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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살영락경 제6권
19. 수행품(隨行品) ①[1]
그때 하늘ㆍ용ㆍ귀신ㆍ아수라ㆍ가루라ㆍ긴나라ㆍ마후라가와 사람과 사람이 아닌 것 그리고 여러 보살마하살ㆍ비구ㆍ비구니ㆍ우바새ㆍ우바이가 각각 스스로 생각을 내었다.
‘우리들이 부처님의 신령한 지혜와 변화의 한량없음을 관하고자 여러 세계에 노닐다가 본 고장에 돌아온 것을 깨달아 아는 이가 없다.’
[질문들]
그때에 범천(梵天)이 있으니 이름을 존부존(尊復尊)이라고 불렀다. 다른 곳 부처님 세계로부터 와서 세 가지 선을 행하여 지났으므로 두려울 바가 다시없었다.
그가 즉시 자리에서 일어나 오른팔을 들어내고 합장한 채 꿇어앉아서 게송을 지어 여쭈었다.
천존(天尊)은 세 가지 통달한 지혜로
3세의 근본을 모조리 관하여서
미혹을 끊으시고 의심도 없애서
신령한 지혜의 도(道)를 나타내시네.
있는 그대로 성품이 자연스러워서
행이 3유(有)를 초월했으니,
보살 영락(瓔珞)의 지혜는
총체적으로 어떤 행을 위함인가?
도수(道樹)는 모든 법의 근본이니
무생(無生)의 마음이 제일이네.
스승 없이 스스로 깨쳤으니,
무슨 행을 따라 얻었는가?
낮고 변변치 않은 경지 초월하여
위로는 보살도를 사모하고
네 가지 요긴한 법을 창달하니
범행(梵行)은 청정의 근본일세.
천상과 세간의 중생 무리들
생각 생각이 각각 같지 않아
상념을 멸하여 일어나지 못하게 함은
무엇을 말미암아 이루어지는가?
법계는 본래 스스로 공하고
받는 지혜가 약간 있어서
하나의 행[一行]으로 부처를 짓게 됨은
다시 무엇을 말미암아 이루는가?
나고 죽은 열두 바다에
유전하면서 오히려 멈추지 않지만
부처님 지혜는 변제(邊際)가 없어서
찾아 연구하여 그들을 제도하네.
도는 본래 일상(一相)으로부터이니
끊고 멸하여 나는 바 없으면
바깥 몸의 번뇌를 관하고
안의 법도 또한 마찬가지이네.
온 곳은 여기서 먼데
기꺼이 법을 듣기를 원하오니
오직 부처님께서 낱낱이 연설하시어
영원히 티끌의 그림자 없애주소서.
그때 부처님께서 존부존에게 말씀하셨다.
“훌륭하고 훌륭하구나. 족성자여, 부처님 앞에서 이 뜻을 능히 묻는구나.
이제 마땅히 게송으로써 낱낱이 분별해 주리라.”
[행을 따라 얻음]
본래 수없는 세대로부터
선지식을 가까이하여
본말의 공(空)을 보지 않으니,
이를 일러 행을 따라 얻음이라 하네.
한량없는 법을 사유하고
본말의 공을 분별하여
도과(道果)가 오염되지 않으니
이를 일러 행을 따라 얻음이라고 하네.
생각하는 바 삿됨에 처하지 않고
바른 법의 근본 여의지 않아
일상(一相)이 본래 스스로 고요하니
이를 일러 행을 따라 얻음이라고 하네.
10력(力)은 삼천세계의 왕으로서
피안(彼岸)과 차안(此岸)을 영원히 제도하고
본래 없는 법을 닦아 행해서
5음의 고통 없애주시네.
지혜의 밝음이 비추는 곳은
위로 허공의 무제(無際)까지 사무치니
잘 교화하여 본래의 교법을 따르면,
이를 일러서 행을 따라 얻음이라고 하네.
공의 성품 고요하고 편안하며
무상(無相)과 무원(無願)도 또한 그러하여
세 가지 정(定)은 평등하여 짝이 있으니
이를 일러 행을 따라 얻음이라고.
그 정(定)에 들어갈 때면
온갖 법은 있는 바 없어서
몸의 물듦을 버리고 한 몸이니
이를 일러 행을 따라 얻음이라고 하네.
모든 부처님의 법 다르지 않아
그 사람을 따라 분별하니.
과거에 이미 멸한 행이
어찌 다시 뿌리의 조짐이 있으랴?
사람의 지혜로 닦고 익혀서
믿음을 지켜 권법(權法)을 삼아
저절로 ‘나’라는 상념 멸하니
이를 일러 행에 따라 얻음이라고 하네.
