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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29편
큰 물 위에서 통치하시는 영광의 하나님을 찬송함
(찬송 시편 24편)
2021-1-29, 금
맥락과 의미
시편 29편은 번개가 치면서 비가 내리는 장면을 묘사하는 시편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이것은 바알 숭배의 본거지인 레바논과 헤르몬 산에 번개가 내려치면서 심판을 시행하시는 것을 노래합니다. 같은 것이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평화의 소식이 됩니다.
앞에서 시편 28편에서 성도는 악인을 심판해 달라고 부르짖었습니다. 여호와께서 자기의 간구하는 “소리”를 들으신다고 확신하였습니다(28:6). 29편에서는 “여호와의 소리”가 7번 나옵니다. 그분이 심판하는 것을 노래합니다. 여호와께서 시인의 간구를 들어 주신 것은 개인적인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공적인 심판과 관련된 것임을 이러한 데에서 노래하는 것입니다.
1. 높은 곳에서는 주님께 영광을 (1-2절)
2. 일곱 우레로 임하시는 주님의 영광 (3-9절)
3. 땅에서는 평화 (10-11절)
1. 높은 곳에서는 주님께 영광을 (1-2절)
1 너희 권능 있는 자들아 영광과 능력을
여호와께 돌리고 돌릴지어다
2 여호와께 그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며
거룩한 옷을 입고 여호와께 예배할지어다
“여호와께 돌리라(드리라)” 3번 말합니다. “여호와께 경배하라”는 명령으로 이어 집니다. 여호와의 행하심을 보고 그분의 이름에 합당한 경배를 드리라고 합니다.
처음에는 “여호와께 드리라”고만 합니다. 이어서 “영광과 권능”을 드리라고 합니다. 마지막으로 “그분의 이름의 영광”을 드리라고 합니다. 영광과 권능은 여호와의 이름의 영광으로 이어집니다. 여호와라는 이름은 출애굽을 이루신 그 이름입니다. 그 구원을 베풀어 주신 여호와의 영광을 생각하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합니다.
여호와께 영광을 돌리라는 명령에 대한 답은 이 시편의 끝에 가서 찾을 수 있습니다. 중간에 말하는 시편의 내용을 잘 알 때에 여호와께 잘 영광을 돌릴 수 있습니다.
“권능 있는 자들”는 “신의 아들들”입니다. 여기서는 이방신들을 말합니다. 헤르몬 산을 근거지로 삼고 있는 바알들에게 심판을 선언합니다. 하나님께 심판을 받는 것이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입니다 (참조. 시편 97:7)
2절에서 “거룩한 옷을 입고 여호와께 예배할지어다” 여호와께서는 그분께 나아오는 자가 거룩한 옷을 입고서 경배하게 하셨습니다(참조. 시 110:3). 그런데 원문에는 “옷”이라는 표현은 없고 거룩함의 “위엄”이 있습니다. 그래서 “거룩한 위험을 갖추신 여호와께 경배하라”로 볼 수 있습니다.
2. 일곱 우레로 임하시는 주님의 영광 (3-9절)
3-9절에서는 “여호와의 소리”가 7번 나옵니다. 그와 별도로 “여호와”만 3번 더 나옵니다. 7과 10이라는 숫자로 완전함을 표시합니다.
3-9절은 하늘에서 천둥과 번개와 함께 비가 내리고 물들이 격렬하게 흘러가는 모습을 묘사합니다. 세 부분으로 나뉩니다. “하늘 - 바다 - 땅/산 – 광야”로 소리가 퍼지는 모습입니다. 하늘에서 선포된 여호와의 소리가 큰 비바람과 함께 지중해에서 동쪽으로 와서 레바논 산을 휩씁니다. 홍수를 이루어 남으로 내려갑니다. 거기에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납니다. 홍수가 여호와의 보좌를 흔드는 것이 아니라, 그 위에 보좌에 앉으신 분에게 영광을 돌립니다.
