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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바사론 제8권
32) 사성제처(四聖諦處) ①
사성제(四聖諦)는,
고제(苦諦)ㆍ습제(習諦:集諦)ㆍ진제(盡諦:滅諦)ㆍ도제(道諦)이다.
[문] 사성제는 그 성품이 어떠한가?
[답] 아비담(阿毘曇)에서 설명하기를,
“5성음(盛陰)이 고제이며 유루인(有漏因)이 습제(習諦:苦諦)이며 수연멸(數緣滅:擇滅)이 진제(盡諦:滅諦)이며 유학(有學)과 무학(無學)의 법이 도제(道諦)이다”라고 하였다.
비유로 설명한다면,
“명(名)과 색이 고제며, 행(行)과 결사(結使)가 습제며, 행과 결사가 소멸하는 것이 진제며 지(止)와 관(觀)이 도제다.”
또 비바사론(鞞婆沙論)에서 설명하기를,
“여덟 가지 고상(苦相)이 고통이고, 고제다. 그 밖의 고통은 비록 괴롭다고 하더라도 고제는 아니다.
현재에 존재하는 애착이 습제(習諦:集諦)다. 그 밖의 애착과 유루법은 비록 ‘가까이 모여진다[習]’고 하더라도 습제는 아니다.
미래에 존재하는 애착이 소멸하는 것이 진제다. 그 밖의 애착심과 유루법이 소멸하는 것은 비록 번뇌가 다한다고 하더라도 진제는 아니다.
여덟 가지 도(道)를 배우는 것이 도(道)이며 도제다. 나머지 유학법과 모든 무학법은 비록 도라고 하더라도 도제는 아니다”라고 하였다.
[문] 그대의 설명에 따른다면 아라한(阿羅漢)은 습제와 도제의 두 진리를 성취하지 못하게 된다.
습제를 성취하지 못한다고 하는 것은 그것이 ‘미래에 존재하는 애착이 습제다’라고 하였으니, 아라한이 욕망을 제거하였을 때는 미래에 존재하는 애착이 다 사라지기 때문이며,
또 도제를 성취하지 못한다고 하는 것은 ‘여덟 가지 도를 배우는 것이 도제다’라고 하였는데, 아라한이 과보를 얻었을 때는 유학(有學)의 여덟 가지 도[八正道]는 버리게 되기 때문이다.
[답] 존자 구사(瞿沙)는 설명하기를,
“자기의 음과 다른 사람의 음, 중생의 수법(數法)과 비중생의 수법, 그 모든 것이 고통이며 이 고통이 고제다.
다만 이 고제를 지혜로 관할 때는 자기의 음(陰)만을 관하는 것이지 다른 사람의 음과 중생들의 수법 및 비중생들의 수법은 관하지 아니한다”라고 하였다.
[문] 왜 그런가?
[답] 그가 지혜로 관한 이 고통이라 하는 것은,
여기서 말하는 다른 사람의 음이나 중생들의 수법이나 비중생들의 수법에서는 고통이 생길 수 없다.
이 다른 사람의 음이나 중생의 수법, 비중생의 수법에는 명근(命根)이 없다.
이런 자기의 음에서 고통이 생기는 것인데, 만약 이 자기의 음이 없다면 다른 사람의 음이나 중생의 수법, 비중생의 수법에서는 당장 무슨 고통이 생기겠는가?
그런 까닭에 자기의 음을 관하고자 지혜가 생겨난 것이다.
경전 안에서 수법에 관하여 설명하기를,
“자기의 음에서 진정한 고통이 생기나니, 다른 사람의 음은 이와 같지 아니하다. 자기의 음에 인하여 다른 사람의 음에서도 고통이 생기는 것이며 다른 음에 인하여 자기의 음에 고통이 생기지는 아니한다.
그런 까닭에 자기의 음을 관하는 것이며 다른 음이나 중생의 수법, 비중생의 수법을 관하는 것이 아니다.
모든 가까이 모여드는 번뇌가 습제(習諦:集諦)다. 다만 관할 때는 자기의 음의 원인만을 관하는 것이지 다른 음이나 중생의 수법, 비중생의 수법을 관하는 것이 아니다.
또한 자기의 음이 다하고 또한 다른 음과 중생의 수법과 비중생의 수법이 다하는 그 모든 것이 다하는 것이 진제(盡諦:滅諦)다.
다만 멸제를 관할 때는 자기의 음이 다하는 것만을 관하는 것이지 다른 음이나 중생들의 수법, 비중생의 수법이 다하는 것을 관하는 것이 아니다.
또한 자기의 음에 얽힌 도(道) 및 다른 음과 중생들의 수법, 비중생의 수법에 얽힌 도, 이 모든 도가 도제다.
다만 이 도제를 관할 때는 자기의 음에 얽힌 도만을 관하는 것이지 다른 음이나 중생들의 수법, 비중생의 수법에 얽힌 도를 관하는 것이 아니다.
이 같은 설법을 빗대어,
“자기의 음 및 다른 음, 중생들의 수법과 비중생의 수법 그 모든 것이 고통이며, 이것이 고제이며 지혜로 관할 때도 그 모든 것을 다 관한다”라고도 일컫게 된다.
[문] 가령 그가 관할 때는 고통을 지혜로 관하는 것인데, 다른 음이나 중생들의 수법, 비중생의 수법에서는 고통이 생기지 아니하는데 어떻게 관하는 것인가?
[답] 설사 고통이 생기지 아니한다고 하더라도 단지 그 모든 지혜가 없는 사람에게는 지혜가 생겨나게 하고자 함이고,
의심이 있는 사람에게는 결정하는 마음이 생겨나게 하고자 함이고,
비방하는 마음이 있는 사람에게는 믿음이 생겨나게 하려는 것이다.
또한 어떻게 다른 사람의 음이나 중생들의 수법, 비중생의 수법에서 나의 고통이 생기지 아니한다고 할 수 있겠는가?
만약 다른 사람이 손으로 나를 때린다면 그때도 나는 고통이 생기지 아니하겠는가?
만약 이와 같이 위쪽에서 나무나 돌이 나의 머리 위에 떨어진다면 그래도 나에게는 고통이 생기지 아니하겠는가?
이런 이유 때문에 자기의 음 및 다른 사람의 음, 중생들의 수법과 비중생들의 수법, 그 모든 것이 고통이며 이것이 고제며 이를 관할 때도 그 모든 것을 관한다고 말한 것이다.
그 모든 것이 고통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또한 자기의 음의 원인과 다른 사람의 음의 원인과 중생의 수벌, 비중생의 수법의 원인, 그 모든 것이 가까이 모여드는 것이다.
습제(習諦:集諦)를 관할 때도 근본과 말단을 남김없이 관하기 때문이다.
또한 자기의 음과 다른 사람의 음과 중생들의 수법, 비중생들의 수법이 다하되, 그 모든 것이 다하는 것이다. 진제(盡諦)를 관할 때 그 지상(止相)을 남김없이 관하기 때문이다.
또한 자기의 음의 도와 다른 사람의 음의 도와 중생들의 수법, 비중생의 수법에 얽힌 도, 그 모든 것이 도이다. 이 도제(道諦)를 관할 때도 그 생사를 벗어나는 도[出要]의 상(相)을 남김없이 관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4제의 성품이니, 이미 그 본연의 종상(種相)에 따라 그 성품을 설법하였으니, 마땅히 행상(行相)을 설명해야 한다.
[문] 무슨 이유로 제(諦:眞理)라 하며 이 진리에 어떤 뜻이 있는가?
[답] 실다운 뜻이 진리의 뜻이다.
뜻을 분별하고 뜻을 분명히 하고 뜻을 뒤바꾸지 않고 뜻이 거짓되지 않은 것이 진리의 뜻이다.
[문] 만약 실다운 뜻이 진리의 뜻이라면 허공이 택멸(擇滅)되지 않는 것도 실답고 분별할 수 있는 것인데. 그것의 경우에는 왜 진리로 내세우지 않는가?
[답] 4제의 법을 종기ㆍ종기의 원인ㆍ종기를 치료하는 것ㆍ종기가 낫는 것이라 생각해 보자.
여기서 종기는 고제에 해당하고 종기의 원인은 습제(習諦)에 해당하고 종기를 치료하는 것은 진제(盡諦)에 해당하고 종기가 낫는 것이 도제에 해당하는지라, 이를 진리라고 내세우는 것이다.
저 허공은 택멸되는 것이 아니기에 그것은 종기가 아니며 종기의 원인도 아니며 종기를 치료하는 것도 아니며 종기가 낫는 것도 아니다. 그런 까닭에 진리라고 내세우지 아니한다.
또 법이란 가시ㆍ가시의 원인ㆍ가시를 떼어 내는 것ㆍ가시를 없애는 것이라고도 말할 수 있겠다.
여기서 가시란 고제에 해당하고 가시의 찌르는 원인은 습제에 해당하고 가시를 떼어 내려는 것은 진제에 해당하고 능히 가시를 없애는 것은 도제에 해당하기에, 그것은 진리라 내세운다.
그러나 저 허공은 택멸이 아닌지라 그것은 가시도 아니며 가시가 찌르는 원인도 아니며 가시를 떼어 내는 것도 아니며 능히 가시를 없애는 것도 아니다. 그런 까닭에 그것은 진리라고 내세우지 않는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법이란 병과 병드는 원인과 병을 치료하는 것과 능히 병이 낫는 것을 말한다.
여기서 병은 고제에 해당하고 병의 원인은 습제에 해당하며 병을 치료하는 것은 멸제에 해당하고 병이 낫는 것은 도제에 해당하기에 그것에는 진리라 내세운다.
그러나 저 허공은 택멸이 아니기에, 그것은 병이 아니고 병드는 원인도 아니며 병을 치료하는 것도 아니며 능히 병이 낫는 것도 아니다. 그런 까닭에 진리라고 내세우지 아니한다”라고 하였다.
또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법이란 재앙과 재앙의 원인, 재앙에서 벗어나는 것, 능히 재앙을 없애는 것을 말한다.
여기서 재앙은 고제에 해당하고, 재앙의 원인은 습제에 해당하고, 재앙에서 벗어나는 것은 진제에 해당하고, 능히 재앙을 없애는 것은 도제에 해당한다.
진리라고 내세우지만 저 허공은 택멸이 아니기에 재앙이 아니며, 재앙의 원인도 아니며, 재앙에서 벗어나는 것도 아니며, 능히 재앙을 없애는 것도 아니다. 그런 까닭에 진리라고 내세우지 아니한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법이란 고통과 고통의 원인, 고통에서 벗어나는 것과 능히 고통을 여의는 것을 말한다.
