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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하나님
사무엘하 18:31-33
하나님과 성도와의 관계를 아버지와 아들 관계로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성도들의 아버지가 되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자녀들을 사랑하는 부모에게서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미국에서 ‘나는 아버지입니다’라는 책이 베스트 셀러가 되어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다고 합니다. 저자 딕 호이스트는 뇌성마비로 태어난 아들의 아버지로서 아들과의 관계를 직접 쓴 책입니다. 탯줄이 목에 감겨 산소 공급이 잘 안되어 뇌성마비로 태어난 아들을 위해 아버지는 실망하지 않고 최선을 다했다는 실화입니다. 아버지는 미식 축구와 야구 선수까지 했고 주 방위군 공군 중령으로 퇴역을 했습니다.
뇌성마비로 태어난 아들을 위해 특수 컴퓨터를 주문해서 공부를 시켰습니다. 어느 날 아들이 ‘아버지, 나 달리고 싶다’라고 하는 말을 듣고 아들을 휠체어에 태워 동네를 돌기 시작했습니다. 아들이 좋아하니까 매일 휠체어를 밀고 달렸습니다. 경주장에까지 출전하여 꼴찌가 되어도 달리니까 아들은 ‘오늘 내 몸에 장애가 살아진 것 같다’고 하며 좋아했습니다. 보스톤 대회를 비롯해서 마라톤에 무려 1000회 이상 출전하였고 400회 이상을 완주를 했으며, 6000km 미국 대륙을 횡단까지 했습니다.
아들이 ‘아버지, 고마워요. 아버지가 없었다면 저는 할 수 없었어요’라고 말하자 아버지는 ‘아들아, 네가 없었다면 나는 하지 않았다’라고 말했습니다. 아버지라서 아들을 위해서 최선을 다했다는 이야기로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있습니다. 그들은 지금도 보스톤에 살고 있습니다.
어느 심리학자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4살 때는 ‘아버지는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는 전능자’로 안다고 합니다. 12살이 되면 ‘아버지는 아는 것이 별로 없다’고 합니다. 14살이 되면 ‘아버지는 구닥달이다’, ‘쾌쾌묵은 구식이다’고 합니다. 21살이 되면 ‘아버지는 골동품이다’. 25살이 되면 ‘아버지는 어느 정도 아는 것 같기도 하다’. 30살이 되면 ‘때때로 아버지께 묻고 싶다. 나보다 더 많이 아신다’. 50살이 되면 ‘이런 경우에 아버지는 어떻게 하셨을까?’. 60살이 넘으면 ‘아버지는 훌륭하신 분이시다’라고 생각한다고 합니다. 사람은 60세가 넘어야 철이 드는가 봅니다.
신학적으로도 육신의 아버지에 대한 이미지가 곧 하나님에 대한 이미지가 된다고 합니다. 아버지로부터 꾸지람을 듣고 매를 맞고 자란 자녀들은 하나님도 무서운 하나님으로 압니다. 성경을 읽어도 율법, 진노, 심판하시는 것만 보고 ‘하나님은 무서운 분이시구나’, 진노의 하나님, 심판하시는 무서운 하나님으로만 알게 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용서와 사랑을 많이 받은 자녀들은 하나님도 용서의 하나님, 사랑이 풍성하신 하나님, 은총의 하나님으로 생각합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깊은 사랑을 성경에 두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신약에서는 탕자의 아버지입니다. 말 안듣고 집 나간 아들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다 거지가 되어 돌아 왔을 때 책망 한 마디 하지 않으시고 맞아 드리며 기뻐하는 탕자의 아버지에게서 하나님 아버지의 용서와 사랑을 배울 수 있습니다.
그리고 구약에서 다윗입니다. 다윗이 하나님의 은혜로 왕이 되었습니다. 왕이 되었지만 아들 압살롬에게 배척을 당합니다. 압살롬은 아버지를 죽이고 왕이 되려고 한 패륜아였습니다. 가만히 있어도 저절로 왕이 될 수 있을 것인데. 위로 형 둘은 죽었기 때문에 장자의 자격으로 기다리기만 해도 저절로 왕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압살롬은 아버지를 죽이고 자기가 왕이 되겠다고 군사를 몰고 다니며 쿠데타를 일으킵니다. 그러나 아버지 다윗은 아들과 대항하지 않고 피난을 하였습니다. 얼마든지 아들을 대적하고 소탕할 수 있었지만 다윗은 그렇게 하지 않고 뒷문으로 왕궁을 떠나 정처 없이 피난을 하였습니다. 왜 다윗이 대적하지 않고 뒷문으로 피해 도망을 해야만 했을까요?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아버지이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대적들에게는 한 번도 패한 일이 없고 피하여 도망한 일이 없습니다. 누구보다도 앞장서서 대항하여 싸워 대적들을 다 멸하여 죽인 장수입니다. 그러나 아들이 아버지를 대항 할 때는 뒷문으로 도망하여 피하였습니다. 아무리 아들이 패륜아고 죽일 놈이라 할지라도 아버지로서 아들을 대항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다윗은 아들이 아버지를 죽이려고 하는 무서운 세상을 비판도 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아들 압살롬을 나쁜 아들이라고 저주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기도하여 아들을 어떻게 해 달라고 기도도 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를 죽이려고 따라 오는 아들을 악한 놈, 저주 받을 놈이라고 조금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요압 장군에게 “나를 위하여 젊은 압살롬을 너그러이 대우하라”(18:5)라고 명령하였습니다. 아들은 아버지를 죽이려고 하지만 아버지는 아들을 ‘너그러이 대우하라’고 명령하였습니다. 아들을 죽이지 말라는 신신당부를 했습니다.