1) 혼돈의 물을 정리하시는 소리 (3-4절)
3 여호와의 소리가 물 위에 있도다
영광의 하나님이 우렛소리를 내시니
여호와는 많은 물 위에 계시도다
4 여호와의 소리가 힘 있음이여
여호와의 소리가 위엄차도다
여호와의 소리는 우레에 제한되지 않지만, 여기에서는 우레로 말씀하시는 모습을 그려냅니다. 뇌성이 치니까 바다 위로 소리가 퍼져나가는 모습을 그려냅니다.
이것은 꾸짖는 모습이 될 수도 있습니다. 많은 물이 모든 것을 삼키고 혼돈의 상태로 몰아갑니다. 여호와께서 그 물들에게 말씀하시니까 그들이 여호와의 말씀에 순종합니다. 여호와께서 많은 물들 위에 좌정하시고 통치하십니다.
29편에서는 여호와의 힘차고 위엄 있는 소리 앞에 많은 물들이 잠잠해집니다. 그분은 많은 물들을 잠잠케 하고 그 위에 주님의 나라를 세우셨습니다(시 24:2). 홍해의 큰 물을 엉기게 하면서 말리시고 자기 백성을 건너게 하시고 그 물이 다시 흐르게 하여서 애굽 군대를 몰살시키셨습니다(출 15:8-10). 여호와께서는 그처럼 큰 물을 자기 백성의 구원을 위하여 다스리시는 영광의 하나님이십니다.
이방인이 만든 바알 신화에서는 물과 강이 바알과 싸운다고 합니다. 그러나 여호와 큰 홍수도 조용히 굴복합니다. 이방인들은 바알이 비와 폭풍의 신이라 하면서, 그들의 농사를 위하여 바알을 섬겼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도 그 우상 숭배에 흔들리기도 했습니다. 백성에게 비를 주시는 분은 바로 여호와 그들의 하나님이라는 것을 우레로 말씀하십니다(참조. 시 18:7-15; 68:4, 8, 33). 우레 같은 큰 소리로 말씀하셔서 그분의 백성에게 하나님의 영광을 알려 주시려고 하십니다.
2) 백향목을 꺾으시는 주님의 소리 (5-6절)
5 여호와의 소리가 백향목을 꺾으심이여
여호와께서 레바논 백향목을 꺾어 부수시도다
6 그 나무를 송아지 같이 뛰게 하심이여
레바논과 시룐으로 들송아지 같이 뛰게 하시도다
여호와께서 우레로 말씀하시니까 많은 물이 잠잠해졌는데 레바논의 헤르몬 산을 향하여 말씀하시니까 두 가지 일이 일어났습니다.
첫째는 레바논의 백향목이 꺾였습니다. 레바논의 백향목은 아름답고 장엄합니다. 다 자란 나무는 높이가 35-40미터가 되기 때문에 하늘을 찌를 듯한 기세로 굳게 서 있습니다. 이러한 자태 때문에 교만한 사람의 태도를 상징하기도 합니다(이사야 2:12-14). 높이가 35-40미터이고 둘레가 10미터가 되는 아름드리 나무가 “여호와의 소리”에 꺾였습니다. 주님께서 손도 대지 않았는데 말씀 하나에 쓰러졌습니다.
둘째, 여호와의 소리에 레바논과 시룐 산이 뒤흔들렸습니다. 시룐은 헤르몬 산을 말합니다. 헤르몬 산은 레바논 남부, 이스라엘의 북쪽에 있는 산입니다. 높이가 2814미터이고 만년설이 있습니다. 이곳은 바알 우상숭배의 본거지입니다. 여호와께서 소리를 발하시니까 레바논이 뛰고 그 지역에서 가장 높은 헤르몬산이 짐승처럼 놀라서 뜁니다. 바알 신이 사람들에게 안정감을 주는 것이 아니라 송아지처럼 도망가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왜 레바논의 백향목을 꺾고 헤르몬산이 요동하게 하겠습니까? 그것은 이 시를 부를 이스라엘 백성을 위함입니다. 마음이 나뉘어서 바알을 섬기지 말고 여호와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고 하시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는 한 가지를 더 말씀하십니다.