여기서 고통은 고제에 해당하고 고통의 원인은 습제에 해당하고 고통에서 벗어나는 것은 진제에 해당하고 능히 고통을 여의는 것은 도제에 해당하기에 진리라고 내세우지만,
저 허공은 택멸이 아니기에 고통이 아니며 고통의 원인도 아니며 고통을 벗어나는 것도 아니며 능히 고통을 여의는 것도 아니다. 그런 까닭에 진리라고 내세우지 아니한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법이란 오음과 오음의 원인 오음에서 벗어나는 것, 능히 오음을 여의는 것을 말한다.
여기서 오음은 고제에 해당하고 오음의 원인은 습제에 해당하며 오음에서 벗어나는 것은 진제에 해당하고 능히 오음을 여의는 것은 도제에 해당하기에 진리라 내세우게 되지만,
저 허공은 택멸이 아니기에 오음이 아니며 오음의 원인도 아니며 오음에서 벗어나는 것도 아니며 능히 오음을 여의는 것도 아니다. 그런 까닭에 진리라 내세우지 아니한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이것은 이 쪽 강 언덕과 저 편 강 언덕과 강물과 뗏목을 말한 것이다.
여기서 이 쪽 강 언덕은 고제에 해당하고 저 편 강 언덕은 진제에 해당하며 강물은 습제에 해당하고 강물을 건너가는 뗏목은 도제에 해당하기에 진리를 내세우게 되지만,
저 허공은 택멸이 아니기에 이 쪽 강 언덕과 저 쪽 강 언덕이 있는 것이 아니고 강물이 중간에 가로놓여 있는 것이 아니고 강물을 건너가는 뗏목이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 까닭에 진리라 내세우지 아니한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허공은 택멸이 아니면서 무루(無漏)인 까닭에 고제ㆍ습제에도 포함되지 아니하며 무기(無記)이기 때문에 진제에도 포함되지 아니하며 무위(無爲)이기 때문에 도제에도 포함되지 아니한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허공은 택멸이 아니면서 항상하기 때문에 고제ㆍ집제ㆍ도제에 속하지 않으며 무기(無記)이기 때문에 진제(盡諦:滅諦)도 아니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법이란 즐거운 곳을 연(緣)하는 것이고 나쁜 곳을 연하는 것이기 때문에 진리로 내세우게 되지만,
허공은 택멸이 아니면서 즐거운 곳을 연하지도 나쁜 곳을 연하지도 않는다. 그런 까닭에 진리라 내세우지 아니한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법이란 사견(邪見)의 연이고 또 무루견(無漏見)의 연이라 일컫는다. 그런 까닭에 진리를 내세우게 되지만,
저 허공은 택멸이 아니기에 사견의 연이나 무루견의 연이 아니다. 그런 까닭에 진리를 내세우지 아니한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법이란 원인과 결과를 일컫는다. 따라서 진리를 내세우게 되지만,
허공은 택멸이 아니기에 원인과 결과가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 까닭에 진리를 내세우지 아니한다”라고 하였다.
[문] 만약 전도(顚倒)되지 않은 것이 진리의 뜻이라 한다면, 전도된 것이 진리에 섭수(攝受)되어서는 안 된다. 왜냐 하면 그것은 전도된 것이기 때문이다.
[답] 그 행상(行相)이 전도된 가운데 머물고 있기 때문에 전도라 말하는 것이다.
만약 실다운 종상(種相)을 분별케 된다면, 이와 같은 경우는 진리에 포함된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만약 원인과 결과가 있다면 이 경우에는 진리에 포함된다.
만약 무상(無常)한 것을 영구하다고 헤아리고, 괴로운 것을 즐거움이라 헤아리고, 더러운 것을 청정하다고 헤아리고, 아자재(我自在)가 없는 것을 나는 자유자재하다고 헤아린다면, 이와 같은 것을 전도라고 말한다”라고 하였다.
[문] 만약 그 뜻에 거짓 없음을 진리의 뜻이라 한다면, 헛된 것은 진리에 포함되지 말아야 한다. 거짓된 것이기 때문이다.
[답] 간사하게 남을 녹이는 사람은 오로지 거짓 속에 살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거짓말[妄語]이라고 한다.
만약 그에게도 실종(實種)의 상(相)을 분별하는 것이 있다면 이는 진리에 포함된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가령 원인과 결과가 있다면 이는 진리에 포함된다.
그러나 만약 의지 아니한 것을 보았다고 말하고 본 것을 보지 못했다고 말하며,
듣지 아니한 것을 들었다고 말하고 들은 것을 듣지 못했다고 말하며,
분별하지 못하는 것을 분별한다고 말하고 분별할 수 있는 것을 분별하지 못한다고 말하며
,[비ㆍ설ㆍ신 세 가지의 감정을 총괄적으로 이름한 것이다] 알지 못하는 것을 안다고 말하고 아는 것을 모른다고 말한다면 이것을 거짓말[妄語]이라 한다”라고 하였다.
이를 실다운 뜻이 진리의 뜻이라 일컫는다.
그 뜻을 분별하는 것, 그 뜻을 분명히 하는 것, 그 뜻이 전도되지 않은 것, 그 뜻이 거짓되지 않은 것이 진리의 본뜻에 해당되는 것이다.
[문] 고제에 어떤 모습이 있으며 습제와 진제와 도제에 어떤 모습이 있는가?
[답] 존자 바수밀(婆須蜜)은 설명하기를, “핍박당하는 모습이 고제의 모습이며 근본과 말단[本末]의 모습이 습제의 모습이며 정지(停止)된 모습이 진제의 모습이며 출요(出要)의 모습이 도제의 모습이다”라고 하였다.
다시 설명하기를,
“이미 윤회를 이룬 모습이 고제의 모습이며 곧 윤회를 이를 모습이 습제의 모습이며 윤회의 행상을 여의는 모습이 진제의 모습이며 능히 윤회의 행상을 여읜 모습이 도제의 모습이다”라고 하였다.
그는 다시 설명하기를,
“이미 생사윤회가 이루어진 것이 고제의 모습이며 곧 생사윤회를 이룰 모습이 습제의 모습이며 이미 생사윤회에서 벗어난 모습이 진제의 모습이며 능히 생사의 윤회에서 벗어날 수 있는 모습이 도제의 모습이다”라고 하엿다.
존자 담마다라(曇摩多羅)는 설명하기를,
“여러 존자께서 계시기에 비로소 진리의 상이 나타납니다.
저 오성음(五盛陰)의 언덕은 마치 무쇠로 둘러싸인 것 같으며 세 가지 고통[三苦:苦苦ㆍ行苦ㆍ壞苦] 속에 들어가 그 안에 있으면서 서로 뒤섞이는 것이 마치 무쇠덩어리를 불 속에 던져 넣으면 그 안에 불길이 들어가서 무쇠 빛깔이 불빛과 같이 되는 것과 같습니다.
고제를 지혜로 관하기를 마땅히 이와 같이 하여야 합니다.
이같은 고가 인연 따라 유행(流行)하고[行所轉] 변화하여 생사를 맺고[結所變] 그 세계를 만들어 후유(後有)가 있게 됩니다. 이같은 인연의 결합은 마땅히 습제(習諦) 가운데서 일어난다고 지혜로 관해야 합니다.
이같은 인연 따라 고가 유맹하고 생사를 맺는 것을 여의어 다시 후유(後有)가 없는 이 같은 인연의 결함이 진제라는 것을 지혜로 관해야 할 것입니다.
지관(止觀)을 닦아서 흥쇠법(興衰法)은 인연 따라 없어지는 것을 알게 되면 도제라고 지혜로 관해야 합니다.
그런 까닭에 여러 존자가 계시기에 비로소 진리의 상이 나타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부처님께서 게송으로 말씀하신 것과 같다.
진리는 하나요 둘이 없는데
중생들에게는 갖가지로 의심 생기네.
난타가 모든 진리를 보았다 하여도
나는 사문(沙門)이라고 말하지 않네.
[문] 사제(四諦)의 경우 부처님은 왜 “진리는 하나며 둘이 없다”라고 하셨는가?
[답] 존자 파사(波奢)는 설명하기를,
“하나하나가 진리이기 때문에 부처님은 하나의 진리라고 말씀하셨고 두 개의 진리는 없다고 하셨다.
하나의 진리란 고제(苦諦)는 하나의 속제(俗諦:等諦)며 두 개의 고제는 없고,
또 하나의 진리란 습제는 하나며 두 개의 습제는 없다는 것이며,
또 하나의 진리라 한 것은 진제는 하나며 두 개의 진제는 없다는 것이며,
하나의 진리라 한 것은 도제는 하나며 두 개의 도제는 없다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부처님은 ‘진리는 하나며 두 가지 진리는 없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진리는 하나’라고 한 것은 진제(盡諦)를 말한 것으로 많은 종류의 해탈이 있다는 생각을 끊기 위해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이학(異學)들은 무신해탈(無身解脫)ㆍ무량의해탈(無量意解脫)ㆍ정취해탈(淨聚解脫)ㆍ무상취해탈(無想聚解脫) 등 많은 해탈이 존재한다고 한다.
부처님은 그것이 해탈이 아니며 생사를 벗어나 여읜 것도 아니고, 유일한 최상의 해탈은 진제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것이 부처님이 많은 해탈이 있다는 생각을 끊기 위해서 ‘진리는 하나며 둘이 없다’라고 말씀하신 내용이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하나의 진리’라고 한 것은 도제를 말씀하신 것으로 이는 많은 도가 있다는 생각을 끊기 위하여 하신 말씀이다.
이학들은 먹지 아니하고 덤불 위에서 잠자고 두 손 모아 해와 달의 기운을 들이마시며 나무 열매만 먹고 벌거벗고 살며 가시 위에 누워 잠자고 낡은 풀 옷을 입고 다니는 등 많은 도가 있다고 한다.
이에 부처님은 ‘이런 것은 정도가 아닌 사도이기에 이에 의지해서는 안 되며 바른 사람들이 행할 도가 아니며 악인들이 행하는 도며 오직 하나 최고의 뜻을 지닌 도는 도제뿐’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것이 부처님이 많은 도가 있다고 헤아리는 생각을 끊기 위하여, ‘진리는 하나며 둘은 없다’고 말씀하신 내용이다”라고 하였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경전에 따르면, 두 가지 진리[滅諦ㆍ道諦]란 등제(等諦)와 제일의제(第一義諦)인 것이다.
[문] 어떤 것이 등제이고 어떤 것이 제일의제인가?
[답] 등제(等諦)란 고제와 습제가 여기로 섭입되는 것을 말한다.
즉 여자건 남자건 어린 사내아이건 어린 계집아이건 혹 오기도 하고 가기도 하며 앉아 있기도 하고 머물기도 하는 등 온갖 행동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제일의제라 한 것은 진제와 도제를 말한 것이다.
또 다르게 설명하면 등제라 한 것은 고제ㆍ습제ㆍ진제의 세 가지 진리라고 하기도 한다.
