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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三十五回 晉重耳周遊列國 秦懷嬴重婚公子
제35회: 진(晉)나라 중이는 열국을 주유하고 진(秦)나라 회영은 공자와 거듭 결혼하다.
話說,公子重耳怪狐偃用計去齊,奪魏犨之戈以刺偃,偃急忙下車走避,重耳亦跳下車挺戈逐之。趙衰、臼季、狐射姑、介子推等,一齊下車解勸。重耳投戟於地,恨恨不已。狐偃叩首請罪曰:「殺偃以成公子,偃死愈於生矣!」重耳曰:「此行有成則已,如無所成,吾必食舅氏之肉!」狐偃笑而答曰:「事若不濟,偃不知死在何處,焉得與爾食之?如其克濟,子當列鼎而食,偃肉腥臊,何足食?」
한편, 공자 중이는 호언의 계략에 빠져 제나라를 떠나게 된 일을 분하게 생각하여 위주가 들고 있던 창을 빼앗아 호언을 찌르려고 했다. 호언이 급히 수레에서 내려 달아나서 중이의 창을 피했다. 중이도 역시 수레에서 뛰어내려 창을 잡고 쫓았다. 조쇠, 구계(胥臣), 호사고(狐射姑), 개자추 등이 일제히 수레에서 내려 노여움을 풀고 진정하라고 권했다. 중이가 창을 땅바닥에 던져 버리기는 했으나 분함을 이기지 못했다. 호언이 돌아와 머리를 조아리며 죄를 청하며 말하기를, “이 호언을 죽여서 공자께서 뜻을 이룬다면 저는 죽는 것이 사는 것보다 낫습니다.” 했다. 중이가 말하기를, “이번에 가서 뜻을 이루면 그만이지만 만약에 뜻을 이루지 못한다면 내가 반드시 외삼촌의 고기를 먹을 것이오.” 하니, 호언이 웃으면서 대답하기를, “일이 만약 이루어지지 않으면 이 호언이 어디에서 죽을지 모르는데, 어찌 공자에게 먹히겠습니까? 만약 일이 이루어진다면 공자께서 진수성찬을 차려놓고 먹을 것인데 호언의 비린내 나는 고기를 어떻게 드실 수 있겠습니까?” 했다.
趙衰等並進曰:「某等以公子負大有為之志,故舍骨肉,棄鄉里,奔走道途,相隨不舍,亦望垂功名於竹帛耳。今晉君無道,國人孰不願戴公子為君?公子自不求入,誰走齊國而迎公子者!今日之事,實出吾等公議,非子犯一人之謀,公子勿錯怪也。」魏犨亦厲聲曰:「大丈夫當努力成名,聲施後世。奈何戀戀兒女子目前之樂,而不思終身之計耶?」重耳改容曰:「事既如此,惟諸君命。」狐毛進乾糒,介子推捧水以進,重耳與諸人各飽食。壺叔等割草飼馬,重施銜勒,再整輪轅,望前進發。有詩為證:「鳳脫雞群翔萬仞,虎離豹穴奔千山。要知重耳能成伯,只在周遊列國間。」
조쇠 등이 함께 나와 말하기를, “우리들이 공자께서 큰 뜻을 품고 계시다는 생각으로 처자식도 버리고 고향을 떠나 길에서 떠돌면서도 공자의 곁을 떠나지 않고 따르는 이유는 공명이 죽백(역사책)에 기록되기를 바라서입니다. 지금 진(晉)나라 군주가 무도하여 나라 사람들이 누군들 공자를 군주로 추대하려고 원치 않겠습니까? 공자께서 스스로 찾아가지 않는다면 누가 제나라까지 와서 공자님을 모시고 가겠습니까? 오늘의 일은 사실 우리가 모두 상의한 것이지 자범(호언) 한 사람이 꾸민 것이 아닙니다. 공자께서는 잘못 의심하지 마십시오.” 했다. 위주가 또한 성난 목소리로 말하기를, “대장부라면 이름을 천하에 떨치고 명성을 후세에 전하도록 힘을 다해 노력하여야 마땅하거늘, 어찌하여 아녀자와 눈앞의 환락에 연연하여 평생에 품었던 뜻을 생각지 않으려고 하십니까?” 하니, 중이가 얼굴빛을 고쳐 말하기를, “일이 이미 이렇게 되었으니 오로지 여러분의 뜻을 따르겠소!” 했다. 호모가 마른 밥을 가져오고 개자추가 물을 떠 와서 중이와 그 일행은 배불리 먹었다. 호숙(壺叔) 등이 풀을 베어와 말을 먹인 뒤에 다시 재갈을 물리고 수레의 바퀴와 끌채를 정비한 후에 앞을 향해 출발했다. 이 일을 증명하여 노래하기를, “봉황은 닭 무리에서 하늘 높이 날고, 호랑이는 승냥이의 굴을 나와 깊은 산을 달린다. 중이가 어떻게 패업을 이루었는지 알려면, 오직 그것은 열국을 유랑하면서 얻은 지혜였음이라!” 했다.
不一日行至曹國。卻說,曹共公為人,專好遊嬉,不理朝政,親小人,遠君子,以諛佞為腹心,視爵位如糞土。朝中服赤芾乘軒車者,三百餘人,皆里巷市井之徒,脅肩諂笑之輩。見晉公子帶領一班豪傑到來,正是「薰蕕不同器」了!惟恐其久留曹國,都阻擋曹共公不要延接他。大夫僖負羈諫曰:「晉曹同姓,公子窮而過我,宜厚禮之。」曹共公曰:「曹,小國也,而居列國之中,子弟往來,何國無之?若一一待之以禮,則國微費重,何以支吾?」負羈又曰:「晉公子賢德聞於天下,且重瞳駢脅,大貴之徵,不可以尋常子弟視也。」
중이의 일행은 하루가 되지 않아서 조(曹)나라에 도착했다. 한편 조나라의 군주 공공(共公) 양(襄)은 사람됨이 놀기를 좋아하여 조정의 정사는 전혀 돌아보지 않고, 소인을 가까이하고 군자를 멀리했다. 그는 아첨배를 심복으로 삼고 벼슬을 오물 버리듯 함부로 주었다. 조회를 행할 때 조복에 붉은 무릎 가리개를 착용하고 초헌(軺軒)을 타고서 드나드는 사람만 3백 명이 넘었는데, 모두가 시정의 잡배들로서 비위만을 맞추며 아양을 떠는 무리였다. 진(晉)나라 공자 중이가 일단의 호걸들을 데리고 도착한 일은 마치 향초와 악초는 같은 그릇에 담을 수 없는 격이었다. 조나라의 관리들은 오로지 중이의 일행이 조나라에 오래 머무르게 될까 걱정하여 모두 조공공에게 중이의 일행을 받아들이면 안 된다고 막았다. 대부 희부기(僖負羈)가 간하기를, “진(晉)나라와 조나라는 희성(姬姓)의 동성 제후국입니다. 공자가 궁하여 이곳을 지나가게 되었는데 마땅히 후하게 대접함이 예절입니다.” 하니, 조공이 말하기를, “조나라는 작은 나라다. 열국 가운데에 끼어 있어 자제들이 왕래하는 것이 어느 나란들 없겠는가? 만약 일일이 예를 갖추어 접대하다가는 나라는 작고 비용은 많아서 어떻게 버티겠는가?” 했다. 희부기가 또 말하기를, “진(晉)나라 공자 중이는 천하에 어진 덕으로 소문이 났고, 또한 눈동자가 둘에 갈비뼈가 하나로 붙어 있어 앞으로 크게 귀하게 될 상입니다. 보통 자제들과 같이 취급해서는 안 됩니다.” 했다.
