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아함경에서는 법을 두 가지로 나누고 있다.
법과 법 아님[비법]을 함께 표시면 다음과 같다.
제일의공경[잡아함] | 육중품[7][중아함] | ||
법1 | 열반의 공[第一義空] | 가장 공한 법[第一最空之法] | 비분별 |
법2 | 세속의 법[俗數法] | 임시로 이름 붙여진 법[假號法] 인연의 법[因緣法] | 분별 |
바법 | 잘못된/삿된 소견 |
“어떤 것을 제일의공경이라고 하는가?
모든 비구들아, 눈은 생길 때 오는 곳이 없고, 소멸할 때에도 가는 곳이 없다.
이와 같이 눈은 진실이 아니건만 생겨나고, 그렇게 생겼다가는 다시 다 소멸하고 마나니,
업보(業報)는 있지만 짓는 자[作者]는 없느니라.
이 음(陰)이 소멸하고 나면 다른 음이 이어진다.
다만 세속의 수법(數法)은 제외된다.
귀ㆍ코ㆍ혀ㆍ몸ㆍ뜻도 또한 이와 같다고 말하겠으나,
단 세속의 수법은 제외된다.
세속의 수법이란, ‘이것이 있기 때문에 저것이 있고, 이것이 일어나기 때문에 저것이 일어난다’는 것을 이르는 말이니,
(12연기법이 이어진다, 중략)
또 ‘이것이 없기 때문에 저것이 없고, 이것이 소멸하기 때문에 저것이 소멸한다’는 것이니,
(12연기법이 이어진다, 하략)”
“어떤 것이 가장 공한 법인가?
저 눈은 생길 때에는 곧 생기지만 그 오는 곳을 볼 수 없고,
멸할 때에는 곧 멸하지만 그 멸하는 곳을 볼 수 없다.
다만 임시로 이름이 붙여진 법[假號法]과 인연의 법[因緣法]은 제외한다.
어떤 것이 임시로 붙여진 이름과 인연의 법인가?
이른바 이것이 있으면 곧 있고, 이것이 생기면 곧 생기는 것이다.
(12연기법이 이어진다, 중략)
이것이 없으면 곧 없고, 이것이 멸하면 곧 멸한다.
(12연기법이 이어진다, 하략)”
12연기법의 내용은 6내입처ㆍ6외입처ㆍ6인식ㆍ6접촉과, 6접촉으로 말미암아 생기는 6느낌ㆍ6생각ㆍ6의도ㆍ6애욕ㆍ6기억ㆍ6번뇌를 포함한다. 곧 이 세계를 구성하는 요소들이 생기고 사라지는 것과 관련된 모든 법들을 포함한다.
이러한 것은 <잡아함경_232. 공경>의 서술에서 이것을 확인할 수 있다.
‘가장 공한 법’은 부처님께서 이루신 궁극의 법[열반법]이며, 부처님의 눈으로 바라본 있는 그대로의 세상의 모습[진여법]이다. (태어남과 번뇌와 함이 없는 불생/무생ㆍ무루ㆍ무위의 빕이다.)
‘세속의 법/임시로 이름 붙여진 법/인연의 법’은 기본적으로 중생들이 살아가는 세상의 모습을 부처님의 눈으로 해석하여 말씀하신 것이다. [이 법들은 중생의 눈으로 바라본 세상의 모습을 말한 것이 아니다.]
4성제와 37도품도 세속의 법에 속한다. 이 법들은 중생들이 가장 공한 법의 경지에 도달하는 길을 보여주는 것들이다. 상대적으로 더 높은 수준에 도달한 중생들이 행하는 법이다.
보통의 중생들은 ‘열반의 공/가장 공한 법’을 알지 못할 뿐만 아니라, ‘세속의 법/임시로 이름 붙여진 법/인연의 법’도 알지 못한다.
그런데 이 두 가지 법들의 뜻과 그것들의 관계를 정확히 알지 못하는 경우에는 부처님의 말씀을 많이 듣고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고 잘못 이해하여 잘못된 견해를 내게 된다.
2. 금강경의 주 내용은 수보리의 세 가지 질문과 그것에 대한 부처님의 대답으로 구성된다.
세 가지 질문에 대하여 금강반야바라밀경 파취착불괴가명론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어떻게 머물러야 하는가?’
어떤 모습의 과(果)에 대하여 마음이 머물기를 서원(誓願)하고 욕구(欲求)해야 하는가?
‘어떻게 수행해야 합니까?’