그것은 진제도 역시 성(城)이 나타나고 강 건너 저 편 언덕이 나타난 것과 같다고 말한다.
제일의제(第一義諦)란 도제를 말한 것이다.
이와는 다른 설명이 있으니,
4제(諦) 모두가 등제인 동시에 제일의제라고 말한다.
그것은 도제도 역시 강을 건너가는 뗏목과 같고 산(山)과 같다고 관한다. 그런 까닭에 4제 모두가 다 같이 등제이며 또한 제일의제라고 말하는 것이다.
고제ㆍ습제 가운데서 등제라는 것은 알에서 말한 바와 같이 여자ㆍ남자ㆍ어린 사내아이ㆍ어린 계집아이가 혹 오기도 하고 가기도 하고 앉아 있기도 하고 머물기도 하는 등 온갖 행동으로 나타나지만 그것이 모두 다 같인 고제와 습제에 포함된다는 것이고,
그 모든 것이 제일의제라고 하는 것은 그 모두가 무상(無常)하고 공(空)이며 무아(無我)이기 때문에 제일의제라고 하는 것이며, 인이 모여서 연(緣)이 있는 것이다.
또 진제(盡諦) 가운데서 등제라고 하는 것은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이 정원ㆍ피안(彼岸)ㆍ성을 관찰하는 것을 말한다.
삼야삼불(三耶三佛:三藐三佛, 부처님의 십호의 하나)이 말씀하신 제일의제란 번뇌가 멎어 미묘하게 여의었기 때문에 제일의제라고 하신 것이다.
또한 도제, 등제라고 하는 것은 경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도제란 강물을 건너는 뗏목과 같고 큰 바위와 같고 간과 같아서, 일곱 가지 꽃이 생기고 여덟 가지 공덕수(功德水)를 이루는 것이며 제일의제라 하는 것은 도는 생사를 벗어나는 바른 길이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모든 4제(諦)가 그 취(趣)에 있어서 등제이며 또한 모두가 제일의제로 나아가게 되는 것[趣]이다.
[문] 만약 4제 모두가 등제를 일으키고 제일의제를 일으킨다면 그것은 다 같이 18계(界)와 12입(入)과 5음이 존재하여야 할 것이며 제일의제에도 응당 18계ㆍ12입ㆍ5음이 있어야 할 것이니, 그렇다면 등제와 제일의제에 어떤 차별이 있는가?
[답] 존자 바수밀은 설명하기를,
“등제(等諦)란 제법의 이름을 말한 것이며,
제일의제란 제법의 성품을 말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는 거듭 설명하기를,
“등제란 세속의 수법(受法)을 말한 것이며,
제일의제란 현인ㆍ성인의 수법을 말한 것이다.
이것이 등제와 제일의제의 차이점이다”라고 하였다.
[문] 그것은 제일의제와 등제 중에서도 제일의제인가, 그런 것이 아닌가?
만약 제일의제와 등제 중에서 제일의제라 한다면 응당 하나의 진리만이 있어서 그것이 제일의제일 것이며 2제(諦)는 없어야 말 것이다.
또 만약 등제가 제일의제 가운데서 제일의제가 아니라고 한다면 역시 하나의 진리만이 있어서 그것이 제일의제요, 2제(諦)는 없어야 할 터인데도 논서에는 이를 말했다.
[답] 제일의제와 등제 중에서도 바로 제일의제가 된다.
등제(等諦)는 제일의제 가운데서는 제일의제가 아니라고 한다면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2제도 진실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진실된 것에 두 가지가 있다고 말씀하셨으니 그런 까닭에 등제도 제일의제 가운데 제일의제임을 알 수 있다.
[문] 만약 등제도 제일의제 가운데 제일의제라고 한다면 마땅히 하나의 진리만이 있어야 할 것이며 그것이 바로 4일의제일 터이니 2제는 없어야 할 것 아닌가?
[답] 그렇다. 하나의 진리만이 제일의제의 진리다.
[문] 만약 이것이 하나의 진리며 제일의제라고 한다면 부처님은 왜 2제를 말씀하셨는가?
[답] 인연사 때문에 부처님은 2제를 말씀하셨다.
만약 어떤 인연사가 등제에 속한다면 이 인연사는 제일의제가 아니며 또 어떤 인연사가 제일의제에 속한다면 이 인연사는 등제가 아니다.
예를 들면 한 가지 아프다는 감각[痛]을 네 가지 인연으로 설명한다.
즉 인연(因緣)ㆍ차제연(次第緣)ㆍ증상연(增上緣)ㆍ소연연(所緣緣) 등 네 가지 인연이 그것이다. 비록 하나의 아픈 감각이지만 그 원인은 네 가지 인연으로 설명한다.
만약 어떤 일[事]이 인연에 의해 일어났다면 이 일은 소연연ㆍ차제연ㆍ증상연이 아니고 만약 어떤 일이 증상연에 의해 일어났다면 이 일은 인연ㆍ소연연ㆍ차제연이 아니다.
이와 같이 한 가지 감각을 여섯 가지 원인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즉 상응인(相應因)ㆍ공유인(共有因)ㆍ자연인(自然因)ㆍ일체변인(一切遍因)ㆍ보인(報因)ㆍ소작인(所作因) 등 여섯 가지가 그것이다.
이렇게 그것이 비록 한 가지 아픈 감각이라 하더라도 그 원인은 여섯 가지로 설명되는 것이다.
오직 어떤 일이 상응인으로 일어난 것이라면 이 일은 다른 원인 즉 소작인(所作因) 등의 다섯 가지 원인으로 생긴 일이 아니며,
또 만약 어떤 일이 소작인으로 생긴 일이라면 이 일은 다른 다섯 가지 원인으로 생기는 일이 아니다.
이와 같이 하나의 진리가 제일의제인 것이다.
만약 어떤 일이 등제에 속하는 일이라면 이 일은 제일의제가 아니며,
또 만약 어떤 일이 제일의제에 속하는 일이라면 이 일은 등제가 아니다.
존자 다라난제(陀羅難提)는 설명하기를,
“성질과 명칭으로 보면 등제(等諦)는 고제(苦諦)ㆍ집제(集諦)에 포함된다.
부처님의 계경에서 말하기를,
”이학(異學)의 바라문(婆羅門)에도 세 가지 진리가 있다.
어떤 것이 세 가지 진리인가?
이 이학(異學)인 바라문이 다른 바라문에게 말하기를,
‘모든 중생들을 해치지 아니한다’라고 하였을 경우,
이것을 이학인 바라문이 다른 바라문에게 말하는 첫 번째 진리라고 한다.
또한 이학인 바라문이 다른 바라문들에게,
‘나는 다른 사람에게 해주는 일도 없고 다른 사람도 나에게 해주는 일도 없다’라고 이렇게 하였을 경우,
이것이 이학인 바라문이 다른 바라문에게 말하는 두 번째 진리다.
또한 이학인 바라문이 다른 바라문에게,
‘습법(習法)은 진법(盡法)이다’라고 이렇게 하였다면,
이것이 이학인 바라문이 다른 바라문에게 말하는 세 번째 진리에 해당된다”라고 하였다.
[문] 이 가운데 무엇을 바라문이라 말하며 무엇이 진리인가?
[답] 바라문이란 외도의 법이고 진리란 곧 이 세 가지며 나머지는 모두가 허망한 것이다.
이와는 다르게 해석하는 사람도 있으니,
그 해석에 따르면, 여기서 바라문이라 한 것은 내법(內法)을 말한 것이며 진리라고 한 것은 곧 이 세 가지다.
부처님의 선법은 이학들의 생각을 끊기 위하여 이학이 스스로 말한 형식을 빌리신 것이다.
이 바라문들은 늘 다른 사람을 억압하고 재촉하여 재(齋)를 지내게 하기 때문에 소를 죽이기도 하고 양을 죽이기도 하고 닭과 돼지를 죽이기도 하며, 또한 온갖 중생들을 죽이는 것으로 재를 지내기 때문에,
부처님께서 “다른 사람을 핍박하고 재촉하면 바라문이 아니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즉 “모든 중생들을 해치지 아니하는 것이 제일의제이다”라고 하여,
바라문인 이학이 스스로 말한 형식을 취한 것이다.
또한 이 바라문들은 구하는 바가 있기 때문에 범행을 수행하고, 천녀(天女)와 하늘 음식[天食]을 위하여 수행을 한다.
이에 부처님께서, “구하는 바가 있어서 범행(梵行:淸淨行)을 수행하는 것은 바라문이 아니다”라고 하신 것이다.
즉 “집착하는 것이 없고 사랑하는 것이 없고 구하는 바가 없이 청정행을 행하는 것이 제일의제다”라고 하여,
바라문인 이학이 스스로 말하는 형태를 취하신 것이다.
또한 이 바라문들은 단멸(斷滅)하는 것을 영구불변한 것으로 헤아리기 때문에,
부처님께서 “만약 단멸하는 것을 영구불변하는 것으로 집착한다면, 이는 바라문이 아니다”라고 하신 것이다.
즉 “모든 습법은 모두가 진법이다. 이것이 제일의제를 아는 바라문이다”라고 한 것이다.
이것을 두고 “바라문이라 표현한 것은 불교의 내법(內法)을 말한 것이고 진리는 곧 이 세 가지다”라고 하는 것이니,
부처님이 계경에서 말씀하신 뜻은 이학들의 생각을 끊기 위한 것이었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이 가운데서는 법신(法身)을 세 가지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즉 계신(戒身)과 정신(定身)과 혜신(慧身)이 그것이다.
그 경에서,
‘모든 중생들을 해치지 아니한다’라고 한 것은 계신을 말한 것이며
‘나도 다른 사람을 위하지 아니하고 다른 사람도 나를 위하지 아니한다’라고 한 것은 정신(定身)을 말한 것이며
‘모든 습법은 모두가 진법이다’라고 한 것은 혜신을 말한 것이다.
세 가지 법신의 설명과 같이 세 가지 계율[三戒:八戒ㆍ具足戒ㆍ五戒]에 빗대어 설명하거나, 세 가지 사유[三思惟:審慮思ㆍ決定思ㆍ動發勝思]에 빗대어 설명할 경우에도 역시 그렇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이 가운데서 말하고 있는 것은 공(空)ㆍ무원(無願)ㆍ무상(無相)의 세 가지 삼매에 드는 방편이다.
즉 ‘모든 중생들을 해치지 아니한다’는 것은공삼매(空三昧)의 방편이며,
‘내가 다른 사람을 위하지 아니하고 다른 사람도 나를 위하지 아니한다’라고 한 것은 무원삼매(無願三昧)의 방편이며,
‘모든 곳에 모여드는 존재는 다 없어진다’고 한 것은 무상삼매(無相三昧)의 방편을 말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이 가운데서 말하고 있는 것은 공ㆍ무원ㆍ무상의 근본 삼삼매(根本三三昧)다.
