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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실론 제11권
Ⅳ. 멸제취[2]
멸제6. 파무품(破無品)
[문] 없다는 논의 중에는 어떠한 허물들이 있는가?
[답] 만일 없다하면 죄와 복 등의 과보거나 속박과 해탈 등의 온갖 법도 없다.
또 아무 것도 없다고 집착하면 이 집착까지도 없는 것이다. 말을 하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없기 때문이다.
또 있다거나 없다거나 하는 따위의 논리는 다 믿음 때문에 말하게 되는데 혹 현재에 보아서 아는 것[現知]을 믿거나 혹은 추측하여 아는 것[比知]을 믿거나 혹은 경서(經書)를 따르거나 간에 만일 아무것도 없다고 말한다면 이 세 가지 안에는 있지 아니하리라.
그대는 뜻에 혹시 나는 경서를 따른다고 하기도 하나, 그 일은 옳지 못하다.
경서의 뜻도 이해하기 어려우며 어느 때에는 있다 하고 어느 때에는 없다고 말하면 어떻게 믿겠는가?
만일 추측으로 아는 것을 믿는다면 반드시 먼저 실제로 본 연후에 그와 비교하여 알아야 한다.
또 병 따위의 법은 지금 실제로 나타나 있고 마음을 내었기 때문이며, 마음을 내는 데 따라서 이 법이 잇기 때문에 없는 것이 아니다.
또 지금 병과 동이 따위는 실제로는 차별이 있다.
만일 온갖 것이 없다면 무슨 차별이 있겠는가?
그대는 뜻에 혹 “삿된 생각 때문에 분별이 있다”고 한다면 어찌하여 허공에서는 병 따위를 분별하지 않는가?
또 그대가 “어리석기 때문에 물질이라는 마음을 낸다”고 하나
만일 온갖 것이 없다면 그 어리석음도 없어야 할 터인데 어디로부터 일어나는가?
또 그대는 뜻에 “온갖 법이 없다”고 하면 이 앎[知]은 무슨 인연으로 생기게 되는가?
모든 앎은 인연 없이는 생기지 않는다. 물길을 알기 때문에 앎이라 한다.
이 앎은 없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또 만일 도무지 없다면 지금의 모든 사람들은 응당 제 마음대로 해야 하는데도 모든 착한 사람은 모두가 보시와 지계와 인욕 등의 착한 법을 즐겨하고 착하지 못한 법을 멀리 여읜다.
그러므로 알아라. 없는 것이 아니다.
또 병 따위의 법은 지금 실제로 알 수 있는데도 그대는 “현재에는 없다”고 한다.
없다는 법 때문이라면 또한 경서들도 믿지 아니해야 하며, 그렇다면 무엇을 근거 삼아 모두가 없다고 말하는가?
그러므로 “모두가 없다”는 일을 분명히 해야 한다.
만일 능히 인연으로써 밝힐 수 없다면 딴 사람의 주장하는 바가 자연히 성립되어야 한다.
다른 사람의 논리가 성립되는 까닭에 그대의 세운 법은 무너지게 되며 만일 인연이 있어서 성립시킬 수 있다면 없는 것이라고 말하지 못하리라.
멸제7. 입무품(立無品)
없음을 주장하는 사람의 말 그대는 말로써 공하다는 것을 부수지만 그러나 모든 법은 사실상 없는 것이니 모든 감관과 대경은 다 얻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모든 법 가운데서는 있음의 갈래[有分]로써 취할 수 있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온갖 법은 취할 수가 없고 취할 수가 없기 때문에 없는 것이다.
그대는 전체를 취할 수 없다 할지라도 모든 것의 부분은 취할 수 있다고 하면 그 일도 옳지 못하다.
모든 부분 중에서는 마음을 내지 않는다. 왜냐하면 굵은 병 따위의 물품은 취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부분은 있음의 갈래가 될 수 없다. 왜냐하면 있음의 갈래로 인하여 부분을 말하는데 있음의 갈래가 없기 때문에 부분도 없다.
또 타라표거나 구나가 없으면 부분도 없다. 그러므로 부분은 없다.
또 만일 세밀한 부분을 보면 항상 부분에 대한 마음을 내고 병이라는 마음은 성내지 않아야 한다. 왜냐하면 만일 항상 부분만을 생각하면 마침내 병이라는 마음을 내지 말아야 하기 때문이다.
