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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대왕릉.기행문.앨범(3) ◈여행일자 : 5박6일간 2004.7.30(금)~8.4(수) ◈주 관 : 해사랑 TOUR (대표 신정범) ◈참 여 : 49명 ①덕유산악회 27명 (대장 이경훈) ②가림산악회 23명 (대장 정연랑) ③금수산악회 9명 (대장 박효종) ▶2022.01.재편집하였음 |
네째날 2004.08.02.(일) 이도백하-통화시-집안시-(광개토대왕 유적지-압록강)-관전시-(LONG DU HOTEL) |
2004.08.01(토) 셋째날 백두산종주 산행이 끝나고 08.02(월)~08.04(수)까지는 일반 관광지 여행을 한 기록이다.
◈ 2004.08.02(일) 제4일 날씨 : 맑고 더웠음
새벽 한 시경. 승합차가 두 번 왕래하며 기차역까지 실어 날랐다.
30여 분후 개찰을 하고 열차에 승차하였다.
한국의 침대열차로 생각하면 오산이다. 한쪽 창가는 통로이고 반대 측 창가를 기준으로
3층 침대가 마주보며 6개로 구성되어 있어,2,3층은 앉기도 힘들 정도로 낮았다.
나는 맨 아래층, 반쯤열린 창을 닫으려 해보니 꼼짝도 하지 않아 포기했다.
창가로 머리를 두고 누어보니 열차바퀴가 레일을 지나는 소음과 창밖에서 고약한 냄새가 날아들어 통로 쪽으로 돌아 누었다.
머리맡에 위층으로 오르는 계단이 있어 찜찜하긴 했지만...
며칠 밤을 잠을 설치고 오늘 산행의 쌓인 피로한 터라 모두들 정신없이 골아 떨어졌다
00:00 ▲ 야간 침대열차 ▲
그래도 누워서 잠을 자서 피로가 많이 풀렸다.
가끔 시커먼 굴뚝연기가 많은 공장지대가 창밖으로 보이는데 원자로같이 생긴 여러 개의 굴뚝에서 엄청난 증기를 내뿜는 곳은
아마 염색공장인가 보다.
이런 공해물질들이 계절풍을 타고 한국 상공까지 날아와 애를 먹인다니 보통일이 아니다.
12시 되어서야 통화 역에 도착하여 마중 나온 버스를 타고 둘째 날 저녁을 먹었던 미아리 식당에 당도하여 한식으로 아침식사를 했다.
11:50 ▲ 통화역(集安市) ▲
00:00 ▲ 集安市 구글지도 ▲
지안시(퉁화시) (集安市)
중국 지린 성 퉁화 시
지안시(집안시, 중국어: 集安 또는 輯安, 병음: Jí'ān)은 중화인민공화국 지린성(吉林省) 퉁화시(通化市)의 현급시이다.
면적은 3408 km², 인구는 약 23만 명이다.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자강도 만포시와 마주보고 있다.
지리
지안시(集安市)는 지린성 남동부, 압록강 중류에 위치하고 있다.
남동쪽은 압록강을 경계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접하며, 북쪽은 퉁화 현, 동쪽으로 바이산시, 서쪽으로는 랴오닝성(遼寧省) 환인현(桓仁縣), 남서쪽으로는 단둥시 콴뎬 만족 자치현과 마주한다.
삼림지역이 총면적의 3분의 2를 차지해 장백삼 등을 특산물로 한다.
연평균 기온은 섭씨 6도, 강수량은 900mm 정도이다. 북·중 국경을 이루는 압록강이 이곳을 흘러 양국이 공동으로 사용할 대형 수력발전소가 건설되고 있다. 고구려의 수도였던 국내성이 있던 곳으로 비정되고 있다.
역사
본래 구려(句驪)의 터전으로 여겨지며, 기원후 3년에 고구려는 도성을 졸본성에서 지안(集安) 시내의 국내성으로 천도하였다.
209년에는 부근의 환도성으로 천도하여 427년에 평양성으로 천도할 때까지의 425년간 고구려의 수도였으며, 당시의 유적이 아직도 많이 남아 있다.
고구려가 멸망하면서 당나라가 가물주 도독부를 설치하였으며, 이후 발해, 요나라, 금나라, 원나라의 통치를 받았다.
청나라가 들어서면서 백두산 일대는 '용맥'이라는 신성한 땅으로 여겨져 금봉토로 지정되었고, 이 지역도 출입이 통제되었다.
그러나, 청나라 말기가 되면 점차 개발이 진행되어 1902년에 집안현(輯安縣)이 설치되었고, 1965년에 집안현(集安縣)으로 개칭한 후 1988년에는 현급시로 승격해 현재에 이른다.
자료 위키백과
https://ko.wikipedia.org/wiki/%EC%A7%80%EC%95%88%EC%8B%9C_(%ED%89%81%ED%99%94%EC%8B%9C)
00:00 ▲ 好太王啤/太王堎유적지 ▲
구글지도 참고자료입니다.(集安市 好太王啤/太王堎유적지의 위치 참고지도)
00:00 ▲ 好太王啤/太王堎유적지 ▲
글지도 참고자료입니다.(集安市 好太王啤/太王堎유적지의 위치 참고지도)
13:39 ▲ 광개토 대왕릉비.대왕왕릉 유적지 ▲
집안시 광개토대왕 유적지 탐방.