‘모든 중생들을 해치지 아니한다’는 것은 공삼매를 말한 것이며,
‘내가 다른 사람을 위하지 아니하고 다른 사람도 나를 위하지 아니한다’라고 한 것은 무원삼매를 말한 것이며,
‘모든 모여드는 존재는 다 없어진다’라고 말한 것은 무상삼매를 말한 것이다.
그런 까닭에 이 가운데서 말하고 있는 것은 근본 삼삼매를 말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부처님 계경에 따르면 이는 자기가 맹하는 바른 행일지니 이른바 4제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다.
[문] 왜 자기의 바른 행이라 말하는가?
[답] 자기의 행이라 하는 것은 자기가 닦는 도의 수행이며 다른 사람에 인연하여 닦는 도가 아니다. 이것을 자기의 바른 행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문] 어떻게 아는가?
[답] 부처님의 계경에 나와 있다. 계경 중에 어떤 두타행(頭陀行)을 닦는 바라문[梵志]이 부처님 계신 곳에 찾아와 게송으로 말하였다.
내가 세상의 천상 세계와 인간 세계를 관찰해 보았으나
바라문의 수행에 의지한 곳 없었네.
나는 지금 부처님께 예배하오니
저를 미혹케 하는 가시덤불을 없애주소서.
[문] 이 바라문이 말한 것은 무엇인가?
[답] 그 바라문은 게으른 사람이다. 그는 부처님 계신 곳에 찾아와서는,
“사문 구담씨가 나를 위하여 도를 닦았으니, 나의 생각 속에 결사(結使:번뇌)가 다하게 하여 주시오”라고 말한 것이다.
이에 부처님께서는 그를 위하여 게송을 말씀하셨다.
나는 그대를 해탈시킬 수 없네.
바라문과 다른 세속 사람들이여
만약 지극히 미묘한 도를 알게 된다면
그대가 이 흐름을 건너갈 수 있네.
[문]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무엇인가?
[답] 부처님은 바라문에게 다른 사람이 닦은 도를 원인하여 자신의 결사(結使)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 것이다.
“바라문이여, 다른 사람이 닦은 도를 원인하여 그대의 결사가 다 없어지게 할 수 있다면 내가 보리수나무 밑에 앉아 있었을 때 모든 중생들이 모두가 그 결사가 다 없어졌을 것이다. 나는 모든 중생들에 대하여 지극히 대비(大悲)한 마음이 있었느니라.
바라문이여, 오직 다른 사람이 닦은 도를 원인하여 그대의 결사가 다 없어지게 할 수는 없다.
바라문이여, 마치 자신이 병들었을 때 자신이 약을 복용하는 것과 같나니 다른 사람이 약을 복용함으로 인하여 자기의 병이 치유되는 것은 아니다.
바라문이여, 이와 같이 자기에게 결사라는 이름의 병이 있으면 성도(聖道)라는 이름의 약을 자기가 복용해야 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이 성도라는 약을 복용함으로 인하여 자기의 결사병이 낫게 되는 것이 아니다.
만약 바라문이 약을 복용하고 나서 병이 낫게 되었다면 이러한 바라문에게는 자기가 갖고 있던 길사의 병을 성도의 약을 복용함으로써 낫게 된 것이다”라고 하신 것이다.
이것으로 경전에서 말씀하신 ‘스스로 수행해야 하는 4제(諦)’는 다른 사람이 수행함으로써 얻어지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런 까닭에 ‘자기의 바른 수행’을 말하게 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바르지 아니한 것을 바른 곳으로 들어가게 하는 까닭에 ‘자기의 바른 행’이라 말한 것이다.
여기서 바르지 아니하다는 것은 범부(凡夫)가 그것이며, 바르다는 것은 성인의 도가 그것이다.
이는 바르지 아니한 범부로 하여금 바른 도의 과보에 들어가게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자기의 바른 행’이라 말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바른 것을 바른 도로 들어가게 하는 까닭에 ‘자기의 바른 행’이라 말한 것이다.
첫 번째 바르다는 것은 세간제일법을 말하는 것이며 다음에 바른 도라 한 것은 고법인(苦法忍)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자기의 바른 행’이라 말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문] 왜 성제(聖諦:四諦)를 사기의 바른 수행이라 말하고 18계ㆍ12입ㆍ5음을 말하는 것은 아니라고 하는가?
[답] 이 성제(聖諦)라 하는 것은 최상의 교화를 받는 사람을 말하며 또한 최상의 경계를 말하는 것이다.
처음 수행하는 사람을 위하여 12입(入)을 설명하고 조금 행을 익힌 사람을 위하여 5음(陰)을 설명하지만, 이미 행을 이룬 사람을 위하여 이 4제(諦)를 설명한다.
이 사성제는 법신으로 나아가는 진리이다. 즉 사성제의 인견(忍見)에 가까이 간 사람을 말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성인의 진리를 설명한다는 것은 증지(證知)하여 과보를 얻어서 결사를 보두 제거하제 하는 일이며, 이는 18계ㆍ12입ㆍ5음에 해당하는 일이 아니다.
그런 까닭에 사제를 ‘자기의 바른 행’이라 말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문] 사성제(四聖諦)라 하는 것은, 어찌하여 사성제라 내세우며 그것으로 근본을 삼는가?
이는 인과(因果)를 위한 것인가? 아니면 관(觀)을 위한 것인가?
만약 근본을 말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마땅히 3제(諦)만이 존재해야 할 것이다.
즉 고통에서 벗어나면 습제(習諦)는 없게 되고, 가까이 모여드는 것을 벗어나면 고제(苦諦)는 없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고제가 하나의 제로 성립되고, 진제(盡諦)가 두 번째 제에 해당하고, 도제(道諦)가 세 번째 제에 해당하는 것이다.
또 만약 이것이 인과에 얽힌 일이라고 한다면 마땅히 5제가 있어야 할 것이다.
가령 고통에 원인이 있으면 결과가 있게 되니, 이것이 두 가지 제로 나누어지고,
도제에도 역시 원인과 결과가 있게 되니 두 가지 제로 분류되어,
이렇게 4제가 성립되고 여기에 진제가 다섯 번째 제11 해당하는 것이다.
또 만약 관을 말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마땅히 8제가 있어야 할 것이다.
즉 먼저 욕계의 고제를 관하고, 뒤에 색계와 무색계의 고제를 관하며, 또 먼저 욕계의 행(行)과 멸(滅)을 관하고, 뒤에 색계ㆍ무색계의 행과 멸을 관하며, 또한 먼저 욕계에 행해지는 도를 관하고, 뒤에 색계와 무색계에서 행해지는 도를 관하게 되는 것이다.
[답] 인과 때문에 사제(四諦)가 세워지는 것이다.
[문] 만약 그렇다면 마땅히 5제가 있어야 한다.
가령 고제에도 원인이 있고 결과가 있다.
저 모든 ‘고가 모이는 곳으로 나가는 길,’ ‘유(有)가 모이는 곳으로 나가는 길’, ‘탐욕이 모이는 곳으로 나가는 길’, ‘생사윤회로 나가는 길’이 있는데,
이처럼 도제에도 원인과 결과가 있어서 거기에는 모든 ‘고통이 다하는 곳으로 나아가는 길’과 ‘유가 다하는 곳으로 나아가는 길’과 ‘탐욕이 다하는 곳으로 나아가는 길’과 ‘생사윤회가 다한 곳으로 나아가는 길’이 있다.
그런데 어떻게 원인과 결과 때문에 4제가 세워진다고 하는가?
[답] 세 가지 일, 즉 유루와 무루[有漏無漏]ㆍ원인과 결과[因果]ㆍ비방과 믿음으로 인하여 4제(諦)가 세워지는 것이다.
이 4제에는 두 종류가 있다. 즉 유루와 무루의 두 종류가 그것이다.
이 가운데 유루의 사제에는 원인과 결과가 있는데,
유루의 원인이라 하는 것, 거기에 하나의 제인 습제(習諦:集諦)가 세워진다. 이것은 유루에 결과가 있어서 두 가지 제(諦)가 세워진다고 하는 것이다.
또한 고제가 무루의 종자가 되는 경우에는 원인과 결과가 있다.
즉 무루에 원인이 있고 결과가 있는 것에 하나의 제인 도제가 세워진다.
또한 무루에 결과만 있고 원인은 없는 것에 두 번째 제인 멸제가 세워진다.
[문] 무루의 종자에 원인이 있고 결과가 있다고 한다면, 무슨 까닭으로 하나의 진리만을 세우는가?
[답] 비방과 믿음의 차별 때문이다.
이 고제에 두 가지 종류의 비방이 있다. 여기에는 고통도 없고, 모여드는 것[習]도 없다고 하는 비방이다. 이와 같은 가운데서 일어나는 비방의 경우 거기에 상응하게 두 종류의 믿음도 일어나게 된다.
또한 도제(道諦)에도 원인이 있고 결과가 있다. 거기에서는 모든 비방이 ‘도는 없다’는 동일한 비방이 되는데, 이 동일한 비방이 일어날 경우 응당 하나의 믿음도 일어나게 된다.
이러한 일을 두고 유루ㆍ무루의 차별 때문에, 또 원인과 결과의 차별 때문에, 또 비방과 믿음의 차별 때문에, 4제가 세워진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와 다르게 설명하기도 하는데,
즉 관에 인연하기 때문에 4제가 세워진다는 견해가 그것이다.
그들은 말하기를,
“욕계의 고통과 색계ㆍ무색계의 고통, 그 모든 고통은 동일한 관(觀)에 속한다. 핍박당하는 한 모습이기 때문이다.
또한 욕계에 행해지는 원인과 색계ㆍ무색계에 행해지는 원인도 동일한 관에 속한다. 본말(本末)이 갉은 하나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또한 욕계에 맹해지는 고제가 다하게 되고 색계ㆍ무색계에 행해지는 고통이 다하게 되는 것도 그 모든 것이 동일한 관에 속한다. 하나의 중지된 모습이기 때문이다.
또한 욕계에서 행해지는 도와 색계ㆍ무색계에서 행해지는 도도 동일한 관에 속한다. 다 같이 생사윤회에서 벗어난 모습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두고 동일한 관(觀)이기 때물에 사성제를 세우는 것이라고 말한다.
[문] 어떤 것이 사성제(四聖諦)인가?
선근(善根)을 말하는 것인가?
무루인 까닭에 성스럽다고 하는가?
아니면 성인이 성취한 바를 말하는 것인가?
만약 선근을 말한 것이라고 한다면 이 성제(聖諦)에는 마땅히 2제(諦)만이 존재하여야 할 것이니, 즉 거룩한 멸제와 도제의 두 진리가 그것이다.
선과 악ㆍ무기의 세 가지 근은 고제와 집제가 여기에 해당된다.