또 만일 먼저 부분을 생각하고 뒤에 병이라는 마음을 낸다면 병이라는 마음은 오랫동안 기다려서 생겨야 하는데도 사실은 오랫동안 기다리지 않고 생긴다. 그러므로 부분을 생각하지 아니한다.
또 만일 병을 보면 부분에 대한 마음을 내지 않고 바로 병이라는 마음을 내게 된다.
또 온갖 부분이라는 것은 없다. 왜냐하면 온갖 부분을 모두 분석하고 분석하면 이에 미진(微塵)에 이르게 되고 미진까지 부수면 필경에는 아무 것도 없는 데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또 온갖 법은 필경에는 반드시 공의 지혜를 내게 된다. 그러므로 으뜸가는 진리[第一義] 중에는 모든 부분들이란 모두가 없다.
또 만일 부분을 말하게 되면 두 가지 진리를 부수게 된다. 왜냐하면 만일 사람이 있음의 갈래는 없고 모든 부분만이 있다고 하면 과거와 미래며 견도에서 끊을 바 따위의 모든 업은 없고, 이렇게 되면 세속의 이치도 없게 된다.
그대는 으뜸가는 진리로써 공을 삼는데 으뜸가는 진리에도 모든 부분은 없다.
그러므로 알아라. 모든 부분만을 말하면 두 가지 진리에 들지 못하며 두 가지 진리에 들지 못하기 때문에 없는 것이다.
또 만일 법이 한도를 지나가게 되면 바로 없는 것이 된다.
마치 부분이 있음의 갈래 보다 더 지나가게 되어서 또한 나머지 부분이 먼저의 부분보다 지나가게 된지라 보다 지나갈 수 있기 때문에 이 부분에 대한 논리는 없게 된다.
또 물질 따위도 없다. 왜냐하면 눈은 작은 물질을 볼 수 없고, 뜻은 현재의 물질을 알아내지 못한다. 그러므로 물질은 붙잡을 수 없다.
또 안식은 이것이 물질이라고 분별하지 못하고 의식도 과거에 있고 현재의 물질 중에 있지 않으므로 물질을 분별할 수 있는 것이 없다. 분별이 없기 때문에 물질은 붙잡을 수 없다.
또 첫째 번 의식은 물질을 분별하지 못하고 둘째 번의 식도 역시 그와 같으므로 물질을 분별하는 것이 없다.
[문] 안식이 물질을 붙잡고 난 다음에는 의식으로 기억한다. 그러므로 분별이 없지 아니하다.
[답] 안식은 물질을 보고 나면 바로 사라지고 다음에는 의식을 내는데 이 의식은 물질을 보지 못한다. 물질을 보지 못하거늘 어떻게 기억할 수 있겠는가?
만일 보지 않고도 기억할 수 있다면 장님들도 물질을 기억해야 할 터인데 실은 기억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의식은 기억할 수 없다.
[문] 안식으로부터 의식을 낸다. 그러므로 기억할 수 있다.
[답]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온갖 뒤따라 일어나는 마음[後心]은 다 안식으로 인하여 생기므로 모두 기억할 수 있어야 하고 또 끝내 잊어버리지도 아니해야 하리니 그로부터 생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은 그렇지 아니하다.
그러므로 알아라. 의식은 역시 기억하지 못한다. 마치 허망한 것을 기억하는 것처럼 병 따위의 온갖 물질을 붙잡는 것도 역시 모두가 거짓인 것이니, 없는 데도 망녕되이 붙잡는다. 그러므로 온갖 물질은 없다.
또 만일 눈이 본다고 말하면, 눈이 물질에 당도하여 보게 되는가 당도하지 아니하고도 볼 수 있는 것인가? 만일 당도한다면 볼 수 없을 것이니, 눈은 가는 모양이 없기 때문이다.
이 일은 먼저 밝혔었다.
만일 도착하지 않고도 본다면 여러 군데의 물질을 다 보아야 하는데도 사실은 보지 못한다.
그러므로 알아라. 당도하지 않고서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문] 물질이 알 만한 자리에 있으면 눈은 볼 수 있다.