광개토 대왕비는 好太王啤로, 광개토 대왕릉은 太王堎으로 비꾸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을 완료하고 나서 고구려 역사 말살을 위한 그들의 소위 東北工程정책을 밀어붙이는 중심지가 여기이다.
광활한 면적에 광개토대왕비는 방탄투명유리로 된 4면 창의 건물을 씌워 놓았고, 조금 떨어진 위치에 왕릉이 있는데 무덤내부는 촬영금지, 감시 장치도 많이 장착해 있었다.
뒤편 산봉우리에서 내려온 줄기가 왕릉을 이루고 집안시 마을을 좀 지나 압록강이며 그 건너 보이는 산들이 북한이다.
중국 동북지역이 우리 선조들께서 다스리던 땅이었다는 것이 실감이 간다.
13:40 ▲ 광개토 대왕릉비유적지 ▲
13:43 ▲ 유적지 매표소 ▲
세계 문화유산
광개토 대왕릉비(好太王碑)
그 이름도 자랑스러운 광개토 대왕
요금 ¥30 / 패키지 티켓 ¥100(장군총+광개토 대왕릉비+위산 귀족묘지+환도 산성)
참고 (0435)626-2796
가는 법 터미널에서 7번, 또는 시내에서 6번 버스를 타고 타이왕베이(太王碑) 정류장 하차.
이용 시간 09:00~17:00
고구려의 제19대 왕인 광개토 대왕(재위 391~413)의 업적을 기리고자, 아들 장수왕이 414년에 세웠다.
화강암 대석 위에 세운 비는 높이 6.39m, 무게는 37톤에 달한다.
한 면이 1.35~2m에 달하는 사면체 응회각력암에 총 44행 1,775개의 글자를 어른 주먹만 한 크기로 새겼다.
비문의 내용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뉜다.
첫머리에는 고구려의 시조인 주몽부터 광개토 대왕에 이르기까지 어떻게 고구려가 계승 · 발전되어 왔는가를 소개한다.
두 번째 부분은 광개토 대왕의 정복 활동을 연대순으로 기록했다.
세 번째 부분에는 무덤을 지키는 수묘인의 출신지와 차출 방식 및 수묘인의 매매 금지 등에 관한 규정을 새겨 놓았다.
그러나 비문을 보호하기 위해 사방을 유리로 막아 놓아서 자세히 관찰하긴 어렵다.
먼발치에서 바라보는 광개토 대왕릉비는, 인위적으로 다듬어 규격이 딱 떨어지는 비석이 아니라 더 웅장하고 자유로운 기개가 돋보인다. 그 자연스러운 형태에서 고구려인들의 자유롭고 호방한 기질을 엿볼 수 있다.
자료 : 다음백과
https://100.daum.net/encyclopedia/view/87XX77900416
13:44 ▲ 광개토 대왕릉비(好太王碑) ▲
13:44 ▲ 광개토 대왕릉비(好太王碑) 유적지 ▲
13:44 ▲ 광개토 대왕릉비(好太王碑) ▲
광개토 대왕릉비 앞에서 기념샷 한 컷
13:45 ▲ 광개토 대왕릉비(好太王碑) ▲
13:46 ▲ 광개토 대왕릉비(好太王碑) ▲
13:46 ▲ 광개토 대왕릉비(好太王碑) ▲
00:00 ▲ 광개토 대왕릉비(위키백과) ▲
광개토 대왕릉비(好太王碑)
414년 고구려 제19대 광개토 대왕의 업적을 기념하기 위해 아들 장수왕이 세운 비석이다. 사면에 비문이 새겨져 있는데 높이 6.39m, 너비 1.35~2m에 달하는 한국 최대의 비석이다.
비문은 크게 3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1부는 주몽의 건국 신화를 비롯하여 광개토 대왕에 이르는 역대 왕의 치적과 약력, 그리고 비의 건립 경위가 기술되어 있다.
제2부는 핵심 부분으로 대왕의 정복 활동에 관한 기술이 주를 이루고 있다.
제3부는 묘를 관리하는 수묘인에 관한 내용이 기술되어 있다.
비문의 내용 중 가장 논란이 많은 부분은 제2부의 정복 관련 기사이다. 그중에서도 신묘년 기사는 최대의 쟁점이 되어 왔다.
현재에도 완전한 결론은 나지 않았지만 이 비석이 광개토 대왕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세워졌다는 점을 감안해 볼 때 전체적인 내용은 고구려의 성장과 발전 과정에서 해석하는 것이 바람직하다.(자료 : 위키백과)
13:52 ▲ 광개토 대왕릉비(好太王碑) ▲
광개토 대왕릉(好太王陵)
광개토 대왕릉비에서 북서쪽으로 300m 떨어져 있다. 거대한 자갈 무더기가 쌓여 있고 주위에 화강암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다.
원래는 장군총처럼 화강암을 계단식으로 쌓아올린 석실묘였고, 원형 그대로 보존되었다면 장군총보다 4배 컸을 것이라고 한다.