3) 광야를 진동시키시는 주님의 소리 (7-9절)
7 여호와의 소리가
화염을 가르시도다
8 여호와의 소리가 광야를 진동하심이여
여호와께서 가데스 광야를 진동시키시도다
9 여호와의 소리가 암사슴을 낙태하게 하시고
삼림을 말갛게 벗기시니
그의 성전에서 그의 모든 것들이 말하기를
영광이라 하도다
여호와의 소리는 불꽃을 내뿜습니다. 큰 번개가 내리치는 모습입니다. 우레와 함께 큰 불꽃이 온 땅을 가로지르고 있습니다. 앞 장면에서는 레바논의 백향목이 꺾이고 큰 산 헤르몬산이 뒤흔들렸습니다. 이 장면에서는 광야가 뒤흔들리고 암사슴이 낙태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소리에 광야가 뒤흔들리고 가데스 광야가 뒤흔들립니다. 성경에서 가데스 광야는 두 곳을 가리킵니다. 첫째는 가데스는 이스라엘의 북쪽 지역(오론테스 강 북쪽)을 가리킵니다. 바알의 근거지인 이곳을 하나님께서 무너뜨리십니다. 광야가 “뒤흔들린다”와 암사슴이 “낙태한다”는 히브리어는 같습니다. 광야가 “뒤흔들리는 것”은 단순한 지진이 아닙니다. 낙타가 출산의 고통을 하다가 낙태하는 고통입니다. 여호와의 소리로 말미암아 땅이 요동하고, 거기에 사는 짐승이 공포 때문에 조산합니다. 백향목은 그 흔적도 찾아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마치 홍수로 심판을 당한 것과 같이 모두 휩쓸려서 거대한 산이 사막처럼 황폐하게 되었습니다.
둘째로, 가데스 광야는 이스라엘이 광야 생활하던 그 남쪽을 가리킵니다(민수기 20:1; 33:36). 북쪽의 가데스로부터 남쪽의 가데스 광야까지 여호와의 소리가 온 땅을 가득 채우고 있습니다.
이러한 시의 표현에서 한 가지 더 생각할 지점이 있습니다. 남쪽과 북쪽은 태풍과 지진으로 요란하지만 여호와의 성전이 있는 곳은 조용합니다. 여호와의 성전이 있는 그곳에서는 여호와의 영광을 찬송하는 잔잔한 소리만 들립니다. 이 땅에서 여호와의 소리가 그 능력을 나타내는 것을 보고서 그분의 성전에서 만물이 외칩니다. “영광”이라고 외칩니다.
여호와께서는 이 땅에 울려 퍼지는 주님의 소리를 우리에게 들려주셨을 뿐 아니라 그분의 성소에서 만물이 찬송하는 소리도 들려 주십니다. “영광의 하나님”께서 우레로 말씀하신다고 3절에서 말하였는데 8절에서는 만물이 “영광”이라고 찬송합니다. 여호와께서 말씀 한 마디로 레바논과 헤르몬산, 가데스의 바알 본거지를 다 심판하시는 것을 보고서 만물이 영광의 하나님께 “영광”이라고 하면서 찬송합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여 이 땅위에서 하나님의 뜻이 시행되기 때문에 이러한 찬송을 하는 것입니다.
