竹帶先生傳
丁若鏞(1762~1836)
죽대 선생(竹帶先生)은 이공 종화(李公宗和)의 별호(別號)이다. 집이 가난하여 돈이 없었으므로 가느다란 대나무를 한 치쯤 되게 잘라 그것을 줄에 꿰어 갓끈도 하고 띠도 하였다. 그러므로 어린아이들이 죽대 선생이라고 불렀다.
그의 선조는 한산(韓山) 사람으로서 목은 선생(牧隱先生) 이색(李穡)의 후예이다. 대대로 현달하여 아조(我朝)에 들어와서 관찰사를 지낸 축(蓄), 좌참찬(左參贊)을 지낸 훈(塤), 좌의정(左議政)을 지낸 유청(惟淸), 관찰사를 지낸 언호(彦浩)가 있고, 음사(蔭仕)로 두 대를 내려와서 좌찬성(左贊成)을 지낸 죽천(竹泉) 덕형(德泂)이 있다. 또 그 아래로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을 지낸 성원(性源), 현감(縣監)을 지낸 경항(景抗) 등이 있는데, 대체로 명문(名門)의 혁혁한 이들이다. 그 뒤 4대는 때가 맞지 않아 벼슬하지 않았는데, 죽대 선생은 더욱 궁곤하여 살 집도 없었다. 일찍이 번암(樊巖) 채 상국(蔡相國 채제공)의 집에서 집과 곡식을 얻어 살았는데, 상국은 그를 후하게 대우하였으나 그 문에 드나드는 빈객들은 모두 선생을 업신여겨 궁한 늙은이일 뿐 아무 능력도 없다고 여겼다.
가경(嘉慶 청 인종(淸仁宗)의 연호) 신유년(1801, 순조 1) 가을에 목만중(睦萬中)ㆍ홍희운(洪羲運)ㆍ이기경(李基慶) 등이 사람의 생살권(生殺權)을 쥐고서 날마다 선류(善類)들을 제거하기를 마치 풀을 깎아버리듯 짐승을 사냥하듯 하였다.
유언비어가 대계(臺啓)에 올라 사람을 죽이거나 귀양보내는 것 외에도 풍문에 의해 이 관기(李寬基)를 잡아다가 국청(鞫廳)에 넘기고 풍문에 의해 채홍정(蔡弘定)을 잡아다가 형조에 넘기고, 풍문에 의해 권철(權徹)을 잡아다가 포도청(捕盜廳)에 넘기고, 풍문에 의해 조상겸(趙尙兼)을 잡아다가 영외(嶺外)에 귀양보냈다.
털끝만큼이라도 비위를 건드리는 자는 곧 눈깜짝할 사이에 얽어넣어 죽이기를 마치 손바닥 뒤집듯 하였다. 그들은 위세가 등등해지자 채 상국의 관작(官爵)을 박탈할 것을 모의, 그해 겨울에 평소에 잘 아는 진신 장보(搢紳章甫)들을 협박하여 글을 지어 성토(聲討)하게 해서 채 상국의 죄안(罪案)을 만들었다. 평소에 상국의 은애(恩愛)를 받은 자들에게는 모두 직사(職司)를 임명하여 그들로 하여금 의논을 주장하도록 하였고, 은애를 조금 적게 받은 자들에게 그 다음가는 직책을 주었는데, 감히 회피하는 자가 있으면 서교인(西敎人)이라는 죄목을 씌웠다. 사자와 호랑이처럼 으르렁거려 마치 개나 양을 몰듯 하였다. 이에 위로 경상(卿相)으로부터 아래로 베옷 입은 선비에 이르기까지 모두 두려워하여 몸을 굽혀 땅에 엎드리고 머리를 조아려 죄를 빌면서 그 호령을 공손히 들었으며, 한 사람도 감히 저항하거나 머뭇거리는 자가 없었으므로, 며칠 안 되어 모여든 사람이 수백 명이나 되었었다.
죽대 선생은 이때 편지를 이희운(李羲運)ㆍ이기경(李基慶) 등에게 보내어 채 상국의 억울함을 반복하여 변호하였는데, 그 말이 애절하여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하였다. 그 두 사람을 추존(推尊)하여 공정(公正)하다 하면서 이가환(李家煥)ㆍ정약용(丁若鏞) 이하는 어육(魚肉)이 되어도 돌아볼 겨를 없이 오직 우리 번암 상공만이 구원되기를 기원했다. 그리하여 실낱같은 희망이 조금 있었는데, 악당(惡黨)들은 반성하지 않고 성토하는 일을 더욱 급하게 독책하였다.