무덤에 ‘願太王陵安如山固如岳
(태왕의 능이산처럼 평안하고, 큰 산처럼 굳건하길 기원합니다.)’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었다.
‘태왕(太王)’이란 칭호는 광개토 대왕를 가리키므로, 광개토 대왕릉으로 추정하고 있다.
또한 2003년 중국이 능을 조사하면서 발견한 청동 방울이 이런 추정을 강하게 뒷받침하고 있다.
방울의 몸체 사방에 ‘新卯年(신묘년)’, ‘好太王(호태왕)’, ‘所造鈴(소조령)’, ‘九十六(구십육)’이라고 3자씩 문자가 적혀 있었다.
이 글을 해석하자면 ‘신묘년(391년)에 호태왕이 96번째 은방울을 만들었다.’라는 뜻으로,
신묘년은 광개토 대왕이 재위했던 해다.
자료 : 다음백과
https://100.daum.net/encyclopedia/view/87XX77900416
13:55 ▲ 광개토 대왕릉(好太王陵) ▲
13:55 ▲ 광개토 대왕릉(好太王陵) ▲
13:56 ▲ 광개토 대왕릉(好太王陵) ▲
13:59 ▲ 광개토 대왕릉(好太王陵) ▲
13:59 ▲ 광개토 대왕릉(好太王陵) ▲
14:00 ▲ 광개토 대왕릉(好太王陵) ▲
광개토 대왕릉에서 보이는 집안시(集安市)
14:01 ▲ 광개토 대왕릉(好太王陵) ▲
태왕릉 (太王陵)
우산하 541호분, 우산묘구 제541호묘
시대 고대/삼국/고구려
건립시기 고구려시대(4세기 말∼5세기 초)
성격 무덤, 왕릉
유형 유적
소재지 중국 길림성 집안시 태왕향
분야 역사/고대사
개설
태왕릉은 중국 길림성 집안시 태왕향 통구 분지의 우산 남쪽 기슭에 위치하고 있으며, 방형 평면을 가진 계단식 돌무지무덤이다.
이 능은 흙 담으로 쌓은 능원 내에 자리한다. 무덤의 동편으로 제대로 불리는 시설이 있고 동북편으로는 건물지 등이 확인되었으며,
남쪽으로 딸린무덤[陪塚]이 있었다고 하나 확실하지는 않다.
1913년 조사 시 출토된 “원태왕릉안여산고여악(願太王陵安如山固如岳)”이라는 명문이 있는 벽돌에 근거하여 태왕릉이라고
불리게 되었으며, 1966년 중국 측에서 우산묘구 제541호묘(JYM 0541)로 편호하였다. 이 능에서 동북쪽으로 300m 거리에 광개토왕비가 있다.
내용
태왕릉은 잘 다듬은 돌로 축조한 계단식 돌무지무덤으로서 현재 11단이 남아 있다. 잔존하는 무덤의 정상부는 한 변이 24m 정도의 평평한 면을 유지하고 있으며, 여기에 매장주체부가 노출되어 있다. 매장주체부는 돌로 쌓은 돌방[石室]과 돌방 내에 맞배지붕 형태의 돌덧널[石槨]이 있고, 돌덧널 내에는 관대(棺臺)가 남북 방향으로 두 개 놓여 있으며, 주검은 나무널[木棺]에 안치되었을 것이다. 돌방은 한 변 길이 3.24m, 2.96m의 장방형에 가까운 방형이고, 서벽 중앙에 길이 5.4m, 폭 1.96m의 연도(羨道)가 있다.
분구 위에서는 기와와 연화문 와당, 벽돌이 출토되어서 분구 정상부에 목조 구조물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이러한 구조물이 왕릉의 상징으로 보고 있다.
무덤의 남쪽으로 3m 거리에 돌널[石棺]형태의 딸린무덤이 있었다고 하나 확실하지 않다. 또한 중국에서는 무덤의 동쪽을 50∼68m 거리에 1.5m 높이로 쌓아 올린 석단 시설을 제대로 보고 있으나, 그 용도는 확실하지 않다. 무덤의 동북쪽 120m 지점에도 건물지가 있으며, 능원의 동쪽 담장과 9m 정도 간격이 있어 초소시설로 추정된다.
무덤에서는 여러 유물이 출토되었는데, 특히 Y자형으로 부조된 연화문 와당은 태왕릉형 와당이라고 할 만한 특징적인 것이다.
이외에도 금·금동·청동·철기와 토기 등 1,000여 종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금동제 장막걸이 장식, 상 다리 등과 등자(鐙子), 행엽(杏葉), 띠 연결고리 장식 등의 마구와 “신묘년 호태왕O조령구십육(辛卯年 好太王O造鈴九十六)”이라는 명문이 새겨진 청동방울이 출토되어 주목을 끌었다.
