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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일진회
최익현과 같은 우국지사들은 목숨을 바쳐 항일의병활동을 벌였지만, 이러한 아픔을 딛고 역사는 상제께서 보신 공사대로 흘러가고 있었으니, 대인(大人)의 뜻을 알 길 없는 일반 사람들은 대한제국(大韓帝國)이 일본으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많은 애환과 설움을 겪었다.
그러나 상제께서는 때로는 그들의 충절을 높이 사기도 하시고, 때로는 일부 친일 세력을 쓰셔서 일본이 조선에 들어올 수 있도록 공사를 처결하셨다.
일본이 한국에 들어와 조선을 개화(開化)시켜 구습(舊習)을 일소(一掃)하고 상등국(上等國)으로 만드는 과정에서 일본을 끌어들이는 세력도 필요했다. 이 일을 담당한 것이 ‘일진회(一進會)’였다. 전경에 보면 일진회에 대한 언급이 여러 군데에서 나온다.
이 해(갑진년) 七월에 동학당원들이 원평에 모였도다. 김형렬이 상제를 뵈옵고자 이곳을 지나다가 동학당이 모여있는 것을 보고 상제를 찾아 뵈옵고 그 사실을 아뢰이니 상제께서 그 모임의 취지와 행동을 알아오도록 그를 원평으로 보내시니라. 그는 원평에서 그것이 일진회의 모임이고 보국 안민을 목적으로 내세우고 대회 장소가 충남(忠南) 강경(江景)임을 탐지하고 상제께 되돌아가서 사실을 아뢰었도다. 이 사실을 들으시고 상제께서 “그네들로 하여금 앞으로 갑오(甲午)와 같은 약탈의 민폐를 없애고 저희들 각자가 자기의 재산을 쓰게 하리라. 내가 먼저 모범을 지어야 하리라” 말씀하시고 본댁의 살림살이와 약간의 전답을 팔아 그 돈으로 전주부중에 가셔서 지나가는 걸인에게 나누어 주시니라. 이로부터 일진회원들은 약탈하지 않고 자기 재산으로 행동하니라. 이 일로써 전주 부민들은 상제께서 하시는 일을 감복하면서 공경심을 높였도다.
― 전경 교운 1장 15절
일진회는 러일전쟁이 막바지에 이른 1904년 8월 종로에서 창립되었다. 설립의 배후에는 일본군부와 송병준(러일전쟁 때 일본군 통역관을 지낸 친일파)의 힘이 작용했다.
일진회는 일본이 한국정부를 간섭하는데 있어 한국인의 친일적 민의(民意)가 필요하였기 때문에 조직한 단체라고 할 수 있다. 러일전쟁 때 일본군의 통역이던 송병준(宋秉畯)이 구(舊)독립협회의 윤시병(尹始炳)ㆍ유학주(兪鶴柱) 등과 1904년 8월 18일 유신회(維新會)를 조직했다가 8월 20일(음 7월 10일) 일진회로 고치고 회장에 윤시병, 부회장에 유학주를 추대하여 발족하였다. 이 단체는 ①왕실의 존중, ②인민의 생명 및 재산 보호, ③시정(施政)의 개선, ④군정(軍政)ㆍ재정(財政)의 정리 등 4대 강령을 내세우고 국정의 개혁을 요구하는 한편, 단발(斷髮)과 양복차림으로써 부일(附日)의 결심을 나타내게 하고 문명의 개화를 급격하게 서둘렀다.
하지만 일진회의 이와 같은 활동은 서울을 무대로 했을 뿐이고 지방조직이 없어 세력을 확대하지 못했다.
이 무렵 이용구는 동학의 잔여 세력을 모아서 진보회(進步會)라는 조직을 통솔하고 있었다.
진보회는 동학교도들이 주세력을 이루고 있었으며 전국적인 조직기반을 갖추고 있었다.
동학란이 실패한 이후 관군과 일본군은 동학의 뿌리를 뽑기 위하여 잔당을 색출, 잔인한 보복을 가해오자 동학교도들은 관의 핍박을 피하고 살아남기 위해 지하로 숨어들어야 했다.