[답] 무엇을 알 만한 자리라 하는가?
[문] 눈이 보는 때를 알 만한 자리라 한다.
[답] 만일 눈이 도달하지 아니하고도 또한 알만한 자리라 한다면 온갖 처소의 물질은 모두 다 알만한 자리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도달하거나 도달하지 아니하거나 간에 다 같이 볼 수가 없다.
그러므로 알아라. 물질은 볼 수가 없다.
또 먼저 눈과 물질이 잇고 뒤에 안식이 생긴다면 이 안식은 의지도 없고 반연도 없다. 만일 동시라 하면 눈과 물질의 인연으로 식을 낸다고 하지 못하리니 동시라 하면 서로 원인이 될 수 없는 까닭이다.
또 눈은 바로 네 가지의 요소인지라 눈이 만일 본다면 귀 등도 보아야 하리니 다 같은 네 가지 요소인 까닭이다. 물질도 그와 같다.
또 이 안식은 있는 곳이거나 없는 곳이거나 간에 두 가지가 다 같이 허물이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만일 안식이 눈에 의지한다면 그것은 있는 처소라 만일 물건이 없는 처소면 의지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만일 그대가 “식은 눈의 조그마한 부분에서 생긴다거나 혹은 전부에서 혹은 두 눈 속에서 한꺼번이거나 간에 식이 생길 때가 있는 곳이다”고 하면, 있는 곳은 곧 전부이니,
그와 같이 되면 많은 식으로 하나의 식을 이룬다는 이런 허물이 있고 또한 많은 식이 한꺼번에 생긴다는 허물도 있게 된다.
또 하나 하나의 부분을 알면서 전체를 알지 못하면 알아야 할 터인데도 실은 전부가 없다는 그런 허물이 있게 된다. 만일 없는 곳이라면 눈에 의지하지 않아야 된다.
멸제8. 파성품(破聲品)
없음을 주장하는 사람의 말 한 마디의 말조차 오히려 없다. 왜냐하면 마음이 생각 생각에 사라지고 소리도 생각 생각에 사라지기 때문이다.
부루사(富樓沙)라고 말함과 같이 이런 말은 들을 수가 없다. 왜냐하면 부(富)를 듣는데 따라 식(識)은 누(樓)를 듣지 못하고 누를 듣는 식은 사(沙)를 듣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나의 식으로 세 개의 낱말을 한꺼번에 들을 수가 없다. 그러므로 식은 하나의 말도 들을 수 없다.
그러므로 알아라. 소리는 들을 수 없다.
또 흐트러진 마음은 소리를 들으나 선정에 든 마음이라면 듣지 못한다. 선정의 마음으로 아는 바는 바로 진실이라 이 때문에 소리는 들을 수 없다.
또 소리가 귀에 도달하거나 도달하지 않거나 간에 모두 다 들을 수 없다. 들을 수가 없기 때문에 소리는 없다.
또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귀는 그것이 허공과 같은 성품이다”라고 한다.
그것은 물질이 없기 때문에 허공이라 한다. 그러므로 귀가 없고 귀가 없기 때문에 소리가 없다.
또 소리는 인연이 없다. 그러므로 소리가 없다.
소리의 인연이란 모든 요소[大]의 화합이니 이 화합의 법은 얻을 수가 없다. 왜냐하면 만일 모든 법이 체성이 다르면 화합이 없으며 만일 체성의 다름이 없으면 어찌 스스로 화합하겠는가?
설혹 한 군데 있다 하여도 생각 생각에 사라진다. 그러므로 화합하게 되지 못한다.
멸제9. 파향미촉품(破香味觸品)
내음은 붙잡을 수 없다. 왜냐하면 비식(鼻識)은 그것이 첨복의 내음인지 그 밖의 다른 내음인지를 분별하기 때문이다. 의식도 내음을 맡지 못한다.
그러므로 의식 또한 그것이 첨복의 내음인가를 분별하지 못한다.
[문] 비록 그것이 첨복의 내음임을 분별하지 못할지라도 내음만은 붙잡을 수 있다.
[답] 그렇지 아니하다. 마치 사람이 첨복[瞻蔔]나무를 얻지 못하였어도 어리석기 때문에 첨복나무라는 마음을 냄과 같이 내음의 자체는 얻지 못하면서도 어리석기 때문에 내음이라는 마음을 낼 뿐이다.