또 만약 무루의 성스러움이 사성제라고 한다면 곧 두 가지 진리만이 존재하여야 할 것이니, 즉 무루의 진제와 도제가 그것이다. 고제와 집제의 두 가지는 무루이기 때문이다.
또 만약 성인이 성취한 바를 4제라고 한다면 성인이 아닌 사람도 역시 성취할 수 있다.
경에서 말하기를,
“누가 고제와 집제를 성취하는가?”라는 물음에,
대답하기를,
“모든 중생들이 성취한다”라고 하였다.
[답] 성인이 성취한 바를 사성제(四聖諦)라 한다.
[문] 성인이 아닌 사람도 역시 성취한다.
경에서 말하기를,
“누가 고제ㆍ집제를 성취하는가?”라는 물음에,
“모든 중생들이 성취한다”라고 하였다.
[답] 일체의 사성제를 성취한다고 하는 것은 곧 성인이다.
성인이 아닌 사람은 비록 성취하는 것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일체의 사성제를 모두 성취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 까닭에 성인이라 말하지 아니한다.
[문] 성인의 경우도 사성제를 성취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즉 속박을 갖춘 채 고법인(苦法忍) 가운데 들어가는 것이 그것이다.
[답] 잠시 후에 상지(上地)의 고법지(苦法智)가 생기게 되면 모든 사성제를 성취하게 된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이것은 성인만의 도리이며 성인만이 아는 것이며 성인만이 되는 것이며 성인만이 깨닫는 것이며 성인만이 관하는 것이며 성인이 깨닫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성인의 진리[聖諦]’라 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성인의 계율을 얻은 사람이 성인이니, 그 성인에게는 이 진리[諦]가 존재한다. 그런 까닭에 성제라 말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성인의 재물[財]을 얻은 사람이 성인이니, 그 성인에게는 이 진리가 존재한다. 그런 까닭에 성제라 말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성인이라 하는 것은 지관(止觀)을 얻은 사람이 성인이니, 그 성인에게는 이 진리가 존재한다. 그런 까닭에 성제라 말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성인의 법인(法印)을 얻은 사람이 성인이니, 그 성인에게는 이 진리가 존재한다. 그런 까닭에 성제라 말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존자 승가바수(僧伽婆修)는 설명하기를,
“그때 범인이 성인과 함께 논쟁을 벌였는데, 범인은 아자재(我自在)하다고 말하고 성인은 아자재가 아니라고 말하였다.
또 성인은 이것을 즐거움[樂]이라 말하고 성인은 괴로움이라고 말하였다.
또 범인은 무인(無因)과 부정인(不正因)을 주장하였고 성인은 유인(有因)과 정인(正因)을 주장하였다.
그들은 함께 다투다가 부처님 계신 곳에 이르러 이러한 내용을 아뢰었더니,
부처님의 말씀은 성인의 말과 같았으며 이것은 성인의 도리이기에 성인만이 알고 성인만이 보며 성인만이 터득하고 성인만이 관하며 성인이 깨닫는 것이라 하셨다”라고 하였다.
[문] 만약 설명한 내용과 같다면 항하의 모래알처럼 수많은 모든 삼먁삼불(三藐三佛) 그 모두에게 말다툼의 소지가 있는 것인가?
아니면 이 일은 논하지 아니하고 이렇게 널어 두는 것이 좋은 것인가?
[답]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성인만이 밝히고 성인만이 알고 성인만이 보고 성인만이 터득하고 성인이 관하고 성인이 깨닫는 것이기 때문에 사성제라 말하는 것이다.
어떤 것이 네 가지 성제인가?
고성제(苦聖諦)와 고습성제(苦習聖諦)와 고진성제(苦盡聖諦)와 고진도제(苦盡道諦)가 그것이다.
어떤 것이 고성제인가?
태어나는 고통ㆍ늙는 고통ㆍ병드는 고통ㆍ숙는 고통ㆍ원수진 이와 미운 이를 만나는 고통ㆍ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고통ㆍ구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고통일지니 줄여서 말하면 5성음(盛陰)의 고통이 그것이다.
그 가운데 태어나는 고통[生苦]이라 한 것은 인연은 모두가 고통이기 때문이다.
늙는 고통[老苦]이라 한 것은 젊고 건장한 모습이 변하기 때문이다.
병드는 고통[病苦]이라 하는 것은 경계가 단절되기 때문이다.
죽는 고통[死苦]이라 한 것은 큰 근심이며 슬픔이기 때문이다.
원수진 이와 미운 이를 만나는 고통[怨憎會苦]이라 한 것은 절실히 싫고 밉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고통[愛別離苦]이라 한 것은 생각하고 잊지 못하는 것과 서로 어긋나기 때문이다.
구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고통[求不得苦]이라 한 것은 바라던 생각이 끊어지기 때문이다.
간략히 말해 5성음(盛陰)의 고통이라 한 것은 모든 고통의 근거가 되기 때문이다.
또한 태어나는 고통이라 한 것은 고통의 시작이기 때문이고,
늙는 고통이라 한 것은 안색이 쇠퇴하기 때문이며,
병드는 고통이라 한 것은 모든 일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고,
죽는 고통이라 한 것은 번뇌의 열(熱)이 많기 때문이다.
원수진 이와 미운 이를 만나는 고통이라 한 것은 좋지 못한 꼴을 보기 때문이고,
또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고통이라 한 것은 만나서 기쁜 대상과 어긋나기 때문이며,
구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고통이라 딴 것은 좋은 바람이 단절되기 때문이다.
간략히 말해서 5성음의 고통이라 한 것은 그 모든 고통이 이것에 근거하여 굴러가며, 이것에 근거하지 않는 것이 아닌 까닭에 ‘간략히 말하면 오성음의 고통이다’라고 말한 것이다.
[문] 5성음(盛陰)의 경우 그것은 모한 광범위한 고통인데 왜 부처님은 ‘간략히 말해서 5성음의 고통’이라 말씀하셨는가?
[답] 그것은 줄여 말해도 고통이고 넓혀서 말해도 고통이다.
다만 그 고통이 많기 때문에 부처님께서 ‘줄여서 말하면 5성음의 고통이다’라고 하신 것이다. 즉 고통으로 인한 병폐가 많기 때문이다.
비유하면 마치 도적의 우두머리를 남이 보지 않는 곳에서 야단치든지 여럿이 보는 앞에서 야단치든지 모두 그 후환이 큰 것과 같다.
이와 같이 5성음은 줄여도 역시 고통이고 넓혀도 역시 고통이다.
다만 부처님이 ‘간략히 말하면 오성음의 고통이다’라고 하신 것은 고통에 수반한 병폐가 많기 때문이다.
[문] 5음 가운데 즐거움도 있는가?
만약 5음 가운데 즐거움이 있다면 왜 부처님은 고제(苦諦)만을 설법하시고 낙제(樂諦)에 관한 말씀은 없는가?
만약 5음 가운데 즐거움이 일다고 한다면 어떻게《마하남경(摩訶男經)》에서 하신 말씀과 통할 수 있는가?
《마하남경》에 이르기를,
“만약 색이 오로지 고통이며 즐거움이 아니라고 한다면 즐거움과 기쁨은 오래 되면 기쁘지 않을 것이다.
마하남아, 이것은 중생들이 색에 집착케 하는 원인이 아니기에, 중생들이 색에 집착하지 않을 것이다.
마하남아, 만약 수(受)ㆍ상(想)ㆍ행(行)ㆍ식(識)이 오로지 고통이요, 즐거움이 아니라고 한다면 즐거움과 기쁨이 오래 되면 즐겁지 않을 것이다.
마하남아, 이것은 중생들로 하여금 식에 집착케 하는 원인이 아니기에 중생들이 식에 집착하지 않게 될 것이다.
마하남아, 만약 색이 오로지 고통만이 아니고 즐거움이라면, 즐거움과 기쁨이 오래도록 그 즐거움을 잃지 않을 것이다.
마하남아, 이것은 중생들이 색에 집착케 하는 원인이기에 이로써 중생들은 색에 집착하게 될 것이다.
마하남아, 가령 수ㆍ상ㆍ행ㆍ식이 오로지 고통만이 아니고 즐거움이라면 즐거움과 기쁨이 오래도록 그 즐거움을 잃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중생들로 하여금 수ㆍ상ㆍ행ㆍ식에 집착케 하는 원인이기에, 이로써 중생들은 수ㆍ상ㆍ행ㆍ식에 집착하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또한 다음으로 수(受)의 즐거움과 괴로움과 즐겁지도 괴롭지도 아니한 세 가지 감각을 설법하셨다. 만약 고제(苦諦)의 5음 가운데는 즐거움이 없다고 한다면 이 논서에서 어떻게 이 두 가지 경의 내용과 통한다고 하는가?
[답] 누군가 “5음 가운데 즐거움도 있다”라고 설명하였다.
그러자(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만약 5음 안에 즐거움도 있다면 그것은 마하남경의 내용과는 잘 통할 수 있으나 이 경의 내용과는 어떻게 통할 수 있겠는가?
이 경에서는 왜 고제(苦諦)만을 설명하고 낙제(樂諦)는 말하지 아니하였는가?”라고 물었다.
대답하기를,
“비록 5음 가운데 즐거움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단지 적기 때문에 고제의 몫 속에 포함시켜 내세운 것이다.
비유하면 마치 독이 든 병에 한 방울의 꿀물을 그 속에 떨어뜨린다고 하더라도 한 방울의 꿀물로 인해서 독이 든 병을 꿀병이라 부를 수는 없는 것과 같다.
오직 독이 많기 때문에 독병이라 부르나니 결코 꿀병은 아니다.
이와 같이 비록 5음 가운데 즐거움이 있다 하더라도 다만 그 분량은 적기 때문에 고제의 몫 속에 포함시켜 고제라고 내세울 것이다”라고 하였다.
또 “5음 가운데 즐거움은 없다”라고 말하기도 한다.
[문] 만약 5음 가운데 즐거움이 없다고 한다면 이 경의 내용은 통용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까닭에 ‘고제 가운데 낙제는 없다’라고 말하였지만, 그러나《마하남경(摩訶男經)》의 내용과는 어떻게 통용될 수 있는가?
[답] 여기서 말한 것은 속인(俗人)들의 수법인 동시에 또한 성인의 수법도 말한 것이다.
속인들의 수법인 경우는 5음 가운데도 즐거움이 있을 수 있다.
가령 길을 걸어가다가 피로할 때 조금 쉬게 되면 문득 “즐겁다”라고 말하게 되고,
또한 추울 때 조금 뜨거운 것을 얻으면 문득 “즐겁다”라고 말하게 되고,
또 더울 때 조금 시원한 것을 얻으면 문득 “즐겁다”라고 말하게 되고,
또 배고플 때 조금 먹을 것을 얻게 되면 문득 “즐겁다”라고 말하게 되고,
목마를 때 조금 마실 것을 얻게 되면 문득 “즐겁다”라고 말하게 되는 것이 여기에 해당한다.
