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정도론 1권
7.4. 계를 계속해서 생각함(戒隨念)
101. 계를 계속해서 생각함을 닦기를 원하는 자는 조용히 혼자 머물러 참으로 나의,
계는 “훼손되지 않고, 뚫어지지 않고, 오점이 없고, 얼룩지지 않고, 벗어났고, 지자들이 찬탄하고, 비난받지 않고, 삼매에 도움이 된다.(A.iii.286)”라고,
이와 같이 훼손되지 않은 것 등의 덕으로 자신의 계를 계속해서 생각해야 한다.
재가자가 [지니는 것이] 재가계고 출가자가[지니는 것이] 출가계다.
102. 제가자의 계든 출가자의 계든, 그들의 시작에서든 끝에서 든, 단 하나도 파하지 않았을 때 가장자리가 끊어진 천 조각처럼 훼손되지 않았기 때문에 훼손되지 않은 것(akhaṇḍāni)이다.
그들의 중간에서 단 하나도 파하지 않았을 때 중간에 구멍 난 천 조각처럼 뚫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뚫어지지 않은 것(acchiddān)이다.
그들을 차례대로 둘 혹은 셋을 피하지 않았고 배에 나타난 길고 둥근 모양 등을 한 얼룩덜룩한 검고 붉은 색깔 등을 가진 소처럼 오점이 없기 때문에 오점이 없는 것(asabalāni)이다.
그 사이사이에 그들을 파하지 않을 때 그들은 다른 색의 반점으로 얼룩덜룩한 소처럼 얼룩지지 않았기 때문에 얼룩지지 않은 것(akammāsāni)이다.
103. 일반적으로 말하면 일곱 가지 음행과 연결된 계와 노여움과 적의 등의 나쁜 법들에 의해 손상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 모두는 훼손되지 않았고, 뚫어지지 않았고, 오점이 없고, 얼룩지지 않았다.(1. §§143-52)
104. 훼손되지 않은 계들이 갈애의 노예상태로부터 풀려난 뒤 벗어난 상태를 만들기 때문에 벗어난 것(bhujissāni)이다.
부처님 등 지자들이 찬탄하기 때문에 지자들이 찬탄하는 것(viññūpasatthāni)이다.
갈애와 사견이 들러붙지 않고 어느 누구에 의해서도 ‘이것이 계 가운데서 당신의 결점이다’라고 비난할 가능성이 없기 때문에 비난 받지 않는 것(aparāmaṭṭhāni)이다.
그들은 근접삼매나 본삼매에 도움이 되고, 혹은 도의 삼매와 과의 삼매에 도움이 되기 때문에 삼매에 도움이 된다(samādhi-saṁvttanikāni).
105. 이와 같이 ‘훼손되지 않고’라는 등으로 구분한 계의 덕을 계속해서 생각할 때,
“그때 그의 마음은 탐욕에 얽매이지 않고, 성냄에 얽매이지 않고, 어리석음에 얽매이지 않는다. 그때 그의 마음은 계를 의지하여 올곧아진다.(A.iii.285)”
이와 같이 앞서 설한 방법대로(§66) 장애들을 억압할 때 차례에 따라 어떤 한 순간에 禪의 구성요소들이 일어나게 된다.
계의 덕은 심오하기 때문에 혹은 갖가지 덕을 계속해서 생각함에 전념하기 때문에 이 禪은 본삼매에는 이르지 못하고 근접에만 이른다. 이처럼 계의 덕들을 계속해서 생각함을 통해 일어나기 때문에 계를 계속해서 생각함(戒隨念)이라 부른다.
106. 이러한 계를 계속해서 생각함을 닦는 비구는 [계를 공부하기를 존중하고 순종한다. 믿음이 깊어진다. 희열과 기쁨이 커지고, 두려움과 공포를 극복하고, 고통을 감내할 수 있다.[계를 구족한 자들과] 함께 살고,[그들을] 엎드려 영접함에 부지런하며, 자책하는 두려움이 없고, 작은 허물에도 두려움을 보며, 믿음 등이 깊어지고, 희열과 기쁨이 커진다. 더 이상 통찰하지 못한다하더라도 적어도 선처로 인도된다.
그러므로 슬기로운 자는 항상 게을리 하지 말지니
이와 같이 큰 위력을 가진 계를 계속해서 생각함을.