또 먼저 말함과 마찬가지로 내음이 도달하거나 도달하지 않거나 간에 붙잡는다 하면 두 가지가 다 허물이 있다. 그러므로 내음이 없다.
맛도 그와 같으며, 닿임 또한 없다. 왜냐하면 미진(微塵) 등의 부분 안에서 조차 오히려 닿임의 감각을 내지 못한다는 것은 먼저 말한 것과 같다. 그러므로 닿임이 없다.
멸제10. 파의식품(破意識品)
의식(意識)도 또한 법을 붙잡지는 못한다. 왜냐하면 의식은 현재의 물질과 내음과 맛과 닿임을 붙잡을 수 없다는 것을 먼저 이미 설명하였다. 과거와 미래는 없다. 그러므로 의식은 물질 등을 붙잡지 못한다.
[문] 만일 의식이 물질 등의 법을 모른다면 응당 자체는 알아야 한다.
[답] 법은 스스로 알지 못한다. 왜냐하면 현재도 스스로가 알 수가 없는 것은 마치 칼이 제 날을 벨 수 없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과거와 미래는 법이 없다. 때문에 또한 그 밖의 마음도 없다. 그러므로 의식은 스스로를 알지 못한다.
[문] 만일 사람이 남의 마음을 알 때에는 의식이 마음의 법을 알 수 있다.
[답] 사람은 자기 스스로를 알지 못하면서도 역시 생각하기를 “나는 마음이 있다”고 하기도 한다. 남의 마음에서도 역시 그와 같을 뿐이다.
또 미래의 법이라도 역시 남을 아는 마음을 일으킬 수 없다. 만일 이렇게 되면 무슨 허물될 것이 있겠는가?
또 뜻이 법을 반연하면 많은 허물이 있다. 뜻이 반연에 당도하거나 의식이 반연에 당도하지 않거나 간에 물질 등을 기억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과 같다. 이런 허물 때문에 의식은 법을 알지 못한다.
멸제11. 파인과품(破因果品)
없음을 주장하는 사람의 말 만일 결과가 있다면 응당 원인 가운데에 먼저 구나(求那)가 있으면서 생기거나 먼저 구나가 없으면서 생기거나 간에 두 가지가 다 허물이 있다.
마치 양쪽 손바닥에 먼저는 소리가 없었는데도 소리를 내고 술이 되는 인(因) 안에 먼저는 술이 없었는데도 술이 나오게 되고 수레의 인안에 먼저는 수레가 없었는데도 수레를 만들어지게 됨과 같아서
그러므로 원인 중에는 먼저 구나가 있으면서 결과를 내는 것이 아니다.
그대는 “원인 중에는 먼저 구나가 없으면서도 결과를 낸다”고 하면
마치 형상 없는 바람의 원소[微塵] 같은 것도 물질을 내어야 한다.
만일 그렇다면 바람에도 물질이 잇고 금강석 중에도 내음이 있어야 한다.
또 현재에 보건대 흰 실로는 흰 베를 짜고, 검정 실로는 도로 검정 베를 짜낸다.
만일 원인 중에서 먼저 구나가 없으면서도 결과를 낸다면 어째서 흰 실에서는 흰 것으로만 만들어지고 검정 것으로는 만들어지지 아니한가?
그러므로 원인 중에 먼저 구나가 없으면서 결과를 이루는 것이 아니다.
이 이치는 두 가지가 다 극단이다. 똑같이 허물이 있다. 그러므로 결과는 없다.
또 원인 중에 결과가 있다면 응당 다시 생기지 않아야 할 터인데, 있다는 것이 어떻게 생기며, 만일 없다는 것도 생기지 않아야 할 터인데 없는 것이 어떻게 생기는가?
[문] 현재에 보건대 병을 만들거늘 어떻게 결과가 없다하겠는가?
[답] 이 병이 만일 먼저 만들어지지 않았다면 어떻게 만들 수 있겠는가?
그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만일 먼저 만들어졌었다면 어떻게 만들 수 있겠는가?
그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문] 만드는 때를 만든다고 한다.
[답] 만든다는 때는 없다.