이때 죽대 선생은 밤낮 계속된 노심초사로 몸이 몹시 야위어 걸음도 걸을 수 없을 정도였으나, 이에 돌연히 몸을 일으키어 해진 옷을 걸치고 대나무 갓끈을 매고 대나무 띠를 두르고 여러 사람이 모여 있는 곳에 갔다. 비틀거리며 층계를 밟아 중당(中堂)에 올라가서 두 발을 뻗고 앉아 눈을 부릅뜨고 모여 있는 사람들을 말없이 한동안 바라보았다. 그 영걸한 기풍(氣風)이 사람을 서늘하게 하였는데 이내 꾸짖어 말하기를,
“네 이 개자식들아, 너희 할아비는 추탈(追奪)할 수 있고 너희 고조할아비도 추탈할 수 있겠지만, 우리 번암 상공은 추탈할 수 없다. 네 이 역적놈들아! 이 무슨 짓이냐. 너희들의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그리고 터럭 하나하나가 모두 번암 상공이 길러준 것이며, 너희 아비와 할아비도 모두 번암의 비호(庇護)를 받았는데, 너희들이 차마 이런 일을 할 수 있느냐. 역적놈들아! 어찌 나를 죽이지 않느냐.”하고는 앞으로 나아가 통문(通文)을 빼앗아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질겅질겅 씹어서 밟아 버렸다. 그곳에 있던 필기구와 술병을 모두 발로 차버리고, 곡을 하며 욕을 하며 나갔다.
이 때에 그곳에 모여 있던 사람들은 기운이 빠지고 얼굴이 붉어져 감히 한마디 말도 못했다. 그 다음날 이기경이 풍문을 듣고 죽대 선생을 잡아다가 형조에 넘겨 고문과 매질을 하여 거의 죽이다시피 한 뒤 단성현(丹城縣)에 유배시켰다. 죽대 선생은 담소(談笑)하며 길을 나섰고, 마침내 채 상국은 관작이 추탈되었다.
죽대 선생이 귀양을 떠난 지 열흘이 지났을 때였다. 이기경이 아침에 막 일어나 세수도 하기 전에 갑자기 한 여인이 머리를 풀어헤친 채 소맷자락을 걷어올리고 큰 칼을 손에 들고 들어오는데, 그 칼날은 지금 막 숫돌에서 갈아낸 것 같았다. 그녀는 곧바로 문안으로 들어오며 이기경을 향하여 찔렀는데, 기경이 졸지에 황급하여 내당으로 달아나니 칼날이 그의 옷솜에 박혔다. 여자가 그를 쫓아갔으나 여러 노복들에게 붙들려 더 이상 쫓지 못하였다. 여자는 그에게 꾸짖어 말하기를, “네 이 역적놈아! 우리 아버지가 길에서 돌아가시게 되었으니, 너도 내 손에 죽어야 한다. 네가 지금 종들에게 내 손을 잡게 하겠지만, 네가 만약 우리 아버지를 놓아주지 않으면, 너는 결국 내 손에 죽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기경이 애걸하며 말하기를, “감히 빨리 돌아오도록 도모하지 않을 수 있겠소.”하니, 여자가 획 돌아 나가가며, “그 말을 절대 어기지 말라.”하였다. 이에 소문이 온 나라에 퍼져서, 죽대 선생에게 대단한 딸이 있음을 알았다. 죽대 선생이 단성에 가니 영남의 여러 사우(士友)들이 다투어 돈과 쌀과 베와 비단을 갖다주어 날마다 맛좋은 술과 고기를 배불리 먹었다. 뜻밖에 부귀와 안락을 누리다가, 귀양간 지 7년 만에 돌아와 집에서 죽었다.
외사씨(外史氏)는 말하기를 “나는 예전에 죽대 선생과 잘 지냈다. 두려워하는 표정으로 마치 말을 못할 듯이 보이는 사람은 오로지 죽대 선생뿐이었다. 그런데 죽대 선생만이 능히 번옹을 위해 한마디 하였으니, 선비를 안다고 하겠는가?”라고 하였다.
선생은 진실로 열렬한 의사(義士)이고, 그 딸 또한 의협심 있는 여자였다. 어떤 이는 그녀의 검술이 서툴다고 하나 틀린 말이다. 그녀의 뜻은 조말(曺沫)이 제 환공(濟 桓公)에게 했듯이, 살려두고 위협만 하려는 것이었다. 그래서 끝내 이기경을 죽이지 않았던 것이다. 번옹이 중년에 참소에 걸렸을 때 죽파(竹坡) 유항주(兪恒柱)만이 배반하지 않았고, 신유년(1801)의 화(禍)에는 죽포(竹圃) 심규(沈逵)만이 홍희운과 이기경에게 항복하지 않았다. 죽대 선생도 이에 절개를 세웠기 때문에 세칭(世稱) 채문(蔡門)의 삼죽(三竹)이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