曹共公一團稚氣,說賢德他也不管,說到重瞳駢脅,便道:「重瞳寡人知之,未知駢脅如何?」負羈對曰:「駢脅者,駢脅骨相合如一,乃異相也。」曹共公曰:「寡人不信,姑留館中,俟其浴而觀之。」乃使館人自延公子進館,以水飯相待,不致餼,不設享,不講賓主之禮。重耳怒而不食。館人進澡盆請浴,重耳道路腌臢,正想洗滌塵垢,乃解衣就浴。曹共公與嬖幸數人,微服至館,突入浴堂,迫近公子,看他的駢脅,言三語四,嘈雜一番而去。狐偃等聞有外人,急忙來看,猶聞嬉笑之聲。詢問館人,乃曹君也。君臣無不慍怒。
조공공은 유치한 생각으로 중이가 어질고 덕이 높다는 말에는 전혀 개의치 않고, 눈동자가 둘이며 갈비뼈가 붙어 있다는 말에 관심을 보이더니 문득 말하기를, “눈동자가 둘인 사람은 과인도 보았지만 갈비뼈가 붙어 있는 사람은 아직 보지 못했다. 어떻게 생겼는가?” 하니, 희부기가 대답하기를, “갈비뼈가 붙어 있다는 것은 갈비뼈가 서로 합쳐져 한 개로 된 기이한 체형을 말합니다.” 했다. 조공공이 말하기를, “과인은 믿지 못하겠다. 잠깐 객관에 머물게 하여 그가 목욕할 때를 기다려 한번 엿보아야겠다.” 하고, 역관에서 일하는 사람을 시켜 공자 중이를 역관에 들어오게 했으나 물과 밥만 내놓고 다른 음식은 내놓지 않았다. 잔치도 없었고 손님을 맞이하는 주인의 예절도 행하지 않았다. 중이가 성을 내어 먹지 않았다. 역관에서 일하는 사람이 데운 물을 가져와 목욕하기를 권하니, 먼 길을 달려오느라 더러워진 몸을 씻고 싶어서 즉시 옷을 벗고 목욕을 했다. 조공공은 총애하는 신하 몇 명과 평복으로 객관에 이르러 거리낌 없이 욕실로 들어가 중이의 곁으로 다가가 그의 붙은 갈비뼈를 보고는 몇 마디 시끄럽게 떠들고는 밖으로 나갔다. 호언 등이 외부인이 왔다는 소리를 듣고 급히 와서 보니, 웃고 떠드는 소리가 들려 객관에서 일하는 사람에게 물어보니 바로 조공공이었다. 중이의 일행은 성내지 않을 수가 없었다.
卻說,僖負羈諫曹伯不聽,歸到家中,其妻呂氏迎之,見其面有憂色,問:「朝中何事?」負羈以晉公子過曹,曹君不禮為言。呂氏曰:「妾適往郊外採桑,正值晉公子車從過去。妾觀晉公子猶未的,但從行者數人,皆英傑也。吾聞:『有其君者,必有其臣;有其臣者,必有其君。』以從行諸子觀之,晉公子必能光復晉國,此時興兵伐曹,玉石俱焚,悔之無及。曹君既不聽忠言,子當私自結納可也。妾已備下食品數盤,可藏白璧於中,以為贄見之禮。結交在未遇之先,子宜速往。」僖負羈從其言,夜叩公館。重耳腹中方餒,含怒而坐。
한편, 희부기는 조공공에게 간했지만, 듣지 않자 집으로 돌아갔다. 아내 여씨(呂氏)가 그를 맞이하여 안색이 어두운 것을 보고 묻기를, “조정에서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하니, 희부기가 진(晉)나라 공자가 조나라를 지나가는데 조공공이 무례하게 대한다고 말했다. 여씨가 말하기를, “첩이 성 밖에서 뽕잎을 따고 있는데 그때 마침 진(晉)나라 공자가 탄 수레와 그 일행이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진나라 공자는 내가 보지 못했지만 그를 따르고 있던 일행들은 모두 영걸들이었습니다. 제가 듣기에 ‘그 군주가 있으면 반드시 그 신하가 있고, 그 신하가 있으면 반드시 그 군주가 있다.’고 했습니다. 진나라 공자를 따르고 있던 일행을 보니 진나라 공자는 반드시 진나라를 다시 빛낼 것이고, 그때에는 군사를 일으켜 조나라를 쳐서 옥과 돌이 함께 불에 탈 것이니, 후회한들 소용이 없습니다. 조공공이 이미 충언을 듣지 않았으니 그대는 마땅히 스스로 몰래 그들과 친교를 맺어 두는 게 좋겠습니다. 첩이 이미 여러 가지 음식 몇 쟁반을 준비하여 놓았으니 그 안에 희고 둥근 옥을 감추어 가져가서 선물을 드리고 뵙는 예절을 차리십시오. 아직 서로 만나지 못하여 모르는 처지에서 먼저 친교를 맺어야 하니 대감께서 마땅히 서두르시기 바랍니다.” 했다. 희부기가 그 말을 듣고 밤중에 공관을 찾아가 문을 두드렸다. 중이는 배가 고파서 분노를 머금고 앉아 있었다.
聞曹大夫僖負羈求見饋飧,乃召之入。負羈再拜,先為曹君請罪,然後述自家致敬之意。重耳大悅,嘆曰:「不意曹國有此賢臣!亡人幸而返國,當圖相報!」重耳進食,得盤中白璧,謂負羈曰:「大夫惠顧亡人,使不飢餓於土地足矣,何用重賄?」負羈曰:「此外臣一點敬心,公子萬乞勿棄!」重耳再三不受。負羈退而嘆曰:「晉公子窮困如此,而不貪吾璧,其志不可量也!」次日,重耳即行,負羈私送出城十里方回。史官有詩云:「錯看龍虎作狉狸,盲眼曹共識見微;堪嘆乘軒三百輩,無人及得負羈妻!」
조나라 대부 희부기가 음식을 가지고 와서 뵙기를 청한다는 소리를 들은 중이는 즉시 그를 불러들였다. 희부기가 절을 두 번 올리고 먼저 조공공이 저지른 무례에 대해 대신 사과를 드렸다. 그런 뒤에 자신의 존경하는 마음을 말하니, 중이가 크게 기뻐하며 탄식하기를, “조나라에 그대 같은 현명한 신하가 있었다니 뜻밖의 일이오! 도망 다니는 사람이 다행히 나라로 돌아가면 마땅히 이 은혜를 갚을 것이오.” 했다. 중이가 가져온 음식을 먹다가 음식 안에서 희고 둥근 옥이 나오자 희부기에게 말하기를, “대부께서 도망 다니는 사람에게 은혜를 베풀어 길에서 굶지 않게 해준 것만도 고마운 일인데 어찌하여 이렇게 귀한 보물까지 주십니까?” 하니, 희부기가 말하기를, “이것은 외국의 신하가 드리는 성의이니 공자께서는 바라옵건대 물리치지 마십시오.” 했다. 중이가 재삼 사양하여 받지 않았다. 희부기가 물러 나오며 탄식하기를, “진(晉)나라 공자가 이렇게 곤궁한데도 내가 바친 둥근 옥을 탐하지 않으니 그 뜻이 헤아릴 수 없이 크구나!” 했다. 다음날, 중이의 일행은 곧 출발했다. 희부기가 개인적으로 나와서 성 밖 10리까지 전송했다. 사관이 시를 지어 이르기를, “용과 호랑이를 너구리나 살쾡이로 잘 못 알았던, 눈뜬장님 조공공의 식견이 천박하구나! 초헌 타고 거들먹거리는 한심스러운 조나라 신하 삼백 명 중에, 한 명도 희부기 처의 식견에 미치는 자가 없었네.” 했다.
重耳去曹適宋。狐偃前驅先到,與司馬公孫固相會。公孫固曰:「寡君不自量,與楚爭勝,兵敗股傷,至今病不能起。然聞公子之名,向慕久矣。必當掃除館舍,以候車駕。」公孫固入告於宋襄公,襄公正恨楚國,日夜求賢人相助,以為報仇之計。聞晉公子遠來,晉乃大國,公子又有賢名,不勝之喜!其奈傷股未痊,難以面會。隨命公孫固郊迎授館,待以國君之禮,饋之七牢。次日,重耳欲行。公孫固奉襄公之命,再三請其寬留,私問狐偃:「當初齊桓公如何相待?」偃備細告以納姬贈馬之事。
중이가 조나라를 떠나서 송나라로 갔다. 호언이 앞서 달려 먼저 도착하여, 사마(司馬) 공손고(公孫固)와 만났다. 공손고가 말하기를, “우리 주군께서 스스로 힘을 헤아리지 않고 초나라와 승리를 다투어 군사는 패하고 허벅지를 다쳐 지금 병상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공자의 이름을 듣고 사모한 지 오래되었습니다. 우선 관사를 청소하여 공자를 모시겠습니다.” 했다. 공손고가 송양공에게 들어가서 고하니, 송양공은 이때 초나라에 한을 품고 밤낮으로 현인을 구하여 도움을 받아 원수를 갚을 생각을 하고 있었다. 진(晉)나라 공자가 먼 길을 떠나 송나라에 온다는 말을 듣고, 진나라는 곧 대국이고 공자 중이는 또한 어진 이름을 얻고 있으니 기쁨을 이기지 못했다. 그러나 허벅지의 상처도 아직 아물지 않아 직접 영접하기는 어려웠다. 송양공의 명에 따라 공손고가 성 밖에서 맞이하여 관사로 안내하고 제후의 예우를 대접하여, 칠뢰(七牢 ; 소 양 돼지 등으로 제후를 대접하는 음식)로 접대하게 했다. 다음날 중이가 떠나려고 하자 공손고가 송양공의 명을 받들어 재삼 머물러주기를 청하고, 호언에게 조용히 묻기를, “당초에 제환공은 어떻게 공자를 대하던가요?” 하니, 호언은 제환공이 여인을 중이와 혼인시키고 수십 필의 말을 주어 대접한 일을 자세히 설명했다.