의의와 평가
태왕릉은 그 거대한 규모와 명문 벽돌이 출토되어 일찍부터 고구려 왕릉으로 추정되었던 무덤이다. 무덤의 주인공으로는 광개토왕, 장수왕, 고국천왕 등이 비정돼 왔는데, 출토된 유물과 무덤구조로 미루어보아 태왕릉의 건립 연대는 4세기 말에서 5세기 초가 우세하여 많은 이들이 광개토왕의 무덤으로 보고 있다. 고구려 최전성기 때의 대형 돌무지무덤으로서 국내성 시기 고구려 왕권의 크기와 지배력을 짐작케 해주는 중요한 유적이다
자료 : 다음백과
https://100.daum.net/encyclopedia/view/14XXE0058998
14:01 ▲ 광개토 대왕릉(好太王陵) ▲
14:02 ▲ 광개토 대왕릉(好太王陵) ▲
14:02 ▲ 광개토 대왕릉(好太王陵) ▲
광개토 대왕릉에서 보이는 집안시(集安市)
14:03 ▲ 광개토 대왕릉(好太王陵) ▲
14:03 ▲ 광개토 대왕릉(好太王陵) ▲
14:04 ▲ 광개토 대왕릉(好太王陵) ▲
14:06 ▲ 광개토 대왕릉(好太王陵) ▲
14:07 ▲ 광개토 대왕릉(好太王陵) ▲
광개토왕 (廣開土王)
고구려 제19대 왕, 영락대왕, 永樂大王, 호태왕, 好太王,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 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 고담덕, 高談德
출생 374(소수림왕 4)
사망 412(광개토왕 22)
국적 고구려, 한국
재위 391년∼412년
시호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
개요
대외적인 정복사업을 정력적으로 수행하여 재위기간 동안 고구려의 영토와 세력권을 크게 확장시켰다.
영락(永樂)이라는 연호를 써서 중국과 대등한 입장을 보였다. 본명은 담덕(談德). 중국측 기록에는 안(安)으로 전한다.
영락대왕(永樂大王)이라고도 한다. 제18대 고국양왕(故國壤王)의 아들이다.
386년(고국양왕 3) 태자로 책봉되었다가, 391년 즉위했다(→ 고구려의 대중국전쟁).
정복사업
즉위초부터 예성강을 경계로 대치하고 있던 백제에 적극적인 공세를 취했다.
392년 7월 백제를 공격하여 석현성(石峴城)을 비롯한 10개 성을 빼앗고, 10월에는 사면이 가파르고 바다로 둘러싸인 난공불락이라던 관미성(關彌城)을 20여 일 만에 함락시켰다. 394년 7월 빼앗긴 땅의 탈환을 위해 침공해온 백제군을 수곡성(水谷城)에서, 395년 8월에는 패수(浿水)에서 각각 격퇴하고 8,000명을 사로잡았다. 396년에 광개토왕은 직접 수군(水軍)을 이끌고 백제를 공격했다. 이때 고구려군은 해로로 임진강 방면에 진출하여 한강 너머에까지 진격해서 58성 700촌락을 쳐부수고, 백제의 아신왕(阿莘王)에게 항복을 받고 많은 전리품과 백제왕의 동생과 대신 10명을 인질로 잡아오는 큰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백제는 399년 임나가야(任那加倻), 안라(安羅), 왜(倭)의 연합세력과 함께 신라를 공격해왔으며, 404년에는 다시 왜군과 연합하여 고구려의 대방고지(帶方故地)를 침공했다. 광개토왕은 5만의 병력을 보내 신라에서 그들을 몰아내고 가야지역까지 추격했고 대방고지에 침입한 왜구도 몰아냈다.
아울러 신라에 대해서는 친선관계를 맺고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400년에는 왜구의 침입으로부터 신라를 구원하여 영향력을 더욱 강화했다.
서쪽으로도 진출하여 랴오둥[遼東] 지방을 놓고 후연과 싸웠다.
당시 고구려는 모용씨(慕容氏)의 후연국(後燕國)과 서쪽 국경을 맞대고 있었다. 후연과는 사절을 파견하는 등 한동안 평화적인 관계를 유지했지만, 400년 후연왕 모용성(募容盛)이 소자하(蘇子河) 유역에 위치한 고구려의 남소성(南蘇城)과 신성(新城)을 침략하자 양국관계는 악화되었다.
이에 402년 랴오허[遼河]를 건너 멀리 평주(平州)의 중심지인 숙군성(宿軍城)을 공격하여 평주자사(平州刺史) 모용귀(募容歸)를 도망치게 했다.
404년에도 후연을 공격하여 요동성을 비롯한 랴오허 동쪽지역을 차지했다. 이는 전국시대 연(燕)에게 잃었던 고조선의 땅이 700여 년 만에 고구려에 의해 회복된 것이었다. 그 뒤 405년 후연왕 모용희(募容熙)의 요동성 침입과 406년의 목저성(木抵城) 침입을 물리치고, 산둥 성[山東省]지역을 차지하고 있던 남연(南燕)과 긴밀한 관계를 맺어 후연을 견제하고 랴오허 동쪽지역을 더욱 확고히 장악했다.
그러나 서방으로의 진출은 408년 후연을 멸망시키고 등장한 북연(北燕)과 우호관계를 유지함으로써 일단락되었다.
이밖에도 392년에는 북으로 거란(契丹)을 정벌하여 남녀 500명을 사로잡고 거란에 잡혀 있던 고구려인 1만 명을 데리고 돌아왔다.