아득히 먼 예로부터
중생은 ‘있음’에 물들어 집착하여
있음을 끝내 스스로 알지 못하니
어찌 상념 없는 법을 인식하랴?
다만 대성인(大聖人)이신 분만이
분별하시어 그 품류를 따라서
올바른 요체로 인도를 하니
이를 일러 행을 따라 얻음이라고 하네.
겁수(劫數)의 기한도 어렵게 여기지 않아
손가락 튀기듯 하는 것과 같지만
어리석고 미혹한 사람 깨우치기 어렵고
착함에 나아가게 함이 정말 어렵네.
한 몸[一身] 다시 한 몸으로부터
억만해(億萬姟)를 지나도록
차별을 두지 않고 불쌍히 여겨서
제도치 못했으면 결코 버리지 않네.
행이 본래 자연을 말미암고
날카롭고 둔함이 각각 품(品)이 있어
이제 큰 광명을 입으니
이를 일러 행을 따라 얻음이라고 하네.
‘나’는 본래부터 스스로 행을 지어
이제 다시 그 갚음을 받으니,
행이 다하면 삼계도 없어서
홀로 서서 의지함이 없네.
사람이 생각하는 뭇 항상된 상념은
성현의 율(律)과 가르침이 아니네.
피차의 상념을 능히 버림이야말로
이를 일러 행을 따라 얻음이라고 하네.
몸을 헤아리니 본래 스스로 없는데
하물며 식신의 생각[識神念]이 있겠는가?
어리석고 미혹한 중생의 무리
처음부터 능히 버리지 못하네.
도인(道忍)에 다섯 가지 행이 있고
초념(初念) 속에도 마찬가지라서
부정관(不淨觀)을 사유하니
이를 일러 행을 따라 얻음이라고 하네.
[....]
몸이 청정하여 티와 때가 없어
끝내 삿된 업을 짓지 않고
입이 참되고 정성스런 까닭은
본래 속임 없음을 말미암기 때문일세.
도의 윤택[道潤]이 미치는 곳에
문득 구제할 바가 있게 되면
전에 거칠고 난잡함을 말미암음이니
어찌 윤택이 미치지 못함을 원망하랴?
큰 서원은 항상 평등하여서
거칠고 세밀함을 생각지 않고
행이 평등하여 피차가 없으니
이를 일러 행을 따라 얻음이라고 하네.
사람은 그 어려움을 초월할 줄 알아
스스로 지켜서 딴 생각 없고
스스로 구제하고 다시 남도 건지니
이를 일러 행을 따라 얻음이라고 하네.
가령 사람이 5색을 보는 것처럼
스스로 그 식의 상념을 일으켜
고통의 쌓임이 이로 말미암아 불어나
큰 재난과 근심을 여의지 않네.
식의 법은 볼 수가 없어서
인연으로 약간의 생각을 내어
한번 나고 다시 한 번 멸하니
면하고자 하여도 너무나 어렵구나.
도의 지혜에 다섯 가지 모습 있어
이루어지고 파괴되는 법을 분별하니
행이 다하여 소굴이 없어도
그때 식(識)은 마침내 있는 바일세.
한 형상은 한 형상을 받아서
몸마다 마멸되지 않으니
대저 그 나무를 베고자 해서
다 없애려거든 뿌리를 남겨두지 말라.
식의 뿌리가 줄기를 뻗어서
이르는 곳마다 걸림 없으니
힘센 장사와 여러 선도(仙道)들
누가 그 근본을 능히 찾으랴?
오직 삼계의 존자만이
능히 가두어 달아나지 않게 하고
지혜의 불로 태워버려서
어둠의 장소는 알지 못하게 하네.
무명은 뭇 행의 연료이고
착함의 근본을 억제해 막으니
여덟 가지 해탈의 물로 씻어서
때를 없애니 티끌 그림자도 없노라.
나고 죽고 오고 가는 고통은
지금 세상에서 뒷세상으로 나아가니
애달프다, 이 고통과 고달픔
성인이 아니면 누가 능히 구제하랴?
온갖 하늘은 복 받은 집이고
네 범천[四梵]도 또한 그러하니
행은 청정한 과보를 말미암아
덕을 인간 가운데 으뜸으로 삼네.
생각하니 옛적으로부터
본래 세 가지 악취(惡趣)가 없었는데
스스로 지어서 지금 각기 받으니
어찌 다시 의심 있으랴?
만일 여러 부처님으로 하여금
도의 가르침을 나타내지 않게 한다면
문득 여래 계신 곳에서
그 허물을 비방하여 말하였으리.
나도 또한 너희들 불쌍히 여기노라,
생을 받아서 근본에 요달치 못함을.