公孫固回復宋公。宋公曰:「公子昔年已婚宋國矣。納女吾不能,馬則如數可也。」亦以馬二十乘相贈,重耳感激不已。住了數日,饋問不絕。狐偃見宋襄公病體沒有痊好之期,私與公孫固商議復國一事。公孫固曰:「公子若憚風塵之勞,敝邑雖小,亦可以息足。如有大志,敝邑新遭喪敗,力不能振,更求他大國,方可濟耳。」狐偃曰:「子之言,肺腑也。」即日告知公子,束裝起程。宋襄公聞公子欲行,復厚贈資糧衣履之類,從人無不歡喜。自晉公子去後,襄公箭瘡日甚一日,不久而薨。
공손고가 돌아와 송양공에게 복명하자, 송양공이 말하기를, “진(晉)나라 공자는 옛날에 이미 송나라 여인과 혼인을 한 적이 있으므로 여인을 보내는 것은 내가 하지 못하겠고, 말은 제환공이 내린 숫자와 같이 보내 주도록 하시오.” 하니, 말 20필을 주었다. 중이는 감격해 마지않았다. 그들이 공관에 며칠 머무는 동안 송나라 관리들이 음식을 가져와 연회를 끊이지 않게 열어 접대했다. 호언이 송양공의 상처가 아물 기한이 없음을 보고, 공손고를 조용히 만나 공자 중이의 귀국에 관한 일을 상의했다. 공손고가 말하기를, “공자께서 만약에 유랑하시는 노고를 꺼리신다면 우리나라는 비록 작지만, 충분히 쉴 수 있는 곳입니다. 만약 공자께서 큰 뜻을 펼치시고자 하신다면 우리나라는 얼마 전에 싸움에 지고 군사를 잃어 힘을 떨칠 수가 없습니다. 다시 다른 큰 나라에 도움을 청하여야 비로소 일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하니, 호언이 말하기를, “그대의 말은 진심에서 우러나온 말씀입니다.” 했다. 호언은 그날로 공자 중이에게 고하여 떠날 채비를 차렸다. 송양공이 중이 일행이 떠나려고 한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많은 재물과 양식, 의복과 신발 등을 보내 주니, 중이를 따르는 사람들이 기뻐해 마지않았다. 진(晉)나라 공자 중이가 떠난 후에 송양공은 상처가 날이 갈수록 악화하여 오래지 않아 죽었다.
臨終,謂世子王臣曰:「吾不聽子魚之言,以及於此!汝嗣位,當以國委之。楚,大仇也,世世勿與通好。晉公子若返國,必然得位,得位必能合諸侯,吾子孫謙事之,可以少安。」王臣再拜受命。襄公在位十四年薨。王臣主喪即位,是為成公。髯仙有詩論宋襄公德力俱無,不當列於五伯之內。詩云:「一事無成身死傷,但將迂語自稱揚。腐儒全不稽名實,五伯猶然列宋襄。」再說,重耳去宋,將至鄭國,早有人報知鄭文公。文公謂群臣曰:「重耳叛父而逃,列國不納,屢至飢餒。此不肖之人,不必禮之。」
송양공이 죽음에 다달아 세자 왕신(王臣)에게 말하기를, “내가 자어(目夷의 자)의 말을 듣지 않아 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다. 네가 군주 자리를 이으면 마땅히 나라의 정사를 자어에게 맡기도록 해라! 초나라는 우리의 큰 원수이니 대를 이어 절대 수호하지 말아라. 진(晉)나라 공자가 만약 자기 나라로 돌아가면 그는 반드시 군주의 자리에 올라 틀림없이 능히 제후들을 합칠 것이니, 너는 겸손하게 그를 섬겨야 가히 조금 편안해질 것이다.” 했다. 세자 왕신이 두 번 절하며 양공의 유언을 받들었다. 송양공은 재위 14년에 죽고 세자 왕신이 상을 주관하여 송나라 군주 자리에 올랐다. 이가 송성공(宋成公)이다. 염선이 시를 지어 송양공은 덕과 힘이 하나도 없는데 춘추오패로 치는 것은 부당하다고 논했다. 그 시에 이르기를, “이룬 공은 하나도 없이 싸움에서 입은 상처로 죽었고, 엉뚱한 말만을 늘어놓으며 스스로 과장했다. 썩은 선비들이 명분과 실리를 전혀 살피지 않고서, 오히려 춘추오패에다 송양공을 넣었다.” 했다. 한편, 송나라를 떠난 중이와 그 일행은 이윽고 정나라 경계에 도착했다. 어느새 어떤 사람이 정문공에게 보고했다. 정문공이 신하들에게 말하기를, “중이가 부왕을 거역하고 도망쳐서 열국들이 받아 주지 않아 여러 번 굶어 죽을 뻔했다고 했소. 변변치 못한 위인인 것 같으니 반드시 예를 차릴 필요가 없소.” 했다.
上卿叔詹諫曰:「晉公子有三助,乃天祐之人。不可慢也。」鄭伯曰:「何為三助?」叔詹對曰:「『同姓為婚,其類不蕃。』今重耳乃狐女所生,狐與姬同宗,而生重耳,處有賢名,出無禍患,此一助也。自重耳出亡,國家不靖,豈非天意有待治國之人乎?此二助也。趙衰狐偃,皆當世英傑,重耳得而臣之,此三助也。有此三助,君其禮之。禮同姓,恤困窮,尊賢才,順天命,四者皆美事也。」鄭伯曰:「重耳且老矣,是何能為?」叔詹對曰:「君若不能盡禮,則請殺之,毋留仇讎,以遺後患。」
상경 숙첨이 간하기를, “진(晉)나라 공자를 돕고 있는 것이 세 가지가 있습니다. 하늘이 돕는 사람이니 태만하게 대하지 마십시오.” 하니, 정문공이 말하기를, “그 세 가지 돕는다는 게 무엇이오?” 했다. 숙첨이 대답하기를, “‘동성끼리 혼인하면 그 무리가 번창하지 못한다.’고 했는데, 지금의 중이는 호녀(狐女)의 소생이고, 호(狐)와 희(姬)는 같은 종족입니다. (동성이 혼인하여) 중이가 태어났는데 가는 곳마다 어진 이름을 얻고, 나라 밖으로 나가서도 해를 입지 않으니, 이것이 하늘이 돕는다는 첫 번째입니다. 중이가 도망을 나간 뒤부터 오래도록 본국의 정세는 안정이 안 되고 있으니 이것은 어찌 하늘의 뜻이 나라를 다스릴 사람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이 두 번째 돕는 것입니다. 조쇠, 호언은 모두 당세의 영걸들입니다. 중이가 이들을 얻어서 신하로 삼았으니 이것이 그 세 번째 돕는 것입니다. 그러니 주군께서는 그를 예로써 대하시면 그것은 동성에게 예를 행하게 되고, 곤궁한 사람을 보살피는 일이며, 또한 현인을 높이고, 천명을 따르는 일이 됩니다. 이 네 가지가 모두 아름다운 일입니다.” 했다. 정문공이 말하기를, “중이는 이미 늙었는데, 그가 무엇을 할 수 있겠소?” 하니, 숙첨이 대답하기를, “주군께서 만약 예를 다할 수 없으면 청컨대 그를 죽이십시오. 공연히 원수를 만들어 다음날 후환을 남기지 마십시오.” 했다.