2절에서 여호와께 영광을 돌리라고 하였는데 우리는 9절에서 만물이 여호와께 영광을 돌리는 것을 봅니다. 그 영광은 없는 것을 만들어서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여호와께서 행하신 일에 나타난 그 영광을 그대로 인정합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께 영광을 드리는 것이 됩니다. 우리도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을 그대로 인정하고 나아가면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바알과 여호와 사이에서 머뭇머뭇하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 시편을 주셨습니다. 그들은 이 시편을 부르며 자기 마음 안에 있는 바알 숭배적인 것을 버리고서 여호와의 영광을 찬송하였을 것입니다. 우리도 이 시편을 읽을 때에 여호와의 말씀을 들읍시다. 또한 우리 안에 있는 우상을 버리면서 여호와의 영광을 찬송합시다. 주님께서는 이 시편의 말씀으로 우리 안에서 새로운 일을 행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3. 땅에서는 평화 (10-11절)
10 여호와께서 홍수 때에 좌정하셨음이여
여호와께서 영원하도록 왕으로 좌정하시도다
11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힘을 주심이여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평강의 복을 주시리로다
결론 부분에서는 여호와께서 주어로 등장합니다. 네 번이나 “여호와께서”라고 합니다. 그분이 홍수 위에 좌정하시고 영원한 왕으로 통치하시며 자기 백성에게 힘과 평강을 주십니다. 여호와께 합당한 영광을 돌렸을 때에 자기 백성을 위하여 통치하시는 여호와의 영광스러운 모습이 더 분명히 나타납니다.
여호와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두 가지로 묘사됩니다.
첫째, 여호와의 영광은 홍수에서 나타납니다. 여기에서 “홍수”는 노아 홍수를 말할 때 쓴 단어입니다(창세기 6:17; 7:6, 17 등). 하나님께서는 바알 숭배의 본거지를 노아 홍수와 같은 심판으로 철저히 심판하셨습니다. 노아 때에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을 보고 자기가 좋아하는 대로 아내를 삼은 일을 보고서 심판하셨습니다. 지금도 가나안 여인들의 아름다운 것과 그 풍요를 보고서 그 길로 행하는 백성중의 어떤 사람들에게 경고하시는 것입니다. 그들과 우리 안에 있는 우상숭배적인 것과 현세적인 것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둘째, 여호와의 영광은 백성에게 힘과 평화의 복을 주십니다. 1절에서 여호와께 “영광과 능력”을 돌리라고 하였습니다. 그분께 영광을 돌리는 자기 백성에게 여호와께서는 “힘”(능력, 11절)을 주십니다. 세상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고 맞설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주님의 소리에 청종하는 자들에게 평화의 복을 주십니다. 바알 숭배의 본거지를 말씀 한마디로 다 없애셨습니다. 그 말씀을 듣고 여호와의 영광을 찬송하는 자들에게 평화의 복을 내려 주십니다. 우리 안에 있는 우상 숭배적인 성향도 그리스도 안에서 다 없애 주시고서 평화의 복을 내려 주십니다.
레바논에 가서 백향목을 벌목하여 부자가 되는 일에 참된 평화의 복이 있지 않습니다. 주께서 이 시편으로 가르쳐 주신 것을 깨닫고 주님의 영광을 찬송하는 자에게 주님께서는 복을 내려 주시기를 기뻐하십니다.
4. 홍수의 심판과 찬송하는 자에게 주시는 능력, 그리스도
1) 우상 숭배자에게 오는 홍수의 심판, 순종하는 자에게 능력의 복
큰 비가 내려서 땅을 흡족히 적시고 싹이 움트게 하는 것을 보고서 가나안 사람들은 바알을 섬겼습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좋은 복을 우상에게 돌린 것입니다. 우리도 주님께서 주신 좋은 것으로 우상을 만들어서 섬기는 일이 있습니다.
시편 29편으로 주님께서는 우리를 정결케 하시면서 주님의 영광을 찬송하게 인도해 주십니다. 29편의 “소리”는 28편의 간구하는 “소리”와 연결되어 있다고 하였습니다. 악인들이 죽이려고 하는 긴박한 상황에서 주님께 도움을 구하였을 때에 주님께서는 29편에서 “여호와의 소리”를 들려주셨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되 악인의 근거지를 다 없애시면서 구원해 주시는 분이심을 알려 주십니다.