왜냐하면 모든 만든다는 갈래는 이미 만들어져 있는 그 안에 떨어져 있기 때문이고
아직 만들어지지 않은 갈래는 만들어지지 않은 그 안에 떨어져 잇기 때문에 만드는 때가 없다.
또 만일 병이 만들어진다면, 과거거나 미래거나 현재이어야 한다.
과거라면 만들어지지 않았다. 이미 사라졌기 때문이다.
미래라 하여도 만들어지지 않을 것이 아직 있지 않기 때문이다.
현재라 하여도 만들어지지 않는다. 그것이 있기 때문이다.
또 만드는 사람으로 인하여 만드는 일이 있어서 이루어지는데 이 안에서의 만드는 사람은 사실상 얻을 수가 없다. 왜냐하면 머리 등의 몸 부분은 만들어내는데 관계되는 일이 없기 때문에 만드는 사람이 없고 만드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만들 일도 없다.
또 원인은 결과보다도 먼저이거나 뒤이거나 한꺼번이거나 간에 모두가 옳지 못하다.
왜냐하면 만일 원인이 먼저이고 결과가 뒤라면 원인은 이미 사라져 없어졌거니 무엇으로 결과를 낼 것인가?
마치 아버지가 없는 것과 같거늘 어떻게 아들을 낳을 것인가?
만일 원인이 뒤이고 결과가 먼저라면 원인 자체도 아직 생기지 않았거늘 어떻게 결과를 낼 것인가?
마치 아버지도 아직 낳지 않은 것과 같거늘 어떻게 아들을 낳겠는가?
만일 원인과 결과가 한꺼번이라면 이런 이치는 있을 수 없는 것이니,
마치 두 개의 뿔이 나란히 나오는 것과 같다.
왼쪽 오른쪽이 서로 원인이 된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이치는 세 가지에 자극하여 다 옳지 못하다.
그러므로 결과가 없다.
또 원인과 결과는 하나거나 다르거나 간에 두 가지가 다 허물이 있다. 왜냐하면 만일 다르다하면 올을 떠나서 베가 있어야 되고 만일 하나라 하면 올과 베가 틀림이 없기 때문이다.
또 세간에는 어떤 법이라도 원인과 결과가 구분이 없는 것을 보지 못한다.
또 만일 결과가 있다면 응당 자기가 짓거나 남이 짓거나 함께 짓거나 원인없이 짓거나 하여야 할 터인데, 그것이 다 옳지 못하다.
왜냐하면 이러한 법이라도 자기 자체를 만드는 일은 없기 때문이다.
만일 자체가 있다면 스스로가 만들 필요가 무엇인가?
만일 자체가 없다면 어떻게 스스로가 만들 수 있겠는가?
또 어떠한 법도 자기 자체를 만드는 것을 볼 수 없기 때문에 스스로가 짓는 것이 아니다. 남이 만든다는 것도 옳지 못하다.
왜냐하면 눈과 물질은 식을 내는 데에 관계가 없기 때문에 남이 만들지 아니한다.
또 만든다는 생각도 없기 때문에 온갖 법에는 만드는 이가 없다.
마치 씨앗이 “나는 싹을 내리라”고 하는 그런 생각을 하지 아니함과 같으며
눈과 물질이 “우리들은 함께 식을 내리라”고 하는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음과도 같다.
그러므로 모든 법에는 만든다는 생각이 없다.
함께 만든다 함도 옳지 못하다.
자기와 남이라는 허물이 있기 때문이다. 원인없이 만든다는 것도 옳지 못하다.
만일 원인이 없으면 결과라는 이름조차도 없기 때문이다.
만일 네 가지가 모두 없다면 어떻게 결과가 있겠는가? 만일 있다면 말을 해야 한다.
또 이 결과는 먼저 마음이 있어 만들어지거나 먼저 마음이 없이 만들어지거나 하여야 한다.
만일 먼저 마음이 있어 만들어진다면 태중의 어린애의 눈 등의 몸들은 어느 누구의 마음이 있어서 만들어지는가?
자재천 등 조차도 만들 수 없다.
먼저 이미 설명한 업도 마음이 없는 것이며, 이 업을 짓는 데도 과거세 동안에 있었거늘 어떻게 마음이 있어서 만들어야 되겠는가?
그러므로 업 또한 마음이 없다.