395년에는 시라무렌 강 방면의 거란으로 추측되는 비려(碑麗)를 친정하여 염수(鹽水) 방면의 부락 600~700영(營)을 격파하고 많은 가축을 노획했다.
398년에는 숙신(肅愼)을, 410년에는 동부여(東夫餘)를 정벌하여 굴복시켜 북쪽과 동쪽으로 영역 내지 세력권을 확장했다.
이리하여 재위기간중에 64성과 1,400촌락을 정복했으며, 고구려의 영역을 크게 확장시켜 서로는 랴오허, 북으로는 개원(開原)~영안(寧安), 동으로는 훈춘[琿春], 남으로는 임진강 유역에 이르렀다. 이와 같이 중국민족과의 뼈저린 투쟁의 목표이던 랴오둥을 완전히 차지하고 또 동북의 숙신을 복속시켜 만주대륙의 주인공이 되었다.
내치
또한 내정의 정비에도 힘써 장사(長史)·사마(司馬)·참군(參軍) 등의 중앙관직을 신설하고 역대 왕릉의 보호를 위하여 수묘인(守墓人)제도를 재정비했다.
393년에는 평양에 9사(寺)를 창건하여 불교를 장려하기도 했다.
그의 능(陵)과 생전의 훈적(勳績)을 기록한 능비(陵碑)가 414년에 건립되었는데, 지금도 중국 지린 성[吉林省] 지안 현[輯安縣]에
남아 있다. 능에 대해서는 장군총(將軍塚)설과 태왕릉(太王陵)설이 갈라져 있다. 시호는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이다.
자료 : 다음백과
https://100.daum.net/encyclopedia/view/b02g1228b
14:08 ▲ 광개토 대왕릉(好太王陵) 출입구 ▲
14:09 ▲ 광개토 대왕릉(好太王陵) 안내석 ▲
광개토 대왕릉 관광을 마치고 얼마 안 떨어진 인근에 있는 장군총으로 이동하였다..
광개토대왕의 아들이라고 하며 선왕의 묘비를 이분이 조성했다고 한다.
고구려의 뛰어난 축성기술을 이용한 커다란 돌로 쌓아올린 묘지로 중학교 역사공부에서 나왔던 기억이 난다.
햇살이 대단히 뜨거운 날씨다.
00:00 ▲ 장수왕(장군총) 위치도.구글지도 ▲
14:30 ▲ 장수왕(장군총) 입구 ▲
장군총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Tomb of the General 2.jpg
장군총(將軍塚)은 중국 지린성 퉁화시 지안시(集安市) 퉁구(通溝)의 토구자산(土口子山) 중허리에 있는 고구려 시대의 돌무덤(石塚 석총)으로서, 현재 가장 완벽한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돌무지무덤이다. 산 아래에 광개토왕릉비가 있다.
무덤은 총 7층의 단계식 피라미드로 이루어져 있고, 평면은 장방형으로서 한 변의 길이는 31.5~33미터이며, 무덤의 높이는 현재 14미터로 아파트 5층 높이에 달한다. 기단(基壇)의 무덤 둘레로 한 변에 세 개씩 호석(護石)이라 하는 적석 밀림 방지석이 배치되어 있는데, 분실되었는지 오직 동변만 가운데 호석 없이 두 개뿐이다.
정부(頂部)는 만두형(饅頭形)을 하고 상단부에 1열의 구멍이 있어 정상에 건축물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 안쪽에는 향당이라 불리는 사당이 있었으리라 추정했지만, 무덤 동쪽에 초대형 제단이 발견됨으로써 현재는 불탑이나 비석이 서 있었을 것으로 보는 추세이다. 안팎 전부를 화강석으로 쌓아올린 석축릉으로 구조가 정연하고 규모가 매우 장대하다. 이 묘는 일찍이 도굴당한 듯하여 아무런 부장품이 남아 있지 않으며, 축석분으로서 거의 안전한 모양을 갖추고 있는 유일한 것이며, 중국에서도 볼 수 없는 독특한 양식이다.
내부 구조를 살펴보면, 묘실은 횡혈식으로 벽화가 그려졌던 흔적이 있으나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 석실의 위치는 높고 밑으로부터 3단째 단을 상(床)으로 하고 있다. 최상단의 상면(上面)과 거의 같은 높이에 장방형의 거대한 1매의 천정석이 있으며, 연도(羨道)는 서남방으로 있으며 천장은 큰 돌 3매로 되어 있다.
현실의 4벽은 6단으로 쌓고 각 벽의 위에는 굵고 모진 기둥을 옆으로 높여서 천정석으로 받치고 있다.
현실의 크기는 가로·세로의 높이가 모두 5미터 이상이며 상(床)으로 오기(基)의 관대(棺臺)가 있으며, 기단의 4주에는 넓이 4미터의 돌을 두르고 자갈로 채워져 있다.
4벽과 천장에는 본래 칠을 하였으며 벽화가 있었던 흔적이 보이나 지금은 전부 박락(剝落)되고 없다.
각 층의 외부에는 기와로 덮었던 것으로 생각되나 모두 무너지고 잡초만이 무성하다.