이와 같은 중생의 무리는
성현의 가르치심 받지 않네.
지나가신 부처님 한량이 없건만
너는 보고 듣지 않았기 때문에
미래의 항하 모래 수의 부처님께
어찌 제도를 받을 수 있으랴?
사람의 마음 확연히 깨치면
겁수의 기한을 기다리지 않고
한번 듣고 문득 성불하여
여러 법계를 거치지 않네.
다만 중생의 무리 생각하니
도에 힘쓰지 않아
이 때문에 스스로 떨어져서
5도(道) 연못에 영원히 처해 있네.
마치 새가 허공을 나는데
날개를 의지해야 갈 수 있는 것처럼
사람이 지관(止觀)의 정(定)이 없으면
무엇으로 말미암아 공의 지혜 얻으랴?
나고 죽음은 한정이 없고
도의 힘은 백 가지 행을 지나네.
형상 없는 옷으로 물들여서
스스로 도의 과(果)를 이루리.
5음 본래 형상 없지만
형태의 색상(色相)을 지어서
그 덕이 제석과 범천을 능가하여
상 없는 법[無相法]을 설하네.
행하는 사람은 바깥의 색을 관하고
안의 식은 가서 분별하네.
저 색은 내가 지은 것 아닌데
나의 마음 스스로 가서 물드네.
색은 본래 나의 근본 아니고
색의 성품은 끝내 없으니
나의 식을 헤아림도 그러해서
본래 무엇으로부터 생겼는가?
스스로 그렇게 깨치면
바깥 색은 스스로 공적하고
안의 식도 또한 그러해서
담연(澹然)하여 본래 생겨남이 없네.
사람이 비상공(非常空)을 생각하여
몸의 근본법을 스스로 관하면
그대로 저기에 이르게 되어
영원히 무위의 언덕에 처하리.
본래 5음의 몸 받아
해탈코자 하지만 능히 여의지 못하니
태를 받은 것이 큰 근심이라서
여의지 못하니 무슨 이익 있으랴?
5분법신(分法身)을 갖추고
계ㆍ정ㆍ혜[戒定慧]의 이해를 이루며
도덕의 향을 피워서
세간의 냄새와 더러움을 없애네.
사람이 밝은 지혜를 닦아서
억 겁 동안 게으르지 않으면
뭇 덕이 자연히 갖추어져
견줄 이 없다고 호칭하네.
뜻에 어긋나도 습속(習俗)을 따르고
존귀함에 처해도 교만하지 않아
행에 따라 높고 낮음을 좇으면
영원히 편안함에 처하도록 서게 하네.
혹은 3악도의 고통에 들어가서
방편의 지혜를 나타내어
밖으론 고통을 대신 받는 듯하지만,
내면의 마음은 물드는 바 없네.
나는 옛적 무수한 세상에서
보살의 도를 닦아 행하여
믿음을 다한 인(忍)을 얻어서
행이 2주(住)의 경지를 지났네.
그때에 모든 부처님 모여서
널리 시방으로부터 오는 것은
하나의 하렬(下劣)을 위해서
구원 없음을 면케 하고자 함이네.
여러 부처님 각각 손을 펴시어
죄에 이르지 않도록 막으셨지만
죄의 힘 가릴 수 없었으므로
손을 물리치고 옥에 끌려 들어가네.
여러 부처님 그 뒤를 찾아서
지옥 속으로 다시 들어가
저 죄인을 구원하여
뭇 고뇌를 여의게 하고자 하시네.
여래는 신령한 지혜의 힘으로
몸에서 큰 광명을 놓으셔서
지옥 속을 널리 비추시면
환히 밝아서 하나의 색과 같네.
죄인이 광명을 보고서
다시는 몸의 고통스러운 상념이 없고
모두 다 광명을 입어서
지옥의 고난을 여의게 되네.
오직 저 한 중생만은
모든 부처님도 구원하지 못하시나니
5역(逆)의 삼가지 못한 행이
바로 이 고뇌를 이루었네.
나는 이때부터
나아가면서 게을리 앉았고
나고 죽는 고통으로도
중도에 마음을 바꾸지 않았네.
지금은 이미 성불을 얻어
호칭을 석가모니라고 하나니
5음의 몸 헐어 없애고
뭇 덕을 널리 갖추었네.
죄를 받음이 끝내 끝장이 없고
선의 근원도 인식하지 못하니
행이 다하여 뭇 덕을 뛰어넘어야
비로소 허공의 성품에 감응하네.
이제 또한 죄를 받으면서
구원 없는 자 있을까 걱정이니
신력(神力)으로 능히 제지해 머물게 해도
머물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네.