鄭伯笑曰:「大夫之言甚矣!既使寡人禮之,又使寡人殺之。禮之何恩,殺之何怨?」乃傳令門官,閉門勿納。重耳見鄭不相延接,遂驅車竟過。行至楚國,謁見楚成王。成王亦待以國君之禮,設享九獻。重耳謙讓不敢當。趙衰侍立,謂公子曰:「公子出亡在外,十餘年矣,小國猶輕慢,況大國乎?此天命也,子勿讓。」重耳乃受其享。終席,楚王恭敬不衰。重耳言詞亦愈遜。由此兩人甚相得,重耳遂安居於楚。一日,楚王與重耳獵於雲夢之澤。楚王賣弄武藝,連射一鹿一兔,俱獲之。諸將皆伏地稱賀。
정문공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대부의 말이 심합니다. 이미 과인에게 예를 다하라고 해 놓고, 또 과인에게 그를 죽이라고 하니, 예를 다해야 할 무슨 은혜가 있으며, 그를 죽여야 할 무슨 원한이 있겠소?” 했다. 즉시 문을 지키는 관리에게 명령을 전해 성문을 닫고 성안으로 들이지 말라고 했다. 중이는 정나라가 영접하지 않음을 보고, 마침내 수레를 몰아 정나라를 지나 초나라에 이르러 초성왕을 알현했다. 초성왕 역시 공자 중이를 제후의 예로써 대하고 잔치를 열어 구헌(九獻 ; 술잔을 아홉 번 올리는 천자의 예절)을 하려고 했다. 중이가 겸양하며 감당할 수 없다고 했다. 조쇠가 곁에 시립하고 있다가 중이에게 말하기를, “공자께서 밖으로 도망을 나온 지 십여 년입니다. 작은 나라도 오히려 가볍게 보아 무시하는데 하물며 큰 나라겠습니까? 이것은 하늘의 뜻이니 사양하지 마십시오.” 했다. 중이가 이에 그 잔칫상을 받았다. 주연이 끝나도 초왕의 공경하는 태도는 변하지 않았다. 중이의 언사도 역시 매우 겸손했다. 이로써 두 사람은 아주 뜻이 맞아서 중이는 마침내 초나라에서 편안히 지낼 수 있게 되었다. 하루는 초성왕이 중이와 같이 운몽(雲夢)의 늪지에 사냥을 나갔다. 초왕이 무예를 뽐내면서 활을 연달아 두 번 쏘아 사슴과 토끼를 잡았다. 여러 장수가 모두 땅에 엎드려 축하했다.
適有人熊一頭,衝車而過,楚王謂重耳曰:「公子何不射之?」重耳拈弓搭箭,暗暗祝禱:「某若能歸晉為君,此箭去,中其右掌。」颼的一箭,正穿右掌之上,軍士取熊以獻。楚王驚服曰:「公子真神箭也!」須臾,圍場中發起喊來,楚王使左右視之,回報道:「山谷中趕出一獸,似熊非熊,其鼻如象,其頭似獅,其足似虎,其髮如豺,其鬣似野豕,其尾似牛,其身大於馬,其文黑白斑駁,劍戟刀箭,俱不能傷,嚼鐵如泥,車軸裹鐵,俱被嚙食,矯捷無倫,人不能制,以此喧鬧。」
그때 마침 곰 한 마리가 나타나 수레를 들이받고 지나갔다. 초성왕이 중이에게 말하기를, “공자는 어찌하여 활을 쏘지 않습니까?” 하니, 중이가 활을 잡아 화살을 메기고 마음속으로 기도하기를, “내가 만약 진나라로 돌아가 군주가 될 수 있다면 이 화살이 저 곰의 오른쪽 발바닥에 맞게 해주십시오.” 했다. 쉬잇 하고 한 발을 쏘니 곧바로 곰의 오른쪽 발바닥에 꽂혔다. 군사들이 곰을 잡아 가지고 와서 중이에게 바쳤다. 초성왕이 놀라 탄복하며 말하기를, “공자는 참으로 귀신같은 활 솜씨입니다.” 했다. 잠시 후에 사냥터를 에워싸고 있던 군사들 사이에서 함성이 들렸다. 초성왕이 좌우에 있던 시종을 보내 알아보게 했다. 시종이 다녀와서 보고하기를, “산골짜기에서 한 마리의 짐승이 뛰어나왔는데 그것은 곰 같지만 곰이 아니고, 코가 코끼리 같으며, 머리는 사자 같고, 발은 호랑이 같으며, 털은 승냥이 같고, 갈기는 멧돼지 같으며, 꼬리는 소와 같습니다. 몸의 크기는 말 만하고 무늬는 희고 검은 반점이 섞였습니다. 검과 창, 칼과 화살로도 모두 상할 수가 없고 쇠를 진흙같이 씹어서 수레바퀴를 싼 쇠를 모두 깨물어 먹습니다. 더욱이 굳세고 날쌔기가 짝이 없어 사람들이 제압할 수가 없으니 저렇게 왁자지껄합니다.” 했다.
楚王謂重耳曰:「公子生長中原,博聞多識,必知此獸之名?」重耳回顧趙衰,衰前進曰:「臣能知之。此獸其名曰『貘』,秉天地之金氣而生,頭小足卑,好食銅鐵,便溺所至,五金見之,皆消化為水,其骨實無髓,可以代槌,取其皮為褥,能闢瘟去濕。」楚王曰:「然則何以制之?」趙衰曰:「皮肉皆鐵所結,惟鼻孔中有虛竅,可以純鋼之物刺之,或以火炙,立死,金性畏火故也。」言畢,魏犨厲聲曰:「臣不用兵器,活擒此獸,獻於駕前。」跳下車來,飛奔去了。楚王謂重耳曰:「寡人與公子同往觀之。」即命馳車而往。
초성왕이 중이에게 말하기를, “공자는 중원에서 자랐으니 널리 듣고 많이 알 것이니 틀림없이 이 짐승의 이름을 알겠지요?” 하니, 중이가 머리를 돌려 조쇠를 쳐다보았다. 조쇠가 앞으로 나와 말하기를, “신이 그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 짐승의 이름은 맥(貘)이라 하며 천지간에 있는 쇠의 기운을 받고 생겨난 것이기 때문에 머리는 작고 발은 짧으며 구리와 쇠를 잘 먹으며 대소변을 보면 그것이 변하여 오금(五金 ; 금 은 구리 쇠 주석)이 됩니다. 왜냐하면 모든 쇠붙이가 소화되어 물로 변하기 때문입니다. 그 짐승의 뼈는 골수가 없어서 망치로 대용할 수 있으며 그 가죽을 요로 만들면 전염병을 물리치고 습기를 제거할 수 있습니다.” 했다. 초성왕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어떻게 잡아야 하오?” 하니, 조쇠가 말하기를, “가죽과 피부가 모두 쇠로 되어 있지만, 오직 콧구멍 속 빈 구멍을 매우 단단한 강철로 찌르면 잡을 수 있습니다. 혹은 그 짐승을 불로 구우면 즉시 죽습니다. 쇠의 성질은 불을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했다. 조쇠가 말을 마치자 위주가 성난 목소리로 말하기를, “신은 무기를 사용하지 않고 이 짐승을 산채로 사로잡아 어가 앞에 올리겠습니다.” 하고, 수레에서 뛰어내려 나는 듯이 달려갔다. 초성왕이 중이에게 말하기를, “과인은 공자와 같이 가서 보기로 하지요.” 하고, 즉시 명하여 수레를 몰아 그 짐승이 있는 곳으로 갔다.