손병희 역시 마찬가지였다. 동학의 3대교주인 손병희는 동학란의 실패 이후 목숨을 보전하기에도 급급한 형편이 되어 도망다니는 신세가 되어 있었다. 동학의 2대 교주 최시형으로부터 교통(敎統)을 승계받기는 했으나 국내에서는 도저히 동학을 펼 상황이 아니었던 것이다.
손병희는 1897년부터 지하에서 교세확장을 꾀하다 결국 1901년 일본을 경유, 상하이[上海]로 망명하였다가 다시 손병흠ㆍ이용구와 함께 일본으로 망명했다. 손병희는 이때 오세창(吳世昌)ㆍ박영효(朴泳孝) 등을 만나 국내 사정을 듣고는 두 차례에 걸쳐 청년들을 선발하여 일본으로 데리고 건너가 유학시켰는데, 이는 그간 일본과 중국 등지로 망명생활을 하면서 조선의 앞날은 개화의 성공 여부에 달려 있음을 절감한 때문이었다.
손병희는 이때부터 적극적으로 조선을 개화시켜 발전을 도모함과 동시에 그 공을 인정받아 정부로부터 핍박받던 동학을 합법적으로 인정받아 음지(陰地)에서 양지(陽地)로 동학을 끌어내고자 하였다. 그렇게 되면 손병희로서는 일거양득(一擧兩得)이었다.
1903년 한반도를 둘러싼 러시아와 일본 간의 대립이 격화되자 손병희는 러일전쟁을 필연적인 것으로 인식하고 이를 계기로 일본군과 협동, 동학교도를 동원하여 러시아 세력을 축출하는 한편 한국 정부를 개혁하고 정권을 장악할 것을 계획했다. 이를 위해서는 일본군 당국과 사전 양해가 성립되어야 할 것이라고 보고 권동진을 통해 일본군 참모총장 다무라[田村]를 만나 합의를 보고 손병흠을 국내에 파견하여 교도들로 하여금 거사준비를 서두르게 했다. 그러나 다무라가 1903년 8월 5일 갑자기 죽었으며, 또 국내에 파견되었던 손병흠도 일본으로 건너가는 도중 8월 3일 부산에서 원인 모르게 죽음으로써 계획이 실패로 돌아갔다.
손병희는 결국 1904년 2월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국내의 두령 40명을 불러 정치단체를 결사하여 러일전쟁에 공동출병할 것을 지시했다. 그리고 러일전쟁이 끝난 후 서울로 돌아온 두령들은 대동회(大同會)를 조직하고 비밀리에 도인을 모았으나 조선 정부와 동학세력을 배제하고 독자적으로 조선에 대한 패권을 장악하려는 일본 군대에 의해 해산되었다. 이 때문에 같은 해 4월 박인호ㆍ홍병기를 일본에 불러 7월중으로 다시 이름을 중립회(中立會)로 바꾸어 재조직할 것을 지시했다. 이에 따라 호남지역과 관서지역에서 중립회가 설립되었으며, <대한매일신보>에 100원의 격려금과 함께 자신의 내정개혁론에 대한 5개 조항을 실어 중립회의 취지를 선전했으나 정부와 일본군의 탄압으로 성공하지 못했다. 이리하여 그는 이용구를 조선에 파견하여 회의 명칭을 진보회(進步會)로 바꾸고 전국적으로 16만 명의 회원을 확보하고 360여 군(郡)에 지방조직을 설치하여 전국적인 활동 기반을 갖추었다.
그리고 손병희는 8월 30일(음 7월 20일)부터 일시에 궐기대회를 열도록 지시하여 갑진개혁운동(甲辰改革運動)이 시작되었다. 진보회의 통고문이 각 지방에 배포되었으며 각 지역의 동학교도들이 모임을 갖고 단발(斷髮)을 시행하고 흑의(黑衣 : 개화복)를 입기 시작했다. 그러나 진보회가 동학의 잔당이라는 것을 안 정부는 곧바로 군대를 출동시켜 갑오년 때처럼 토벌할 움직임을 보여 전국 지방관과 진위대에 이를 토벌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각 지방에서는 충돌사건이 빈발하였다. 평안도 태천에서는 수백 명의 교인이 관군에 쫓겨 고치강에 빠져 익사 당하는 비극이 벌어졌다.
