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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승장엄경론 제9권
20. 범주품(梵住品)[1]
[보살이 닦는 범주(梵住)]
[문] 보살이 닦는 것에는 네 가지의 범주(梵住)가 있다.
이를 무엇이라고 이릅니까?
게송으로 말한다.
범주(梵住)에는 네 가지가 있고
하나하나에 네 가지 모양이 있으니
치장(治障)과 합지(合智)와
전경(轉境)과 성생(成生)이다.
[釋] ‘범주’라 함은 이른바 네 가지의 무량(無量)이다.
곧 자(慈)와 비(悲)와 희(喜)와 사(捨)이다.
여기서 보살의 네 가지 무량에는 그 하나하나에 각기 네 가지 모양이 있음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첫째는 치장이니 다스릴 것이 끊어졌음으로 말미암기 때문이다.
둘째는 합지니 분별이 없는 지혜를 얻어서 대치가 뛰어나기 때문이다.
셋째는 전경이니 중생연(衆生緣)과 법연(法緣)과 무연(無緣)으로 말미암기 때문이다.
넷째는 성생이니 뛰어난 업을 지음으로 말미암아서 중생들을 성취하기 때문이다.
[문] 어떤 것들의 중생이 중생연이 되고 어떤 것들의 법과 무연이 법연과 무연이 됩니까?
게송으로 말한다.
즐거움과 고통과 기쁨과 번뇌
이와 같은 것을 중생연이라 한다.
법연은 그 법을 설함이요
무연은 곧 그와 같다.
[釋] 네 가지의 중생취(衆生聚)가 있으니 바로 중생연이다.
첫째는 즐거움을 구하는 중생취요, 둘째는 고통이 있는 중생취요, 셋째는 기쁨이 있는 중생취요, 넷째는 번뇌의 중생취이다.
‘자(慈)’라 함은 즐거움을 구하는 중생취에 있어서 즐거움을 주려는 행을 일으키는 것이다.
‘비(悲)’라 함은 고통이 있는 중생취에서 고통을 뽑아버리는 행을 일으키는 것이다.
‘희(喜)’라 함은 기쁨이 있는 중생취에 있어서 떠나지 않는 행을 일으키는 것이다.
‘사(捨)’라 함은 여러 수(受)에서 번뇌를 일으키는 중생취에 있어서 거기서 벗어나는 행을 일으키게 하는 것이다. 이를 중생연이라고 이른다.
‘법연(法緣)’이라 함은 곧 그 네 가지의 범주법을 설하는 것을 말하여 법연이라고 이른다.
‘무연(無緣)’이라 함은 곧 여(如)를 분별이 없는 데서 설하는 것을 이른다.
게송으로 말한다.
여(如)의 뜻이기 때문에
인위(忍位)에서 청정함을 얻는다.
신업(身業)과 구업(口業)에 섭수한 것이니
또한 모든 번뇌가 다하였다.
[釋] 네 가지의 행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무연의 자비라는 것은 여(如)의 연(緣)이기 때문이며, 8지(地)의 무생법인(無生法忍)에 이르러 일체의 선근을 얻고 또한 원만함을 얻으니 청정하기 때문이다.
‘자비가 의지하는 신업과 구업 두 업에 섭수된다’고 함이란 모든 번뇌가 또한 다 없어진 것이다.
번뇌의 소연과 같이 의(意) 자체의 모든 번뇌의 끊음을 설하니, 소연을 끊기 때문이다.
이는 경 가운데서 말한 것과 같다.
[문] 네 가지의 범주는 어떠한 행의 차별이 있습니까?
게송으로 말한다.
움직임이 있음과 움직이지 아니함과
씹음이 있음과 씹지 않음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네 가지의 범주는
이와 같은 행의 차별이다.
[釋] 범주에 네 가지의 행의 차별이 있음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첫째는 움직임이요, 둘째는 움직이지 아니함이요, 셋째는 씹음이요, 넷째는 씹지 아니함이다.