且說,魏犨趕入西北角圍中,一見那獸,便揮拳連擊幾下。那獸全然不怕,大叫一聲,如牛鳴之響,直立起來,用舌一舐,將魏犨腰間鎏金鋥帶,舐去一段。魏犨大怒曰:「孽畜不得無禮!」聳身一躍,離地約五尺許。那獸就地打一滾,又蹲在一邊。魏犨心中愈怒,再復躍起,趁這一躍之勢,用盡平生威力,騰身跨在那獸身上,雙手將他項子抱住。那獸奮力躑躅,魏犨隨之上下,只不放手。掙扎多時,那獸力勢漸衰,魏犨兇猛有餘,兩臂抱持愈緊。那獸項子被勒,氣塞不通,全不動彈。
한편, 위주가 에워싼 사냥터의 서북쪽 모퉁이로 달려가서 그 짐승을 보자 주먹으로 연달아 몇 번이고 가격했다. 그 짐승은 전혀 두려워하지 않고 크게 한번 부르짖으니 그 소리가 마치 소가 우는 소리와 같았다. 그 짐승이 서서 다가오며 혓바닥으로 한 번 핥자 위주의 허리에 차고 있던 금으로 장식한 칼집 띠가 딸려 들어가 버렸다. 위주가 대로하여 소리치기를, “몹쓸 놈이 어찌 이리 무례하냐?” 하고, 몸을 한번 솟구쳐 땅에서 다섯 자나 높이 뛰어올라 내려오면서 그 괴수의 정수리를 걷어찼다. 그러자 그 짐승이 한쪽 편에 쭈그려 앉았다. 위주가 더욱 성을 내어 다시 한번 몸을 솟구쳐 그 기세를 타고 평생의 모든 힘을 다하여 몸을 날려 그 짐승을 올라타서 두 손으로 목을 껴안았다. 그 짐승도 있는 힘을 떨쳐 뛰어다니며 위주를 떼어버리려고 했으나, 위주는 아래위로 흔들리면서도 목을 조이고 있던 두 손을 놓지 않았다. 그 괴수가 한참 동안 발버둥을 치더니 그 기세가 점점 수그러들었다. 위주는 여전히 흉맹한 기세를 누그러뜨리지 않고 목을 조인 양팔에 더욱 힘을 주었다. 그 짐승은 목이 졸려 기가 막히고 통하지 않아서 전혀 움직이지 않게 되었다.
魏犨乃跳下身來,再舒銅筋鐵骨兩隻臂膊,將那獸的象鼻,一手捻定,如牽犬羊一般,直至二君之前。(真虎將也!)趙衰命軍士取火薰其鼻端,火氣透入,那獸便軟做一堆。魏犨方纔放手,拔起腰間寶劍砍之,劍光迸起,獸毛亦不損傷。趙衰曰:「欲殺此獸取皮,亦當用火圍而炙之。」楚王依其言。那獸皮肉如鐵,經四圍火炙,漸漸柔軟,可以開剝。楚王曰:「公子相從諸傑,文武俱備,吾國中萬不及一也!」時楚將成得臣在旁,頗有不服之意,即奏楚王曰:「吾王誇晉臣之武,臣願與之比較。」楚王不許曰:「晉君臣,客也,汝當敬之。」
위주가 등에서 뛰어 내려와 쇠줄로 그 짐승의 팔다리를 묶었다. 코끼리의 코처럼 생긴 짐승의 코를 한 손으로 잡고 마치 개나 양을 끌듯이 끌고 와서 초성왕과 중이의 앞에 바쳤다. (참으로 호랑이 같은 장수였다.) 조쇠가 군사들에게 명하여 불을 피우게 하여 그 짐승의 콧속으로 훈기를 집어넣자 그 짐승이 문득 부드러워져서 한 개의 물렁물렁한 덩어리가 됐다. 위주가 손을 들어 허리에 차고 있던 보검을 뽑아 그것을 내리쳤으나 칼에서 불빛만 일어날 뿐 그 짐승의 털 하나도 상하지 못했다. 조쇠가 말하기를, “이 짐승을 죽여서 가죽을 얻기 위해서는 주위에 불을 피워 구워야 합니다.” 했다. 초성왕이 그 말대로 하게 했다. 그 짐승의 가죽과 살이 마치 쇠와 같았는데, 사방에서 불을 피워 구우니 점점 부드러워져서 가죽을 벗겨 낼 수 있게 됐다. 초성왕이 말하기를, “공자를 따라다니는 사람들은 모두 문무를 겸비한 호걸입니다. 우리나라에는 만에 하나도 없습니다!” 했다. 그때 초성왕 곁에 성득신이 서 있다가 자못 불복하는 뜻으로 초성왕에게 아뢰기를, “대왕께서 진(晉)나라 신하들의 무예를 과장하시니 신이 그들과 무예를 겨루어 보고 싶습니다.” 했다. 초성왕이 허락하지 않고 말하기를, “진(晉)나라의 공자와 그 일행은 우리의 손님이다. 그대는 마땅히 존경하는 마음으로 대하라!” 했다.
是日獵罷,會飲大歡。楚王謂重耳曰:「公子若返晉國,何以報寡人?」重耳曰:「子女玉帛,君所餘也,羽毛齒革,則楚地之所產。何以報君王?」楚王笑曰:「雖然,必有所報。寡人願聞之。」重耳曰:「若以君王之靈,得復晉國,願同歡好,以安百姓。倘不得已,與君王以兵車會於平原廣澤之間,請避君王三舍。」(按行軍三十里一停,謂之一舍,三舍九十里。言異日晉楚交兵,當退避三舍,不敢即戰,以報楚相待之恩。)當日飲罷,楚將成得臣怒言於楚王曰:「王遇晉公子甚厚,今重耳出言不遜,異日歸晉,必負楚恩,臣請殺之。」
이날, 사냥을 끝내고 연회를 열어 크게 즐거워했다. 초성왕이 중이에게 말하기를, “공자께서 만약 진(晉)나라에 돌아가신다면 무엇으로 과인에게 보답하시겠습니까?” 하니, 중이가 말하기를, “대왕께서는 여자와 옥과 비단이 넘칩니다. 깃털과 털 및 상아와 가죽은 초나라에서 나는 것들입니다. 무엇으로 대왕께 보답하겠습니까?” 했다. 초왕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비록 그렇지만 반드시 보답할 것이 있을 것입니다. 과인이 그것을 듣고 싶습니다.” 하니, 중이가 말하기를, “만약 대왕의 보살핌에 힘입어 진(晉)나라 군주가 된다면, 원컨대 서로 수호하여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도록 힘쓰겠습니다. 만약에 부득이하여 대왕과 전쟁을 할 경우 넓은 평원이나 소택지에서 제가 대왕의 군사를 피하여 삼사(三舍)의 거리만큼 뒤로 후퇴하겠습니다.” 했다. (행군 30리를 1정이라 하고 그것을 일러 1사(舍)라 하며 3사는 90리다. 중이의 말은 후일에 진(晉)나라와 초나라가 전쟁을 하게 될 경우, 마땅히 3사를 물러나서감히 즉시 싸우지 않음으로써 초나라에서 대접받은 은혜에 보답하겠다는 말이다.) 그날 연회가 끝나자 초나라 장수 성득신이 노하여 초왕에게 말하기를, “대왕께서 진(晉)나라 공자 일행들을 매우 극진히 대해 주시는데 오늘 중이의 말은 불손합니다. 후일 그가 진나라에 돌아가면 반드시 초나라의 은혜를 배반할 것입니다. 청컨대 그를 죽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했다.
楚王曰:「晉公子賢,其從者皆國器,似有天助。楚其敢違天乎?」得臣曰:「王即不殺重耳,且拘留狐偃趙衰數人,勿令與虎添翼。」楚王曰:「留之不為吾用,徒取怨焉。寡人方施德於公子,以怨易德,非計也!」於是待晉公子益厚。話分兩頭。卻說,周襄王十五年,實晉惠公之十四年,是歲惠公抱病在身,不能視朝。其太子圉,久質秦國,圉之母家,乃梁國也。梁君無道,不恤民力,日以築鑿為事,萬民嗟怨,往往流徙入秦,以逃苛役。秦穆公乘民心之變,命百里奚興兵襲梁,滅之。梁君為亂民所殺。
초성왕이 말하기를, “진(晉)나라 공자는 어진 사람이다. 또한 그를 따라다니는 일행들도 모두 나라를 이끌 만한 인재들이다. 이는 하늘이 돕고 있는 것 같다. 초나라가 감히 하늘의 뜻을 거스르겠는가?” 했다. 성득신이 말하기를, “대왕께서 중이를 죽이지 못하신다면, 호언과 조쇠 등 몇 사람을 이곳에 억류시켜 호랑이에게 날개를 달아주지 말아야 합니다.” 하니, 초성왕이 말하기를, “우리가 그들을 억류시켜 놓고 쓰지 않는다면 한갓 원망을 살 뿐이다. 과인이 이제껏 공자에게 은혜를 베풀었는데 원한으로 은덕을 바꾸는 것은 좋은 계책이 아니다.” 했다. 이에 초왕은 중이 일행을 더욱 후하게 대접하였다. 이야기는 두 갈래로 나뉜다. 한편, 주양왕 15년(기원전 636년)은 진(晉)나라 혜공이 즉위한 지 14년째 되는 해였다. 이 해에 진혜공이 몸에 병이 들어 정사를 못 보게 되었다. 진혜공의 태자 어(圉)는 오랫동안 진(秦)나라에 인질로 잡혀 있었고, 어의 외가는 양나라였다. 양나라 군주가 무도하여 백성들의 노고를 전혀 생각하지 않고 성을 쌓고 연못을 파는 일을 벌여, 백성들이 원망하여 종종 양나라를 떠나 진(秦)나라로 흘러 들어가 혹독한 노역을 피하려고 했다. 진목공은 양나라의 민심이 변한 틈을 이용하여 백리해에게 명하여 군사를 일으켜 양나라를 습격하여 멸하게 했다. 양나라 군주는 난민에게 살해되었다.