형편이 이렇게 되자 지방에 세력 기반이 없던 일진회가 진보회의 지방조직기반을 탐내고는 접근해왔다. “정부에서는 갑오년 동학당 토벌 때와 같이 일본군이 합세하여 진보회를 소탕할 방침이니 살아남는 방법은 일진회와 같이 행동하는 길뿐”이라고 설득하였다.
진보회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일진회의 제의를 거절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진보회는 일진회의 제안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이로써 진보회는 지방관과 진위대의 토벌을 면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상제께서는 한국에 일본을 끌어들이는 세력이 필요했고 그 역할을 일진회에게 맡길 것이므로 일진회와 진보회를 통합하여 필요 없는 인명 살상을 피하고자 공사를 처결하신 것이다.
일진회와 아전의 교쟁이 전주에서 갑진년 7월에 있었도다. 최창권(崔昌權)이란 사람이 부내의 아전을 모아 일진회 타도의 의병을 일으키고자 각 군 각 면으로 통문을 보냈도다. 상제께서 이 소식을 전해 들으시고 “어렵게 살아난 것이 또 죽겠으니 그들을 내가 제생하리라.” 상제께서 화정리의 이경오(李京五)를 찾아 돈 칠십 냥을 청구하시니 그가 돈이 없다고 거절하였도다.
부득이 다른 곳에서 돈 일곱 냥을 구하여 가지시고 “이 돈이 능히 칠십 냥을 대신하리라” 말씀하셨도다. 상제께서 형렬을 대동하시고 용머리 주막에 돌아오셔서 많은 사람을 청하여 술을 권하여 나누시고 난 후에 종이에 글을 쓰고 그 종이를 여러 쪽으로 찢어 노끈을 꼬아서 그 주막의 문 돌쩌귀와 문고리에 연결하여 두시니라. 그 날 오후에 아전과 일진회원 사이에 화해가 이룩되니 일진회원들이 사문을 열고 입성하니라. 이 일에 상제께서 소비하신 돈이 여섯 냥이었도다. 가라사대 “고인은 바둑 한 점으로써 군병 백만 명을 물리친다 하나 나는 돈 여섯 냥으로써 아전과 일진회의 싸움을 말렸느니라” 하셨도다.
― 전경 행록 3장 14절
진보회가 일진회와 통합의사를 보이자 일본의 후원 하에 있던 일진회(一進會)가 정부의 동학 탄압 지시를 강력하게 비판하였고 정부는 동학의 토벌을 철회하고, 그해 11월 1일 그동안 갇혀 있던 동학교도들을 석방했다. 김연국을 비롯한 모든 동학교도들이 석방됨으로써, 동학은 40년간에 걸친 지하포교를 청산하고 비로소 국가의 공인을 받게 되었다. 1904년 12월 2일 진보회가 일진회에 합동청원서를 각 도별로 제출하는 형식을 거쳐서 동학과 일진회는 공식적으로 합동했다.
일진회는 동학당(東學黨)의 친일세력인 이용구(李容九)의 진보회(進步會)와 같은 해 12월 26일에 합동하여 회장에 윤시병,13도총회장에 이용구, 평의원장(評議員長)에 송병준이 각각 취임하였고, 일본인 고문(顧問) 모치츠키 류타로[望月龍太郞]를 추대하고 일본의 지원을 받아 이때부터 그들의 친일행각이 시작되었다. 이후 그들은 을사조약이 체결될 때, 온 국민이 합심하여 국채보상운동을 벌일 때, 합병으로 국권이 피탈될 때 어김없이 그 현장에 있었으며 선두에 서서 노골적인 친일행각을 벌였다. 그 과정에서 내정개혁 활동과 병행하여 일본과의 유대를 위해 러일전쟁 수행에 일본군이 필요로 하는 철도부설ㆍ군수품 조달 및 수송 작업ㆍ밀정 등으로 활동했다. 또한 철도습격 등 반일운동으로부터 일본을 보호했다.