‘움직인다’고 함은 물러서는 분(分)이니 물러설 수 있기 때문이다.
‘움직이지 않는다’고 함은 머무는 분과 뛰어난 분이니 물러설 수 없기 때문이다.
‘씹는다’고 함은 염오된 것이니 즐거운 맛을 탐착하여 대승의 마음이 없기 때문이다.
‘씹지 않는다’고 함은 염오되지 않은 것이니 이 물러서는 등의 행은 범주의 차별이다.
여러 보살은 움직이지 아니하고 씹지 않은 가운데서 머물고, 움직임과 씹는 가운데 머물지 않는다.
[문] 범주의 종류의 차별은 어떠합니까?
게송으로 말한다.
앞의 여섯과 앞의 둘은
아래의 지위로서 아래의 마음이 있다.
서로 같은 것들은 아래가 되니
아래를 번복하면 곧 위가 된다.
[釋] 아래와 위의 차별이라는 것은 그 정하지 못한 지위의 자기 성품이다.
앞에 있는 여섯 품이 아래가 된다. 일체의 정지(定地)에 있는 앞의 2품도 또한 아래가 된다.
이른바 연품(軟品)과 연품 중에 있는 아래의 지위 역시 아래가 된다고 함은 이른바 아래 7지(地)의 보살이 위의 지위를 관찰하기 때문이다.
아래의 마음 또한 아래가 된다고 함은 이른바 여러 성문이기 때문이요,
서로 같은 것 또한 아래가 된다고 함은 이른바 아직 무생법인을 얻지 못한 보살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말하기를 아래라고 하였으니, 이 아래를 번복하면 곧 위가 됨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문] 이 네 가지의 범주는 능히 몇 과위를 얻습니까?
게송으로 말한다.
태어나는 것[所生]의 욕계의 과보와
만취(滿聚)와 중생을 성숙시킴과
불리(不離)와 장애를 벗어남의
다섯 가지를 구족함이 과가 된다.
[釋] 보살이 모든 범주에 머무는 것이 인이 되어 다섯 가지의 과를 갖추어 얻는다.
첫째는 욕계의 중생 가운데 태어남이니, 이는 과보의 과이다.
둘째는 복과 지혜의 두 무더기의 원만함이니, 이는 증상의 과보이다.
셋째는 중생을 성숙시키는 것이니, 이는 장부(丈夫)의 과보이다.
넷째는 일체의 태어나는 범주를 벗어나지 않는 것이니, 이는 의보(依報)의 과이다.
다섯째는 태어나는 곳마다 항상 저 장애를 벗어나는 것이니, 이를 상리(相離)의 과라고 이른다.
[문] 이 범주에는 어떠한 일들이 있어서 이를 보살의 모양이라 합니까?
게송으로 말한다.
설사 무거운 장애의 인연을 만나고
스스로 방일을 쓰더라도
보살의 모양을 알고자 하면
범주의 마음에서 후퇴하여 물러남이 없다.
[釋] 보살이 두 가지 일이 있어서 범주의 마음이 움직이지 아니함이 마땅히 보살의 모양이 됨을 알아야 한다.
첫째는 설사 무거운 장애의 인연을 만나더라도 마음이 마침내 다름이 없는 것이니, 이는 보살의 모양이다.
둘째는 설사 스스로 방일하더라도 이른바 능치(能治)가 앞에 나타나지 아니할 때에 마음이 또한 다름이 없는 것이니, 이는 보살의 모양이다. 하물며 한량없는 때가 앞에 나타나는 때이겠는가?
[문] 범주의 장애는 어떤 것을 이릅니까?
게송으로 말한다.
네 가지의 범주에 네 가지의 장애가 있으니
성냄과 번뇌와 근심과 욕심 때문이다.
보살이 이러한 장애를 갖추면
여러 가지의 허물과 실수가 일어난다.
[釋] 네 가지 범주의 대치하는 것에 갖추어 네 가지의 장애가 있으니, 그 순서대로이다.