太子圉聞梁見滅,嘆曰:「秦滅我外家,是輕我也!」遂有怨秦之意。及聞惠公有疾,思想:「隻身在外,外無哀憐之交,內無腹心之援,萬一君父不測,諸大夫更立他公子,我終身客死於秦,與草木何異?不如逃歸侍疾,以安國人之心。」乃夜與其妻懷嬴,枕席之間,說明其事:「我如今欲不逃歸,晉國非我之有,欲逃歸,又割捨不得夫婦之情。你可與我同歸晉國,公私兩盡。」懷嬴泣下,對曰:「子一國太子,乃拘辱於此,其欲歸不亦宜乎?寡君使婢子侍巾櫛,欲以固子之心也。今從子而歸,背棄君命,妾罪大矣。子自擇便,勿與妾言。妾不敢從,亦不敢洩子之語於他人也。」太子圉遂逃歸於晉。
태자 어가 양나라가 망했다는 말을 듣고 한탄하며 말하기를, “진(秦)나라가 나의 외가를 멸망시킨 것은 나를 업신여기기 때문이다.” 하고 진(秦)나라를 원망하는 뜻을 품게 되었다. 이에 진혜공이 병이 났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생각하기를, “이 몸이 외국에 잡혀 있어 밖으로는 나를 가엽게 여겨 도와주려는 친구도 없고, 안으로는 심복의 도움도 없는데, 만약에 부군께서 갑자기 돌아가시게 되어 대부들이 다른 공자를 군주로 세운다면 나는 평생 진(秦)나라의 손님으로 있다가 죽을 것이니, 초목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이곳을 도망쳐 본국으로 돌아가 부군의 병 구완을 하여 나라 사람들의 마음을 안정시키는 것이 좋겠다.” 하고, 밤이 되어 잠자리에서 그 아내 회영에게 그 일을 설명하기를, “내가 만약 지금 달아나 돌아가지 않으려 한다면 진(晉)나라 군주 자리는 내 차지가 되지 않을 것이오. 내가 달아나 돌아가려고 하면, 또한 부부의 정을 끊어버리는 것이라. 부인도 나와 함께 진(晉)나라로 돌아가면 공사(公私)가 모두 이루어지게 될 것이오.” 했다. 회영이 울면서 대답하기를, “그대는 한 나라의 태자로 이곳에서 굴욕을 당하고 계시니 본국으로 돌아가시고자 함은 또한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저의 아버지께서 저를 시켜 태자의 시중을 들게 하심은 태자의 마음을 붙들어 두고자 함입니다. 지금 제가 태자를 따라 진(晉)나라로 돌아가면 이는 부왕의 명을 저버리고 큰 죄를 짓는 것입니다. 태자께서는 스스로 방편을 택하여 행하시고 첩에게는 말씀하지 마십시오. 첩은 감히 세자를 따를 수가 없으나 또한 그대의 말을 다른 사람에게 누설하지 않을 것입니다.” 했다. 태자 어는 마침내 도망쳐 진(晉)나라로 돌아갔다.
秦穆公聞子圉不別而行,大罵:「背義之賊!天不祐汝!」乃謂諸大夫曰:「夷吾父子,俱負寡人,寡人必有以報之!」自悔當時不納重耳,乃使人訪重耳蹤跡,知其在楚,已數月矣。於是遣公孫枝聘於楚王,因迎重耳至秦,欲以納之。重耳假意謂楚王曰:「亡人委命於君王,不願入秦。」楚王曰:「楚晉隔遠,公子若求入晉,必須更歷數國。秦與晉接境,朝發夕到。且秦君素賢,又與晉君相惡,此公子天贊之會也。公子其勉行!」重耳拜謝。楚王厚贈金帛車馬,以壯其行色。重耳在路復數月,方至秦界。雖然經歷尚有數國,都是秦楚所屬,況有公孫枝同行,一路安穩。自不必說。
태자 어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갔다는 보고를 받은 진목공은 큰 소리로 욕하기를, “배은망덕한 도적놈이다! 하늘이 너를 돕지 않을 것이다!” 했다. 이에 여러 대부에게 말하기를, “이오 부자는 모두 나를 저버렸다. 내가 반드시 보복하겠다.” 했다. 진목공은 옛날에 중이를 진(晉)나라 군주로 세우지 않았던 일을 후회하고 곧 사람을 시켜 중이의 종적을 찾게 했다. 그리하여 그가 초나라에 있은 지 이미 수개월이 지났다는 것을 알았다. 이에 공손지를 초성왕에게 사절로 보내어 중이를 진(秦)나라로 데려와 진(晉)나라 군주로 세우려고 한다는 뜻을 전하게 했다. 중이는 짐짓 초성왕에게 말하기를, “이 망명객은 군주께 목숨을 맡겼습니다. 진(秦)나라로 가고 싶지는 않습니다.” 하니, 초성왕이 말하기를, “초나라와 진(秦)나라는 너무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공자께서 만약 진(晉)나라로 들어가려고 하신다면 반드시 여러 나라를 거쳐야만 합니다. 그러나 진(秦)나라와 진(晉)나라는 국경을 접하여 아침에 출발하면 저녁에 닿을 수 있습니다. 또한 진(秦)나라 군주는 원래 현명하고 또 진(晉)나라 군주와는 사이가 좋지 않으니 이것은 공자를 하늘이 도우는 기회입니다. 공자께서는 부지런히 가십시오.” 했다. 중이가 초왕에게 절을 올리며 감사했다. 초성왕이 많은 황금과 비단, 수레와 말을 주어 그 행색이 훌륭하게 해주었다. 중이 일행은 여러 달 동안의 노정 끝에 드디어 진(秦)나라 경계에 이르렀다. 비록 여러 나라를 거쳤지만, 모두가 진(秦)나라와 초나라를 따르는 제후국들이고 더욱이 공손지와 동행이라 도중에 편안하게 여행한 것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秦穆公聞重耳來信,喜形於色,郊迎授館,禮數極豐。秦夫人穆姬,亦敬愛重耳,而恨子圉,勸穆公以懷嬴妻重耳,結為姻好。穆公使夫人告於懷嬴。懷嬴曰:「妾已失身公子圉矣,可再字乎?」穆姬曰:「子圉不來矣!重耳賢而多助,必得晉國。得晉國,必以汝為夫人,是秦晉世為婚姻也。」懷嬴默然良久,曰:「誠如此,妾何惜一身,不以成兩國之好?」穆公乃使公孫枝通語於重耳。子圉與重耳有叔姪之分,懷嬴是嫡親姪婦,重耳恐於礙倫理,欲辭不受。趙衰進曰:「吾聞懷嬴美而才,秦君及夫人之所愛也。不納秦女,無以結秦歡。臣聞之:『欲人愛己,必先愛人;欲人從己,必先從人。』無以結秦歡,而欲用秦之力,必不可得也。公子其毋辭!」
진목공은 중이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 얼굴에 기쁜 기색을 띠며 교외에 나가 영접하고 공관을 내주며 예의가 극히 정중했다. 진목공의 부인 목희도 또한 중이를 존경하고 사랑했으며, 태자 어를 괘씸하게 생각하여 목공에게 권하여 회영을 중이의 처로 혼인을 맺고자 했다. 목공이 부인을 시켜 회영의 뜻을 알아보게 했다. 회영이 말하기를, “저는 이미 공자 어에게 몸을 허락한 사람인데, 어찌 다시 혼인할 수가 있습니까?” 하니, 목희가 말하기를, “태자 어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중이는 어질고, 많은 사람이 곁에서 도우니 반드시 진(晉)나라 군주가 될 것이다. 그가 진(晉)나라 군주가 된다면 반드시 너를 부인으로 만들 것이다. 이렇게 되면 진(秦)나라와 진(晉)나라가 대를 이어 혼인하는 것이다.” 했다. 회영이 말없이 한참 있다가 말하기를, “진실로 그러하다면 제가 어찌 이 한 몸을 아껴 두 나라의 우호를 방해할 수야 있겠습니까?” 했다. 이에 목공이 공손지를 시켜 중이에게 뜻을 알아보게 했다. 태자 어와 중이는 숙질간이고, 회영은 중이에게 친조카며느리였다. 중이가 윤리에 어긋나는 것을 두려워하여, 사양하고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했다. 조쇠가 앞으로 나와 말하기를, “제가 듣기로 회영이 미모와 재주를 겸비하여 진목공과 그 부인이 사랑한다고 합니다. 회영을 거부하시면 진(秦)나라의 환심을 살 수 없습니다. 신이 듣기에 ‘남이 나를 사랑하게 하려면 반드시 먼저 남을 사랑해야 하고, 남이 나를 따르게 하려면 반드시 먼저 남을 따라야 한다.’고 했습니다. 진(秦)나라의 환심을 사지 않고서 진(秦)나라의 힘을 쓰고자 한다면 틀림없이 얻지 못할 것입니다. 공자께서는 사양하시면 안 됩니다.” 했다.