우리는 삶을 하나님의 심판하시는 홍수의 관점에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지금도 하나님의 백성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에 휩쓸려서 살아갑니다. 두 주인을 섬기는 것이 불가능한데, 여전히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려는 자기 백성들에게 “홍수의 관점”에서 이 세상을 보라고 하십니다. 그들이 자랑하던 레바논의 산은 벌거숭이가 된 것을 알려 주시면서 우리 안에 있는 우상 숭배적인 것을 제거해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안의 우상을 제거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찬송하면서 나아오는 자에게 “능력”을 주십니다. 그 능력은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바알의 종이 아니라 하나님의 종으로서 능력 있게 행하도록 인도해 주십니다. 그리고 그러한 자들에게 평화의 복을 내려 주십니다. 온 세상에 가득한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 주시면서 하나님을 찬송하고 하나님을 닮아가게 인도해 주시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여전히 혼돈의 세력이 큰 힘을 잡고 있는 것 같지만, 우리 하나님은 홍수 위에 좌정하신 분이시고 유리 바다처럼 맑은 데에서 통치하시는 분이십니다(계 4:6). 그러한 모습을 보여 주시면서 우리를 영원한 나라로 인도해 주십니다. 지금도 일곱 우레로 말씀하시면서 바다와 땅을 밟고 있는 천사를 통하여서 주님의 일을 이루어 가십니다(계 10:3-5).
29편은 하늘의 영광으로 시작하고 땅의 평화로 마칩니다. 29편의 시인은 비와 우레와 천둥을 보면서 여호와의 소리를 들었고, 그것이 하늘에서는 영광이고 땅에서는 평화의 복음임을 들었습니다. 우리도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보면서, 천둥과 함께 쏟아지는 소낙비를 보면서 하나님께 영광이고 땅에서는 평화가 되는 것을 노래합니다.
2) 예수 그리스도안에 영광과 평화
“하늘의 영광”과 “땅의 평화”는 예수님께서 태어나셨을 때에 천사들이 찬송했습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눅 2:14).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과 땅의 평화를 더 풍성하게 봅니다. 선인과 악인에게 해와 비를 주시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보내어 주셔서 참된 평화의 복음을 전해 주셨습니다. 29편의 시인은 폭우를 보면서 우상 숭배하는 마음을 버렸는데,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우상 숭배하는 마음을 버립니다.
뿐만 아니라 해와 비를 내려 주시는 하나님을 모르고 우상을 섬기는 자들을 향하여 우리는 이 은혜의 복음을 전할 마음을 갖게 됩니다. 그들은 우상을 섬기기 때문에 우리를 미워하고 어려움을 줍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의 마음에 있는 불안함을 압니다. 주님의 자비를 구하면서 우리와 함께 하나님의 영광을 찬송하자고 초청할 합니다. 여호와의 성전에서 만물이 주님의 영광을 찬송하기 때문에 우리가 찬송할 뿐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이 복음을 전하게 됩니다. 우리는 악인에게 피해를 받는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해와 비를 내려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합니다. 그들에게도 함께 여호와의 영광을 찬송하는 데에 이르자고 권고할 마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믿고 복종할 일
오늘 읽은 시편 29편은 천둥번개와 홍수의 장엄함을 노래하는 서정시가 아닙니다. 자연현상을 통해서 그 가운데 일하시는 하나님에 대해 말하는 이야기입니다(서사시). 그 천둥번개를 보고서 바알 우상을 숭배하던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그 모든 것의 주인 되신 하나님을 경배하라고 초대하는 초대장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개인으로서는 다룰 수 없는 거대한 경제 흐름을 보면서 자칫 경제가 자체적으로 흘러 가는 것처럼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스리신다는 것을 망각할 수 있습니다. 이 코로나 전염병 앞에서 우리는 수동적인 희생자 처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자신도 모르게 물질과 건강을 우상 처럼 받들 수 있습니다. 자신도 모르게 물질과 생물학적인 것이 이 세상의 모든 것을 결정하는 것 처럼 생각할 수 있습니다.
과거에 천둥 번개와 비를 통해 하나님의 심판을 나타내신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갑작스런 경제 혼란과 공중 보건의 혼란을 통해 누가 이 모든 것을 다스리시는 지 생각하게 합니다. 우리가 보기에 비극 가운데서 일하시는 하나님 앞에 겸손히 엎드립시다. 우리 안의 죄와 불순종을 고백합시다. 우리 안의 우상을 회개합시다.