마땅히 어떤 행(行)을 닦아서 그 과를 얻어야 하는가?
‘어떻게 그 마음을 항복받아야 합니까?’
어떤 등류의 마음을 항복받아서 그 마음의 근원을 청정하게 하는가?
그리고 금강경의 주제는 대강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순서는 임의로 정한 것이니, 특별한 의미가 없다.)
① 보살에 관한 것
② 중생에 관한 것
③ 상[모습]에 관한 것
④ 중생의 믿음에 관한 것
⑤ 법과 비법에 관한 것
⑥ 반야바라밀[보시, 인욕]에 관한 것
⑦ 성문 4과에 관한 것
⑧ 경전의 복덕과 공덕에 관한 것
⑨ 불국토의 장엄에 관한 것
⑩ 여래의 몸[상호]에 관한 것
⑪ 여래의 법의 증득에 관한 것
⑫ 여래의 설법에 관한 것
⑬ 여래의 다섯 가지 눈에 관한 것
⑭ 법의 단멸상에 관한 것
⑮ 가장 공한 법에 관한 것
⑯ 세계의 일합상에 관한 것
⑰ 견해에 관한 것
⑱ 유위법에 관한 것
3. 금강경에서는 이 모든 주제들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서술한다.
A는 ‘보살, 중생, 법, 몸’ 등의 주제어를 가리킨다.
[‘A거 없다’는 ‘무엇은 A가 아니다’의 집합이다.]
(1) A는 A가 아니다. (A가 아닌 것도 아니다.)
(2) A는 없다.
부처님 말씀이 이러한 형식으로 된 까닭으로 두 가지 측면에서 생각해 볼 수 있겠다.
하나는 언어의 한계의 측면이고, 다른 하나는 중도의 측면이다.
3.1. 언어의 한계의 측면에서
‘법1’의 경지를 이해하고 거기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먼저 ‘법2’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런데 ‘법2’에서 제대로 벗어나려면, 먼저 ‘법2’를 충분히 이해해야 한다. ‘법2’를 충분히 이해하지 않고서는 그것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법2’를 제대로 이해하며면, 그것이 임시로 이름 붙여진 법(이나 인연의 법)의 형식으로 된 것임을 알야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법2’를 듣고서는 그 내용뿐만 아니라, 그것을 표현한 말에 집착하여 그것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 연유로 금강경에서 ‘법2’를 (1)이나 (2)의 형식으로 표현한 것이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 모든 법은 ‘법1’을 목표로 한다. 그런데 문제는 법1’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법1’을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 까닭은 다음과 같다.
‘법1’을 말하고자 한다면 언어를 사용할 수밖에 없다. 곧 ‘법1’을 말할 때도 ‘법2’의 임시로 이름 붙여진 법(이나 인연의 법)의 형식으로 드러낼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법1’에 관아여 말을 하는 바로 그 순간에 분별을 벗어날 수 없으며, 그 결과 ‘법1’에서 말하고자 하는 뜻을 나타낼 수 없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법1’의 뜻을 제대로 이해하고 전달하고자 하면, 먼저 ‘법1’을 말하고 나서 곧 바로 그것을 부정할 수 밖에 없다.
그런 연유로 금강경에서 ‘법1’을 말할 때 (1)이나 (2)의 형식으로 말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3.2. 중도의 측면에서
아함경에서는 중도를 설명하기 위하여 때때로 어떤 법에 대히여 다음의 네 가지 형식으로 나타내기도 한다. (A와 B는 같을 수도 있고 다를 수도 있다.)
(3) 네 가지 견해
가. A는 B이다.
나. A는 B가 아니다.
다. A는 B가 아닌 것이 아니다.
라. A는 B도 아니고 B가 아닌 것도 아니다.
아혐경에서는 모든 법은 (3)의 네 가지 가운데 어느 것도 참이 아니라고 하였다. 이것은 ‘양 극단의 견해는 바른 견해가 아니라’는 중도를 표현한 것이다.
이러한 중도의 견해는 ‘법2’에 해당할 뿐 아니라 ‘법1’에도 해당한다.
그런데 법을 예컨대 (3가)로 서술한다면, 보통은 양 극단의 하나의 견해로 이해될 수도 있다.
이런 연유로 금강경레서는 그렇게 해석되는 것을 막기 위하여 (3나)의 형식으로, 나아가 (3다, 3라)의 형식으로 표현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아함경에서 보면, (3)의 네 가지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여 주장하는 것은 중도에 어긋나는 주장으로 판단하고 그런 질문에 대해서는 대답하지 않으셨다[무기].]