重耳曰:「同姓為婚,猶有避焉。況猶子乎?」臼季進曰:「古之同姓,為同德也,非謂族也。昔黃帝炎帝,俱有熊國君少典之子,黃帝生於姬水,炎帝生於姜水,二帝異德,故黃帝為姬姓,炎帝為姜姓。姬姜之族,世為婚姻。黃帝之子二十五人,得姓者十四人,惟姬己各二,同德故也。德同姓同,族雖遠,婚姻不通。德異姓異,族雖近,男女不避。堯為帝嚳之子,黃帝五代之孫,而舜為黃帝八代之孫,堯之女於舜為祖姑,而堯以妻舜,舜未嘗辭。古人婚姻之道若此。以德言,子圉之德,豈同公子?以親言,秦女之親,不比祖姑。況收其所棄,非奪其所歡,是何傷哉?」
중이가 말하기를, “동성끼리 혼인하는 것도 오히려 피하는데, 하물며 조카며느리와 혼인을 한단 말이오?” 하니, 구계[胥臣]가 나와 말하기를, “옛날의 동성은 동덕(同德)을 말함이지 동족을 의미하지 않았습니다. 옛날 황제(黃帝)와 염제(炎帝)는 모두 웅국(熊國)의 임금인 소전(小典)의 아들들로써 황제는 희수(姬水)에서 나고 염제(炎帝)는 강수(姜水)에서 났습니다. 두 임금이 덕이 서로 달랐기 때문에 황제는 희성이 되고 염제는 강성이 되었습니다. 희족(姬族)과 강족(姜族)들은 대대로 혼인을 했습니다. 황제의 아들 25명 중에 성씨를 얻은 자는 14명인데, 오직 희(姬)와 기(己) 두 성씨만이 동덕이기 때문입니다. 덕이 같고 성도 같다면 비록 먼 종족이라도 혼인을 할 수 없습니다. 덕이 다르고 성도 다르다면 비록 가까운 종족이라 할지라도 남녀의 혼인은 피하지 않습니다. 요임금은 제곡(帝嚳)의 아들이고 황제의 5대손입니다. 그리고 순임금은 황제의 8대손이라 요임금의 딸은 순 임금에게는 고모할머니가 됩니다. 요임금이 자기의 딸을 순임금과 혼인을 시키려고 하자 순임금은 사양하지 않았습니다. 옛날 사람들이 혼인한 도가 이와 같은데, 덕으로 말하면 태자 어의 덕이 어찌 공자의 덕과 같겠습니까? 또한 친함으로 말하면 진(秦)나라 군주의 딸의 친함이 고모할머니에 비할 수는 없습니다. 하물며 태자 어가 아끼는 여인을 빼앗는 것이 아니라, 그가 버린 여인을 거두는 것입니다. 어찌 윤리를 해친다고 하십니까?” 했다.
重耳復謀於狐偃曰:「舅犯以為可否?」狐偃問曰:「公子今求入,欲事之乎?抑代之也?」重耳不應。狐偃曰:「晉之統系,將在圉矣。如欲事之,是為國母。如欲代之,則仇讎之妻,又何問焉?」重耳猶有慚色。趙衰曰:「方奪其國,何有於妻?成大事而惜小節,後悔何及?」重耳意乃決。公孫枝復命於穆公。重耳擇吉布幣,就公館中成婚。懷嬴之貌,更美於齊姜,又妙選宗女四名為媵,俱有顏色,重耳喜出望處,遂不知有道路之苦矣。史官有詩論懷嬴之事云:「一女如何有二天?況於叔姪分相懸。只因要結秦歡好,不恤人言禮義愆。」
중이가 호언에게 다시 의논해 말하기를, “외숙부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하니, 호언이 묻기를, “공자께서 이제 본국에 돌아가셔서 이오를 섬길 생각이십니까? 또는 그를 대신해서 군주 자리에 오를 생각이십니까?” 했다. 중이가 대답이 없자, 호언이 말하기를, “이오가 죽으면 진(晉)나라는 그 아들 어(圉)의 소유가 됩니다. 만일 어를 섬기고자 하신다면 회영은 국모가 될 것이고, 어를 대신하여 군주 자리에 오를 생각이라면 회영은 원수의 아내가 됩니다. 어찌하여 다시 물으십니까?” 하니, 중이가 얼굴에 부끄러운 기색을 띠었다. 조쇠가 말하기를, “앞으로 그 나라를 빼앗아야 하는데 그 아내쯤이야 무슨 대단한 것이 있겠습니까? 큰일을 하려는 사람이 조그만 절개에 얽매였다가는 뒷날 후회해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했다. 중이가 마침내 뜻을 정했다. 공손지가 중이의 허락을 받아 목공에게 복명했다. 중이는 길일을 택해 폐백을 보내고 공관에서 혼례를 올렸다. 회영의 미모는 제나라 강씨 보다 더 예뻤다. 또한 목공은 종실의 여인 4명을 가려 뽑아 회영의 잉첩(媵妾)으로 주었는데 모두가 아름다웠다. 중이가 뜻밖에 많은 미녀를 얻어 기뻐했다. 마침내 유랑 생활의 고생스러움을 잊어버렸다. 사관이 회영의 일을 논의하는 시를 지어 이르기를, “한 여인에게 어찌하여 하늘 같은 지아비가 둘이던가? 더욱이 두 사람은 숙질 사이라는데, 오로지 진(秦)나라의 환심만을 얻으려고, 예의에 어긋난다는 말을 돌아보지 않았구나.” 했다.