성인의 수법인 경우는 이와 같은 5음 중에 즐거움은 없다.
성인의 경우에는 지옥 가운데서 18계ㆍ12임ㆍ5음이 불길처럼 타오르고 있음을 관하고,
이는 유정천(有頂天)에 이르기까지도 역시 그렇게 관한다.
이와 같이 속인의 수법인 경우는 5음 중에 즐거움이 있으나 성인의 수법인 경우 5음 중에 즐거움은 없다.
그렇다면 어째서 고습애습성제(苦習愛習聖諦)에서는 이 애착은 애락(愛樂)이 함께 하기를 바라는 미래의 욕망이 된다고 하였을까?
[문] 아비담(阿毘曇)에서 말했다.
집제는 어찌하여 유루(有漏)에 인연하며, 부처님은 어째서 미래에 있게 되는 애착의 유루 종자만을 집제로 세웠는가?
[답] 이 애착심을 집제로 내세울 때는 유루의 종자를 거두어 받아들이게 된다. 그런 까닭에 부처님은 미래에 있게 되는 애착의 유루 졸자만을 집제로 내세우긴 것이다.
예를 들면 생각에서 행(行)이 세워질 때 행의 종자를 거두어 받아들이게 된다. 그런 까닭에 부처님은 일체의 상응ㆍ불상응의 행음(行陰) 가운데에서 하나의 심소(心所)를 행음이라 내세우신 것이다.
이와 같이 이 애착심을 집제(集諦)로 내세울 때는 그 종자를 거두어들여서 받아들이게 된다. 그런 까닭에 부처님은 미래에 있게 되는 애착의 모든 유루(有漏)의 종자를 집제라 내세우신 것이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애착심이라 하는 것은 과거와 미래와 현재에 해당하는 것이며 고(苦)가 근본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들의 설명에 따르면, 이 애착심은 과거와 미래와 현재의 고의 근본 원인인지라 장차 연을 이루면 습(習)이 함께 생긴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애착심이라 하는 것은 자주 바뀐다. 그것이 고통이 되었을 때 더욱 불어나게 하는 주체가 된다.
그들은 게송으로 말하였다.
나무 뿌리 뽑지 않고
자르기만 한다면 도로 나무 생기듯
애착의 근본 뽑아내지 아니하면
다시금 고통을 받게 된다.
이것은 애착이 자주 고통으로 바뀌어져서 더욱 불어나는 고통의 주체가 되는 것을 말한 것이며 그런 까닭에 그렇게 읊은 것이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애착을 설명하면 어머니와 같나니, 게송에서 설한 바와 같다.
애착 속에 태어난 대장부
그 마음 중생 향해 달려가
생사 속에 들어가서
고통을 받게 되니 매우 공포스럽네.
이것은 애착을 고통의 어머니와 같다고 보았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애착이라 하는 것은 남자ㆍ여자의 종자이며 종자가 생겨나서 자라나고 길러내는 것을 말한다.
즉 이 중생들이 동서남북으로 향해 달려감으로써 부모와 처자ㆍ노비(奴婢)들을 공양하게 되는 것은 모든 것이 애착에 말미암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새가 한 산골에서 벌레를 죽어 가지고 돌아와서 새끼를 기르는 일과 같다.
이 모든 것이 모두 애착 때문에 생기는 일이며, 이것을 곧 남자ㆍ여자의 종자가 생겨나 자라나고 길러지는[長養] 일이라 말한다. 그런 까닭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애착이라 하는 것은 중생의 수법과 비중생(非衆生)의 수법(受法)으로 생겨나고 자라나고 길러지는 것을 말한다.
즉 이 중생들이 코끼리ㆍ말ㆍ낙타ㆍ소ㆍ노새ㆍ당나귀ㆍ돼지ㆍ양ㆍ노비를 길러 내고 또 금ㆍ은ㆍ유리(琉璃)ㆍ자거(車渠)ㆍ마노(馬瑙)ㆍ산호ㆍ호박 등을 비축하고 있는 것이 이것이다.
이것을 중생의 수법과 비중생의 수법으로 생기고 자라나고 길러지는 것을 애착이라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애착이라 하는 것은 미세한 행이 되풀이되는 것을 말한다.
마치 나무를 깎는 칼로 어떤 물건을 깎아내면 느끼지 못하는 사이에 껍질이 깎여지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애착도 여러 번 자주 미세하게 행해지며 행해질 때는 이를 느낄 수가 없다. 그런 까닭에 그렇게 말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애착이라 하는 것은 싫어지고 만족함이 없는 마음이다.
마치 사람이 짠물을 마시면 갈증이 더해지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중생들은 아직 탐욕이 제거되지 아니한 사람이 만약 어떤 경계를 얻었을 경우 그에 대한 애착이 더욱 불어난다. 애착을 싫어하고 만족함이 없는 마음이라 한 것은 이런 이유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애착이란 버리기 어렵고 제거할 수 없는 것을 말한다.
마치 어떤 사람을 두 나찰(羅刹)이 지키고 있는 것과 같다.
그 가운데 한 나찰은 어머니의 형상을 하고 있고 한 나찰은 자기의 형상을 하고 있는데,
자기의 형상을 한 나찰은 쉽게 방호(防護)할 수 있으나,
어머니의 형상을 하고 있는 나찰에게서 자기 몸을 방호할 수는 없다.
이와 같이 중생들도 탐욕이 아직 제거되지 아니한 사람은 흔히 두 가지의 번뇌에 의하여 유지되고 있다. 즉 애착과 노여움이 그것이다.
노여움이란 자기의 형상을 지닌 나찰과 같아서 쉽게 그것의 침입을 막고 몸을 지킬 수 있지만,
애착이라 하는 것은 어머니의 형상과 같아서 그 침입을 막고 지킬 수 없다.
애착을 버리기 어렵고 제거할 수 없는 마음이라 한 것은 이런 이유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애착은 나찰과 같다.
마치 나찰이 장사꾼을 만나면 그들이 타고 온 배를 부수고 나서 그들을 찾아가 문안을 드리며 말하기를,
‘잘 오셨소. 여러분, 참 잘 오셨소. 신선 같은 사람들이여, 여기 정원이나 누각은 쾌락이 끝이 없고 궁궐 같은 집들도 즐길 만하여, 여기에는 여러 가지 진귀한 보물이 많고 온갖 것이 모두 풍족하게 갖추어져 있으니, 모두 지니고 서로 주고받고 하면서 우리들과 함께 이곳에서 즐겁게 즐기는 것이 좋을 것이오’라고 말한다.
만약 그 장사꾼들이 자기 그들의 욕망에 따르게 되면 그런 일이 끝난 후에는 그들의 명근을 끊고 그들을 잡아먹는다.
그들이 사람을 잡아먹을 때 만약 머리카락 손톱ㆍ발톱ㆍ이빨 등이 남아 있게 되면 모조리 이를 취하여 다 먹어 치우고 남아있는 먹거리가 없게 하며, 그 사람들을 잡아먹을 때 피가 땅에 떨어지면 손가락과 손톱으로 움켜쥐고 이를 먹는다.
이와 같이 이 애착이라 하는 것도 처음 인연할 때는 화기애애한 얼굴로 기쁜 빛을 띄우지만,
결과가 맺어질 때는 곧 달라져서 목숨에 비유되는 지혜의 명근(命根)을 끊고 지옥 속에 떨어져 지극히 나쁜 고통을 받게 된다.
애착을 나찰과 같다고 하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애착이라 하는 것은 끈적거려 서로 달라붙는 것과 같다.
이 애착의 끈적거림에 달라붙은 중생은 열반에 이르지 못한다.
마치 파리가 꿀병이나 축축히 젖은 쇠가죽에 달라붙게 되면 제 힘으로 날아갈 수 없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중생들도 애착의 끈적거림에 서로 달라붙게 되면 열반에 이를 힘이 없어진다. 그런 까닭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이 애착이라 하는 것은 삶과 죽음이라는 독벌레의 길에서 일어난다.
마치 물이 있는 곳에서는 독벌레의 길이 일어나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애차도 생사(生死)라는 독벌레의 길을 일으키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애착이라 하는 것은 그 성품 자체가 흩어졌다 다시 합쳐지는 유위법(有爲法)이라 일컫는다.
마치 물의 넘치는 성질로 모래를 흩고 허물게 되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애착도 그 성품 자체가 흩어졌다 능히 다시 합쳐지는 유위법이기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애착이라 하는 것은 모든 생사의 번뇌가 시들고 마르지 않게 적셔 주는 것이다.
마치 물에 적셔지면 모든 약초와 나무들이 시들고 마르지 아니하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애착은 생사의 번뇌가 시들고 마르지 않게 적셔 주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애착이라 하는 것은 인식(認識)의 증자를 적셔서 거기서 번뇌의 싹이 돋아나게 하는 것을 말한다.
마치 종자를 물속에 담그면 싹이 돋아날 수 있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애착 속에 담겨지면 인식의 종자에 번뇌의 싹이 돋아나게 되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애착이라 하는 것은 만약 그것이 생각 속에 달라붙게 되면 그의 다른 번뇌도 모두 달라붙게 된다.
마치 옷에 기름기와 때가 있으면 그것이 옷에 물들고 달라붙게 되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애착이라 하는 것도 생각 속에 달라붙게 되면 그의 다른 번뇌도 모두 달라붙게 되는 까닭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애착이라 하는 것은 만약 그것이 생각 속에 즐겁게 떠오르면 그의 다른 번뇌도 모두 즐겁게 여겨진다.
마치 물이 있는 곳에는 개구리와 물고기가 그 가운데서 즐기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애착이라 하는 것도 생각 속에서 그것이 즐거우면 그의 나머지 다른 번뇌도 모두 즐겁게 여겨지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애수(愛受)에는 종자라 이름하는 세 가지가 있다.
그 가운데 첫 번째를 애착의 종자라 부르고,
넓은 영역을 지닌 것을 감각[受]의 종자라 부르며,
이미 소멸된 것은 무명(無明)의 종자라 부른다.
애수에 종자라 이름하는 세 가지가 있다 함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애착이라 하는 것은 그물과 같은 것이라고 말하며 또한 물과 같고 물을 뿌리는 것과 같다고 말한다.
경에 이르기를,
‘비구들이여, 나는 애착을 설명하기를 그물과 같고 물을 뿌리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 이유는 이 중생들이 애착의 그물 속에 감긴 가운데서는 5음의 덮개가 마음을 덮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는 것이다’라고 하고 있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애착은 헤아릴 수 없는 것이다. 게송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본래는 이 하나의 애착이 있는데
이 애착에 두 가지가 있게 되네.
