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으로 차린 식탁
김단혜
집콕 생활이 이어지며 밥상 차리는 일이 만만치 않다. 가끔 한 끼는 간단하게 커피와 토스트로 때우기도 하지만 하루 세 끼 챙기는 일이 부담스럽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는 만나자마자,
“나 좀 늙지 않았니?”
라고 묻는다.
“밥해주는 거 힘들지?”
말 안 해도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인다.
한 남자와 평생을 사는 것도 힘들지만 하루 세 끼를 같이 먹기는 빨지 않은 속옷을 다시 입는 것처럼 늘 꺼림칙하다. 남자 들에게 집밥이란 휴식, 안식 같고 간식은 힐링이란다. 밥상에 모이는 식구가 많은 것도 아니고, 남편과 단둘이 밥을 먹으며 주부 사표를 낼 수는 없다. 그동안 밥은 일하기 위해 때우는 식이었는데 코로나로 인해 제일 중요한 일이 되어버렸다. 어떻게 하면 평생 먹어야 할 밥이 상큼할 수 있을까? 우리집 식탁은 아일랜드 식으로 바퀴가 달려 이리저리 끌고 다닐 수 있 다. 식탁을 서재로 끌어와 크림색 식탁보를 깔고 밥 대신 책을 차리기 시작했다.
오늘 차릴 책 반찬은 밥, 국, 두릅, 임연수 구이, 샐러드….
우선 두릅부터 데쳐보자. 봄에는 두릅을 먹어줘야 한다. 대 여섯 개 들어있는 한 팩이 만원이면 좀 비싸다 싶지만, 이때만 먹을 수 있지 싶어 지갑을 연다. 시집 한 권 값이네 하면서 시를 사듯 사는 나물이다.
두릅 같은 책, 올봄 나의 영혼을 뒤흔든 책이 있다. 미셀 딘 의 『날카롭게 살겠다, 내 글이 곧 내 이름이 될 때까지』다. 뉴욕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샤프한 여성 작가 12명에 대한 이야 기다. 이 책을 드는 순간 카프카의 말처럼 도끼로 머리를 얻어 맞은 듯 퍼뜩 정신이 들었다. 얼음물로 샤워한 기분이랄까. 이런 책을 만나기는 열심히 책방을 기웃거리는 내게도 일 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하다. 손가락을 가시에 찔리면서 따야 하는 두릅 같은 책이다. 읽지 않고 서가에 꽂아만 놓아도 아니 표지만 봐도 가슴에서 불이 난다. 남편의 성을 뺀 이름을 가진 여자들이 나온다. 진부하지 않은 글을 쓰는 여자들. 존 디디안을 표지로 한나 아렌트, 수전 손택, 도로시 파커를 만날 수 있다.
밥 같은 책을 찾기 시작했다. 늘 가방에 넣고 다니는 책을 골 랐다. 유진목의 『산책과 연애』 산책과 연애가 무슨 관계가 있 는 건 아니고 말의 흐름 출판사에서 낱말 잇기로 이어지는 책인데 예를 들면, <커피와 담배>, <담배와 영화>, <영화와 시>, <시와 산책>, 이런 식으로 한 작가가 두 개의 낱말을 제시한다. 산책과 연애 그러니까 책과 책 사이에 존재하는 책이다. 유진목 시인은 부산에서 손목서가 라는 독립책방을 하는 시인이다. 부산에 갔을 때 손목서가를 스치기만 하고 들리지 못한 후 팬이 되었고 부산을 다시 가야 하는 이유가 되었다. 유진목 시인의 시 「잠복」은 밤이면 이불처럼 덮고 자곤 한다.
이번에는 임연수를 노릇하게 굽는다. 꼭 생선이 있어야 밥 을 먹는 나를 위한 특별한 책은 바로 정세랑의 『시선으로부터』 다. 이 책은 심시선을 중심으로 여자 3대의 이야기다. 하와이로 여행가 시선의 제사상을 치르는 가족. 제사에 놓을 것을 각자 하와이에서 찾는다는 스토리가 신선하다. 이렇게 소설을 쓸 수 있다는 생각에 정신이 퍼뜩 난다. 심시선의 제사상에 놓인 물건도 다양하다. 커피와 훌라춤, 무지개, 파도 거품 그리고 도넛. 나도 내 아이들에게 내 제사상에는 밥 대신 책을 놓 아달라고 해야겠다.
각자 한 권씩 자신이 갖고 오고 싶은 책을 갖고 제삿밥 대신 책 이야기를 하는 제사상 생각만 해도 짜릿하다.
여보, 밥 다 됐어요. 밥, 아니 책 먹을 시간이에요. 남편은 두릅도 맛있고, 생선도 알맞게 구워졌다며 입 꼬리 가 올라간다. 오늘 커피는 당신이 좋아하는 에티오피아 내추럴 어때요. 콧노래가 저절로 나온다.