그동안 동학의 탄압이 없어지자 손병희는 1905년 12월 1일 동학을 천도교로 개칭하고 1906년 1월 28일 일본에서 귀국하였다. 그러나 교단 내에 권동진ㆍ오세창ㆍ양한묵 등 망명 개화 관료 출신들과 일진회를 이끌었던 송병준(宋秉畯)ㆍ이용구 일파 및 김연국 일파가 서로 반목하게 되자 정교분리(政敎分離)를 표방하고 일진회의 지방지회 해체를 지시했다. 이에 대해 송병준ㆍ이용구는 천도교 결의서를 각 지방에 배포하여 자신들을 중심으로 교도들을 결속시키고자 했다. 이를 직접적인 계기로 1906년 8월 23일 손병희가 일진회의 핵심적 역할을 하고 있던 이용구 이하 62명을 출교처분(黜敎處分)함으로써 천도교와 일진회는 분립하게 되었다.
상제께서는 유년시절부터 남달리 생명을 중시하여 호생지덕(好生之德)이 깊으셨다. 유년시절에 있던 이야기이다. 하루는 비가 많이 내려 시냇물이 불어났다. 그러자 시내의 한가운데 도톰한 모래언덕에 있던 개미 떼가 빠져나오지 못하고 비에 떠내려가게 되었다. 이 광경을 유심히 지켜보던 소년 강증산은 개미가 냇가로 기어 나올 수 있도록 널빤지로 다리를 놔주셨다. 이리하여 개미떼는 무사히 시내를 빠져나와 목숨을 건질 수가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조그만 에피소드에 불과하지만 생명 있는 것을 아끼고 소중히 하는 상제의 덕을 보여주는 한 단면이다.
천지만물이 다 상제의 덕으로 생성(生成), 화육(化育)되는 것이라 생명을 긍휼히 여기는 상제의 덕(德)은 편벽(偏僻)이 없으니 아군(我軍)과 적군(敵軍)이 따로 없음이다. 인간적인 눈으로 보면 때려 죽여도 시원찮을 친일파이지만 다 연고가 있어 역사라는 큰 무대에서 악역(惡役)을 맡는 것이니 그때그때의 쓰임이 다른 까닭이다. 크게 보면 모두 상제님의 불쌍하고 가련한 백성들인 것이다. 다음의 글은 일진회에 얽힌 일화(逸話)로써 상제의 이러한 면모를 엿볼 수 있게 한다.
어느 날 상제께서 문공신(文公信) 에게 돈 서른 냥을 지니게 하시고 피노리를 떠나 태인 행단(杏壇) 앞에 이르셨도다. 주막에 들러 술을 찾으시니 주모가 술이 없다고 대답하기에 상제께서 “이런 주막에 어찌 술이 없으리요”라고 하시니 주모가 “물을 붓지 아니한 새 독의 술이 있나이다”고 대답하기에 상제께서 “술은 새 독의 술이 좋으니라. 술에 안주가 있어야 하리니 돼지 한 마리를 잡아라.” 분부하시고 글을 써서 주모에게 주어 돼지 막 앞에서 불을 사르라고 이르시니 주모가 그대로 행한 바 돼지가 스스로 죽으니라. 또 상제께서 주모에게 “돼지를 삶아 먼저 맛을 보는 자는 누구든지 죽으리라” 분부하셨도다. 상제께서 삶은 돼지를 그릇에 담아 뜰 가운데 술을 전주로 걸러서 마루 위에 놓게 하시고 글을 써서 주인을 시켜 뜰 한가운데서 불사르게 하신 후에 공신과 주인과 참관한 마을 사람과 행인들과 함께 술과 고기를 잡수셨도다. 이 때 상제께서 큰 소리로 “무엇을 더 구하느뇨. 글자 한 자에 하나 씩만 찾아가면 족하리라”고 외치셨도다.