첫째는 성냄이요, 둘째는 번뇌요, 셋째는 근심이요, 넷째는 욕심이다.
이와 같은 장애로 말미암으나 범(梵)에는 체가 없기 때문이다.
만일 체가 있었으면 이 네 가지의 장애에서 다시 여러 가지의 허물과 실수가 있을 것이다.
[문] 여러 허물과 실수란 어떤 것입니까?
게송으로 말한다.
이와 같은 여러 번뇌에는
일어나면 세 가지의 해(害)가 있으니
자신을 해치고 또한 그를 해치고
계를 해친다.
[釋] 이 게송은 세 가지의 해(害)의 허물이 있음을 나타내 보였다.
첫째는 자기를 해침이니 이른바 스스로 괴롭다는 생각을 지음이요,
둘째는 남을 해침이니 이른바 남이 괴롭다는 생각을 지음이요,
셋째는 계율을 해침이니 이른바 함께 괴롭다는 생각을 지음이다.
게송으로 말한다.
뉘우침이 있고 또한 이로움을 잃고
보호를 잃고 스승이 버리고
벌을 다스리고 아울러 악한 이름 등
이와 같은 여섯 가지의 꾸짖음이 있다.
[釋] 이 게송은 여섯 가지의 꾸짖음을 얻는 허물과 실수를 나타내 보인 것이다.
첫째는 스스로 꾸짖음이니 근심과 뉘우침이 있음으로 말미암기 때문이다.
둘째는 남의 꾸짖음이니 이양(利養)을 잃음으로 말미암기 때문이다.
셋째는 하늘의 꾸짖음이니 옹호함을 잃음으로 말미암기 때문이다.
넷째는 큰 스승의 꾸짖음이니 큰 스승의 버림으로 말미암기 때문이다.
다섯째는 범행(梵行)의 꾸짖음이니 지혜 있는 범행을 닦는 사람이 여법하게 벌주어 다스림으로 말미암기 때문이다.
여섯째는 시방(十方) 사람들의 꾸짖음이니 악한 이름이 흘러나기 때문이다.
게송으로 말한다.
뒤에 받을 몸이 여러 어려움에 떨어지고
범주에서, 지금에도 또한 물러서서
심수(心數)가 또한 고통을 얻는
다시 세 가지의 허물이 생긴다.
[釋] 이 게송은 뒤에 얻는 세 가지의 허물과 실수를 나타내 보인 것이다.
첫째는 어려움에 떨어지는 것이니, 이 악한 업으로 말미암아 뒤의 세상에서 악한 보를 얻기 때문이다.
둘째는 물러서는 행동이니, 이미 얻은 물러섬과 아직 물러서지 않은 데서 물러서서 잃음이나 현재와 미래의 범주를 물러서서 잃게 되기 때문이다.
셋째는 괴로움이 생김이니, 심수(心數)의 법으로 말미암아 큰 근심과 괴로움이 생기기 때문이다.
[문] 이미 허물과 실수를 말하였으니, 어느 것이 공덕입니까?
게송으로 말한다.
범주에 잘 머무는 사람은
모든 악을 멀리 여의어서
생사에 능히 염오되지 아니하고
여러 중생들을 버리지 않고 구제한다.
[釋] 범주에 머무는 자는 두 가지의 공덕을 얻는다.
첫째는 번뇌를 버림이니,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은 허물과 실수를 다 멀리 여의기 때문이다.
둘째는 중생들을 버리지 아니함이니, 중생들을 성숙시키기 위하여 생사에 염오되지 않기 때문이다.
[문] 이미 공덕이 됨을 알았으니, 이 공덕을 어찌하여 가장 높고 가장 위의 것인 줄 알겠습니까?
게송으로 말한다.
마치 사람에게 자식 하나가 있어서
덕이 있고 극히 사랑함을 내듯이
보살이 일체 중생에 있어서도
범행의 뛰어남을 일으킴이 그보다 뛰어나다.