공의 성품 비록 청정하지만
행이 차야만 비로소 갖추게 되니
신족의 다섯 가지 신통법으로는
이 고달픔을 능히 여읠 수 없네.
5음 각각 성품이 있어서
짓는 바가 한 품(品)이 아니네.
인ㆍ지(忍智)의 바라밀은
행이 갖춰져야 비로소 이루게 되네.
도는 온갖 법의 근본을 내고
있음이 없는 법[無有法]을 북돋아 키우니
뜻을 세우기 수미산[安明] 같아서
끝내 헐어 없앨 수 없네.
비유하자면 어떤 사내가
마음대로 경계를 만드는 것과 같으니
이것은 바라는 대로 얻을 수 있지만
죄를 면하고자 함은 너무나 어렵네.
7보(寶)의 여러 궁전과
코끼리ㆍ말ㆍ나라ㆍ재물 보배
이것은 모두 허깨비 같아서
잠깐 동안도 그대로 머물러 있지 않으며,
전륜성왕이라는 자리는
4천하를 거느리고 있지만
이 또한 마멸의 법이어서
무상하여 오래 존재하지 않네.
저 닦아 행하는 사람
색의 근원을 분별하여
본래 스스로 그렇다고 이해해 아나니
이것을 일러 색음(色陰)을 이루었다고 하네.
몸의 아픔은 백팔 가지이고
안과 밖과 중간의 법이 있으니
아픔이 나오는 데를 알면
이것이 통음(痛陰)에 응하는 법이네.
상념은 아지랑이가 이글거리는 것 같아서
허물어지면 본래 있는 바가 없으므로
상념을 억제하여 생겨나지 않게 할지니
이것을 일러 상음(想陰)에 응한다고 하네.
세 가지 행이 세 가지 법 이루어
셋을 멸하면 곧 셋에 응하므로
3독(毒)의 뿌리를 뽑아내어 끊으면
3세(世)의 유(有)에 물들지 않네.
다섯 가지 법을 벌써 갖추어
식이면서 식 없음을 받지 않아
안팎의 여섯 티끌 없으니
이를 일러 식온(識薀)이라 한다네.
네 가지 방편의 도를 잡아
4무애지(四無畏智)를 타고
네 가지 도과(道果)의 증명을 초월하니,
때문에 네 가지 취요(聚要)에 응하네.
나고 죽는 바다는 경계가 없어
광대하여 가장자리가 없으니
여섯 신족의 도를 타면
곧 그 연못에 노닐 수 있네.
어리석고 미혹한 종자 불쌍히 여기어
완습(翫習)하면서 버리지 않음은
형상이 마치 파초 나무와 같아서
껍질은 있어도 속은 알맹이가 없네.
나는 이제 보리수의 밑에서
온갖 도의 품(品)을 영락하여
공훈이 백억을 초월하니
세웅(世雄)이 존귀하기 으뜸이네.
오늘날 부처님께서
5탁 세계에 출현하시었지만
티끌의 더러움에 물들지 않으니
마치 연꽃이 집착 없는 것과 같네.
그 마음 마땅히 수호하여
번뇌에게 미혹되지 않고
안으론 여덟 가지 바른 깨달음으로
몸과 마음의 법을 영락하여야 하네.
밖으로 여러 가지 상호로써
온갖 국토를 장엄하고
밝은 지혜로 두 관(觀)을 닦으면
상호를 스스로 장엄하게 꾸미리.
본래 4대(大)로부터 이루어져서
이루어짐과 무너짐은 있는 바가 없네.
앞의 생각[前念]이 뒤의 생각[後念] 아니매
새롭게 티끌 번뇌를 이루네.
마음을 일체에게 베풀어서
높고 낮음에 거슬리는 바 없고
안으로는 바라밀을 갖추면
의지함도 없고 처할 곳도 없네.
계를 지켜서 항상 한마음으로
저를 관해도 범하는 바 없고
뭇 도덕을 옹호하여서
계의 성품의 행을 빠트리지 말라.
3지(地)에 열 가지 법 있는데
형상이 없어서 볼 수가 없고
권도로 속여서 죽음에 들어가
세상의 경로를 나타내 보이네.
세상에 나서는 온갖 고생과 근심
걱정과 두려움 무수히 변해도
성인은 능히 오고 가면서
이것을 위태롭다고 하지 않네.
큰 도는 본래 형상이 없어서
있음도 아니고 생겨남도 없는 지혜이니
모습[相]마다 바라밀이어서
몸을 스스로 영락하네.
눈으로 봄은 위아래로 깜짝거리지만
멀리 보는 데는 한계가 없네.
바라밀을 닦고 깨끗이 하여
이 걸림 없는 과보를 얻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