이것이 계를 계속해서 생각함에 대한 상세한 설명이다
7.5. 보시를 계속해서 생각함(施隨念)
107. 보시를 계속해서 생각함을 닦기를 원하는 자는 자연스럽게 보시에 전념하고 항상 보시하고 나누어 주어야 한다.
혹은 처음 닦는 사람은,
‘지금 이후부터 만약에 받을 사람이 있으면 단 한 입 분량의 덩어리라도 먼저 보시하지 않고 먹지 않으리라’고 받아들여,
[수행을 시작한 바로] 그 날 덕이 높은 분들께 능력껏 최대한 보시 한다.
그런 뒤 거기서 표상을 취하고 조용한 곳에 혼자 머물러,
“이것은 참으로 내게 이득이고 참으로 큰 이득이다.
나는 인색함과 때에 얽매인 사람들 가운데서 때와 인색함에서 벗어난 마음으로 살고, 아낌 없이 보시하고, 손은 깨끗하고, 주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이다.(A.iii.287)”라고,
이와 같이 인색함의 때로부터 벗어난 것 등의 덕으로 자신의 보시를 계속해서 생각해야 한다.
108.
‘참으로 내게 이득이다:’ 참으로 내게 이득이고, 장점이다.
“[음식을 베풀어서] 생명을 주는 자는 천상이나 인간에 삶을 얻는다.(A.iii.42)”
“보시하는 자를 좋아하고 많은 사람들이 늘 모인다.(A.iii.40)” “좋은 사람들의 법을 따라 보시하는 자는 사랑받는다.(A.iii.41)” 이와 같은 방법으로 세존께서 보시하는 자의 이득을 찬탄하셨다.. 반드시 나도 그 이득에 동참하리라는 것이 여기서 뜻하는 것이다.
109.
‘참으로 큰 이득이다’:
이 교법과 사람 몸을 얻은 것은 참으로 내게 큰 이득이다.
왜 그런가? 나는 인색함의 때에 얽매인 사람들 가운데서 … 나누어주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110.
‘인색함과 때에 얽매인’: 인색함과 때에 사로잡힌.
‘사람들 가운데서’: 태어났기 때문에 중생이라 불린다.
그러므로 여기서 이것은 ‘인색함과 때에 사로잡힌 중생들 가운데서’하는 뜻이다.
인색함과 때는 자기의 번영을 타인과 나누어 가짐을 견디지 못하는 특징을 가졌고, 마음의 본래 투명한 상태를 더럽히는 어두운 법의 일종이다.
111.
‘때와 인색함에서 벗어난’:
탐욕과 성냄 등 다른 때와 인색함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때와 인색함에서 벗어난’이라 했다.
‘마음으로 살고’:
앞서 설한 그 상태의 마음으로 산다는 뜻이다.
그러나 경에서는 일래자였던 석가족의 마하나마(Mahānāma)가 의지해서 머무는 것에 대해서 여쭈었을 때 의지해서 머무는 것으로 설했기 때문에
“나는 벗어난 마음으로 집에서 산다(A.iii.287. v.331)”라고 설하셨다.
그곳에서는 [탐욕 등 오염원들을] 극복하고 산다는 뜻이다.
112.
‘아낌없이 보시하고’: 관대하게 보시한다.
‘손은 깨끗하고’:
손은 지극히 청정하고, 정성스럽게 자기의 손으로 선물을 주기 위해 항상 손을 씻는다는 뜻을 설한 것이다.
‘주는 것을 좋아하고’:
주는 행위가 주는 것이다. 보시한다는 뜻이다. 그 주는 것을 항상 실천하여 좋아하기 때문에 ‘주는 것을 좋아하고’라 했다.
‘구걸하는 것에 반드시 부응하고’(yācayoga):
구걸하는 자가 원하는 그것을 보시하기 때문에 구하는 것에 부응한다는 뜻이다.
독송할 때는 야자요가(yyācayoga)라고도 한다. 헌공(yajana)이라 불리는 공양에 부응한다는 뜻이다.
‘보시하고 나누어주는 것을 좋아한다’:
보시하는 것과 나누어주는 것을 좋아합이다.
‘나는 보시하고, 또 내 자신이 사용할 것을 나누어준다. 나는 이 둘 모두 좋아한다.’라고,
이와 같이 계속해서 생각한다는 뜻이다.