[釋] 그보다 뛰어나다는 비유는 곧 보살의 네 가지 범주가 가장 높고 가장 위임을 나타내 보인 것이다.
[문] 대비(大悲)는 어떠한 중생에게 인연하게 됩니까?
게송으로 말한다.
치연하게 성함과 원수가 뛰어남과
고통이 핍박함과 또한 어두움이 덮임과
험한 데 머묾과 장차 크게 속박됨과
독을 먹음과 아울러 도를 잃음과
다시 비도(非道)에 머묾이 있음과
수삽(瘦澁)한 자가 있으니
이와 같은 열 가지의 중생은
대비심의 소연이다.
[釋] 보살의 대비는 대략 열 가지의 중생으로써 경계를 삼는다.
첫째는 치연하게 성하는 중생이니, 이른바 욕염(欲染)에 즐겨 집착하는 자이다.
둘째는 원수가 뛰어난 중생이니, 이른바 착함을 닦을 때에 마의 장애가 되는 자이다.
셋째는 고통스럽게 핍박받는 중생이니, 이른바 세 가지의 악한 길에 있는 자들이다.
넷째는 어둠이 덮인 중생이니, 이른바 항상 착하지 못함을 행하는 자로서 업의 과보를 알지 못함으로 말미암기 때문이다.
다섯째는 험한 데 머무는 중생이니, 이른바 열반을 즐기지 않은 자로서 생사의 험한 길이 단절되지 아니함으로 말미암기 때문이다.
여섯째는 크게 속박된 중생이니, 이른바 외도의 치우친 견해를 가진 자가 해탈을 향하고자 하나 가지가지의 치우친 견해의 굳게 속박됨을 받은 자이다.
일곱째는 독을 먹는 중생이니, 이른바 정(定)의 맛을 먹는 자이다. 비유하면 좋은 음식에 독이 섞이면 능히 사람을 해치듯이 착한 정도 또한 그러하여서 탐욕의 집착함이 되면 문득 물러서서 잃게 된다.
여덟째는 도를 잃은 중생이니, 이른바 증상의 아만이 있는 자가 진실된 해탈의 도 가운데 혼미하고 잘못됨으로 말미암기 때문이다.
아홉째는 비도(非道)에 머무는 중생이니, 이른바 아래의 승(乘)으로서 결정되지 못한 자는 물러섬이 있음으로 말미암기 때문이다.
열째는 수삽(瘦澁)한 중생이니, 이른바 여러 보살로서 복과 지혜의 두 무더기가 가득 차지 못한 자이다.
이와 같은 열 가지의 중생은 보살의 대비의 소연 경계인 것이다.
[대비의 과(果)를 얻음]
이미 대비의 경계를 말하였으니,
다음에는 대비의 과(果)를 얻음에 대해 말하겠다.
게송으로 말한다.
장애를 끊음과 깨달음의 인과
즐거움을 줌과 또한 과를 좋아함과
자기 흐름의 다섯 가지를 의지하기 때문에
이 사람은 부처님과의 거리가 가깝다.
[釋] ‘장애를 끊는다’고 함은 상리과(相離果)이니 장애를 끊었기 때문이다.
‘깨달음의 인’이라 함은 증상과(增上果)이니 중생을 이롭게 하기 때문이다.
‘즐거움을 준다’고 함은 장부과(丈夫果)이니 장부가 짓는 것이기 때문이다.
‘과를 좋아한다’고 함은 과보과(果報果)이니 좋아하는 과보를 얻었기 때문이다.
‘자기의 흐름’이라 함은 의과(依果)이니 미래의 뛰어난 자비를 주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다섯 가지의 과는 다 대비를 의지하여 얻는 것이니 마땅히 알라. 이와 같은 보살은 부처님 보리와의 거리가 곧 멀지 않게 됨을.