자료 : 위키백과
https://ko.wikipedia.org/wiki/%EC%9E%A5%EA%B5%B0%EC%B4%9D
14:31 ▲ 장수왕(장군총) ▲
장군총 (將軍塚)
우산하1호분(禹山下一號墳)
무덤은 화강암 장대석을 이용하여 방대형 단을 7층으로 쌓고 제4층 단의 중앙에 널길과 돌방을 설치했다. 묘실의 방향은 서남향이며 무덤의 네 모서리는 정확히 동서남북에 맞추어졌다. 무덤 중심부의 높이는 11.28m, 밑면적 860㎡이다. 1,100여 개의 장대석으로 외형을 축조한 후 내부는 강돌로 채웠다.
무덤은 오래 전에 도굴되어 묘실에서는 유물이 발견되지 않았고 무덤 남쪽 밑의 흙더미에서 동제장식편이 수습되었을 뿐이다. 무덤둘레에는 잔자갈을 깔고 그 바깥에 돌담을 둘러 묘역을 구분했다. 돌담은 현재 그 자취만 남아 있다.
무덤의 거대한 규모와 5기에 이르는 배총, 기단식돌방무덤인 점을 근거로 왕릉이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광개토왕릉이나 장수왕릉으로 보는 견해가 많다.
정식 명칭은 우산하1호분(禹山下一號墳)이다.
무덤 앞으로는 퉁거우 평야[通溝平野]가 펼쳐져 있고 그 너머에 압록강이 흐른다.
무덤은 화강암 장대석을 이용하여 방대형 단을 7층으로 쌓고 제4층 단의 한가운데에 널길과 돌방[石室]을 설치했다.
묘실의 방향은 서남향이며 무덤의 네 모서리는 정확히 동서남북에 맞추어졌다.
무덤 중심부의 높이는 11.28m, 밑변 한 변의 길이는 29.34m, 밑면적 860㎡이다. 1,100여 개의 장대석으로 외형을 축조한 후 내부는 강돌로 채웠다. 무덤축조에 쓰인 석재의 부피는 총 6,000㎥에 이른다.
무덤의 기초부는 지면을 깊이 5m가량 파내고 자연석을 다져넣은 후, 그 위에 큰돌을 깔았는데 제1층 기단부의 바깥으로 4m가량 나오게 하여 무덤돌이 내리누르는 힘에 견딜 수 있게 했다.
무덤의 제1층은 4단으로, 2~7층은 모두 3단으로 장대석을 쌓았다.
이중 제1단에 쓰인 장대석 중 큰 것은 길이 5.7m, 너비 1.12m, 두께 1.10m에 이른다.
각층의 윗단 장대석 상면과 위층 하단 장대석 하면에는 서로 맞물리도록 7~8㎝ 너비의 요철부를 만들었다.
제1층의 각면에는 일정한 간격으로 높이 5m가량의 대형 석재로 버팀돌을 세워 무덤을 지탱하게 했는데, 북면의 1개는 깨어져 없어지고 현재는 11개만 남아 있다.
널길은 5층 남면의 하단 중앙에서 안으로 기울어 내려가게 제3층 상면을 바닥으로 하는 널방[玄室]과 이어진다. 널길의 길이는 5.5m이며 널길 입구에는 문지방과 같은 거대한 장대석을 가로놓아 제4층의 벽석 속으로 감추어지게 했다. 널방은 장대석을 6단으로 쌓아올려 정방형의 벽을 이루게 하고 그 위에 역계단식 평행줄임방식으로 들보 역할의 석재를 얹어 마무리한 다음 길이 4.5m, 너비 3.8m 크기의 판석을 덮어 축조했다.
천장돌의 넓이는 약 60㎡, 무게는 50t가량이다. 널방의 길이와 너비는 각각 5.0m, 높이 5.5m이다. 널방 안에는 동서로 나란히 2개의 널받침[棺臺]을 설치했다. 널받침은 길이 3.7m, 너비 1.5m이며 윗면 가장자리를 요철형으로 두드러지게 하여 관이 놓일 위치를 나타냈다. 널방 안에는 본래 석회를 발랐으나 현재는 그 자취만 남아 있다. 무덤정상부에 놓인 돔형의 석재 상면 4변에는 21개의 둥근 구멍이 뚫려 있고 주변에서 상당량의 와당편을 발견했다.
무덤의 남쪽 흙무더기에서 연꽃무늬 등이 장식된 와당편과 녹슨 쇠사슬이 여러 점 발견되었는데, 둥근 구멍은 쇠사슬로 난간을 설치했던 것이고, 와당과 기타 건축자재류로 보아 정상부에 사당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무덤은 오래 전에 도굴되어 묘실 내에서는 일체 유물이 발견되지 않았고 단지 무덤 남쪽 밑의 흙더미에서 동제장식편이 수습되었을 뿐이다. 무덤둘레에는 잔자갈을 깔고 그 바깥에 돌담을 둘러 묘역을 구분했다. 돌담은 모두 무너져 현재는 그 자취만 남아 있다.