비록 개인적으로 국가적으로 어려움에 있지만, 하나님의 능력과 왕되심을 인정하는 자에게는 홍수 가운데서도 방주와 같은 복된 평화를 주십니다. 이 복을 알지 못한 채 하나님을 저항하는 자를 불쌍히 여깁시다. 우리의 믿음을 조롱하는 자들을 용서하고 하나님의 복의 전달자가 됩시다.
오늘 시편 29편으로 찬양하면서 우리의 영혼을 일으킵시다.
조금 더 생각하기
<참고> 시편의 29편의 구조
1-2, 10-11절이 서론과 결론입니다. 두 부분 다 여호와라는 말이 각각 네 번씩 나옵니다(개역개정에서는 1-2절에서 1개를 번역하지 않음). 3-9절에서는 “여호와의 소리”가 7번 나옵니다. 그와 별도로 “여호와”만 3번 더 나옵니다. 7과 10이라는 숫자로 완전함을 표시합니다.
<참고> 1절 권능있는 자들=신들의 아들들
권능있는 자들(1절)은 직역하면 “신들의 아들(브네 엘림)”입니다. 누구를 가리킬까요?
첫째, 천사를 가리킬 수 있습니다(욥기 1-2장의 천사, 이사야서 6장에의 스랍). 하늘의 천사들에게 하나님을 찬송하라고 명하는 말이 됩니다.
둘째는 이방 신들에게 여호와를 찬송하라고 명령하는 말도 될 수 있습니다. “신들의 아들들”이 시편 89:7에서는 “권능 있는 자”로 번역되었느데 이방 신을 가리킵니다. 출애굽기 15:11에서도 “여호와여, 신(엘림) 중에 주와 같은 자 누구니이까?” 하면서 이방 신들을 가리켰습니다. 시편29편은 바알의 근거지인 헤르몬 산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노래한 시편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너희 신의 아들들”은 이방 신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홍해에서 애굽의 신들이 꼼짝을 못한 것처럼 여호와께서 심판하시면 바알도 꼼짝을 하지 못할 것을 생각하면서 모든 신들에게 여호와께 경배하라고 명령하는 것입니다(참조. 시 97:7).
<참고> 5절, 레바논의 백향목
레바논의 백향목은 만년설이 있는 추운 지역에서 자랐기 때문에 목질이 매우 단단하고, 향기가 좋습니다. 그래서 성전과 궁전의 재료로 사용되었습니다(열왕기상 5:6-10; 7:1-12). 아름답고 장엄합니다. 다 자란 나무는 높이가 35-40미터가 되고 둘레가 10m로 하늘을 찌를 듯한 기세로 굳게 서 있습니다. 레바논의 백향목의 그러한 자태는 교만한 사람의 태도를 지적하는 데에도 사용되었습니다. “대저 만군의 여호와의 한 날이 모든 교만자와 거만자와 자고한 자에게 임하여 그들로 낮아지게 하고 또 레바논의 높고 높은 모든 백향목과 바산의 모든 상수리 나무와 모든 높은 산과 모든 솟아오른 작은 산”(사 2:12-14)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참고> 6절, 시룐
시룐은 헤르몬 산의 페니키아 식 이름입니다(신 3:9). “자폰 산”이라고도 합니다. 헤르몬 산은 레바논 산의 남부에 있고, 높이가 2814미터이고 만년설이 있습니다. 거기에서 남쪽으로 흘러내리는 물이 요단의 근원을 이룹니다. 이스라엘에 물을 공급하는 이 산에는 유명한 바알의 신전이 있습니다. 두로와 시돈에도 바알 신전이 있는데 가장 높은 산인 이곳에 바알의 본거지가 있습니다.
<참고> 10절, 홍수
홍수(마불)은 노아 홍수를 표현한 단어입니다(창 6:17; 7:6, 17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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