다윗은 아들이 잘못된 것을 자신의 잘못으로 생각하였습니다. 충신 우리아의 아내를 빼앗고 우리아를 죽였을 때 나단으로부터 크게 책망을 들었습니다. 그때 다윗은 자신의 잘못을 고백하며 회개하여 용서를 받았습니다. 죄는 회개하여 용서를 받았지만 나단 선지자는 다윗에게 “칼이 네 집에서 영원토록 떠나지 아니 하리라”(삼하12:10)고 말씀하신 바가 있습니다. 다윗은 지금 아들 압살롬을 피하여 도망하면서 나단에게 들었던 그 말씀을 깊이 생각합니다.
아들이 아버지를 죽이겠다고 했을 때 지난 날의 자신의 죄를 생각한 것입니다. 압살롬이 저렇게 패륜아가 되어 아버지를 죽이고자 하는 것은 압살롬의 잘못이 아니라 다 내 잘못이다. 뼈저리게 회개하는 것입니다. 저 아들이 잘못이 아니라 내 때문에 저렇게 되었다라고 깊은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내가 왕궁을 빼앗기고 도망하는 피해자가 아니라 저 아들이 피해자라고 생각하며 하나님께 회개하는 것입니다. 아들이 잘못된 것은 몽땅 내 탓이라는 마음으로 피난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용서만을 기다리며 하나님의 뜻에 맡기는 것입니다.
다윗이 아들에게 쫓겨 도망할 때 사울의 친족 중 한 사람인 시므이가 다윗을 보고 “피를 흘린 자여 사악한 자여 가거라 가거라”고 하며 다윗과 신하들에게 돌을 던지며 저주를 하는 것입니다(16:7). 이러한 저주의 말을 듣고 아비새가 다윗에게 “이 죽은 개가 어찌 내 주 왕을 저주 하리이까 청하건대 내가 건너가서 그의 머리를 베게 하소서”라고 했더니 다윗은 “그가 저주하는 것은 여호와께서 그에게 다윗을 저주하라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저주하도록 하셨는데 “네가 어찌 그리하였느냐 할 자가 있겠느냐”(16:10)라고 말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다윗이 한 이 말속에는 자신의 지난 날에 잘못한 일들을 기억하며 그 잘못에 대한 저주로 생각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시므이를 죽이지 말라고 했습니다. 불난 집에 부채질을 하는 것처럼 아들에게 쫓겨 도망하는 다윗을 보고 저주하는 말을 했다는 것은 참아 들을 수 없는 저주지만 다윗은 여호와께서 저를 통해 나를 저주하게 하심이라고 신앙적으로 받아 들였습니다.
이 말씀 앞에서 우리는 합당하지 않은 말을 듣거나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어떻게 하는가를 돌이켜 보아야 합니다. 사기를 당하고 큰 손해를 보았을 때, ‘하나님이 저 사람을 통해서 나에게 손해를 보게 하셨다’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할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 진리를 생각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자녀들이 잘 자라고 훌륭한 사람이 되는 것은 축복이지요. 그러나 자녀들이 속을 썩이고 나쁘게 자라는 것은 부모로서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대부분의 부모들은 자녀들이 잘못되는 것은 자녀에게 문제가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아니면 나쁜 친구 때문이라고 하며, 부모에게는 전혀 책임이 없는 것처럼 말합니다. 그러나 자녀는 부모의 영향을 받고 자랍니다. 잘잘못은 부모에게 그 영향이 크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자녀들이 잘못되었을 때 부모는 그 자녀를 통해서 자신을 돌이켜 보아야 합니다. 자녀는 부모의 거울입니다. 부모의 열매입니다. 자녀가 나빠서가 아니라 부모의 잘못한 것들이 자녀에게서 나타난 것입니다.
