리에 앉히면 될 일입니다. 싫다는 사람을 굳이 사가로 나가시면서까지”
“답답한 소리 마오.”
“두 차례나 전하께서 그 사람을 차송하지 않았습니까. 싫다고 등청도 않는 사람을 뭣 때문에 몸소 찾아 나선단 말입니까. 신첩은 알다가도 모르겠습니다.”
적잖이 흥분돼 있는 목소리였다. 지그시 감은 상감의 두 눈에선 무얼 가늠하는지 골똘한 생각에 잠겨있는 듯했다.
중전 김비는 상감의 마음이 자신의 말에 동요하고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더는 말할 수 없었다. 상감의 시선이 김비 쪽으로 옮겨졌다.
“중전, 유비 유황숙은 남양으로 제갈공명을 세 번이나 찾아갔었소. 어디 유비만 그랬습니까. 문왕(文王)도 강태공을 얻으려 낚시터까지 갔다지 않습니까.”
“마마께선 고사(古事)를 본 따 영상 집을 찾아가시는 것입니까?”
“고사를 본 따는 게 아닙니다. 나로서는 찾아가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오.”
“어인 까닭입니까?”
중전이 재우쳐 묻자 상감의 용안은 측은히 변했다. 얼마 동안 침묵이 흐르자 상감은 혼잣말처럼 입을 열었다.
“세상 사람들은 내가 호강스럽게 지낸다고 믿을 것이오. 그게 조선의 군왕이라 믿겠지만 나는 추호도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소.”
“신첩의 말은 그게 아니옵고”
“중전, 비가 열 달 넘게 오지 않고 있습니다. 강원도 땅과 영동 일대의 마을이란 마을은 텅텅 비어 강아지 새끼 한 마리 구경할 수 없다잖소. 중전은 소식도 듣지 못했소?”
“백성이 굶고 있다면 먹이시면 해결될 일입니다. 10만석이든 20만석이든 굶은 백성을 먹이시면”
“영상이 사임하고 없는데 백성이 굶으니 덮어놓고 먹이란 말이오?”
“그 자리에 앉을만한 사람을 물색하면 될 일입니다.”
“비가 오지 않아 민심이 극도로 사납고 게다가 천주교 문제까지 시끄럽습니다. 이러한 여러 문제에 영상은 자신의 부덕으로 생긴 일이니 물러나겠다는 것이오. 이런 판국에 나는 발뺌을 하고 죄없는 영상만 물러나게 한단 말이오? 중전의 말대로 그런다고 해봅시다. 아니 할 말로 덜컥 전쟁이나 일어나 보오. 어느 누가 그런 임금 밑에서 충성을 앞세워 전쟁을 치른단 말입니까.”
그때 문밖에서 김상궁 목소리가 들려오자 상감의 역정 섞인 목소리가 날았다.
“무슨 일이냐?”
“외전에서 거래가 올라왔나이다. 영상 대감이 등청했다 하옵니다.”
“무어라, 내가 곧 나가리라.”
영상이 입궐한 건 사실인 모양이었다. 자기를 만나기 위해 전하가 나선다는 말을 듣자 더 이상 자리에 누워있을 수 없어 입궐한 모양이었다. 지체없이 편전으로 나가자 그 곳에 영상이 있었다. 머리를 바닥에 조아리며 사배를 마치고 차분히 입을 열었다. “전하께서 신의 집을 찾아오신다는 말씀을 받은 소인을 용서해 주시옵소서. 하오나 마마, 신으로서는 어쩔 도리가 없사옵니다.”
상감은 용상에서 일어나 영상 곁으로 다가갔다. 영의정 김치인은 그해 일흔하나였다. 이미 늙을 대로 늙어 이는 모두 빠지고 허리는 구부러졌으며 손은 앙상한 뼈만 남아 마른나무 가지처럼 바짝 마른 상태였다. 늙은 정승의 손을 잡고 울음을 터뜨리자 김치인의 오열은 더욱 심해졌다. 군신간에 엉키어 뜨거운 눈물을 멈추지 않은 상태로 한동안 그대로 있다가 상감이 먼저 눈물을 거두었다.
“내 비록 덕이 없고 보잘것 없는 군왕이기는 하나 무엇이 옳고 그른지는 압니다. 열 달 넘게 가뭄이 들어 민심이 시끄러운 것도 나의 부덕함 탓이오. 그런데 어찌 영상이 허물을 뒤집어쓰고 사임하겠다는 것이오.”
“전하, 이 늙은 것이 노망기가 있어 그리했사오니 허물에 대한 꾸중은 마옵소서.”
“그래, 좋은 생각이 있습니까? 우선 극심한 가뭄에서 헤어나야겠으니 기우제를 올리게 하옵소서.”
“그리하시오, 당장 예조에 분부해 거행토록 하시오.”