그 이튿날 아침에 공신이 술과 고기 값으로 서른 석 냥을 몽땅 갚은 뒤에 상제께서 공신을 데리시고 행단을 떠나 솔밭 속으로 지나시다가 갑자기 큰 소리로 “이 놈이 여기에 있다” 하시는도다. 공신이 놀라서 옆을 보니 동자석 (童子石) 만이 서 있도다. 그곳에서 원평으로 행하시는 도중에 공신에게 “훗날 보라. 일본 군사가 그곳에 매복하였다가 여러 천 명을 상하게 할 곳이니라. 그러나 글자 한 자에 하나씩밖에 죽지 않게 하였으니 저희들이 알면 나를 은인으로 여기련만 누가 능히 알리요”라고 상제께서 말씀하셨도다. 그 후에 일진회원 수천 명이 떼를 지어 그 곳을 지나다가 일본 군사가 의병인 줄 알고 총을 쏘니 스물 한 명이 죽었도다.
― 전경 행록 3장 17~18절
이와 같이 많은 생명의 살상을 막고 구하시면서 장차 일진회의 맡은 바 역할을 수행케 하신 것이다. 일진회의 역할은 다름 아닌 일본이 조선으로 들어올 수 있도록 보조역할을 하는 것으로 일진회가 상제님의 일을 한다는 사실이 전경에 명시되어 있다.
상제께서 일진회가 발족되던 때부터 관을 버리시고 삿갓을 쓰고 다니시며 속옷을 검은 것으로 외의를 흰 것으로 지어 입으셨도다. “저 일진회가 검은 옷을 입었으니 나도 검은 옷을 입노라” 말씀하시고 문 밖에 나오셔서 하늘을 가리켜 말씀하시기를 “구름의 안이 검고 밖이 흰 것은 나를 모형한 것이니라” 하셨도다.
― 전경 행록 1장 33절
동학은 본의든 아니든 봉기의 실패 이후 곡절을 많이 겪었으며 또 많이 변했다. 복잡한 시대상황과 불리한 여건 속에 종교를 보전하기 위해 몸부림쳤으며 그 결과 일부의 동학도들이 친일 세력으로 탈바꿈하여 일제를 끌어당기는 앞잡이 노릇을 하게 된 것이다.
일진회는 1905년 11월 을사조약이 체결되기 전에 선언서를 발표하여 ‘한국의 외교권을 일본에 이양할 것’을 제창하여 여론조작 공작을 하는 한편, 단발(斷髮)과 양복차림으로써 부일(附日)의 결심을 나타내게 하고 문명의 개화를 급격하게 서둘렀다.
그리고 1907년에는 정부에 대해 탄핵안을 제출하였는데 그 내용은 국채보상운동을 어리석은 짓이라 하여 조속히 진정시킬 것을 요구한 것이었다.
또한 1909년 12월에는 임시 총회를 열고 ‘한국정부를 폐지하고 일본이 직접 통치할 것’을 포함한 4개항을 결의, 황제와 통감, 총리대신에게 전달하였으며, 일본 수상 ‘가쓰라[森忖]’에게도 진정서를 제출하여 한일합방을 부추겼다.
이외에도 크고 작은 일에 빠짐없이 관여하여 국민들의 반일감정을 자극하였으며 원성(怨聲)을 샀다. 친일행위를 하는 일진회에 대한 국민들의 반감은 대단하였고 실제 폭력사건도 많았다. 내버려두면 나라를 팔고 조상을 팔아먹는 단체라 하여 명맥을 유지하기도 힘든 지경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상제의 일을 하니 살려 내어 후천을 여는 공사에 써야 했다. 이는 사람도 모르고 귀신도 모르는 일로써 그들 자신도 모르는 일이었다.
일진회원들은 자기 자신이 무슨 일을 하는지도 모르고 일본 세력의 앞잡이 노릇을 잘하는 것만이 살길이라 생각하고 친일행각에 열을 올렸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피상적인 고찰이고 좀 더 심층적인 고찰을 해보면 일진회의 의미와 난세에 일진회가 맡은 역할에 대해서 해답을 찾을 수 있다. 아울러 왜 상제께서 한낱 친일단체에 이토록 정성을 들여 손수 살려내셨는지에 대해서도 답이 나온다.