秦穆公素重晉公子之品,又添上甥舅之親,情誼愈篤。三日一宴,五日一饗。秦世子罃亦敬事重耳,時時饋問。趙衰狐偃等因與秦臣蹇叔、百里奚、公孫枝等深相結納,共躊躇復國之事。一來公子新婚,二來晉國無釁,以此不敢輕易舉動。自古道:「運到時來,鐵樹花開。」天生下公子重耳,有晉君之分,有名的伯主,自然生出機會。再說,太子圉自秦逃歸,見了父親晉惠公。惠公大喜曰:「吾抱病已久,正愁付託無人。今吾子得脫樊籠,復還儲位,吾心安矣。」
진목공이 평소에 공자 중이의 인품을 존중하였고, 또 사위와 장인 사이가 되자 그 정의가 더욱 돈독하게 되었다. 3일마다 한 번씩 잔치를 열고 5일마다 한 번씩 술자리를 베풀어 중이 일행을 대접했다. 진(秦)나라의 세자 앵(罃) 역시 중이를 공경하여 시시로 음식을 가져와 문안을 드렸다. 조쇠, 호언 등이 진(秦)나라의 중신인 건숙과 백리해 및 공손지 등과 친교를 깊이 맺었다. 그러나 모두 진(晉)나라로 돌아가는 일에 대해서는 주저했다. 그 이유의 하나는 공자가 신혼이었고, 그 둘은 진(晉)나라에 별다른 변화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감히 경솔히 거사할 수가 없었다. 예로부터 이르는 말에, “운(運)이 오면 쇠로 된 나무에도 꽃이 핀다.”고 했는데, 하늘이 공자 중이를 내어 진(晉)나라 군주의 자리에 앉혀서 패업을 이루게 하려 하니, 자연히 기회가 생길 것이라고 생각했다. 한편, 당진의 태자 어가 진(秦)나라에서 도망쳐 돌아와서 부친인 혜공을 뵈었다. 혜공이 크게 기뻐하여 말하기를, “내가 앓아누운 지가 오래되었음에도 후사를 맡길 사람이 곁에 없어서, 근심하고 있던 차에 오늘 네가 새장에서 탈출하여 태자의 자리에 돌아왔으니 내 마음이 편안하구나!” 했다.
是秋九月,惠公病篤,託孤於呂省郤芮二人,使輔子圉:「群公子不足慮,只要謹防重耳。」呂郤二人頓首受命。是夜,惠公薨,太子圉主喪即位,是為懷公。懷公恐重耳在外為變,乃出令:「凡晉臣從重耳出亡者,因親及親,限三個月內俱要喚回。如期回者,仍復舊職,既往不咎。若過期不至,祿籍除名,丹書註死。父子兄弟坐視不召者,並死不赦!」老國舅狐突二子狐毛狐偃,俱從重耳在秦,郤芮私勸狐突作書,喚二子歸國。狐突再三不肯。
그해 가을 9월에 혜공이 병이 위독하게 되자 여성(呂省 ; 여이생)과 극예(郤芮) 두 사람에게 부탁하여 태자 어를 보좌하라면서 이르기를, “다른 공자들은 그다지 염려할 바가 없겠지만 중이만은 조심해서 막아야만 할 것이오!” 했다. 여성과 극예 두 사람이 머리를 조아리고 혜공의 명을 받았다. 그날 밤에 혜공이 죽었다. 태자 어가 장례를 주관하고 진(晉)나라 군주로 즉위했다. 이가 회공(懷公)이다. 진회공은 중이가 나라 밖에서 변을 일으킬까 두려워하여 즉시 명을 내리기를, “중이를 따라 나라 밖에서 유랑하는 진(晉)나라 신하들의 친척들은 모두 3개월을 시한으로 하여 나라 안으로 불러들여라! 기한 내에 돌아온 자는 옛날의 관직을 주고 지난 죄를 묻지 않겠으나, 만약 그 기한 안에 돌아오지 않는 자들은 녹봉과 호적에서 이름을 지우고 죄인의 명부인 단서(丹書)에 사(死)자로 주(注)를 달아 놓겠다. 그자들의 부자나 형제가 좌시하고 부르지 않는 자는 모두가 죽음을 면하지 못하리라!” 했다. 노국구 호돌의 두 아들인 호모와 호언은 모두 중이를 따라다니다가 현재 진(秦)나라에 있었다. 극예가 조용히 호돌을 찾아와 두 아들을 불러들이는 편지를 쓰라고 권유했다. 호돌이 재삼 응하지 않았다.
郤芮乃謂懷公曰:「二狐有將相之才,今從重耳,如虎得翼。突不肯喚歸,其意不測,主公當自與言之。」懷公即使人召狐突。突與家人訣別而行。來見懷公,奏曰:「老臣病廢在家,不知宣召何言?」懷公曰:「毛偃在外,老國舅曾有家信去喚否?」突對曰:「未曾。」懷公曰:「寡人有令:『過期不至者,罪及親黨。』老國舅豈不聞乎?」突對曰:「臣二子委質重耳,非一日矣。忠臣事君,有死無二!二子之忠於重耳,猶在朝諸臣之忠於君也,即使逃歸,臣猶將數其不忠,戮於家廟。況召之乎?」
이에 극예가 진회공에게 말하기를, “호돌의 두 아들 호모와 호언은 모두 장상의 재목입니다. 지금 중이를 따르고 있으니 호랑이가 날개를 단 격입니다. 호돌이 불러들이지 않고 있으니 그 뜻을 알 수 없습니다. 주군께서는 마땅히 그를 불러 말해보십시오.” 했다. 진회공이 사람을 시켜 호돌을 불러오라고 했다. 호돌은 집안사람들과 작별 인사를 한 후에 궁궐로 들어가 진회공을 보고 아뢰기를, “노신은 몸에 병이 들어 아무 일도 못하고 집안에 있습니다. 무슨 일로 저를 부르시는지 그 까닭을 모르겠습니다.” 하니, 진회공이 말하기를, “호모와 호언이 나라 밖에 있는데, 노국구께서 집에서 불러들이는 편지를 보냈습니까?” 했다. 호돌이 대답하기를, “아직 편지를 쓰지 못했습니다.” 하니, 진회공이 말하기를, “과인이 영을 내려, ‘기한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는 자는 죄가 가족에게 미친다.’고 했는데, 노국구께서는 어찌하여 듣지 못했습니까?” 했다. 호돌이 대답하기를, “신의 두 아들이 중이에게 몸을 맡긴 지 오래되었습니다. 충신은 주군을 섬기다가 죽을지언정 다른 사람은 모시지 않는 법입니다. 두 아들이 중이에게 충성하는 것은 마치 조정의 여러 신하가 주군께 충성하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만일 그들이 도망쳐 돌아온다면 신은 오히려 그들의 불충을 꾸짖고 가묘(家廟)에 데리고 가서 죽일 것입니다. 그런데 어찌 제가 그들을 부르겠습니까?” 했다.
懷公大怒,喝令二力士以白刃交加其頸,謂曰:「二子若來,免汝一死!」因索簡置突前,郤芮執其手,使書之。突呼曰:「勿執我手,我當自書。」乃大書「子無二父,臣無二君」八字。懷公大怒曰:「汝不懼耶?」突對曰:「為子不孝,為臣不忠,老臣之所懼也。若死,乃臣子之常事,有何懼焉!」舒頸受刑。懷公命斬於市曹。太卜郭偃見其屍,嘆曰:「君初嗣位,德未及於匹夫,而誅戮老臣,其敗不久矣!」即日稱疾不出。狐氏家臣,急忙逃奔秦國,報與毛偃知道。
진회공이 크게 노하여 장사 두 명에게 소리쳐 명하여 시퍼런 칼날을 호돌의 목에 겨누게 하고는 말하기를, “두 아들을 불러오겠다고 하면 죽음을 면하게 하겠다.”며 죽간을 호돌의 앞에 펴놓게 하고, 극예가 호돌의 손을 붙잡고 편지를 쓰려고 했다. 호돌이 소리쳐 말하기를, “내 손을 놓아라! 내가 직접 쓰겠다.” 하고, “자식은 두 아비가 없고 신하는 두 임금이 없다.” 라고 여덟 글자를 크게 썼다. 진회공이 크게 노하여 말하기를, “너는 죽음이 두렵지 않느냐?” 하니, 호돌이 대답하기를, “자식이 되어 불효하고 신하가 되어 불충한 것이 노신이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만약 죽게 된다면 그것은 곧 신하로서 항상 있는 일인데 어찌 두려워하겠습니까?” 하고, 목을 길게 늘어뜨려 형을 받으려고 했다. 진회공이 명하여 저잣거리에서 참수했다. 태복 곽언(郭偃)이 호돌의 시체를 보고 탄식하기를, “군주가 처음 그 자리에 올라 덕이 필부만도 못하여, 나라의 원로대신을 죽이니 망할 날이 오래지 않았다.” 하고, 그날로 몸이 아프다고 핑계를 대고 두문불출했다. 호씨의 가신들이 급히 도망쳐 진(秦)나라로 가서 호모와 호언에게 알렸다.
不知毛偃如何,且看下回分解。
호모와 호언이 어떻게 할지 모르겠구나. 다음 회를 보면 풀릴 것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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