애착은 고리로 이어서 사슬이 되니
그 애착 헤아릴 수 없네.
애착을 헤아릴 수 없다고 하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애착이라 하는 것은 그 범위가 넓나니, 게송으로 물은 것과 같다.
땅보다 더 넓은 것은 없고
바다보다 더 깊은 것은 없으며
수미산보다 더 높은 것은 없으며
나연(那延)보다 더 뛰어난 힘은 없는가.
부처님께서 게송으로 대답하셨다.
애착보다 더 넓은 것 없고
뱃속을 만족하게 채울 수 없고
그 교만함 최고로 증상하니
중생은 부처보다 뛰어나지 못하네.
이상과 같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애착이라 하는 것은 선정(禪定)을 오염시키는 주체이다.
아비담(阿毘曇)의 설명에 따르면,
‘미정(味定)과 상응하는 초선(初禪)의 경지는 미정에 들어간다고 말해야 하는가? 미정이 일어난다고 말해야 하는가?라는 물음에,
대답하기를,
‘만약 미정에 들어가고 나면 이것이 미정이 일어난 일이며, 애착이 모든 사유[正受]를 오염시키는 주체인 까닭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고 했다”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애착에 의지하는 것을 모태에 깃든 것으로 일컫기도 한다. 부모의 부정한 행위로 인하여 정액이 방출된 까닭에서이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애착이라 하는 것은 마치 나찰녀(羅刹女)처럼 미치고 어리석은 마음을 간직한 것을 말한다.
마치 가미니(伽彌尼:羅刹女)에게 잡혀 가는 것으로 애착을 비유한 것과 같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또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애착이란 계(界)를 끊고 지(地)를 끊고 종자(種子)를 끊고 근(根)을 끊는 것이기 때문에 애착이라 한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애착이라 하는 것은 모든 생사의 결사를 담고 있기 때문에 애착이라 한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애착이라 하는 것은 맨 처음 열 가지 법이다.
경의 설명에 따르면,
‘아난아, 애착으로 인하여 추하게 되고,
구하게 됨으로 인하여 이익을 찾게 되고,
이익을 찾음으로 인하여 따지게 되고,
따지는 것으로 인하여 욕구하게 되고,
욕구함으로 인하여 집착하게 되고,
집착함으로 인하여 인색하여 버리지 못하게 되고,
인색해져 버리지 못함으로 인하여 자기 집을 형성하게 되고,
집을 형성함으로 인하여 그 집을 지키게 되고,
지킴으로 인하여 아난아, 곧 알게 된다.
무엇을 곧 알게 되는가?
칼과 몽둥이가 있다는 것을 곧 알게 된다.
칼과 몽둥이가 있으므로 해서 곧 싸움과 갈등이 있게 되고, 아첨하고 속이고 거짓말하는 일이 있게 되며, 생각 속에 문득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불선법(不善法)이 존재하게 된다’라고 하였다.
이런 이유 때문에 부처님의 경전에서는 모든 미래에 있게 되는 애착의 유루 종자만으로 집제(集諦)를 내세웠으며 애착이 다하면 고통도 다한다고 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사성제(四聖諦)에서는 어떻게 하면 이 사랑으로 인한 미래의 세계에 있을 기쁨과 욕망이 모두 남김없이 끊어지고 이를 버리고 뱉어내서 다하게 하여 욕망 없이 소멸하여 중지되는가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문] 이와 같이 하면 집제도 다 없어지는 것인데, 부처님은 왜 고제(苦諦)가 다한다고만 말씀하시고 집제는 말씀하시지 않았는가?
[답] 마땅히 말씀하셨다.
만약 고제가 다한다고 말씀하셨다면 역시 집제도 다하는 것이다.
만약 이론 말씀하시지 아니하였다면 부처님께서 다른 말씀이 계셨을 것이다.
이는 내용을 나타내는 내용의 문(門)이며 내용의 약(略)이며 내용의 도(度)를 말씀한 것이니, 그 내용을 알아야 한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사람을 교화하기 위하여 그가 도를 바라게 하기 위해서 그렇게 말씀하셨다.
가령 부처님께서 ‘고제가 다한다’고 말씀하셨을 경우,
이런 교화를 받는 사람은 설법을 듣고 나면 그것을 다하고자 한다.
그래서 생각하기를,
‘그것이 다한다면 지극히 묘한 경지다. 능히 악한 고통을 벗어날 수 있는 것을 말하고 있구나’라고 하기 때문에,
그런 까닭에 부처님은 계경에서,
‘고제가 다한다’고만 말씀하시고,
‘집제가 다한다’라고는 하시지 아니하였다”라고 하였다.
고제(苦諦)가 다한 도제(道諦)는 어떤 것인가?
이는 팔정도(八正道)를 말한 것이다.
팔정도라 하는 것은 정견(正見)ㆍ정지(正志)ㆍ정어(正語)ㆍ정업(正業)ㆍ정명(正命)ㆍ정방편(正方便)ㆍ정념(正念)ㆍ정정(正定)의 여덟 가지를 말하는 것이다.
[문] 이와 같은 것은 집제가 다하여도 도제인데, 왜 고제가 다하면 도제라 하고 집제가 다한다고 말하지 않는가?
[답] 마땅히 그렇게 말해야 한다. 가령 고제가 다한다고 말한다면 역시 집제도 그렇게 다한다고 말해야 한다.
만약 아직 말씀하시지 아니하였을 경우에는 부처님께서 다른 말씀이 계셨을 것이다.
이는 내용을 표현한 것이며 내용의 문(門)이며 내용의 약(略)이며 내용의 도(度)를 나타낸 것이니, 그 내용을 알아야 한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그 집제라 하는 것은 이 가운데 이미 집제를 벗어났으면 고제는 없고 고제를 벗어났으면 집제는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이미 고제가 다한 도제를 말하였다면 그것이 곧 집제가 다한 도제임을 알아야 한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사람을 교화하기 위하여 그가 그런 결과를 바라게 하기 위해서 그렇게 말씀하셨다.
가령 부처님께서,
‘고제가 다한 도제’를 말씀하셨을 경우,
이런 교화를 받은 사람은 설법을 듣고 나면 도제를 얻고자 한다.
그래서 생각하기를,
‘그 도제라 하는 것은 지극히 묘하다. 능히 이 패악한 고통을 끊을 수 있는 길을 말하고 있구나’라고 하기 때문에,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고통을 받지 아니할 때 도(道)의 공덕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가 도에 관해서 그 내용을 묻기를,
‘능히 원인으로 하여금 원인이 되지 아니하게 할 수 있으며 능히 결과가 결과가 아니게 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면,
대답하기를,
‘나는 원인이 원인이 되지 아니하게 할 수도 없고 결과가 결과 아니게 할 수도 없다.
다만 인과 연으로 생겨난 고통이라는 것은 그 인연을 당장 허물 필요가 있으며, 그렇게 되면 그는 다시는 고통을 받지 않게 되고, 또 과 인연도 다시는 고통을 주지 않고 이어지지도 않게 되며, 다시는 고통과 인연을 맺지 아니하게 된다.
이것을 두고 고통을 받지 아니하면 도의 공덕이 나타나는 것이라 말하는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라고 한다”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비방을 끊기 위하여 그 때문에 고제가 다한 도제를 말씀하셨다.
즉 예닐곱 살의 아이로서 아라한과(阿羅漢果)를 얻는 사람이라도 그 후로 백 년 동안 생사의 번뇌 속에서 세간의 많은 고통을 받는 사람도 있다.
그리하여 그런 사람에게,
‘그의 도는 무엇이 능하기에 그로 하여금 그러한 고통을 받게 하는가?’라고 세간 사람들은 도를 비방한다.
이에 부처님은 설법하시기를,
‘도에 호응하는 것은 자기를 위하여 미래에 다가올 고통을 끊기 위해서다.
목숨이 다하면 다시는 고통을 받지 아니하고 다시는 또 다른 고통이 이어지지 아니하며 또다시 고통과 더불어 인연을 맺지 아니한다’라고 하셨다.
이것을 두고 부처님이 계경에서 고제가 다한 도제를 말씀한 것이며 집제(集諦)가 다한 도제를 말씀하신 것이 아니다.
부처님의 계경에 따르면 수많은 종류의 여러 가지 선법이 화합하여 그 모든 선법이 모두 4제(諦) 안에 거두어들여진다. 사성제(四聖諦)라 하는 것은 그 가운데서 제일가는 진리이니, 그것은 모든 것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들판에 있는 모든 중생들의 발자취는 모두가 코끼리의 발자국 속으로 거두어들여지며 그 코끼리의 발은 짐승들의 발 가운데 제일가는 발이며 그것은 넓고 크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종류의 선법이 화합하여도 그 모든 법은 모두 사성제[四諦] 안에 거두어들여지며, 사성제는 그 법 가운데 모든 것이 포함되었기 때문에 제일가는 것이니, 모든 것을 수렴하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문] 설사 세 가지 성제(聖諦)는 유위이기에 화합되는 것이 있다고 하더라도 멸제(滅諦)는 무위인데 어떻게 화합하는가?
[답] 설사 화합하지 아니한다 하더라도 다만 모든 법을 거두어들이기 때문에 화합한다고 표현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이는 얻는 측면을 말한 것이기 때문에 화합이라 표현한다.
비록 멸제(滅諦)는 화합하지 아니하지만 다만 그것으로 얻는 것, 이것이 화합이니, 이것을 두고 화합이라 표현한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화합의 내용은 두 가지로 설명된다. 즉 존재하는 것의 화합과 일어나는 것의 화합이 그것이다.
사성제 가운데 세 가지 성제(聖諦)에는 이 존재하는 것의 화합과 일어나는 것의 화합 등 두 가지 화합이 있으나, 멸제(滅諦)의 경우는 일어나는 화합[起和合] 만이 있다.
다만 존재하는 것의 화합[有和合], 이것을 화합이라고 말하기 때문에 멸제에는 화합이 없다고 할 따름이다.
부처님의 계경에 따르면 ‘혜근(慧根)은 어디서 관해야 하는가?
사성제(四聖諦)가 그것이다’라고 하였다”라고 하였다.
[문] 섭수(攝受)된 내용 때문에 4제(諦)라 하는가? 인연 때문에 4제라 하는가?
섭수된 내용 때문이라고 한다면 혜근에는 사성제가 포함되어 있지 아니하고, 사성제에도 혜근은 포함되어 있지 아니하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만약 인연 때문에 4제를 말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이는 모든 법과 인연하는 것이 된다.
[답] 섭수된 내용 때문도 아니고 또한 인인 때문도 아니다.
[문] 만약 그렇지 아니하다면 이것은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답] 일에 인연하기 때문이다.
이 혜근은 일로 인하여 사성제를 얻어 뛰어난 마음의 주인이 된다.