[대비의 머물지 않음]
이미 대비의 과를 얻음을 말하였으니,
다음에는 대비의 머물지 않음에 대해 말하겠다.
게송으로 말한다.
생사의 괴로움으로 체를 삼으며
무아(無我)의 성품을 써서
싫어하지 아니하고 또한 번뇌하지 않으니
대비의 뛰어난 깨달음 때문이다.
[釋] 일체의 생사는 괴로움으로써 체를 삼고 무아로써 성품을 삼는다.
그런데 보살은 괴로움에 있어서 여실한 지혜를 얻고 무아에서 위없는 깨달음을 얻는다.
이와 같이 지혜와 깨달음을 얻고서는 대비로 말미암기 때문에 생사에 있어서 싫어함과 벗어남을 내지 아니하고,
뛰어난 깨달음으로 말미암기 때문에 또한 번뇌에 시달림도 받지 않는다.
그러기에 보살은 열반에 머물지 않음을 얻고, 또한 생사에도 머무르지 않는다.
[대비의 공덕]
이미 대비로 머물지 않음을 말하였으니,
다음에는 대비의 공덕에 대해 말하겠다.
게송으로 말한다.
괴로움의 자기 성품을 볼 때에
괴로움을 알아서 괴로움을 슬퍼함을 낸다.
그리고 또 버리는 방편을 알기에
항상 수행하여 싫어하지 않는다.
[釋] 보살이 세간의 괴로움을 관하여 자기 성품을 볼 때에 곧 괴로움을 슬퍼함을 내는 것이 그와 같다.
또한 그 괴로움을 멀리하는 방편 또한 여실하게 안다.
이를 알고서는 항상 수행하여 싫어하지 않는 것을 대비의 공덕이라고 말한다.
[대비의 차별]
이미 대비의 공덕을 말하였으니,
다음에는 대비의 차별에 대해 말하겠다.
게송으로 말한다.
자기의 성품과 더불어 수택(數擇)과
숙세의 익힘과 장애를 끊음,
마땅히 알아야 한다. 보살의 자비는
이와 같은 네 가지의 차별이 있음을.
[釋] 이 대비는 그 순서대로 네 가지의 차별이 있다.
첫째는 자기 성품이니 자연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둘째는 수택이니 공덕의 허물과 실수를 보기 때문이다.
셋째는 숙세의 익힘이니 먼저 세상에서의 오래 닦음으로 말미암기 때문이다.
넷째는 장애를 끊음이니 욕심을 여읨으로 말미암아 다스릴 것의 번뇌장을 끊어서 청정하여졌기 때문이다.
다시 여섯 가지의 차별이 있다.
게송으로 말한다.
평등함도 아니고 또한 항상함도 아니며
깊음도 아니고 또한 수순함도 아니며
도가 아니고 얻지 못함도 아니어서
여섯 가지를 번복시키는 자비가 이와 같다.
[釋] 대비가 아닌 여섯 가지의 차별을 번복시키면 이것이 곧 대비의 여섯 가지의 차별이 된다.
첫째는 평등이요, 둘째는 상항(常恒)이요, 셋째는 심극(深極)이요, 넷째는 수순이요, 다섯째는 정도(淨道)요, 여섯째는 부득(不得)이다.
‘평등’이라 함은 낙수(樂受) 등 중생들이 가지고 있는 여러 수(受)가 다 괴로움인 줄 알기 때문이다.
‘상항’이라 함은 또한 무여열반(無艅涅槃)에 이르도록 다함이 없기 때문이다.
‘심극(深極)’이라 함은 지(地)에 들어간 여러 보살들이 자기와 남의 평등함을 얻었기 때문이다.
‘수순’이라 함은 일체 중생들의 괴로움을 이치대로 뽑아버리고 구제하여 주기 때문이다.
‘정도(淨道)’라 함은 대치하는 것의 번뇌를 끊어 제거하였기 때문이다.
‘부득(不得)’이라 함은 무생법인을 얻었을 때에도 모든 법을 가히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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