또 가라사대 “난을 짓는 사람이 있어야 다스리는 사람이 있나니 치우(蚩尤)가 작란하여 큰 안개를 지었으므로 황제(黃帝)가 지남거(指南車)로써 치난하였도다. 난을 짓는 자나 난을 다스리는 자나 모두 조화로다. 그러므로 최제우(崔濟愚)는 작란한 사람이오, 나는 치란하는 사람이니라.
전명숙은 천하에 난을 동케 하였느니라.
― 전경 교법 3장 30절
애초에 동학의 씨를 뿌린 사람은 최제우였다. 그런데 과연 동학은 성공한 혁명이었던가? 최제우는 실패했고 세상은 동학으로 인하여 더 어지러워졌다. 이것은 최제우 사후의 동학의 행보를 보면 더욱 확연히 드러난다. 동학의 이념과 조직에 매력을 느낀 전봉준 같은 이가 동학에 들어오고 나서는 더 심해졌다.
국제정세를 읽지 못한 갑오년의 봉기는 화(禍)만 자초했을 뿐 척왜양이, 보국안민, 구세제민, 포덕천하 등과 같은 이념은 하나도 구현되지 못했다. 반외세도 실패했고 반봉건도 실패했다. 즉 동학이 태동하여 이룬 것은 하나 없고 무고한 생목숨들만 죽어나간 꼴이었다. 천지에 원한이 차고 넘칠 판이었다.
사정이 이러하니 해원상생의 진리를 가지고 오신 상제께서는 어떻게든 원의 매듭을 풀고자 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당신께서 원인을 제공하여 씨가 뿌려진 동학에 대해서 해원상생의 원리로 풀고자 하신 것이다. 이에 동학의 후신(後身)과 같은 일진회는 한 중요한 단초(端初)가 되었고, 일진회를 계기로 여러 갈래로 복잡하게 엉킨 실타래를 풀어내신 것이다.
그런데 이 과정을 눈여겨보면 신명(神明)의 역사(役事), 즉 해원의 역사(歷史)가 보인다. 원래 동학란은 혁명의지가 약했던 북접 계열의 교도들이 교조(敎祖) 최제우의 신원(伸寃)을 풀기 위해 일어났었다. 그런데 일진회에 동참한 동학교도들은 대부분 북접 출신들이었다.
따라서 동학은 일진회를 통해 정부의 공인을 받음으로써 동학란의 원래 목적이었던 최제우에 대한 교조신원(敎祖伸寃)을 이루었던 것이고, 동학을 존속시킬 수 있었다.
게다가 그 당시 조선의 처지로서는 동학도들이 폐정개혁안에서 부르짖었던 신분제의 철폐와 같은 근대적인 개혁은 일본 세력을 끌어들여 개화한 후에 달성할 수 있었다. 그래서 반외세는 실패했지만 반봉건은 이루었으며 또한 정부와 동학도들의 숙원을 없앴으니 절반의 성공은 가져온 셈이었다. 아무리 좋은 이념과 뜻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중도에서 좌절되어 끊어져 버리면 처음부터 세상에 아니 나오는 것만 못한 것이다.
그런데 『전경』에 보면 한 맺힌 동학의 신명들이 일진회를 징벌하려는 움직임에 대해서 나온다. 척왜양이(斥倭洋夷)를 부르짖던 동학의 정신이 아직 살아 있음이다.
갑오년에 죽은 동학도들이 친일(親日)을 용납할 리가 없었다. 척왜(斥倭)를 부르짓던 그들에게 왜(倭)와 타협이나 양보는 있을 수 없는 일이요, 씻을 수 없는 치욕이었다. 수많은 동학도들의 죽음을 욕되게 하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동학의 신명들을 이를 갈면서 이들 일진회의 친일을 응징하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상제께서는 훗날의 일을 준비하셔야 하기 때문에 공사로서 일진회를 살리시면서 또 한 편으로 올곧은 동학의 정신이 계승되도록 길을 열어주셨으니 그것은 바로 손병희와 천도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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