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상회복, 32년을 기다렸다"
1989년, 전국교직원노동조합으로 특화된 교육운동을 하였다고
독재권력은 1,700 전국의 교사를 교단에서 몰아냈댜.
투쟁 끝에 4년 6개월 후 우리는 다시 교문을 열었다.
그러나 복직교사는 퇴직할 때까지 5호봉이 낮은 불이익으로 이어졌고
승진 등의 기회도 뭇 경쟁의 대열에서 밀려났다.
우리는 훗날 공허한 한 장의 민주화유공자 증서를 빈손으로 받아들었다
아래 사진은 1989년 당시 결사단식투쟁을 벌였던 명동성당 천막 안이고,
단식 10일, 우연히 전교조신문에서 링거를 맞고 누워 있는 내 얼굴을 반겼다.
마침 전교조 백서를 만드는데 글이 접수되지 않는다고
단톡에서들 설왕설래!
몇 자 적어 오늘 마감 날에 맞추었답니다. 함 읽어보시죠.^^!
명동단식(전교조신문, 90.5.21~6.4 / 사진으로 보는 전교조 1년)
죽음을 각오한 단식이 7월 26일부터 11일간 감행되었다. 600여 교사 중 250여명이 탈진한 이 처절한 단식은 전교조사수투쟁의 정점을 이루었다.
"생때 생떼, 모두 안녕!"
때는 전교조 결성에 대한 당국의 회유와 협박, 고발, 구속 등 대대적인 탄압이 자행되고, 학교에서는 징계위원회를 열어 탈퇴를 거부한 교사의 면직 또는 파면이 속도를 내던 시기였다. 전날 직권면직 서류를 받은 난 모든 마음의 준비가 끝났고 이제 몸만 떠나면 되는 날. 나는 순천금당고 너른 교무실에서 교단을 떠나는 변을 마쳤다. 누군가 가까이서 눈물을 훔쳤고 한동안 교무실은 정적에 휩싸였다. 그때 갑자기 밖이 소란해지기 시작했다. 전교생이 모두 운동장으로 쏟아져 나온 것. 선생님들은 황급히 뛰어나갔고 나는 휑한 교무실에 홀로 남겨졌다.
그 순간 내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앉아 있어야 할지 서있어야 할지 안절부절못하는데 복도에서 웬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학생 한 명이 교무실 안으로 팽개쳐졌다. 시위 주동자의 한 명로 보이는 3학년생이었다. 밖에서는 “김진수 선생님 면직을 철회하라”는 외침이, 안에서는 목하 학생의 고통스런 신음이 뒤엉켰다. 교사는 자신의 책상에 몽둥이를 내던진 뒤 시계를 풀고 고성과 함께 격투기를 방불케 하는 폭력을 가했다. 나는 치를 떨었다. ‘생때같은’ 아이를 부여안고 그 큰 주먹을 대신 얻어맞거나 그 홍두깨 발길질을 내가 다 받아냈어야 옳았다. 그는 일 년 전에 전근한 동문출신 신 아무개 교사였다. 구사대를 자임한 듯 대놓고 나를 겨냥했다. 교육민주화운동을 하다 죄 없이 학교를 떠나게 된 선배교사 앞에서 자신의 후배이자 제자인 학생을 희생양으로 내게 도발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나는 말할 수 없는 지괴감 속에서 무언가 당장 서둘러야겠다는 마음으로 결연해졌다. 곧장 조합원 선생님 열네 분과 미술실에서 만났다.
“저는 밖에 운집해 있는 학생들을 다독여 교실로 되돌릴 자신이 없어요. 학생회 임원들을 불러 제 뜻을 전하고 싶네요. 남은 동지들께서 학생들을 감싸 다치지 않게 상황을 마무리해주세요.”당부했다. 이윽고 모인 학생회 간부 30여명을 향해 “전교조는 선생님들의 참교육 운동이고 나는 또 밖에서 감당해야 할 일들이 쌓여있으니 부디 내 가는 길을 열어 달라. 의기를 거두고 집회를 수습하라” 일렀다. 시간이 흐르고, 미쁜 제자들이 교실을 향했다. 나는 바로 학교 뒤 생울타리를 꿰어 비탈길을 미끄러지면서 처음으로 컹컹 울었다.
우리 학교가 이럴진대 순천의 다른 학교라고 사정이 다를까. 효천고와 매산고도 같은 시련을 겪었으며, 매산중 순천공고 순천상고 순천여상 선혜학교와 함께 순천승주지역 여러 분회에서 분루를 삼켰다. 그렇게 해서 끝끝내 해직을 안고 돌아온 동지들은 차마 열다섯을 넘지 못했다. 이 과정에서 탈퇴자의 명단이 시시각각 방송국 전파를 탔고 내분과 갈등으로 조직은 위기를 맞는다. 나는 마침 긴급 제안된 확대비상대책회의(?)에서 순천승주지회장에 선출된다. 흔들리는 조직을 붙들어 세울 묘책도 능력도 없었지만 전의만은 가상하여 “동지 여러분, 내가 관 속에 들어가기 전에는 결단코 전교조 깃발을 내리지 않겠습니다!”했다.
며칠 후 이런 일도 있었다. 내 면직처분으로 미술교사 자리가 빈 것을 알게 된 어떤 사람으로부터 만나자는 전화가 걸려온 것. 홍 아무개라는 금당고 동문이었다. 처음 보는 내게 덮어놓고 금당고 미술교사 자리에 자기를 천거해 달라 ‘생떼’를 썼다. 취기가 있었던 그가 맘에 들지 않는다며 백주의 길거리에서 나를 폭행했다. 이후 그는 무슨 수를 썼는지 그 미술 자리를 꿰차는데 성공했다. 세월이 흐르고 먼 훗날, 신 아무개 교사는 전교조 순천금당고 분회장을 자임하기도 했다. 나는 그가 부끄러운 과거를 상쇄하여 조금은 찜찜했던 기억으로부터 한 걸음 벗어나고 싶었을 거라 헤아려주었다.
살아갈 직장을 잃고 돌아온 나를 아내는 핀잔은커녕 설거지소리도 내지 않고 안아주었다. 아무렴, 나는 그녀의 맘속 깊숙이 드리웠을 긴 불안의 그림자를 토닥이며 쥐꼬리만 한 퇴직금으로 어여삐 오년을 났다.
그것은 마치
봄볕에 붙는 불꽃처럼 아슴히
그것은 어쩌면
마른 가실의 날풀씨처럼 달뜬 가슴
생을 포박한 개밋둑 삶의 병영 너머로
삭풍도 열풍도 아닌 참 잘 피운 바람
참 잘 말린 볕
붉은 껍질 속 흰 살빛 벅찬 이 손금 위의
능금, 내 아내
「내 손금 위의 능금」부분
감사하다. 친구 곽재구 시인은 내 첫 시집의 발문 한 쪽을 이렇게 적었다. “전교조의 해직교사로 지내던 시절 그와 몇몇 남도의 섬들을 여행한 적이 있는데 그 여행 뒤 끝에 그는 늘 삶과 예술성이 함께 존재하는 싱싱한 작업들을 꾸려내곤 했었다. 집안에 먹을 쌀이 떨어지고, 딸아이가 아주 좋아하는 피아노 학원의 학원비를 몇 달째 내지 못하는 형편 속에서 그가 그림에 쏟은 열정을 나는 지금도 기억하고 있거니와 작업실 꾸릴 공간이 없어 안방을 치우고 먹물과 함께 씨름하던 그 곤궁한 시절이 있었으므로 해서 나는 그를 당당하게 그림쟁이라 부를 수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