묘역의 북편 50m 지점에는 동서로 나란히 5기의 배총(陪塚)이 마련되었으나 현재는 1기만 그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배총은 기단부 3층과 묘실일부만 남아 있으며 남향이다. 기단부의 길이는 9.2m, 높이는 1.9m이다. 묘실 네 벽과 천장은 각 1개씩의 대형판석으로 이루어졌다. 타원형에 가까운 천장돌 밑면 둘레에는 요철형의 돌기부를 만들어 빗물이 돌방 안으로 흘러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 장군총에 쓰인 석재는 무덤의 서북 20㎞ 거리에 있는 양펀 현[陽分縣] 가오타이춘[高臺村] 상뤼수이차오[上緣水橋] 근처 채석장에서 가져온 것 같다.
그 이유는 이 채석장의 석재가 결이 고운 화강암으로 장군총에 쓰인 돌과 재질이 같기 때문이다. 무덤의 거대한 규모, 5기에 이르는 배총, 무덤이 돌무지무덤의 최종단계형인 기단식돌방무덤인 점, 무덤 주변에 태왕릉(太王陵)과 광개토왕비(廣開土王碑) 등이 있는 점 등을 근거로 무덤의 피장자를 412년에 죽은 광개토왕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그러나 태왕릉을 광개토대왕릉으로 보고, 장군총은 장수왕릉이라고 보는 견해도 많다.
자료 : 다음백과
https://100.daum.net/encyclopedia/view/b18j2917a
14:31 ▲ 장군총 안내석 ▲
14:31 ▲ 장수왕.유적지.장군총 ▲
14:32 ▲ 장수왕.유적지.장군총 ▲
14:33 ▲ 장수왕.유적지.장군총 ▲
14:34 ▲ 장수왕.유적지.장군총 ▲
14:35 ▲ 장수왕.유적지.장군총 ▲
14:36 ▲ 장수왕.유적지.장군총 ▲
장수왕(長壽王)
강(康)
시대 고대/삼국
출생 394년
사망 491년
유형 인물
직업 왕
성별 남
분야 역사/고대사
요약 삼국시대 고구려의 제20대(재위:413~490) 왕.
개설
재위 413∼491. 본명은 거련(巨連) 또는 연(璉). 광개토대왕의 맏아들이다.
408년(광개토왕 18)에 태자로 책봉되었다가, 아버지 광개토대왕이 죽은 뒤 왕위를 계승하였다.
생애 및 활동사항
재위 기간 동안 중국의 분열을 이용해 중국 외교를 적극적으로 전개하였다.
당시 북중국은 여러 이민족의 국가들이 각축을 벌이다가 439년 북위(北魏)에 의해 통일되었고,
남중국은 한족에 의해 동진(東晉, 317∼420)·송(宋, 420∼479)·남제(南齊, 479∼502)가 차례로 흥망을 되풀이하고 있었다.
이에 장수왕은 즉위하던 해에 동진에 사절을 파견해 70년 만에 남중국 국가와의 교섭을 재개하였다.
이후 송·남제와도 외교관계를 유지했는데, 이는 북위와 백제를 견제하기 위한 것이었다.
또 북위가 북중국의 강자로 부상됨에 따라 435년(장수왕 23)에는 북위에 사절을 파견해 외교 관계를 수립하였다.
436년 북위의 군대에 쫓긴 북연(北燕)의 왕 풍홍(馮弘)이 고구려 망명을 요구하자 이를 받아들였다.
뿐만 아니라 북위의 풍홍 소환 요청을 거절하고, 466년 북위의 혼인 요청을 거절하는 등 자국의 이해 여부에 따라
외교 관계를 달리하였다.
그리하여 북위와의 관계에서 긴장이 고조된 적도 있었고, 440년부터 461까지 20년간 사절의 교환이 중단된 적도 있었지만,
대체로 북위와도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특히 백제가 북위에 접근을 시도한 472년 이후부터는 매년 2차례 이상 사절을 파견하는 등 북위와의 관계를 더욱 강화해 나갔다.
뿐만 아니라 북위와 적대 관계에 있는 북아시아 유목민족인 유연(柔燕)과도 관계를 가졌다.
479년에는 흥안령산맥(興安嶺山脈) 일대에 거주하던 지두우족(地豆于族)의 분할 점령을 꾀하고 거란족에
대해 압력을 가하기도 하였다.
이렇듯 장수왕은 중국 및 북아시아의 여러 세력들과 다각적인 외교를 통해 서방의 안정을 이룩하였다.
또한 이를 토대로 왕권의 강화와 중앙집권체제의 정비에 더욱 박차를 가하였다.
414년에는 고구려 왕실의 신성성과 부왕인 광개토왕의 업적을 과시하기 위한 광개토왕릉비를 건립하였다.
427년에는 국내성(國內城 : 지금의 吉林省 集安縣)에서 평양성(平壤城 : 지금의 평양 시가지 동북방 6∼7㎞ 지점에 위치한
大城山城 일대)으로 천도를 단행하였다.
이는 국내성 일대에 뿌리깊은 기반을 가진 고구려 귀족세력을 약화시키고, 국가운영을 뒷받침할 경제적 기반을 확대하기 위한
것이었다.