만일 먼저 마음이 없이 만들어진다면 어째서 남을 괴롭히는 이가 괴로움을 받게 되고 남을 즐겁게 하는 이가 즐거움을 얻겠는가?
현재에 업을 짓는 동안에도 역시 마음으로 분별하면서
“이렇게 해야겠다. 이렇게 하지 않아야겠다”고 하리라.
만일 마음이 없이 짓는다면 어떻게 이러한 차별이 있겠는가?
그러므로 먼저 마음이 있다거나 마음이 없다거나 하는 것은 모두가 옳지 못하다.
이와 같은 온갖 감관과 대경은 다 얻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법도 없다.
멸제12. 세제품(世諦品)
[답] 그대는 비록 “갖가지 인연으로 법은 다 공하다”고 설명한다 하더라도 그 뜻은 옳지 않다.
왜냐하면 나는 먼저도 말하였거니와 만일 온갖 것이 없다면 이 논(論)도 없어서 모든 법 중에도 있지 않다.
이와 같은 따위로 공을 부수어도 그대는 필경에 대답을 하지 못하고 오히려 짐짓 공을 세우리라. 그러므로 온갖 법은 없는 것이 아니다.
또 그대가 말하는 “감관이 없다”함과 “반연이 없다”고 하는 그러한 일들은 우리가 밝힐 바가 아니다.
왜냐하면 부처님이 경전 중에서 직접으로 이 일을 방지하기 위하여 다섯 가지의 일은 생각으로나 의론으로나 표현할 수 없음을 말씀하셨으니
이른바 세간의 일과 중생의 일과 업의 인연의 일과 좌선(坐禪)하는 사람의 일과 모든 부처님의 일이다.
이 일이야말로 일체지(一切智)를 갖춘 분이 아니면 헤아려서 결단할 수 없다.
여러 부처님만이 법을 분별하는 지혜가 있고,
성문이나 벽지불은 열반을 통달하는 지혜만은 있어도 모든 법을 분별하는 지혜 중에서는 조그마한 부분을 얻을 뿐이다.
모든 부처님은 온갖 법과 온갖 종류와 근본이 되고 말단이 되는 자체의 성품과 전체의 모양과 개별의 모양을 모두 다 통달하셨다.
마치 사람이 주택 따위의 물품을 무너뜨리기는 쉬워도 만들기는 어려운 것처럼 공의 지혜는 얻기가 쉬우나 모든 법을 바르게 분별하는 지혜는 내기 어렵다.
[문] 부처님이 도량에 앉아서 얻으신 모든 법의 모양 같은 것은 부처님의 말씀처럼 이와 같이 말해야 한다.
[답] 부처님은 비록 온갖 법은 말씀하셨으나 온갖 종류는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니 해탈을 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부처님은 “모든 법이 인연으로부터 생긴다”고 말씀하셨으나
하나하나의 생기는 인연은 말씀하지 않으셨다.
다만 고통을 제거하는데 필요한 것만 말씀하셨다.
채색으로 그린 모든 빛깔과 풍류하는 등의 모든 소리와 모든 내음과 맛과 닿임 등의 한량없는 차별은 다 말씀한 일이 없으며
설령 말씀한다해도 또한 큰 이익이 없기 때문에 부처님이 이와 같은 일들을 말씀하지 않았다 하여 없다고는 말할 수 없다.
또 사람이 채색으로 그린 그림 따위의 법을 분별할 줄 모르면 그것을 없다고 말하는 것처럼 그대도 역시 그와 같다.
일을 성취할 수 없다 하여 그런 일이 없다고 말하나, 슬기로운 이에게는 있고 모르는 사람에게는 없는 것으로 된다.
마치 나면서부터 장님이
“검고 흰 것은 없다. 내가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고 하나
보지 못하기 때문에 없다고는 할 수 없는 것처럼
모든 물질도 그와 같다.
“스스로의 인연으로 성취하지 못하기 때문에 온갖 법이 없다”고 한다.
또 모든 부처님 세존은 온갖 지혜를 갖춘 분으로서 우리들의 신앙하는 바인데 부처님은
“다섯 가지 쌓임이 있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알아라. 물질 등 온갖 법은 있으며, 마치 병 등과 같이 세속의 이치 때문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