이날 김치인은 오랜만에 궁에 들어와 서른셋의 이서구(李書九)를 경상우도 암행어사로 삼아 파송했다. 황해도와 강원도 지방엔 이곤수(李昆秀)가 차송되었다. 어명을 받든 예조에선 삼각산과 남산 한강에서 기우제를 올리고 종묘의 사직단에서도 기우제 올릴 준비를 서둘렀다. 기우제 준비를 서두르는 중, 하늘엔 구름이 모여들어 한양은 먹구름으로 뒤덮였다. 한 방을 두 방울 빗발이 보이자 한발에 시달린 백성들의 입에서 기쁨의 소리가 터져나왔다.
“비다! 비가 온다!”
백성들은 만나는 이마다 상감을 추켜세웠다. 그것이 인사말이었다. 하루 전만 해도 극심한 한발로 소란스럽기 그지없던 나라가 상감을 추앙하던 방향으로 치닫더니 비는 무서운 기세로 쏟아졌다. 다소 늦은 감은 있지만 쫙쫙 쏟아지는 빗발에 안도감을 느꼈던 상감은 창밖으로 시선을 돌린 채 문득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힌다.
‘만약 그렇게 되면 어쩐다지’
중전이 걱정스러운 눈길을 상감쪽으로 돌리며 묻는다.
“마마, 걱정되는 일이 있사옵니까? 내 잠깐 망령된 생각이 들어”
“망령된 생각이라니오?”
“비가 너무 과하게 오는 지라.”
“비 내리는 것까지 걱정이옵니까.”
“그렇소. 너무 오랫동안 가물어 잊고 있었는데 빗발이 심상치 않아 걱정이 생겼습니다.”
비가 와도 걱정, 안 와도 걱정·상감의 푸념같은 얘기가 끝나기도 전에 천지를 뒤흔든 뇌성소리가 요란스럽게 울렸다. 상감의 용안에 어두운 그림자가 스치고 지나갔다. 머리 한켠에 떠오른 건 규장각에 걸어놓은 시구였다. 그것을 가만히 읊조렸다.
하늘가에 가을 구름이 옅으니
서녘으로 쫓아오는 만리 바람
오늘 아침에 갠 경치가 좋으니
비 오래 왔어도 농사에는 피해 없네
가을 버들은 푸른 행렬로 줄 서 있고
산의 배는 조그맣고 붉게 익어
피리 소리가 다락 위에서 나니
높은 하늘로 치솟아 드는 외기러기
두보의 <우청(雨晴)>이란 시였다.
상감은 이 싯귀에서 '구우불방농(久雨不妨農)'이란 구절을 자주 읊조렸다.
비가 오랫동안 내렸어도 농삿일엔 아무 피해가 없다는 뜻이다.
그 구절처럼 이번의 폭우 역시 농사엔 아무런 피해가 없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상감의 간절한 기원에도 빗발은 사흘이고 나흘이고 계속되더니 이레가 지났어도 무엇이 부족한 지 계속 퍼부어댔다.
'우르릉 쾅!' 가까운 곳에 벽력을 내리쳤는지 상감은 꿈길에서 홀연히 깨어나 창밖으로 시선을 향한 채였다.
이미 어둠은 장대같은 빗발에 갇힌 채 살그머니 내려와 있었다.
순간 상감의 뇌리를 들쑤시는 기억이 되살아났다.
이틀 전 미행(微行) 길에서 만난 처녀의 모습이었다.
사대부 집안 여식이 상감을 잠자리에 시중들면 내리는 건 은반지였다.
반지엔 날짜와 시각을 새겨 넣어 용정(龍精)을 맞은 밭에 기름진 수확이 있기를 바라지만 한 달 내내 소식이 없거나 불손한 소식이 들리면 반지는 회수되어 뜨거운 불에 녹임을 당한다.
은이 귀했던 당시 상황에 비추어 상감이 미행(微行)을 나가 민정을 시찰할 때 잠자리 시중(薦枕)을 받으면 민간의 처녀에게는 가죽으로 만든 녹두색 패가 내린다.
녹두패다. 성상은 한때의 객고를 풀수 있는 즐거움이지만 처녀에겐 예기치 않은 그날 밤의 역사를 고스란히 가슴에 안는다.
성상의 총애가 내린 날짜와 시각이 내관의 붓놀림으로 쓰인 그날 밤의 역사가 처녀의 손에 놓이면, 이것은 부귀영화를 보장받을 신분증명용 기록으로 바뀐다.
'내가 그 아이와 인연을 만들면서 녹두패를 줬겠다. 한데, 그 아일 찾으러 갔을 때 이미 어디론가 떠났다고 무예별감이 말했잖은가. 그런 아이가, 궁에 들어와 있다는 건 무슨 말인가?'
∎녹두패(綠豆牌) ; 상감이 총애한 민간 여인에게 내리는 패
∎우청(雨晴) ; 두보의 시
출처 : 오마이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