또 평양천도를 계기로 백제·신라 방면으로의 진출을 적극 추진하였다.
그리하여 455년에는 백제의 왕이 교체되는 틈을 이용해 백제를 공격하였으며, 475년에는 승려 도림(道琳)을 이용해
백제의 국력을 피폐하게 한 다음 왕 자신이 3만 명의 군대를 거느리고 백제를 공격하였다.
그리하여 백제의 수도 한성(漢城)을 함락시키고 개로왕을 살해함으로써, 백제의 도읍을 웅진(熊津 : 지금의 충청남도 공주)으로
옮기게 하였다. 뿐만 아니라 서해의 해상권을 장악해 백제 및 백제와 교류하는 왜가 중국 남조에 접근하는 것을 적극 차단하였다.
한편 신라와의 관계에서는 417년 신라의 왕위계승분쟁에 개입해 눌지마립간을 옹립하는 등,
처음에는 우월적인 입장에서 평화관계를 유지하였다.
그러나 신라가 백제와 군사동맹을 맺고 고구려에 대해 적대적인 입장으로 선회하자 468년에는 신라의 실직주성(悉直州城)을
공격해 빼앗았다.
481년에는 호명성(狐鳴城 : 지금의 경상북도 靑松郡 虎鳴山?) 등 7성을 빼앗고, 미질부(彌秩夫 : 지금의 경상북도 흥해)까지
진격하였다.
중원고구려비(中原高句麗碑)는 고구려와 신라가 적대관계로 돌입하기 직전, 고구려가 아직 우위를 점하고 있던 시기에
건립된 것이라 생각된다.
이로써 고구려는 서쪽으로는 요하(遼河), 동쪽으로는 북간도 혼춘(琿春), 북쪽으로는 개원(開原), 남쪽으로는 아산만·남양만에서 죽령에 이르는 넓은 판도를 차지하게 되었다. 인구도 약 2세기 전에 비해 3배로 늘어나는 일대 전성기를 이루게 되었다.
장수왕이 491년에 98세로 죽자, 북위는 거기대장군 태부 요동군개국공 고구려왕(車騎大將軍太傅遼東郡開國公高句麗王)을
추증하고 시호를 강(康)이라 하였다.
이것은 북위가 이민족에게 수여한 추증 가운데 가장 높은 것으로서, 장수왕에 대한 북위의 평가를 짐작하게 한다.
장수왕의 무덤에 대해서는 고구려의 옛 수도였던 중국 길림성(吉林省)집안현(集安縣)에 있는 장군총(將軍塚)이라는 견해와,
평양시 역포구역 용산리에 위치한 진파리고분군의 전동명왕릉(傳東明王陵)이라는 견해,
그리고 평안남도 평성시 경신리에 위치한 경신리1호분(전 한왕묘)이라는 견해가 있다
지료 : 다음백과
https://100.daum.net/encyclopedia/view/14XXE0048605
14:37 ▲ 장수왕.유적지.고인돌 ▲
14:39 ▲ 장수왕.유적지.장군총 ▲
14:40 ▲ 장수왕.유적지.장군총 ▲
14:40 ▲ 장수왕.유적지.장군총 ▲
14:40 ▲ 장군총에서 본 집안시 ▲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자강도 만포시와 마주보고 있다.
14:41 ▲ 장수왕.유적지.장군총 ▲
14:43 ▲ 장수왕.유적지.고인돌 ▲
14:43 ▲ 장수왕.유적지.고인돌 ▲
아쉬움을 뒤로하고 유적지를 출발 시내 조선묘향산 식당에서 점심식사를 했다.(오후2시)
북한당국이 정책적으로 운영하고 있는 식당이라고 관리 아줌마가 얘기해준다.
00:00 ▲ 집안시-압록강-만포시(자강도) 구글지도 ▲
조선식당에서 식사를 마치고 가까이 있는 압록강변 보트 유람장을 잠시 들러보고는 집안시를 출발했다.
15:45 ▲ 집안시-압록강변 보트 유람장 ▲
15:47 ▲ 집안시-압록강변 보트 유람장 ▲
15:48 ▲ 집안시-압록강변 보트 유람장 ▲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자강도 만포시와 마주보고 있다.
15:49 ▲ 집안시-압록강변 보트 유람장 ▲
15:49 ▲ 집안시-압록강변 보트 유람장 ▲
15:49 ▲ 집안시-압록강변 보트 유람장 ▲
.15:49 ▲ 집안시-압록강변 보트 유람장 ▲
오후 7시30분 관전시 롱두호텔에 당도하여 여장을 풀고 중국식 저녁식사를 마친 후 사우나탕에 들러 씻고 나와서 오래간만에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이번 여정 중 최고급 무궁화 4개의 호텔이란다.
19:32 ▲ 관전시.롱두호텔 도착 ▲
19:32 ▲ 관전시.롱두호텔 도착 ▲
17:50 ▲ 중국식 저녁식사(롱두호텔) ▲
19:51 ▲ 중국식 저녁식사(롱두호텔) ▲
19:51 ▲ 중국식 저녁식사(롱두호텔) ▲
22:14 ▲ 관전시.롱두호텔.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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