그런 까닭에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혜근은 어디에서 관해야 하는가? 사성제가 그곳이다”라고 하셨다.
또 신근(信根)의 경우에는 일로 인하여 네 가지 허물어지지 아니하는 믿음을 얻어 그것이 뛰어난 마음의 주인[增上主]이 된다.
그런 까닭에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신근은 어디서 관해야 하는가? 네 가지 허물어지지 아니하는 믿음이 그곳이다”라고 하셨다.
또한 정진근(精進根)의 경우에는 일로 인연하여 네 가지 생각을 끊고 뛰어난 마을의 주인이 된다.
그런 까닭에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정진근은 어디서 관해야 하는가? 네 가지 생각[意]을 끊는 것이 그곳이다”라고 하셨다.
또 염근(念根)의 경우에는 일에 인연하여 네 가지 생각이 멈추게 되어 마음의 뛰어난 주인이 된다.
그런 까닭에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염근을 어디서 관해야 하는가? 네 가지 생각이 멈춘 곳이 그 곳이다”라고 하였다.
또 정근(定根)은 일에 인연하여 사선(四禪)의 경지에서 뛰어난 마음의 주인이 된다.
그런 까닭에 부처님이 말씀하시기를,
“정관을 어디서 관해야 하는가? 사선(四禪)의 경지가 곧 그곳이다”라고 하셨다.
이와 같이 이 혜근(慧根)은 사성제에서 뛰어난 주인의 업무를 맡게 되나니,
이것에 대해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혜근은 어디서 관해야 하는가? 사성제가 그곳이다”라고 하였다.
무엇이 사성제인가?
고성제(苦聖諦)와 집(集)ㆍ멸(滅)ㆍ도(道)의 성제가 그것이다.
[문] 보통의 경우 원인이 앞서고 결과는 뒤에 일어나는 것인데, 부처님은 왜 고제(苦諦)를 먼저 말씀하시고 집제를 뒤에 말씀하셨는가?
[답] 이 고제는 거칠기[麤] 때문에 이것을 먼저 말씀하셨고, 집제(集諦)는 미세하기 때문에 뒤에 말씀하셨다.
비유하면 사람들이 활쏘기를 배울 때 먼저 기(箕)ㆍ흙덩어리ㆍ풀다발 등을 쏘는 법을 배운 다음에 능히 털끝을 쏘아 맞혀서 빗나가지 아니하게 할 수 있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고제는 거칠기에 그것을 배운 다음에 집제의 미세한 내용을 관해야 하는 것이다.
[문] 보통의 경우 먼저 포를 닦은 다음에 번뇌가 다하면 증(證)을 이루게 되는데, 부처님은 왜 멸제를 먼저 말씀하시고 도제를 뒤에 말씀하셨는가?
[답] 멸제(滅諦)를 관하게 되면 도제(道諦)를 관하는 일은 뒤따르기[隨順] 때문이다.
[문] 어찌하여 멸제를 관하게 되면 도제를 관하는 일이 뒤따르게 되는가?
[답] 그것은 수행하는 사람이 먼저 번뇌가 다하여 증을 이룬 뒤에 도를 구하여 마땅히 어떤 길로 열반에 이르러야 하는가를 관하기 때문이다.
비유하면 어떤 사람이 길을 걸어갈 때 다른 사람에게 묻기를,
“나의 갈 길을 지시해 주시오”라고 할 경우,
상대방이 도로 묻기를,
“어느 곳에 가려 하는가?”라고 하면,
“나는 아무 성(城)에 가고자 한다”라고 한다.
그러면 그가 말하기를,
“이 길이 거기로 가는 길이다”라고 했다면, 그는 이미 그 성을 알게 된 것이다.
도를 설명하기 쉬운 것은 이와 같다.
만약 도제를 먼저 말하고 뒤에 멸제를 말한다면 문득 어느 길로 나아가야 할지를 알지 못하게 된다.
그러나 먼저 멸제를 말한 뒤에 도제를 말한다면 이미 멸제를 알기 때문에 곧 도를 닦기가 쉽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그것은 수행하는 사람이 먼저 3제[諦]에 대한 어리석음[癡]을 제거한 다음에야 도제의 도의 연[道緣]이 눈앞에 나타나 도제에 대한 어리석음을 제거하게 되기 때문이다.
비유하면 사람들이 먼저는 다른 사람의 얼굴을 보되 스스로 자기 얼굴은 보지 못하다가 라고 깨끗한 거울로써 스스로 그의 얼굴을 비추어 보게 되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수행하는 사람도 그가 도와 인연할 경우 먼저 3제(諦)에 대한 어리석은 생각을 제거한 다음에 도제에 이르는 도의 연(緣)이 눈앞에 나타나서 도제에 대한 어리석은 생각을 제거하게 된다. 그런 까닭에 부처님은 먼저 멸제를 말씀하시고 뒤에 도제를 말씀하신 것이다”라고 하였다.
[문] 가령 먼저 집제(集諦)를 끊은 후에 고제를 알게 되는데, 부처님은 왜 먼저 고제를 아는 일을 먼저 말씀하시고 그 후에 집제를 굳는 일을 말씀하셨는가?
[답] 고통의 근본[苦根]을 뽑아내기 위해서다.
비유하면 나무를 먼저 가지나 잎을 잡고 난 다음에 그 뿌리를 자른다면 자르기가 쉬운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생사(生死)의 나무에서 먼저 그 고통을 안 다음에 그 모여드는 뿌리를 자르기는 쉽다. 그런 까닭에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이것은 고제를 관하게 되면 능히 집제를 관하는 경지가 찾아오게 되고,
집제를 관하고 나면 능히 멸제를 관하는 경지가 찾아올 수 있게 되고,
멸제를 관하고 나면 도제를 관하는 경지가 찾아올 수 있음을 말한 것이다.
고제를 관하지 아니하고 집제를 관하거나 멸제ㆍ도제를 관할 수는 없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고제에 대한 지혜에서 능히 집제ㆍ멸제ㆍ도제에 대한 지혜가 찾아올 수 있다.
고제에 대한 지혜가 일어나지 아니하고 집제ㆍ멸제ㆍ도제에 대한 지혜가 일어날 수는 없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고제를 관하는 것은 집제와 멸제와 도제를 관하는 방편의 문이며 근거다.
고제를 관하는 관(觀)을 일으키지 아니하고는 집제ㆍ멸제ㆍ도제를 관하는 관이 일어날 수는 없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고제를 관한다고 하는 것은 집제ㆍ멸제ㆍ도제를 관하는 인자(因子)며 뿌리다.
근본을 가지고 연줄을 만들면 집제 등의 관이 일어나는 것이 있게 된다.
고제를 관하는 관이 일어나지 아니하고는 능히 집제ㆍ멸제ㆍ도제를 관하는 관이 일어날 수 없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고제를 관한다고 하는 것은 집제ㆍ멸제ㆍ도제가 생기고 유지되어 함께 평등하게 지니고 불어나고 자라나고 길러지게 되는 계기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고제를 관하는 관을 일으키지 아니하고는 능히 집제ㆍ멸제ㆍ도제를 관하는 관(觀)을 일으킬 수 없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고제에 대한 어리석은 생각은 능히 집제ㆍ멸제ㆍ도제에 대한 어리석은 생각을 잡고 간직하게 만든다. 그래서 고제에 대한 어리석은 생각을 제거하지 아니하고는 능히 집제ㆍ멸제ㆍ도제에 대한 어리석은 생각을 제거할 수 없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고제에 대하여 어리석지 아니하면 능미 집제ㆍ멸제ㆍ도제에 대하여도 어리석지 아니하게 할 수가 있다.
고제에 대하여 어리석지 않게 하지 못하고도 능히 집제ㆍ멸제ㆍ도제에 대하여 어리석지 아니할 수는 없다”라고 하였다.
존자 파사(波奢)는 설명하기를,
“그것은 수행하는 사람이 5음을 등창과 같은 것이라 관한 다음에 그 원인을 찾으면서,
‘이것이 어디에서 생긴 것인가’를 관하여 본다.
그리하여 그것이 집제에서 생긴 것임을 관한 다음에,
‘어떻게 하면 이를 없애겠는가? 즉 모두 멸하는 것이 그것이다’라고 관하고,
‘열반은 어떻게 하면 이르게 되는가?’라고 관하고서,
팔성도(八聖道:八正道)의 종자가 그것이다‘라고 관한다.
비유하면 사람의 몸에 등창이 생기면 지극히 고통스럽고 피고름이 흘러나오는데, 그것의 원인이 된 곳을 찾아보고 이것이 어디서 생겼는가를 관하면, 혹 바람과 추위와 열 때문에 생긴 것을 알게 된다.
그리하여 어떻게 하면 이것을 없애고 안온하게 살아갈 수 있으며, 어떻게 하면 안온한 곳에 이를 수 있는가를 생각하여, 혹 약을 복용해서 설사를 하기도 하고 혹 종기를 째서 고름을 짜내기도 한다.
이와 같이 수행하는 사람도 5음(陰)이 등창과 같다는 것을 관한 후에 그 원인을 찾아,
‘이것이 어디서 생겼는가’를 관하여 보고,
그것이 집제에서 생겼으면,
‘어떻게 하면 다 소면하고 없앨 수 있는가? 열반은 어떻게 하면 이르게 되는가? 팔정도의 종자이다’라고 관하게 된다.
또한 다음에는 수행하는 사람이 오음을 우환[患]과 같다고 관한 후에 그 원인을 찾아보고,
‘집제가 그것이다’라고 관하고,
‘어떻게 하면 없앨 수 있는가? 단멸시키면 다하게 된다’고 관한 후에,
‘어떻게 하면 열반에 이르게 되는가? 팔정도(八正道)의 종자가 그것이다’라고 관하게 된다.
비유하면 마치 어떤 사람이 아이를 키우다가 그 아이가 도적이 되어 흉포하게 악한 무리를 따라가고 있음을 알고 인식한 다음에 그 원인을 찾아보며,
누가 우리 아이를 허물었는가를 관하고 악한 무리로부터 일어난 일임을 알게 되면,
‘누가 능히 이를 제지할 수 있는가’를 관하고,
‘선지식(善知識)이 그 사람이다’라고 관하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수행하는 사람도 5음이 우환과 같다고 관한 후에 그 원인을 찾고,
‘이것이 어디서 생겼는가? 집제로부터 생겼다.
어떻게 하면 없앨 수 있는가? 단멸하게 되면 다하게 된다.
어떻게 하면 열반에 이르게 되는가? 팔정도가 그 종자가 된다’라고 관하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수행하는 사람은 고제를 알고 난 다음에 집제를 끊고, 집제를 끊고 나서 멸제로 증험을 하고, 그 후에 도를 닦게 되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먼저 고제를 말하고 뒤에 집제ㆍ멸제ㆍ도제를 말하게 된 것이다”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