(중도에 관한 경들, 무상과 유무에 관한 10가지 질문, 잘못된 견해 62가지)
4. 그런데 불경에서 (4)로 말했다고 해서 반드시 (5)가 거짓이라는 것은 아니다.
(4) A는 B가 아니다.
(5) A는 B이다.
A의 속성에 대하여 서술핟 때, 금강경에서는 (4)로 서술되지 있으나 많은 경전에서 (4)에 대응하는 (5)의 방식으로 서술하고 있다.
예컨대 많은 경전에서 부처님은 이러이러한 몸을 가지셨고, 이러이러한 법을 깨달으셨고, 이러이러한 법을 말씀하셨다고 (5)의 형식으로 말한다.
아함경에서는 12처와 18계, 5음, 연기법을 비롯한 여러 법에 관하여 (5)의 형식으로 말한다.
이른바 대승경전에서는 보살과 대승의 여러 법에 대하여 (5)의 형식으로 말한다.
그런데 이러한 법들에 대하여 금강경에서는 (4)의 형식으로 그것들을 부정하고 있다.
사실 모든 부처님의 법이 (4)의 형식으로 표현해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금강경에서 (4)의 형식으로 표현한 것은 사실은 금강경이나 다른 경전에서 (4)에 대응하는 (5)를 충분히 이해한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또 금강경에서 ‘법1’이나 ‘법2’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거의 말하지 않은 것도 이러한 전제에 말미암은 것으로 생각해 볼 수도 있겠다.
금강경에서 주로 법을 (4)의 형식으로 표현한 것은, (5)의 형식으로 표현된 거의 대부분의 법이 임시로 이름 붙여진 법이나 인연의 법인데, 중생들이 그러한 법에 집착하는 겻을 경계하기 위한 것이라 생각된다.
또 가장 공한 법아라 할지라도 그 법을 말로 표현하는 바로 그 순간에 분별에 떨어질 수 밖에 없다는 것을 경계하기 위함일 것이다.
그런데 아함경에서는 ‘빛깔은 나다’를 부정하기 위하여 ‘빛깔은 나가 아니다’로 말하는 등[‘빛깔은 나다’는 잘못된 견해이며, ‘빛깔은 나가 인니다’가 바른 견해이다] 필요한 경우에만 (4)의 형식을 사용하고, 그밖의 경우에는 (5)의 형식을 사용하였다.
아함경에서 그리 한 것은, 아마도 부처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들이 말에는 본래부터 어떤 한계가 있다는 것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으며, 또 중도를 말흠하신 까닭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다고 전제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아함경에서 보면 거의 모든 부처님의 제자들은 부처님의 그런 말씀을 듣고 바로 알아 들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미 그렇게 전제하고 있다면, 언어의 한계와 중도에 관하여 따로 말하면 되는 것이지, 어떤 법을 말할 때마다 그 사실을 강조하여 말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5. 뗏목의 비유에 대한 위상도 아함경과 금강경에서 조금 다른데, 위에서 말한 아함경과 금강경의 서술 방식의 차이를 반영한다.
아함경에서 뗏목은 일차적으로는 강을 건너 저 언덕으로 가기 위한 방편[8정도]을 비유한 것이다.
(잡아함경_1172. 독사경, 증일아함경_31. 증상품[6])
그리고 강을 건너고 나서는 뗏목을 버려야 한다. 저 언덕에 도달했음에도 뗏목을 계속해서 가지고 가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기 때문이다.
(중아함경_200. 아리타경, 증일아함경_43. 마혈천자문팔정품[5])
금강경에서는 뗏목을 버려야 한다는 것에 방점을 두고 있다. 그렇지만 강을 이미 건너 저 언덕에 이르렀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금강경에서 뗏목으로 비유한 것은 반야바라밀이다.]
뗏목을 타고 강을 건너 저 언덕에 가고자 한다면, 강을 건너기 전에는 뗏목을 버릴 수 없다. 만일 강을 다 건너기도 전에 뗏목을 버린다면 곧바로 강에 빠져 거센 강물에 휩쓸려 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6. 요컨대 금강경을 아함경에 비추어 말하자면, 인연의 법 너머에 있는 가장 공한 법의 경지를 부정의 논리로 설한 경이라 할 수 있겠다.
그리고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 이전의 모습이 보살이었다는 것을 생각해 본다면, 금강경에서 말하고자 하는 보살의 행을 대강이나마 짐작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