가끔 속 썩이는 자녀를 둔 부모에게서 ‘자식이 아니라 원수’라는 말을 듣습니다. 그러나 누가 원수입니까? 부모가 자식에게 원수이지요. 압살롬이 아버지를 원수로 알고 죽이려고 한 것은 부모가 자식의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다윗은 아버지로서 아들 압살롬을 원수로 생각지 않고 끝까지 아들이였습니다. 그러나 압살롬은 아버지를 원수로 죽이고자 한 것입니다. 오늘 부모와 자식들 사이에 원수가 많습니다. 그래서 자식이 부모를 죽이는 일까지도 있습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납니까? 자식의 잘못이 부모 때문이라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속 섞이는 자녀가 있다면 자신들을 돌이켜 보아야 합니다. 아무도 알지 못한, 자신도 잊고 있었던 숨겨진 지난날에 자신의 모습들이 자녀에게서 나타나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자녀들에게 속았습니까? 자식에게 속았다고 생각하기 전에 지난 날에 부모를 속였던 것을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그 버릇이 누구에게서 배운 것입니까? 부모에게서 배운 것입니다.
자녀들이 속을 썩입니까? 그 자녀를 통해서 자신을 돌이켜 보아야 합니다. 지난날에 잘못한 것을 회개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내가 지난날에 잘못한 것이 자녀들에게 나타난 것으로 마음 아파하는 부모가 되어야 합니다. 자녀들의 잘못을 탓하거나 나무랄 것이 아니라 자신을 책망하는 부모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자녀는 하나님의 뜻에 맡겨야 합니다.
다윗은 압살롬이 반역할 때 대적하지 않고 도망했습니다. 압살롬을 이길 수 없어서 도망한 것이 아닙니다. 아들은 아버지를 죽이려고 하지만 아버지는 아들을 죽이고자 하는 마음은 조금도 없었습니다. 다윗이 도망한 것은 자신이 죽을까 두려워서가 아니라 아들을 살부자로 만들지 않기 위해서 였습니다.
압살롬은 하나님께서 가만두지 않았습니다. 압살롬은 낙타를 타고 다윗의 부하를 향해 달리다 나무 가지에 머리가 걸려 대롱대롱 달려있고 낙타는 다아나 버렸습니다. 이것을 보고 다윗의 신하 중 요압이 명령하여 죽였습니다. 요압은 다윗의 가장 신뢰하는 장군이였지만 다윗 왕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아버지요 왕을 대적하는 압살롬을 죽이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압살롬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다윗은 “마음이 심히 아파”했습니다(33).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압살롬아”, 죽은 아들을 애통하였습니다. 아들은 아버지를 죽이려고 했지만 아버지는 끝까지 대적이 아니라 아들이라고 불렀습니다. 이같은 아버지 다윗에게서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찾을 수 있습니다. 다윗은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면, 압살롬 내아들아 내 아들아”, 여기서 아버지의 참사랑을 봅니다.
그러나 다윗은 아들을 대신하여 죽지 못하였습니다. 여기서 인간 사랑의 한계를 느끼게 됩니다. 그러나 아버지 하나님은 범죄한 죄인들을 위하여 친히 죽어 주셨습니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셔서 대신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하시므로 죄인들을 구원해 주셨습니다. 인간의 아버지는 때로는 사랑이 식어져 자녀를 돌보지 않기도 하고, 내 버리기도 합니다. 하물며 자녀를 상품화 하여 팔아 자기 배를 채우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하나님은 죄인을 위하여 죽기까지 하셔서 죄인을 용서하시는 분이십니다.
주기도문에 ‘하나님’이라는 이름을 없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로 불려집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은 ‘우리 아버지’가 되십니다. ‘아버지’ 속에 모든 것이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용서도, 사랑도, 돌보심도, 베푸심도 아버지 안에 다 들어 있습니다. 탕자의 아버지와, 아버지 다윗에게서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가 어떤 분이신가를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된 자들로서 하나님을 말씀도 잘 듣지 않고 거역하고 대적하고 불평하고 원망하였던 잘못을 용서를 빌 수 있어야 합니다. 압살롬이 악하고 나쁜 놈이라고 하겠지요. 그 나쁜 놈이 압살롬만이 아니라 오늘 바로 나와 여러분입니다. 육신의 부모를 속썩이고 마음 아프게 해 드린 압살롬이 바로 나요 여러분입니다. 나아가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 섬기고 귀신 섬김으로 하나님을 원수같이 대적하였던 우리들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친히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하시며 우리를 용서해 주신 그 사랑을 진심으로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아무리 잘못한 일이 있어도 용서해 주시는 아버지가 되십니다. 하물며 하나님께 욕돌리고 대적해도 용서해 주시는 아버지가 되십니다.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를 다시 한번 감사하며 그 은혜를 찬송하며 영광 돌릴 수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시기를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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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소중한 말씀 감사합니다!!
설교준비에 도움이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은혜의 설교 감사합니다.
설교 감사합니다.
설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