113. 이와 같이 ‘때와 인색함에서 벗어난’이라는 등으로 구분한 보시의 덕을 계속해서 생각할 때 ‘그때 그의 마음은 탐욕에 얽매이지 않고, 성냄에 얽매이지 않고, 어리석음에 얽매이지 않는다.
그때 그의 마음은 보시를 의지하여 올곧아진다.(A.iii.285)”
이와 같이 앞서 설한 방법대로(§66) 장애들을 억압할 때 차례에 따라 어떤 한 순간에 禪의 구성요소들이 일어나게 된다.
보시의 덕은 심오하기 때문에 혹은 갖가지 덕을 계속해서 생각함에 전념하기 때문에 이 禪은 본삼매에는 이르지 못하고 근접에만 이른다.
이처럼 이것은 보시의 덕을 계속해서 생각함을 통해 일어나기 때문에 보시를 계속해서 생각함(施隨念)이라 부른다.
114. 이러한 보시를 계속해서 생각함을 닦는 비구는 더 큰 양으로 보시하는 것을 향해 기운다. 탐하지 않는 잠재성향을 갖게 되고, 자애에 수순하며, 두려움이 없고, 희열과 기쁨이 커진다.
더 이상 통찰하지 못한다하더라도 적어도 선처에 인도된다.
그러므로 슬기로운 자는 항상 게을리 하지 말지니
이와 같이 큰 위력을 가진 보시를 계속해서 생각함을.
이것이 보시를 계속해서 생각함에 대한 상세한 설명이다.
7.6. 신을 계속해서 생각함(天隨念)
115. 신을 계속해서 생각함을 닦기를 원하는 자는 성스러운 도를 통해 일어난 믿음 등의 덕을 갖추어야 한다. 그 다음에 조용한 곳에 혼자 머물러,
“사대왕천이 있고, 삼십삼천이 있고, 염라천이 있고, 도솔천이 있고, 화락천이 있고, 타화자재천이 있고, 범신천이 있고, 그보다 높은 천들이 있다.
이런 신들은 믿음이 구족하여 여기서 죽은 뒤 그곳에 태어났다.
나에게도 그런 믿음이 있다.
신들은 이런 계를 구족하여 … 배움을 … 보시를 … 통찰지를 구족하여 여기서 죽은 뒤 그곳에 태어났다.
나에게도 그런 통찰지가 있다.(Aiii.287)”라고,
이와 같이 신들을 증명(sakki)으로 삼은 뒤 믿음 등 자기의 덕을 계속해서 생각해야 한다.
116. 그러나 경에서는
“마하나마여, 성스러운 제자가 자신과 그 신들의 믿음과 계와 배움과 보시와 통찰지를 계속해서 생각할 때 그의 마음은 탐욕에 얽매이지 않는다(A.iii.287-88)”라고 설하셨다.
비록 이렇게 설하셨지만 그것은 신들을 증명으로 내세워 믿음 등 자신의 덕이 신들의 것과 같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 설했다고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주석서에,
“신들을 증명으로 삼은 뒤 자신의 덕을 계속해서 생각해야 한다.”라고 분명하게 설했기 때문이다.
117. 그러므로 처음 [수행을 시작했을] 때 신들의 덕을 계속해서 생각한 뒤 그 다음 단계로 자기에게 있는 믿음 등의 덕을 계속해서 생각할 때,
“그때 그의 마음은 탐욕에 얽매이지 않고, 성냄에 얽매이지 않고, 어리석음에 얽매이지 않는다. 그때 그의 마음은 신을 의지하여 정직해진다(A.iii.285)”
이와 같이 앞서 설한 방법대로(§66) 장애들을 억압할 때 차례에 따라 어떤 한 순간에 禪의 구성요소들이 일어나게 된다.
118. 이러한 신을 계속해서 생각함을 닦는 비구는 신들이 사랑하고 마음에 들어 한다. 믿음이 더욱더 깊어지고 희열과 기쁨이 커진다.
더 이상 통찰하지 못한다하더라도 적어도 선처로 인도된다.
그러므로 슬기로운 자는 항상 게을리 하지 말지니
이와 같이 큰 위력을 가진 신을 계속해서 생각함을.
이것이 신을 계속해서 생각함에 대한 상세한 설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